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 예수님의 '人性'  - 출간본
선지자선교회
● 도성인신의 '人性' 硏究 - 첫 번째 글

1. 도성인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를 교리용어로 '도성인신'이라 합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 신인양성일위

또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말씀'은 신성이며, '육신'은 인성으로서 신성과 인성 양성이 일위가 된다는 말씀이니 그 교리용어로 '신인양성일위'라 합니다.

3. 신인양성일위에서의 '일위'

'일위'라는 것은 신성은 높고 인성은 낮고 하는 것이 없이 한 격위라는 말입니다. 직위도, 직분도, 역사도, 영광도 일위입니다. 신성은 주격이고 인격은 소유격이고 하는 것이 없는 일위입니다. 그러므로 일위가 가지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인성은 죄만 없을 뿐이지 우리 인간의 인성과 꼭 같다 하는 것은 깨달음의 미달입니다. 죄만 없고 우리와 인성이 꼭 같은 자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하와입니다. 그러나  아담처럼 흙으로 지은 예수님의 인성이 아닙니다. 하와 같이 아담의 갈빗대로 만든 예수님의 인성도 아닙니다. 또 우리 인간처럼 부정모혈로 태어나신 예수님의 인성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 인간의 인성과 단순하게 비교하면 안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신 예수님의 도성인신에는 무한의 오묘가 들어있습니다.  

5.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의 무한 완전한 역사를 일위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인성입니다. 그러므로 죄만 없을 뿐 우리와 꼭 같은 인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를 말할 때 표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말씀 곧 제이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신 인성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하신 이 말씀을 많이 또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6. 신인양성의 일위

'말씀이 육신이 되어' 곧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를 다른 말로 '도성인신'이라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신인양성일위'라 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일위'라는 말입니다. 왜 '일위'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일위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일위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인성과 꼭 같다고 한다면 아담 하와가 범죄하기 전의 인성과 같은 상태인데 아담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의 신성과의 관계가 '일위'가 되지 못하고 '일행'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우리 인간의 인성과 꼭 같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 교리에 배치되는 오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곧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를 아무리 깊이 깊이 연구해도 끝이 없을 무한성의 도리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신성의 무한을 온전히 일위적으로 이룰 수 있는 신인양성일위의 인성이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7.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등식

도성인신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신인양성일위

신인양성일위 = 신성과 인성이 한 격위

● 도성인신의 人性에 대한 '난해절' 硏究 - 두 번째 글

1.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죄 삯으로 심히 고민하고 또 영원히 죽은 우리를 주님이 우리 대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시므로 우리를 이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대속역사를 말씀하시는 성구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 인간의 인성 같이 연약성을 가져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해석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사망의 해를 이미 받은 것이 되기 때문에 대속주로서의 자격이 이미 상실 된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는 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역사로 받아야 합니다.

2.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26:38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말씀과 연결을 지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십자가상의 대속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므로 마26:39 성구를 잘 살펴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만일'을 전제한 후에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십자가의 대속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전적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동하고 정하겠습니다'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지 않고 자기 원대로 하는 죄악으로 영원히 죽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그 대속역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구속주의 직분도 전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또 그 직분을 이루는 역사에 있어서도 전적 자원하심으로서 지공법과 지성법에 만족이 되는 대속인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4.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첫째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우리 마음이 원해야 하고 둘째는 그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이 이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26:38에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시고 이어서 마26:39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 또 이어서 '마26:41'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하셨으니 우리 마음면에 대한 대속은 일차 완료가 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으니 우리 육신면에 대한 대속이 아직 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바로 이어서 육신도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눅22:4)하므로 우리 육신면에 대한 대속역사도 완료를 하십니다.

5.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하신 '땀'은 아담이 범죄 후에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3:19)' 하신 그 땀의 성격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땀을 피 방울 같이 흘리시므로 우리가 흘려야 할 땀을 대속 하신 것을 말씀하는 성구입니다.

또 '피'는 하나님께서 열납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므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벨의 피입니다.(창4:11) 그래서 아벨의 순교의 피는 아벨 자신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완전한 번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땀을 피 같이 흘리신 것도 우리를 완전한 번제의 제물이 되도록 하시는 대속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6. 이제는 자고 쉬라

(마26: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이제는 자고 쉬라'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민으로 죽게 되었는 대속과 또 우리 대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대속과 그리고 우리의 마음면의 대속과 또 육신면의 대속과 우리가 완전한 번제물이 되는 대속을 다 이루시고 이제는 완전 종결의 십자가를 앞두고 이미 이루신 대속과 또 이루셔야 할 남은 대속을 다 예비하신 후에 '이제는 자고 쉬라' 하신 것입니다.

7.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막15:34)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마27:46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성구를 십자가상의 고통이 너무 심하므로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해석해 놓은 것이 모든 주석들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좁아서 죽는 것만 보지 죽음 너머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아버지께 원망을 했다고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와 살과 생명을 우리 위해 제물로 내놓으신 골고다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신 것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대속 제물로 써주셨습니까! 대속주의 직책을 주셔서 대속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는 찬양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완료된 십자가상에서 찬양하신 것은 아버지가 귀하게 등용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또 승리케 한 기쁨에 못 견뎌 마지막 있는 생명을 다 바쳐서 찬양한 찬양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원망하는 죄를 지었다면 우리를 대속 하지 못합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셨다면 어떻게 우리의 대속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일에 원하고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에 만족이 되는 그 자유성으로 우리에 대한 대속이 된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대속 제물로 써 주시고 이 대속 일을 완성하도록 해 주십니까!' 하는 기쁨에 넘친 그 기쁨은 육 덩어리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도 죽음이 오는 것을 못 견뎌서 원망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 생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땅위에 삼십삼 년 사 개월을 지내시면서 유월절 제물이 되는 일을 원하시고 원하시다가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완성이 될 때에 최종 완성 단계에 와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의 제물로 쓰시고 이 대속 하는 일을 완성하기까지 해 주셨습니까!' 하고 넘치는 기쁨으로서 마지막 최종에 이 찬송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렸던 것입니다.

8.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 죽으심만이 우리에 대한 대속의 전부가 아니라 십자가상에 죽으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 대속을 예비적으로 다 이루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비적 대속을 다 이루시고 이 대속을 완전 종결로 끝맺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생애 전부는 우리를 대속 하신 속량의 역사이셨고, 그 속량의 대속 역사를 완전 종결로 이루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셨습니다.

9. 도성인신의 '人性' 성구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롬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도성인신의 人性에 대한 '히4:15' 硏究 - 세 번째 글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 히4:15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하시지 않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하셨습니다.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하셨으면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셨다고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말에서 차이점은 '모든 일에'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느니라' 하신 이 말씀을 가지고 해석해야 해석할 성구의 기본이 바로 되어서 그에 따라 바른 해석이 되겠습니다.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하신 것은 마4:1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는 속량의 제물이 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 대신 '모든 일'에 다시 말하면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 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시험을 치러서 승리를 해야 하므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하신 말씀입니다.

'죄는 없느니라' 하신 말씀에서 '모든 일에'를 빼고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느니라' 이 말씀으로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이 다만 죄가 없는 차이일 뿐 우리와 인성이 같다고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느니라' 하신 말씀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야 오류가 없게 되겠습니다.

또 '죄가 없느니라' 하신 말씀 중에서의 '죄'라는 성격은 우리가 짓는 그런 죄를 말하는 것도 있지만 그 보다는 죄의 성격적 죄를 말하는데 이 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구속주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의가 되고 이 구속주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드리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 대신 모든 대속 할 역사에 있어서 그 대속 역사를 온전히 이루셨으므로 죄가 없으시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2. 그래서 히2:9에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히4:15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하시는 말씀과 히2:9에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하는 말씀과 같은 도리의 말씀입니다.

또 히4:15에 '죄가 없느니라' 하시는 말씀과 히2:9에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은 우리를 대속 하시는 속량의 제물이 되시는 이행역사로 죽으셨지 죄의 삯으로 사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모든 대속 역사에 있어서 고통과 고민과 땀 흘리신 것과 피 흘려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속량의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일 뿐 예수님 자체가 고통을 당하시거나 고민을 하시거나 그 수고가 고난이 되어 땀을 흘리시거나 사망의 권세로 해를 받아 피 흘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었습니다. 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는 전부가 우리를 위한 속량의 대속역사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4:15 말씀을 근거해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우리와 한가지로 연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에서 미달이 되는 깨달음입니다.

고민과 고통과 땀과 죽음은 벌써 죄의 삯이 되는 사망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연약하여서 고민과 고통과 땀과 죽음을 당했다면 이는 죄의 삯 아래에 있게 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속량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나 우리 인간 같이 연약하지는 않습니다. 신성의 무한 완전한 구원역사를 일위가 되셔서 이루신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 '도성인신의 人性과 인간의 人性' 同異點 연구 - 네 번째 글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2.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

(롬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이 예수님의 육신은 '다윗의 혈통에 나셨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과 같은 육신이라는 말씀입니다.

3.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 곧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죄 있는 육신으로'가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라는 말씀을 깊이 있게 바로 연구해야 합니다.

4.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우리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모양으로 나셔서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5.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셨으니 우리와 같이 살과 피가 있는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육신이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하셨으니 육신은 예수님의 인성을 말씀하고, 영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의 무한 완전의 대속역사를 일위로 온전히 이루셨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이나 우리 같이 죄 있고 연약한 육신이 되신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롬8:3에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셨지 '죄 있는 육신으로 보내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3:16 전반절)' 하신 것입니다.

지금 도성인신의 '인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성질면과 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능력면 이 두 면을 논설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육신의 성질은 우리 육신의 성질과 같습니다. 우리와 같이 살과 피를 가지신 육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육신의 능력은 우리 육신의 능력과 꼭 같지 않습니다. 무한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신인양성 일위가 되셔서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일행'으로 이룰 수 있는 인성의 능력이고,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일위'로 이룰 수 있는 인성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의 능력은 요1:48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시는 능력이며, 요11:43-44에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 능력이며, 마14:25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의 성질은 우리와 같은 인성이로되, 예수님의 인성의 능력은 우리의 인능과 다른 것입니다.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도성인신은 '크고다 경건의 비밀이여'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을 우리의 육신과 감히 비교할 수가 없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입니다. 유한 된 우리 인간들이 깨달으려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입니다.

요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셨고, 롬8:3에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셨고, 딤전3:16에는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이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성구를 깨닫기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입니다.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해석하기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입니다.

아래의 성구를 다시 한번 깊이깊이 궁구 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문장의 의미적으로나 그 문장 속의 구원의 도리로나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 있는 말씀입니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롬8:3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딤전3:16에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6. 반론에 대한 변증

예수님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의 능력이 다르다는 논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반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론: 요1:48에서 빌립이 부르기 전에 나다나엘을 본 분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입니다,

변증: 우리 인간의 인성이라면 예수님 같이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본 것같이 볼 수 없습니다. 요1:48 말씀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이신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신 것은 예수님의 신성도 보셨지만 예수님의 인성도 같이 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신성만도 아니고 인성만도 아닌 신인양성일위이십니다.

반론: 요11:43-44에 나사로를 살린 능력은 엘리야와 바울도 행한 능력입니다.

변증: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직접 살리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바울은 죽은 자를 직접 살리는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역사에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신성과 인성이 가진 직책과 직분과 사역과 영광이 일위이십니다.

반론: 마14:25에 바다 위로 걸어가신 예수님 인성 능력은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바로 따라 행한 능력입니다.

변증: 예수님은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물위를 걸었으나 곧 물에 빠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인간의 인성은 그 능력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인성이나 우리 인간의 인성이나 그 인성의 성질은 꼭 같습니다.

그래서 딤전3:16에는 예수님의 도성인신 신인양성 일위에 대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경건의 비밀'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도성인신에 대하여 참에 도달하기까지 깨닫기에는 큰 경건의 비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도성인신의 人性에 대한 '요14:12' 硏究 - 다섯 번째 글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의 말씀 앞에는 '나를 믿는 자는'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나를 믿는 자는' 하는 말씀을 분명히 붙여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는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는 말씀으로만 해석을 하게 되면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해석할 성구가 바로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또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대속의 일을 우리 인간이 할 자가 아무도 없고 또 예수님 보다 더 큰 대속의 일을 할 자도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말씀 앞에 '나를 믿는 자'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나를 믿는 자' 곧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말씀도 되겠지만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을 우리가 가지면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는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을 믿는 분량만큼

그러면 요14:12에서 '나를 믿는 자는' 곧 '예수님을 믿는 자는' 무엇을 말씀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으면 도성인신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인간으로서는 예수님의 일을 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셨는가? 일차로 이 말씀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면 '나를 믿는 자는' 하는 말씀이 먼저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차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하는 말씀이 해석되어지겠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하는 말씀은 '우리 인간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이 일위로 역사 한 것 같이 하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일위로 역사 하신 것 같은 역사를 할 자가 전무합니다. 그렇기에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인간은 전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14:12 말씀의 구원도리는 예수님을 믿는 분량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도성인신의 人性은 '성령으로 잉태' 硏究 - 여섯 번째 글

1. 잉태의 정의

(창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잉태라는 것은 '태에 아이를 배는 것'을 잉태라 말합니다.

2. 성령으로 잉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 된 것'을 자칫하면 성령과 마리아가 결합하여 잉태되었다고 여길 수 있는데 마1:20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1:18-20)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 된 그 근거를 논증한다면 첫째로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 말씀 하셨고, 둘째는 우리 인간은 부정에도 원죄가 있지만 모혈에도 역시 원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잉태하시는 데에 마리아의 모혈이 결합될 수 없는 것이고, 셋째는 요1:14에서는말씀이 육신이 되어하셨고 롬8:3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하셨고 딤전3:16에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죄만 없지 우리 인간과 꼭 같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하셨겠습니까?

아담 하와가 타락하기 전 죄가 없을 때에 아담 하와의 인성이 하나님의 신성과 일위로 역사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일행으로 역사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은 신성과 일위로 역사 하셨습니다.

도성인신의 '인성'에 대하여 논설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과 죄만 없는 것이 차이가 날뿐 꼭 같다' 라고 단순하고도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이제는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 간단하게 표현될 정도의 도리라면 왜! 도성인신에 대하여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3:16)' 라고 말씀 하셨겠느냐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 인간은 부정모혈로 잉태하여 났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과 예수님과 분명한 차이점은 '부정모혈로 잉태'와 '성령으로 잉태'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은 그 인성면에서는 인질이 꼭 같습니다. 그러나 인능면에서 우리 인간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은 분명히 차이가 또 있습니다. 이렇게 잉태할 때부터 우리 인간의 잉태와 예수님의 잉태는 근본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에서 하나는 신성과 일위가 될 수 있는 인성이고 하나는 일위가 될 수 없는 인성이므로 그 차이가 바로 우리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의 차이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과는 그 인성의 인질은 꼭 같습니다. 피와 땀이 흐릅니다. 그러나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예수님의 신성과 일위로 역사 하는 면에서는 인간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은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그 차이가 있는 면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인간의 인성이 죄만 차이가 날뿐 꼭 같다'는 이 말에는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인간의 인성은 차이가 있다는 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라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일행'이 되지 않으면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죄라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예수님의 신성과 '일위'가 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인간의 인성이 죄가 없는 것만 차이가 날뿐 우리 인간의 인성과 같다'고 말하려면 일위와 일행의 도리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도리를 포함시켜서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 인간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꼭 같다'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이 말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이 죄라는 부분에서 우리 인간의 죄 범위와 예수님의 인성의 죄 범위를 꼭 같이 둔다면 동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모혈로 난 우리 인간의 인성을 예수님의 신성이 전적 붙들고 써도 일행 밖에 할 수 없는 인성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일위로 역사 할 수 있는 인성이 되려면 그 인성은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됩니다. 성령으로 잉태 되셔서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유한으로서는 간단하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신 말씀입니다.

3. 기묘자

그래서 또 사9:6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하셨습니다.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을 인간이 다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심을 가리켜서 '기묘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4. 임마누엘

마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셨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하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또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것을 밝히 나타내어 주는 말로서 예수님은 도성인신 신인양성일위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니 요1:14 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과 같은 구원도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 도성인신의 人性에 대한 '肉身' 연구 - 일곱 번째 글

1. 육신

'육신'이라는 말은 사람의 몸이 되는 육체를 육신이라 말합니다. 구약 신5:26이나 신약 마26:41에 기록 된 육신이라는 말을 상고해보면 육신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신5: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또 '육신'이라는 어휘를 히브리어(바사르 1320 살, 육체)나 헬라어(사르크스 4561 살, 육체)를 참조하여 보아도 사람의 몸이 되는 육체를 육신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육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범위를 바로 알고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와 롬8:3의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와 딤전3:16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는 말씀을 깊이 상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고깃덩어리 몸이라는 말이나 그 몸이 마음과 관련성이 있을 때 그 몸을 중심하여 표현하는 말이 육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도 육신에 포함되겠습니다.

2. 성령으로 '잉태'와 마리아에게 '나신' 것과는 뜻이 다름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와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신 이 예수님은 마1;18-23 말씀대로 성령으로 잉태 되셨습니다.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렇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하는 말씀이 있고 또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1:3)'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9:5)'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하는 '나셨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곧 '잉태'와 '나셨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육신은 사람의 육신과 같으나 예수님의 영은 신성 하나님이심을 행16:7을 상고해보면 알 수 있게 합니다.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러기에 위의 성구들을 상호간 깊이 상고해서 또 마1:18-23 말씀을 연결하여 깊이 상고해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심과, 그리고 마리아에게 나심과, 예수님의 영과, 또 예수님의 육신에 대해서, 그 범위의 구원의 도리를 다 해석할 수는 없으나 믿음에 이르는 윤곽적 해석은 어느 정도 할 수 있겠습니다.

● 도성인신에 대한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 硏究- 여덟 번째 글

1. 아폴리나리스의 주장

초대교회사에서 삼위일체 논쟁 시에 '아폴리나리스'는 '말씀'이 어떻게 성육신 하셨는가를 설명함으로서 삼위일체론을 옹호하려했습니다. 그런데 '아폴리나리스'는 삼위일체의 제 이 격위이신 '말씀' 곧 신성이 예수님의 영혼의 자리에 대신 차지했다고 주장함으로서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성육신 하게 되셨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 인간처럼 육체를 지니셨으나 지정의는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 곧 신성이 예수님의 영혼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의하여 정죄 되었습니다.

2.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비성경적

이러한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인간의 인성구조를 바로 알지 못하므로 인한 오류였습니다. 인간의 인성구조는 영과 육(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폴리나리스가 예수님의 인성이 육체만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그 육체에는 몸만 아니라 마음(혼)까지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오류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은 육체(몸) 만이고, 영혼(註: 초대교회사에서는 영혼을 마음이라 또 지정의라 하였음)은 말씀 곧 신성 차지하였다고 주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스가 이렇게 오류된 기독론을 주장하게 된 것은 영이 영혼이고 영혼이 마음이고 마음이 지정의이라고 알던 교리시대였기 때문입니다.

3. '육신'은 육으로서 마음이 포함되는 용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하는 말씀에서 '육신'은 육신(몸)만이 아니라 육신 곧 육에 속한 혼(마음)까지도 육신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과 합해서 육이기 때문입니다.

4. '아폴리나리스'의 주장과 '김반석'의 주장은 그 차이가 판이함

초대교회사의 '아폴리나리스'는 도성인신의 '인성'에서 육신을 몸만으로 보았으나 '김반석'은 육신을 몸 만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혼(마음)까지 육신에 포함을 시키는 논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구가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구가 명백히 말씀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주장을 할 리 만무한 것입니다.

(요이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일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신 그 육체는 예수님의 인성으로서 심신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행16:7) 예수의 영' '(벧전1:11) 그리스도의 영' '(갈4:6) 아들의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벧전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도성인신'에 대해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셨고(요1:14, 롬3:8, 딤전3:16) 또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 하셨지(요일4:2, 요일1:7) 더 이상은 성경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각도로 말하면 예수님의 인성에 있어서 인간과 같이 영이 있다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반석이 주장하는 도성인신의 '인성'은 마음과 몸으로 말하고 있고, 아폴리나리스가 주장하는 도성인신의 '인성'은 몸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반석이 주장하는 도성인신의 '인성' 부분과 아폴리나리스가 주장하는 도성인신의 '인성' 부분과는 그 차이가 판이합니다.

5. 성경적 근거를 제시

성경은 예수님의 영에 대해서 '예수의 영(행16;7)' '그리스도의 영(벧전1:11)' '아들의 영(갈4:6)'이라고 밝히 말씀하시고 '신성'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혹 이 주장을 반론하여 예수님의 인성에도 영이 있어서 그 영은 인간의 영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라고 하는 성구가 명백하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인성에서 인간과 같은 영을 가졌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신성의 영과 인성의 영, 두 영을 동시에 가져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심신은 신성의 영과 인성의 영, 두 영 중에 어느 영의 인도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지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6. 도성인신의 '인성'에 대한 等式

6-1) 성경적 等式

○ 예수님의 영 =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으로서 신성

○ 예수님의 육신 = 육신(마음{지정의}과 몸), 육체(마음{지정의}과 몸)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형태
신성이 성령으로 잉태 된 육신과 한 인격이 되어 일위적 역사

6-2) 오류적 等式

○ 예수님의 영 = 사람과 같은 영

○ 예수님의 육체 = 육신(마음{지정의}과 몸), 육체(마음{지정의}과 몸)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형태
신성의 영과 인성의 영을 각각 가지므로 두 인격이 되어 결합적 역사  

● 도성인신의 人性과 '대속범위' 硏究  - 아홉 번째 글

1. 육체

성경에서 육체라는 것은 마음이 영에게, 영은 하나님께 다스림 받지 아니하고, 마음이 몸을 쫓아서 몸 위주로만 사는 인간을 가리켜서 '육체(창6:3)'라 말씀했습니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2.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받으신 고난은 '육체의 고난(벧전4:1)'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육체의 고난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가 된 그 범죄에 대한 대속의 고난이셨습니다.

(벧전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3. 벧전4;1은 대속 하신 그 속량의 범위를 나타낸 말씀

그래서 벧전4;1 성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 하신 그 속량의 범위를 나타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폴리나리스가 도성인신의 '인성'은 몸 만이라고 주장을 할 때에 오류적 주장이라고 그 근거 성구를 제시 할 수 있는 성구 중 하나가 바로 벧전4:1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된 타락이기 때문에 그 범죄는 몸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타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시는 그 속량의 범위는 육체 곧 마음과 몸이 범죄 한 그 범죄에 대한 대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영은 육체 곧 심신이 범죄 함으로 그 주격 책임에서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육체 곧 심신이 범죄 한 그 범죄를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으로 대속 하시게 되면 육체 곧 심신이 범죄 한 그 주격 책임에서 하나님과 끊어졌던 영이 다시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중생의 대속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에서도 우리 인간과 같은 영을 가져서 우리 인간의 영을 대속 하는 그런 속량의 범위는 아니라는 것이 이 성구가 그 근거를 제시한다 하겠습니다.

4. 초대교회의 인성구조 교리와 현재의 인성구조 교리

초대교회사와 그 후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인성구조에 대해서는 영이 영혼이고, 영혼이 마음의 지정의라고 하는 교리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영은 영이고, 마음은 신령한 육으로서 고깃덩어리 몸과 함께 육이라는 성경적 교리가 정립 된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성인신의 '인성' 곧 '육신' 곧 '육체'에 대한 교리 정립도 인성구조가 새롭게 정립 된 현 시점에 따라서 더 깊고 더 정확한 성경적 교리로 새롭게 정립되어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사에서 정립 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는 그 시대 그 시점에서 가지는 인성구조 교리를 근거하여 정립된 교리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새롭게 정립 된 인성구조 교리를 우리들이 가졌기 때문에 새롭게 정립 된 이 인성구조 교리를 근거하여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러므로 초대교회사에서 교리가 이미 정립되어졌다고 그 시대의 교리에 근거를 두어서 그 자리에서만 머무른다면 현재 정립된 성경적 인성구조 삼분설 교리에 상충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영(영혼, 마음의 지정의)과 육(몸) 이분설을 가지고 교리 세우느냐? 아니면 영과 육(마음과 몸) 이분설 안에 삼분설을 가지고 교리를 세우느냐? 하는 그 차이는 대단한 결과의 차이를 불러온다 하겠습니다. 실례로 아폴리나리스가 인성구조에 대하여 삼분설 교리로 대했다면 이단설로 정죄 받는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봅니다. 아폴리나리스는 대단히 성경을 깊게 깨달았으나 그 자신이 인성구조를 바로 정립하지 못했고 또한 그 시대 교회들도 인성구조가 바로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발생 된 총체적 오류였습니다.

이러함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성인신의 '인성' 곧 '육신' 곧 '육체'에 대하여 이분설로 대하느냐 삼분설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성경적이 될 수도 있고 오류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설로 대하여 자칫 정죄 받을 수도 있겠고 또한 삼분설로 대하여 기존 교리보다 깊은 교리를 새롭게 정립할 수도 있겠습니다.

5. '도성인신' 교리에 대하여 주의 할 점

5-1) 완결교리로 단정짓는 것을 주의

예수님의 '도성인신'에 대한 교리 정립이 얼마나 성경적 깊은 해석의 교리라 할지라도 '이렇다!' 라고 완결교리로 단정을 짓는 것은 이단설로 몰리기가 쉽겠습니다. 그러기에 완결교리로 단정을 짓는 것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서 소개하고 그 범위 안에서 해석을 해야 되겠습니다. 잘못 그 범위를 넘어버리면 그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도리의 범위를 넘어버리는 주장이 되어서 이단설 시비에 휩쓸릴 우려가 있겠습니다.

5-2)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주의

또한 한쪽으로 치우쳐도 이단설로 몰리기 쉽겠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 그 말이 얼핏 맞는 말 같으나 성경적에서 이탈 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 하여 어떻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가졌다고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만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5-3) 사람의 영은 '생령' 예수님의 영은 '성령'

그래서 또한 오류가 생겨지는 것이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꼭 같은 몸, 마음, 영을 가진 인성구조라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구조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성은 사람인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감동으로 역사 하게 되지 예수님이 하나님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흡사 우리 인간이 몸, 마음, 영이 있어서 한 인격체로서 신성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동으로 역사 하시는 이 역사와 같다는 논리가 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을 때 '생령'이 되었고, 예수님의 영은 성령으로 잉태 될 때 '성령'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영은 생령이고, 예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6.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예수님은 제 이위 성자 하나님이시다' 하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는 말입니다.  

성경으로 엄밀하게 따져서 '예수님이 사람이시다' 라고 이 표현만 독립되게 말하면 비성경적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표현은 독립이 되어도 성경적 표현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지 말씀이 한 인간이 되셔서 우리 인간 같이 영, 마음, 몸을 가진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꼭 같은 몸, 마음 그리고 영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한 신성과 인간의 유한한 인성이 신인양성일위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도성인신'이고, 도성인신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신인양성일위라는 교리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가 육체가 되셨다' 하셨지 어느 성구에도 '예수님이 사람이시다' 하는 성구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딤전2:5)'라 하신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이 사람이시다'는 말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같은 말 같이 보이나 같은 말이 아닌 것은 '예수님이 사람이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시다' 라는 말이 되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이 됩니다. 마치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7)'와 '진리는 성령이라'고 할 때 이 두 말이 같아 보이나 차이가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일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말씀 보다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중보'를 말씀하는 성구입니다.

제 이위 성자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대속 하신 것이지,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신성의 감동을 받아 결합으로 우리를 대속 하신 것이 아닙니다.

7. 도성인신의 도리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또 '도성인신 교리와 또 신인양성일위'에 대한 교리는 교회사와 교리사에 있어서 그 교리를 더 깊이 있게 또 더 완벽하게 정립하려 하다가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신학자는 현재까지 정립 된 교리 중에서 미달 또는 오류 된 교리가 보인다 할지라도 수정, 보충, 보완하는 일에는 좀처럼 달라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사와 교리사에 있었던 것처럼 잘한다는 것이 자칫 이단설로 몰릴까 하는 까닭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참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도성인신과 신인양성일위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서조차 말씀하시기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3:16)' 하셨기 때문입니다.

8. 김반석의 글은 연구차원의 글

그러하므로 김반석이 발표하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논설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완결 교리로서 발표가 아니라 연구차원에서 진행되어져 가는 논설입니다. 그래서 글의 제목마다 '硏究'를 덧붙여 명시하였습니다.

또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도성인신과 신인양성일위의 교리에 대하여 '이렇다' '이것이다' 라고 완결적 교리로 단정을 짓는 것은 벌써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도성인신 신인양성일위에 대한 교리에 대하여 완결적 교리라고 정립할 수 없는 것은 이 교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선상의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유한으로서는 무한의 하나님을 다 측량 할 수 없는 오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연구 신학자가 이단을 배격하기 위하여 발표한 논문이 오히려 이단으로 되 몰리는 논문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함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의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스 또한 기독론을 더 굳건히 정립하려다가 오히려 이단설로 정죄를 받았던 것이 이런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도성인신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는 오묘가 있기 때문에 그 오묘를 인간의 유한으로는 다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지난 교회사와 교리사가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9. 도성인신의 '人性' 주해

9-1)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인성의 영이 인간의 영과 같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이 되시겠나 하는 점을 살펴볼 수 있는 성구입니다.

9-2)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육신과 영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육신과 영은 예수님의 육신과 영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신 예수님을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의롭다 하실 수 있는 영은 신성 하나님이십니다.

9-3)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육체와 영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육체와 영은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육체와 영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육체는 죽임을 당하시고 그 죽임을 당하신 육체를 영이 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살리신 영은 신성 하나님이십니다.

● 도성인신의 인성과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 解剖' 硏究 - 열 번째 글

<서론>

아래는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에 대한 교계의 초대교회사 교재입니다.

1. '아폴리나리스' 설 - 교재A 한국장로교출판사 세계교회사

'아폴리나리스'는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성육신 하셨는가를 설명함으로서 삼위일체론을 옹호했다. 그런데 그는 삼위일체의 제 2격위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 성육신 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그의 합리적 영혼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주장함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성육신 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다른 인간들처럼 육체를 지니셨으나 인간의 지정의는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합리적 영혼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2.  '아폴리나리스' 설 - 교재B 초대교회사 파일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성부 곧 말씀이 인간이 되셨을 때 인간의 영혼을 말씀이 대치했다는 것이다.

3. '아폴리나리스' 설 - 교재C  초대교회사 파일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 제한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사람의 영에 대치했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이 없으니 인성 제한이라고 주장하였다.

4.  '아폴리나리스' 설 - 교재D 목회자양성원 초대교회사

아폴로나리스는 기독론의 첫 이단설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몸과 마음에 있어서는 온전한 사람이나 그 영은 하나님의 신으로 대치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 인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안디옥 학파의 갑바도기아 신학자들 중에 나지언즈스의 그레고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인양성이 온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정죄하였다.  

<본론>

1. 교재의 내용이 각각 다름

1-1) 집필자에 따라 교리나 문체가 각각 다름

교회사 교재들을 언뜻 보면 내용이 같아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용이 일관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교재 집필자에 따라서 교리적으로나 문체적으로 각각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속한 교단이나 또 각자가 가진 교리신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사 교재를 대하는 우리들이 종합적으로 취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려야 그 지식이 오류 되거나 편협 되지 않겠습니다. 그런고로 '아폴리나리스' 설에 대해서도 여러 교재를 종합해서 총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오류 되고 편협 되기 쉽겠습니다. 그래서 아폴리나리스' 說을 총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위의 4종류 교재를 대표적으로 소개하였습니다.

1-2) 집필자에 따라 靈觀이 다름

위의 아폴리나리스 說을 보면 '靈'에 대한 개념이 '지정의를 영이라' '영혼을 영이라' '영을 영이라' 이렇게 집필자에 따라 가지는 靈觀이 각각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1-3) 집필자에 따라 肉觀이 다름

또 이 靈觀에 따라 '육'에 대한 개념도 다른데 '몸이 육이라' '마음과 몸이 합해서 육이라' 이렇게 집필자에 따라 肉觀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2. 교재 A, B, C는 이분설, 교재 D는 삼분설

위에 소개한 4종류의 아폴로나리스 說 중에서 교재D를 유심히 살펴보면 교재 A, B, C 와는 유독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재 D는 삼분설 교리를 근간으로 집필 된 내용이고, 교재 A, B, C는 이분설 교리를 근간으로 집필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교재 D는 '아폴리나리스'가 주장하고 또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이단설로 정죄한 근간이 되는 인성구조 이분설에 대해서 본래 그대로 집필하지 않고 그 집필자가 가지는 삼분설 교리신조에 맞추어서 교재 D를 집필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3. '아폴로나리스'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분설로 논쟁

초대교회사의 '아폴로나리스'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인성구조 이분설을 근거하여 주장을 했고 또 이에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도 인성구조 이분설을 근거해서 정죄를 했습니다.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교재A, B, C를 보면 육을 몸으로 보고 영을 영혼으로 또 지정의 마음으로 보았다는 것으로서 여실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4. 교재 D는 본래의 이분설을 삼분설로 대함으로 변형되게 집필

교재 D를 보면 '아폴로나리스'의 주장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정죄한 근거가 되는 본래의 이분설을 간파를 하지 않고 현재 가진 집필자의 삼분설 교리신조에 따라 대함으로 본래에서 변형되게 집필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발생되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아폴로나리스'가 '기독론'을 주장할 그 당시에는 이분설 교리를 근간으로 논쟁을 하였는데 마치 삼분설 교리를 근간으로 논쟁이 있은 것처럼 오해를 가지게 한다는 점입니다.

5. 초대교회사 그 당시 있었던 기독론 그대로 파악

그러므로 초대교회사에서 '아폴로나리스'가 주장한 설이 무엇인지 그 본래를 바로 알아야 하겠고, 그 다음에는 집필자의 교리신조에 따라서 교재의 내용이 각각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도 알고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논제가 되는 '아폴로나리스' 설을 초대교회사 그 당시에 있었던 기독론 논쟁을 그대로 파악해야 되겠습니다. '아폴로나리스'의 기독론 주장에 대해서 여러 교재를 종합적 취합해서 총괄 파악이 되어야 만이 그 바탕 위에서 바른 논설과 논변과 논증이 되어지겠습니다.

6. 만약 '아폴로나리스'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삼분설 교리를 가졌다면?

만약에 '아폴로나리스'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인성구조에 있어서 삼분설 교리를 가졌다면 아마도 '아폴로나리스'가 오류 된 주장을 할 리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러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정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아폴로나리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肉身觀을 몸만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바른 논설을 하려다가 그만 오히려 이단설로 정죄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폴로나리스'가 육신을 몸과 마음 이 둘이 합해서 육신으로 알았다면 이단설로 정죄 받는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유추(類推)해 봅니다.

7. 교재 D에 대해 유의할 점 재론

한번 더 재론하는 것은 교재 D는 '아폴로나리스'가 주장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정죄한 이분설을 본래 그대로 집필하지 않고 현재 집필자가 가진 교리신조에 맞추어서 삼분설로 집필한 것입니다. 그 당시 몸과 영혼으로 二分한 논쟁을 마치 몸과 마음과 영 三分으로 논쟁한 것처럼 집필하므로 그 당시 교리논쟁을 집필자가 가지는 교리신조의 시각으로 혼합해서 집필한 이점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논쟁한 기독론은 '육은 몸으로' '영은 영혼으'로 또 지정의 마음으로' 이분설 안의 논쟁이었는데 마치 '육은 마음과 몸으로' '영은 영으로' 논쟁한 것같이 여길 수 있는 교재로 집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재 D는 초대교회사 그 당시 이분설 논쟁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삼분설 교리로 교재를 집필한 의도는 좋으나 그 당시 초대교회사에서 가진 기독론 논쟁에 대하여 이 시대 우리들에게 교리사 그대로 정관을 가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관을 가지게 하였다는 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8. 집필자의 교리신조에 따라서 교리사 표현이 달라짐을 유의

그래서 또 하나 배우는 것은 역사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데에 따라 달라지고 또한 집필자가 가진 교리신조에 따라 이렇게도 집필되고 저렇게도 집필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교회사나 교리사 교재를 대할 시는 그 교재를 종합적으로 취합하여 총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론에 있어서 교회사나 교리사를 참조하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론 논설 논변에 있어서는 지난 시대의 교회사나 교리사는 참고는 될 수 있으나 교리 정립의 근거는 삼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기독론 논쟁은 이분설을 바탕 하였고, 지금 기독론 논쟁은 성경적 삼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근거 성구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8:3),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3:16)하시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육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의 영(행16:7), 그리스도의 영(벧전1:11), 그 아들의 영이라(갈4:6)하심으로 예수님의 영에 대해서는 신성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벧전4:1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하셨습니다.

○ 원어 참조

신성 - (데오테스 2320) 데오테스는 데오스(2316: 신, 하나님)에서 유래했으며 '신성'을 의미합니다.

육체 - (4985, 소마티코스) 소마티코스는 형용사 소마티코스(4984: 몸의, 신체의)에서 유래했으며 '육체적으로, 신체적으로'를 의미합니다. 이 원어 해석도 인성구조 삼분설을 가지기 전, 이분설을 근거한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몸'으로 한계를 그었지만 실은 육체에는 마음도 포함이 됩니다.

<결론>

1. 교리사는 참조

초대교회 교리사에서 이분설 교리로 정립 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것을 오늘 삼분설 교리가 정립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성구조 이분설 교리에 머물고 만다면 현대교회 우리가 가진 삼분설 교리에 충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 깨달음을 역대 교리사를 참조도 하고 배우기도 해야 되지만 최종은 성경입니다.

2. 선지자의 사명

오늘날까지 교회사에 있어서 교리를 바로 세우려다가 고독, 고립, 고난을 받은 선지자들이 많았음을 우리들이 잘 압니다. 그 시대마다 그 시점의 정통 교리와 상대한 것이기 때문에 번연히 고독, 고립, 고난이 올 줄 알면서 말입니다. 또한 이 시대 보편적 교회의 정통 이분설 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분설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지난 교리사에 그대로 맡기고 나가면 평안하고 평탄할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보여 주시는데 다수에 맞추어 묵묵 한다면 이는 영감을 소멸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부득불 맡겨주신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함이 오늘날까지 교회역사에서 선지자가 받은 고난사 중에 한 부분이었습니다.

● 도성인신의 인성과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硏究 - 열 한 번째 글

<서문>

일차 원고이며 추후 보완할 것입니다. 그것은 靈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靈이든지 사람의 靈이든지 그 靈은 하나님의 영이거나 또 하나님의 속성의 영이므로 그 靈을 있는 그대로 다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靈은 하나님의 영과 그 하나님의 속성으로 된 영이기 때문에 그 무한 완전한 靈을 유한 된 우리 사람들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한 완전을 다 보아야 만이 다 파악할 수 있는데 우리들이 그렇지 못하고 다만 그 무한 완전 속에 들어 가 있기 때문에 그 속성만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데 그칠 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靈에 대한 부분이 되는 '삼위일체' 교리든지, '도성인신' 교리와 '신인양성일위' 교리든지 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우리 사람이 생령이 된 '인성구조' 교리는 '이렇다' 라고 딱 단정을 짓지 못하고 점차 그 교리가 자라가야 할 면의 성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이 글은 현재의 시점에서 깨달은 깨달음이지 내일이 되면 또 어떻게 깨달음이 더 진행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급한대로 이 글은 일차 원고이며 추후 반드시 그 어느 누구를 통해서나 어느 시대를 통해서 수정 보완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또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자라가야 할 부분 중에 한 부분이기도 하겠습니다.

<본문>

1.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흙으로 지은 그 사람이 생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만일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흙은 물질에 속한 것이므로 물질은 육의 부분이 되겠습니다. 육은 신령한 물질인 마음(혼)과 고기 덩어리가 몸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으니 일차적으로 지은 그 사람의 요소는 물질요소가 되는 육입니다. 마음과 몸으로 된 육을 일차적으로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차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산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그 사람은 생령(生靈산 영)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신만 있는 사령(死靈죽은 영)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령의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가 끊기면 그 사람은 죽은 영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신 때와 생기가 끊긴 때와 상관없이 사람이라는 이름은 일차적으로 가졌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생령의 사람이냐 아니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죽은 영의 사람이냐 하는 그 차이는 이차적으로 가지겠습니다.

그렇기에 중생 된 믿는 신자와 중생 되지 않는 불신자라도 다 같이 사람이라는 이름은 일차로 가졌습니다. 이래서 영이 죽은 불신자라고 해서 짐승이라 이름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영이 산 신자와 영이 죽은 불신자를 구분할 때는 영의 사람과 육체의 사람이라고 그 이름을 구별해서 부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기 이전의 사람의 상태는 육체의 사람이며, 생기를 불어넣으신 이후의 사람의 상태는 영의 사람이겠습니다.

또 영이 중생 된 신자가 영을 쫓아 살 때와 육신을 쫓아 살 때의 상태를 구분해서 그 이름을 붙인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새사람과 옛사람이겠습니다.

창2:7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흙으로 사람의 마음과 몸이 되는 육신을 지으시고 그 육신 곧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육신의 사람이 생령의 사람이 되었다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성경에는 '흙으로 육신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육신이 생령이 되었다' 하지 않으시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시고 이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하시므로 사람의 일차 상태의 범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산 영의 사람이 되어야 사람이고, 산 영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겠습니다. 이래서 생령(生靈산 영)의 사람이냐, 아니면 사령(死靈죽은 영)의 사람이냐로 구분 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영은 흙에 속한 것이 아니며 또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 속했고 전적 하나님의 속성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영은 범죄 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사람이 범죄 할 때는 그 사람이 영을 떠날 때이며 또한 범죄하면 영이 그 사람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를 행할 때도 사람이 의를 행한 것이고 범죄 할 때도 사람이 범죄를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의를 행할 때 육신이 의를 행했다고 하지 않고, 또 범죄 할 때도 육신이 범죄를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의를 행했고 그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지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의 사람이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며, 생기가 끊어져서 생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온전한 생령의 사람과 온전치 못한 육체의 사람으로 구분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셨지 '흙으로 육신을 지으시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지 '그 육신이 생령이 된지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으실 때 이미 '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육신이 생령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생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육신의 사람이라고 그 성격을 구분해서 명칭 해야 합니다.

인류시조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 하므로 사람이 산 영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죽은 영의 사람 곧 육체의 사람 곧 멸망의 사람이 될 때에 이 멸망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사람이 범죄한 그 범죄를 짊어지고 대속 하실 때에 육체의 사람이 다시 생령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2.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8:3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 '육신의 사람' 부분이지 '생령의 사람' 부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 사람의 육신(마음과 몸)에 대한 부분을 대속 하셨지, 우리 사람의 영에 대한 부분을 대속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범죄 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의 사람' 부분을 대속 하실 때에 우리 사람이 다시 '생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을 위해 대속 하신 것은 우리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이 되므로 생령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의 생령의 사람으로 이차 창조를 한 것입니다. 이래서 첫 사람 아담은 부정모혈로 우리를 나게 하였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피와 성령과 진리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전15:45-49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흙에 속한 자가 있고 하늘에 속한 자가 있는 것입니다. 흙에 속한 자를 하늘에 속한 자로 구원을 주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이래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은 생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다시는 육신의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위의 성구를 깊이 상고해보면 흙으로 사람을 지은 것과 그 사람이 생령의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사람이 범죄 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그 사람으로서 우리 사람을 십자가로 대속 하신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 사람의 본래와 또 우리 사람이 범죄 한 부분과 또 우리 사람을 대속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그 사람 된 부분의 인성과 신성이 일위가 되어서 완전한 대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 하셨습니다. 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의 사람이 되었다 하셨습니다.

사람은 생령의 사람이라야 정상적인 사람이며, 죽은 영의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을 의인이라 하며, 비정상적인 사람을 죄인이라 합니다. 그래서 의인이라 또 죄인이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국에 가고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생령의 사람이냐 하는 것과 죽은 영의 사람이냐 하는 것이 다를 뿐이지 신자나 불신자나 다 같이 흙으로 지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하나는 생령의 사람이고 하나는 육체의 사람입니다.

<연구>

(전3:19-21)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 註: 전3:19-21 말씀에서 '사람의 혼'이라 하지 않고 '인생의 혼'이라고 한 그 면을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11:5에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셨습니다. 이래서 '인생'이라는 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을 인생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말은 인생을 사는 그 사람 자체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전3:21에서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말씀하지 않고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전3:20에 사람이나 짐승이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하는 말씀과 연관을 시켜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영감의 갑절을 구하고 있습니다.

● 도성인신의 인성에 대한 '육신에 죄를 정하사' 硏究 - 열 두 번째의 글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1.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대속역사, 예수님의 영으로는 구속역사

1-1) 율법

'율법'은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을 지킨 그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인도하는 법이 율법입니다.

1-2) 육신

우리의 '육신'은 원죄와 본죄가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이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는 법칙의 요구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이 율법의 요구인데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으로서 우리가 지킬 계명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1-3) 그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예수님을 보내어 '그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우리를 위해 사죄의 대속, 칭의의 대속, 화친의 대속역사를 하셨습니다.

1-4) 그의 영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의 영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도록 구속역사를 하십니다.

'그의 영'은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으니, '그의 영'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으로서 곧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대속역사를 하셨고, 예수님의 영으로는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사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서 구속역사를 하십니다.

2.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2-1) 육신을 쫓는 자

육신은 마음과 몸이 육신입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또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가 육신을 쫓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들이 똘똘 뭉쳐진 것이 세상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 한 덩어리 된 큰 성 바벨론 바벨탑입니다.

2-2) 영을 좇는 자

영은 성령을 말하는데 곧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을 쫓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는 자가 영을 쫓는 자이며, 또 예수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죄 없는 자, 의로운 자, 하나님과 화친 된 자로 사는 자가 영을 쫓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롬8:1에 영을 쫓는 자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므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도성인신의 인성에 대한 [연구 및 질문] - 열 세 번째 글

1.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무슨 말씀이며 또 육신은 인성구조에서 무엇입니까?

2, 롬8:3-4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셨는데 '육신의 모양'은 무슨 말씀이며 또 '육신에 죄를 정하사'와 '그 영'은 무슨 말씀입니까?

3. 히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는 무슨 말씀이며 또 육체는 인간의 인성구조에서 무엇입니까?

4. 요일4:2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5. 벧전3:18-19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는 무슨 말씀입니까?

6. 요2:21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는 무슨 말씀입니까?

7. 골2:9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그 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데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는 무슨 말씀입니까?


8. 갈4:6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그 아들의 영'은 무슨 말씀입니까?

9. 롬8:9-11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은 무슨 말씀이며 또 '그의 영은' 무슨 말씀입니까?

10. 행16:7에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예수의 영'은 무슨 말씀입니까?

11. 고전1:30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와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는 무슨 말씀입니까?

12. 요8:23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는 무슨 말씀입니까?

13.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는 무슨 말씀입니까?



14. 요1:26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한 사람'은 무슨 말씀입니까?

15. 행10:42에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이 사람'은 무슨 말씀입니까?

16. 롬5:15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하셨습니다.

질문: 그러면 '한 사람'은 무슨 말씀입니까?

17. 딤전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무슨 말씀입니까?



18. 질문: 위의 1에서13의 성구에서는 '육신' '육체'로 말씀하셨고, 14에서 17의 성구에서는 '사람'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19. 질문: 예수님의 인성에서 우리 인간의 인성 같이 인성에 영이 있다면 예수님의 신성의 영과 인성의 영이 어떻게 신인양성일위로 역사 할 수 있는지 그 논리를 전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20. 질문: 예수님의 인성에서 우리 인간의 영과 같이 피조 된 인성의 영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인성의 영에 대한 성경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1. 질문: 예수의 영과 인간의 영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도성인신의 인성교리에 대한 [각론적 교리] - 열 네 번째 글

예수님은 신성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이십니다. 이 성경적 교리를 부인하면 이단적 교리가 됩니다. 그러한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일위가 되어야 우리를 대속 하실 수 있고 또 예수님의 인성이 사람이라야 우리 범죄한 사람을 대속 하실 수 있는 자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반석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를 잘 살펴보면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이시라는 것에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신인양성에 대해서 좀 더 세밀히 성경적으로 조명하려는 것뿐입니다.

초대교회사로부터 중세교회사 그리고 현대교회사에 까지 예수님의 신성은 참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참사람이라는 성경적 정통교리를 이어왔습니다. 깨달음과 그 깨달음대로 행함이 부족하고 미약한 김반석도 물론 성경적 정통교리 대로 예수님의 신성은 참 하나님이며, 예수님의 인성은 참 사람이신 것을 그대로 교리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사의 교리사에서 기독론에 대한 교리가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이시다 라는 성경적이며 또 그 총론적 교리가 지금까지 정통교회에서 그 정통교리를 계대 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김반석은 이 성경적이고도 그 총론적 교리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좀 더 세밀히 각론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하여 조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총론적 교리를 각론적으로 말입니다.

오늘까지 교리사에서 예수님의 신성은 참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참 사람이시라는 그 성경적 그 총론적 교리를 이제 좀 더 세밀히 성구를 근거하여 각론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김반석은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이시라는 교리가 성경적 정통교리라는 것에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실히 받습니다. 다만 이에 더하여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 된 대로 조금 더 성구를 세밀히 적용시켜서 발표한 것뿐입니다. 성경에 기록 된 그대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김반석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교리 발표에 대해서 판단을 하시려면 성구해석이 잘못 된 부분을 찾아서 지적해 주시면 언제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 수정하며 보완을 하겠습니다.

김반석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발표는 총론적으로는 정통교회가 인식하고 있는 교리와 꼭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이십니다. 그렇기에 김반석은 예수님의 신성이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예수님의 인성이 참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김반석이라는 목사가 예수님의 인성이 참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는 그런 오해 되게 하는 말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김반석의 도성인신의 인성에 대한 연구 ①에서 ⑬의 글을 바로 잘 이해하지 못하셨거나 아니면 발표한 글의 표현이 미숙해서 그러하지 ①에서 ⑬의 글을 성경을 근거해서 상고하고 연구하시면 예수님의 신성은 참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인성은 참 사람이시라는 것을 더욱 더 각론적으로 세밀히 해석한 것으로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초대교회사에서 예수님의 신성은 참 하나님, 예수님의 인성은 참 사람이라는 성경적 그 총론적 정통교리에 대하여 이제 현대교회사에서는 좀 더 수준 있게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좀 더 세밀히 각론을 붙이고 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도 좀 더 세밀히 각론을 붙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근거해서이겠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총론적 교리로는 정통교회에 속한 우리 교계와 김반석을 포함한 모두가 일치하는 것이니 그 총론을 두고서 이렇다 하더라 저렇다 하더라 하는 헛 논쟁이나 헛 시비나 헛 유포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반석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각론면을 두고 교리를 더 제시한 것이니 그 각론 교리에 들어가서 김반석의 해석이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로 그 판단의 시각관을 두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급한대로 그 각론적 교리를 발표한 것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판단하여 주시면 틀린 것은 수정하고 깨달은 깊이가 얕았다면 보완을 하겠습니다.

김반석은 예수님의 신성은 참 하나님, 예수님의 인성은 참사람이라는 예수님의 신인양성에 대한 총론적 교리에 대해서는 그 교리가 성경적 교리임을 명확히 받습니다. 다만 이 총론적 교리의 그 바탕 위에 각론적 교리를 연구 차원에서 발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 도성인신의 대속에 대한 [연구 및 질문] - <열 다섯 번째 글>

<서문>

1. 육체의 정의

성경에 '육체'라는 말이 고깃덩어리 몸을 육체라고 할 때도 있고, 몸과 함께 몸을 쫓는 마음과 합해서 육체라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창6:3, 엡2:3, 등을 참조.

2. 예수님의 대속 범위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1:22)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벧전4:1)

3. 신성이 육체로 충만히 거하심

골2:9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골2:9 말씀은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에 대한 교리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데 가장 참조하기 좋은 성구로 받으며, 이와 함께 예수님의 인성이 어떠하시며 또한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의 인성에 어떻게 일위적으로 역사 하셨나 하는 것을 참조하기에 가장 좋은 성구로 받습니다.  

<서론>

1.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질문: 이 말씀에서 '육체가 됨이라' 하는 '육체'는 인성구조에서 무엇입니까?

2.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질문: 이 말씀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는 무엇입니까?

3.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질문: 이 말씀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4.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질문: 이 말씀에서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하는 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본론>

1.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질문: 이 말씀에서 '육신에 죄를 정하사'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2.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질문: 이 말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3.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질문: 이 말씀에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4.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질문: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5.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질문: 이 말씀에서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하는 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6.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질문: 이 말씀에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7. (벧전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질문: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결론>

1. (고전15:45-47)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질문: 이 말씀에서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2. (갈4:4-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질문: 이 말씀에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3.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질문: 이 말씀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 도성인신과 상관된 [교리 정립관] 硏究 - <열여섯 번째 글>)


<서론>

◎ 數에 있어서

수에 있어서 1에서 10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1에서 3까지만 수라고 말할 때 그 주장이 맞지만 數論에 있어서 미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에서 3까지도 수이지만 또 4에서 10까지의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에서 3까지만 수라고 주장하는 자는 말하기를 1에서 3까지를 수라고 주장했더니 그것은 '미달이라' 한다면서 어째서 미달이 되느냐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1에서 3은 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수론에 있어서 미달이라 지적하면 이에 흥분되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여 1에서 3이 수라고 말하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1에서 3만이 수라고 여기고, 그 이상의 수가되는 4에서 10을 말할 때 그 수를 수로 여기지 않는다면 1에서 3만이 수라고 주장하는 그 주장은 미달을 넘어서 오류적 주장이 됩니다. 왜냐 하면 수에는 1에서 3도 있으나 그 위에 4에서 10까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4에서 10을 말하는 사람은 1에서 3이라는 그 수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를 수라고 그 수론을 같이 하지만, 1에서 3만을 수라고 여기는 것은 수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미달이거나 오류라 지적하는 것입니다.


◎ 바다에 있어서

10미터 바다 속의 세계를 보고 그것을 바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고 또 틀린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바다는 10미터 깊이의 바다 세계도 있지만, 더 깊은 100미터 바다 속의 세계도 있고, 또 1,000미터 바다 속의 세계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10미터 바다 속을 보고 그 세계만을 바다라고 할 때에는 그 지식에 대해서 미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00미터, 1,000미터 바다 속의 세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미터 바다 속의 세계를 본 사람은 그 10미터의 바다 속의 세계도 바다이기 때문에 '미달이다' 하는 말에 저항감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 하면 10미터 바다 속을 본 것은 바다를 본 것이 분명히 맞는데, 그 바다 본 것에 대해서 '미달이라' 했으니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일 것입니다. 자신이 본 것이 분명히 바다라는 세계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10미터 이상의 바다 속의 세계를 본 사람이 '미달이라'고 말하는 것은 10미터의 바다 세계가 바다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10미터 속의 바다 세계도 있지만 그 보다 더 깊고 깊은 바다 세계도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인 것입니다.


◎ 코끼리에 있어서

눈뜬 당달봉사가 코끼리를 만져보고 이게 코끼리구나 하고 자기가 만져본 부분만을 코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봉사가 만져본 부분은 코끼리 다리통 밖에 만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끼리 다리통을 말하면서 그것이 마치 코끼리 전부인양 주장한다면, 그 봉사에게 말하기를 그게 아니라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코끼리론에 미달이라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코끼리 다리통만 가지고 코끼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코끼리는 몸통도 있고, 또 머리통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당달봉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당달봉사라서 코끼리 전체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본 부분만 알아서 그런 것이라고 자인한다면 별 충돌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당달봉사가 자기가 안 그 지식에 자존심의 고집을 부려서 다리통 외에 그 이상의 것을 말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 하려들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는 논변 논쟁의 충돌이 있게 마련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달봉사의 수가 거의 다수라 할 때는 그들이 만져보고 안 다리통의 그 범위가 코끼리이지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코끼리론에 대한 이단이라고 몰아붙일 것입니다.  

이렇겠지만 실상은 당달봉사가 코끼리 다리통만 가지고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코끼리론에 있어서 그 지식은 미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코끼리 다리통도 그게 코끼리는 코끼리이나 그 다리통만 가지고 코끼리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미달이며 또 그 정도가 지나치면 오류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미달이라'는 말은 당달봉사가 말하는 그 다리통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는 분명히 맞는데 몸통도 머리통도 더 광범위하게 있다는 그 진리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초대교회사에서부터 현대교회사에 까지 예수님의 인성이 되는 육신은 본질상 우리 사람의 육신과 같다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이를 부인하는 보편 정통교회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육신이 죄만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육신과 그 육신이 본질상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그 즉시 기독론에 오류를 가진 이단교회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지 우리의 인성과 같다는 것은 정통교회의 가지는 기본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지 우리의 인성과 같다는 그 교리에 딱 한계를 지우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면 기독론에 있어서 미달이라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1에서 3만을 수라고 여기고 그 이상 4에서 10을 말할 때 그 말은 틀린 이단의 말이라고 한다면, 1에서 3만을 수라고 주장할 때는 그 말이 미달적이나, 4에서 10은 수가 아니라고 이단 취급할 때에는 1에서 3만이 수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부터는 그 주장은 미달과 함께 오류가 되어 버립니다.  

1에서 3만이 수라고 주장하는 것이 미달이며 또 더하여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1에서 3이 수라고 말하는 그 수론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1에서 3만이 수라고 말하는 그것이 미달이며 오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론 대해서 초대교회사로부터 현대교회사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정통교회가 이제까지 정립한 교리는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 정도 범위의 교리를 가지고 더 이상이 없는 기독론이라고 딱 못을 박아 버린다면 그 교리는 미달이며 오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 딤전3:16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는 현재 정통 보편적 교회가 깨닫고 있는 현재 정도보다는 훨씬 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의 교리가 무한히 더 내포되어 있는 기독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되는 육신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육신과 같은 육신이라는 것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죄만 없을 뿐 우리와 같은 육신은 육신이나 우리의 육신은 신인일행적이고, 예수님의 육신은 신인일위적인 육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런 면 등등으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를 좀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현재까지의 기독론, 거기까지 만을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이고, 더 깊은 교리를 발표할 때 그 기독론은 이단적이라고 단정한다면, 수에 있어서 1에서 3만이 수라, 또 바다 속 10미터 세계만이 바다라, 또 코끼리 다리통만이 코끼리라 하는 주장과 같은 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딤전3:16에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하시므로, 우리가 현재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론, 그 이상의 큰 경건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또 히5;11에'멜기세덱에 관하여도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달봉사 같은 우리에게 멜기세덱에 대해서 본대로 다 말하면 다 이해하고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예수님 곧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신 여기에,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단순하게 '죄만 없으실 뿐 우리의 육신과 같다'라고만 간단히 말하는 이 정도에 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만 말하는 것은 기독론의 초보적이며 그래서 또한 신학자와 목회자가 알아야 할 기독론에 있어서는 미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론에 있어서 현재적 보다 더 이상이 되는 깊이의 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편 정통교회가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님의 육신은 죄만 없으실 뿐 우리 사람의 육신과 같다는 교리에 대해서 성경적 교리로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거나 이를 배척할 자 없습니다. 보편 정통교회의 초신자라 할지라도 이 기독론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고 또 그대로 인정하는 교리입니다. 그래야 대속론에 있어서 상치가 되지 않고 또 그래야만 우리가 실상의 대속이 입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데 예수님의 육신이 죄만 없으실 뿐 우리의 육신과 같다고 말할 때, 그 정도로만 가지고도 우리가 개적으로 이룰 구원에 있어서는 큰 부족이 없습니다 또 교리적으로 이해하는데도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을 다루는 신학자와 또 조직신학을 연구하는 목회자라면 그 수준의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육신과 본질상 꼭 같지만 그 이상이 되는 구속 역사상에 있어서는 어찌되느냐 하는 면을 상고해 보자는 것입니다.

마치 1에서 3이 수이고, 10미터 바다 속도 바다이고, 코끼리 다리통도 코끼리이나, 우리가 현재 논하려는 것은 그 이상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성경에서 상고하며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인성의 육신이 우리 사람의 육신과 죄만 없을 뿐 본질상 같다고 할 때에 육신의 본질은 우리 육신의 본질과 같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조금도 없고, 다만 그 본질상 같다는 여기에서 하나 혼동을 가지는 있는 것은, 그 역사상에 있어서도 우리 육신의 인성과 같다고 여기는 점입니다.


<결론>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하나 질문을 가져보는 것은,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지 않고, 우리 사람 중에 원죄와 본죄가 없는 사람이 있어서 신성이 그 사람의 육신을 입었다고 가정해 볼 때, 과연 그 사람의 유한 된 육신의 성질로서 신성 하나님의 무한 완전과 일위가 되어서 우주적 구속역사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죄만 없을 뿐 우리의 육신과 꼭 같은데, 무한 완전의 신성이 유한 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니, 그 육신이 무한 완전의 신성과 일위가 되어지는 무한 완전성의 육신으로 변해졌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인성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나시므로, 그 육신적으로는 우리의 육신과 같으나, 그 역사상 있어서는 무한 완전의 신성과 일위적으로 역사 할 수 있는 무한 완전성의 육신인지?


<성구>

마16:14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16:15에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6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롬8:3에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빌2:7-8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골2:9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참고>

1. ◎ (눅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하신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려는 말씀인지를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2. ◎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의 신성만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 곧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성인신 하신 신인양성일위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3. ◎ (막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사9:6에는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셨고, 또 막13:32에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자'가 또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고 하셨으니,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신 말씀을 적용시켜 볼 수 있겠습니다.

막13:32 말씀을 단편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왔고(고전1:30), 또 우리는 아래서 났고 예수님은 위에서 났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8:23)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막13:32 말씀은 예수님의 육신이 우리 인간의 육신과 같아서 지식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아들에게로 나오는 그 근원적 순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깨달아 봅니다.  


■ 예수님의 '人性' 교리에 대한 그 확정 - <열일곱 번째 글>)

(고전15:45-49)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고전15:45은 사람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에서 그 영에 대한 말씀

1. 고전15:45에「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하셨고,「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인류 조상 아담을 말씀하고, 마지막 아담은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2. 이래서 첫 사람 아담의 영은 산 영 곧 생령(창2:7)이 되었다 하셨고, 마지막 아담 곧 둘째 사람 곧 예수 인성의 영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하셨습니다. 그 살려주는 영에 대해서 롬8:11에 말씀하시기를「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셨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라 함은 곧 하나님의 영을 말씀하고, 하나님의 영은 곧 신성이시니, 예수님의 인성의 영은 신성 곧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골2:9에는「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육체에는 영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3. 첫 사람 아담은 우리 인간의 인성을 말씀하고,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의 인성을 말씀합니다. 그 인성의 영에서 첫 사람 아담의 영은 산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인성에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신성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는 우리 사람과 같은 인성의 영은 없습니다.


● 고전15:46-47은 사람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에서 그 육에 대한 말씀

4. 고전 15:46에「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육 있는 자요, 마지막 아담은 신령한 자라 하셨습니다.

5. 또 고전15:47에「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지음 받아 났고, 둘째 사람 예수의 인성은 성령으로 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기에 우리 사람의 인성과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나 근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인성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인성이고,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를 대속 하는 인성입니다.

우리의 인성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인성이기에 신인일행(神人一行)이라는 그 인성의 실력이고,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를 대속하는 인성이므로 신인일위(神人一位)라는 그 인성의 실력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은 다 같은 인성이나 그 실력은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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