10 여보! 내 눈이 점점 멀어가오

  선지자선교회

여수경찰서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감옥 생활은 광주구치소, 광주형무소, 경성구치소를 전전하다 194311월 청주구금소로 이어졌다. 다섯 번씩이나 감옥에서 감옥으로 옮겨진 아버지는 그 곳에서 해방이 되어 풀려날 때까지 지냈다. 5년의 세월을 가족과 떨어져 외롭고 고통스런 옥살이를 한 것이다. 그 고통스런 세월 속에서 어버지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라도 속히 나가는 것이 자유일 것 같으나 오히려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 감사한다고 했다. 경성구금소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곳 관리자가 와서 아버지가 소지하고 있던 성경과 찬송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불교 서적을 한아름 들여다가 아버지 앞에 놓았다. 읽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라는 뜻이다. 이 역시 아버지의 사상을 전환시키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일이다. 몇 날 동안 아버지는 그 책들을 빠짐없이 다 읽었다. 읽은 후에 감상문을 제출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썼다.

 

하늘에 어찌 두 해가 있을 수 있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우주의 주인공이 어떻게 둘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 외에 구원이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대성이나 오직 내 구주는 홀로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 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자 어디 있으랴.

이 신을 위하여는 아까울 것 무엇이며,

이 주를 버리고서 내가 어디로 가랴.

 

그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 앞에 구금소장, 감찰과장, 보도과장 그리고 당시 불교계에서 으뜸간다는 일본 승려가 와서 앉았다. 교도관들이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승려와 변론을 시키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기독교가 진리냐, 불교가 진리냐를 놓고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몇 시간 동안 한치의 양보도 없는 논리 싸움이 계속 되었다. 원래 그 일본인 승려는 마음속으로 기독교를 저급한 종교라고 얕잡아보고 있던 자다. 두 사람이 논쟁이 점점 열기를 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말문이 막히는 쪽은 오히려 승려 쪽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 사람 있느냐?

하나님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일국의 왕도 보기가 황송하온데 어찌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그 승려를 향해 아버지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장하는 불교의 신을 내게 보여 주시오. 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 주겠소 하고 일단락을 지어버렸다. 한낱 보잘것없는 죄수 따위에게 신앙 토론에서 밀리고 있다는 자각이 그 승려를 흥분시켰으리라. 일본인 승려는 벌떡 일어나더니 네놈이 감히 나에게 이기려고 도전하느냐? ! 이것이 불교의 신이다 하며 느닷없이 아버지의 뺨을 후려쳤다. 아버지는 흥분한 그 승려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신도는 나같이 처량한 신세인 죄수의 뺨을 때렸지만, 하나님의 충직한 아들인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쪽 뺨도 마저 치십시오

 

건방진 죄수 같으니...... 네가 감히 나를 이기려 한단 말이냐.

일본 승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승려는 아버지를 발길로 차기도 하고,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었다. 놀란 간수들이 그 승려를 데리고 나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참 망측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변론에 이기지 못한 그 승려가 폭력으로 이기려고 했으니 사실은 그가 진 것이다. 이 광경을 본 후부터 승려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청해듣던 강연도 중단되고 말았다.

청주구금소에 일을 때의 일이다. 이곳 사상전환을 시키는 기관에서 기독교에 지식 있는 자를 외부에서 한 분을 초빙해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대화를 시켰는데 그분은 기독교 계통의 대학을 나왔고 과거에는 기독신자였다. 그는 1달 내로 손 목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이다. 그가 아버지 앞에 나타났다.

손 목사, 지금 조선 교회는 극도로 수난기를 맞았습니다. 이 난관에 목자가 양떼를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외곬이 되어 처박혀 있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로마에 있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를 탈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이 말에 아버지는 하도 기가 막혀서 . 지금 조선 교회는 당신 말대로 어려운 수난기를 맞았습니다. 마음놓고 진리를 전할 수 없거니와 진리를 바로 전하다가는 모두 나처럼 투옥시키니 이 기막힌 현실에서 내가 잘 살자고 양떼들에게 독초를 먹여 독살시킬 바에야 차라리 진리를 따르다가 투옥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위대한 무언의 설교가 될 것입니다. 진흙구더기 속에서 연꽃이 향기를 드러내듯이 진리를 보여 줘야 할 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 일본 정부에서는 당신이 믿는 기독교를 믿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니야. 기독교를 믿되 일본주의적 기독교(일본신 천황)를 믿으라는 말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정부에서는 당신을 잘 살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이오.

기독교는 본시 일본주의적 종교가 아니고, 신본주의적 종교인데 만일 기독교를 일본적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닐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그보다 작은 일본신 아래에다가 끌어넣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독 속에 그릇을 넣을 수 있을지언정 그릇 속에 독을 넣을 수 없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아버지는 어떠한 질문에도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여러 번 심문이 있었는데 그때도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당당하게 밝혔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과 같은 구금 생활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가져 보지 않았다. 형편이야 어떻든지 오직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 날 이후 아버지에게는 식사량을 반으로 줄이는 감식이 벌이 내려졌다. 사상을 전향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을 부린 데다 같은 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전도한다는 이유로 내려진 형별이다. 가뜩이나 적은 양의 식사인데 그것을 또 반으로 줄였으니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수저를 놓자마자 그 순간부터 또 배가 고팠다. 감식형으로 줄어든 밥은 꼭 곶감만 했다. 그 밥은 살기에도 어중간하고 죽기에도 어중간한 양이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한창 먹을 나이인데 그토록 적은 밥을 먹고 나면 더 배가 고파져서 견딜힘이 없었다. 이젠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부족한 식사로 인해 영양실조에 걸려 점점 눈이 멀어져 갔다. 그 시절에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꼭 초등학교 1,2학년 학생이 쓴 것처럼 대문짝만한 글자들이 이리 삐뚤 저리 삐뚤 중심이 잡혀 있지 않았다.

 

신앙의 누이인 황덕순 고모에게 쓴 편지에는 덕순아, 내 눈이 지금 점점 멀어간다 라고 적혀 있다. 그 때 황 고모는 피복 공장에 다니며 일할 때였는데 그 편지를 받고 간유 영양제를 큰 것으로 두 통을 사서 보내드렸다. 아버지는 그중 한 통을 어머니에게 보내고, 나머지 한 통만을 자신이 드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 간유를 복용하고 차츰 눈이 회복되었다.

감옥 생활은 언제나 춥고 배고프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적응 할 수 없는 곳이 감옥일 것이다. 불기 없는 썰렁한 방, 박탈당한 자유에의 갈구,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인하여 그 곳에 갇힌 사람들은 조금씩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변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앙으로 무장한 아버지만은 예외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아버지는 언제나 활기찬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죄수건 간수건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 간수들 중에서도 예외로 아버지를 동정하고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조선인 간수 한 분이 있었다. 아버지의 굽힘 없는 신앙의 지조를 높이 사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려고 애썼던 자다.

이 조선인 간수는 한때 아버지를 동정하여 상부에다 선의로 거짓 보고를 한 적도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를 위해 요즘 손 목사는 신사참배도 잘 하고 성적도 대단히 우수하다고 요다 검사에게 아버지를 변호해 준 바로 그 간수이다. 이 간수가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하루는 아버지에게 다가와서 아버지의 처지를 동정하며 간곡히 설득을 했다.

손 목사, 당신은 참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사람이오. 밖에 나가서 더욱더 보람 있는 일을 해야지, 언제까지 감옥에 갇혀 있기만 할 셈이오. 죄라고 해야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뿐이잖소.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합시다. 신사참배는 안 해도 좋으니 그냥 여기에다 신사참배 했다는 지장만 찍으시오. 지금이라도 당장 내보내 주겠소. 그가 내민 서류는 신사참배는 국민 의식이므로 거부하지 않고 참배하겠다는 것을 적은 일종의 서약서였다.

그건 안 됩니다. 당신의 생각은 고마우나 이것은 나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안 한일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 하지 않을 일을 하겠다고 거짓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아버지는 대뜸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감옥에는 도둑질하다 잡혀온 이도 있고 치고받고 싸우다 잡혀온 이들도 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쟁하다 잡혀온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도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은 밤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끌려 나갔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고문하는 자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같이 모의한 놈들을 대라!

......

그놈들 지금 어디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지 네놈은 알고 있지? 어서 그 곳을 대라...... 이 자식, 정말 못 불겠어?

고문하는 자의 목소리는 살기등등했지만 독립투사의 입에서는 괴로운 신음 소리만 흘러나올 분이었다. 홀로 고통을 감당하다 견디지 못하면 죽을지언정 결코 동지를 팔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면 그들은 손톱 사이사이를 대쪽으로 만든 날카로운 침으로 찔러내곤 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으면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 물을 코에 들이붓기도 하고 전기 고문을 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고문에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여겨지면 독립투사들은 입을 열어 자백하는 대신 혀를 깨무는 쪽을 택했다. 혀가 잘려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자백하여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유혹을 그런 식으로 물리친 것이다.

잘린 혀로는 말을 할 수 없을 터이므로.

아버지는 이런 애국지사들의 꿋꿋한 나라 사랑의 일념을 곁에서 지켜보며 더욱 강건한 믿음을 다짐하곤 했다. 보라, 저들은 나라를 위해서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위해서 이 한 목숨 못 바칠 까닭이 무엇이냐. 이 정도 고난을 어찌 힘들다 하겠는가.

아버지의 신앙은 독립투사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고문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일본은 망하게 되어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이들을 벌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아니다.

아버지는 다섯 번이나 감옥에서 감옥으로 옮겨 다녔는데, 그 중 가장 고생이 심했던 곳이 바로 청주구금소이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눈만 뜨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쉴 새 없이 전도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결국 그 전도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인해 구금소 측에서 아버지를 독방에 가두어놓았다.

외로움은 둘째 치고 뼈마디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이겨낼 길이 없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운 겨울이 계속되었다. 두터운 이불이 있을 리 없으니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독방에 갇힌 아버지로서는 그 고통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옆 사람의 온기라도 느낄 수 있다면 추위를 이겨내기가 한결 수월할 터였다. 계속되는 추위로 아버지는 동상에 걸려 손발이 얼다가, 또 얼고, 또 얼고...... 이것이 계속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열 손톱, 열 발톱까지 다 얼어 짓물러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