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 ● 11. 한부선과 방위량 선교사의 딸 캐더린의 결혼

  선지자선교회

115-116>1932927일에 29세의 나이로 한부선은 캐더린과 평양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이 다녔던 평양외국인학교는 그 날은 () 공휴일로 선포하였고, 아홉 개의 선교본부와 만주의 선교본부에서도 축하객이 올 정도로 한부선의 결혼식은 성대한 행사였다.한부선은 당시 미국인의 결혼 예식은 한국에서 특별한 행사였으며, 특별히 두 사람 모두 선교사 자녀였으므로 더욱 큰 축제였다고 자신의 결혼식에 대해 묘사하였다. 한가태는 1904년 평양에서 북장로교 선교사로 활동 중인 캔사스주 출신의 방위량(Wiliam N. Blair) 박사와 에디스 블레어(E야소 Blair)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방위량은 1718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계 이민자였으며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알렉산드 블레어(Alexander Blair)의 후손으로서 장로교 전통이 강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또하느 그는 한국교회사의 전환점이 되는 역사적인 1907년 평양대부흥회를 인도하고 목격한 증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117>방위량은 19015월에 멕코믹신학교(McCormick Theor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같은 해 6월에 결혼한 후 910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120>방위량은/ 이 외에도 그는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방위량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했으며, 후에는 영락교회의 목회자로, 그리고 1992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템플튼(Templeton) 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를 들 수 있다.

 

121>바위량/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에도 선교지 한국을 잊지 못하여, 소련군정의 특별허가를 받아 개인자격으로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약 1년간을 평양에 머물면서 그가 사역했던 교회들을 순방하며 설교했으며, 한 장외 연합집회에서는 20,000여명이 운집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선교사가 동양의 예루살렘이 있었던 북한에서 활동한 마지막 선교행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