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선지자선교회

아버지는 율촌분주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바로 여수유치장으로 끌려갔다. 그 곳은 여수내무소 교화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좁은 여수 바닥에 무슨 죄인이 그리 많던지. 한 방에 겨우 20명을 수용하면 맞는 넓이에 40˜50명씩 빽빽이 들어차 있는 감방이 7개나 되었다.

 

그들이 어찌 죄인들이겠는가. 인민군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자기네들 사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그들은 아무 죄도 없다. 부르주아 계급이라 하여 농토를 많이 소유한 지주들과 기독교인들, 우익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이 끌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눕기는 고사하고 다리를 편하게 앉아 있기도 힘들만큼 비좁은 실내였다 잠을 잘 때면 최대한 몸을 웅크린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자야 했다. 덮을 이불은 바라지도 않지만 누울 공간이라도 있어야 잠을 청할 텐데 이건 어떻게 해볼 수도 없어 하얗게 밤을 새워야 할 판이었다. 그 곳은 마치 콩나물시루처럼 되어 있었다. 식사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에 오리알 만한 꽁보리밥 뭉친 것과 굵은 소금이 조금 나왔다. 무엇보다 큰 고통은 물을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꽁보리밥을 주면서 대여섯 명 당 한 그릇 꼴로 물을 주고 나면 그뿐이다. 혼자 마셔도 시원치 않을 물을 여럿이 나눠먹고 나면 금세 갈증이 나곤 했는데, 그것은 소금의 짠맛 때문에 더욱 심했다.

아이고 죽겠네, 물 좀 주시오. 목이 타서 그래요.

시끄럽다. 개새끼들, 너희 하고 싶은 대로 다할 바에야 왜 미쳤다고 모셔와.

날은 덥고 갈증은 나는데 마실 물은 없고, 잠은 오는데 잠을 잘 수도 없으니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다. 목이 말라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것만 같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동신 오빠 같은 반 친구인 김창수를 만났다. 그는 우익 사상이 강한 학생으로 율촌교회 김 장로님의 아들이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처형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학생이다. 그 후에 서울에 살면서 우리와 자주 연락하며 지내왔다. 김창수씨에게 부탁하기를, 그가 끌려가서 탈출해 나오기까지의 상황을 증언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여수 감방은 1방에서 7방까지 있었는데 3감방에 아버지와 김창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열흘쯤 전에 붙잡혀 왔다고 하면서 반갑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김창수는 저 손 목사님 같은 성자가 무슨 죄로 오셨을까?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도 아들 삼았던 분인데, 이들과 같은 죄인 취급을 당할 것인가?

 

언젠가 동인, 동신 순교 후 내가 목사님을 만나 위로했을 때, 동인 동신이는 더 좋은 천국에 갔는데 무슨 걱정이야? 창수 군도 예수 잘 믿어야 해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던 분 아닌가? 그런데 그 목사님이 지금 붙들려 오다니...... 김창수는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훔쳤다. 손 목사님을 보자 새삼스레 옛 친구 동신이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에 취조실에 끌려가 본격적인 취조를 받았다. 김일성 사진과 스탈린 사진이 나란히 걸린 방이었는데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일제 치하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며 위로의 말을 해주면서, 무슨 서류 종이 같은 것을 내밀며 기록을 좀 해달라고 거의 부탁에 가깝게 공손히 말을 했다.

 

아버지가 보니 그 것은 고백서라는 것이었는데 과거에 잘못한 사실을 기억하여 낱낱이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에 고백은 하나님에게나 하는 것이지 이런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고백할 내용도 별로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글도 쓰지 않을까 하다가 그들의 포악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 주자는 생각에 우선 종이를 받아서 잠깐 읽고 기도를 드렸다.

 

책임자는 그 모양이 아니꼬운지 씨익 웃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기도를 마친 후 아버지는 신앙 고백을 적어 내려갔다. 일찍이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이 강산을 속히 복음화 시키지 못한 죄, 피 흘리며 싸우는 인간들에게 주의 복음 진리를 언행으로 가르치지 못한 죄, 더구나 동족간에 살상을 일삼는 이 현실에 무능하고 무신하며 무애한 이놈의 죄 백 번 죽어 마땅 하는 등의 내용을 대략 열거한 글이다.

 

아버지의 글을 읽어본 그 책임자는 태도가 180도로 변하더니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따위를 고백서라고 썼단 말이야? 이 철면피야! 손 목사,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

그는 길길이 날뛰며 탁자 위에 그 고백서를 팩 집어던졌다.

일제 때 고생 했다기에 봐주려고 했더니 형편없이 썩었군. 일제 때 당신,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갔었나?

하나님 계명에 위반되므로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계명 좋아하네. 그게 무슨 하나님 계명이야, 미국 놈 계명이지. 당신은 철저히 미국 물이 들었어.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제풀에 흥분하여 설쳤다. 나중에는 아버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하면서 제 나름대로 가치와 판단으로 아버지를 몰아세웠다. 공산주의를 얼마나 비방하고 다녔느냐, 미국 놈 스파이 노릇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느냐, 목사 노릇하려면 죽은 듯이 죽치고 앉아서 기도나 할 것이지 왜 그렇게 싸돌아다니면서 공산주의를 악선전했느냐고도 했다.

 

아버지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무런 변명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책상 밑에 있던 몽둥이를 꺼내어 아버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아버지는 아이구 소리 한 마디 없이 그저 방바닥에 허우적거리고만 있었다. 김창수는 그 광경을 두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한다.

주님 지신 십자가 나도 지겠사오며 주께서 당하신 고초 내게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며 이 아픔 속에서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다.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는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야 초주검이 되다시피 해서 기어서 감방 안으로 돌아왔다. 함께 감방에 갇혀 있던 김창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 날 밤에 아버지는 두들겨 맞은 아픔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고열과 함께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그러나 신음을 하면서도 아버지는 감방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걸 잊지 않았다고 했다. 이 감방 내에선 말을 못 하게 됐으므로 큰 소리로 전도는 못 하고 귓속에다 대고 숨을 죽여 가며 또 간수들의 눈을 피해가며 전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깜빡 의식을 잃고 잠잠해졌다가도 이내 여러분,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하는 소리를 신음 소리 사이사이에 내뱉었다고 했다.

 

교화장의 하루는 반성 시간부터 시작된다. 아침 6시에 기상을 하면 곧바로 정좌를 하고 한 시간 반 정도 반성을 해야 했다. 그 시간에 아버지는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러나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소리가 새어나가면 간수들에게 체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껏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미국 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온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라는 것이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반성을 할 만한 잘못도 없고, 또 그들의 강요 아래 그 따위 치졸한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있어 그 한 시간 반은 하나님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는 소중한 기도의 시간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두고 온 가족들 걱정으로, 또 어떤 이들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당장의 불안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김창수 학생이 뒤를 돌아보면 아버지는 계속 기도에만 열중하고 눈을 감고 입술만 달싹거렸다고 한다. 반성의 시간은 시멘트 양철 조각을 긋는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끝난다. 그 소리는 아침 식사시간을 알리는 반가운 소리이기도 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꽁보리밥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이라도 큰 것을 집으려고 난리들이다.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다른 것이 더 커 보이는지 얼른 옆의 것으로 바꾸는 이들도 있다. 크면 얼마나 크고 작으면 또 얼마나 작을까마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주먹밥을 놓고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들은 그 주먹밥을 게눈 감추듯 후다닥 먹어치웠다.

 

김치 한 쪽 없는 맨밥인데다가 그나마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인데도 그야말로 꿀맛이다. 사람들은 제 식사를 다하고도 양에 차지 않기 때문에, 더 먹고 싶어서 다들 입맛을 다신다. 그렇게 조악한 음식이건만 없어서 못 먹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과 달리 언제나 맨 마지막에 남은 주먹밥을 집었으며, 남들이 우걱우걱 입에 우겨 넣는 동안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둘러보면 이미 제 주먹밥을 먹어치운 사람들이 아버지 앞의 주먹밥을 쳐다보고 있다. 입가로 침을 흘리는 이들도 있다. 아버지는 주먹밥을 반으로 쪼개어 감방 안으로 가장 쇠약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는 본시 소식가이니 이 절반으로도 족합니다.

아버지의 그 말을 본심이라고 믿은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다. 한 덩어리를 다 먹어도 양이 차기엔 모자라는데 하물며 그 절반으로 어떻게 요기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끼니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픈 그들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의 밥을 얻어먹는다.

 

한번은 김창수에게 반을 잘라서 학생! 이런 곳에서는 늘 배가 고픈 법이라네 하며 주는데 너무 배가 고파 얻어먹어 버린 것이 이날 이 시간까지 목에 걸린다고 했다. 그는 또 그 사랑의 주먹밥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양반다리를 한 자세 그대로 죽은 듯이 앉아 있어야 했다. 다리를 뻗어도 안 되고 옆 사람과 말을 주고받아도 안 된다. 만일 다리가 저린 다고 해서 다리를 뻗거나, 답답하다고 해서 옆 사람과 몰래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키는 날에는 사정없이 얻어맞아야 한다.

 

간수들은 철문 사이로 손바닥을 내밀게 하고 피가 맺힐 때까지 각목으로 사정없이 내리친다. 한번은 간수가 지나다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들어오더니 누가 방금 말했어? 하며 그 임자를 찾아내려고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자진해서 나오는 사람이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간수는 만약 5분 내로 자백하는 사람이 없으면 감방에 있는 사람 모두 차례로 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5분이 지났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일어나 내가 했으니 나에게만 벌을 주시오 하고 앞으로 나갔다. 간수는 가만히 아버지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 가버렸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은 채였다. 간수 역시 아버지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말한 쪽은 앞쪽인데 아버지는 맨 뒤쪽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일이 아님에도 자진해서 일어난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을 터였다.

 

갇힌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명씩 불려나갔다. 그들은 어쩌면 석방을 시켜 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감방 문을 나서지만 어두워지면 어김없이 다시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업혀서 들어오는 이들도 많았다.

 

아버지 역시 여러 차례 취조관 앞에 불려갔다. 첫날과 거의 비슷한 질문과 대답이 반복적으로 던져졌다. 당연히 아버지는 첫날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 감방에 돌아왔다.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치에 맞는 질문이 던져져야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할 것이 아닌가. 자백을 하라고 하나 무엇을 자백하라는 것인지, 반성을 하라고 하나 무엇을 반성하라는 것인지, 어떤 사실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며 캐묻는 심문도 아닐 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그럴 만한 정황을 들이대며 묻는 취조도 아니다. 막무가내로 자백하라 였고, 무조건 반성하라 였다.

 

한번은 김창수도 불려갔는데, 허리춤을 움켜쥐고 취조실로 끌고 들어간 그들은 따귀를 올려붙이며 다짜고짜 너 이 새끼, 사람 몇이나 죽였어? 하는데 어안이 벙벙해서 멍청히 서있었더니 사방에서 무자비한 발길질이 날아오더라고 했다. 처음에는 뭔가 착오가 있나 보다, 나를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나 보다 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들은 김창수의 말은 도대체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무순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새끼, 웬 잔말이 이리 많은 거야. 묻는 말이나 대답해. 몇 명이나 죽였어? 그들은 등이고 얼굴이고 다리고 가리지 않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김창수는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그들이 멋대로 작성한 조서에 지장을 찍어 주고 돌아왔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김창수를 눕히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김창수는 울면서 취조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한참을 아무 말이 없다가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육신은 고통은 순간이나, 영혼의 기쁨은 영원하다네. 순교자가 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길뿐일세.

 

그러나 그는 18세 나이로 죽기는 정말 싫었다고 한다. 김창수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순교한 동인 동신 오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부끄러움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고 했다. 또한 죽음을 초월한 듯한 아버지의 의연한 자세를 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