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사람

 

1984. 9. 19. 수새

 

본문: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어제 아침에 설교한 데 대해서 비판해 주는 것 그것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를 못합니다. 모두 다 '와 저 설교를 꼬집고 저럴까? 우리는 은혜가 됐는데'  그렇게만 은혜가 됐습니다. 설교를 잘 해서 아주 제 마음에도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고쳐서 말하는 그것을 고치지 안하면 그 저 탄환 없는 총과 같이 일시는  사람들이 좋아하지마는 그 뒤에 그 속에 능력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전에 우리 교회에 이름은 내가 밝히지 않겠는데 ○집사님이라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변동 없습니다. 여기에 아마 권사님들은 알  건데 벌써 여러분들은 그때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뭣이든지 시작하면은 그대로  계속을 합니다. 뭐 참 절대를 붙일 만치 부동입니다. 그렇게 어려워도 견디고  모욕스러워도 견디고 힘들어도 견디고 또 좋아도 변동 없고 마치 참 감각 없는  목석같이 그렇게 그만치 변동이 없고 또 경제도 괜찮고 뭣이든지 맡아서 하면은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남해에 그때에 도마 교회가 어려워서 도마  교회를 도와라 해서 오백 원씩 도왔습니다. 매월 오백 원씩을 도왔는데 그 뒤에  도운 그것을 그저 세상 뜰 때까지 계속 도왔습니다. 그다음에는 뭐 안도와도  된다 해도 계속 변동 없이 그대로 도왔습니다. 아주 인내력이 있습니다. 아주  인내력이 있고 계속성이 있고 아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참 한번 뭐이든지 작정하면 변동 없고 그렇게 인내력이 있었는데,  그분에게 뭐이 모자랐느냐 하면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인내해야 되느냐 영감을  받기 위해서, 영감대로 하기 위해서 인내하고 진리대로 하기 위해서 인내하는,  반드시 인내의 그 속에 알맹이에는 진리와 영감 때문에 인내하는 것 영감이라면  하나님이요 진리라면 참된 이치인데,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이 진리인데.

진리 때문에 인내 한다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계속 하느냐? 계속하는 건 내가 뭣 때문에 계속하느냐? 이것도 내가 영감  때문에, 영감을 내가 소멸하지 안하고 영감을 내가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용욕스러운 소리를 듣고도 내가 참는 것이 뭣 때문에 참느냐? 진리.

이 진리대로 복종하기 위해서, 진리와 영감이라는 거기에 대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그렇게 느끼지 안하고 그냥 한번 거석하면 쭉 꾹 참아서 나갑니다. 아주  부동입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의 비판력이, 평가력이  자라지 않습니다. 인내력만 자라니까, 인내라 하는 것이 그것이 좋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러면 '인내가 제일이다' 아니오. 인내가 온전히 무슨  인내냐? 영감과 진리에 복종하는 그 계속이 계속해야 되지 진리와 영감 없이  암만 참는, 그러면, 목석이 제일 일등 되겠습니다. 죽은 송장이 제일  일등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고 아무리 참고 견뎌도 거기에 대해서 영감과 진리  말을 자꾸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사님은 깨달았는가 뭐 엊저녁부터 잘 안 됐기 때문에 인제 심방을,  어제부터 산에 운동 하는 거 기도하러 가는 것을 이제 다 치워 버리고 이제는  심방 가야 된다고 어제 심방 늦게사, 그때가 아마 얼마나 됐든가? 한 아홉시  넘어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사 옵디다. 어디 갔다 오느냐 이라니까 아침 안  먹고 그래 심방 갔다 온다고. 깨달은 모양인데,  슬기 있는 다섯 처녀에 대해서, 기름 사는데 대해서, '어떠한 일이든지, 아주  곤욕스러운, 아주 용욕스러운. 천한 거 뭐 그것을 그럴 때에 참고 견디는 그것이  내나 기름 준비하는 것이라.' 좋은 말했습니다. 했는데, 제일 요지는 '요렇게  하는 것이 영감을 영접하는 것이요 진리를 영접하는 것이다. 요렇게 하는 것이  진리와 영감의 능력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하고,  또 예를 들어서 그 ○장로님이 설교할 때에 '주 안에 있으라, 주 안에 있으라.'  하는 그 말을. '주 안에 있으면 이게 된다. 뭐 주 안에 있으면 모든 거 된다, 주  안에 있으면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것이다, 주 안에 있으면' 하는 그런 거  좋습니다. 좋은데, 거기다가 해석을. 주 안에 있는 것이 뭐이냐? 주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고 해석이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대속을 벗지 안 하고 있는 것이 좋다, 우리가  기도 제목에 몇째 기도 제목에,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 그거 몇째 제목이지요?  예? 첫째 제목에 '주님의 대속을 벗지 말아라.' 우리가 그거 대속을 안 벗어야  됩니다. 대속을 벗지 마라,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 안에 있는 것이 그것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라고 거기다가 해석을 붙이기를 대속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어쩌든지 죄를 짓지 안하고, 죄를 내주지 안하고 의를 내주지  안하는 그것이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라 그렇게 해석했으니까 그 해석이  됐습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뭐이 짓지 않는 것인가? 그다음에 해석이 더 퍼쳐  나가야 그다음에, 나무로 말하면 잔뿌리가 생겨서 잔뿌리에서 양분이 오지 큰  뿌리에는 양분이 안 옵니다. 그 큰 뿌리는 아무 소용없고 밑에 잔뿌리가 양분이  많습니다. 그러면, 사죄를 벗지 않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자기가 그 현실에서  그때 현실에 자기에게 해당된 그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는 것이,  말씀을 버리지 안하고,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말씀을 그대로 자기가 지키는  그것이 사죄를 벗지 않는 것입니다. 또 칭 의를 벗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현실에서 자기 주관대로 살지 안하고 진리와 영감에게 피동되고, 자기 주관대로  피동되지 안하고 영감과 진리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이제고 칭의에 속한  것입니다. 칭의는 자기 주관에 반대 하는 것이오. 또 화친의 생명은 하나님을  자기 속에 왕으로 모셔 가지고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주장하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그 화친의 생명을 취하는 것 그 해석이 가다가 끄트머리의 가는 뿌리가,  잔뿌리가 별로 나지를 안했다 그거요. 잔뿌리가 나지 안하고 실지로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은, 말만 좋지 어떻게 하느냐 하는 실지의 실천 신앙에 가 가지고는  효력이 없게 된다 그거요.

 또 그 ○○○ 장로님이 예를 들어 설교한 데 대해서, 복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거 잘 했습니다. 이래야 복을 받는다. 이래야 복을 받는다, 복을 받는다  이랬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는 뭐이냐?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그 말은, 마음을 높이지 말라 말은 무엇이든지  부요한 그거, 그것을 가치로 삼지 말아라, 가치야 있습니다. 왜 그게 가치  없겠습니까? 자기 가진 재물도 가치가 있고 지식도 가치가 권세도 가치가  있지마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께 비해서는 그거 뭐 가치가 억억억억억만  분의 일도 안 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가치로 삼지 말아라. 가치로  삼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줘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그러면, 그것이 제일 요긴합니다. 그거.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소망 두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소망 두기 위해서 이런  선도 행하고 선한 사업도 하고 동정하는 자도 되고 이런 것이 뭐이냐 하면  그분에게 내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살살 달래서 말이요. 그분을 달래서  그분을 비위를 맞추어 가지고 성글지 안 하고, 그분을 거슬리지 안 하고 그분  좋도록 이래 해야 그분이 내게 해 줄 것 아니겠소? 그렇지 안 해요? 사람들도  내가 돈 빌리러 가면 그 사람에게 아 예 이 사람이 내게 대해서 무엇을 좀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거 정리해야 됩니다. 섭섭한 생각  있으면 아예 정리해 놓고 '내가 아무 연문에 참 그랬는데 매우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제가 언제 그걸 다 정리를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마음을 얻는  거라 말이오. 또 '언제 이렇고 이렇게 했는데 그걸 내가 순종치 안하고 거역을  했는데 그 뒤에 이렇게 이렇게 순종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라면 벌써 돈 빌려  줄 사람 마음이 벌써 다 돌아 섰다 말이오. 돌아서고 난 다음에 '아, 이거 천상  이거 말 안 할라해도 이번에 사정이 이런데' 사정 얘기만 하면 '아, 그래?  얼마나 있어?' 그라면 빌려준다 그 말이오. 돈을 빌리는 것도, 빌려 가지고 갚을  돈도 그렇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서 언제든지 그분과 영감 진리를, 여기에 저  ○○○ 권사님 구역에 있던 그 무슨 목사님이오? ○ 무슨 목사님이지요? 예? 와  여기 더러 우리교회 와서. 왔다 갔다 하는 분 있지 않아요? 지금 ○○교파에 간  분. 아따 그 이름이 뭐이지? ○ 뭐? ○○○? ○○, ○○○옳지 ○○○ 목사님,  ○○○목사님은 그저 거기에 대해서 느끼지는 못하고 뭐 여기는 딴게 뭐 있는가,  진리 영감 둘만 가지면 된다고서. '진리 영감 진리 영감 진리 영감을 말하고. 뭐  설교 보니까 설교 말하는데 마다 진리 영감 끄트머리는 진리 영감, 시작도 진리  영감, 무슨 설교든지 하면 진리 영감으로만 자꾸 하니까 진리 영감만 알면  된다.' 이런데 그 사람이 '진리 영감만 알면 된다. 진리 영감만 하면 된다. 여기  뭐 진리, 영감뿐이다' 하는데 진리 영감이 뭐인지 모른다 그거요. 그 사람이  몰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진리 영감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지금 엉뚱한 짓을 지금 하고 가고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진리 영감을 말을 해야 됩니다. 그걸 안 하면 안 돼요.

 ○○○ 목사님이 아주 설교를 잘했습니다. 가정에 대해서, 그 내가 그 설교한  데 대해서는, 아, ○○○ 목사님은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좀 묻기 때문에, 그분은  이제 목회를 할 수 있겠다. 왜? 목회하는 것은 가정을 아껴 뭐 교회를 아껴서  교회가 이라면 되겠나 저라면 되겠나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설교가 나왔다  그 말이오. 그게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나왔는데, 고 다른 걸 다 말을 하기는  다 했지마는 그 모든 그리 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고  주름 잡힘이 없는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함이라. 교회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은, 교회라는 것은 어떤 것이 교회냐? 교회는 진리하고 영감하고 사람하고  셋이 삼합 된 것이 교회입니다. 뭐 가정이 아무리 단합돼서 아무리 깨소금이  쏟아지고 아무리 좋고 뭐이 한다 하더란데도 그 가정이 영감과 결합이 안 되고  진리와 결합이 안 되고 영감과 진리와 그 가정의 사람들이 요렇게 셋이 삼합이  안 됐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 삼합이 생명이라 말이오. 요 삼합되기  위해서 요래야 된다. 그러면, 삼합되기 위해서 부부간에도 잘 지내야 되고  삼합되기 위해서 자녀들도 길러야 되고 요 삼합이 중심인 요게 생명입니다. 고게  없으면 안 된다 그거요.

 다른 사람들도 그랬는데, 또 ○ 장로님이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배 안에  있으라.' 그런 것도 했는데, 그 '사죄 안에' 그렇게 말해서 전부 안에 있는 것만  해석해. 안에 있는 것만 해석했는데,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안에 있는  것이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좀 잔뿌리가 내렸으면 좋은데, 잔뿌리 같지마는 그게  중요하다 그 말이오.

 또 그러고 생명 있는 믿음 생명 없는 믿음을 말했는데 아주 그것도 좋은 것을  말했습니다. 환경에 피동되는 것은 생명 없는 믿음이라, 환경에 피동 안 되고  하는 것이 그것이 생명이라 이랬는데, 생명 있는 믿음에 '환경에 피동되면  생명이 없는 믿음이라.' 그거 아주 좋은 걸 말했습니다. 요긴한 것을 기억하고  잘 말했는데, 그러면, 환경에 피동 안 되는 것이 할 때에는 반드시 환경에 피동  안 되고 진리에 피동 돼야 된다, 영감에 피동 돼야 된다. 그것이 반드시 붙어야  된다 말이오. 붙어 가지고서 거기에서 피동이 되고 환경에 피동이 안 돼야 되지.

그러니까, 환경에 피동이 안 돼야 된다. 요 말을 한 번이나 하면은, 한 번  하면은 영감과 진리에 피동되기 위해서 영감에 피동한다. 그것이 꼭 요래 마주  서야 되지, 환경에 피동 안 되는 이거는 껍데기 고 진리에 피동되는 요거는  알맹인데 요 알맹이가 있고 껍데기가 있어야 돼지지 알맹이는 말하지 안하고  껍데기만 말하다 보면 나중에 가서는 고만 인본주의 설교가 돼서 소리뿐이지.

말뿐이지 아무 거기에서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넓게 말 하다가 좁아서 좁혀서 자꾸 좁혀 가지고  마지막에는 요리도 못 가고 저리도 못 가고 요리밖에는 못 가는 손 골목에 딱  연결을 시켜서 거기에 부착이 돼 버려야 그래야 거석하지 뭐 이래 만일 보고만  이런다면은 등등하이 '하나님을 위한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 좋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 그라면, 하나님 위하면 복 받는다,  ○○○목사님도 좋은 걸 말했습니다. 환난 있으면 환난 그거 가지고 주님  위하고, 또 평안 있으면 평안 그거 가지고 주님 위하고 부요하면 부요 그거  가지고 주님 위하고, 가난 있으면 가난 그거 가지고 주님 위한다 그거 아주  좋았습니다. 좋았는데. 그렇게 주님을 위한다 위한다 하지마는 주님 위하는 것이  뭐이 주님 위하는 것이냐 그게 좀 뿌럭지가 나와야 될 거라 말이오. 뭘 위하는  것이냐? 우리는 주님 위하는 것은 주님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진리와 영감대로  하는 그게 주님 위하는 것 진리와 영감대로 하는, 거기에도 또 진리 영감이라.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설교할 때에 진리 영감 그거 빼 놓으면 설교가  아닙니다. 진리와 영감이 빠지면 설교가 아니고 또 주님의 피공로가 빠지면 설교  아니고, 그러니까, 설교할 때에는 요 세 가지 언제든지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요 셋이 들지 않으면 그 설교는 실은 생명력이 없는 설교라 그거요. 그러면,  영감은 성신의 감화이니까 대단히 크고 진리는 크고 주님의 피공로는 예사로  생각하는데, 주님의 피공로를 위해서 주님의 피공로를 협조하기 위해서 영감이  우리에게 왔고 진리가 우리에게 왔고. 또 진리와 영감은 우리에게 어째 왔느냐?  주님의 피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왔지, 피공로가 끌어다가 영감과 진리를  우리에게 줬지 피공로가 아니면 영감 진리가 우리에게 안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이 우리에게 온 것도 주님의 피공로 때문에 왔고. 또 피공로  때문에 온 진리와 영감이 무슨 일 하러 왔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피공로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왔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피공로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로 인해서 모든 게 되기 때문에.

 잘 말을 말을 잘 알아들어서 고 말 귀를 잘 알아야 돼. 말귀를 잘 알아야 된다  말은 말의 요 모베기가 있으면 요 모베기 요 모베기 요 모베기 요 모베기 요  모베기 요 모베기 요 모베기, 고 각도를, 말의 각도를, 말의 모베기를 잘 알아야  되지 그걸 모르고 둥글둥글 하이 이래 되는 것은 빛좋은 개 살구가 돼서 보기는  좋고 들을 때는 좋지마는 나중에 실지로 살라 하면 아무것도 없다 그거요.

그라면 안 돼.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른다 그거요  여기에 어제 아침에도 말했는데, 겸손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이러니까, 대부분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는 여기에 대해서, 이 성구를 보고. 그러니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겸손한 것이, 겸손으로 자기를 든든케 해라 이라니까 그저 사람  앞에 머리 숙여서 자꾸 굽신거리고 이 사람 앞에도, 겸손이 그것이 겸손인 줄  알고, 이 겸손이라 하는 이 정의가 이제까지 바로 나와 있지를 안하다 그  말이오. 여러분들이 겸손이라는 정의를 주석을 가지고서 뭐 칼빈 주석에 있는가  다 찾아보라 그 말이오.

 겸손이 그저 사람들은 대개 둘 있는데 하나 있다면 그것이 겸손한 사람으로,  좋은 것은 둘 있는데 하나 있다면 겸손한 사람으로, 또 자기의 나쁜 것은 하나  있으면 둘 있는 것으로 그래야 겸손한 사람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그거는 성경에 말했지마는 낫게 여기고 귀중히  여기는 그것이 겸손이라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여서  허리를 모가지만 까딱 하지 말고 허리를 푹 굽히는 것이 그것이 겸손이라, 모두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는 그게 겸손이라. 그거 좋습니다. 다 좋은 거요.

그렇지만 그거 다 껍데기라 그 말이오.

 겸손은 어떤 것이 겸손이냐?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겸손이라 하는 것을 내가  벌써 여러 수십 년 내가 가르쳤다 그 말이오.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겸손이라.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은 자기를 바로 알면 하나님을 바로 알고 환경을 다 바로  알게 돼. 자기 바로 아는 것은 자기가 자기는 어떤 자인가, 어떤 환경을 가진  자이며, 어떤 이웃을 가진 자이며, 어떤 만물과 관계를 가진 자이며, 조물주,  제일 높으신 창조주와 관계를 가진 그것을 아는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라  말이오. 자기 아는 것이 뭐 나는 이름이 아무것이라 하는 그거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키가 얼마라 체중이 얼마라 그거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라,  자기는 어떤 존재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 어떤 수준에 살고 있는  것이며, 자기는 어떤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 자기의 실력은 어느  정도이며 하는 그것을 자기가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것. 그걸 바로 알라면 모든  존재를 바로 알아야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지 모든 존재를 바로 알지 못하면,  만일 예를 들어서 모든 존재가 백 개라면 백 개의 구십 구를 알고 하나는  모릅니다. 하나 모르면 그 하나 모르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바른 자기가 의무와 책임과 관계를 모르게 되니까 백분지 일은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라 말이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백분지 일을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 연구하는 것이 모든 연구라. 자기  알면 하나님 알고 하나님 알면 자기 안다, 이것이 다 관계성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걸 알게 되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는 어떻게 한다 자기를 자연히 알게 되고 만물을 알게 된다 그거요.

 이래서,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겸손이라. 자기를 바로 알면 자기가 월권하지도  안할 것이고, 남용하지도 안할 것이고, 허영도 가질 수 없고 허욕도 가질 수  없고, 모든 지나친 계획이나 소원이나 그런 것도 가질 수 없고, 자기 위치를  월권해 가지고 자기 위치는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서 한 칸만 뛰어 올라도 자기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죽는 곳이라 말이오.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  위치를 벗어나면 죽는다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쩌든지 지위는 올라가야  좋고, 지위는 올라가야 좋고, 재물은 많아야 좋고, 몸은 튼튼해야 좋고 이러니까  그거 다 일방적 지식이라 말이오. 몸이 병드는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고 재산이  부한 것도 있고 가난한 것도 있는데 부한 것이 좋을는지 가난한 것이 좋을는지  나는 몰라. 내가 지위가 올라가는 게 좋은지 내려가는 것이 좋을는지 나는 몰라.

주님만이, 전지하신 주님만이 아시지 그분 외에는 아무도 알 리가 없다 말이오.

알 리가 없기 때문에 내가 경거망동으로서 '아, 내 이 지위는 내 실력보다도  너무 지위가 낮아졌다. 내 대우가 낮다. 또 나는 이제 대우가 높아졌으니까  좋다.' 그럴 수 없다 그 말이오. 나는 좋은지 나쁜지 그걸 모르겠소.

 이러기 때문에 이 판단을 '나는 주님이여. 내가 뭘 달라고 하겠습니까?' 뭘  달라고 할 때도 우리가 달라고 할 때에도 그렇다 말이요. 달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이걸 주십시오.' 그렇게 말을 하지를 못하겠다 그 말이오. 성경에  명문되어 있는 것이면. 회개하는 것, 회개 하는 것 같은 이런 것은 명문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이여 회개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지마는 다른 거는,  이거 제 의견에는, 제 소원에는 이걸 주셨으면 좋겠는데 이거 주시는 것이  좋을는지 안 주시는 것이 좋을런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르겠으니까  당신이 알으셔서, 내 마음에는 주시면 좋겠는데 이거 주시는 것이 내게 좋거든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는 내나 한가지라. 그 기도보다 '주시는 것이 주님  당신의 기쁨이 되거든 주십시오.' 왜? 당신의 기쁨이 된 것이 내게 좋은 것이지  당신의 근심거리 되는 거는 내게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내게 좋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이러니까, 내 의견은 이런데  당신은 의견이 어떤지 이걸 따라서 당신 의견을 따라서 하시옵소서' 이렇게  우리가 기도한 다 그 말이오. 주님도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겠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겸손한 자는 어떤 자가 겸손한 자냐?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를 바로 알라고 하면은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될는지 어떻게 모든  존재들을 상대해야 될는지 이런데, 이러니까,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이러니까  자기를 바로 알아서, 자기를 바로 알아서 자기가 자기로 사는 것, 자기가 바로  자기로서 손색없는, 모순이 없는, 흠이 없는 자기로서 자기 행동 하는 것 그게  제일 든든이라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그게 제일 든든이라.

 이렇게, 예를 들면 자기가 설 자리가. 보니까 빈자리가 많습니다. 천도만도  많습니다. 빈자리가 많은데, 빈자리가 많은데,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그  말은 겸손으로 자기를 든든케 하라 말인데, 빈자리가 천도만도 넘은데 거기에  섰다가 남의 자리 섰으면 제가 나중에 쫓겨나야 된다 그거요. 그러면 실패되고  쫓겨나야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천도만도 넘은 그 자리 가운데서 자기가 가서  설 자리를 그 자리를 바로 알아 가지고 딱 써는 요거 가지고서 네 허리를  동이라, 예를 들면. 요거 가지고 허리를 동이라 그 말이오. 또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그 말은 네가 이렇게 해야 될는지 저렇게 해야 될는지 모르는데 고 옳고  바르게, 요렇게 해야 될 것 조렇게 해야 될 것을 네가 똑 바로 아는 거. 바로  아는 그것으로써 너를 든든케 해라 허리를 동이라 그 말이오. 그러니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말은 그 말입니다. 지나간 언제 오전엔가, 주일날  오전인가 그 설교를 했는데.

 그러기에, 겸손으로 든든케 해라, 겸손 외에 뭐 고함을 질러 가지고 든든케  하는 거 돈 가지고 든든케 하는 거, 암만 해 봤자. 암만 네게 있는 거 세력을  가지고 든든케 한다 해도 절대자이신 주권자 주재자 그분에게 거슬려 놓으면  그까짓 거 뭐 폭풍 앞에 겨지 그거 날아가 버리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분을 중심해 가지고서 그분과 관련성, 그분과 관련성이 바로  됐으면 되는데, 그분과 관련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련성도 있고 모든  만물과의 관련성도 있으니까 그 관련성고 걸 바로 가져서 나설 자리에 딱 요래  섰어야 아무 일 없다. 바로 섰으면 누가 와 가지고 왈칵 밀어내도 결국 밀어낼  그 사람이 나중에 수치를 당해. 왈칵 밀어내니 힘이 모지라서 내가 비켜나왔다  말이오. 나왔으면 뒤에 가서 대주재가 와 가지고서 '예 너 와 여기 섰어?' '내가  저기 섰었는데 저 사람이 밀어내서 여기 섰습니다.' 대주재가 있다가서 '너 왜  밀어 냈어? 너와 남의 자리에 섰어? 빨리 비켜 저기 가서 서.' 이럴 거라  말이요. 그게 심판이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러니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자, 이러니까, 겸손한 사람은,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이러니까, 이분이  전지전능의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심판자요 창조주요 보관자요 또 모두 다  유지시키는 분이시요 이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 있으니까, 이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 돼 있는데. 이분이 굉장하신 분이라 말이오. 이분이 굉장하신 분이니  이분을 알고 이분 앞에 네가 어쩌든지 그분이 아는 대로 그분의 뜻에, 딱 맞춰서  네가 행동하고 그분이 너를 평가하는 대로 네가 바로 네 가치를 알아야 되지  자기 가치를 너무 지나치게 과소평가로 너무 지나치게 적게 평가해도 안 되고  과대평가로 너무 많이 평가해도 안 되니 고 아주 정가를 하도록, 이분을 보고.

이분이 계시니 이렇게 크신 분이 계시니, 모든 것의 주인되신 이분이 계시니,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분이 계시니, 모든 거는 이분으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살고  있는 이분이 계시니 내 일 분 일 초도 이분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내인데 이분이  계시니 이분이 계시니 이분을 알고 이분 앞에서 자기가 자기로서의 나타나서  가지고 있으라, 이것이,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이분이 크신 분이니 이분  앞에 네가 너를 바로 알고 네가 너로 바로 서서 있거라 바로 살아라.

 이게 뭐이냐 하면은 세상의 군왕들. 관원들, 군왕들과 관원들은 세상에 있는  권세자들 말하는 것 아닙니까? 잘난 사람들, 또 여황으로 앉은 자 이런 사람들이  다 말 하기를 뭐 '하나님에게 매여 가지고 있는 그 끈을 끊자.' 또 딴딴 묶어  놓은 이 결박을, 하나님의 그 법칙이 딱 이래 묶어 놔서 꼼짝 못 하는데 '이  법칙을 벗어나자'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이가 비웃는다 말이오.

'웃으심이여 하늘에 계신 이가 비웃으시리로다.' 그 어떤 조직이요 어떤  규범이요 어떤 법칙인데 그 법칙을 제가 벗어나겠다고 하니까 저만 박살이  나지지 소용이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일생 동안 벗어나는 것으로 가지고서  자기를 박살시켰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거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말이오.

벗어날 수가 없는데 벗어날 수 없는 줄 알고 자기 자리에 가서 꼭 찡겨서 자기  자리에 딱 앉아. 거기에가 천국이요 자기의 영생이요 거기에가 평안이요  거기에가 피난처다. 이러니까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으라 말은 하나님이 계약을  선포해 놨는데 그 계약 선포에 어긋나지 안하고 계약 선포에 딱 들어맞는 그  자리에 네가 섰거라, 그게 피난처라 그 말이오. 그게 은신처라. 숨을 자리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래서,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리라.' 이러니까, 거기서 능하신 손아래에 겸손해 있으니까 이런 환경 저런  환경 자꾸 현실이 자꾸 변해지는데 이제 변해지는 그 현실에서 여기에 맞추고  저기에 맞추고. 요래 변할 때는 요래 맞추고 조래 변할 때는 조래 맞추고 요래  맞춰 가지고 어쩌든지 요 현실에도 자기 앉을 자리. 조 현실에서 자기 설 자리,  요 현실에서 자기 할 일 조 현실에서 자기 할 일 요렇게 하다가 보니까 때가  되니까, 그래 세월이 지나갔다 말이오. 세월이 지나가니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는 사람 됐고, 권세와 지위를 주실 수 있는 사람 됐고, 저는 받아서  보관하고 받아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됐고. 이라니까 이것이 뭐이냐  하면은 자격 문제라. 자기 되는 문제라. 자격이 되는 것이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자격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쉽다 그 말이오. 하나님도 당신 법이 있기  때문에 법에 안 어기도록 맞아야 주실 수 있지, 또 준다는 것이 준 게 그  사람에게 화가 되면 안 된다 그 말이오. 준 것이 복이 돼야 되지, 그렇지  않아요? 어린 아이가 칼 달라 할 때에 칼을 주면은 그 칼 가지고서 반드시 손  베일 거라. 칼 줬으면 조금 있으면 반드시 손가락을 끊었든지 뭣이 일이 날 거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걸 줄 수가 없거든 . 모든 것도 다 그래.

 이러니까, '때가 되면 너를 높이시리라.' 그러니까, 네가 높을 생각 하지 말고  네가 너 될 대로 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요런 것 주든지 저런 것 주든지 네게  적당하게 합당하게 자꾸 이와 같이 주시는데 네가 너 되는 것이 문제지 너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그 말은 그 위의 죽  연관성이니까, 겸손한 사람, 겸손한 사람, 자기를 아는 사람, 자기를 아는  사람은, 이거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마음을 움직이고, 이 마음 움직이는 거는  생각도 마음 움직임이요, 또 소원도 마음 움직임이요, 감정도 마음 움직임이요,  또 기쁨도 마음 움직임이요, 슬픔도 마음 움직임이요, 희로애락 이런 모든 것 다  마음 움직임 아닙니까? 마음 움직임, 또 이 몸의 움직임 이 움직임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말이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니까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염려라 말은 자기의 생각을 주께  맡겨 버리라 이런 것은 외부적, 염려라 말은 생각 염(念)자 생각 려(廬)자이니까  네 생각을 주님에게 맡겨 버리라 이런 것인데, 요 속의 뜻은 뭐이냐? 요 일이  너무 걱정이 되고 어려워서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마음이 눌리고 근심이 돼지고  이러니까 '아 이러니 내가, 이, 일은 내가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인데, 하기는  해야 되는데 내가 뭐라고' 이 현실 닥쳤으니까 현실 닥친 이 현실에 마음을 이래  움직이든지 저래 움직이든지. 몸을 이래 움직이든지 저래 움직이든지 움직이기는  움직여야만 되기는 되겠는데, 현실은 지금 움직여야 되는데. 안 움직이면 잘못  움직이면 해가 되든지 의가 되든지 되는 것이니까 이거는 뭐 뒤로 미룰 수도  없고 당장에 움직여야 되는데 나는 모르겠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런 자기의 그 어려움, 자기가 현실을 살아 나가는 것이 도무지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아주 어려움이라는 것을 느끼는 그 어려움을  느껴 가지고, 어려움을 느껴서 '나는 도무지 그거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맡아주십시오' 하는 요것이,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하는 것은 고 어려움이  속에 있는 그것이 제일 요지요. 어려움 없이 주께 맡겨 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말이오. 어려우니 이 어려움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주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하는 그 염려에 대해서는 아주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나로서는 할 수  없다.'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어려움을 느껴서 '이 어려움은  나로는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당신이 이 어려움을 판정해 주십시오.' 그  말입니다.

 염려를 맡긴다 말은 염려를 책임 맡아 달라 말인데, 염려를 책임 맡아 달라  말은 심신의 그 발동을 심신의 동기를 그걸 맡아주십시오 하는 그 말입니다.

내가 생각을 이 생각해야 될는지 저 생각해야 될는지 모르니까 모든 것을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모르니까 거기에 대해서 판정 시비곡직을 판정해 가지고서  나를 '요렇게 요래라 저래라 지도하는 그것을 당신이 하셔야 되지 나는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모릅니다.' 요것을 주님에게 맡기는 것이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 맡기는 것.

 '주께 맡겨 버리라.' 맡겼다 말이오. 맡겼으면, 자 하나 물어 봅시다. 맡겼으면  내가 예를 들면 여기에서 이 말을. 말을 해야 됩니까, 이 말을 해야 됩니까 이  말을 해야 됩니까 어느 말을 해야 됩니까? 그 말할 것을 선택을 해서 '요 말을  해라' 그렇게 어떤 말해야 될 것을 지시해 주는 그것을 맡겼다 말입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당신이 내 아신 말까지 다 해 줄 터이니까 나는 그 말할 필요가  없고 당신이 내 말까지 다 맡아서 주관해서 나는 말에 대해서는 아무 거석할 것  없고 가만히 있으면 당신이 내 입을 써 가지고서 말을 이래 해서 옳은 말 하도록  그래 한다는 말입니까,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 그 말에 대해서 취사선택하는  그것을. 그 말의, 요 말이냐 저 말이냐 그 지도하는 거, 그 말의 지도하는 걸  맡긴다 말입니까? 말에 대한 판정권, 선택 판정권을 맡긴다는 말인지, 말하는  것을 당신에게 맡긴다는 말인지? 뭐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것이지요?  자, 말을 당신이 나 대신 말을 해 주실 터이니까 이제 말을 해 주실 것을, 다  당신이 말해 주시도록 말해 주실 것을 맡긴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또, 이 말을 해야 될까 저 말을 해야 될까 어떤 말을 해야 되는  그것을 판정 선택 결정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맡긴다는 것으로 아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네, 이깁니다. 이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면 행동하는 것도 나는 가만히 있고 당신이 내 행동을 해  주도록 이러면 우리는 뭐이 됩니까? 우리는 그라면 어찌 됩니까? 기계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계적인 사람이 돼.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유기적으로 기록했지 기계적으로 기록하지 안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기계,  그러면, 당신이-영감에도 여러 가지 영감이 있습니다. 축자적 영감, 기계적  영감,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모든 걸 기계와 같이 써  가지고, 기계라 하는 것은 이거 '주:종을 가리키심' 기계 아닙니까? 제까짓 게  암만 여기 있어 봤자 무슨 소리 내요? 내가 이라면 '주: 종을 치심' 소리 낼 수  있다 말이오. 이 기계 모양으로 사람은 아무 주장이나 아무 뭐 주권이나 이래  자유성은 없는데 하나님께서 기계와 같이 이라니까, 제가 틀릴래야 틀릴 수  있습니까? 기계와 같이 써 가지고 성경 기록 했다 하는 기계적 영감이 있고, 또  축자적 영감이라. 그 한 획 한 획, '요 획을 건너라. 건너뛰어라. 또 요거 요래  삐쳐라.' 요래 가지고 축자적 영감이라 하는 요 영감도 있고 별별 영감이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가 믿는 건 뭐이냐 하면 유기적 영감이라. 유기적  영감이라 하는 것은 우리 자유의사를 당신이 다 허락해 가지고서 우리  자유의사에게 깨닫게, 깨닫게 해 가지고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 해 가지고 우리  자유의사가 올바라져서 우리 마음에 '요게 옳다' 요래 기록하도록 한 것이  성경의 기록이라, 그래 유기적 영감을 온 세계가 다 정통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말까지 당신에게 맡기는 거 아니야.

 이러니까, 자, 우리는 무엇이든지 취사선택을 못 하겠다 그 말이오. 이 말 해야  될지 저 말 해야 될지 몰라. 모르는데, 이 말 해야 될지 저 말을 해야 될지,  말을 들어야 될지 안 들어야 될지, 그러니까 이 청각이라 하는 것도, 들어  가지고 깨닫는 청각도 요 듣는 데에 이래 깨달아야 될지 저래 깨달아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말은 한자리에서 같은 말 들었는데 그 깨달아지는 것은 뭐 수십  명이 다 깨달아지는 것이 다르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래 깨달아져야 되느냐,  청각에 대해서도 나는 어떻게 청각해야 될는지, 시각에 대해서도 내가 어떻게  시각해야 될는지. 모든 걸 접하는 접각에 대해 가지고도 내가 어떻게 깨달아야  될지 모르겠다 그 말이오. 이걸 당신에게 맡기는 것이오. '이거 나는 모르니까  이거 맡아주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맡아서 모든 것을 판정해 가지고서. 이래라  저래라 다 판정을 해 가지고서 할 때에는 우리는 뭣 해야 됩니까? 우리는 그래  하라 할 때에 우리가 해야 되겠다 그 말이오. 그래 하라 할 때 해야 돼. 말하라  할 때에 해야 되겠고. 말하지 마라 할 때에 안 해야 되겠고, 또 이렇게 깨달아야  될 때 이렇게 깨달아야 되고 그것이 뭐이냐 하면 성신의 감화인데,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지 말아라.'  이렇게 우리에게, 내가 당신에게, 하나 예를 들면 무슨,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나는 모른다 그 말이오.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행동을 내가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모르고 있으니까, 모르는데, '내가 이래야 될지 모르니까  당신이 이것을 맡아서 나를 좀 지도 해 주십시오.' 하는 그것이 모든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지도해 주십시오.' '지도해 주십시오.' 했으니까, 그렇게  맡겨 놨으니, '지도 해 주십시오.' 했으니까 그 사람이 고다음으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다음으로 할 일은 뭐이요? 예? '지도해 주십시오.' 했으니까  그다음으로 그 사람의 할 일은 뭐입니까? 이제는 안심을 하고, 안심을 하고 자기  볼일을 보러 가야 되겠습니까?, 이제 '지도해 주십시오.' 했으니까 기다리고  대기하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딴 데로 볼일 보러 가야 되겠습니까? 볼일 보러  가야 된다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대기해 있어야 된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대기해 있어야 된다 말이오. 이거라.

 맡겼으니까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지도할는지 그 지도를 지금 대기해야 되겠다  말이오. 대기해야 되겠는데, 당신이 이렇게 시키시는 일이면 내가 똑똑 그대로  판정만 하지 못하지, 판정만 하지 못하지 시켜 주시기만 시켜 주신다면 그 일  내가 실행이라 하는 거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없다 하면은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겠소.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겠고,  기다리고 있어서 당신이 판정하는 것을 내가 깨달아서 알기는 알겠는데 알아도  알고 행하지를 또 못 하겠다 그 말이오. 알고 행하지를 못 하겠으니까 그까짓 거  바로 알아 봤자 소용없다 하고서. '아나 모르나 바로 알아도 못하는 거 뭐,  삐뚤어지게 알아도 못하는 거 못하는 거는 한가지이니까 뭐 맡겨서 바로  판정해서 지도해 줘 봤자 무슨 소용 있느냐' 자 이것이 기독교인지, 네가 바로  모르니 바로 지도해 주시기를 구하고 그분에게 지도를 맡겨 놓고 지도를  기다리고, 그다음에는 네가 지도하는 대로, (○○○씨, 요런 거 모르면  헛일이라.) 지도하는 대로 고대로 네가 움직여야 되는데, 마음도 그대로  움직여야 되겠고 몸도 움직여야 되겠는데 움직이는 그 힘이 있는 사람은 이제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 문제가 없겠고 움직일 수 없는, 움직일 힘이 없는  사람은 어찌 해야 됩니까? 힘이 없는 사람은 부득이 주님에게 구해야 될거라  말이오.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움직일 힘없습니다. 주님이 암만  몸을 이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행동하라 하지마는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럴 때는 당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힘이 없으니 나에게  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맡긴 자는, 맡긴 자는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로는 하나님에게 그 지도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그 간구를  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도와서 감당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하는 것이 둘째로  중요하다 그 말이오  중요한데. 그러면, 우리가 그자 같이 기도할 때에 당신이 '요렇게 해라' 판정을  해 주실 때에 판정한 것을 받아 가지고 그와 같이 자기가 실행을 하려고 할  때에. 그러면, 주님에게 기도하면은. 실행하는 그 과정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힘을 '요렇게 내가 할 힘이 없으니까 요렇게 하도록 해 주십시오'  요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그러면, '요렇게 해라'  하는데 무슨 일을 하라 했느냐 하면 쌀을. 쌀을 짊어지고 가라 이랬다 말이오.

주님이 '쌀을 짊어지고 가라' 요걸 판정해서 짊어지고 가라 하면 쌀을 짊어지고  가라 하는데 나는, 주님이 쌀을 짊어지고 가라 하는 것을 백 석을 짊어지고 가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백 석을 짊어지고 갈 수가 있느냐? 그러면, 내가 백 석을  짊어지고 갈 수가 없다. 이러니까 '주님, 짊어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요렇게 기도를 하는데, 고 사람이 '나는. 백 석을 지고 갈 수 없으니까 백 석을  짊어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하고 이렇게 팔짱을 찌르고 앉았어야  될는지. '나는 찍해야 한 가마니 밖에는 못 지고 가는데 이 백 석을 어떻게 지고  갑니까? 이걸 좀 지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서 한 가마니 그거, 자기  힘으로 한 가마니밖에는 못 지고 가니까 한 가마니를 지고 갈라고. 한  가마니밖에는 지고 갈 힘이 없는데 그 힘을 가지고 한 가마니를 지고 갈라고  이렇게 들이대고 힘을 써서 자기 힘대로 한 가마니를 지고 간다 말이오. 한  가마니 지고 갈 힘을 다 들여서 지금 그 쌀을 지고 갈라고 애를 씁니다. 지고  갈라고 애를 쓰면 하나님께서 '야, 너는 쌀 그거는 못 지고 가니까, 네가 져  봤자 한 가마니밖에 더 지겠나, 이 백 석이 있는데? 너는 여기 가만히 나앉았어.

여기 좀 옆에 나 앉아서 가만히 좀 서서 있어. 내가 져다 줄 터이니 여기 와서  서서 있어' 그라는 하나님인지, 또 한 가마니를 자기는 질 수밖에 없는데 내가  못 지고 가니까, 꼭 지고 가기는 지고 가야 되겠는데 못 지고 가니 애가 터져서  주님에게 '이걸 좀 지고 가도록 해 주십시오.' 이렇게 당신에게 힘을 지고 갈 수  있는 그런 힘을 달라고 이렇게 간구를 이렇게 했으니까 간구한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들여서 그 쌀을 지고 가 봤자 한 가마니밖에 못 지고 갈  힘이지마는 그 힘을 가지고서 이렇게 지고 갈라 하면서 하나님에게 '이 백  가마니를 지고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면 자기가 한  가마니를 지고 가는 힘을 쓰는 그 힘쓰는 거기에서, 자기가 처음에는 한 가마니  지고 갈 힘밖에 없는데 그래 기도를 하고 이래 져 보니까 백 가마니를 지고  갑니다. 백 가마니가 퍼뜩 일어나니까 짊어져진다 말이오. 백 가마니, 한  가마니밖에 힘이 없는데 져 보니까 백 가마니를 져. 백 가마니를 짊어지고 떡  이래 놨습니다. 이래 놨으면 놓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를 '아, 이거 참 내가 쌀을  백 가마니를 질 수 있는 그런 힘이 있었네. 공연히 하나님에게 구할 것 없이  내가 힘이 있었네.' 그라고 제가 지고 온 것으로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고,  또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백 가마니를 지고 올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고, 또 '이러니까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고, '내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내가 연약한 힘이지마는 내 힘을 다  들여서 어쩌든지 지고 갈라고 애를 쓰고 내 힘을 다 들이니까, 내 힘을 들이니  내 힘 속에다가 하나님이 힘을 넣어 줘 가지고서 내가 백 가마니를 지고 갈 수  있는 실력이 됐다. 이거는. 실력은 내 기도를 통해서, 이 사건을 통해서 백  가마니 지고 갈 수 있는 실력을 주님이 나에게 주셔서 내가 백 가마니 지고 갈  수 있는 실력을 내가 얻었다. 이제는 내가 백 가마니 지고 갈 수 있는 그 능력을  주님에게 얻었다.' 이렇게 자기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방편과 그 순서와 또  자기가 그렇게 지고 간 거, 이랬는데, 그럴 때에 내가 힘을 쓰니까 당신이 내  힘씀을 통해 가지고서 줬다고 요렇게 믿는 것이 성경입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 자, 백 가마니를 져다 놓고 난 다음에는 이제 요걸 지고  갈 동안에는 주님이 힘을 주셔서 지고 갔지마는 이 백 가마니 져다 놓고 난  다음에는 '아, 이제 그 힘이 내게 항상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만 그 힘을 백  가마니 질 때만 줬지 백 가마니 지는 것을 끝냈으니까 그 힘은 도로 주님이  가져갔다.' '찾아갔다' 이래 주님이 찾아가신 것으로 그렇게 아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백 가마니를 지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때에 백 가마니를 지고 갈 수 있는 그 힘을 얻은 것은 다시는 주님이 찾아가지  아니하시고 내 능력으로서 영원히 줬기 때문에 내 능력이 그만치 그만한  능력자가 되어졌다 요렇게 믿는 것이 성경입니까? 어떻습니까? 찾아간다고 믿는  것이 성경이요 자기가 그만침 지고간 그 힘은 자기에게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으로 자기가 믿는 것이 성경입니까? 어떤 거요? 주님이 도로 찾아가십니까?  자기에게 머물러 있습니까? 그것도 판정해야 된다 그거요. 어떻게 믿습니까? 자,  찾아가는 것으로 믿는 사람 찾아가는 걸로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네, 그때는  좋지만 나중에 찾아 간다? 또, 자기에게 그 힘은 그대로 자기 힘이 되어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네, 자기 힘으로 되어 있는 것이오. 자기  힘으로 되어 있어.

 그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되어 있지마는 자기에게 앞으로는 백 가마니를 질  수 있는 것 같으면 자기에게 있는 것 가지고만 하지마는 백 가마니 질 수 있는  그보다 더 큰 게 오기 때문에 당신에게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또 백  가마니를 지고 갈 수 있는 그 힘이 자기에게 와 있습니다. 자기에게 와 있는데,  그 힘이 자기에게 와 있는데, 주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와 있는데 그 힘이 그만  자기 힘이 됐습니까?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 연결된 힘입니까?  연결된 힘입니다. 연결된 힘인데, 그 연결을 끊지 안하면 그 힘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걸 똑 바로 알고 신앙생활하는 게 좋다 그  말이오.

 그래서 자, 그러니까, 우리가 맡긴 사람은 어려운 줄 알고 맡겼는데. 맡기는  것은 행동까지 전부, 움직임까지 다 맡겼습니까? 이래 움직여야 된다 하는  취사선택의 판정하는 것을 맡겼습니까? 뭐 맡겼소? 판정하는 것을 맡겼습니까?  전부 그 일을 다 완성시키는 그 일을 맡겼습니까? 예? 자, 완성시키는 것을  맡겼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판정하는 거 맡겼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이거라 말이오. 이거. 똑똑히 알아야 돼. 판정하는 것을  맡겼습니다.

 판정하는 것을 맡겼으니까 내가 할 일은 뭣입니까? 첫째, 대기하고 있을 것.

당신이 뭐라 할지 모른다 그 말이오. 기다려야 될 거 아니겠소? 기다려야 당신이  기다려야 듣겠습니다. 기다리면 들으면 알겠습니다. 알겠는데-그게 영감입니다.

영감-알겠는데, 그러면, 알면 그것을 행할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행할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으면 낙망을 해야 됩니까 주님에게  구해야 됩니까?  그러면 주님에게 구해야 되는데 구할 때는 앉아서 입으로만 구하고 '저걸 좀 해  주십시오.' 요렇게 구해야 되겠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이면서 '내가  모자라니까 하나님이여 도와주시옵소서.'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그 방편으로 구해야 되겠습니까? 주님에게  기도하면 당신이 해 줄 것이니까 하나님을 심부름꾼으로, 내 심부름꾼으로.

하나님을 내 종으로 이렇게 심부름을 하고 이래 부탁을 해서 구하는 것이 돼야  되겠습니까? 내가 힘이 있는 힘을 다 가지고 발동을 해도 안 되니까 날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으로 구해야 되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 하는 걸 구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팔짱 끼고 하나님을 심부름군이나 종으로 이래 삼아서 이거  나는 가만히 있고 '당신이 좀 이거 하십시오' 이렇게 심부름군으로 시키는 걸로  구해야 됩니까?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됩니까? 자,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된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네.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됩니다. 도와주시기를 구한다면  자기에게 있는 힘을 기울여서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기울여서 하는 것이  도와주기를 기울이는 것입니까, 자기 힘은 가만히 두고서 있는 것도 안 쓰고,  이제 자기 힘은 쓰지 안하고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겠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쓰고 모지라는 것을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모자라는 거 구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모지라는  것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라  말이오. 와 또 몰라? 지금. 이게 옳다 그거요. 이렇게 판정해서 신앙생활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 믿음에 뭐 더 하요? 예? 덕을 더 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성적인 신앙이라야 된다 말이오. 알고 믿는 거라야 되지 모르면 소용없어.

그냥 이래 뚝 하는 그런 거는 아무 소용없어  그러니까, 첫째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이 중요하고, 믿음은 그거요. 둘째로는  사람이 중요하고, 셋째로는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 말이오. 암만 바로 알아도 또  치우치면 안돼. 모든 것을 절제 조절을 해서 많을 것은 않고 적을 것은 적고  이렇게 다 조절을 해야 되지 조절 안 하면 기형이 되고 만다 말이오. 절제. 또  뭐이요? 그거 암만 그래 해도 계속을 해야 되지 계속 안 하면 또 소용없다,  인내. 또 뭐이요? 암만 그래 해도 경건이라야 되지 경건 안 되면 소용없다 그  말이오. 또 뭐이요? 암만 그리 잘 돼도 저만 잘 될라 하면은 하나님께서 '너 잘  되는게 내가 무슨 소용이 있노?' 저만 잘 되려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형제 우애를 가졌어야 된다 그거요. 그다음에 뭐입니까?  사랑을 더하라. 그 뒤에는 자기에게 있는 거, 자기도 희생해서 모든 걸 이렇게  주는 사랑은 주는 것. 희생해서 모든 사람을 나와 같이 되어지도록 해 주기를  힘써야 된다 그거요. 이게 뭐 몇 가지입니까? 팔 덕.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셋째로 중요한 것은 알고 믿어야 되지 그냥 맹종으로 하는  그거는 소용이 없어. 그저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저 뭐 '믿사옵나이다. 하면  됩니다.' 이래 가지고 나 그런 권고 많이 받았습니다. 이래 가르치면 '뭐 그렇게  세밀히 해 봐야 저거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으면 성령의 감동으로  알아듣지, 알아듣는 사람은 듣지 못 알아들을 택이 있는가? 이러니까, 그저  '성령이 오시면 다 된다' 그것도 참 소경 믿음이오. 또 뭐 '믿사옵나이다.' 하나  하면 다 된다 하는 그것도 또 소경 놀음의 믿음이라. 그거 다 안 된 믿음들이라.

꼭 알아야 되고고 이치에 맞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도 그저 맹종적인 기도. 맹목적인 기도 하나님이 듣지  안하십니다. 요렇고 요렇고 조건을 딱딱 따져 가지고서, 여기 뭐 세상의 이게  자연계시라. 이 세상의 법에도 무슨 고소장을 쓰든지 진정을 쓰든지 할 때에는  고걸, 딱 진정을 쓸 때에는 '요렇고 요렇고 요렇고 요렇고 요렇고 요렇기 때문에  요것은 해 줘야 되겠습니다.' 할 때에 그것을 위에서 보고서 '아, 요거는 해  줘야 되겠다. 요거 사실인가 조사해 봐라.' 사실 조사해 보고 그렇다면 딱 해  준다 말이오. 이거 보니까 아무 그런 것도 없는데 뭐 이래 진정서라고 이래 해  놓으면 비벼서 내버린다 말이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모든게 다, 고 지식이라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람 다음에 셋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맡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은  맡기기 마련이고. 겸손한 사람은 맡기기 마련이고 맡긴 사람은 대기하기  마련이고 맡겨 놓고 대기하는 사람은 걱정 돼서 당신에게 간구하지 안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간구하는 사람은 제 힘이 모자라니까 당신의 힘을 빌어야  되겠으니까 간구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다해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해 가지고서 노력을  해야 되지 안 하고 이래 하나님께 기도하고 떡 팔짱 끼고 이라고 있는 거는  헛일이라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하는  것을 이제 깨달았겠습니다.

 맡긴 데는 염려를 맡기라 한 것은 염려 속에 알맹이는 근심 걱정이 돼서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그것을 느끼고 맡겨야 돼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해도 되지만 내가 수월할 터이니까 좀 해 주십시오.' '내가 해도 되기는  되지마는 내가 하는 것보다 당신이 하는 게 좀 좋을 터이니까 좀 해 주십시오.'  이거는 소용이 없어. 고 속에 나로서는 절대 할 수가 없다. 이런 어려운 일이다.

'당신이 안 해 주면 안 됩니다.' 하는 요게 있어서 맡겨야지 그거 없으면  헛일이라 그 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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