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세상과 마찰


선지자선교회 1983년 10월 14일 금새

 

본문 : 딤후3:12-17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언제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정성과 열심을 가졌다 할지라도 성경 말씀대로 하지  안하면 그것은 헛 경건입니다. 경건은 주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의 말씀대로 바로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렇게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자와 언제나  마찰이 있는 것입니다. 왜? 세상 그 자체가 하나님과 진리와 대립이 돼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자기도 이전에는 하나님과 진리와 대립된 세상과  하나되어 살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과 진리와 하나되는 생활을 하려고 하니까  세상과는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자기도 바른 생활을 해서 다 영생이 되는 것이고 또 자기를  핍박하며 따라오는 자라도 그는 영생을 이루게 하는 운동이 되지마는 이 경건이  대립되는 세상 생활은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되든지 또 그렇지  안하면 자기와 관련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 되든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고 총결론은 그 생활은 다 속이고 속는 것뿐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은 물질에 속으면 물질 손해가 가지마는 인생에 속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 손해를 갑니다. 인생의 기능 손해, 다시 말하면  건설구원의 손해가 갑니다.

 그런고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결과적으로 자타를 해치는 것 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정짓고 확신해야 됩니다. 또 거기에 속했던 것이 경건으로 살려고  하니까 그와 대립되니 필연적으로 박해가 있다는 것도 단정짓고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악령의 유혹을 받아 예수님 믿는 일을 가지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런 것을 준비하는 데에 쓰는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경건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경건하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영원한 건설구원을 위하여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많게도 하시고 적게도 하시고, 또 평안하게도 하시고 고통당하게도 하시고  이것은 일체 당신에게 맡겨버려야 됩니다.

 '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하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할 생각, 우리가  책임져야 될 책임, 또 내게 대해서, 자기가 할 일, 자기가 책임질 일, 자기의  의무와 모든 본분 이 모는 것을 우리는 털끝만한 것도 옳게 할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주께 맡겨서, 어데까지 맡길 것이냐? 주님에게 맡기는 것은  당신에게 다 맡겨놓고 당신이 내게 대해서 취급하시는 대로 나는 취급을  당합니다. 당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는 따라서 그저 순종할 것뿐입니다.

 이러면 순종할 때에 어데까지 맡기느냐? 죽는 일이 닥쳐도 주님이 잘해 주는  것을 알고 달게 죽고, 어떠한 고귀한 자리에 앉혀도 주님이 고귀한 자리에 앉혀  준 것인 줄 알고 달게 견디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과 모든 정성과 모든  것이 자기 일을 자기가 감당키 위해서 전부 다 총력을 기울이는데 거기에 총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딴걸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거기에 총력 기울이던 것을 전부 다 주님에게 기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성전도 될 것이요, 주님의 사모도 될 것이요,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지체  노릇도 할 것이요, 나는 무지하지마는 당신이 전지하시기 때문에 '가라, 오라,  있으라, 해라.' 당신이 나를 주관하시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이 되는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보니까 그 몇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인데, 믿는 사람들인데 믿는  사람들이 참 믿었다고 하면 모르고 닥치는 일은 없습니다. 다 알립니다. 믿는  사람들이 순교하는 것은 몰라서 순교하는 것 아닙니다.

 반드시 기독자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에는 어떤 게 십자가의 고난이냐?  자체가 깨끗한 자라야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수 있고 깨끗한 자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에는 반드시 그 앞에 두 길이 뚜렷이 있습니다. 어떤 길이  있느냐?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고난 안 당하고 고난 반대의 환영과 존칭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두 길이 있는데, 주님과 진리를 위해서 고난의 길을 자취해서  가는 것이지 몰라서 끌려가거나 그런 일 없습니다.

 자기는 그 어려움을 당하기 싫은데 어려움을 당한 것 아닙니다. 자기의 양심의  권면을 받아서, 자기가 아는 진리의 권면을 받아서, 그보다 강한 영감의 감동을  받아서, '이것은 당장이라도 피할 수 있지마는 주님과 진리를 위해서 이 길은  걷지 안할 수가 없다'해서 비판 평가하는 똑똑한 그 평가와 비판에서 자기가  자원해서 걸어가는 것이지 강제 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십자가상에서라도  그때도 두 길이 있습니다. '지금 내려와서 증거하라. 지금 내려오면 우리가 다  믿겠다.' 예수님은 그때에 당신은 전능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육체 하나 죽은 것 살리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는 그리스도라 해 가지고 다 인정하고 믿겠다.'  첫 시험에 '성전에 뛰어내리라. 상하지 안하면 이는 참 그 높은 데 뛰어내려도  안 죽는 것 보니까 이는 하나님께로 온 그리스도라 다 믿겠다. 십자가상에도  내려오라 우리가 다 믿겠다.'  이러나 예수님이 그 일을 하지 아니한 것은 한 분 되신 삼위 일체이신 자존자  독존자이신 이 하나님, 당신에게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못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일을 취하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취했습니다.

 그런 분들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가면 죽는 일이다.

이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가지고 사명 감당을 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내가 이거는 안 갈 수 없다.' 해서 자기의 깨달음에서 사명감에서 뭘 갔는지  모르지마는,  만일 그 마음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주여 나를 주관해 달라고  하지마는 실은 정성이나, 마음이나, 총명이나, 자기를 깨닫는 모든 판단이나  그런 것은 세상이 자기를 주관해 가지고, 돈이 주관하는 것처럼 지위나 권세나  세상 권세가 자기를 주관해서 거기에 복종했는지 하나님께 복종으로 갔는지 둘  중에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멸망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단정짓고 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세상과 마찰된다.

 어떤 사람은 나한테 얘기하면서 '그 사람하고 만나 가지고 아무리 친밀을  가지려고 해도 그 말 한 마디만 해 주면 친밀해지겠는데 하나님이 걸려서 말을  못 하겠고, 진리에 걸려서 말을 못 하겠고, 참 그 사람하고 서로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기가 막히는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래 맞춰서 그 사람의 그 주장을  따르면 하나님과 진리와 대립이 되겠고 하나님의 진리와 나누지 안할라고 그  사람에게 아무리 내 모든 것을 다 죄되지 않는 것은 다 어떻게 내가 봉사해서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진리에 위반되지 않는 것만 행하려고 해도 결국은 한  자리 있으면서도 그만 말 한 마디 두 마디에서 서로 사이가 벌어지고 말더라.'  기가 막히는 그런 것을 겪어봐서,  내가 그래 보기를 '네가 이제 신앙생활을 조금 시작하는구나. 신앙생활이라  하는 건 전부 다. 그런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이 사람 호인이  신앙 사람들 이상 없고, 다른 사람들 봉사하는 데 신앙생활 하는 사람 이상이  없고, 자기를 희생하는 데에 신앙 사람보다 더 희생하는 사람이 없지마는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대립이 되고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원수가 된다. 경건  때문에 원수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세상과  대립이 되어서 마찰이 된다는 이것을 네가 알아라.'  그러나 마찰된 그 걸음은 그 사람도 내가 바로 인도했고 나도 바로 걷는  것이지마는 마찰되는 그 마찰을 피하면 내가 나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여서  멸망을 일으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네가 성경을 배운 것을 네가 확신해라. 성경을 확신해라. 확실히  인정하고 또 그대로 살아라. 이것이 확신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데 거하라'  네가 성경을 공연히 알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다 있습니다. 여기에까지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듣고 연구하고  기억하고 하는 요것은 전부가 다 보배로운 지식입니다. 지식입니다.

여기에까지는 지식입니다. 여기에까지만 가고 말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는 결과를  교만해서 멸망시키는 결과밖에는 맺지를 못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옮겨 갈 때에 비로소 실상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옮겨갈  때에 자기가 인정 못 하던 것, 보지 못하던 것, 이해 못 하던 것을 확실힉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나를 구원하시는 것을 내가 알았다'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런고로 '확신한 데 거하라'  그런데 배운 것을 자기가 요대로 인정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은 왜 그러냐?  이것이 다 하나님이 직접 자기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직접 인도라니? 성경은  한목 줬는데 직접 인도라?' 직접 인도입니다.

 직접 인도를 왜 직접 인도가 되느냐? 직접 인도 요 말씀을 그 사람에게 주님이  행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는 네가 요 말씀을 행하라 성경 보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그 사람이 알고 인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말씀을 지켜야 할  현실을 주는 그것이 그 말씀을 그때 주님이 직접 말씀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주시는 것으로써 개성구 개성구를 자기에게 개별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직접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님과 진리가 바로 자기를 직접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도할 때에 그대로 행하면 행한 그것이 영생이요, 그것이 온전한 사람이요,  온전한 기능입니다. 이것 외에 딴것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런데 요렇게 믿고 확신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 인도해서 가르쳤든지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기관을 버리면 그  진리가 자기에게는 역사하지를 않습니다.

 '뉘게서 배운 것을 기억하라' 했는데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  사람이야 아무것도 없지마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은 어데까지나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뉘게서 배운 것을  기억하고 버리지 말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가르치고 인도할 때에 인도를 받는 데에 자기가 억지로 인정도  할 수 있고 억지로 자기가 그대로 실행도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억지로 했든지, 억지로 인정했든지 인정한 사람은 인정을 하고  행함으로 구원 얻을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인정하고 순종하는 일에 여러 종류 있습니다. 하나는 단마음으로  하는 것 있고, 단마음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있고 또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있습니다. 원하는 마음으로. 부득이해서 불평을 품으면서 부득이해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있습니다. 세 가지 종류.

 하나는 원함으로, 하나는 단마음으로, 하나는 억지로. 억지로 된 것은 일단은  구원 얻지마는 결과는 또 멸망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억지로 얻는 그것이  쓴뿌리요 그것이 원죄에 속한 옛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하고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가 닥치면 그대로 행하는  것이 있고, 자기는 원하는 마음은 없었지마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보니  행해야 되겠다 해서 단마음으로 하는 사람 있고, 행하기는 행하고 인정하기는  해야 되는 것이니 강제로 그러니까 속에 언제든지 불평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  있습니다.

 노아가 이렇게 자기의 세 자녀에게 대해서 권면하고 이랬으니까 거기에다  인정하고 순종하는 그 세 아들이었습니다. 이렇지마는 그 함이 하는 일을 보면  아버지가 그와 같이 할 때에 언젠가 속에 그 하는 것이 마땅치 안해서 반발심  반동심이, 반발심 반동심이 있어서 저러는데, 그러니까 감사함이 없고 아버지가  인도하는 것이 속으로 부득이해서 순종하지 마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어데든지 하나 실수만 있으면 손뼉을 치면서 '봐라, 아버지도 이렇게  실수했다.' 이렇게 할 그에게 있지마는 자기는 띄이지 안하니까 못 하지마는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술먹고 벌거벗고 누웠을 때에 와서 보고 '봐라  아버지가 술이 취해 가지고 벗어 눕고 있다.' 그것이 어데서 나왔느냐? 노아  홍수에 구원 얻은 것이 아버지가 그 시킬 때에 원하는 마음으로도 아니고  단마음으로도 아니고, 불만 불평을 가지고 그와 같이 순종하다가 배로써 구원은  얻기는 얻었지마는 속에 그놈을 뽑아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을 하되, 순종을 하되 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원하는 것은 이게 뭐이냐? 원하는 것은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로 원하고 원하고 '주여, 이게 되기를 원합니다. 원합니다.' 순교를  해도 원하고 원하는 마음에서 순교하는 사람 있고, 원하는 마음은 없었지마는 그  일이 닥쳤을 때에 '주님이 나 위해서 어떻게 하셨으니 나 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때에 불평 없이 단마음으로 하는 것 있고, 그게  이등이오.

 그래 하면서도 마음에 두려운 마음 불평스러운 마음 이렇지마는 안 믿을 수  없고 버릴 수 없고 해석을 하니까 아무래도 죽기는 죽는 사람이고 '참 이렇지만  안 당했으면 좋은데 부득이해서 당한다' 하는 그 사람은 언젠가 그 부패성이  자기에게 그만치 또 해독을 끼치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김현봉 목사님에게, 지금 서울대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자리가  그 이름이 뭐인고? 관악동? 관악동이요? 관악동 거기에서 집회할 때에 제가 가서  참석을 해 봤는데 그 목사님이 언제든지 시간을 지키라고 자꾸 이렇게 야단을  치니까, 물론 기뻐 즐거워서 하는 사람도 다 있었겠지요.

 그 목사님이 어째 그날 삼 분이 늦었습니다. 삼 분이 늦었어. 삼 분이 늦으니까  거기에서 전부가 다 단합해 가지고 '목사님, 시작 시간이 삼 분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 그렇게 말하는 데도 '참 목사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가  있다.' 하는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외나 거석한  사람은 그런 말을 감히 '나는 몇십 번 몇천 번 몇백 번 이와 같이 이런 것이  그걸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 정죄받을라?' 해서 말 두려워 말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공격적으로 그렇게 '자꾸 시간 지키라더니만 당신도  어겼구만.' 이렇게 반발적으로 공격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더라 그거요.

 그래서 그때 제가 '참 그 목사님은 언제든지 단마음으로 순종해라 단마음으로  순종해라 했는데 이 단마음으로 순종하는 그것이 여기에서도 표현이 있구나'  하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함, 셈 함, 둘째아들 함이 그와같이 한 것은 언젠가 반발심이 늘 있다가 그리  되니까 됐다 해서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기뻐 즐거워서 그 형제들에게 가서  전했을 것이요 두 형제는 근심하면서 그를 다른 사람이 다 수치 보지 못하도록  덮는 것을 가지고 뒤로 들어와서 덮었을 것이오.

 아마 그 세 아들 가운데는 성경에 다른 모든 것을 미루어 봐서 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단마음으로 순종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순종하나  부득이해서 순종한 사람도 있어 그 세 아들의 순종이 다 각각 종류가 달라서 그  뒤에 축복이 각각 달랐습니다. 제일 큰아들이 축복이 제일 컸고, 마지막 아들이  땅의 축복을 받았고 둘째 아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지금도 '이 기도하자. 새벽기도를 나오라.' 뭣 때문에?  '돈벌이를 좀 못해도 새벽기도를 나오라, 다른 일을 좀 못해도 지금은 기도하라.

지금은 때가 긴박하다.' 다 벌어놔봤자 불타버리면 그만이지, 그런 것 불타고  하는 그런 것은 어쨌든지 떠날 때는 두고 갈 것들이니까 타든지 물에 떠내려  가든지 도적맞든지 다 한가지로 없어지는 것이지마는 일생 동안 예수 믿는 것을  한 마디로 팔아버리고 마는 그런 일이 되지 않도록 큰 도적을 맞지 않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에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가 있고 난 다음에 그 신사참배 한 사람들은,  신사참배 한 사람들로서는 해방 후에 영능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이 없었습니다.

참 뼈아프게 회개를 하는 사람들은 다 영능을 가 졌습니다.

 그 회개에도 층어리가 많았습니다. 영능을 가졌으나 영능을 가진 가운데도  회개치 않으면 회개치 않은 그놈이 들어써 영능을 가지고 일하되 자기의  명예심으로 공명심으로 일한 사람, 또 세상에 있는 무슨 환영받는 대우를 위해서  일한 사람, 별별 종류가 다 있어.

 그것은 마지막에 끝이 깜깜해졌습니다. 끝이 깜깜해서 죽을 새는 깜깜하게 일반  사람이라,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이 그 사람을 붙들고 성령과 진리의  능력에게 붙들려서 자유하지 못하는 성령과 진리의 종이 되고 그의 수족이  되어지는 그런 결과가 맺어지지를 아니했더라 그말이오.

 사람은 다 준비를 했었어도 '더디 오매 졸며 잘새' 기름 준비 한 사람도 졸고  잤소. 다 졸고 잤지마는 준비한 자와 준비 안 한 자가 마지막에 등불을 켤 때에  달랐다 그거요. 확신에 거합시다. 자기가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시험할 것이오.

 어제 아침에는, 두려워하는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두려워하지  안하면 사라의 딸이 된다 했어. 사라는 여인들의 신앙의 표준 신앙이오. 네가  아무리 두려운 일에라도 놀라지 안하면 사라의 딸이 되리라 하는 것은 자기가  정말로 기본구원을 믿는다면 믿는 그것이 기본구원을 믿지 않느냐,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증표는 자기 현실을 닥쳤을 때에 자기로 증거합니다.

 믿는 자기인지 안 믿는 자기인지? 믿는 행위인지 아닌지 그것이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을 기본구원을 자기가 어떻게 인정하며 어떻게 입고 있으며 기본구원을  얻은 그 기본구원의 권능을 얼마나 자기가 가졌으며 행동하느냐 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기본구원을, 모든 행동이 불타버렸다 말온 기본구원을 얻기는 얻었지만  기본구원을 부인한 자로 하늘나라 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하늘나라 가서 주님  앞에 대면할 게 뭐 있겠습니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러니까 건설구원을 잘 이룬 사람은 기본구원을 바로 인정하고 믿고  기본구원을 입은 사람, 네가 참으로 전능의 아들로 전능 가진 아버지를 모시고  있느냐 보자. 보니까 전능하신 아버지를 모셨다는 말은 있었는데 모시지 안한  사람 있고, 또 하나님의 개별 섭리를 믿는다 하지만 안 믿는 사람 있고, 영생을  가졌다 하지마는 지금 죽는 그 생명이 제 생명이지 중생된 영생이 자기 생명이  아니라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지금은 위급한 때입니다. 지금 뭐 명예니 지위니 권세니 대우니  그까짓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분에게 인정을 받아야 되고 그분이 나를  알아줘야 되고, 그 나라에서 등용이 돼야 그 나라의 것이 우리의 것이지 이 세상  것은 우리의 것 아닙니다. 있는 것만치 손해요.

 저는 어제 그 모두 다 장례하는 걸 볼 때에 다 생각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옆에 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말하기를 그래 하기를' '참, 한 때는  좋았겠다. 아주 결혼할 때에 참 아주 결혼을 상등 결혼했다 할 것이다.'  이렇지마는 그런 일로 인해서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했는지 모른다 그말이오.

 내가 볼 때에는 좀 높은, 경제적으로 높은 자리, 지위적으로 높은 자리  권세적으로 높은 자리, 어떤 행락적으로 높은 자리, 세상 부요를 가진 사람은  부요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에 거리끼는 것만 봤지 부요 그거를 다 가지고  신앙생활에 이용한 다니엘 같은 그런 사람은 보기가 드물다 그거요.

 우리는 깨야 됩니다. 때가 가까왔습니다. 어리석지 말아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케 하고 행위를 온전케 하는데 이 외에 구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외에 구할 것이 뭣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이 외에 딴것 할 것이 뭣 있습니까? 이 외에 다른 것 뭐  바라보고, 이것으로 가지고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구비하고  족족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까지 기도하는 데에 등록된 수는 천오백오십 명이 등록하고 기도합니다.

천오백오십 명이 등록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러 오신 장로님 기도하러  오신 장로님은 아홉 명입니다. 지난밤에 기도 하러 오신 장로님은 아홉 명이고,  장로님이 몇 분인지? 그분들은 다 부자라서 못 왔을 것입니다. 분명이 부자라서  못 왔습니다.

 부자는 부자 그것을 버려야 천국 가지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이랬습니다. 부자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도할 수  있는 허락을 안 해 줘서 다리를 옮기지 못 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못  하고 아파서 집에서 하구로 했든지 그럴 것입니다.

 또 ○○○, ○○○, … 이렇게 아홉 분은 기도하러 왔더랍니다. 내가 요것은  그렇게 하라 소리 안 했는데 ○○○집사님이 했습니다. 그거는 잘 했습니다. 그  칭찬 받을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밑에 일하는 잘하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상급받을 것이고 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대개는 하나님 앞에 상급 받을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일은  대개는 그렇습니다. 나도 속에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나님이 섭섭하게 여기시는 일도 있지마는 대개는 그렇습니다. 이런고로 요런  것도 좀 기도하니까 '요것을 다 표시를 해야 이제 기도하러 오겠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 했습니까?  천오백오십 명이 기도하러 왔는데 이제 자기 집에서 기도를 하고 산에서  기도하고 여기 와서 기도 안 했을지라도 기도한 사람은 반드시 나갈 때에  거기다가 기록을 해 주십시오. 왜? 그라면 다른 사람에게 선을 격발케 합니다.

기도할 열심을 그들에게 일으켜 줍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살면 여러 사람이  살아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기도 했지마는 거기다가 빼 버리면, 이 기도는 했지마는 거기에다가 도장  찍지 안하고 빼 놓으면 쭉 읽어보다가 '여기에도 다른 사람도 보니까 더러 빠진  사람도 있구나' 해서 빠진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빠진 사람에게 그 강퍅하고 그  게을한 마음을 도로 강하게 안심하고 담대함을 주니까 그게 하나님이 노여워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기도한 분은 기록하고, 또 이래 새벽기도 못 나오는 먼데서 계시는  분들은 자기 맡은 식구 가운데에서 어쩌든지 전화로도 기도하라 하고 기도해  가지고 주일날 와 가지고 그것을 다 찍어서 나중에 보면 천오백오십 명이 하나도  하루도 빠지지 안하고 다 기도하고, 만일 빠지면 자기 전에 자다가도 일어나  가지고 기도를 하십시오. 빼면 안 됩니다.

 이러고 이제 아직 수가 멀었습니다. 장년반만 해도 삼천, 출석도 삼천이지  주일학교가 칠팔천 되지, 중간반이 한 이천 되지 이러니까 우리가 아마  호적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저는 목표를 그래 두고 있습니다. 내가 낙심한  자들을 다 대개만 불러서 인도한다고 해도 주일학교가 만오천이 될 것이고,  중간반이 사천이 될 것이고, 장년반이 오천이 될 것이라. 믿다가 낙심한 자를  일으켜 가지고 이렇게 인도해야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내가 이렇게 주를  위해서 주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힘썼으니 그게 뭐이냐? 힘쓴 그 공로가  나타난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집니다.

 '거석이 홍안이라' 돌을 들어야 낮이 벌개진다고 암만 안 들고 이래 가지고야  아무 힘 안 들어. 힘을 쓰면 붉어지는 것처럼 자기가 그와 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안할 것이라 하는 것이 믿어지는  믿음을 만드는 것이오. 믿음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하나 순종하니 그게  믿음이 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으로 영감의 사람이 되고 영감의 행위가 되는  그것으로써, 그것은 다른 데서 안 돼요. 자기가 이 말씀과 영감을 지식으로,  기억으로, 귀로,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마는 거기에까지에서는 자기에게  교만의 결과를 일으키지 참 영광된 구원의 겸손의 결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감과 진리가 자기와 하나가 돼야 돼요. 자기와 하나될 때에 자기는  겸손해지고 자기는 권위 있어지고 자기는 사람과 행동이 변화됩니다.

 그 하나되는 것은 꼭 현실에서 그 진리를 버리지 안하고 현실에 영접 해야,  현실에 주님을 배척하지 안하고 현실에 주님을 영접해야, 왼쪽에서는 간부되어  있는 세상이 와 가지고 자꾸 그럴 때에 간부를 버리고 주님하고 이제 본남편  주님하고 결합이 돼져야 되지 그 외에 다른 걸로써는 하나되는 갈이 없습니다.

암만 외워봤자 소용 없어. 신학대학 암만 다녀야 소용 없어. 부흥강사 암만 돼도  소용 없어. 그 현실에서만 영감과 진리는 자기와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권면을 해서 어쩌든지 다 전체가 기도합시다. 이러면 이 한 교회 가지고도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조그만한 한 사람의 입, 예수님의  입에서 나와 가지고 천하에 도가 퍼졌고 천하에 구원이 퍼졌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하시는 이 일에 단마음으로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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