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할 때 주의 할 것

 

1987. 1. 15. 새벽 (목)

 

본문:로마서 8장 22절∼23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래 읽을 때에 피조물이 무엇 때문에 탄식하며 고통하는가 하는 그런 것을 위에 말했기 때문에 읽으면서 그 뜻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우리는 뭐인가? 우리는 지금 단체인데, 다수가 합하여 하나된 것이 우리인데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우리가 뭐인가? 그 밑에 해석이 있읍니다.

“우리 곧” 우리가 뭐이냐?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처음 익은” 그러면 성령이 오셔 가지고 첫번 역사한 그 역사, 첫번 역사의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그러면 성령이 처음에 와서, 맨처음에 와서 역사하셔 가지고 열매 맺은 것이 뭐인가? 성령이 처음에 와서 역사해 가지고 맺어 놓은 열매가 뭐인가? 역사한 그 결과가 뭐인가?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처음 익은” 익었다는 것은 다 성숙했다 말 아니요? 익었다는 것은 이건 열매가 익었다, 그 사건이 익었다, 또 그 사람의 노력하던 그것이 이제 성숙했다 그런 말들 많이 쓰지 않습니까? “이뿐 아니라” 자꾸 생각해서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그러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 성령의 처음 역사한 결과 성과, 결과라면 다 이룬 거 아닙니까? 성과라면 다 이루어진 열매 과(果)자, 과실 과(果)자,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그러면 성령이 처음에 와서 역사한 것이 무슨 역사했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역사를 성령이 처음에 와서 역사했습니까? 성령님이 처음에 와서, 우리에게 와서 역사한 것이 뭐이지요? 녜, 중생. 중생입니다. 중생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직접 와 가지고 우리와 관련을 가진 그 관련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제일 처음에 관련을 가졌을 때에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역사하신 그 결실은, 그 결과는 뭐이냐? 중생입니다. 그라면 요거 확실합니까? 성경에서 요 성경이 가르치는 고 확고한 그 지식과 깨달음을 가져야 되는데, 지식이라 하는 것과 깨달음이 무슨 말인가? 지식이라 하는 것은 그저 거게 대해서 상식적으로나 또 논리적으로나 그렇게 아는 것이 지식이요,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교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 무슨 미신에 대한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뭐이냐? 다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는 것과 다르다 그거요. 아는 것은 그저 지식하고 있는 것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거게 대해서 어떻게 하나의 각오와 또 결심과 소욕을 가졌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거게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소망하고 어떻게 행할 것을 자기가 알고 작정한 그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그렇게 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처음 익은 열매, 처음 역사해 가지고 익었다, 성숙했다, 결실이 됐다. “결실을 받은 우리까지도” 결실이 곧 중생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중생을 받은 우리까지도” 우리까지니까 중생 받은 영이 요 우리라는 요 복수 속에 들지 아니한 중생된 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녜,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면 이 중생된 영이 몇 뭉텅이나 됩니까? 한 뭉텅이입니다, 한 뭉텅이. 요것을 기억해요.

중생된 영은 구약 시대에 있던 영은 중생에 대한 온갖 역사는 받았지마는 중생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예약적, 약속한 예약적 중생이고 소망적 중생이지 중생을 받지 못했다가 중생은 언제 했습니까? 구약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예약적으로, 예약, 미리 약속한. 예약적으로 소망적으로, 예약적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하신 일은 그 후에 대속하셨는데 미리 앞으로 이런 대속이 있으니 너희들이 이 대속을 바라보면서 이 대속을 너희들이 힘입어라, 이 대속의 혜택을 입어라. 그래 가지고 예약한 것이고, 또 예표로, 그 표시로 예표한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그 사활의 대속, 예수님의 대속을 예표한 것은 무엇으로 예표했습니까? 짐승으로 예표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가지고, 그 짐승 잡은 짐승은 내나 예수님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중생되는 이 중생도 예약적으로 예표적으로 자기네들 것으로 소망은 하고 있기는 있지마는 이 중생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중생은 언제 됐습니까? 언제? 언제, 여게는? 녜, 중생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실 때에 그때에 그들이 중생됐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중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가 중생됐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중생됐습니까? 부활하심으로 중생됐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그 공로를 인해서 우리가 중생됐지 부활하심이 없으면 중생이 못 됩니다.

그러면 구약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중생된 그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가 무엇입니까,○○○? 살아 어째? 살아 뭐? 살아 나왔다고? 녜, 살아 나왔다고 하면은 불신입니다. 그래 내가 그걸 묻는 거라. 살아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같이 들어갔었습니다. 그것은 뭐이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죽은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영이 그때 중생된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택자들 사이에 죄가 다 해결되어진 그것은 성소와 저성소 사이에 가루어 있는 휘장 사람이 손 대지 안하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휘장이 갈라져서 그 사이가 터졌습니다.

그것은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리워 있다는 것을 표시해 놓은 그 성전인데 구약 성도들은 전부 그 성전에서 지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거게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가지고 복종하는데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면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지 짐승의 피를 가지지 안하고 들어가면 죽었습니다. 또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가지 여러번 제맘대로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랬는데 그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이래서 히브리서에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지성소 하나님 앞에 담대히 우리가 어린양의 피를 힘입어서 들어가고 출입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우리가 접할 때에 우리 단독이 하나님을 접하지 못합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하나님과 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붙이지 안하면 그 기도가 헛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해 놓고, 많이 해 놓다 보면은 그만 기도를 해 놓고 먼저 한 거는 잊어버리고 자꾸 기도를 얼마든지 했습니다. 이래 하고 먼저 것은 다 잊어버려 버리고 맨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한 마디 하다 보면은 많이 해 놓은 기도는 다 자기가 잊어버리기 때문에 마지막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데에 다 거기에 포함될 수 없는 그런 일이 됩니다. 왜? 자기는 기도해 놓고 잊어버려. 본인이 잊어버린 그걸 무엇을 그게 포함되겠습니까?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만 자기가 하나님을 생각지 안하고 자꾸 기도만 이래 마구잡이 입에 나오는 대로 중얼중얼 자꾸 이래 주 대다가 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실컷 기도해 놓고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게 기도인 줄 알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 이 마지막에 결말도 지우지 아니하고 그만 그냥 그라다가 끝마치는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다 무효의 기도입니다.

다만 자기가 그렇게 명상한 일은 되고 자기가 그렇게 참된 도리를 생각한 것은 되기 때문에 연습도 되고 또 익숙하게도 되고 하나님의 도를 성경 읽듯이 그 참된 구원의 이치를 말하고 생각하고 자꾸 이렇게 했으니까 익숙해지기는 익숙해지지마는 기도는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자기 기도한 것이 잊어버리기 전에, 잊어버려지기 전에 기도해 놓은 그것을 자기가 뭣뭣을 기도한 걸 똑똑히 기억하고 아는 그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딱 결론을 지워 버립니다. 결말을 지웁니다.

그라고, 자기가 기도하다가 잊어버렸어. 뭘 했는지 몰라. 안 돼. 그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면은 자기가 모르는데 자기가 모르는 그 무슨 신청을 합니까? 무슨 간청을 합니까? 자기가 아는 간청해야 되지 자기 모르는 간청은 소용이 없어.

이러니까, 뭘 했는지 모를 때에는, 모르기는 다른 거 하다 보니까 그거 먼저 것 잊어버리는 수 있고 또 기도하다 보니까 이런 거 저런 거 생각이 나서 그 생각하다 보니까 기도하는 거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도하다가 생각에서 생각으로 나가는 것을 가리켜서 연상이라 그렇게 합니다.

연해서 생각한다. 그러면 이 기도하다가 무엇을 하나 생각하니까 엉뚱하게 그로써 자꾸 생각 생각이 연상돼 나가서 저 엉뚱한 데 딴데 가서 있습니다. 딴데 가서 있어. 그것이 다 헛된 기도라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 뭐 이리 갔다가 저리 가서 저게 가서 가 버리니까 저리 끌고 갔고 저리 끌고 갔고 해 가지고 이랬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끄트머리 아무리 결론을 지워 봤자 소용이 없다 그거요. 그 딴게 됐는데 뭐이 됩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기도하는 데에 그 기도하는 그 내용이 너무 길면 중간에 잊어버리기도 쉽고 딴거 되기도 쉽기 때문에 짤막짤막 하게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청을 해라.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소용이 없어. 주님의 이름의 그 간청이 아니면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기도를 짤막짤막하게 기도를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그렇게 해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편지를 했는데 거게 쓰기를 ‘간단하게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는 것을 결론을 지우는 그 참 가르침을 받아서 감사하다’ 하는 그렇게 편지한 사람의 편지를 내가 봤습니다. 신고함에 넣어 놔서 내가 읽어 봤는데. 그걸 깨달은 사람.

그러기 때문에 길게 하지 말아요. 기도하는 데에, 기도하다 보면 그래 될 수 있는 대로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그 내용이 모르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내용을 못 알아듣도록. 그러니까 기도하다가 기도하면서 그 내용은 뭐 이러니 저러니 하는 그런 것을 똑똑히 무슨 말 하는지도 그저 웅얼웅얼하면서 응응응응 응응응응 .....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구로 이렇게 해 가지고 소리를 내 기도할 때는 그렇게 기도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거는 왜 그런가?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도를 했지마는 기도하다 보니까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이제 주님을 향해서 하던 기도가 사람에게 ‘지금 사람이 듣고 있다’ 하는 그걸 자꾸 말합니다. `사람이 듣고 있다.’ 이라다 보니까 ‘사람이 듣고 있으니 사람에게 네가 자꾸 말을 해라' 이래 가지고 그것이 설교는 될지라도 기도는 안 됩니다. 설교와 기도가 다릅니다.

그라다 보면 사람에게 들어나 봐라, 들어 봐라, 사람에게 들어 봐라 하는 기도가 되고 사람에게 외치는 기도가 돼 버리면은 벌써 그 기도에 하나님과 나와의 간구하는 이 중요한 간구성이 다 없어지게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 ‘들어라’ 하는, 사람에게 설교하는 거와 같은 그런 성격으로 탈선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는 내용이 소리 낼 때에는 사람에게 들리지 아니하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또 소리를 안 내고 기도할라고 이래 하면은 기도에 순서가 잘 되지 안할 때에는 부득이 소리를 내서 기도하면서 자기만 아는 소리를 내고 내용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안하도록 그렇게 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것은 소리 안 내니까 순서가 엮어지지 안하고 그만 자기 혼자 쪽 순서가 엮어지지 안하고 생각이 뱅뱅뱅 돌아서 또 그 생각하고 그 생각하고 자꾸 뱅뱅 돌아가고 그 기도가 그 순서적으로 진달되지 않는다 그 말이오.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소리 내야 좀 처음에는 되니까 응응응응 이래도 속으로 말해. 속 말 하고 있다 말이요, 속 말로. 응응응응 이게 안 될 때는 이리 거석하고, 또, 그라다가 참 이제 어쩔 때는 자기도 모르게 무엇이 소리가 콱 튀어 나올 때도 있기는 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그 일을 안 하도록 할라고 응얼응얼 이래 하고, 또 이렇게 기도하다가, 그렇게 기도하다가 되다 말이오. 소리도 내니까 되. 나중에 기도를 많이 하고 나면 소리 내는 것도 되다 그거요. 소리 내는 것도 되니까 인제 소리를 내지 안하고 자기 생각으로 기도합니다. 생각으로, 생각으로 기도해도 그 생각이 동가리가 끊어지지 안하고 그 생각이 정확하게 이 생각 저 생각 자꾸 생각으로 자꾸 이와 같이 기도를 합니다. 그때 그게 그 기도가 정상적인 기도입니다.

또 생각으로 자꾸 기도하는데 나중에 오래 동안 기도하면 생각하기도 힘이 든다 그 말이오. 생각하기도 힘이 드니까 이 생각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 생각하는 데에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자기를 인도하는 그 인도의 기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구할 수 없는 구할 줄 모르는 것을 대신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우리가 구할 바 알지 못하는 것을 성령님이 대신해서 기도한다” 그러면 그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데 있습니까? 녜, 로마서 8장 26절에 있답니다. 성령이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성령님이 대신 기도해 주시는데 나는 자꾸 아멘만 합니다. 성령님이 대신 기도하는데 나는 ‘아멘’ 그러면 우리가 대표 기도할 때에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은 나도 거게 동의하고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는 것을 발표하는 것이 아멘입니다. 그 찬성하고 소원한다는 그 표시로써 아멘 합니다. 그 설교할 때도 아멘 하는 것은 그 설교에 나도 동의요 나도 같은 소원을 가졌다 할 때에 아멘으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멘 합니다. 아멘 하다가 아멘 그것도 나중에는 됩니다. 되니까 우리 육체는 약하기 때문에 아멘도 되다 말이오. 되니까 나중에는 성령이 인도하실 때에 그저 속으로 아멘 합니다. 아멘 하고 찬성합니다. 거게서 찬성을 해서 동의한다 그 말이오. 동참한다 그거요.

이래서, 성령으로 기도해서 나중에는 긴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며칠 동안 단식하면서 처음에는 소리 지르다가 나중에 소리 못 지르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오래 동안 여러 날 단식하면 기진해서 아무런 자기가 뭣도 아무것도 할 힘이 없으니까 이제 그때나 심령은 맑습니다.

심령은 밝아서 깨끗한데 그 심령이 이제 주님을 향해서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셔서 이렇게 이렇게 해라 가르쳐 주시는 성신으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던 것을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감동으로 가르쳐 주셔서 그 기도를 이렇게 하다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그 힘도 따라서 하는 것도 힘이 없어 따라 못 하게 될 때에는 이제는 성령님이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시는 것을 나는 거게다 찬성만 합니다.

아멘 동참해서 아멘 아멘 하다가 나중에는 아멘도 할 힘이 없으니까 그저 속 마음으로 성령님이 기도할 때에 ‘나도 그걸 소원합니다. 그 찬성합니다.’ 그 기도에 동참해서 성령이 인도하는 기도를 자기 기도로 삼는 그 기도로서 이제 오래 동안 기도하기를 뭐 며칠이든지 몇십 일이든지 이렇게 단식하면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데에 소리 내서 하는 기도는 조심할 것은 잘못하면 기도가 안 되고 옆에 사람에게 들어 봐라 하는 설교가 되기 때문에 그라면 기도는 헛일이오.

헛일이고, 또 소리 내서 기도하는 사람은 옆에 사람이 없는 데에 가 가지고 기도합니다. 옆에 사람이 없는 데 가서 기도하는 것은 ‘들어라 봐라’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은 심령이 이상합니다. 들을 사람이 있으면 그만 그 사람에게 ‘들으라’ 하는 그 기도를 하기 쉽다 그거요.

그러나 사람이 없는, 사람 없는 빈들 산에서나 깊은 산에 아무도 없는 데 고함 질러 봐야 들리지도 안하는 그런 데 가서 고함 질러 기도하는 데에는 사람이 들어라 봐라,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사람에게 들어라 하는 그 미혹은 주지 못합니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미혹은 안 당한다 말이오.

안 당하니 그때는 무슨 미혹을 당합니까? 그때는 미혹당하기를 입으로 말하고 자기 귀로 듣습니다. 입으로 말하고 들어. 자기가 입으로 말해 놓고 자기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해 놓고 귀로 듣고 자꾸 입에서 말하고 귀로 들어오고 입에 말하고 귀로 들어오고 자꾸 이렇게 돌아가지 저 주님을 향해서 하는 기도는 되지 못하고 자기 혼자 놀음이라 말이오.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서 혼자 감상하는 것처럼. 자기 혼자 노래 부르면서 감상하는 것처럼, 한학자들이 자기 입으로 시를 읊으면서, 시를 읊으면서 그 시가 하도 잘돼 가지고 있으니까 시를 읊으면서 속으로 손뼉을 치면서 크게, 그전에 한문 선생들은 붓이 있어요, 붓. 붓이 있으니까 이 신명이 나면은 글을 지은 걸 글을 매길 때에 이라면 글을 매기면 잘 지었다 하는 것은 돌뱅이를 쳐요.

돌뱅이를 치고 또 그거 더 잘 됐으면 뭐 좋아서 못 견뎌서 그 붓으로 때립니다.

때려 여기 붓으로 점을 쳐요. 툭툭 이래 때리면서 그래 가지고 그래 매깁니다.

인제, 이러니까 그리 시를 읊으면서 자기 입으로 읊고 마음으로 감상하면서 기쁘고 소리를 내서 들을 때 자기 귀로 들어오니까 자기 귀로 들어오는 것을 감상하고 또 소리를 내서 시를 읊고 하는 거 모양으로, 성악가들도 자기 혼자 자기가 노래를 부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마음으로 감상하고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감상하고 이렇게 하는데 처음에는 듣고 감상하는데 이 소리내는 데에 힘을 쓰지 안하고 감상하는 데 힘을 쓰다 보니까 소리는 그까짓 거 뭐 중점을 두지 안하고 뜻에 대한 감상만 하기 때문에 발성 연습을 하는 사람은 저 귀에 안 들리는 데 가서 연습해야 된다 합니다. 저 폭포 밑에서나 소리 들리는 데 암만 소리를 내도 귀에 들리지 안하니까 뭐 잘하는지 못하는지 표도 안 나고 자기가 발성만 하니까 그거 소리 못한 것 생각하면 안 돼, 그만. 잘한 거 자꾸 소리만 많이 내 가지고 발성 연습만 많이 하면은 목청이 터져 가지고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혼자 소리를 내서 기도할 때에는 자기가 잘못하면 그 소리를 자기가 입으로 하면서 자기 귀로 듣고 하니까 자기 혼자 놀음이라. 입으로 소리 내고 귀로 듣고 귀로 듣고 자꾸 뺑뺑 돌아가지 저 객관인 상대, 내 주관 놀음뿐이지, 주관 놀음뿐이지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가 안 되기 쉽다 그거요.

그러니까 혼자 소리 내 기도할 때에는 자기 귀로 듣는 그거 아니고 어짜든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해서, 기도라 하는 것은 꼭 대화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기도는 대화. 하나님하고 나하고 서로 대화해.

주님이 들어야 되고 또 주님이 들으면 나한테 응답하시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주님이 이렇게 하신다. 그 하는 것을 소리가 들립니까? 소리는 안 들리지마는 내가 이렇게 기도할 때에 성령의 감화가 ‘그것은 잘못 됐다. 그거 기도하면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할래?’ 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문제를 생각하면 또 그 문제를 기도하고 또 이렇게 자꾸 기도하면은 이것만 기도하면은 기도할 때에 ‘네가 이것 기도하는 데 여게 대해서 이 문제는 어쩔래? 이 문제는 어쩔래?’ 거게 대해서 문제 있는 걸 또 알려 줘요. 그러면 또 그 문제 기도해. 그 문제 기도하면은 또 저 문제는, 자꾸 이래 가지고 이것 저것 구비해서,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걸 성령이 우리에게 기르쳐 주셔 가지고 빌 바를 알아서 기도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을 다 한다 그거요.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걸 주의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여게서 기도할 때에 그 기도, 설교 듣고 난 다음에는 그만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기는 좋습니다. 왜? 자리를 옮기면 그만 잊어버리기 쉽다 말이오.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충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좋고, 그보다 더 성숙한 것은 자기가 들은 말씀을 꼭 강직을 해 가지고 그 자리서 기도하지 말고 그 자리서 감동받은 것은 다 버려 버리고 그 자리에서 배운 진리만 거머쥐고 그것만 기억해 가지고 어데로 갑니다. 어데로든지 가 가지고 뭐 여기 우리 예배당은 넓어 놔서 낮에는 아무도 없는 데 들어오면 무서워요. 저 구석이 어떻게 감감하이 먼지. 아주 무서워. 이 산골에 가는 거나 같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저 구석으로 가 가지고 그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그 말씀을 다시 되새기면 자기 마음 속에서 생각이 나와요. 그 진리를 말하면 그러면 여기서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깨닫고 느끼는 것만침 깨닫고 느껴지고, 그게 끝이 아니고. 깨닫고 느껴지고, 더 자꾸 생각하며 기도하다 보면 그보다 훨씬 더 깨닫고 느껴지고 나중에 자꾸 더 기도하고 생각하다 보면은 거게서 이제 자기가 설교 들을 때 깨닫지 못하던 모든 것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고 이렇게 소원하게 되고 그래 가지고 거게서 자꾸 많이 받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 자꾸 받아 가지고 거기서 깨달아 가지고 자꾸 설교하니까 항상 설교해야 듣는 사람은 항상 모르는 소리하고 또 새 소리 하고 하는 것은 헛소리가 아니고 자꾸 기도 가운데 성령에게 배워 가지고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들이 이것이 없으면은 그 교역자가 타락하고 항상 해 봤자 능력있는 목회를 못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들어 가지고 가서 거기 가서 기도하면서 처음에는 이래 기도하면서 소리 내지 안하고, 어릴 때는 소리 내지 안하고 기도할라 하다 보면은 그만 졸아버린다 말이오. 소리 내지 않고 기도하다 보면은 자꾸 이라면 암만 기도할라 해도 기도가 자꾸 엮어서 진도가 전진이 돼야 되는데, 자꾸 이래 순서가 자꾸 엮어져서 기도를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되고 뱅뱅뱅뱅뱅 자꾸 돌아가서 자꾸 그것만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서 그만 그라다가 보니까 나중에 그만 졸기 쉽다 말이오. 그럴 때는 이제 소리를 내서 순서를 엮으라 그 말이요, 소리를 내서.

소리를 내서 순서 엮는데 사람 없는 데 가서 하면은 소리를 똑똑히 어음을 내서 해도 된다 그거요. 뭣이 어떻고 어떻고, 이○○○집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가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있는 것은 자기가 자꾸 그 도를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입으로 말한 것이 자기 귀로 들어가고 이래 해도 배어집니다. 자기가 자꾸 여러 번 말하면 배어져요. 속에 자기 마음에 배어지고, 생각에 배어지고, 지식에 배어지고, 그 성질에 배어지고, 뜻에 배어지고, 사상에 배어지고, 그 모든 욕심에 배어지고, 자꾸 욕심이 그리 되고, 이 배니까 그 사람으로 성화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유익하나 그 기도가 잘못하면 기도는 되지 안하고 사람들에게 들어나 봐라 하는 설교가 되기 쉬우니까 그게 좀 위험성이 있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그러니까 소리내서 그리 하는 기도는 옆에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가 가지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사람 없으면은 사람에게 들어나 봐라 ‘네가 이래 기도하는데 저 사람이 듣고 있다. 듣고 있으니까,’ 나중에 그라다 보면은 기도하기로 시작한 사람이 가다가 보면 설교하고 있다 말이오.

다른 사람에게 자꾸 들어라 하고 자꾸 내서 이거 지금 설교를 지금 하고 있는 게 되고 만다 말이오. 그러면 그만 기도는 헛기도가 된다 그거요.

또 그라고, 그러면 사람 없는 데 가 가지고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면 나중에 그 기도에 위험성이 뭐입니까? 그 위험성은 주관 놀음만 되고, 기도라 하는 것은 대화라. 서로 대화로 이래 말하면 저 상대방에서 듣고 자꾸 이래 대화하는 것인데 그 대화 상대방 없는 데 저 혼자 말하는 게 된다 말이오. 그걸 구수렁이라 이랍니다, 구수렁이.

저는 저거 있는 동리에 들구수렁이라 하는 사람이 있어. 들구수렁이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들에 가 일하면 뭐 이렇고 이렇고 자꾸 혼자 자꾸 구수렁거려. 그 혼자 인제, ‘이 돌은 이래 놓으면 좋은데 뭐 이래 놨을꼬?’ 또 ‘이거는 이라면 좋은데 이래 놨을까? 이거는 이래야 될세 저래야 될세.’ 자꾸 혼자 자꾸 이래 구숭거리며 자꾸 일하기 때문에 이 별명이 들구수렁이라.

들구수렁이.

그런데, 그거 모양으로 그만 그렇게 구수렁, 자기 혼자 자꾸 말하고 귀로 듣고 자기 감상하고 자꾸 그라니까, 그것도 좋아요. 그것도 자기가 성화가 됩니다.

자기가 자꾸 그렇게 하는 가운데 성화가 되고 변화가 되고 좋기는 좋아요.

좋으나마 기도는 안 된다 그거요. 알겠습니까? 이해가 돼요? 이러니까 그때에 자기는 그렇게 할 때는 그것이 안 되도록 노력 하고 자꾸 그와같이 자기 혼자 놀음, 혼자 놀음. 기도라는 것은 쌍방 놀음인데, 쌍방, 쌍방 놀음인데 혼자 놀음이 되기 쉽다 말이오. 그러면 들을 사람이 있어야지, 주님이 들으셔야 되는 건데 안 들으니까 소용이 없다 그거요. 헛기도 되기 쉬워.

그러면 그럴 때에는 뭘 조심해야 됩니까? 자기 귀로 감상하는 귀로 들어오는 그거는 다 치워버리고 자꾸 주님에게 지금 맞대내기로 주님에게 ‘주님, 이렇고 이렇습니다.’ 이러면은 또 주님이 대답을 하시요. ‘이렇고 이렇습니다' 하면 주님이 ‘야, 그런데 이렇고 이렇다. 너 이런데 뭐,’ `이렇게 이렇게 이걸 좀 주십시오.’ ‘야, 그러면 네가 이걸 주면은 네가 어떻게 할 것이고? 이거 주면 네가 위험하지 안하느냐?’ 예를 들어서 하나 돈을 달라 하면은 ‘돈 주면 네가 돈으로 가지고 어떻게 쓰면은 그 돈을 가지고 쓰면은 그 결과가 어찌 될 줄 아느냐?’ 그러니까 나중에 가서 기도하다가 보니까 ‘주님이여, 너무 돈이 없어서 죄지을까 두려우니 없게도 마시고 또 돈이 너무 많아서 죄지을까도 모르니까 많게도 마시고’ 자꾸 이런 소리 중얼중얼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론으로 ‘주님이여, 내가 여게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돈이 있어야 될란지 없어야 될란지 가난한 게 좋은지 부요한 게 좋은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맡겨 놓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적당하고 조절하셔서 적당하게 주십시오.’ 하고서 돈에 대한 기도는 떠나가 버리고 딴것 하게 된다 말이오. 자꾸 딴것.

이는 아무리 구해도 구할 만한 것이고 아무리 받아도 좋고 해롭지 안한 것이 있어. 생명에 속한 하늘에 속한 것은, 자, 믿음은 자꾸 받으면 혹 위험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받으면은 위험할 수 있소 만에 하나도 위험성이 있습니까 받을수록이 좋습니까? 받을수록이 좋아.

또 사랑은 받으면 위험합니까 받을수록 좋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몇 가지 있습니까? 사랑은 몇 가지 있습니까? 사랑은 몇 가지 있소? 저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 사랑은 몇 가지. 뻐뜩 들어 봐, 자꾸. 하나가? 어. 두 가지.

이런데, 사랑 말을 말이오. 먼저 바오르 오세의 교황이 한국에 와 가지고 말한 말 가운데 그게 다는 다인지 몰라도 그 나왔는데 신문에 나오고 뭐 이거 그 모든 기독 신문에 나오고 나왔는데 그걸 제가 뭐라 했는고 읽어 보니까 거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저 불교에서는 대자 대비요. 사람이라는 것은 자비하게 살아야 된다. 대자 대비라. 불교가 대자 대비라. 이것만 말했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 사랑을 말하지 안했어.

갈라디아서에 읽어 보면은 바울이 그 모든 박해를 당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데에 박해당했지 십자가 아니면 박해는 없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사람 구원이 아니고 마귀 놀음이지, 암만 해 봤자 그거 마귀 놀음이기 때문에 마귀가 핍박할 리 없어. ‘잘한다 잘한다’ 이렇게 칭찬해 주지.

그러니까 사랑을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없는 사랑은 마귀 사랑입니다. 알겠습니까? 대속이 없는 사랑은 마귀 사랑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자꾸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고 십자가의 대속을 강하게 주장하는 데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뭐이라 했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그거 뭐입니까? 사랑이 없으면 뭐입니까? 율법. 알겠소? 율법.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그 도리를 말을 하면서 진정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하면은 율법이 되고 만다 말이오. 내가 설교를 암만 이렇게 해도 여러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하는, 구원해서 구원을 이루어서 복되게 하려는 그 사랑이 속에 없이 자꾸 이 구원의 도리만 말하면은 그거는 율법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 은혜와 상관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거게는 구원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말하나 사랑이 그 속에 주장이 돼 가지고 하지 안하면은 율법 주장이 되고 말고 또 아무리 사랑을 말하나 십자가의 도리가 없으면 뭣 됩니까? 뭣 됩니까? 배암 사랑 된다 말이요, 배암 사랑.

배암 사랑이 뭐이요? 배암 사랑은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배암에 미혹되고 난 다음에는 사랑한 사랑이 있으니까 미혹되고 난 다음에는 하와가 아담을 사랑해 가지고 한 일이 있고 또 아담이 거기 미혹받아 가지고 한 사랑한 일이 있습니다.

하와가 아담을 사랑하고 아담이 하와 사랑한 일이 있는데 그 사랑은 그 사랑의 결과가 죽였습니까 살렸습니까? 죽였습니까 살렸습니까? 죽였습니다.

뭐 했는데? ‘하, 나만 먹고 할 게 아니라 이 선악과 나만 먹을 게 아니라 남편도 줘서 먹어야 되겠다.’ 또 남편은 ‘그 선악과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는 거 이거 먹어?’ 야단을 쳐야 될 터인데 하와가 상글상글 웃으면서 요 앵을앵을 하면서 요 쌓아니까 요 아담이 그만 하와의 사랑에 녹아서 덜컥 받아 먹었다 그 말이오.

그게 하와는 아담 죽였고 아담은 하와 죽이는 거라. 알겠어요? 이러기 때문에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는 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알맹이가 되지 못한 사랑은 그 무슨 사랑입니까? 배암의 사랑, 정욕 사랑, 암컷 수컷이 사랑하는 정욕 사랑. 또 혈통, 내 새끼라 하는 혈육 사랑. 또 뭐이요, 하나는? 동류 사랑. 자꾸 접촉하니까 서로 사랑하게 됐다 말이오. 그거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것은 다 배암 사랑이요 죽이는 사랑입니다. 요렇게 구별해 가지고 예수를 믿어야 돼요.

뭐 시간이 많이 지나가서 그만 안 됐습니다. 또 자꾸 나와요. 나오면 지금 오늘 아침에는 지금 이거 중요한 것을 지금 가르쳐야 되는데 자기를 알아야 돼요, 자기.

자기를 알아야 되는데 자기가 뭐인지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어떻게 삽니까? 이런데 모두 자기를 모르고 살아요. 이 자기인지 저 자기인지? 누가 가서 말하면은 ‘이렇고 이렇고 이런데 이거 좀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새벽기도 안 나오면 안 됩니다.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하니까 ‘남의 사정 알지도 못하고 뭐 나는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가나? 나는 몸이 피곤하고 뭐 어짜고 이래 가지고 안 나가지.’ 다 그거 피곤한 거 다 그런 거 고개를 넘겨 가지고 나온다 그 말이오. 저만 피곤한 게 아니라.

‘너만 피곤하나? 네까짓 게 너는 뭐하고 사느라고 그래 피곤하노? 너만 밥먹나? 다른 사람도 일한다.’ 이라지마는 그래 놓으면 ‘아따 야 목사 그 권찰 불량하더라. 막 그랬더니만 막 나를 퍼붓더라. 막 혈기를 가지고 퍼붓더라.’ 이랄 터이니까 할 수 없어 그 소리를 안 한다 그 말이오.

그 말 하면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게 뭣입니까? 그게 자기를 죽이는 자기입니까 참자기입니까? 저 새로 온 분 저분, 대답해 봐. 죽이는 자기인가 어떤 자기라? 여기 안경쟁이 옆에 앉은 사람 말이오. 그래. 자기를 죽이는 자기라.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거짓된 자기, 가장한 원수인 자기, 요래 자기를 똑똑히 알아야 돼. 이러니까, 그만 그러니까 할 수 없어 그 말도 못한다 그 말이오.

그래 엊저녁에 내가 들으니까, 어떤 사람 말 들으니까 ‘오늘 저녁에는 산에 기도하러 갑니다’ 꽃마을에 기도하러 간다 해서 내가 고맙게 생각하고 ‘기도하러 가? 참 그 사람들은 은혜를 받는다.’ 이라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뭐 산에 이렇츰 추운데 기도하러 간다’ 그게 뭐이 대단해서? 저도 여기 서부교회 부임하고 난 다음에, 그때는 아마 몇 해가 됐는지 몰라요.

대개는 하루밤도 집에 안 잤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여기 그때 모두 권사님도 모두 이런 분들은 다 따라다녔어. 같이, 아예 저녁 먹으면 그만 저녁 얼른 설겆이 해 놓고서 먹고 난 다음에는 보따리 싸 가지고, 그때는 비니루가 없어요. 요새 뭐 비니루가 있어서 참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비니루 없는데 이거 이거 뭐 담요나 지금같이 그리 좋습니까? 이놈 싸서 두부렁이 짊어지고서 저 산에 가 가지고 거기서 항상 밤새껏 기도하다가 또 새벽되면은 여게서 네시 반에 새벽기도 볼 터이니까, 그때도 네시 반이야. 네시 반이지? 그때 네시 반에 했어요 네시에 했습니까? 그때 네시에 했던가? 어? 그때 네시, 그때. 네시 반이 아니고.

네시에 또 설교하러 옵니다.

오면 우 수십 명이 갔다가 또 새벽에 내려와 가지고 또 여기서 또 예배 보고 낮에 부지런히 일하고 난 다음에, 또 낮에는 뭐 일하고 이렇게 할라 하니까 기도하러 그렇게 한적한 곳에 갈 여가가 없으니까 또 저녁 먹으면 가고. 몇 해 동안을 별로이 빠지지 안하고 계속 갔었습니다. 그때도 겨울도 있었고 그때도 여름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비 올 때도 있고 눈 올 때도 있었어. 그래도 계속 갔었어. 뭐 얼마 여러 날? 아니야. 계속 저녁마다 밤마다 계속 갔었어. 주일날도 가고 토요날도 가고 언제든지 가 가지고, 가기는 그만 산에 가 가지고 거기서 그만 기도하고 이래 지냈어.

이런데 요새 사람들 어떻게 게을한지? 내가 저 양산동에도 보면 목사라 하는 사람들이 게을해서 거기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그라고 왔다가는 퍼뜩 가고 또 이라는데, ‘심방 가고 전도하기 위해서 그란다’ 심방 전도 그거보다도 기도 많이 하는 게 좋습니다.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역사하셔야 되지 자꾸 돌아다니기만 돌아다니면 일만 는다 말이오.

그런데 어제도 보니까 뭐 중간반 반사들은 한 육십 명 갔다던가, 학생들하고. 왜 육십 명만 가요? 어짜든지 방학 때 많이 데리고 가십시오. 그저 산에도 가서 가고, 좀 이거, 세상에 딱 들어붙었었던 게 이런 방편 쓰고 저런 방편을 쓰든지 어짜든지 세상에 들어붙어 있는 학생들 막 잡아 떼면 그거, 뗄라 하면 어째요? 여기 혹이 붙었는데 혹 뗄라 하면 아파요 안 아파요? 아파요 안 아파요? 이거 지금 자기 몸에 암병이 들렸는데 암병 그놈을 떼 내트릴라 하면 아파요 안 아파요? 아파요. 그라면 아파도 떼내 버려야 돼요 안 아프구로 하기 위해서 그만 냅둬야 돼요? 냅두면 죽어. 이러니까 이 세상에 들어붙어 있는 거 이거 떼기 위해서 어쩌든지 이렇게 막 이래 해 가지고 이래 좀 해야 될 터인데 그 하는 열심이 없어.

방학 동안에 유치반 중간반 일부 이부 전부 이거 그거는 방학 기간만 거석하니까 방학 기간에 죄짓고 전부 방종하는데 방학 동안에 그랄 여가 없이 자꾸 끌어들여요. 공부는? 공부 하나님 오면 다 돼. 그까짓 공부해 봐야 공부 그게 뭐 그거 대단한 거라? 하나님이 크요 공부가 크요? 하나님을 내 하나님 삼는 게 크요 공부를 지식을 내 지식 삼는 게 크요? 어떤 게 큽니까? 지식을 자기 지식 삼는 게 더 유익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손으로 한번 들어 봐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 삼는 것이 더 크고 복되다는 걸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이거야!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해요, 확신을 가지고.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봐, 엊저녁에 약속을 했지만 오늘 아침에, 뭐 오늘 아침에 온 사람, 엊저녁에 온 사람 다 죽었는가, 손 든 사람 다 죽었는가 거짓말쟁이인가 그라면 오늘 아침을 굶을 건가? 이렇게 못났다 그 말이요, 이렇게.

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옳은 일에 대해서는 이렇츰 약하고 죄짓는 데에는 어떻게 강하고 빠르고 날랜지? 그게 벌써 다 구원이 다 더럽게 이루어지고 예수를 더럽게 믿는다는 증거 아니요? 이래도 예수를 잘 믿는 척하고 있다 말이오.

있다가, 뭐뭐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산에 가는 것도 ‘하, 우리 산에 가서 기도합니다.’ 대단한 줄 알아. 우리는 그때 여러 해라.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그때 뭐 모르겠소. 십 년이 됐는지 몇 해가 됐는지 계속해서 그렇게 했어.

또 지금 또 그래 하는 사람, 지금 저 서장 같은 데는 가면은 아무것도 먹지 안하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다가 죽은 사람 많아. 지금 거게서 뭐 풀뿌리니 나무 잎사귀니 그런 거 이렇게 그런 거 먹고 똑 짐승 모양으로 터래기가 하야이 사람인 줄 모르고 똑 짐승으로 알 수 있는 그만침 그래 가지고 그런 거 먹으면서 이 모든 세계 인류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그런 성도들이 많다 그 말이오.

그 산다싱도 가 가지고 많은 사람 만나 봤는데 보니까 기도하면서 몇 해나 됐는가 하니까 몇 해가 되는지 그거는 자세히 모르고 벌써 나이도 몇 살인지도 모르고 그 짐승같이 하얀데 기도하고 있더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성경을 모르면 거기 가서 물어. 거기 가 가지고 거기 깊은 산, 히말라야 산이라면 굉장한 산인데 세계 제일 높은 산인데 거기 가 가지고 가서 만나 가지고 성경 묻고 이랬는데, 그때는 가서 묻고 이랬는데 그 뒤는 한번 찾아 가니까 벌써 그 굴에서 별세해서 해골이 돼 가지고 가라앉고 있더라고. 그래서 가서 그만 못 만나서, 자기 성경에 난제를 물으러 갔다가 그 난해절을 묻지를 못하고, 언제든지 거기 가 묻고 이랬는데 물어 보지를 못하고 말았어요.

그런 사람이 많은데 이다음에 인제 부활하면은 그 우리가 일한 척하지마는 참 은밀히 일한 사람이 얼마나 이 인류를 사랑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그 심정을 가지고 구원 역사를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데 선내끼, 이 주일학교 심방한다고 선내끼 해 놓고 난 다음에 많이 했다고 제딴에는 크게 했다고. 주님은 하나님이라도 다 바쳤는데 품든 거 몇 해 동안 품든 먹고 나머지기 그거 토큰으로 이 구원하기 위해 썼다고 대단히 교만하면 그때 가면 부끄러울 거야. 그러니까 아예 겸손을 가지고 일해야 되지 그때 가면 부끄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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