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첸, 존 그레심 (Machen, John Gresham : 1881-1937)

  선지자선교회

미국의 보수주의적 장로교 신학자이자 구 프린스톤 신학의 대표적인 옹호자인 메이첸은 1881년 바티모어의 유능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파의 장로교 전통에서 성장한 그는 사립학교에서 6년간 교육을 받았으며, 곧이어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그는 잠깐동안 유럽을 여행하였으며, 1902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딕 윌슨(Dick Wilson),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카스파르 W, 핫지(Caspar w, Hodge) 그리고 벤자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등과 같은 석학들의 지도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특히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교수는 워필드와 프란시스 L, 패튼(Francis L, Patton)이었다.

 

한편 1904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서의 공부를 마친 메이첸은 1905년에 더 많은 학문적 연구를 위해서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에 입학한 그는 아돌프 유리허(Adolf Juicher)와 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그리고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 등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헤르만의 자유주의적 신학에 매료된 메이첸은 프린스톤에서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으며, 곧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마르부르크에서 괴팅겐(Gottingen)으로 옮겨 J, F, W, 부셋(J, F, W, Bousset) 등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지도하에 계속 공부하였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메이첸은 1906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약학 강사직을 제의받았다. 그 제의를 수락한 그는 1914년까지 강사로 활동하다가 이후로 조교수로 승격되어 신약 문헌과 신약 주경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경험한 메이첸은 그의 신앙이 회복되는데 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회복하면서 성경의 고등비평의 심각한 영향을 점점 더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복음서에 대한 고등비평의 공격에 대해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역사적인 자료들성경의 적절한 상식적인 해석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훗날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주제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드러났다.

 

한편 영적인 방화의 시기를 끝낸 메이첸은 1914년에 장로교 목사로 안수받았다. 이후로 그는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계시의 객관성 그리고 사실들의 실체성 등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그리고 기적의 의미와 중요성을 주된 골자로 한 1910년에 총회 성명서를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프린스톤 신학교가 점차 보수주의적 신학에서 벗어나자 1929년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났다. 그를 뒤이어 프린스톤을 사임한 교수들과 함께 메이첸은 같은 해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개교 연설에서 그는 성경의 절대 권위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을 견지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북장로교(PCUSA),의 선교본부가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중국 파송 선교사 펄벅(Pearl Buck)을 지원하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들을 선교사로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자, 그는 독립 선교 본부를 창설하였다. 이로 인해 북장로교와 독립 선교 본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으며, 결국 1936년에 메이첸을 중심으로 정통 장로교(OPC)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다. 독립 선교 본부를 설립하는 것에 불만을 느낀 오스왈드 T, 앨리스(Oswald t, Allis)와 클레렌스 에드워드 노블 매카트니(Clarence Edward Nobld Macartney) 같은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떠났다. 또한 메이첸과 교리적인 갈등을 일으킨 칼 매킨타이어(Karl Mclntire)와 부스웰(J, O, Buswell)eh 교단을 떠나 곧 성경 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이듬해에 메이첸은 북 다코다로 설교 여행을 나섰다가 돌아오던 도중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전반적으로 메이첸의 신학은 전형적인 개혁주의 신학이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혁주의 입장을 그대로 따랐다. 현대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앙,(Christian Faith in the Modern World, 1936)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메이첸은 기계적인 영감설을 지지하지 않았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성경의 저자의 지식과 자유가 용인되었다고 보는 유기적인 영감설을 옹호하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얻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접근 방법과 일반상식을 사용하여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한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방법들을 무시하고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문제점을 하나님, 인간, 성경, 그리스도, 구원, 교회에 관한 믿음이라는 견지에서 심도있게 다룬 최초의 책이 바로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의 하나인 기독교냐 자유주의냐(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40)dlek. rm 책에서 그는 기독교의 현대적인 중요한 라이벌은 자유주의라는 결론을 내렸다.

 

메이첸의 신학에는 개혁주의적인 신론이 그 중심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절대 주권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으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바울 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 1921)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이라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서, 이러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신약의 증언들이 사실이며, 그 증언들 간에 통일성이 있음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메이첸의 견해는 그리스도가 단지 스승이자 본보기라는 당대의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거부한 것이며, 오직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의 주류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메이첸은 그리스도를 강조한 만큼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지만, 신앙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 1925)라는 책에서 그는 성육신과 성경 저작 그리고 택자의 중생과 성화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적용은 성령의 행위이며, 성령을 통해서 성자와 성부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칼빈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강하게 역설하였던 메이첸은 성경은 사실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완전히 참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무오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성령이 성경 기자들을 초자연적으로 감동하여 모든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가운데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메이첸은 이러한 성령의 영감이 기계적인 성질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실 때 기계나 막대기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간을 인간으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메이첸은 성경이 종교의 영감의 책일 뿐만 아니라 사실적이요 과학적이라고 규정하였다. , 그는 성경의 진리가 모두 명제적(Propositional)이기 때문에 이해가 가능하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성경과 과학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되는 것이었다. 또한 메이첸은 이러한 성경의 특성이 기독교 변증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이첸의 성경관은 A, A, 핫지(A, A, Hodge)와 벤자민 B, 워필드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종종 메이첸은 그들의 전통의 최대의 마지막 옹호자로 자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메이첸은 신학적인 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 분야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회 분야에서 그는 당대의 사회 집단주의를 강하게 반대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였다. 그는 그 근거를 하나님이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관용 정부 개념을 주장하였으며, 강제적인 공립교육 제도를 반대하고 기독교 학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메이첸은 비록 교단 분열이라는 커다란 오점을 남기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점점 인본주의에 물들어가던 교회에서 개혁주의적 정통 신앙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주의적 폭압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자유를 사수하고자 한 새로운 종교개혁의 비전을 제시한 개혁자였던 것이다.

 

자료: 정성구/개혁주의 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