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성읍

  선지자선교회

198017일 월요일 새벽

 

본문: 이사야 261-2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그날에' '그 날에 이 노래를 부르리라' '그 날'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를 두고 말합니다.

 

유다라고 이렇게 표시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유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유다 지파를 통한 이 구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성곽을 삼으신 이 구원을 위해서 기뻐 찬미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유다에 속한 사람은 곧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 열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하실 때에 그때에 유다 지파에서 구세주가 탄생하실 것을 축복했습니다. 이 유다 땅이라 말은 유다 지파를 통한 구원에 속한 사람들이라 하는 말입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구원의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아무도 해할 수 없는 견고한 우리의 피난처가 있으니 아무도 해할 수 없는 견고한 우리의 피난처가 있으니. 세월이 지나간다고 세월이 해하지 못하는 것.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세월이 지나가면 그것이 절단납니다. 시간이 해할 수 없는 것 천 년 만 년, 억 천만 년, 영원이 가도 시간이 해할 수 없는 것. 또 세상에서도 또 이 나라에 가도 저 나라에 가도 이 지방에 가도 저 지방에 가도 해할 수 없는 것, 또 세상과 무궁 세계에 가도 해할 수 없는 것, 공간이 해할 수 없는 이 견고한 성. 또 이 종류나 저 종류가 해할 수 없는 것. 인간이 해하지 못하고, 과학이 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온갖 악한 악한 사상들도 해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해를 받지 않는 것. 시간과 공간과 종류들에게 해를 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종류들에게 해를 받지 않는 이런 견고한 구원이 있다 하는 말입니다. 견고한 구원이 있다.

 

아무 것도 해할 수 없는 견고한 구원이 있기 때문에 유다의 땅아, 유대 땅, 이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 택함을 입은 자들, 예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 아무 것도 해할 수 없는 이 구원을 인해서 하나님에게 노래하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 성이 무슨 성이냐?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셨다. 성을 삼으셨고 그 성의 윤곽을 삼으셨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견고히 잡고 이 구원성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여기 견고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해할 수 없는 그 튼튼한 방위가 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해할 수 없는 튼튼한 구원이니까 그 안에는 생명으로는 영생이요, 지혜로는 전지요, 능력으로는 전능이요, 능치 못함이 없는 그 완전한 구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피난처 입니다.

 

아무것도 해할 수 없는 이 구원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세월도, 이런 저런 모든 변해지는 장소도, 이런 저런 종류도, 공산주의, 민주주의, 무슨 제국주의, 이런 악독, 저런 미혹, 아무 것도 해할 수 없는 이 구원이 우리에게 온 것을 우리가 깨닫고 이 구원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구원으로 자기의 피난처를 삼는 것,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이 구원 속에 들어가는 이것으로 피난처를 삼고, 이 구원만이 우리의 구원으로 삼아야 되지 이 구원을 내놓은 사람은 그 사람은 시간의 해를 받아야 하고 또 이 공간, 이 처소의 해를 받아야 하고 이런 저런 종류의 해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해를 다 방비하는 그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구원 외에는 없습니다. 또 모든 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것으로만 우리가 충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나타났으니 이 구원은 무엇인가? 곧 하나님과 택함을 입은 백성들과 맺어진 이 약속, 맺어진 이 약속을 어겼던 것을 다 예수님이 회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속해 가지고 이 약속을 어긴 자를 어기지 아니한 자와 같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아니한 자를 지킨 자와 같이 이렇게 우리를 대속해서 본 지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본 지위에서 인생이 타락했는데 타락한 여기에서 타탁한 것을 예수님이 대속하셔 가지고 만물의 영장으로 되어 있는 인생의 본 지위에 올려 놓아서 우리가 이 본 지위에서 타탁하지 아니하고 살면 전체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아니하고 이 위치에서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필연적으로 맺어져 있는 이 약속, 이것이 기본 약속이요, 필연적인 약속이요, 절대적인 약속인데 이것이 기본적 약속입니다.

 

기본적 약속이라 말은 근본적으로 서로 관계가 맺어져 가지고 있는 그 관계라는 말입니다. 약속이라 말은 관계라 말인데 맺어진 관계라.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는 어떤 그 관계가 맺어졌는가? 당신은 우리를 지었고, 우리는 당신에게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지으실 때에 목적을 두고 지었으니 곧 당신을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위해서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을 위하는 자로 살도록 이렇게 벌써 내가 생겨질 때에 관계가 맺어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것으로 당신을 위해서 살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요. 하나님을 배반한 악령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 이거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방편은 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을 어기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는 것인데 이 약속을 어기는 것으로 약속을 어기는 이 방편 가지고 하나님을 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것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우리에게는 두 가지 방편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는 방편 하나가 났으니 이것이 인본이요 이것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방편이요. 이거 외의 것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이 방편 이것 둘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그 방편은 어떤 것이냐? 두 방편 밖에 없는데 하나님으로 피동 되는 것, 하나님으로 피동 되는, 하나님으로 인하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 방편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방편입니다.

 

그러기에 첫째아담으로 사람이 죽은 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이 기본적 관계, 기본적 약속, 기본적인 계약인데 이것을 범함으로 본 위치에서 타락해서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된 이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시 복구시켜서 본 지위에 올려 놓아 이제는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하나님으로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에 사는 방편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에게 피동 되어 사는 이것이 우리가 합리적 생애고, 상호 관계에 기본적 생애고, 이것이 약속적 생애입니다. 계약적 생애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다시 선포해서 이 계약 안에서 살도록 하게 하신 이 계약을 선포해 놓은 것이 구약 성경이요, 신약 성경입니다. 구약(舊約)이라 말은 먼저 구자, 오래 구자, 옛 구자, 곧 약속 약자, 먼저 선포된 약속이라 말입니다. 또 신약(新約)은 그 다음에 선포된 약속이라 말입니다. 이 약속을 지켜서 사는 것이 곧 영생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도록 이렇게 우리에게 한 약속, 한 약속을 지키도록 한 현실, 한 현실을 주셔가지고 이 현실에는 요것을 행해라 고러면 그것이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요, 또 그 다음 현실을 주시면서 이 현실에는 요렇게 행해라. 그대로 지키는 그것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라. 요렇게 하나 하나 약속을 지키면, 신을 지키면, 약속을 지키면, 그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의로운 나라 그게 무엇이냐? 하나님의 구원의 성이다. 그게 도피성이요, 그것이 구원성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성이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데 문들을 열고 들어오라. 그 문들은 어떤 문들인데, 사죄를 힘입어 들어오라, 칭의를 힘입어 들어오라,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이 화평의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들어오라. 곧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의 이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들어오라.

 

어떻게 이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있으냐? 곧 내가 천국 열쇠를 너희에게 주노니 이 열쇠로 꺼내고 들어오라. 그 열쇠가 뭐인데. 이는 혈육이 알게 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니라. 인간, 인간이 주는 그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지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시켜서 알게 하는 성경은 배우지만 네가 어떻게 행할 것은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없다. 배워 가지고는 안된다. 아무리 배워 보아도 모른다. 네 안에 기름 부음이 옳고 참되게 네게 가르쳐 주리니 그대로 거하고, 그대로 살고, 그대로 행해라. 성신의 감화가 아니면 자기가 참된 이치를 자기 현실에 해당된 그 이치를 바로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 발견된 이치를 백번, 천번 말해도 영감이 아니면 모릅니다. 영감이 아니면 알대로 모릅니다. 영감적으로 알아야 결실을 할 수 있는, 권능적으로 그 지식이 자기에게 와서 역사합니다.

 

이러기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너희에게 주노니 네가 땅에서 열면 하늘에도 열리고, 땅에, 또 네가 땅에서 닫으면 하늘에도 닫아진다. 땅에서 풀면 맺으면 하는 그 말이 다 그런 말들입니다. 그런고로 영감으로 이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라.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모든 이 인도는 어떤 인도냐? 죄를 벗는 인도요, 의를 건설하는 인도요, 죄 없는 자로 살게 하는 인도요, 의로운 자로 살게 하는 인도요, 죄를 벗게 하는 인도요, 의를 건설하게 하는 인도요,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고치게 하는 인도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시는 인도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구원이니까 이 땅 위에 공간적인 그런 것으로 구원을 삼지 마라. 내가 이런 사람에게 속해야 구원이 되겠다, 이 나라로 가야 구원이 되겠다. 이 물질로 무엇을 만들어야 구원이 되겠다. 과학을 어떻게 구비해야 구원이 되겠다. 이것으로 아무리 구원해 봤자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 방주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그 방주 외에는 다 헛일했습니다. 이것은 다 헛일이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이 구원으로 네가 구원성을 삼아라 이 구원 속에 들어가라. 하나님이 주시는 이 구원 속에 들어가야 시간과 공간과 종류가 해하지 못해서 영생과 영원한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 이 외에는 구원하는 그런 구원되는 피난처가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이것으로 네 성곽을 삼게 하셨으니까 이 성곽 안으로 들어가라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것만을 자기 구원으로 삼아야 되지 이거 외에 딴 것을 구원으로 삼는 것은 다 자기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서든지 할 수 있소. 이 구원은 어디서든지 이룰 수가 있습니다. 산골에서도 이룰 수 있고, 들판에서도 이룰 수 있고, 시장에서도 이룰 수 있고, 자기 혼자도 이룰 수 있고, 또 인간 복잡한 데 성근데서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 구원은 뭐이냐? 속에 알맹이는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 그 나라 안에는 신을 지키는 것 뿐이요. 의로운 것 뿐이요. 그 나라 안에는 이 나라에 들어갈 때에 어떻게 들어가야 되느냐? 이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문들을 열고 들어가야 됩니다. 문들을 어떻게 열고 들어가는가. 영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영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성신의 감동으로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성신의 감동으로 무슨 문을 열고 들어가는가? 성신의 감동으로 자기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죄없는 자로 살게 하시는 현실에 죄가 나를 와서 확 덮을 때에 누가 봐도 그는 죄 속에 살리라 하는 그 죄가 와 덮을 때에 거기에서 죄 없는 자로 사는 그것이 구원성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를 깨뜨릴 때에 의를 깨치지 아니하고, 의를 건설하기가 심히 어려울 때에 의를 건설하고 이렇게 하도록 현실 현실에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영감 시키는 것, 성경은 우리 현실에 등불 같이 우리 현실에서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하는 그것을 윤곽적으로, 윤곽적으로 이 울타리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희미하게 가르쳐 주요.

 

마치 울타리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이렇게 담장을 쳐놨지마는 담장 안에 집이 있고 집 안에 방이 있고 방 안에 또 자기의 침구가 있고 침구 속에 자기 옷이 있고 옷 속에 자기가 들어 앉아서 그래 자지 않습니까. 드러 누워 자지 않습니까? 이렇게 모두 다 있는 것채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윤곽적이라 탈선 만 못 하도록 이랬어.

 

이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요것은 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는 것을 성경이 안해야 된다는 거를 이렇게 성경으로 찾아서 알았다 할지라도 안해야 된다는 그 감이 어느 정도 강도가 돼 있느냐. 아니해야 된다는 고것을 바로 알아서 아니해야 되는 그기에 참 합격이 되도록 그것이 아니하는 그 실효의 그것이 구원이 되어지도록 죄가 되지 아니하고 의가 되고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지도록 요렇게 하는 데에는 영감이 역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영감의 역사를 받기까지.

 

그러기에 성경에는 구약에 속한 성도들이 성경말씀 대로 한 그것이 영감에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나, 그 예수님의 모든 행사를 대립한 것이나, 선지자들 죽인 것이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죽였습니다. 성경 말씀이 이렇기 때문에 이란다 했는데 그들이 성경 말씀만 지킬 줄 알았지 성경 말씀 안에 영감이 역사하시는 이 영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적용하지 못했고 바로 사용하지 못했어. 영감을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사용처가 달라졌어. 인용을 달리했다 말입니다. 인용이 잘못된 것, 또 인용은 바로 했다 할지라도 껍데기만 했지 속에 알맹이는 알지 못한 것, 이래 가지고 그들이 도리어 죄를 지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구원은 이 나라, 저 나라도 아니요. 또 이것 저것 내가 돈이 있어야 되겠다 과학이 있어야 되겠다 그것은 필요하지마는 그것은 그 다음 조건이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구원 얻은 자에게 그게 필요하고 구원 얻지를 못한 자에게는 그것이 도로 구원을 방해할 수도 있고 그것이 구원을 얻는 데에 필요하고, 구원을 얻은 자에게 필요하고, 그것을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고 구원 얻은 자가 사용하고 이렇지 아니하고 그것을 구원으로 삼으면 그것이 도리어 자기를 망치는 것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은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 그거 다 제한을 벗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우리 구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 말씀, 이 말씀으로 윤곽을 삼고, 이 말씀 가지고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소유와 자기를 정리하는 대로 정리하고 정돈하면, 우리가 자유하는 마음이 됩니다. 돈에도 붙들리지 아니하고, 권세에도 붙들리지 아니하고, 감정에도 붙들리지 아니하고, 오기에도, 자기 성질에도 붙들리지 아니하고, 아무데도 붙들리지 아니한 자유하는 마음이 되어졌을 때에 이 마음을 가리켜서 착한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착한 양심은 아무데에도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붙들려서, 붙들리지 아니하고, 충격받지 않는 마음이요, 이 마음이 되면 요것을 이제 하나님께서 붙듭니다. 이 마음이 되면 하나님을 접선할 수 있소. 이 마음이 되면 영감을 받을 수 있소. 요라면 요것이 진실한 마음이 됩니다. 이 진실한 마음, 요것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것이 구속을 주신 현실 현실에서 죄 없이 사는 것, 죄가 아무리 와도 죄에 물들지 아니하고 죄 없이 사는 것, 범죄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의를 입혀 주시니 의롭게 사는 것,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합해서 화평으로 살게 하시니 이 화평을 뺏기지 아니하고 사는 것, 사죄는 빼앗기지 아니하고 칭의를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합한 이 화합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요대로 이 살이를 하는 요것이 구원성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이럴 때는 아무도 해하지 못해요. 사자가 해하지 못한 것, 불을 불이 해하지 못한 그런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울로 하나의 형식 계시로 보여 줬습니다.

 

어떠한 그 입장 처지라도 이 세 가지만 보면서 영감으로 들어갈 때에는 해하지 못합니다. 죽여도 해는 안 됐어. 그가 날 위하고 말았지. 위함이 되고 말지. 또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추호의 해도 오지 못합니다. 왔으면 그것이 이미 떠날 때가 됐는데 왔는 것이니까 그것으로 더 영광스럽게 됐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10분 기도하고 권찰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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