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범죄

 

1984. 3. 6. 화새벽

 

본문: 히브리서 10장 26절-31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 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브리 6장에는 보면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 구원을 믿고 바라고, 또 하나님의 심판도  우리가 믿고 바랍니다. 우리가 전에는 사람들이 많은 그 공동으로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힘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저 한 사람이 말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말하면 더 힘 있고, 또 천 사람이 말하는 것보다 만 사람이 말하면 힘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살았으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우리의 깨달음과 아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숫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그러하다 하면 사람의 그 많은 수에 대적이나 변론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꺾을  수 없고, 이길 수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옳은 것이나 틀린  것을 다 그렇게 우리가 판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중론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선포 하셨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약 선포를 어떻게 하셨느냐? 그 계약 선포가 어찌 되어  가지고 있느냐? 하는 이를 우리가 믿고 바라봅니다. 또 의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의 그 공론을 참고로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선포한 계약을 찾는 데에 참고로 삼아서 찾기에 도움을 받을까 하는  그 정도로 모든 사람의 말하는 그 공통을 그것을 우리가 알려고 애를 쓰고, 또 이  정도로 우리가 평가하고 권위로 인정하지, 사람의 모든 공동적인 공통적인 그  주장이라면, 이는 뭐이만하면 하나님의 심판이나 영원무궁에 조금도 손색될 것이  없다. 이만하면 족하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가지지를 않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그것 가지고 우리는 안심을 하지를 않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해서 역사적으로 참 상고 때부터 지금까지  공통적인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고, 온 세제가 다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교리라 신조라 그렇게 말합니다. 교리와 신조는 다 역사성을 가진  것이요, 또 공통성을 가진 그런 것을 우리가 다 교리라 신조라 그렇게 해서 우리  믿는 데에 모든 선진들의 그 깨달은 교리와 신조를 우리가 찾아볼라고 또 알려고  배울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대한 절대성 가진 그런  판정이라고 그렇게 인정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약만이 절대성인데 그 계약에  위반 됐으면 아무리 역사성의 그 공통, 또 모든 세제적인 공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런 절대적인 그런 권위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그런 교리와 신조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조하고 궁구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틀렸으면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모든 공동 고백 그 교리를 세워 놓은 그 교리를 그렇게 쉽게 멸시해  버리지는 안하지마는 거기에 대해서 담대히 우리가 연구하려고 달라들고, 또  성경적이 아닌 것을 발견할 때에는 우리는 담대히 반항을 반대를 하고 그것을  수정하려고 그렇게 달라드는 것이 다 우리 믿는 신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받아 가지고 어디까지 권위있게 또 진실하게 그 깨달음의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아, 이 깨달음이면 이는 뭐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담대히 장담을 하지 못하고, 성경에 근거될 때는 성경이  이렇게 말하니 성경이 이렇게 말하니,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는 변하지  않는다 성경을 근거하고야 성경대로의 것이면 말하지마는서도 성경대로의 것이  아니면 장담을 못 가지기 때문에 혹 깨달아서 말하는 것이 이것이 잘못 됐을지도  모르니 이것은 참고로만 삼고. 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성경만을 우리의 구원에  유일한 법전이요, 또 계약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믿으라. 그렇게들 다 본인들이  말하고 갔습니다.

 또 제가 듣는 대로 주기철 목사님도 세상을 떠날 때에 당신이 설교한 그 필기를  그것을 자기가 혹은 저술해 놓은 그것을 다 태워 버리라, 없애 버리라. 왜?  성경이 있으니 성경과 내재적인 영감으로 족하지, 내가 말해 놓은 그것은 잘못될  수도 있고, 또 바로 될 수도 있고 이러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성의, 그래, 권위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 없애고 성경만 보고 영감만 받아서 믿으라,  그렇게 말을 했단 말을 들었습니다.

 칼빈도 자기가 깨달음을 가진 그것을 그렇게 후세에 절대성 가지고 남겨 두지는  아니했고, 다만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이 가라 하는 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데서 멈추고 성경만을 구원의 그 법칙으로 삼아서 믿으라 하는 그  성경의 절대성을 말한 그것이 그 분도 깨달은 데에서 책임을 성경에다가  맡겼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를, 아무리 믿은 사람들이 깨달아도 그게  절대성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성을 가진 그 깨달음인지 절대성을 가지지 못한,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인정하지 못할 깨달음인지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 사람이  깨닫고 가르치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다 완전히 다 해결을 짓고, 권위가  심판대 앞에까지 권위가 있으리라 그렇게는 생각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혹 있지마는 그저 참고로만 삼고, 다만 그날에는 성경이 나를 변증해 줘야 되고,  변호 해 줘야 되지 성경이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바울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 여론들을 그  폄론들을 절대성 두지 안하고 평가하기를 매우 적은 것으로 그래 여겼습니다.

매우 적은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다 해도 그것의 권위를 매우 적은 것으로  그렇게 인정했다 그렇게 말을 했고. 또 자기가 자기를 자기가 자기에게 대해서  양심에 가책이 없이. 마음에 가책될 것이 하나도 없이 그렇게 모든 것을 해결을  지웠다 할지라도 자기가 자기 양심도 그것도 인정하지를 못한다 이랬습니다. 그저  참고로만 삼지 인정하지를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자책할 것을 찾지 못했으나  이럼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전타 함을 받지 못하고, 항상 모든 것을 아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설 것이기 때문에 그 날까지는 항상 심판에 어느  것이 걸릴런가 자기 마음으로 야! 한다고 안심된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말한다고 그것 가지고서 그 날에 무슨, 누구가 이렇게 말했고 모든 중론들이  이렇게 말했으니 하는 그것이 아무런 그 날에 변호가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밤에도 이 말씀을 증거하다가 중단했는데 이 성구를 우리가 어떻게  할런지, 이 성구를 어떻게 규정을 지우고 우리가 신앙생활 할런지 하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의 참고로 말하는 것이고, 또 여러분들 각자가 이 성구를 하나의  연구의 과제로 두고서 각각 다 해결을 짓게 하려는 것이 저의 중심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는 '한번 비췸을 얻고' 이 비췸이란 말은 성령으로 깨달음을  받았다 그 말씀으로 저는 믿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빛에 비췸을 얻고,  성령으로 한번 감동해서 깨닫고 하는 한번 깨닫고,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사가 다 하늘의 은사입니다. 하늘의 은사.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있는  모든 그 은사는 다 하나님의 은사는 은사지마는서도 땅의 은사요, 다 사망과 저주  아래에 있는 은사들이요, 다 정죄 아래에 있는 은사들이지마는서도, 하늘의  은사라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정죄가 없고 사망이 없고. 저주가 없고 다  영생과 완전에 소속한 그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가리켜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우리가 이 은사를 맛봤습니다. 우리가 이 은사를 우리가  맛보지 안했다고서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다 이 은사는 맛본 줄 압니다. 또  성령의 이 빛의 비췸을 우리가 다 얻었습니다. 우리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빛의  비췸을 다 우리가 얻은 사람들입니다.

 또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자꾸 그말 되말했는데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성령에 참예했다 말은 성신의 감화 감동을 우리가 받았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화 감동을 우리가 받지 안했어요.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성령의 이  역사하는 그 역사에 내가 참가를 했고. 그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아니고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우리가 부활할 것을 다 알고 있고 또 부활할 때에  그 능력, 부활할 때에 능력은 어떤 능력이라 하는 그런 썩지도 쇠하지도 안하고,  죽지도 안할 능력이라 하는 걸 우리가 잘 압니다. 또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약할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려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변화함을 받은 그것이 내세의 능력을 맛본 것으로 그렇게  저는 깨닫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안하고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이것을,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해석 하겠습니까? 이렇게 이제 말한 대로  해석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비췸도 받은 사람이고, 하늘의 은사도 맛을 봤고.

성령에 또 참예도 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도 우리가 배웠고 들었고 읽었고 또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썩지 안할 그 능력을 우리가 다 맛봤습니다. 우리 안에 이  능력이야 썩지 않는다, 이 능력이야 썩지 않는다 이 능력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이 능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는 거 우리 입으로도 증거했고, 자기가 확실히 '아,  요 능력이라, 요거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는 그런 것을 그 능력을 우리가 다  맛봤습니다. 봤는데,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주장하는 것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신다 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서 영원히 썩지도 쇠하지도  낡아지지도 안하는 시공을 초월한 그런 그 부활을 신령함으로 부활한다 우리가  이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고, 또 거기에 대한 사선을 넘은, 이 일반 은혜를 넘은  초월한, 특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우리가 다 맛을 봤습니다. 맛보지  안한 사람 없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이거는 다 우리가 이렇게 빛의 비췸도  받았고, 또 능력도 맛봤고. 하나님 말씀도 우리가 들었고 부활의 그 능력도  우리가 체험했고 이거 다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받았는데,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타락한 자들은' 이 타락한 자는 그것은 예수님을 안 믿고  부인한 사람도 타락한 사람이겠는데 아주 예수님을 안 믿고 그만 반대하는  예수를 믿지 않는 그 사람을 타락한 사람으로 볼 것인지, 그 사람이 과거보다 좀  질적으로 좀 쇠퇴한 그것을 타락으로 볼 건지, 신앙 행위에 양적이 줄어진 것을,  좀 감소되고 또 쇠퇴되고 좀 해이해지고 하는 그런 것도 타락으로 볼 것인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기는 그만 예수님을 믿지 안하고 낙심해서 영, 아주  그만 낙심하고 돌아간 사람 그런 사람을 타락으로 보고, 그래도 아무리 믿다가  처음에는 있는 심신을 다 기울여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뭐 일년에 한번  그저 주일 지키거나 말거나, 또 성경을 그전에는 외우다시피 하려고 애를  썼지마는서도 성경을 일 년 내내가야 성경을 몇십 장도 읽지 안 하는 그런  생활을 하나 어쨌든지 그런 사람은 그만 타락한 사람으로 보지 안하고, 그런  사람을 타락하지 안한 사람으로 봤으면 좋기는 좋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본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맞느냐 안 맞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문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그 사람은 다시  회개케 할 수가 없다. 회개케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 타락했다가 다시 또 새로와져서 더 뜨거워지는 사람도 있지마는서도,  그렇게만 슬슬 타락해 가지고서 육체가 늙어서 차차 노쇠해지는 것처럼, 신앙도  차차 차차 노쇠해져 가지고서 마지막 늙어서 죽을 때에는 뭐, 신앙이 아주 없는  젊을 때는 아주 사자 같고 참 불덩이 같고 독수리 같은 이런 신앙가들도 나중에  늙어서는 슬슬 노쇠 해 가지고서 육체의 힘과 똑 같이 그것이 늙어져 가지고  그렇게 되는 사람들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많이 봅니다. 뭐 우리가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는 몰라도, 보면 사람이라 하는 거는  대동소이입니다. 대부분이 같고 좀 다른 점이 좀 있지, 그렇게 아주 판이하게 별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있기는 있지마는서도 그렇게 보지를 우리가 못할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건가? 그것을 타락으로 볼 건가 안 볼 건가?  하나님이 어떻게 이것을 판단하실건가? 고 판단이 참 궁금합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욕을 보임이라' 이랬으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먼저 위에 말한 대로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그렇게 인정이 안 되고, 나는 아직까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자기가 그렇게 자기를 인정할란지, 자기는 참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니까 아직까지 이 사람은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새로와지지 못하고,  빛의 비춤을 받지 못했고. 성령의 감동에 참예하지 안했고, 부활의 능력을 맛보지  안한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한 사람, 성경을 그래도 줄줄 읽고 깨달았다  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달음대로의 깨달음이 되지 안한 그런 미결에  있는 사람인지 미결에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있겠는데, 미결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께로서 도우심을 받을 소망이 있는데, 또 미결에  있다고 하면 우리가 이제까지 믿는 그것은 다 헛되고 다 거짓되고 다 믿는 것이  아니라는 또 문제가 나옵니다.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서운 말씀, '다시는  새롭게 하는 그 회개가 없다' 이렇게 한 말씀, 또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한번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대속 가지고는 대속을  하지 못한다, 그 대속에는 상관이 없다 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할란지,  그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 아침에 본 말씀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우리가 진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진리로 우리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진리라고 우리 입으로 많이 증거를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진리라, 이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진리라,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나타낸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이 지식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가 받았고, 가졌고, 또 배웠고 한 이것이 이 지식인 줄 압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그러면 우리가 지식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사롭게 하나님 말씀을 마구 에누리해서 마구  짓밟아서 이렇게 그렇게 제 마음대로 제 주관대로 해석하는데 하나님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옛날 노아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때는 뭐, 두 마음이 아니고 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여 살려 주옵소서' 하는 그 말이, 꼭 마음도 하나가 됐을  것이고. 소원도 하나가 됐을 것이고 그 이상 간절할 수가 없고 그렇게  했지마는서도. 하나님께서 거기에 피동되지 안하고 거기에 매수당하지도 안했고,  유혹 당하지도 안했습니다. 그대로 단정해서 홍수로 그 노아 여덟 식구 외에는 다  전멸을 시켰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하나님인 것을 또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고 보는지 안 받았다고 보는지 안  받았다고 보면, 우리가 받은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고 하면 우리가 오늘까지 이 지식을 준해서 그 법칙으로 삼아 가지고서, 이  법에 맞추어 살겠다고 하는 모든 사는 그 생활이 다 헛된 생활이요, 거짓  생활이요, 그러면 무슨 법을 맞춰서 살았는가 말이오.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인 것을 알고, 이 말씀을 강론도 하고,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안한 사람들인가? 그러면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우리가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러면 받은 사람이라고 우리가 생각을 합니까? 받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까?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진리 지식을  아직까지 받지 안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는 이 진리 지식을 아직까지  받지 안 한 사람 이 진리 지식을 아직은 자기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자기가 인정되는 사람이면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면 진리 지식을 받은  사람으로 자기를 인정한다면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자, 이러니 우리가 진리  지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리도 저리도 못합니다. 안 받은 사람으로 안다면 우리  생활은 뭘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자기가 다 헛되다는 것으로 다 정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진리 지식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거 또 부담이 있습니다. '진리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죄를 범한즉' '짐짓 죄를 범한즉' 다른 데는 알고 범하는 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짐짓 범하는 죄라. 알고 범하는 죄라, 또 다른 데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또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안 후에 타락하면' 또  타락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짐짓 범하는 죄나 타락하는 죄도 다시 사함을 못  받는다고 했고, 여기에 짐짓 범하는 죄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이 짐짓  범하는 죄나 타락하는 죄나 같은 죄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죄를 어떻게 규명할런지, 이 죄를 어떤 죄라고 우리가 규명할런지  어떤 죄라고 우리가 규명을 해 가지고서 짐짓 짓는 죄에 걸리지 안하고 우리가  이 구원을 가지게 될런지, 아무리 천하 인간이 다 합해 가지고서 짐짓 범하는  죄는 이렇다 그렇게 규명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규명한 것이 절대성은 아닙니다.

절대성은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규정을 지워 줘야 되지 규정 지워 주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짐짓 죄를 범한즉' '짐짓 죄를 범한즉' 그러면 짐짓 범한 죄는 죄인 줄 알고  범하는 죄가 죄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래 해석합니다. 짐짓 범하는 죄는 다른데  해석하기를, '알고 범하는 죄는, 알고 범하는 죄는 사함받지 못한다' 했기 때문에  짐짓 범한 죄를 알고 범한 죄라, 또 알고 타락한 죄라, 알고 타락한 것이라  그렇게, 저는 성경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짐짓 범하는 죄는 진리를 알고  난 다음에 타락한 죄, 그 알고 짓는 죄, 나는 그 죄인 줄 압니다. 이것이 혹, 이  해석이 아니고 여기에 알고 범하는 죄, 짐짓 범하는 죄, 타락해 범하는 죄 이것은,  이러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했는데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렇게  말했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을 지을런지, 그러면 우리는 전부 범죄하는 것이  알고 짓는 죄가 아니다. 이렇게 판정이 되고, 또 진리를 안 후에 타락한 죄가  아니다. 이렇게 판정이 되고, 짐짓 범한 죄가 아니다. 이렇게 판정이 하나님 앞에  판정이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긍휼도 입을 수가 있겠고, 또 속죄함을 입을 수가  있겠는데 우리가 그렇게 여기는 그것이 된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여겨  주신다고 인정해 주신다고 그렇게 규정을 지워 주신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겠는데 만일 그렇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또 그러면  우리의 생각이 다 이것은 진리를 알았다. 성신의 감동에 참여했다, 하늘에 빛을  비췸을 받았다, 내세에 그 모든 내세의 권능을 우리가 맛봤다. 맛보는 것, 무슨  음식 먹듯이 맛보겠습니까? 우리가 깨달은 것이 맛본 것이요. 느낀 것이 맛본  것이요, 생각하는 것이 맛본 것이요. 소원하는 것이 맛본 것 아니겠습니까? 핑계  못할 줄 압니다.

 이런데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위에 짐짓 범하는 죄 이것을 두고서 지금 다시 해석을  하는 것인 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대적하는 자, 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범하는 이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요, 대적하는 자요 또 짐짓 죄를 범하는  자가 대적하는 자인 줄 압니다. 빛에 비췸을 받고 하늘에 것을 맛보고, 부활의  권능을 또 자기가 체득하고, 성신의 감화에 참예하고, 이렇게 하고 범죄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하고 나서 범죄한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몰라도 나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범죄한 일이 나는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알고는 다시 죄를 짓지 안했는지, 죄라고 알고 범한 죄  많습니다. 그 죄가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는 예수 믿기 전에 범죄가 다 그  죄라고 이렇게 생각이 되지마는서도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는 뭐, 거짓말하지  말아라 속이지 말아라,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모두 알고 범한 죄가  얼마나 많은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몰라도 나는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 죄를 우리가 어떻게 할 거냐 말이오.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모세의 그 율법을 어긴  자도 두 세 증인만 있으면, 이 폐한 자란 말은 모세의 율법을 다 그는 필요가  없다 하면, 그렇게 물리친 육체의 이스라엘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하나님 법을  지킬라고 애를 써도 지키지 못하고. 못 지켜서 못 지킨 걸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율법은 소용없다고 그래 버린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에누리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도록만 해석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도록만  이것을, 아주 좀, 아주 따갑게 엄하게 해석해서 유익하면 엄하게 해석하고, 아주  이 해석한다고 쉽게 풀어서 뭐 예사롭게 그렇게 또 해석해서 유익하면 그래  해석하고, 우리 주관대로 우리 욕심대로 참, 이렇게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 중에 제일 큰 죄가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은 제사가  없다' 이렇게 말씀 했으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에누리하는 이 죄,  에누리 하는 이 죄를 어떻게 할 건가 그 말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다 그때 죽었습니다. 그러면 용서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만 돌로 쳐서 죽였고, 다 그를 다 죽여 버렸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다 죽였습니다. 안식일 범한 사람은 '죽이라' 할 때에 그  사람을 잡아 가지고 왔으면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는 음행죄를 범한자니까  당장에 잡혔습니다. '죽여라' 할 때에 모세가 '죽이라' 할 때에 재판해 가지고서  죽였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모세로 말미암아 말로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이랬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사람되어서 도성인신하셔 가지고서 오셔서 십자가에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또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부활하시고, 아버지 우편에서 계시고, 또  성령님이 이를 책임지시고, 진리가 책임지고, 주님의 피공로가 책임져 가지고서  이 일을 위해서 모든 만물을 다 이거 위해서 지었고, 또 모든 순서가 다 이것  때문에 이거 위해서 예정이 되었고, 하나님이 크고 작은 것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데 이거 위해서 섭리하시는데, 이렇게 하신 이를 범한 자야.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그러면 어떻게 하는게 하나님  아들을 밟는 것입니까? 여기에 짐짓 범하는 죄, 짐짓 범하는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밟은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증명을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해석을  해 봐도, 우리가 알고 난 다음에 그 범한 죄 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이  안 되겠습니까? 해석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이 된다고 우리는 그렇게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이 해석을 피할 수가 없어.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뭐,  그 피가 어떤 죄를 담당한 되며, 어디까지 담당을 했으며. 그 담당한 높이는  어디까지 높이 담당했으며, 깊이는 어디까지 깊이 담당했으며 넓이는 어디까지  담당했는가? 그것은 우리가 측랑 못할 만치 우리가 아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모르는 것까지도 다 담당하신 줄을 압니다. 그런데 '그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우리를 구원 하시는 그 은혜를  베푸시는 그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감화를,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이 형벌이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지 안되는지 우리가 지금 웃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예수님의 피공로면 다 사함 받는다 이렇게 했는데 위에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했으니 이 성구를 어떻게 할 건가? 이거 참, 문제입니다. 이 성구를 어떻게  해결을 짓고 우리가 지금 살아야 될런지 이 성구를 모든 선진들이 어떻게 해결을  지었는지. 여기에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러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 있으면  속죄함을 입은 것 아닙니까? 나는, 이 우리 한글로만 번역해 놓은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세계에 다른 모든 각국에서 번역하기를 어떻게 번역 했는지 그걸 내가  지금 어학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모릅니다. 또 원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윈어의 권위는 나는 아주 극히 적은 것으로 봅니다. 정확  무오하다고 해도 원어는 옛날 고전어기 때문에 한 말 가운데에 그 범위가 너무  넓으니까 이쪽 모데기를 등용할 건가, 저쪽 모데기를 채용할 건가 어느 모데기를  채용할 것 때문에 그거는 정확성이라 하는 데에는 정확을 아는 데에는 원어에 가  가지고서 더듬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근거를 하기는 하지마는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신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깨달은 다대수의 깨달음, 그 깨달음이  어떻게 깨달았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지금 모두 다 각국에 성령의 사람들이 깨달아서 번역을 했는가?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저는 그저 우리 한국 말로 번역한 것 요거 알고. 또 일본 말로  번역한 것 약간 알고, 중국 말로 번역한 것 약간 알고.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말로  번역한 것은 모릅니다.

 이런데 그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당이 될란지, 어떻게 적용이 될는지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결을 짓고 믿는 지, 모든 신학자들이 어떻게 해결을  짓고 지나갔는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르쳤는지 이거 문제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 총공회가 열리는데 참, 제가 총공회 생긴 이후 총공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도 아마 이번이 제일 많이 관심을 가졌고, 또 기도도 제일 많이  했다고 제가 생각을 합니다. 또 생각하기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말씀을 증거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데에서 이 말씀을 받았는데 이  말씀을, 제가 처음에 증거하려고 받아 놓고는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뜻이  뭐인지도 모르겠고, 그저 뭐, 도무지 전부모순 모순이고, 전부 이건 이러기 때문에  모순투성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노? 말씀을 이 말씀을  증거하기는 증거해야 되겠는데 이 말씀에 문제가 어데냐? 자꾸 볼수록 물리기만  물리고, 이 어떻게 해결을 짓고, 우리가 정말로 이 말씀을 해결을 짓고 이는  단정을 짓고, 자기 주관적인 안심이라도 안심을 하고서 예수를 믿었는가 하는  것이 자꾸 새삼스러워져서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하나 문제로 그저 내 놓는  것뿐입니다.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더  중하겠느냐' 더 말하는 걸 보니까 이거는 이중입니다. 이중. 이거는 복수입니다.

그전에 처음에가 있고. 또 새로 다시라 그말입니다. '다시'란 말이나 더란 말이나  꼭 같은 말인 줄 압니다. 이것이 뭐, 원어에는 '다시'란 말이나 '더'란 말이나 그  원어에는 그게 없는지? 없는데 사람이 번역하는 것으로 그랬다면은 또 문제가  다른데, 그 원어에도 이것이 '다시'나 '더'라 하는 이것이 있는지?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너희는 생각하라'했으니까 이거 불택자에게 말씀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택한 우리들에게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생각하라' 이거는 여기에 모인 우리들에게 생각하라는 이 말씀인 줄을 압니다.

너희들이란 우리들이지 뭐 다른 무슨 이방인을 가리켜서 말씀 했겠습니까?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우리가 주님을 구주라고 자꾸  주여 주여 하고 있는데 우리가 주님의 원수의 편에 섰는지 안 섰는지? 원수의  편에 섰는지 안 섰는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여기에 또 더 구별했습니다. 그의 백성이라  하니까 우리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신약에 있는 우리들에게 주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해당 아닙니까? 뭐 구약에 지나간 사람들이라 그렇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이 성경 아닙니까?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손이 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통과가 그렇게 어렵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통과가 어렵다. 우리는 뭐, 예수님의 피만 알면 믿으면.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계약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이  계약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한다고 계약이 됐으니까 하나님이 계약이  크고, 또 성경에 있는 그 소망이 계약됐고, 우리의 안보가 계약 됐고, 계약 됐는데  막상 우리가 어떤 권력 앞에 갔을 때에는 하나님의 그 권력을 하나도 인정하지  안하고 완전히 부인합니다. 과거에 신사 참배 때에 조선에 있는 수많은 교인들이  다 그들에게 신사 참배를 했고 그들에게 굴복 했으니까 그들의 세력보다  하나님의 세력을 더 크다고 인정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세력을 능력을  짓밟지 안했습니까? 주님의 이 계약을 이걸 다 저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엔군이 유엔군이 다 철퇴한다 할 때에 한국 교회가 다 놀래서 혈서를 썼고,  전부 다 전부 다 공통적으로 다 시가 행렬도 했고 또 지금 메세지로 가지고도  반대 운동을 해서 '이러면 우리 죽습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남한은 살 길이  없습니다. 유엔군 떠나면 죽습니다.' 이렇게 그것이 전능자의 그 보호를 우리가  믿었던가 말이오. 안 믿었습니다. 믿으면 그 말 어찌 하겠습니까? 그 말이 어떻게  주님을 욕보이고 주님을 멸시하고, 주님을 천대하고, 주님을 짓밟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우리는 뭘 가지고 안심을 하고, 뭘  가지고 위로를 받고 있는지 이 문제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그 손을 통과, 하나님의 손은 심판 아닙니까? 그  심판을 통과하는 것이 무서울진저.

 이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는데. 담당하셨다고 우리가 다 믿고 있고, 알고 있고, 또 증거도 하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에는 이런 말씀이 나타났으니 이거는, 성경이 아닌가? 다른  데도 봤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담대하여 원하는 것은 무슨  담대이겠습니까? 담대를 원하는 것은 이 담대가 하나님께 대해서 담대겠습니까?  이 세상에 굶어 죽느냐? 맞아 죽느냐? 정죄받아 죽느냐? 매장을 되느냐?  억울함을 당하느냐? 뭐 세상에서 이런 무슨 사업의 그 사업에 대해서 뭐 담대한  것이 무엇이 어떻게 하는데 하나님께 담대하니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담대하여' 이 담대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담대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해서  담대한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안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간 큰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이 문제를  생각하고 보니까 땅 위의 것에 그것의 죽는 것, 사는 것, 망하는 것, 가난해지는  것, 천대받는 것 매장받는 것, 뭐, 어떻게 멀어지고 그까짓 거야 아주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이런 걱정. 저런 걱정, 근심 걱정이 가득  찼다가서 자기가 지금 사형받는 일이 갑자기 턱 닥쳐서 사형이라 하는 그 일이  나타났으면 사형 그것만이 두렵지, 그 큰 두려움이 오고 보니까 그 외에 두려움은  그까짓 거 보이지도 안할 그 두려움도 두려움으로 생각하지도 안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6·25때 보니까 그 뭐 사람이 어두우면 고 옆에 가까운 솔부디기 밑에도 못 가고  산에도 못 갈 사람이 산에 와, 맹수가 있고 뭐 어찌 겁이 나서, 거기에 뭐  호랑이가 와서 그렇지 하리라, 안 그래도 그거 생각하게, 산에 두려워 가지  못하는데 인민군이 잡아서 죽일라고 지금 하는 그 추격을 당해 가지고서  인민군을 피해서 달아난 사람은 어디든지 산에 깊은 데 깊은 데 깊은 데 깊은 데  또 험한데 험한데, 맹수들이 우글우글하는 그 속 그 속 그게 두렵지 안해. 맹수도  두려워도 그 인민군들이 자기들을 잡아 죽일라고 찾아다니는 그 두려움보다 그게  작은 두려움이기 때문에 그 맹수 있는 곳이 깊은 산중이 두렵지를 안하더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여기에 '우리가 담대하여' 이 담대가 뭐인가?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보니까 땅에 있는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담대가 아닌가? 그렇게 저는 해석이 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라니까 그저 주님 앞에 버림 당하지 않고 주님과 같이 계시는 것 주님에게만  영접 당한다면 그것이 제일 큰 문제되지, 뭐 지금 떠나든지 늦게 떠나든지 어떻게  떠나든지 주님에게 영접받는 것 주님에게 영접받는 것 그것이 문제지 다른 거는  아무 걱정되는 것이 없다는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9절에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뻐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이러니까 주님이 나를  노여워하시면 어찌 되느냐? 주님이 나를 노여워하시면 어찌 되느냐? 주님이 나를  모른다 하면 어찌 되느냐? 주님이 나를 노여워해서 '네가 나를 짓밟았지, 네가 내  십자가의 대속을 멸시를 했지, 네가 성령의 감화에 대해서 얼마나 네가 학대하고.

천대를 했지' 당신이 나한테 노하신다면 그 이상이 없어, 그만, 당신이 노하신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 없고, 당신이 나를 기뻐 환영 한다면 그 이상 좋은게 없어.

이러니까 이 문제가 큰 문제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두려운게  하나도 없고 모든 데 대해서는 담대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땅위에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러니까 어쩌든지 주님이 기쁘시게 하는 자, 주님이 날 기뻐하는  주님이 날 기뻐하시고,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것만이 이것만이 최고요. 이것만이 심판을 다 통과할 수 있고, 그분이 나를  불상히 여기면 되었어. 그분이 십자가에 다 대속을 했기 때문에 그분이 불쌍히  여기면 되는데 그분이 나 모른다 하면 그만이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땅위에 이런 저런 사건들이 그까짓게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기쁘시게  해서 내가 주를 기쁘시게 해서 내가 주님에게 기쁨이 되어져, 내가 주님에게 기쁨  되어지는 이것이 문제다. 이러니까 죽고 사는 것 이것 저것 모든 것이 다 문제가  아니고 어쩌든지 일편단심 하나 '주님이 나를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힘쓴다' 이렇게, 이 바울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성령은 요렇게 요 단일에다가 집중을 시켰는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뭐 허허 벌판에 엉만진창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친창의  신앙입니다! 아무 정비 정돈이 없는 신앙입니다!! 이러면서 담대히! 소리를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뭘 의지하고 있습니까! 뭘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주관적 위안이 아니고 참으로 객관적인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그  인정인지? 그래도 우리 주관대로 '하나님이 그래도 날 버리지 안하실 것이다.

일편단심 나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라 했으니까 하나님이 내 모든 성의나 모든  거 봐서 이래 봐도 하나님이 '이놈'하고서 차 던지지는 안할 것이다' 하는 이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지?  '힘쓰노라' 10절에 '이는 우리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우리가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누구든지 다 드러날 것을,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자로 여기 기록해 놨습니다. 히브리서에만 있다고 하면  히브리서는 사람들이 다 이해 못할 다른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성구들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를 외경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보지 안하고 외경으로 생각 할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릍 구약에 대한 구약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관한 성경  말씀이라 이렇게 해석해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다고 그렇게  돼지면 하지마는서도 그렇게 돼지겠습니까? 이것도 다 그 학자들이, 타락한  학자들이, 마귀의 감화를 받은 학자들이 우리에게 큰 유혹을 준 일인 줄 압니다.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선도 그대로 다 값을 받고 악도 그대로  값을 받고. '선악간에 그 몸에 행한 것을 따라' 자기가 어떻게 생활 했든지 선한  것에 대해서도 값을 받고, 또 그 악을 행한데 대해서도 값을 받고, '선악간에 그  몸에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것도 성경 아닙니까?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할랍니까? 이거 이번에 좀 해결을 짓고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공연히  위안제로,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에누리해서 모두 다 웃고 있고, 기뻐하고  있고, 떠들고 있고, 이렇게 마구, 오늘 정말로 남한 교회가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지?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지? 스스로 자기가  살펴봅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준 그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 생각대로  만들은 조작배기 하나님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친, 성경이 말씀하신 그  하나심이라야 참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지? 그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을 하는지? 그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지?  그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하는지? 그 하나님을 지존자로 우리가 인정하는지?  선악간에 그 몸에 행함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앞에  우리가 서서 심판을 받는다. 이러니까 공심판을 말하고, 사심판을 말하고,  공심판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심판을 말하고 이렇게 두 가지 심판을 말하는데 '두  가지 심판 말할게 뭐고? 한 가지 심판이면 다 되지, 심판이면 심판이지' 마구  이래 가지고서 '구원이면 구원이지' 어쨌든지 마귀는 마구 혼합탕을 만들어  가지고서 혼돈시키고 혼합시켜 가지고서 구별을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이름은  구별하는 무리란 말이 성도란 말인데 구별을 못하게 합니다.

 ○○○선생이 여기에 와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 그때에 그  강조하기를, 저도 그런 말 했지마는서도 강조하기를 '따져야 됩니다. 따져야  신앙생활이 나옵니다. 따져야 됩니다.' 그 따져야 된다는 그 말을 하나 깨달았기  때문에. 그거 하나 확실히 알아서 따져야 된다는 성도라는 것 따져야 되는  거룩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잡았으면 목사도 될 수 있고 그런 목회자도 좋고  다 될 수 있다 하는 걸 나는 믿습니다. 왜? 이 세상은 따지지 안하는 세상이요,  따지지 안하는 목사들이요, 따지지 안하는 다 신학자들이요. 따지지 않습니다.

따지는 걸 싫어합니다. 구별하는 걸 싫어합니다. 이러니까, 전부 혼합을 시켜  가지고서 무엇이든지 이것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마구 듣기 싫어합니다.

 어떤 신학교에 가니까 다 유력한 신학교인데 가니까 '아. 지금 뭐 그런 것을  이러니 저러니 따지면 안 됩니다. 지금은 그렇게 그렇게 따지고 그리 하면  안됩니다. 그저 그래 그만 둬 두고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있다가 '아,  신학교에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따져 주지 안하고 구별 해 주지 안하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그런 거 구별할 것 없이 그저 믿으면 됩니다. 그런 것  구별할 것 없이 믿으면 됩니다. 우리는 이것으로써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구별할 것 없이 믿으면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보배 피로 다  씻었기 때문에 깨끗하고 믿으면 됩니다.' '네 죄가 주홍같게 붉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나로 더불어 의논하자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어지리라' 의논이  무엇이겠습니까? '변론하자 하는 그 변론이 무엇이겠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선포한 이 말씀을 가지고 변론하고 뭣 변론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따지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지난 밤에 약간 말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건가? 그저 다른 데도  말했지마는 하브리서 6장 4절 이하에 있는 말씀 이 말씀과 또 히브리서 10장에  10장 3절 이하에 있는 이 말씀, 또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하에 있는 말씀 이  말씀을 집에 가서 가만히 새기면서 이 성구를 해결을 어떻게 할 건가? 분명히  우리는 멸망받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멸망받을 사람에게 대해 그 해결하는  길은 있기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결 하는 길을 있으면 그 길을  찾아 가지고서 그 길을 걸어야 되지 그 길을 걷지 않고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 됐다고 하면 선악 간에 그 행함을 따라서 갚음받을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을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다 구원 이를 구원인지  그리스도의 심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우리가 알고 지은 죄가 없는지? 짐짓  지은 죄가 없는지? 또 성신의 감화를 받고 난 다음에 지은 죄가 없는지? 진리를  안 후에 지은 죄가 없는지?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주의 피를 부정하다고 그렇게 정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그런 죄가 없는지? 그 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번에 총공회 와서 참예하는 것은 더 기쁨을 얻고 더 평강을 얻을려고 왔는데  여러 가지 근심만 걱정만 짊어지게 되니 블행같지마는서도 아닙니다. 죽어야  삽니다. 하나님 율법에서 정죄받아 죽어야 살지 죽기 전에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독교의 구원은 부활의 구원입니다. 정죄받아 죽지 안하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죄인이 안 됐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히 위안제 받을 것이 아니고, 가만히 돌아가서 이 성구를  생각하면서 이 성구가 어찌됐는지? 생각을 하고, 해결을 짓고, 그렇게 우리  강퍅하지 맙시다.

 지난밤에 말한 거와 같이 이거는 고만 하나님이 우리 불쌍히 여기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기뻐하면 됩니다. '아, 네가 왔나? 네가 왔나?' 하나님  심판 앞에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설 때에 '아, 네가 왔나?' 하나님이 날  기뻐하시면 됐어. 그러니 그분이 날 기뻐하지 안한다면은 아무 걸로도 우리는 그  대용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됩니다. 죄인을 사랑 하시니까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이는 성구가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보배 피를 욕된 것으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대속하신 주님을 발로 밟고 성령을 욕되게 하고 하는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런 짓을 안했는지? 그런 짓이 없는지? 그런 일이 없는지? 없는 사람  모르겠습니다마는서도 저는 그 죄가 너무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해결을 지을 건가? 해결지을 거는  딴거 없어. 당신이 나를 나는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 당신이 날 기뻐하면 돼. 뭐.

어떻게 당신이 전부다 심판장이요. 심판장이기 때문에 그분이 날 기뻐하면 돼요.

그분이 날 동정하면 돼 버리요. 그분의 동정과 그분의 긍휼을 받으려면 이것이  어떤 길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뭐, 우리가 이런 것 저런 것 사는게 문제  아니고 땅 위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간판 가지는 것, 명예 있는 것 뭐.

어데 정통이니 뭐이니가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토막토막의 그런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들. 또 하나님의 기쁨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의 기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다 기뻐했어. 그게 증거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어데든지 기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기뻐했습니다. 다  기뻐했습니다. 왜? 거기에서 기뻐하는 것이 당신을 믿는 거요, 당신이 믿는 것을  당신이 기뻐했고, 믿는게 믿으니까 만물들은 다 기뻐했고 아무 땅 위에 염려가  없었습니다. 아무 눌리지를 안했소.

 이랬는데 오늘 우리가 어찌 됐으며, 우리 교회들이 어찌 됐는가? 과거에 유엔군  철퇴할 때에 이것은 신사 참배는 억지로 강간을 당한 강탈을 당한 범죄라면은  유엔군 철퇴에 대해서 이와 같아 반대 메세지를 내고, 이와 같이 운동하고 있는  것은 이것은 자원해서 음행한 죄다. 남편이 억지로 당한 그 범행과 강제로 강제로  당한 범행과 제가 원해서 그 범행하는 범행과 어느 죄가 크냐? 신사 참배보다  유엔군 철퇴에 대해서 이렇게 온 교회가 떠들고 하는 이것은 더 큰 죄다 하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더 큰 죄다 하는 것을 노회 때에 말하니까 아, 그거  죄지마는서도 그거 다 해결했는데 뭐, 그걸 노회록에 기록을 해야 됩니다. 이거  안하고 이 노를 풀 수 없습니다. 노회록에 기록하자 하는 그 주장을 한 것이 이  인재 목사님입니다. 기록을 하자 하니까 그거 뭐 기록할게 뭐 있으며. 그 뭐. 다  지나간 일에 노회록에게까지 기록할게 뭐 있겠습니까? 말하는 발언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습니다. 발언해서, 그러니까 다 그대로  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노를 푼 일이 됐는지? 그걸 기록을 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노를 푼 일이 됐다 했는데 그거 풀지 안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살아야 됩니다. 공연히 사람들이 뭐, 정통이라고 정통입니까? 사람이 진리라  한다고 진리입니까? 그것은 다 그 열매를 봐야 알지, 열매를 봐야.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든지 해결을 하고 갑시다. 해결하면 길이 없는 거는  아닙니다. 낙망할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우리가 해결을 받을 수 있는, 그저 받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우리를 기뻐하면 됩니다. 기뻐하면 돼요. 무조건 하나님이  날 기뻐하신다 그렇게 믿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요.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일  행동을 했으니까 그 행동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해결되지, 지나간 죄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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