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연습


선지자선교회 1986 2 9 주일오후

 

본문:디모데전서 4장 6절∼10절 네가 이것으로 형체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 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디모데전서 6장 5절∼6절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오전에, 경건은 하나님을 향망하는ㅡ하나님을 향하고 바라보는ㅡ하나님을 향망하는 동기와 목적 이 한 가지와 또 그 방편을 진리와 영감 이 방편 한 가지와 그 결과는 나는 하나님의 온전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전부가 되어지는 그 결과를 이룬 그것이 경건인 것입니다.

경건을 연습한다고 하신 경건 연습은 하나님을 향망하는 지식이 점점 넒게 깊게 높게 길게 세밀히 자라가는 것이 그것이 경건 연습의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여게‘ 하나님께 대한’이라고 하지 안하고 하나님을 향망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한다는 것은 깊이 나가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일대 일의 상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소망하여 그의 속으로 들어가는 사상을, 정신을 가리켜서 향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지식은 성경에서 배우고 성경 윤곽 속에 들어가 자기 양심을 통하여 영감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십 육 권이나 영감으로 하나님의 은밀하신 그 뜻을 말해서는 다 기록할라면 온 세상에도 둘 만한 곳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종교에서는 경전이 양이 많은 것을 가지고 뽐내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구약 성경은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십 육 권의 간단한 도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 도리 안에 성령의 감화가 내재하시고 역사하셔서, 세상에 두지 못할 뿐 아니라 우주에도 다 둘 수 없는 그 무한함이 영감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지식으로 점점 많아져 가는 것이 그것이 경건 연습의 제일 중요한 일호입니다.

둘째로는 자기가 읽고 듣고 한 이 지식으로 시발하여 영감으로 깨닫게 된 이 지식을 자기 마음에 가득차게 익히는 것이 경건 연습의 이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그 지식을 익히고 익혀서 우리 마음의 온갖 요소에 가득차야 합니다. 마치 흰 베조각에 염색을 하면 염색이 짙을수록 그 베조각은 완전히 그 염색의 색깔로 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색된 그 색깔을 만일 탈색을 한다고 하면 그 색깔은 다 날아가고 원단 그 베조각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첫째 아담에게 받은 바의 그 영은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다시는 탈색할 수 없는, 변동할 수 없는 것으로, 비유컨대 완전히 염색되었습니다. 영원 변할 수 없는 염색으로 되어서 이것을 가리켜서 영생으로 중생됐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신은 이 세 가지로 염색이 될 때에 피와 성령과 진리를 힘입어서 의의 병기가 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또 우리가 피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를 벗었을 때에는 즉시 불의의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심신이 됐다가 마귀의 자녀의 심신되는 그것이 시간이 걸리지 안하고 찰나적으로 변동되는 것을 요한1서 3장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이 심신의 기능은 순전히 성령의 힘으로, 진리의 힘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영생합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래도 억억만 년 후라도 하나님의 이 세 가지 은혜를 우리에게 벗겨 버리면 우리는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완전한 죄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공로를 입을 때에 의인되고 벗었을 때에는 죄인이 됩니다. 이 공로를 입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지체요, 하나님의 몸이요, 전지 전능자가 아니면서 전지 전능자와 같이 되어지지마는 이 은혜를 벗으면 즉시 피조물이요, 불의의 병기, 죄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그 지식을, 하나님에게 배운 그 지식을 배우고 배워서 점점 그 지식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길어지고, 길어진다 말은 하나님을 향하는 지식이 이 세상 한계 내에서 알았다가 또 배우고 보니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게 되고 이 지식이 자라감에 따라서 영원 무궁토록 이 지식이 끝이 없는 소망이요 그 지식을 우리가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지식을 점점 배워간다. 알아간다. 이것을 우리가 힘쓰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지식을 아는 데는 신구약 성경으로 윤곽을 알고 그 속에 내가 양심을 써서 주야로 묵상하는 이 기도에서 영감이 가르쳐 주는 세밀한 지식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알고 난 이 지식을 자기 마음에다가 익히고 익혀서 우리 마음에 완전히, 흰 베쪼가리에 붉은 염색하면 완전히 붉어지고 파란 염색하면 완전히 파래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이 세 가지 지식으로, 주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로 인해서 하나님을 소망하는 이 지식이 우리 마음에 가득 뱁니다. 자꾸 배도록 우리는 익혀야 합니다. 익히는 것은 자기가 입으로 익히고, 입으로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길을 가면서도 익히고, 길을 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 지식을 자꾸 익힙니다. 익히고, 또 눈을 감고 명상하면서 익혀서 그저 어데든지 언제든지 이 지식을 자꾸, 연습이라는 연 자는 익힐 련자입니다. 익힐 련자, 자꾸 익힙니다. 또 새김질하고 또 새김질해서 자꾸 익힙니다. 여러분들이 각각 다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익힐 때에 자기의 힘의 온갖 요소의 기능이 점점 깨끗해지고 새로워지고 그 더러운 것이 녹슬은 거와같은 그런 것이 자꾸 벗겨지고, 때 묻은 거와 같은 것이 벗겨지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그 마음의 온갖 요소가, 이런 병 저런 병, 이런 흠 저런 흠, 조금 하나 그 마음에, 생각 하나, 뜻 하나, 감정 하나 깨달음 하나 조그만한 고것이 들어서 암병과같이 전 인격을 더럽히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을 접촉할 때에 그 사람에게서 안 들을 말 한 마디를 들음으로써 그 사람이 완전히 멸망하는 사람이 되는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가 들어서 멸망할 만한 그런 하나의 그 말을, 지식을, 그것을 자기가 물리침으로써 큰 폭망 속에서 둥그러이 자기가 헤어난 것을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실습이라 말은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자기 몸에다가 자꾸 배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배고 배서, 자기 몸에 배는 것은 자기 손으로 행함으로써 자기의 몸에 배고 또 자기의 눈으로 행함으로써 눈에도 배고 자기의 모든 몸으로 행함으로 몸에 배고, 몸에 배면은 마음에는 더 배고, 또 마음에 많이 배면 그것이 넘어와서 몸에 배이게 되고 이래서, 자기의 마음과 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우기를 마치 배조각에다가 염색하는 거와같이ㅡ그거 비유입니다ㅡ염색하는 거와같이 완전히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진리로 인해서, 완전히 탈색되고 변색으로 염색하는 그것이 우리가 성화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사죄에서 탈색을 하고, 칭의에서 탈색을 하고, 하나님과 화친에서 탈색을 하고 성령님이 이 세 가지 종류로 탈색시키는 것이, 염색시키는 것이 성령이 일하러 온 것입니다. 진리도 이 일 하러 왔습니다. 진리와 성령은 이 세 가지 일을 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를 입어서 대속 입은 자 만들어 대속으로 완전히 감화시켜서, 완전히 감염시켜서 대속의 것이, 사죄를 입어 사죄를 모시고 사죄의 것이 되고, 칭의를 모셔 칭의에게 속하여 칭의의 것이 되고, 화친을 모셔 화친에게 속하여 화친의 것이 되어지도록 이 역사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진리와 영감입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열 세 가지인데 여덟 가지에서 ‘우리’라는 말을 늘 들었습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영원 자존 불변 사랑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렇게 우리가 우리라는 말 많이 들었는데, 그 우리라는 것을 잘 기억합시다. 우리라는 것은 그것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인데, 내라고 하면 단수요 우리라고 하면 복수입니다. 그 복수는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 대속주와 나와 하나가 됐을 때에 그것이 우리입니다. 여게서 더 넓은 범위로 나가면 예수님의 이 구주의 대속과 대속을 입은 역사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나는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 아버지라고 이라는 것은 주님과 나와 하나됐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랄 때에는 주님과 나와의 결합이 된 지 후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되신 것을, 이것을 언제든지 기억합시다.

우리가 혹 생각하기를, 요것을 구별하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나의 하나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라기 쉬운데 그럴 때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고 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에게 대해서 의무와 책임은 내가 개별적으로 가지는 것을 거게 표시해서 사도신경에 그렇게, 신경을 사도들이 정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고 난 다음에 자꾸 하나님 우리 아버지만 부르니까 이 예수님에게 대해서도 똑 배척하는 감을 느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주님.’ 또 그라니까 성령님이 또 들지 안했으니까 ‘성령님' 이렇게 말하는데,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는 데에는 예수님이, 성자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셔서 성자 예수님과 나와 하나가 되어 우리라고 복수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했느냐? 그 역사를 누가 했느냐? 예수님과 나와의 하나 만드는 역사를 누가 했느냐? 하나 만드는 역사를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하나 만드는 역사를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하는 데에는 성부, 성자, 성령, 다 한테 합해서 나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따로 이렇게 부를 필요가 없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할 때에는 제일 처음에 나와 가깝게 먼저 나와의 접선된 것이 누구냐? 제일 나와 먼저 가깝게 접선된 것이 누구입니까? 접선된 것은 곧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성령님이 먼저 나를 붙들고 대속주 예수님과 나와의 결합을 시킵니다. 그러기에, 성령과 물과 피라 요렇게 피를 맨 뒤에 증거했습니다. 증거한 것은 성령님이,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주되심을 우리에게 진리로 알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님의 은혜를 먼저 받아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가 입은 것을 깨닫고 그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성령님 은혜보다 먼저 있었지마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 사이를 소개해 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나를 향하여 먼저 설정돼 있지마는 내가 모르기 때문에 설정돼 있는 그 대속의 공로를 나에게 중매시켜서 나로 하여금 대속의 그 공로를 내가 알고 믿도록 이 중매쟁이가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것을 가지고 너희들에게 증거할 것이요 진리 안으로 인도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영원 자존 불변 사랑 하나님의 우리 아버지’하면, 진리, 성령님, 우리의 대속 주님이 은혜를 똘똘 뭉쳐서 나와 하나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된 것을 비로소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그렇게 달리 말할 것이 없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할 때에는 성부, 성자, 성령, 다 들어갔습니다.

그런고로, 이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향하여 소망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지식이 점점 자라서 그 지식이 하나 알면 고만치 하나님과 나와의 그만치 가까와졌고 둘 알면 그만치 더 가까와졌고 서이 알면 그만치 더 견고해졌고, 너이 알면 그만치 더 깊이 들어갔고 이래서, 자꾸 하나님과 나와의 이렇게 결합시키는 이것이 먼저 지식으로 결합됩니다.

그러기에, 이 지식은 성경에 배우고 성령님에게 배워서, 이 배워서 지식으로 점점 자라가고 지식으로 점점 견고해져 갑니다. 그러면 지식으로 자라가는 그것이 제일호입니다. 경건을 연습하는 데에는 이 경건의 이 지식이 제일호요, 지식으로 점점 자라가고, 둘째로는 이 지식을 자기 마음에 가득 배도록 하는 것이 제이호입니다. 또 삼호는 이 지식을 자기 몸에 가득 배게 하는 것이 삼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저런 우리에게 현실을 주시는 것은 다 이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현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정확하게 하고, 더 광대하게 하고, 더 세밀하게 하고, 또 현실을 주시는 것은 이 지식을 내 마음에 배지 안한 것을 나에게 알려 주시고, 또 나에게 배게 하시고 또 나에게 이 지식이 내 마음에 가득 뱄을 때에 그 결과로 내가 성화되는 것, 그 결과로 내가 깨끗해지는 것, 그 결과로 내가 능력이 있어지는 것, 그 결과로 생명의 힘이 우리에게 있어지는 것 이것을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있고 없는 것을 알리는 것이 현실이요, 또, 현실이 내 몸에 이 지식을 가득 배도록 해 가지고서 내 몸에 배는 것은 내가 하나하나를 실습해서 실지로 내가 실행함으로 내 몸에 배어집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내 마음에 배고, 내 몸에 배고, 밴 이 지식이 이제는 내가 접하고 있는 모든 사건에 배고 내가 접하고 있는 모든 물질에 배고, 이래서, 자기를 통한 이 경건이 어데까지 뱄던지 밴 그것이 자기가 하늘나라에 가서 권위요 지위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통치할 한 고을을 주고, 열 고을을 주고, 다섯 고을을 주고, 므나 하나 늘인 데에 한 고을씩 준다고 비유하신 그것이 우리가 하늘나라에 봉사의 범위며 통치의 범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경건 연습을 자꾸 해야 합니다.

경건 연습은 세 가지. 아는 것 지식하는 것, 그다음에는 마음에 배게 하는 것, 그다음에는 몸에 배게 하는 것, 이 마음에 몸에 배게 할 때에 그때에 관련된 모든 사물들 거게 밴 것, 내가 마음과 몸에 배게 하는 이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가 접촉한 사건에 뱄고 또 물건에 뱄고 이것이, 배었으면, 밴 이게 무엇인가? 그것이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들이요, 그것이 자기의 보좌요, 그것이 만물의 환영이요, 그것이 만물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케 하는 봉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건 연습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오전에 말한 대로 온갖 종류의 연습이 있습니다. 모든 발명가들의 발명은 그것은 다 육체의 연습입니다. 모든 육체의 연단으로써 나가는 그 모든 과학의 지식이나 모든 인간들의 지식은 옳은 것이나 그른 것이나 그런 것은 다 육체의 연습입니다. 육체의 연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육체의 연습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없는 연습은 전부 육체의 연습입니다. 요것의 정의를 단단히 알아야 됩니다. 육체의 연습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주관하지 않는 연습은 전부 육체의 연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도 중생된 영의 작용도 없고 순전히 그 사람의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그 두 가지 작용으로 연습되는 그것이 육체의 연습입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6장에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그렇게 말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부패한 우리들에게 살리는 것은 성령님이 와 가지고 살릴 수 있지 성령님 외에는 인간이 천만 생각을 하고 아무리 오묘하고 기이한 무슨 별스러운 것을 발견해 가지고, 발명해 가지고서 한다 해도 그것은 다 사망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온 그 지식, 그 성화, 그 변화 그것만이 산 것이요, 육은 무익하다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몸 그것으로서 작용하는 모든 것은 다 무익하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과 몸은 독립 독행할 수가 있는가? 독립 독행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지을 때부터 피동의 존재로 지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피동 안 되면 악령과 악성에게 피동됩니다. 이래서, 육은 무익하다 하는 것은 위에 있는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에 여기에 관련이 없고 인간의 심신으로만 날뛰는 것은 다 사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는 그 육신의 생각이라. 말은, 고기덩어라가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육신의 생각이라 말은 심신의 생각은, 작용은 다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요 경건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가 성경에서 받고 영감에서 받고 이렇게 배우는데 그러면 이 지식을 영감이,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가 있느냐? 진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가 있느냐? 요걸 잘 구별해야 됩니다.

진리와 성령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으나 직접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직접 가르쳐 주지를 못합니다. 왜? 이거는 인간의 자주성이라는 자주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은 유한한 자유이지마는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제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와 가지고 죽은 영을 살렸지마는 일단 살리고 난 다음에는 그 개인이라는 그 사람에게 주체성은 중생된 영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체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주체권인 중생된 영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엄격히 구별해서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인서 8장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영을 붙들고, 우리 영을 통해서, 아무리 애가 터져도 아무리 지체가 돼도 성령님이 우리에게 직접 역사하시지를 못합니다. 성령님이 중생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영으로 더불어 하는 이 영은 우리 사람의 영을 가리켜 말합니다.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러면, 이 증거하는 것은 누구에게 증거합니까? 이 증거를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증거를 받는 자가 누구냐? 증거를 받는 자는 우리의 마음과 이 몸인 육입니다. 육이 증거를 받습니다. 다른 게 받지 아니하고 육이 증거를 받는 것입니다.

육이 증거를 받으면 이 증거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말해 봐요. 증거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증거하는 자는 내 중생된 내 영이 내 마음에게 증거합니다. 중생된 내 영이 내 마음에게 증거하고, 내 중생된 영이 내 마음과 몸에게 증거를 하는데 증거할 때에 내 영을 도와서, 내 영을 도와 가지고 함께 내 마음과 몸에다가, 내 중생된 영과 함께, 중생된 영을 도와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해서 자꾸 인식을 시켜서 알게 하는, 내 중생된 영을 돕는 자는 누구입니까? 돕는 자는 누구입니까? 돕는 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돕는 자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돕는 일을 하는데 그러면 돕는 일을 하는데 돕는 일을 할 때에는 성령님이 뭘로 가지고서 우리에게 증거를 해 줍니까? 성령님이 중생된 내 영으로 더불어 함께 합작해 가지고서 내 심신에게 증거를 할 때에, 증거할 때에 그 성령님과 내 중생된 영이 증거하는 도구는 무얼로 합니까? 증거할 때 쓰는 도구는 무엇입니까? 녜, 진리입니다. 증거할 때에 도구는 진리입니다. 도구는 진리입니다. 진리인데, 그러면,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합작해 가지고서 나에게 증거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함께 진리라는 도구를 가지고 이렇게 자꾸 증거를 해 줍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영을 살려서 우리 영에 접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죽은 영에게 접할 수 있는 그 길은 무엇입니까? 그 길은?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 죽은 영에게 접할 수 있습니까? 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접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영은 죄와 허물로 죽은 영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에게 성령님이 와 가지고서 접선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접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통해서 접선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그 공로를 힘 입어서 그 공로의 역사를 우리에게 효력 있게 실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보증자가 누구입니까? 보증자가 누구입니까? 그 일을 보증진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실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 책임진 보증자가 누구입니까? 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보증자입니다. 성령이 보증자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에게 대한 온갖 지식을 우리가 얻어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이 지식을 하나 둘 내가 이 지식을 알고 받아 들이고, 이 지식을 내 지식으로 영접하는 데에는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님과 진리와 이 셋이 중생된 내 영을 통해 가지고서 우리 마음과 우리 몸에 전달해 줍니다. 언제든지 내 주격이 되어 있는 그 영을 우대해서, 이 주격된 이 영을 무시하지 안하고, 이걸 멸살하지 안하고, 월권하지 안하고 언제든지 살려서 이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지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안하고는 우리를 대속할 수 있는 그런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포해 놓으신 법은 진리인데 진리로 행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진리를 어기지 못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진리로 다스리는 진리의 나라요 진리의 왕이십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수많은 순서와 수많은 권위를 가지고 우리가 이 경건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경건을 연습하는 일을 이것을, 평생하는 것이 경건 연습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아는 데서 점점 알고 더 알고 더 알고 자꾸 지식을 더 알고 또 이 지식이 내 마음에 가득 배서, 내 마음에 가득 배 가지고 있어 어떤 무슨 돌발적인 무슨 일이라도 콱 내게 부딪혔을 때에, 부딪힐 때에 내 마음이 어떤 지식에게 피동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한 이 지식이 주체가 되고 이 지식에게 피동됩니다. 그러면 내가 이 현실에서 어떤 돌변적인 무슨, 사물을 당할 때에 그때에, 사물를 당할 때에 내 심신을 공산주의 지식이, 이 심신을 과학의 지식이, 이 심신이 우리의 과거의 믿지안할 때에 주관적인 이 모든 본능적인 자율적인 이 지식이 와 가지고서 내 마음을 통치하면 헛일입니다. 내 마음을 통치하면 결국 거기 통치를 당합니다. 내 몸을 통치하면 결국 그 통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평소에 많이 익히고 익혀서 모든 지식보다 하나님을 향망하는 이 지식을 익히고 익혀서 내 마음에 가득 배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와도 하나님을 향한 이 지식 외에, 하나님을 향한 이 지식 외에 딴 지식이 와 가지고서 손을 못 내 밀어야 돼. 딴 지식이 와 가지고서 여게 나타나지를 못합니다.

나타나지 못해야 됩니다. 딴 지식이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을 향하는 그 지식이 내 마음에 충만함으로 이 지식대로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내 몸이 움직인 그것이 경건 연습의 숙달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두 선지 사도들 행한 그 행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하다, 장대하다, 참 놀랠 만한 일이다. 그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참 아브라함 믿음이 좋다.’ 하지마는 아닙니다. 요 경건 연습으로 그는 본능으로 된 것입니다.

경건 연습으로 본능으로 된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연습이 없는 우리가 볼 때에 우리는 순전히 옛사람에 속해 가지고 있으면서, 저 일을 하니까 놀랠 일이지 그분들은 그것이 경건 연습으로 마음과 몸에 가득 뱄기 때문에 무엇이 닥치든지 닥칠 때에 하나님을 향망하는 그 지식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들은 본능이요, 그것이 필연적이요, 그 지식을 떠나서 움직이는 것은, 마치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법도를 지킬라 하는 거와같이 그렇게 어렵게 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논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다. 논리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자기의 의지나 각오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완전히 변화돼야 됩니다.

그래서, 이 경건은, 뭐이냐? 경건은, 나는, 나와 내게 속한 것은 다 하나님에게 다 맡겨서, 다 전임을 맡겨서 하나님이 책임지고 하나님은 내 전부의 전부가 되어지는 요 변화되는 요것이 경건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불에 타서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땅에 있는 모든 비밀이 다 드러나리로다. 이렇게 하늘은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은 뜨거운 불에 녹아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거룩한 행실은 경건을 만드는 그 과정을 말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주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재림 날, 주님의 재림 날을 바라보라 그 말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의 상황이 우리의 영원한 상황이지 그때가 아닌, 재림이 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 이렇다 저렇다, 동양에는 누가 제일이다, 서양에 누가 제일이다. 암만 해 봤자 예수님의 재림 때 되면 그때는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가치로 둘 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때 남아 있는 그것이 가치입니다. 근심도 그때 남아 있는 근심이 근심입니다. 그전에 다 불타 버리고 없는 그까짓 거야 암만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때에 수치가 남지 안하도록, 그때에 근심이 남지 안하도록, 그때에 없어질 그런 영광과 존귀 그까짓 것도 소용없고 그때에 남아 있을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기쁨, 또 그때에 남아 있을 수치, 그놈을 오늘에 우리가 해결을 지워야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해결을 지워서 이것을 다 정리하고 이래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라 말은 고게만 소망을 두라 말이오. 거게 있지 않는 것은 소용 없습니다. 거게 있지 않는 거 세상이 막 욕을 암만 한다고 해도 그때에 없을 그 욕 그까짓 거 와야 소용도 없습니다. 그때에 남아 있을 욕 그게 문제라 말이오. 또 그때에 영광도, 부귀도, 권세도, 실력도, 가난도, 천대도 그거는 영원 불변의 고정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고정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치로 삼아서 거게 네가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거게다가 가치를 두고 네 심신은, 땅에 사나 그때 그것을 보고서 그것을 지금, 그때 못 할 터이니까 지금 당겨다 오늘 하고 그때에 해결 못 지울 것을 지금 해결 지워야 되겠고, 그때 준비 못 할 것을 오늘에 준비해야 되고 이래서, 내 심신의 전 열중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는 그때의 것을 지금하라. 이런 것이 다 풀어지지마는 의인들은 새 하늘과 새땅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 왕국에서는 죽음이 없고 완전히 성화된 사람들로서 이렇게 무궁세계에 가서 살 것을 연습합니다. 연습하고, 번식 인종이 그때 있습니다. 번식 인종이 있어 번식 인종은 천 년 동안에 죽지 안하고 생산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삼백여 명의 생산을 합니다. 이렇게 생산해서 수십억의 인종이 퍼지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곡과 마곡의 심판으로서 다 멸해 버리고, 이제 번식 인종은 그때 가서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에만 구원이 있지 그다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천년 왕국에서는 이미 구원을 얻어 가지고 신령한 몸으로 다 변화된 사람들이, 기능이 무능자로 변화되든지 유능자로 변화되든지, 이 심신의 기능은 다 지금 다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이 형체의 변화라 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든지 꼭 같은 부활을 받습니다. 꼭 같은 부활받지마는 어떤 사람은 무능한 부활받고 어떤 사람은 영광 있는 부활받고, 이래서 그 영광의 차이가 있다. 영광의 차이가 얼마나 있느냐?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하에 내리보면은 하나 비유했습니다. 땅에 있는 형체가 있고 하늘에 있는 형체가 있으니 하늘에 형체를 하나 든다면 별 달이 있는데 해를 하나 들고, 땅에 있는 형체로 말하면 뭐 콩 한 내끼 모래알 하나 이런 것도 다 형체 아닙니까? 형체이지마는 땅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형체가 있는데 그 형체 한 알의 영광과 하늘에 태양 하나의 영광의 그 가치와 권위가 얼마나 틀리느냐? 몇 억억만 배나 되냐? 억억억억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그런 억억억억만 배도 더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다. 꼭 박아 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의 영광도 이와 같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날을 가치로 삼아서 그것을 바라보라, 소망은 내가 그날에 둬라. 부활 후에, 부활 후에 있는 것이 너의 영원한 것이지 부활 전에, 죽기 전에 있는 이것은 뭐 어떻게 변동될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 후에 영원히 가질 그것을 네가 마련해라. 썩지 안할 것 영원한 것, 완전한 것 그런 것을 마련해라.

그렇게 우리에게 권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짜든지 이 경건 연습을 많이 합시다. 많이 해서, 우리가 다 같이 믿지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천층 만층 억만층도 더 됩니다. 천층 만층 억만층도 더 됩니다. 넓이도 무한합니다. 또 이 지식이 그 사람 마음에 얼마나 뱄는지, 얼마나 뱄는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 개별 행사를 아는 지식이 그몸에 가득 뱄기 때문에 불을 벌거이 불미에 불을 달궈 놓고 너 이 우상에게 절하지 안하면 저 불미에 집어 넣는다 할 때에 그분들은 안색 하나도 다르지 않고 그 피부에는 기쁨이 충만했고, 만족했고, 그 느부갓네살 왕이 호령을 칠 때에, 하도 애가 터지니까 ‘왕이여 암만 그래 쌓아도 절 안 할 줄 아십시오’ ‘그러면 네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불에서 구원하겠느냐?’ ‘구원 할 수 있고, 또 당신의 뜻이 불에 타 죽으라 해도 상관없고, 우리 소망이 그게 아니기 때문에 죽고 살고 당신에게만 권리 있지 불은 내 터럭 하나도 태울 수가 없습니다. 그분만이 내게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할 권리를 가졌지 나는 그분에게 다 맡겼기 때문에 그분이 처리할 권리 있지 아무도 관계 없습니다. ’ 요 지식이 그 마음에 가득 뱄고 그 몸에 가득 뱄기 때문에 그 피부가 기뻐 즐거워서 느부갓네살 왕이 보고서 이상히 여겼고, 불란서 파리라는 그 거리에서 칸토나라 하는 그분이 전도 하니까 형벌 주다 주다가 못 하구로 해도 금해도 안 되니까, 이거 해골 골에 가둬 놔도 또 나와 버리지, 이래 놓으니까 그래, 나중에는 ‘이놈아 네가 이 도를 전할 거냐?’ 기쁘고 즐거워 하면서 ‘전한다’ 하니까 `이놈 웃는 것이 밉상이다. 기뻐하는 것이 밉상이다.’ 요 기쁨 요놈을 없애 볼라고서, 온 전신을 노끈으로 얽었습니다.

얽어 가지고서 기름을 발라 가지고 불을 놨습니다. 불을 놔도 그 얼굴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나중에 불로 지져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말하기를 ‘네가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날 같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가 있을 줄 아느냐? 내 기쁨을 무엇이 끊을 수 있을 줄 아느냐?’ 그럴 때에 아무걸로 해도 그 기쁨을 변동시킬 수가 없어서 마지막에 이제 목을 베에서 세상을 끝냈습니다. 그라니까 그 기쁨이 끝났지요.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니까 이것이 한 신화를 말하는 게 아니고 이것이 무슨, 무슨 이상한 궤변을 하는 것이 아니고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우리에게 책임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내 마음에 가득 배어 있고, 내 마음에 가득 배어 있으면 내 마음을 고통 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실이 내 몸에 가득 배어 있으면 내 얼굴을 찡그리게 할 자가 없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도 그렇고 고문과 고형을 했지마는 그분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이 경건이 가득차 가지고서, 가득차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그 약속을 확실히 믿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워서 말하기를, 그때 사람들이 다 영양 실조로 다 감옥에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죽어 나왔는데, 왜정 말년에 원첨 양식이 없어서 이 콩깻묵 주먹, 똑 솔방울 만한 것을 배급을 줄 때에 이거 가지고 이것도 거게 배고픈 청년들에게 나눠 주고, 마지막에 똑 조그만한 꿀밤덩어리만한 것을 거머쥐고 말하기를 ‘이것이 이 밖에, 오늘도 소가 여러 수천 마리가 잡힐 터인데 수천 마리의 그 모든 고기덩어리보다 이 콩깻묵 요 조그만한 이것이 가치 더 있다 하고서 그는 먹었습니다. 왜? 그는 순전히, 그것이 경건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 가치가, 효과가 크고 나타나는 영광이, 권위가 큰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자꾸 연습합시다. 이거 뭐, 어짜든지 또 지식을 알고 자꾸, ‘하나님은 전능자라, 하나님은 전능자라.’ 하나님은 전능자라 하면 `하나님은 전능자라. 그러면 하나님 날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얼마나 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모든 걸 예정했습니다. 모든 예정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예정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순서 나타나는 것은 예정 아닌 거는 하나도 없는데, 모든 순서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이 날 사랑하심으로서 그것을 베푸셨습니다.

모든 창조는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를 사랑하는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 당신이 보고 아름다와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도록까지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까지 섭리하십니다. 이 사랑을 자꾸 우리가 익힙니다. 사랑을 익히고 익혀서, 어떤 세상이 달라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이 사랑을 의심나게 해도 의심나지 안할 때에 그 사람은 세상을 점령했습니다. 세상은 그의 것이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원 불변의 사랑도 자꾸 연습해서 이리 맞춰서 또 자기가 믿고 저리 맞춰 믿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데, 하나님이 이거 한 것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큰 힘을 들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변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되시기까지 하셨는데 이 사랑이 나에게 변동 되겠느냐? 하나님이 나 위해서 모든 곤욕을 당할 때에도 끝까지, 어떤 고난을 줘도 끝까지,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했어.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죽으심도, 또, 하나님이 죽으실 뿐 아니라 사람으로 다시, 창조주가 피조물로 부활됐습니다. 그러면 창조주가 피조물 된 것은 우리로 말하면 우리가 썩은 송장 껍데기를 입고 송장 속에 드는 것보다 몇 억억만 배나 더 천한 일 아닙니까? 주님이 사람으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 꺼풀을 입고 부활하셨다는 요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 모든 걸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자꾸 성경에 있는 대로 이래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이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이 변하지 않는 요 지식이 내 마음에 가득차서, 온 세상이 부인케 해도 요동치 않은 이 지식, 온 세상이 부인케 해도 내 몸에 가득 배서 내 몸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써의 사랑의 대상으로 내 몸이 움직이고, 사랑의 대상으로 내 몸이 움직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대상이 돼 가지고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움직이는 그것이니까 여게서는 영생이지 사망이 없습니다. 이것을 자꾸 우리가 연습해 나갈 일들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육체의 연습은 모든 과학자, 모든 발명가, 모든 예술가, 모든 세상 이 학자들 그 전부는 다 육체의 연습입니다.

고거는 다 요 안에 다 들었습니다. 육체의 연습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약간의 유익이라면 잠깐 동안 유익이 있다 말이오. 잠깐 동안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경건은 하나 둘로 말할 게 아니라 경건은 전면적으로 유익하니, 범사에 유익하다 말은 영 육, 금생 내세 자기만 유익할 게 아니라 자기로 말미암아 그 유익이 모든 피조물 전체에게 가득차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약속이 있느니라 거게 대해서 성경을 여러분들이,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맡기고 그에게 복종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하고 사는 이 생활에는 무슨 약속이 있는가? 이제 집에 가거든 자꾸 성경을 읽으십시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여게서 그걸 기록할라 하면 성경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거짓말 했습니까? 털끝만치도 거짓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니까 그것을 읽어서 ‘금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러면 이 경건에 대한 금생에 약속이 있고 내세에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만 찾아 봅시다. 이사아 49장 23절에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열왕은 네 양부 된다 그말은 모든 땅 위에 있는 권세는, 양부는 저거 아버지가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을 다 상속받는 것이 그것이 양자 아닙니까? 열왕은 양부된다 말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권세는 저를 위해서 있음이 된다 그말입니다. 저를 위해서 있음이 된다. ‘양부가 되며 왕비는 유모가 되며’ 왕비는 유모된다. 유모는 제가 낳지 안한 것을 제가 낳은 것같이 기르는 것이 유모 아닙니까? 땅 위에 외적인 권세, 내적인 모든 권세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이 경건자의 것이라 그말입니다. 「되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내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자꾸 믿는 사람은 믿어 보니까 ‘아, 하나님 과연 과연, 하나님은 과연 신실하다. 과연 과연.’ 안 믿는 자는 이 마귀를 자꾸 ‘믿었더면 큰일 날뻔했다.

믿었더면 큰일 날뻔 했다.’ 안 믿는 자는 믿었더면 큰일 날뻔했다 해 가지고서 점점 안 믿는 자가 되고, 믿는 자는 ‘과연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로구나’ 점점 믿는 자 되는 것으로서 멸망할 자는 점점 멸망으로 나아가고 구원을 얻을 자는 점점 구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를 해치는 자는 전부 다 하나님이 그것을 망쳐 버립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를 해치는 자는 망칩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아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축복할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라’ 그러기 때문에 의인을 축복하는 자는 그로 인해서 자기에게 축복이 옵니다. 의인을 저주하는 자, 의인을 해치는 자, 해가 의인에게 가는 줄 압니까? 절대 안 갑니다. 의인에게 가지 안하고 제게로 가 가지고 제가 망하게 됩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걸음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한다 해도 그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이래서, 디모데전서 6장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의 다툼이 있나니 지족함을 알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되느니라’ 고 말씀의 뜻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줄 압니다. 이래 가지고 그 경건을 광고를 해 가지고서 경건을 좀 널리 퍼트릴라고 애를 씁니다. 또 그 경건을 다른 사람이 파묻어 버렸으면 막 분을 냅니다. ‘왜 이런 의를 네가 이같이 훼방을 하느냐? 내 의를 왜 훼방을 하느냐? 나타내지 안하고 훼방을 주느냐?’ 자기의 의를 사람들이 나타내 주지 안하고 몰라주고 이것을 매장한다고 사람들이 다투고 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았기 때문에 경건 그것이 막바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런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경건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기 때문에 경건에 대한 그 보상을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경건은 하나님 보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서 보상해 주는 것인데 그 경건을 천하 사람이 매장을 시켰다고 하나님이 거게 다수에 따라서 설복을 당합니까? 어리석소. ‘지족한 걸 알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되느니라’ 네가 경건하게 했으니 경건하게 한 자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을 다 가지시고 너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약속대로 해 주시니 현재 너에게, 네가 기대하는 대로 뭐 이게 안 왔다 저게 안 왔다 할 게 아니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 생활 했고, 경건 생활한 너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전지 전능 자가 알아서 네게 족하게 해주시니까, 너는 그걸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지족한 걸 알면, 하나님께서 내게 콱 엎어져서 그때 코가 깨져도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 인해서 이런 일 닥쳤으니 이것이 무엇보다도 좋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셨다.’ 전지 전능의, 사랑의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이 너에게 좋게 해 주실 터이니까 네게 닥치는 것이면 다 감사하고, 그것이 좋기 때문에 주셨다는 이 비밀을 네가 알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되느니라, 경건이 막바로 그게 돈 되는 줄 알지 말아라. 경건 그게 막바로 지위와 권세와 명예가 되는 줄 알지 말아라. 경건은 네가 하나님을 향해서 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서 하나님이 거게 대해서 당신이 대우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을 다른 사람들이 매장을 하든지 말든지, 몰라 주든지 말든지 그거 상관이 없다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하리라」 26절에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의인을 학대하는 자의 자기 고기를 자기가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이렇게 경건을 하는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만 인간이 환하게 볼 수 있도록 경건자의 하나님이 요 경건자를 이렇게 구원을 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리라 말씀을 했습니다.

오전에, 그 성구를 가르쳐 줬는데 그 성구를 낱낱이 할라 하면은 시간 없으니까 가서 어짜든지 요것을 알고 경건에 대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 모든 걸 맡겨 놓고 순종해서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점점 깊이 넓혀 가고 이 지식으로 자기 마음과 몸에 가득 배게 한 자의 이 자에게 행복이 뭐인지 아는 것을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보십시오. 온 성경은 다 그것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경건한 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요, 경건치 안 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피조물이 성공 하고 피조물, 어떤 피조물을 바라봄으로 멸망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그것을 결말 지우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의 지옥이요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짜든지 우리가 이제 말씀대로 믿읍시다. 믿어서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자꾸 나타나도록 합시다. 기적과 축복이 자꾸 나타나도록 합시다.

내가 아래도 말 들으니까 대구에 어떤 교회에 집사가 살림살이 다 패가해서 부도가 나고 고만 마지막에는, 국회의원에 나갔다가서 낙선이 돼서 전부가 다 패가가 되고 이거 다 헛일이라고 다 집어 치워 버리고 그저, 거지가 돼 가지고서 예수님만 꼬박꼬박 믿고 교회만 충성하는데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천하요? 그래도 그런 것 아무것도 안 보고 이랬는데 강제로 들어다가, 내가 똑똑히는 모르지마는 한국에 제일 큰 회사에 사장으로 들어 앉혔어. 물론 고용 사장이요 주사장은 아니지마는 이렇게, 그분은 다 내 버렸는데 그렇게 해. 그 교회도 이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저런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뭐 이적과 기사가 자꾸 나온대요. 자꾸 나와. 그러면 교회가 될 것 아닙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기적과 축복이 자꾸 나타날 것입니다.

이래서, 연보하는 사람들, 없는 돈 연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먼저 사십시오. 살아 가지고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받으면, 축복 받거들랑은 또 연보해요. 안 하면 화가 와요. 씨는 심어야 되지 씨를 심지 안하면은 연보할 돈 연보 안 하고 그 돈 도적 맞고 그 돈 때문에 병도 들고 고생하고 그런 일이, 속으로 살펴보면 얼마나 그런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을 뜻대로 살고 하나님이 기적과 축복 주시면 나 쓸 거는 나 쓰고 이거 인간 구원에 선한 사업에 투자할 것은 투자하고 그러면 자꾸자꾸 이래 해서, 그리하면 우리 서부교회 교인이 얼마 안 되지마는 이것 가지고도 한국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는 것이 별 게 아니요. 하면 됩니다. 믿으면 됩니다. 허영과 허욕을 다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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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 경험과 체험의 신앙/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60705토새 선지자 2015.10.24
507 계명지키는 생활/ 빌립보서 3장 4절-14절/ 820731토새 선지자 2015.10.24
506 계명이 열어 주는 길/ 요한복음 14장 21절-23절/ 810406월새 선지자 2015.10.24
505 계명-일반적인 계명/ 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850317주전 선지자 2015.10.24
504 계명-일반적인 계명/ 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1985. 3. 17. 주후 선지자 2015.10.24
503 계명지키는 것은 사랑/ 요한복음 15장 9절-15절/ 840415주새 선지자 2015.10.24
502 계명지키는 동기,목적,방편/ 출애굽기 20장 1절-3절/ 881129화새 선지자 201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