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과 메이첸 - 3. 프린스톤 신학교의 한부선

  선지자선교회

* 다음의 글은 박용규 교수가 쓴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 한부선책 내용에서 메이첸 교수와 관련된 글입니다.

 

10. 프린스톤 신학교의 한부선

 

102>교회의 갈등이 더욱 격렬해지면서, 미국 장로교회의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신학교인 프린스톤신학교가 논쟁과 갈등에 점점 말려드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924년 한부선이 신학교에 입학할 당시 메이첸은 학교행정의 중앙집권화 현상과 신학의 포용주의(inclusivism)에 대항하고 있었다. 메이첸이 프린스톤에서 교수로 봉직한지 8년이 지난 1914년에 프란시스 패튼(Francis L, Patton) 박사를 이어 신학교의 학장으로 로스 스티븐슨(J. Ross Stevenson) 박사가 취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러셀(C. Allyn Russell)역사적인 구 프린스톤 신학 정통의 종말을 알리는 가운데 신학교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스티븐슨은 공개적으로 프린스톤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이 어느 특정한 집단만의 신학이 아닌, 모든 장로교회의 신학을 대변할 수 있는 방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03>이러한 스티븐슨의 견해는 메이천을 비롯한 대다수 신학교 교수들이 원했던 전통적인 구학파 신학과 칼빈주의적 신학을 고수하려는 것과는 대치되는 것이었다. , 당시 프린스톤의 신학적 갈등의 중심에는 과연 정통신학(orthodoxy)과 관용적 태도(tolerane)가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프린스톤의 신학적 변화에 대하여 한부선 뿐만 아니라, 그의 부친 한위렴 선교사도 선교지에 있었지만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위렴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스티븐슨 학장과의 수차례에 걸친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게 전달하였다. 프린스톤신학교의 행정적 개편이 신학적 입장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스티븐슨의 견해에 반박하면서, 한위렴은 동문으로서 신학적 포용주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프린스톤 신학 대변지였던 프린스톤 신학정론(Princeton Theological Review)이 발행 주지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또한 어번선언에 서명한 자들이 프린스톤신학교의 이사로 활동하는 것이 과연 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고수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해서도 강한 의구심을 표명하였다. 한위렴에 의하면 스티븐슨이 취하는 포용정책은 지금까지 프린스톤신학교가 추구해왔던 역사적 교리의 입장과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비판적인 내용을 그의 편지에 언급했지만, 한위렴은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린스톤의 신학적 전통을 지속적으로 계승해 나가야 된다는 간곡한 마음을 스티븐슨에게 전하였다. 교리적 포용성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한위렴은 미리 내다보았기에 자신의 견해를 담담하게 피력했다.

 

104>그러나 스티븐슨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신학교 운영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한위렴이 모교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안식년(1931-19320을 보내고자 할 때에, 그 의도에 대해 의심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신학교의 분열을 경험한 그로서는 다시금 노년의 선교사가 안식년을 신학교에서 머물면서 혹시나 신학적 갈등을 야기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데에는 한위렴도 상당히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한위렴의 단호한 신학적 입장이 그의 아들 한부선에게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한부선의 신학생 시절은 어느 한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 프린스톤의 종교전쟁(Battle of Princeton)"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이다. 교수단의 분위기도 뚜렷한 두 집단, , 메이천의 일원인 다수파 집단과 스티븐슨 총장의과 어드만(Charles Erdman)이 이R는 소수파 집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부선은 신학교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메이첸과 그의 신학적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106>1920년대에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온 한국인 학생들 중에는 박형룡을 비롯하여 백낙준,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등이 있었고, 그들도 메이첸의 과목을 들었다. 그런데 당시 그들이 배웠던 구 프린스톤 신학과 신학교 개편에 따른 여러 가지 갈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을 갖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1929년에 메이첸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교수들과 52명의 학생들이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우게 되엇는데, 한경직은 이들을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그들의 구 프린스톤 신학적 입장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한경직이 그로부터 배운 신학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그대로 사역과 삶에 반영했다기 보다는, 이미 그에게 심겨진 신학적 경향이 어느 한 신학적 입장으로 경도되게 하였다. 1920년대에 츠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한국 유학생들 가운데 모든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자들은 박형룡, 백낙준, 윤하여, 한부선, 그리고 한경직 등이었고, 김재준은 웨스터신학교로 전학하였으며, 송창근도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등 세사람은 프린스톤신학교 재학시절에 선교사 중심의 한국 신학교가 새로워져야한다는 의견에 의기투합한 적이 잇었다. 우리는 이들이 1920년대의 미 북 장로교의 신학논쟁 와중에서 프린스톤 신학의 특성과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신학적 전통에 다소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의 차이는 훗날 한국의 신학적 기상도를 가름케 하는 전조였다.

 

107>1920년 중반에 이르게 되면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기독교계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캐나다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그리고 회중교회가 연합한 직후인 1925년 여름방학 기간 중에 한부선은 전도활동의 일환으로 캐나다로 파송되었다. 당시 프린스톤신학교는 일반 교과과정 이외에도 미국과 캐나다 지역의 국내전도와 목회활동을 돕기 위해 여름방학마다 학생들을 파송하곤 하였다. 이 해에 개나다 교회연합(the Union of Canadian Churches)은 프린스톤신학교에서도 중요한 신학주제로 부각되었다.

 

108>교회연합의 배후에는 신학적 좌경화의 경향이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메이첸이나 한부선도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고 잇었다. 적지 않은 캐나다 장로교 신자들은 교리적으로 무분별한 연합보다는 장로교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하였지만, 당시 대세를 거스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소수의 장로교 교회들이 교단 연합을 거절하고 계속적으로 캐나다 장로교회로 존속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캐나다 개신교 연합운동은 선교지 한국에도 신학적인 영향을 미쳐 훗날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12>한부선은 자신의 입장에서 선교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지의 필요에 따라 파송되기를 원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따라 어느 지역이든지 가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선교사는 보냄을 받는 자라는 인식 속에서 다른 사역자들이 가기를 마다하는 지역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가겟다는 마음으로 선교부의 결정을 기다렸다. 한부선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모가 사역하고 있으며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한국으로 파송 받게 되었다. 그가 미국 북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선교사 후보생으로 지원햇을 때에 선교부에는 어번선언에 서명한 간부가 있었는데, 그가 한부선에게 선교지에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부선은 장로교의 목사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한부선은 모든 장로교 목사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 정직하게 동의해야 하며,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긴 토론을 함으로 그는 선교사 후보생의 자격을 박탈당하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1928년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