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낙스) 존 낙스

2014.08.0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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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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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을 통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동안,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에서 개혁과 부흥의 봉화를 높이 든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존 낙스였다. 1560년대 그를 통해 일어난 불길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태동시켰고, 다시 전 세계 장로교 태동의 시발이 되었다.

 

1540년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낙스는 반교황적인 차원의 신앙에서 좀더 적극적인 개혁신앙으로 돌아섰다. 불 꽃 튀는 심장에서 우러나는 그의 설교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1548년 그가 추종하던 위샤트가 순교한 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행한 낙스의 첫 설교는 그가 얼마나 선명한 개혁신앙을 갖고 있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대학 스승을 비롯한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 교수들과 지성인들, 일반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낙스는 다니엘 724,25절에 근거,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 예배의 근간이 성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전하였다. 심장이 찢어질듯 놀라운 파괴력을 지닌 그의 설교는 카톨릭의 문제점을 선명하게 제시, 설교를 듣는 회중들 가슴에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낙스가 개혁을 전개하자, 이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스코틀랜드 여왕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군이 출동하였고, 낙스는 포로가 되어 무려 19개월 동안 프랑스 노예선에서 노젓는 노예생활을 했다. 주의 은혜로 어렵게 풀려나 영국으로 돌아온 낙스는 영국의 개혁자 크랜머의 작업에 동참했으나,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다시 6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제네바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 기간은 스코틀랜드 개혁과 부흥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특별히 제네바에 머무는 1555년부터 1559년까지 그가 목도한 캘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은 깊은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이국에서의 망명생활, 유럽대륙 종교개혁자들과의 교류,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과 영감, 불타는 조국애는 낙스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이상을 스코틀랜드에서도 구현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게 했다. 그리하여 155952일 낙스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왕의 포고에 의해 불법자의 신분으로 낙인 찍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낙스는 !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망명 중에 습득한 종교개혁 이상을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에 적용해 나갔다.

 

낙스는 미사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한번의 미사는 백만의 군대보다 무섭다며 카톨릭 잔재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에게 타협은 곧 저주였다.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야만적인 공격이 있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위대한 역사를 진척시켜 나갔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다 아예 이 교회 담임을 맡아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전역을 휩쓴 개혁과 부흥의 불길이 이곳에서부터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한 청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낙스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몸을 약간 구부정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찌나 활기와 정력에 넘치는지,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는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뜨거운 심장에서 나오는 불꽃 튀는 낙스의 설교가 청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설교를 듣는 이들의 가슴에 개혁의 불, 부흥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낙스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붙들고 루터와 칼빈이 이룩하지 못한 피 없는 혁명을 완성할 수 있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승리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61년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선포하였다. 낙스 한 사람의 용기와 설교가 스코틀랜드의 개혁과 부흥의 불을 지피더니 드디어는 스코틀랜드를 말씀 위에 바로 선 교회로 만든 것이다.

 

사회, 정치, 문화를 종교적 눈을 통해 통찰하는 탁월한 혜안을 지닌 낙스는 단순한 종교개혁 차원을 넘어 사회구제, 평등사상 구현,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을 통해 루터와 칼빈이 이루지 못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낙스는 될성싶지 않은 지도자였다. 외모가 출중하지 못하고 언제 태어났는지 그 출신도 불분명한, 변절한 사제였으며 외교 수완이 없고 사회적으로 버릇이 없는, 세련미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들어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스코틀틀랜드의 개혁은 완성되었다. 당시 상황은 도저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낙스 같은 인물이 그같은 거대한 개혁을 이룩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볼 때 그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대적 소명 앞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혁과 부흥의 불길을 높이 들었던 낙스를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다. 그는 결국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역사 앞에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157211월 어느날, 60세쯤 된 낙스는 아내가 읽어주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들으며 부활의 소망 중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후, “내가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을 읽어주시오라고 부탁하여 요한복음 17장을 들으면서 잠들었다. 이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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