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마르틴 (Luther, Martin : 1483 - 1546)

  선지자선교회

:개혁주의 인명사전/ 정성구/ 총신대학교출판부

 

독일의 저명한 종교 개혁자인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으며, 그 이듬해에 만스펠트(Mansfeld)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소작농 출신이었으나, 만스펠트로 이주한 이후 광업에 종사하다 동제련소를 매입할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아울러 그의 부모는 경건한 로마 카톨릭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어릴 때부터 로마 카톨릭의 엄격한 규율과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만스펠트의 라틴어 학교를 다녔으며, 곧이어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여 공동 생활 형제단” (The Bretren of the Common Life )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그후 1501년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Erfurt University)에 입학하여 스콜라 사상, 논리학, 형이상학, 수사학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이듬해에 그는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505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졸업 후 루터는 당시 출세가 보장된 가장 촉망받는 직업인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여 곧 그는 법률가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하나는 결투 중에 죽었든지 아니면 벼락을 맞고 죽었든 지간에 그의 친구가 사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그는 성 안네여, 나를 도와 주소서! 그러면 사제가 되겠나이다!”라는 서원을 하였다. 결국 루터는 그 서원에 따라 1505년에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두려움에 가득찬 그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 그러나 고행에 힘쓰면 힘쓸수록 건강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고통만 더해갈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죄는 더욱 그를 강하게 괴롭혔다. 일어나는 의구심에 대한 답을 발견하려고 몸부림쳤으나, 어떠한 해답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터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원장 대리이자 신비주의자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다. 폰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성경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권면하였다. 곧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루터는 사제로 임명받았으며, 곧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 대학에는 옥캄의 윌리엄(Willian of Ockham)새로운 길”(via moderna)을 추종하는 유명론자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익돗에서 루터는 유명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유명론을 통하여 중세의 사변적이고 이성적인 신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그가 어거스틴(Augustine)의 신학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유명론의 신학을 극복하게 되었다.

 

한편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던 중 1509년에 성경 학사 학위 (Baccalaureus Biblius)를 취득하였으며, 곧이어 명제집 정통자 학위(Sententiarius)를 획득하기 위하여 에르푸르트 대학교로 항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중세의 표준적인 교리의 개요인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명제집(Sentences)에 대한 주석을 공부함으로써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후 신학 박사가 되라는 폰 슈타우피츠의 권면을 받아들여 박사 학위 과정에 지원하였으며, 드디어 1512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공부를 마친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초빙 받았다. 그 이듬해부터는 2년 동안 시편 강좌를 실시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관심은 오로지 로마서 117절의 말씀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의 의와 복음은 서로 관련성이 없었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 의를 기준으로 죄인을 심판하신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의란 단지 심판을 의미할 뿐 전혀 복음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껏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기도나 금식 혹은 선행 등에 주력하였으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절망감과 아울러 하나님 앞에서 늘 죄인이라는 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그러한 절망감은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발전되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더 그 뜻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바울을 깊이 연구하였다.

 

드디어 루터는 1515년경에 패러다임의 전환과도 같은 돌파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 그는 하나님의 의란 복음 안에 계시된 의로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하여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진리는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안겨다 주었다. 이후로 루터는 계속하여 1515년부터 1516년까지 로마서를, 1516년부터 1517년까지는 갈라디아서를, 1517년부터 1518년까지는 히브리서를, 그리고 1518부터 1519년까지는 다시 시편을 각각 강의하였다. 이러한 성경 연구와 강의를 통하여 루터의 신학은 더 풍성해지고 발전되어 갔다. 훗날 루터는 이 때를 회상하며 이 가르치는 과정에서, 교황제도는 나로부터 미끄러져 나갔다고 말했다.

 

한편 루터는 15171031일에 면죄부를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면죄부에 대한 논란을 유발시켰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면죄부를 구입하게 되면, 교황의 권위에 의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심지어 면죄부로 인하여 연옥에 있는 자들도 죄의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가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전혀 성경에도 찾아볼 수 없는 터무니없는 견해였다. 도미니코 수도사이자 면죄부 판매 담당자인 요한 터첼 (Johann Tetzel)이 비텐베르크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더 이상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라틴어로 쓰여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정문에 게시하여 면죄부의 정상성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교황에게 도전하기 위함에 있지 않았다. 루터는 혁명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황과 싸우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터의 그러한 행동은 그 파급효과가 대단하였다. 곧 라틴어로 쓰여진 루터의 반박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유포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고위급 성직자들도 그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를 술취한 독일인으로 취급하거나 건방진 젊은 신학자로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심각성은 이후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로 명백히 드러났다.

 

15184월에 루터는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하여 로마 카톨릭의 대표단과 논쟁을 벌였다. 이 때 그는 면죄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깔려 있는 죄와 은혜의 문제, 인간의 자유의지와 믿음의 문제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 논쟁의 결과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인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 와중에 루터는 그의 신학의 핵심이 된 십자가 신학의 중요한 맥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십자가 신학에 대하여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혹은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라는 말로 요약하였다.

 

그후 같은 해에 루터는 아우그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출두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이때에 카예탄(Cajetan) 추기경이 교황의 사절로 참석하였다. 이 의회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카예탄이 루터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 때 작센(Sachsen)의 선제후이자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설립자인 프리드리히 3(Frederick )가 개입하여 루터를 보호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보호자로 자처하였다. 결국 루터는 아우그스부르크로부터 도피하였다.

 

그 이듬해 6월과 7월에 루터는 또 다시 라이프치히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주된 논객은 루터와 로마의 신학자이자 교회사가인 존 엑크(John Eck)였다. 논쟁 기술이 좀 더 뛰어났던 엑크는 계략을 써서 루터가 존 후스(John Hus)의 몇 가지 견해를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루터를 몰아 붙였다. 엑크의 계략에 말려든 루터는 자신의 후스주의자임을 고백하였는데, 이로써 후스를 정죄한 종교 회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보헤미아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라이프치히에서 루터는 패배하였으며, 후스주의자로 정죄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논쟁을 통하여 루터는 종교 회의의 무류성과 교황의 최고 권위를 점차 거부하게 되었다.

 

곧 엑크는 교황으로부터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받아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결국 1520615일에 대칙서(Exsurge Domine)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시민들이 루터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에게 개인적으로 그 교서를 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서가 그의 손에 전달되기 전에, 루터는 1520년에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하여 세 권의 중요한 저서를 발표하였다. 우선 첫 번째 책인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에서 그는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교리를 반박하였으며, 교황만이 교회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도전하였다. 두 번째 책인 기독교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 관하여(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ristian Church)라는 책에서 루터는 화체설과 미사를 비난하였으며, 성경의 원리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7성사를 반박하고 세례와 성만찬만을 인정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책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On the Liberty of a Christian)라는 저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결국 이 때에 비로소 그의 신학은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완성되었다.

 

그후 152012월에 대칙서가 루터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그 칙서를 불태움으로써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곧 그 이듬해 1월에 황제인 찰스 5(Charles )가 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름스(Worms) 국회를 소집하였는데 루터와 관련된 문제가 핵심 사안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으면서 보름스 국회에 출두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견해가 성경과 추론에 의해서 분명하게 오류가 있음이 밝혀지지 않는 한 철회할 수 없다고 공언하였다. 결국 루터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추방을 선고받았는데, 그 내용이 보름스 칙령으로 공포되었다. 프리드리히도 더 이상 루터를 공개적으로 보호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하여 프리드리히는 집으로 향하던 루터를 납치하여 아이제나흐(Eisenach)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으로 피신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루터는 계속하여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 때 그가 이룩한 최상의 성과는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일이었는데, 이 번역 성경은 그 이듬해 9월에 출간되었다. 특히 이 성경은 독일의 종교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의 형식을 결정하는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지지자인 카를슈타트(Karlstadt)와 같은 급진적인 지도자들이 과격한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곧 쯔비카우(Zwichkau)의 예언자들이 가세함으로써 그 개혁은 일련의 소요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루터는 15223월에 비텐베르크로 되돌아갔다. 카를슈타트는 곧 그 도시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동안 급진적으로 진행된 개혁은 취소되었다. 그러한 일련의 조치를 토하여 그 도시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으며, 루터는 제후들로부터 호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후 1522년에 개최된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는 진정한 복음만이 설교되어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써 루터와 같은 복음파 설교자들의 활동을 지지하였다. 이후 복음파는 계속 성장을 거듭하였다. 아울러 루터는 복음파 운동을 더 강화시키기 위하여 1523년에 미사와 성찬 예식(Formul Missae et Commuinionis)독일어판 세례 예식(Das Taufbuchlein Verdeutscht)이라는 저서를 발표하였다. 1526년에는 독일 미사(Deutsche Messe)라는 작품을 출간하였는데, 그 책은 미사와 성찬 예식라는 이전의 작품보다 중세적인 요소를 더 확실하게 삭제하였다.

 

그러나 복음파 운동은 1524년에 남부 독일에서 시작된 농민 전쟁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농민 전쟁의 중심에는 급진적인 독일의 개혁자인 토마스 뮌쩌(Thoma Muntzer)가 정신적인 지주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실상 루터의 사상이 농민 전쟁의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특히 1525년에 슈바벤(Swaben) 농부들에 의해서 제기된 12조항에 대해서도 루터는 몇몇 조항에 대해서는 동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두 왕국 교리에 따라 국가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수단들 중의 하나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반란을 하나의 죄라고 간주하였다. 그러한 입장에 따라서 그는 농민 전쟁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결국 농민 전쟁이 더욱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자, 15254월에 루터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의 무리에 대항하여(Wider die rauberischen und orderischen Rotten der andern Bauern)라는 글을 써서 폭도들을 칼로써 진압할 것을 통치자들에게 호소하였다. 곧 그해 5월에 프랑케하우젠(Franken hausen)에서 농민 반란군은 제후들의 연합군에 의해서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농민 전쟁은 종교 개혁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교 개혁에 대한 반대가 더 거세어졌으며, 인문주의 학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특별히 온건한 개혁자이자 인문주의자였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1524년에 자유의지에 관하여(De libreto arbitrio)라는 저서를 발표하여 자유의지를 거부하는 루터의 어거스틴적인 신학을 반박하고 나섰다. 이에 루터는 그 이듬해에 노예의지에 관하여(De servo arbitrio)라는 작품을 출간함으로써 맞대응에 나섰다. 그는 성경적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선한 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은 전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서슴없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정에 관해서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의 범위를 넘어서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결국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결별하게 되었다.

 

한편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간의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엇다. 특히 1526년에 국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긴급하게 슈파이에르(Speier)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서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잠시 중단하기로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후들에게 하나님과 황제의 뜻에 따라 처신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것은 루터파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529년에 로마 카톨릭교도가 다수를 차지한 제 2차 슈파이에르 제국 의회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 의회는 루터교를 사실상 폐지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굴복할 수 없었던 헤세의 필립(Philip of Hesse)과 같은 루터파 지지자들은 항의서를 제출하였는데, 이로써 그 항의자들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리게 되었다. 아울러 같은 해에 루터는 루터파 교회의 교육적인 목적을 위하여 대요리 문답(Grosser Kathechismus)소요리 문답(Kleiner Kathechismus)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 내에서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루터파 교회와 스위스의 개혁교회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루터와 홀드리히 쯔빙글리(Huldrych Zwingli)가 성만찬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양자간에는 1526년부터 1529년까지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실은 그들은 성만찬의 떡이 표지라는 점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만찬 제정의 말씀인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에서 이다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루터는 이 단어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성만찬의 떡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쯔빙글리는 이 단어를 나타낸다”(significat)라고 해석함으로써 성만찬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고로 그는 믿는 것이 먹는 것이다”(Credere est edere)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기독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두 본성 속에 있는 한 인격이라는 칼케톤 신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루터가 두 본성의 통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쯔빙글리는 두 본성의 구별에 더 집중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나아가 루터는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o idomatum)와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Ubiqu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하실 때에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을 펼쳤다. , 그는 성육신의 연장선상에서 성만찬을 이해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제한성을 강조하면서 성만찬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보았던 것이다. 특히 루터의 성만찬에 대한 최상의 진술은 주의 성만찬에 대한 고백(Vorn Abendmahl Christi, Bekenntnis, 1528)이라는 저서에 잘 드러나 있다.

 

결국 성만찬의 차이로 인하여 개신교가 분열될 위기에 놓이자, 헤세의 필립은 의견을 조율하고 연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1529년에 마루부르크에서 회담을 개최하였다. 회담이 계속되는 가운데 15개조의 마르부르크 신조가 작성되었는데, 14개 조항에 대해서는 루터 측과 쯔빙글리 측이 서로 의견 상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성만찬에 관한 마지막 조항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그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로 인하여 루터와 스위스 개혁교회는 영영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황제인 칼 5(Karl )가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간의 화합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아우그스부르크 제국 회의를 개최하였다. 루터교에서는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이 작성한 좀 더 온건한 입장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을 제시한 반면에, 쯔빙글리를 따른 남부 독일의 개신교 측에서는 부처가 작성한 네 도시의 신앙 고백(Confessio Tetrapolitana)을 제출하였다. 아울러 로마 카톨릭 측에서도 반박서(Confutatio)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도가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던 제국회의는 카톨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이 났다. 이에 반발한 루터교 제후들은 1531년에 슈말칼덴(Schmalkalden) 동맹을 체결하였다. 부처의 남다른 노력으로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남부 독일의 도시들마저 이 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후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 투쟁과 갈등이 계속 되었으나, 개신교는 계속 성장하고 확장되어갔다. 그후 루터는 공의회와 교회에 관하여(Von den Conciliis und Kirchen, 1539)라는 책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는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아루러 1537년에는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하는 일에 관여하였으며, 1542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가 된 창세기 강의를 시작하였다. 4년 후에 그는 만스펠트의 제후들간의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향인 아이스레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스레벤으로 가던 도중 병에 걸려 1546218일에 고향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