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0 15:48
■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
1. 친일행태
이러한 방향전환과 함께 부일협력이 사회문제로 등장한 것은 1936년 미나미지로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부터였다. 이때부터 일제에 의한 친일 단체가 속속 생기게 되었다. 즉 소위 국민정신 작흥운동은 일본의 국체를 인식시킴으로써 신민 된 자각을 갖게 하자는 것으로 소위 사회교화의 핵심을 이루는 과제였다. 이 사회교화를 위해서 총독부 학무국 안에 사회교육과를 신설한 미나미 총독은 이들로 하여금 각종의 관련 어용단체들을 조직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러한 흐름에 편승,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이 참여하여 활동한 단체를 대충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 방송선전협의회(1937.1.13)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발족시킨 기구로 당시 제2부 방송인 조선어 방송을 통해 조선민중에게 소위 황민화를 위한 일종의 교육강좌를 했다. 여기에 참여한 저명한 여성으로는 부인강좌에 고황경, 김활란, 서은숙, 송금선, 손정규, 이숙종 등이 있으며 이때는 중일전쟁전으로 일제의 친일 강요가 심하지는 않던 때였다.
◎ 조선부인연구회(1937.1)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생긴 모임으로 신진여성을 동원, 생활개선, 부인 수양 등을 연구, 토의, 실천, 계몽하는 활동을 했다. 상무이사로 김활란씨가 취임하였다.
◎ 애국금차회(1937.8.20)
귀족칭호를 받은 자, 이른바 사회명사들의 처를 중심으로 하여 결성되었고 금비녀 등을 뽑아 헌납하자는 목적을 가진 여성단체였다. 회장은 악질 귀족 윤덕영의 처 김복유, 간사로는 김활란, 송금선, 고황경, 방신영, 손정규, 유각경, 차사백 등이 보인다. 이외에도 여성단체연합회에서는 부인보국을 주제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즉 1938년 6월 24일에 종로 기독교청년 회관에서 강연회를 가지고 장내정리비로 일반 10전, 학생 5전을 받아서 국방헌금을 했다. 이 강연회의 연사 및 연제는 다음과 같았다.
시국과 여성의 각오-유각경(YWCA 총무)
비상시국에 처한 부인 보국-이숙종(성신여교장)
제 미정-임효정(동유회 회장)
보국과 절제-장정심(절제회연합회 총무)
비상시국과 가정경제-황신덕(동아일보 기자)
또한 조선부인연구회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 양식"이란 것을 제정하였다. (38.9).이를 선전 계몽하기 위해 연구회는 11명으로 된 순회강연반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연사는 송금선, 고황경, 김활란, 이숙종 등이었다.
이들 총후(후방부대)의 부인부대는 다시 41년 12월 27일 조선 임전 보국단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부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연사로는 박인덕, 김활란, 모윤숙, 박순천, 임효정,임숙재, 최정희, 허화백 등이 나왔다.
조선임전보국단은 더 나아가 42년 1월 5일 산하기관으로 소위 총후 부일진영을 망라해서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를 발족시켰다. 이 부인대의 간부는 다음과 같았다.
지도위원: 고황경,김선,김활란,박마리아,박순천,박승호,박은혜,박인덕,배선명,서은숙,송금선,손정규,유각경,이숙종,임숙재,임영신,차사백,최이권,황신덕,홍승원.
간사장: 임효정.
간 사: 김선,최정희,노천명,모윤숙,최희경,허하백.2)
기독교여성지도자들 개개인의 변질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일제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교회는 김종우, 유형기 등의 교역자들에 의해서 패배의 장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즉 1938년 4월 25일 서대문경찰서 2층에는 강주희, 김명현, 김용섭, 장정심 등과 일본인 유끼사끼등 일선 각 교회대표자들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 기타 총후보국 강조주간의 행사에도 참가할 것을 결의한 후,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 정신을 발양하겠다는 요지의 선언문까지 발표하였다.
그 후 1938년 5월 8일,부민관 대강당에서는 서울 거주 일.선 교도의 일치단결을 도모하는 경성기독교연합회의 발회식이 있었다.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밑에서 이들은 주악,황거요배,서사제창,성서낭독 등의 식순을 진행한 후 "황국 신민으로서 보국의 성을 치하기를 기함"이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여성으로서는 김할란, 유각경이 평의원으로 활동한 이 경성기독교연합회의 조직으로 교회 일각이 일제에 굴복해 버리자 지방교회들은 수원읍내 종로 예배당에서 시국인식 좌담회를 개최한 끝에 15원 14전을 거두어 국방헌금 하였다. 평양은 동년 5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중일전쟁 이후 시국좌담회 18회, 전승기원제 161회, 국방헌금 836원 56전을 했다는 기록이 보도되었다. 1938년 6월 6일, 인천 용강소학교 강당에서 강화,부천을 포함한 인천기독교연합회가 조직되고 이후 각처에서 기독교연합회가 속속 조직되었다.
이 지방 기독교연합회를 지부로 하는 상위중앙조직이 1938년 7월 7일에 결성되어 조선기독교연합회로 불리웠다. 장곡천정(현 소공동)공회당에서 열린 이 집회는 전선 각처의 교회대표자들이 참가하여 대회선언문을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성기독교연합회의 선언서를 약간 부여한, 기독교 황민화, 내선일체 체제의 완성이었다.3)
더 나아가서 1941년 일제는 각 교파로 하여금 그 고유한 명칭을 버리고 소위 "교단"이라는 일본 교파명을 가지게 하였다. 이에 성결교, 안식교 등은 1943년에 자진 해산, 폐쇄되었다.4)
이때 예를 들어 감리교는 명칭을 혁신교단으로 바꾸었다. 1941년 4월 1일 정춘수 감독은 신교단 규칙을 발표하여 시국에 대응하는 결의를 행하여 일억일심으로 신동아건설에 매진하여 종교보국의 실을 기하려는 결의를 굳게 하였다.5)
이에 따라 감리교여선교회 역시 혁신교단 본부의 규칙에 의하여 선교회라는 명칭을 부인회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이 회 안에 일제는 연합여자사업부를 조직하였다. 1941년 5월 15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제1차 대회를 연 연합여자사업부는 지녀야 할 자질 연마와 대동아건설을 담당할 제 2세 국민을 양육하는 주부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을 하였고 황군의 전쟁비축물을 위한 준비를 강조하였다. 여선교회는 또한 각종 위문대를 보내는 사업과, 가정부인들을 위한 일어 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예를 들면 만주에서는 "전도부인 이베세 씨의 보고에 따라 만주 조선 기독교여전도대의 창립기념으로 규칙통과를 진행하고 감리교 여선교부 주최로 일어보급을 위한 부인 야학을 결의했다."6)는 기록이 있다.
1940년 대동아 전쟁이 터지자 황군징집을 위하여 총독부에서는 기독교 여성으로 하여금 징집에 대한 계몽을 시작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신문 1942년 6월 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1942년 5월 18일 오후 8시부터 경성인사정 중앙예배당에서 감리교단 경성교구의 주최로 부인 강연회를 열고 징병제 실시에 대한 부인들의 인식을 게몽하였는데...다음과 같은 세분의 강연으로 만당한 청중이 감격 중에 성황을 마치었다.
징병제 실시와 반도 여성의 각오.
덕화여숙장 영하인덕
일본부녀의 총후보국
총력연맹부인 지도위원 전전절자씨
옛날 부인의 무용담
야담대가 신정언씨."
이중에서 박인덕은 "오늘의 반도의 여성은 훌륭한 군인의 어머니나 안해가 될 영광스러운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 어머니들은 첫째 우리의 자녀를 건강하게 기르십시다. 우리의 아들은 지금부터 우리 개인의 소유가 아니요 천황폐하의 적자요, 국가의 것이니까 아무조록 튼튼하게 길러서 바치십시다..."라고 하면서, 그겋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어머니 된 이들 자신이 수양을 하여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충성을 다하고 황국신민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내지 여성들의 정신과 생활을 배우는 데는 국어를 한마디 두 마디씩이라고 배우는 것이 또한 길이 됩니다. 말을 배우므로 자연히 일본정신에 이끌려짐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 압니다..."라고 역설하였다.7)
YWCA나 절제회 같은 기독교여성단체 또한 속속 일제에 굴복하였다. 창설될 당시부터 일제치하에서 일본 Y와의 관게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YWCA는 창설자들의 끈질긴 주체적인 노력으로 일본 Y의 양해를 얻어 세계 Y에 독립된 회원국으로 가맹하기에 이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38년 6월부터 Y는 일본 Y에게 폐통합을 강요받았고 Y는 지속적 활동을 위해 대세에 순응하는 자세로서 일본 Y에 정식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명칭을 "일본기독교 여자청년회조선연합회"로 바꾸었다.
이런헤 소위 엘리트 여성이라고 하는 지도층 여성이나, 그들이 중심이 된 여성단체들은 쉽게 일본제국주의와 타협하고 극복하는 길을 걸었지만,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 중에는 끝까지 항일투쟁을 한 기록들도 있다.8)
2. 저항의 역사 - 신사참배 거부사건
그러나 이러한 친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최후까지 저항을 한 역사가 있으니 이것이 곧 신사참배 거부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6년에서 45년간의 황민화 교육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어났다. 즉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 국민의례라고 주장했고 일부 종교인들도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므로 참배의례를 한다는 데 구애받지 말고 우선 학교나 교회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먼저 미션스쿨 계통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에 불응하는 학교는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며, 그래도 불응할 때는 학교를 아주 폐쇄해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McCune)은 1936년 1월 20일자로 교장직의 인가를 취소당했으며 숭의여학교는 스누크 교장도 해임되었다. 그러나 안식교회, 천주교회, 감리교회 등은 쉽게 일제에 굴복하여 그들의 교회, 학교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신사참배에 있어서 시종 강경한 태도를 취한 선교부는 남장로교 선교회였으며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로 시국이 긴박해지자 총독부는 시국인식철저에 관한 통첩을 발하고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각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불응한 광주의 숭일중학, 수피아여중, 목포의 영흥중학, 정명여중 등 4개교는 폐교를 당했고 순천의 매산학교와 전주의 신흥학교 및 기전여중은 폐교령이 내려지기 전에 자진 폐교하였으며, 그 뒤 군산영명학교 등 남장로회 선교회의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폐교되었다.
한편 1937년 10월 29일 평양의 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실여중 등 세 학교도 폐교원을 제출하였으며 그 뒤 대구의 개성, 신명,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신성, 보성, 강계의 영실학교, 서울의 경신, 정신여고 등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1938년 2월까지 신사불참배의 이유로 기독교계 학교를 폐교시킨 총독부 당국은 여세를 몰아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우고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938년 9월 9일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교회를 굴복시킴으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였다.9)
그러나 총회 차원으로는 신사참배를 인정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항해서 투쟁한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한 이기선 목사와 평안남도 평양 중심의 주기철 목사, 부산과 마산 등 경상남도 중심으로 한상동 목사가 전개하였다.10)
이 신사참배 거부사건에는 안이숙, 최덕지, 김두석 같은 여성들도 또한 참여, 활약하였다. 그 중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덕지 전도사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즉,1939년 12월에 밀양 출신 이인재 전도사가 평북,평남 신사불참배운동 현황을 자기가 시무하던 밀양교회에 임시로 시무하는 한상동목사에게 보고한 후, 두 사람이 함께 마산의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서 경상남도 신사불참배 운동방법을 의논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1940년 1월 1일 마산 제비산 소재 태매시 선교사 방에 있는 최덕지 전도사를 방문하여 다음 사항을 합의 결정했다.
1. 신사참배한 현 노회는 해체토록 한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세례받지 않는다.
3.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산노회를 조직한다.
4.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한다.
5. 신사불참배 그룹 예배를 드리고 동지획득에 주력한다.
이렇게 합의를 하고 최덕지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에게 신앙동지로서 협력하기로 약속하고 자신은 경남 일원의 부인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최덕지 전도사는 1940년 3월 5일에 부산 항서교회에서 열린 경남부인전도회에서 신사불참배자를 새 임원으로 선출하도록 회원들을 만나 설득하는 등의 전략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그녀는 신사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신사참배를 안한 자라 해도 궁성요배, 동방요배를 한 자는 죄를 지은 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최덕지 전도사의 설득으로 경남 여전도회 회장으로 최덕지 전도사 자신이 선출되고 총무기타 간부 모두 불참배자가 임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최덕지 전도사는 네 번에 걸친 구속과 많은 고문을 받았고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11)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회유와 강요에 못 이겨 자신의 신앙에 위배되는 친일의 길을 걸었지만, 최덕지 전도사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에 충실했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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