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한부선과 메이첸 - 1. 프린스톤으로 이주

 

* 다음의 글은 박용규 교수가 쓴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 한부선책 내용에서 그레샴  메이첸 교수와 관련된 글입니다.

 

8. 프린스톤으로 이주

 

83> 그 해 헌트가()는 프린스톤신학교의 길 건너편에 살았다. 당시 이 신학교는 미 장로교의 신학논쟁의 여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심각한 신학적 갈등의 도가니에 놓여있었다.

 

84>프린스톤으로 이주하자마자, 한부선은 프린스톤신학교의 교수 사이에 증폭하고 잇었던 신학적 갈등과 심지어 학생들 사이의 불회를 인식하게 되었다. 미 북장로교 안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은 교리의 극소화를 주장하는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신조고백주의(Confessionalism)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1923년 총회에서는 1910년과 1916년의 총회에서 결의된 5개 조항의 기독교 근본진리에 대한 교리적 선언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프린스톤의 유력한 신학자였던 메이첸(J. Gresham Machen)의 저서인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에 출간됨으로 북 장로교 내에서 신학 논쟁의 열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85>19241150여명의 장로교 목사들은 뉴욕주에 있는 어번신학교에 모여 1923년 총회에서 통과시킨 5개 조항의 기독교 교리에 항의하는 소위 어번선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00명의 미국 북 장로교 소속 목사들이 이 성명에 서명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한부선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깊이 숙고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논쟁은 나로 하여금 말씀을 더욱 주의 깊게 찾게 했으며 내 신앙을 더욱 넓고, 깊게 그리고 확신있게 해 주었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부선의 부모는 안식년 동안 프린스톤 제일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그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을 하였다. 그 당시 프린스톤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메이첸이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이 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미 북장로교에 불어닥친 자유신학의 물결은 이 교회에서도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1924년에,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프린스톤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이자 장로교회의 자유주의 세력의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헨리 반 다이크(Henry Van Dyke)가 메이첸 쇼수의 설교에 반박하여 예배 도중에 퇴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한부선 자신이 20세게의 심각한 종교 전쟁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87>이윽고 미국 장로교회가 기로에 선 1924년 가을에 한부선은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는 데이비스(J. D. Divis), 그린(W. B. Green), 위스타 핫지(C. W. Hodge), 메이첸(J. Gresham Machen)., 윌슨(R. D. Wilson), 그리고 보스(Geechardus Vos) 등 마지막 세대의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이라 불리는 교수들의 가르침이 한부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그들로부터 받은 신학적인 교훈은 한부선의 기독교 신앙을 더욱 깊고 강하게 하였다. 한부선은 1920년대에 미 북장로교에 야기된 신학적 갈등의 요인이 무엇이었으며 그런 가운데 프린스톤에서 받은 신학교육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며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