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신사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선지자선교회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목사들 중 김길창 목사는 할아버지가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도 한 고향에서 같이 자란 아주 절친한 사이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믿음을 보고 배우고 자란 그가 엉뚱한 설교를 하고 다녔다. 내가 신사참배 할 때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신사 뒤에서 예수님이 대신 절을 받으시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 할 때는 코가 땅에 닿도록 최상의 경의를 표해 절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31-2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일본을 이토록 축복하고 일본에게 권세를 주어 지금 세계와 싸워 이기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성도들은 이 권세에 굴복해야 합니다. 옥중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외곬입니다...... 라고 역설했다.

 

천년만년 일본의 지배가 계속되리라고 판단한 것일까? 그래서 그는 일본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일신만 호의호식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더라도 불의 한 것을 용납하실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배워서 알텐데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존재마저 망각할 정도로 일본의 힘이 막강하다고 여긴 것일까? 그 목사만이 아니라 신사참배에 참여한 많은 목사들이 이런 식의 해괴한 궤변으로 순진한 교인들을 미혹시키곤 했다. 그래놓고는 훗날

해방이 되고 나자 그들은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았다.

 

목사들은 하나 둘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 나라의 모든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판국이던 것을 우리가 신사참배까지 해가며 교회를 살려냈고,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왔다. 이러한 우리에게 신사참배 앞잡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당치 않다.

 

그래도 그들에게 변명할 말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위선자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그 김길창 목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누우면 별이 올려다 보이는 초라한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돈이 든 흰 봉투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옛정을 생각하여 일시적이나마 동정심이 생겨서 선심을 썼노라는 태도였다. 그런 불의한 돈을 받을 어머니가 아니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따위 얄팍한 동정에 혹할 어머니가 아니었다. 때 묻고 흠집 난 선심은 이미 선심이 아니다. 어머니는 분노로 몸을 떨며 돈 봉투를 내동댕이 쳐버렸다.

 

목사님! 우린 그런 돈 아니라도 굶어 죽지 않으니 목사님이나 그 돈 가지고 가서 잘 잡숫고 잘 사십시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왜 그리 슬픈지 목까지 차오르는 설움을 토해놓으며 어머니와 함께 한없이 울었다. 무안해진 김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다가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돌아 가버렸다.

 

설움 중의 가장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시절 진정한 설움은 따로 있었다. 배고픔보다 또는 못 입는 것보다 내가 느낀 가장 큰 설움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나하고는 놀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줄넘기, 돌차기 놀이를 할 때면 그들은 언제나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려 놀았다. 나는 언제나 먼발치에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할 뿐이다. 학교 다니는 그들이 부러웠고, 함께 어울려 노는 그들이 부러웠다. 매번 나를 끼워주지 않고 마주쳐도 다정하게 아는 체하지 않는 그들이 야속했다. 너무나 속이 상한 나머지 뻔히 거절당할 줄 알면서 어머니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댄 적도 있다.

 

엄마, 나 좀 제발 학교에 보내 주세요.

안 돼. 학교에 가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한단다.

절 안 하면 되잖아요.

너도 잘 알잖니. 오빠들을 보렴. 큰오빠는 신사참배 거부로 소학교 3년 때 퇴학당했다가 나중 창신학교로 전학 가서 간신히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작은오빠는 신사참배 거부로 3학년 때 결국 퇴학당하지 않았느냐? 늘 똑같은 대답이었다.

 

생략

 

어머니의 일생은 한마디로 희생과 인내의 삶이었다. 평생을 헐벗고 굶주리며 지냈지만 언제나 자신 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사셨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싸우면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주어진 운명에 대해 원망하지도 않았다.

 

당시의 어머니는 한 달에 한번씩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면회 갈 때마다 꼭 성경 한 구절씩을 외워 가서 아버지께 읽어드리곤 했다.

 

만일 당신이 신사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머니는 자주 부산 기장에 있는 장 부자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곤 했다. 세살 박이 동림이를 데리고 다니며 남의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해주고 돌아오는 날, 치마폭에 싸온 음식을 우리들 앞에 내어놓으며 하던 말씀을 나는 지금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다.

 

나 먹으라고 내어놓은 것인데 너희들 생각에 목에 넘어가야지. 그래서 주인 몰래 싸가지고 왔다. 많이들 먹어라.

어머니는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끔 부엌에서 일하다 빈혈증상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당신의 몫으로 나온 음식을 먹지 않고 우리 남매들을 위해 싸오곤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련을 안고 이토록 우리는 해마다 가난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