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

 

20150303() 15:24:27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다음은 본인이 지난 223일에 호주에서 모인 4차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 총회 시 이단연구가들 앞에서 한 강의다. 한국교계에는 이단 연구가들을 공격하여 먹고 사는 소위 하이에나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이 글을 이용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할 빌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염려가 적지 않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글을 밝히는 것은 이 강의는 나를 반성하는 의미의 강의이며, 이단 연구가들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며,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교계의 하이에나와 한국교회와 이단연구가들 몸에 붙은 기생충이 누구인지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3회로 나누어서 게재하는 바이다.

  선지자선교회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 (1)

네 종류의 이단 연구가들과 자기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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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

 

본인은 요즘 내가 이단연구가로 자격이 있는가?’ ‘나는 몇 점짜리 이단연구가일까?’ ‘내가 그동안 했던 적지 않은 이단 연구 중에 잘못된 연구나 부족한 연구는 혹 없을까?’를 자주 생각한다.

굽고 부패한 법관의 반성이 아니라, 바르고 정직한 한 법관의 반성이다. 자신이 30-40대에 한 판결과 50-60대에 하는 판결이 다르다는 것이며, 나이가 들수록 판결이 어렵고 두렵다는 것이다. 특히 젊어서 한 판결 중에 후회스런 판결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직한 법관의 고민이라면 이단 연구가는 그보다 더 깊은 반성과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단 판정은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무당 사람 잡듯, 도끼 들고 소 잡는 백정 같은 이단 연구를 하면 안 될 것이다. 중세의 마녀식 사냥을 하듯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이단 연구가는 이단 못지않게 위험하다.

 

교계에는 이단연구가들의 몸에 붙은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악한 자들이 적지 않다. 특히 언론인 중에 그런 자들이 많다. 이들이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본인의 본 강의를 이용하여 또 다시 이단 연구가들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그 기생충이 누구인지 지켜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단연구가들 중에 본인의 강의가 심히 아픈 분이 있을 것을 알지만, 이것은 나 자신을 비판하는 의미의 강의라는 점에서 이해하고 인내로 들어주시기 바란다.

 

네 종류의 이단연구가

 

이단연구를 4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신학적 이단연구, 기자적 이단연구, 이단 전문가들의 연구, 목회자적 이단연구이다. 각각 그 장단점이 다르다고 본다. 하나씩 분석해보자.

 

(1) 신학자적 이단연구

 

신학자들이 이단 연구를 하면 교리적 기준 설정을 가장 잘 하고, 권위가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죽은 이단 잡는 데는 용기가 있어도 산 이단에 대하여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동안 신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단 연구가 그리 많지 못하다는 점이 이것을 증명한다. 첫째는 몰라서 그렇다고 보고, 둘째는 용기가 없어서 그렇다고 본다. 죽은 이단들은 아무리 비판을 해도 협박이나 고소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이단들은 협박하고 고소하고 온갖 짓을 다 하기 때문이다.

 

S 대학의 김 모 교수는 자신은 이단 연구를 하나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특정 이단을 옹호하기 위하여, 이단 연구가들의 연구를 폄하하고 이단 연구는 신학자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그렇게 말한 그 분은 정작 이단연구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 중에 정직한 연구가들이 많다.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교제하면서 이단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2) 기자적 이단 연구

 

기자도 교리 중심으로 연구하는 경우와 주로 윤리 중심으로 하는 연구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두 가지를 동시에 다 한다고 보지만, 언론의 속성상 윤리적 비리를 밝히는데 관심을 가진 연구를 기자적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 이단 문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언론들의 공로는 적지 않다. 이들이 결정적 동기 부여와 초등 자료를 제공한다. 어떤 범죄에도 초등 수사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이들에 의하여 이단 연구의 동기가 부여됐고, 또 결정적 자료들이 제시되었음을 한국교회는 인정하고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이 기자적 연구는 사이비 이단들의 사건과 비리들을 밝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호응이 좋고 영향도 크다.

 

그러나 대신 법정 소송도 많고 생명의 위험이 크다. 이미 한 이단연구가의 죽음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 기자적 연구는 대신 초기라는 점에서 실수할 가능성이 크다. 시간적으로 충분한 근거와 자료를 수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억할 것은 이 기자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해도 윤리적 연구는 이단연구의 본질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3) 이단 전문 연구가들의 연구

 

이는 최근의 현상이다. 주로 목회를 하지 않고, 해도 목회보다 이단 연구에 전념하시는 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최근 이단 연구와 피해자 상담만 전적으로 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났고 이는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분들에게는 정보가 많은 장점이 있고 전념하기 때문에 그 성과도 크다. 특히 그동안 이단에 빠진 자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을 적지 않게 개종시키고 구출한 성과는 아무리 훌륭하다고 찬사를 보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단점 또한 적지 않다. 우선 경제적으로 어려워 유혹을 많을 가능성이 크다. 정통교회는 이단의 피해를 많이 보고 있으면서도 이단 연구의 선교적 의의를 크게 깨닫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고 있다.

 

원래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구린 사람이 돈을 더 주려고 하는 것처럼, 이단이나 사이비들은 청렴한 이단연구가들이라도 금품으로 미혹하려고 하는데, 돈을 받으려는 이단 연구가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간다는 정치인보다 이단 연구가가 더 그렇게 보인다. 3일 굶고 담 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돈 자체를 이기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유혹이 많고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커서 늘 염려가 된다.

 

그리고 이분들은 자신의 연구의 업적을 드러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강도를 계속해서 높여가는 극단적 이단 연구가가 될 가능성도 크다. 특히 교회 밖에 존재하는 이단보다 이단과 정통의 경계에 있거나 교회 안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대하여 그렇다. 잘못하면 이단을 죽이려다 영혼까지 죽게 하여 교회 자체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

 

(4) 목회자적 연구

 

목회자로서 이단을 연구하는 자와 목회적 자세로 이단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목회자로서 목회와 이단연구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깊은 연구를 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자료를 충분히 수집할 시간도 없고, 충분히 연구할 시간도 없다. 목회란 크든 적든 전인적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란 텍스트(Text)보다 콘텍스트(Context)에 치우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도 이단적 사상을 가지기 쉽고, 따라서 목회자 이단연구가는 이단에 대하여 지나치게 관대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교계에 소위 거물 목회자들 중에 이단 교회에 가서 복음 전하러 갔다’ ‘그 교인들의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등의 구실로 설교나 강연을 하여 결국 이단을 옹호하는 결과를 가져온 일이 많았던 점은 동일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적 연구에 장점이 가장 많다고 본다. 본인은 가장 바람직한 이단 연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단 규정은 신학적으로 이단이 되는 경우보다 목회적으로 교회를 어지럽힐 때 더 된다.

 

한국교회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교인을 미혹하는 것이 이단이다라고 순진한 정의를 하신 경우를 보았다. 교리적으로만 한다면 길선주 목사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점은 당시의 신학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인의 미혹과는 관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감리교는 거의 이단 연구를 하지 않았지만 전도총회(다락방)의 류광수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은 교인들이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이단 연구나 규정은 목회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목회자의 이단 연구가 가장 바림직한 이유는 목회자는 교회와 교인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음 위에서 이단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단 전문가들도 비록 목회는 하지 않아도 목회자적 심정은 가져야 한다고 본다.

신학자도 목회자적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은 같다고 본다. 훌륭한 신학자도 길러내야 하지만 훌륭한 목회자를 많이 길러내는 신학교가 좋은 신학교라고 본다. 물론 신학이 목회의 시녀노릇을 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사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신학은 그 자체도 멀지 않아 죽고 만다. 하물며 이단 연구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최대의 변증가요,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목회자였다. 목회자로서 일어나는 이단사설들에 대하여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변증하였고, 그래서 위대한 변증가가 되었다. 이는 칼빈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단 연구가도 가능하면 목회를 하면서 이단을 연구하면 가장 최상이겠지만, 그렇지 못하여도 목회자적 심정으로 이단을 연구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이다.

 

요즘 목사들이 쏟아져 목회할 기회가 적고, 또 목회를 해도 잘 안 되니까, 이단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본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바라고 이루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위 도피성 이단 연구는 도피성 유학생과 도피성 선교사처럼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이분들은 늘 비판 일변도의 자신의 행위에 제동장치를 걸어줄 길이 없다. 마치 남을 정죄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정죄 일변도의 이단 연구를 할 위험이 크다.

 

목회자적 이단 연구는 죽이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살리는데 목적을 두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간첩이 분명해도 양민 속에 숨은 간첩을 향하여 총질을 할 수 없는 것은 주변 양민 때문이다. 아무리 말기의 암이라도 암 자체를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조건 방사능의 강도를 높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죽이려는 그 암보다 먼저 몸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단연구란 이름으로 교회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극단적인 이단 연구가들이 교회 자체를 죽인다는 염려가 적지 않다. 이단연구가들은 이 말을 새겨서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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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 (2)

어떻게 이단연구를 해야 하나?

바람직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1.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이 말은 자기중심적 이단연구를 하지 말라는 의미다. 자기중심적인 이단 연구를 하는 자도 겉으로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매국노도 자기를 애국자라고 하는 것과 같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발등의 향유를 붓는 여인을 향하여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의를 가장한 것과 같다.

 

그러나 자기 성취적 이단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한 번 이단 연구가가 잘못된 기준이나 잘못된 이해에 의하여 이단을 연구하게 되면 그 후부터 자신의 비판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끝까지 양보 없는 이단 연구를 한다. 이들의 특징은 이단의 칼을 적군이든 아군이든 상관하지 않고 들이 댄다는 것이다. 아무나 공격하고 아무나 정죄한다. 그것은 므리바 물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입으로 범죄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과 성경 말씀의 이름으로 이단을 연구하고 정죄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말씀은 이용될 뿐이며 자기 사상, 자기 의, 자기 영광, 자기 기분을 기준으로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이단연구를 하는지 아닌지 늘 반성하고 자기와 싸워야 할 것이다. 자기반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타에 대한 비판보다 앞서야 한다. 남에게 1천을 요구하려면 나는 1001이라도 살려고 해야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는다. 자기 논리, 자기 신앙, 자기 이성, 자기 경험 중심의 이단 연구를 하지 않도록 바울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2. 신학적 학문적 논리적 오류가 없는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신학적, 학문적, 논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의 연구는 신뢰를 얻지 못하고, 또 법정 송사에서 패하게 될 위험이 크다. 평신도 연구가의 경우, 비록 신학을 하지 않았어도 오랜 연구를 하고 그 업적이 있다면 전문가로 보아야 한다.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어떤 분이,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에 10년 넘게 일했고 그 성취가 있다면 그는 그 분야에 전문가로 보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라고 본다. 본인은 이단연구가로 평신도 연구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고, 목사로 부끄러운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학을 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실수를 할 위험이 크다. 한 때 이단 연구를 하던, 한 물리학자가 있었는데 이만저만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신학의 본질적 부분이 아닌데도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정통신학자들을 이단으로 무차별하게 공격하였다. 한 비전문가가 수술을 많이 했는데 예측할 수 없는 마취 쇼크가 일어나자 간단하게 해결할 처방을 몰라 사람을 죽였다고 들었다. 이런 위험이 평신도 신학자에게 있다.

 

특히 이단연구가의 논리적 준비는 아주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큰 실수는 묻어질 수 있어도 이단 연구가들의 작은 실수는 크게 드러난다. 이단연구가들 중에 개인적인 글과 공적 보고서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공적 연구는 관료적이면서도 불필요한 반복을 줄이고 간결하고 명료해야 한다. 교단 보고서에조차 너무 장황하고 길고, 개인의 논문을 쓰듯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평신도 신학자들은 더 높이 날아갈 수 있도록 자신과 더 싸워야 하고, 더 겸손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신학의 개연성과 필연성, 그리고 논리적 개연성과 필연성을 구별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신학을 공부하고 이단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단연구가는 설교 경험, 전도 경험, 영적 경험, 목회 경험, 그리고 깊은 인생 연륜의 경험이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

 

3. 사랑의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죽이는 연구보다 살리는 연구를 해야 한다. 사랑은 기독교의 기초다. 사랑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며, 공의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다. 이단연구의 기능상 약점을 찾고 숨겨진 이단성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동정심 없는 이단 연구를 하기 쉽다.

 

10번 바른 이단 연구를 하고 1번 실수를 한다고 해도 그 한 번의 실수가 10번의 바른 이단 연구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이단자들의 이단 사상 못지않게 이단 연구가의 오류, 아집, 편견, 교만도 문제다.

학문과 법에도 동정심은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정 없는 이단 연구는 죽이는 이단연구다. 어쩌다 한 말 한 마디를 가지고 누구를 이단으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이단 연구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문제를 가지고 이단을 규정할 때는 더 깊이 고민하고 가능하면 삼가해야 한다. 삼위일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삼위일체로 하면 삼위일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터툴리안도 양태론자이다. 그가 사용한 예화들이 그렇고, 위격(hypostasis)이란 말을 본질(substantia)로 번역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동방신학과 달리 서방 신학에서 양태론적 삼위일체 사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심지어 동방신학자들은 칼빈마저 양태론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삼신론자라고 공격하기도 한다는 점을 볼 때, 삼위일체로 이단을 쉽게 정죄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본인이 신사도와 관련된 모 목사의 경우 그가 잘못을 했다고 보지만 그를 보호했다. 그것은 굽어서도 아니고, 내 편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하고, 영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가르쳐주고 덮어주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세이연 보고서에서 한국교회에 신사도 운동을 끌어들인 조 모 목사와 하 모 목사의 경우 그 이름을 제하자고 하였던 것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선교사로 최 모 씨의 경우, 본인이 그에 대하여 얼굴을 돌린 것은 그의 이단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거짓과 선교적 해악 때문이었다. 이처럼 교리나 논리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제사장을 그토록 저주하셨던 예수님의 자세라고 본다.

 

4. 겸손한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잘못된 주장을 하고 비판을 해도 어디선가에 지지자가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자기 성취도가 높으면 겸손을 잃게 된다. 자신이 곧 기준이 되고, 자기가 판단자가 되고 만다. 그것은 교만이다. 교만의 극치다.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자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교만이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방 나라들의 교만이 심판의 주된 원인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만은 더 싫어하시고 더 저주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이단연구는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하는데, 그 교리적 확신 뒤에 숨은 교만과 외식 즉 거짓이 없어야 한다. 교리주의는 이단보다 더 악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 제하고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 적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창녀보다 세리보다 더 저주하셨다. 인류를 구속하는 마지막 고난 주간 1주일에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을 저주하는데 총력하셨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을 잃은 이단 연구는 또 다른 율법주의자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단 연구가는 하나님이 아니다. 은혜를 입은 죄인이다.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 진리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이단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한국교회 앞에서도, 영혼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5. 인내심 있는 이단연구를 해야 한다.

 

이 말은 인내란 이름으로 불의를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 불의한 자라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무조건 비판하고 무조건 정죄하는 것만이 하나님 사람의 자세는 결코 아니다. 밝혔다면 그 후로는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로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다.

 

과거 본인이 조 아무개라는 분과 이단 논쟁을 하였는데 본인은 지금도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사과문을 보내와 일단락 된 후에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켜보았다. 그것은 그가 두려워서도 아니고 굽어서도 아니며 회유를 당한 것은 더욱 아니다.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 다윗이 남긴 가장 위대한 말인,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은 이단연구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성도에게 누구나 모질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인내는 믿음의 속성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내가 옳아도 참고 기다려야 하며 내가 틀렸을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내심이 없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영적 문제다. 성격이 급하다고 하지 않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이단들과 특히 이단 옹호자들에 대하여 참는다. 수백 번의 공격을 받았어도 거의 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의 논리적 윤리적 허점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모순 자체다. 그래도 참는다.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인은 이단 연구가들의 실수에 대하여도 그동안 참았다. 이단 연구가들의 신학적 논리적 심지어 윤리적 약점을 발견하여도 참았다. 그렇다면 이단에 대하여도 특히 교회 안에서 이단성을 가진 자에 대하여 더욱 참아야 할 것이다.

 

6. 완전히 드러난 이단, 교회 밖의 이단과 교회 안에 이단성을 가진 자는 어느 정도로 구별하여 대처해야 한다.

 

이미 충분히 드러난 이단들이 있다. 예컨대 통일교 이단, 신천지 이단, 정명석 이단, 하나님의 교회 이단(안상홍, 장길자), 구원파 이단(권신찬, 유병언, 박옥수, 이요한) 그리고 안식교 이단, 박윤식 이단 등이 그렇다. 그러나 정통교회 안에 있으면서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단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 비판의 자세나 수위나 방법이 좀 달라야 한다고 본다. 그들에 대하여 이단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작 비판할 때는 극악한 이단을 대하듯 비판하는 것은 자기 성취를 위하여 이단을 연구하는 분이란 증거다.

 

7. 영적 선과 정치적 선이 대치될 때, 정치적 선도 무시하지 않으나 궁극적으로 영적 선을 구해야 한다.

 

지구상에 지금까지 정치성이 배제된 이단 연구는 없었다. 항상 이단연구도 정치적 배경 속에서 생기고 또 연구되고 규정된다. 2-3명만 모여도 정치는 자연히 생기고 생겨야 한다. 그런데 이 정치가 이단연구를 어렵게도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또 피할 길도 없다. 그래서 선한 의미에서 정치를 무시하면 안 되며, 또 정치적으로 이단을 연구해서도 안 된다. 정치를 가까이 하면 정치의 오물이 묻고, 멀리하면 정치의 피해자가 된다. 개인 연구가들은 비교적 정치와 무관한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마저 정죄한다. 이 또한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개인 연구가는 공적 연구보다 힘이 없으며, 대신 자기 약점을 걸러줄 기구가 없다는 점을 모르는 무지다. 어떤 때는 개인 연구가 공적 연구보다 더 위험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치적 선과 영적 선이 대치될 때는 영적 선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랬다. 칼빈은 진리에도 충실했지만 탁월한 정치인이었으며, 탁월한 정치인이었지만 또한 진리의 사람이었다. 루터는 프레드릭이 자신을 도울 것을 계산하고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루터를 생전에 프레드릭을 만난 일이 없다고 한다. 그가 단지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프레드릭이란 사람을 붙여주셨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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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3)

 

바람직하지 못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1. 정직하지 않은 이단 연구가가 사라져야 한다.

 

주관적인 참을 진실이라고 하고, 객관적인 참을 진리라고 한다. 우리는 진리를 향하여 가는 자들로 진실할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않은 자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개의 잣대를 쓰거나, 두 개의 저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고무줄 자를 써서는 안 된다. 고무줄 자로 하면, 로마의 한 신처럼, 누구나 짧다고 빼죽이고 길다고 잘라죽일 수 있게 된다.

 

2. 부도덕한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성도로서도 여자 문제, 돈 문제에 깨끗해야 한다. 하물며 목회자로, 더욱이 남을 비판하는 이단연구가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비난 받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혹 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하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것처럼 모르고 헌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헌금한 자에게서 이단성이 발견되거나, 또 순수한 헌금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지면 그를 공적으로 밝히고, 가차 없이 돈을 돌려줘야 한다.

 

이단 연구가로서 심지어 한 사람이 검사의 기능과 변호사의 기능을 동시에 하여, 검사로 구형을 높이고 변호사로 수임료를 높이는 식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빌어먹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도적질해서 먹는 것은 죄다. 성공하지 못할 두려움보다 성공한 후에 찾아올 교만과 타락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밖에 있는 천만인의 원수보다 내 속에 있는 적은 한 가지 죄의 가능성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3. 극단적 이단 연구도 아주 위험하다.

 

토마스 칼라일이 마틴 루터는 어머니 마음을 가진 개혁자였다.”고 했다는 점을 듣고, 본인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자의 자세라고 보기 때문이다. 뮨쳐와 같은 과격한 개혁자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단과 손을 잡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와 같은 자들이 많다고 안다. 또한 반대로 들이 댈 곳과 들이 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별하지 못하고 칼을 들이대는 포악한 이단 연구가도 있다. 사울의 목을 치지 않는 다윗의 그 사랑과 인내는 이단 연구가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늘 자신의 죄와 부족을 찾아야 하고,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 없는 이단 비판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단자만 죄인이 아니라 이단 연구가도 죄인이다.

 

날카로운 송곳이나 칼 하나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찌르는 재미에 취한 아이처럼 이단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어렸을 때, 어쩌다 가진 면도칼 하나를 가지고 이것도 베어보고 저것도 베어보고 재미가 나서, 그 칼로 집 옆에 큰 나무 껍질을 돌아가며 다 벗겨 버린 일이 있다. 결국 그 나무는 죽었고, 나도 부모님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사악한 이단을 대처한다는 미명 하에,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편견, 자기 욕심, 자기 교만 등을 숨겨 합리화하려고 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분들은 부정적 도구로 사용되는 분들로서 긍정적으로 보면 쓸모없는 무용한 사람들이다. 이단을 공격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그 많은 약점들을 그곳에 숨기는 그 악은 이단자의 악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없다.

 

한 평신도 이단연구가는 전천년설도 이단이고, 무천년설도 이단이라고 하고, 어떤 분처럼 방언 자체를 다 마귀의 사역으로 공격하고, 반대로 방언을 못하면 구원도 받지 못한 것처럼 하는 것은 다 극단론이다. 이는 모든 신비적 현상 자체를 모두 사탄 마귀로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단연구가는 누구보다 부드러워야 한다. 속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이단 연구는 위험하다. 이단이나 사이비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해도 가짜로 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가지는 것은 내 말이 맞는 것이 증명되기 위하여 회개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마약 환자는 갈수록 강하게 약을 먹어야 하듯, 갈수록 더 강하고 더 동정심 없는 이단 정죄에 익숙해져가는 이단 연구를 삼가야 한다. 포르테보다 피아니시모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진리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며, 신의로 진리를 그르치지도 않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리란 이름으로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쉽고, 자유자들은 신의를 앞세워 진리를 그르치기 쉽다. 물론 이 둘 중에 진리가 앞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믿음도 신의이다. 이단 연구는 보수주의자들이 한다는 점에서 이단연구가들이 이단연구가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개는 주인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논리라도 쉽게 배신한다. 이단연구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아무나 쉽게 비판하고 아무나 쉽게 정죄하기 익숙해져 있는 이단 연구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4. 소영웅주의적인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오차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영웅심이 있다. 욕심과 사명이, 애국과 정권욕이 함께 꼬여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오차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강단에서 망나니 칼춤 추듯 행동을 하는 자도 있고, 이단연구란 이름으로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은 이들을 막가파 이단연구가라고 부르겠다.

 

누구보다 더 고상하고, 누구보다 더 인격적이고, 누구보다 품위 있는 사람이 이단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인격과 학문성과 영성을 요구하는 행위가 이단연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단 연구는 일반 목회자의 수준과 신학적 수준을 넘어서는 최상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서 이단연구나 하고, 인격적 결함과 정서적 결함을 가진 자가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대법관을 하는 것과 같다.

 

결론 : 이단 연구자들의 하늘 상급이 클 것을 믿는다.

 

목회의 고통은 목회자만 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목회다. 그러나 이단 연구의 어려움은 그보다 더 하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서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다. 단 정직한 이단 연구에 한하여 그렇다. 십자가를 아는 자가 적고, 십자가를 지는 자는 그보다 더 적고, 십자가를 지고 기뻐하는 자는 그보다 더 적다. 이단 연구의 길은 십자가 중에 십자가이다. 그 고통과 어려움을 이단이나 정통교회에 화풀이를 하듯 하지 말고, 그 고난과 고통을 기뻐하는 이단 연구가가 되기 바란다.

 

본인은 이단 문제를 거울로 삼아서 볼 때 한국교회가 가장 잘 보인다고 자부한다. 그런 점에서 내 죄가 교회의 죄가 되었고, 교회의 죄가 민족의 죄가 된 것 같아 눈물로 회개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아파서 견딜 수 없다. 이제 눈물도 말라간다.

 

솔로몬 앞에 두 여자가 있었다. 하나는 가짜 어머니요, 하나는 진짜 어머니다. 진짜 어머니는 내 아들인데 아니라며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였고, 가짜 어머니는 찢어서 갖자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앞에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가? 아들을 살리려고 자기 아들을 포기하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일까? 한국교회와 이 민족 앞에 진짜 어머니를 찾기 어려운 것이 교회와 민족의 위기요 비극이다. 이단연구가들은 교회를 위하여 내 이익은 물론 내 사상, 내 교파, 내 자존심까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진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존귀한 이단 연구가가 되기를 눈물로 호소하며 강의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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