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범죄 회개

 

1988. 12. 18. 주일오후

 

본문: 마태복음 24장 37절∼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오후에 오전 설교를 재독을 하려고 이 시간 내려와서 내가 연락을 했는데, 다시  이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이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 큰 일이 네 번 있었으니 한 번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하늘나라에서 쫓겨 내려온 사탄이 인간계에 침략해서 이  물질계의 모든 만물의 영장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유혹시켜서 범죄케  하여 사망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우주에 있어서 첫째로 큰 환난이었습니다.

 또 둘째로 큰 일은 오전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사상과 공의가 합해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신인양성일위로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설정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이 제일 큰 일이고 그 다음으로 사람들이 알기에 두 가지  큰 일은 하나는, 여게 노아 때라고 하는 것은 노아 홍수 심판 때를 가리켜서  노아의 때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역사가 시작한 지 한  이천 년 정도 됐기 때문에 아마 인종이 지금보다 많을런지 적을런지 하는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사람이 패괴되고 강퍅해졌으므로  사람으로 인해서 코에 호흡이 있는 그런 동물은 사람이든지 곤충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홍수 심판으로 멸하실 것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  홍수 심판을 방어할 수 있는 방주를 만드는 것으로만 이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하나님이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다 이 말씀을 무시하고 등한히 하고 하다가 다 홍수에  멸망받았고 다만 홍수 심판에서 구원 얻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인 것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이랬는데 이것이 사람이 아는 지구상에 큰 일이요, 또 하나 큰 일이 남아 있는  것은 지구상에 하나님의 불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불심판이 임하면 우리는  아직 불심판은 닥쳐보지 안했으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때도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큰 일은 타락한 천사가 인간계에 들어와서 유혹을 시켜 인간이  유혹받아 가지고 만물의 영장된 사람이 범죄 타락했기 때문에 모든 우주가 다  범죄 타락해서 저주 아래에 있게 된 이것이 큰 사건이요,  또 여기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오셔서 신인양성일위의  구세주로 나셔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신 이것이 둘째로 큰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큰 일을 제외하고는 땅위에 큰 일 둘이 있는 것은 하나는 홍수  심판으로 인간이 멸해진 거와 또 하나는 불심판으로 멸해지는 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심판에 하나는 지나간 것으로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성경에  지나간 홍수 심판을 우리에게 정확무오하게 기록해 주셨고 또 앞으로 일어날  불심판에 대한 것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대로는 정확무오한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조심시키는 것은 뭐인고 하니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거짓 선지자, 적기독, 예수님을 믿되 가짜로 예수 믿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일어날 터인데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정욕대로 믿는 사람들이 일어난다 이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정욕이라  말은 자기 욕심이라는 말이고 또 성령의 소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 욕심대로 하는 것은 다 멸망이요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인 소욕대로 하는 것은 다 구원이 되는 것인데, 말세에 교회들이 차차  차차 어떤 경향으로 기울어지느냐 하면 교회들이 다 인간 저거 욕심대로 하나님  섬기는 이 일이 점점 심해져 가고 물들어서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을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자들이 말하기를 주의 강림하신다는 말씀이 어데 있느냐'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이 무서운 미혹이 말세에 있을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성신의 소욕대로 믿는 사람들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터이니 깨어 존절하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록 주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자기 정욕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신자가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이  재림인 불심판을 부인하고 세상 위주로 세상주의로 육신 주의로 이렇게 사는  이런 모든 죄악에 속화되도록 이렇게 교회들이 다 기울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기독교가 성신의 감동대로 하는 성령의 소욕주의가 있고 육체의  소욕주의가 있으니 육체의 소욕주의는 그것은 기독교 육체주의, 기독교 유물주의,  또 기독교 도덕주의, 기독교 윤리주의, 기독교 정치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인본주의 이렇게 어쨌든지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을 근본으로 해서  그분에게 피동되는 이 신앙 사상을 변개시켜서 피조물로 인하여 움직이도록  이렇게 하는 이 속화가 가속도로 일어날 것을 성경에 많이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이래서, 요한계시 17장에 보면 짐승은 세상을 가리킴인데 세상과 일곱 머리와 열  봤이 한 마음과 한 뜻을 품어 가지고서 하나가 되어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이 역사가 일어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알 줄 압니다.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데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고 거게 속한 자, 부르심을 입고 빼심을 얻은 자' 택한 받아  예수 믿는 자들 가운데서는 '진실한 자들만 이기리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진실치 않은 사람들은 이 모든 세상 한덩어리 되는 이 세상덩어리 속에  다 감염되고 속화되고 거기에 다 종이 되어서 자기의 건설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다만 기본구원, 영 구원과 심신의 그 본체 구원만 이루어지고 영육의  본체가 현실에서 노력하는, 그 정력을 기울여 기능을 만드는데 정력을 기울여  기능 만드는 것이 다 땅에 속한 기능을 만들어 불탈 것 다 썩어진 것만 거두고  성령으로 심어서 영생하는 그런 기능을 마련하는 사람들의 수는 심히 적으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때가 어느 때냐? 그러면 앞으로 짐승과 일곱 머리와 열 뿔이  하나되어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이 싸움이 언제 있을 것이냐?  그러면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불심판이 올 것 아닌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면 온 세계가 하나되어 가지고, 머리는 제일 주체 사상되는 걸 말하고 열  뿔은 힘을 가리켜 말하는데 이것이 하나가 돼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때는 언제인가? 이것은 벌써 이르러 닥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눈을 가만히 떠서 보면 세계에 기독교 교회가 많다고 하지마는 그  교회가 참으로 신본주의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부인한 것은 로마인서 12장 1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들을 권하노니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이럴게 말씀하신 것은 살아 있으나, 제물은 죽어서 잡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으나 너는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산, 네  심신은 네가 주관하지 못하고 너는 완전히 자유도 주권도 다 죽어 버렸고  하나님이 너를 주관하셔서 네 자유나 주권은 완전히 박탈을 당하고 그분이 네  안에 와서 살아 계시는 이 역사하는 이런 사람의 숫자가 극히 회귀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진실한 자들만 이기는데 진실한 자들은 어떤 것이 진실한가?  진실은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가 진실인데, 그 안 에다 영감과 대속은 슥에  들었고 껍데기 나온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자는 이 진리대로의 지식과  진리대로의 행위와 진리대로의 사람 이것이 진실한 자지 이 진리와 배치된 것은  다 거짓 부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벌써 세상은 참된 기독교와 이 세상과 두 쪼가리로 요렇게  구별해서 보는 그 시안을 가진 것이 그것이 슬기로움입니다. 아무리 교인이 않고  수가 많아도 세상과 하나가 된 것과 하나님과 하나된 것과 두 가지뿐이지 두  가지 외에 딴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살펴볼 때도 나무도 세상과 하나되어 움직이는 그  시간이 오히려 많다고 할 만하고, 아주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하나된 그 시간은 적고 세상과 하나되어, 자기도 모르게 세상과 하나되어 산  생활이 심히 많은 것을 우리가 느낍니다. 이래서 오늘도 세상은 거의 벌써 세상은  한 덩어리가 됐고 참된 기독교와는 엄연히 경계의 획선이 그어져 가지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자리에 둘이 일하는 데 하나는  데려감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 당하고 또 한 자리에 둘이 누워 자는데도 그러하고  또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는데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 하는 말씀은,  외형과 외부의 생애는 꼭 같으나 그 속에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있고 자기나  피조물 중심이 있어서 중심이 다르다 하는 것을 여게서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움직이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이 있고 피조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 같이 반태기 장사를 하면서 집집마다 '사이소' 하고 다니는 그 반태기 장사를  본다 할지라도 한 사람은 중심이 그 장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구원을 이루는,  믿음 지키는 일을, 그 시야에서 그 분야에서 그런 현실에서 믿음 지키는 일을  한다고, 많은 업이 있지마는 하나님이 그 업을 하라 하기 때문에 그 업을 하고 그  업을 하면서 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 지키는 일과 믿음 지키는  연습으로 하고 또 한 사람은 그렇게 돈이나 땅의 것을 소망하고 하는 그런 것을  얼마든지 우리가 논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은 벌써 온 세상에 전 인류를 깊은 사상적으로 말하면 두 쪼가리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신불신자간에 중심이 하나님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가 중심이 돼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 생활하는 그런 사람도, 세상  생활하는 그건 사람도 있으니,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사람과 같지 안하니 사람은 그 신장과 외모를 보거니와 나는 사람의 중심을 본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보시는 대로에 그 중심으로 구별한다고 하면 벌써  사람은 두 쪼가리로 이렇게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런 일은 이미 닥치고  있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게 "노아의 해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러면,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 하는 말입니다.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 같다면 뭐 어떤  것을 같다고 하시는가? 그 같다는 것을 우리가 한번 궁구해서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물심판 이것이 그때에 제일 무섭고 큰 일인데 뭐  공부하는 일보다도 큰 일이겠고 사업하는 것이나 출세하는 것이나 자기가 무슨  재벌의 문제 가정 문제 그 모든 것보다 이 일이 더 큰 일입니다. 여게 잘못되면  그거 다 물 속에 매장해서 전멸되고 마니까 그런 것보다 이 물심판 문제가  분명히 큰 일은 큰 일입니다.

 그때는 물심판이 문제가 제일 큰 일이지마는 이 일을 큰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심히 적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물심판으로 인간이 멸망받는다는  이 말씀을 아주 등한히 여기고 업신여기고 아주 말같잖게 여기고 이렇게  사람들이 무시하고, 하나님이 예고하신 그 말씀을 아주 무시하고, 히브리서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이 예고한 말씀에 준해서 힘을 썼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고한 말씀을 무시하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같다는 것은 노아 때에 사람들이 제일 중대한 일이지마는 이 중대한  일은 아주 사소한 아주 천한 일로 알아서 멸시를 했고, 그러면  그런 거 멸시하고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이것은, 장가  들고 시집가는 것은 가정 문제 가정의 여러가지 행복을 말합니다. 가정 행복 또  의식주의 행복 이것이라면 인간들의 활동하는 목적과 동기는 다 이 속에 다  포함됐습니다.

 그때와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같고, 하나님의  예고의 말씀을 그렇게 중하게 무겹게 어렵게 권위 있게 참 중대한 일의 그  실상에 가까운 그런 느낌을 가지고 준비 행동한 사람은 심히 적어 여덟 식구밖에  없었다.

 이래서,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 하는 이 하는 데해서 첫째 이것을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고의 말씀을 무시한 거와 불심판에  대해서 말세에 성도들이 무시하는 거와 같다 하는 이 같다고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그때에 사람들이 이 큰 일일랑은 다 업신여겨 등한히 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멸망하는 그 시간까지 모르고 여게만 분망했다 하는  이것이 또 우리 시대에 와 가지고도 꼭 같지 않겠나, 또 같다고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러면 그때에 그 물심판이 이를 때에, 물심판이 이를 때에 물에게 해를 받지  않은 사람도 있고 물에게 해를 받은 사람도 있는데 물에게 해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그거 가지고 물의 해를 방어한 거와 같이  불심판에도 하나님의 말씀 순종한 이것 만으로만 불심판을 방어하는 것이 같지  않겠느냐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뭐 물심판이 왔을 때에 사람들은 별별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저  임시나마, 비오니까, 그때라고 배가 없었겠습니까? 배도 있었겠지요. 배도 있었을  것이고 물 위에 뜨는 것은 뭐 임시라도 사람들 재주 있기 때문에 그때도  과학자들 많으니까 제 수단대로 무엇인가 날뛰었지마는 그때애 그 홍수 심판에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그것만이 이 물은 방어했지 딴거 가지고는 방어를  못했다, 모든 과학들이 하나도 방어하지 못했고 또 유력한 뭐 사람들이 필요로  여기는 물질이나 권세나 지위나 명얘나 학문이나 그런 것들이 아무 무용지물이  다 돼 버리고 말았고 다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한 거 요거 하나만이 물심판을  방어하는 일이 됐다 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래서 앞으로 이 불심판이 을 때에도 핑심판의 해를 방어하는 것이 이것이,  지금 과학 만능을 말하고 기독자들이 불심판 온다는 이런 말은 뭐 하나의  미치괭이 말과 같이 하나의 그저 정신 없는 그런 아주 묵은 그런 말로 알고,  모두 다 필요로 적기는, 온갖 필요로 여기는 그런 것들이 노아의 때와 같이  하나도 소용이 없고, 다만 이 불에게 멸망받지 않을 것은 하나님 말씀 순종한  이것만이 방어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같다고 했기 때문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인자의 임함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기 때문에 뭣뭣이 같은가 하는  것을 우리가 거게서 연상적으로 연구해 볼 때에 꼭 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또 우리가 논리적으로 또 우리가 그 모든 공의외 진리적으로 판단해 볼  때에 노아 때에 있던 그 이치나 우리가 불심판에 당할 때의 이치나 이치는 꼭  같지 그 진리가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때와 우리가 받을 이 불심판의 때와  같다 하는 그런 데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우리가 연상해서 연구할 때에 정확한  답을 우리가 거게서 찾아낼 수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가운데에, 왜 오늘 오후에도 오전 말씀을 한번 재독하려 하는 것은  오전 말씀은 여러분들이 가서라도 생각하면 예수님이 오 셔서 그 나라가 임할  때에는 어떤 나라가 임하는가 하는 것을 다 생각해 보면 다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 나라가 구원 이루는 데는 가장 좋은  나라입니다. 또 이북이니 소련이니 중공이니 하는 그런 데는 사회주의의 물로  가뜩 감염시켜 놨기 때문에 그 한쪽의 사회주의만 알지 다른 세계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도 또 민주주의도 또 자본주의도 또 유물주의도 이런  것들이 막 혼합적으로 섞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구경도 하고 실물을  가지고 우리는 공부하는 실물 교재와 같이 많은 구원의 도움을 입을 수가 있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이 자꾸 어두워서, 지금도 아마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럴 것입니다.

여간 좀 밥을 못 먹어도 어두움이 물러갔으면 좋겠다, 또 여간 좀 고생을 해도  광명한 세계가 됐으면 좋겠다, 여러가지로 좀 피곤하고 뭐 정리하려 하면  억울함이 있어도 꼭 정직한 세계가 됐으면 좋겠다, 이 거짓 없는 세계가 됐으면  좋겠다. 뭐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달아맨 돼지가 누운 돼지 나무란다는 격으로  포승줄로 묶어 가지고 가면서 죄인이라고 수사하는 인간이나 묶여 가지고 있는  인간이나 그거나 그거나 꼭 같지, 껍데기만 가지고 이렇게 가면 가장으로 하지  속을 파고 뒤벼 보면 다 그러니까 누구를 믿으며 누구를 의지하며 누구를  바라보며 누구에게 내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고 또 누구의 지도를 받고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까, 참으로 없는 그런 절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세대에  처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한국 사람이 기뻐하는,  한국에 있는 기독자가 기뻐하는 거와 같은 그런 기쁨을 세계 다른 나라의  기독자로서는 체험을 하지 못할 만치 우리 나라는 실감 있게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전에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것이  좀 더 급하다 해서 오후에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면이 노아의 홍수 때에 물의 해를 받아서 멸망받는 것이나 예수님  재림 때 불심판이 와서 불의 해를 받아서 멸망을 받는 것이나 꼭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물의 해를 방어한 것은 다른 것으로 방어하지를 못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한 그것 가지고만 방어했으니 불심판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그 명령대로 순종한 이것만으로 방어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판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창세기 6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건 말씀이 있고 또 7장 1절 이하에도  보면 또 거듭 그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했다'  하는 말이 두 번이나 거듭 있습니다. '다 준행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으므로 다 구원이 됐다' 이랬는데, 만일 노아가 그때에 하나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명한 것은 배 모으는 것과 모으고 난 다음에 그 안에  수용될 것을 명한 것과 두 가지 종류를 명했는데, 수용할 것은 그것은 뭐 혹  하나가 빠지든지 하는 그건 것은 큰 문제가 아니겠지마는 배를 모으는 데에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대로 다 순 종하지 안허다면 않은 거게는 반드시 물이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구멍이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그리 큰 배는 아니지마는 그 배에 상당한 중량이 실리고 있는데 훙수  위에 떠서 있을 때에 만일 하나님이 대라고 한 나무조각 하나든지 구멍을  막으라는 그 구멍을 하나 안 막았든지 했다면은 그 때에 그 물이 그 배 안으로  그 틈으로 들어올 때에 그렇게 쏜살같이 들어올 때에 그 물살이 얼마나 셌겠느냐,  그러면 그것을 무엇으로 막아낼 수가 있었겠느냐, 그때 무슨 나무쪼가리가  있었다고 씨서 막아낼 수가 있었겠느냐, 그거는 막아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백이십 년이나 걸려도 하나님이 그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보실 때에 다 준행했기 때문에 물심판을 내런 것은 조그마치라도  틈이 나면 그 틈으로서 물이 쓸려 들어와 가지고 다 실패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체하셨다 하는 것도 우리가 미루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추상할  수가 있고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이 불심판을 향해서 무엇으로써 이 불심판의 불의 세력을  막아낼 건가? 내는 그것은 하나님 말씀 순종으로만 막아낼 수 있단다는 것을  베드로후서 3장에 거게 암시해 놨습니다.

 그곳은 어떤 곳인고 하니 의의 나라입니다. 의의 나라로, 불심판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의의 나라로 옮긴다고 했으니까 의의 나라라 말은 하나님에 순종한  결과의 나라라 그런 뜻을 가집니다.

 이래서, 또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한 것들만 모인 곳이다 하는 그런 말씀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제게 걱정이 되고 제 마음이 눌리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을 합니다. 이것은 혹은 지나치다 과격하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련지 몰라도 제  마음으로서는 여게 대해서 마음이 눌립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듬 때에 순종 안 한,  다문 한 조각이라도 붙일 것을 안 붙였다면 그 조각을 물이 차고 들어와서 그  모든 준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럴 때에,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어긴 것을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다  해결받는, 어긴 것이 죄니까 죄를 해결받는 이것이 우리의 문제 하나요 또 하나는  당신이 시킨 대로 당신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이것이 하나요,  이 둘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명령과 요구이니까 이 두 가지로 우리는  불심판을 면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모든 것이 불타고 녹아지려니와 너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리니 이렇게 모든 것이 불탈 때에 너희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당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 가지고 이제 그 나라를 바라볼 때에 의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말씀을 중복적으로 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도 깨끗한 회개라는 말이요 경건이라는 말도 깨끗한 회개라는 말이요 의라는  것도 또 깨끗한 회개라는 말입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린 것이 하나도 없이  하나님에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 물심판을 방어한 것과 같이 불심판을 만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완전 준비가 되어야 이 불심판을 면해진다 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기가 막히고 기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이렇게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래서, 이 면에 대해서 심히 고민하는 일인데 제가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네 죄가 주홍 같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나로  더불어 변론하자. 그러면 눈과같이 양털같이 희어 지리라.' 하는 이 말씀은 검은  것이 없이 깨끗한 완전 회개가 된다 하는 것을 거게 말씀한 것으로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래서, '인간에게 완전 회개, 완전 깨끗이라는 완전 결백,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완전 이행자가 될 수 있다는 이것이 가능성이 있다.' 하는 것을 이  성구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고 그럴 때에는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으리라' 하는 것은 그때부터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든지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길이 있는데도 이런  길을 등한하 하고 게을리 할 때에는, 마치 알았지마는 게을리 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데에만 급급해서 그리 하고 이 명령을 등한히 여긴 사람들은  물 속에 매몰된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이 길이 있는데, 완전 해결의 길이  있는데 길을 두고도 무시해서 해결받지 않는 사람들은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는 것을 거게 덧붙여서 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쩌든지 이 성경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법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심판을 향하여 갈 때에 이 신구약 성경이 심판법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놓은 계약이요 법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법전을 의지 해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 법전을 의지해 가지고 해결을 짓고, 이 법전을 의지해  가지고 우리가 잘못된 것을 미리 사전에 고쳐서 방어하고 해결을 지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다 준행했다고 하는 그 말씀이나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하는 말씀이나  다 같은 성질의 뜻을 가지지 안했는가, 거게서 다 준행한 것이나 이것도 회개해서  다 깨끗해졌다 말이 아닌가, 우리가 다 깨끗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성구이니까 같은 성구다. 여게도 '양털같이 희게 됐을 때에 아름다운  소산을 먹는다' 이렇게 말씀했고 그것이 미진할 때에는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저게도 보니까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 그렇게 말해 놓고 그 7장에 와서 보면 또 '준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래 노아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어떤 점이냐? 이미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의 이 법전을 다 선포해 놓았기 때문에 이 법전을 가지고 이 법전에  걸리지 않도록 우리가 해결을 짓는 것이 그것이 든든한 길이지 이 법전이  있는데도 이 법전에 정죄받을 수 있는 그런 끈을 두고도 우리가 뭐 이런 무슨  사람이 설명하는 그 설명을 인해서 의지해서 안심을 하고 자기가 또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해서 안심 하고 이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지한 일이며 미련한  일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법전을 주셨으니까 이 법전에 어기면 정죄받는 것이고 이  법전대로 해결을 지웠으면 그거는 으례히 대심판을 통과하는 것이고 정죄함이  없을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이 있으니  대속과는 관련이 어찌 되겠는가 이것을 또 우리가 한번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대신해서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의 공로를 설정하신  대속의 설정입니다. 그러면 이 설정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응을 시킬 건가? 성경에  모든 말씀을 보면, 이사야 1장 18절에만 그렇게 말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성경에도 보면 요한일서에도 보면, 요한일서 1장에도 보면 '그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가 잘못됐다고 고하면 사해 준다' 이랬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뭐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해야 된다'그렇게도 안 해 놨고  그저 '아, 이거 내가 잘못됐다.' 그만 고하기만 하면 사해 주신다고 아주 이렇게  간편한 법칙을 우리에게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러면 이 계약으로서 우리가 모르는 죄는 그러하지마는 우리가 아는 죄는 무슨  죄든지, 어떻게 크고 작고 뭐 또 세밀하고 길고 좁고 뭐 넓은 광대한 무슨 범위  넓은 그런 죄악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죄악을 안다고 하면 그 죄악은 주님의  대속의 공로에 우리가 귀속을 시켜서 주님의 공로를 힘입어 이 죄를 고하면서  사하여 달라고 할 때에 즉시 사해 준다는 계약이 있으니까 우리가 어떤 죄라도  아는 죄는 주님 앞에 고하면 사유함을 받는다 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큰 해결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 해결 가지고 다는 아닙니다.

 그랬는데, 또 우리 신앙 경험에서 우라가 잘못된 줄 알고 주님 앞에 고해서  사유함 받았으나 또 사유함 받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환경을 만나게 되면 또 이  죄악은 꼬리를 물고 우리에게 유혹이 들어와 가지고, 그저 강제에 눌리기도 하고  욕심에게 끌리기도 하고 꼬이기도 하고 이래서 또 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이래서, 그러면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범죄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을 주님 앞에 고하기만 하면 사함을 반는다고 하면 우리 문제는  간단하겠는데 성경에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하고 또 범죄하고 또 고하고 범죄해 사함받고 고하고 범죄하고  사함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기를 그래도 좋다 했으면 그만 안심이  되겠는데 말씀하시기를 '알고 범죄하는 죄는 이것은 사함받지 못한다' 그렇게 말해  놨어.

 이래서, 고범죄라 말은 알고 짓는 죄를 고범죄라고 말합니다. 죄인 줄 알고  범하는 죄를 고범죄라고 하는 것인데 이 고범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가지 죄로 알고 주님 앞에 고최서 사함 받는 이 문제는 큰  것이 지금 방어가 돼 가지고 됐는데 거게다가 알고 범한 죄와 짐짓 범한 죄 꼭  같은 말인데. 그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 하는 이 성구에 우리가 걸리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에게 난제에 봉착됩니다.

 그런데 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지은 죄를 자기가 참으로 뉘우쳐 회개할  때베는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정죄하지 아니하신다, 또 자기가 그  죄를 돌이켜 회개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다시  긍휼을 베푸신다 하는 말씀이 있으니까, 우리가 그저 부족해서, 사함받은 그 죄를  사함받고는 다시 그 죄를 범하지 않으면 그것은 완전히 그 부분은 해결이 됐기  때문에 이거는 참 좋고 또 사함받고 연약해서 다시 알고 범했든지 이 고범죄가  되어졌을 때에는 이것은 우리가 힘써 노력을 하면,  사람이라는 것이 잘못된 걸 알고 고친다고 해 가지고 과거에 잘못된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살인죄를 범하고  후회를 하고 다시 살인하지 안한다 할지라도 살인한 그 형이 그대로 남아 있지  어떻게 그게 없어집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대형의 대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시간까지  어떤 죄를 고범죄로 지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다시 그것을 후회하고 고치면,  고치면 그 시간, 고쳤으면 그 고침으로서 당신이 사해 주시고 다시 뒤에 범죄할  때까지는 사함을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사함을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게서 노력을 해서 다시 고범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고범죄 된 것을 고쳤으면  고쳐 가지고 다시 고범죄로 죄를 범할 때까지는 사함을 받고 죄 없는 자가  되니까 이제 죄에 대해서는 고해서 사함받고, 자기가 고범죄, 알고 범한 그 죄는  알고 깨닫고 회개를 했으니까, 회개하고 다시 범죄할 때까지 그 동안 깨끗함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고, 또 이러니까 죄에 대해서는 요 두 가지로  해결이 되겠습니다. 해결이 되는데, 이 두 가지 방편으로 죄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깨서 우리의  행하는 그 의의 양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 질을 보지 아니하시고, 양과 질보다도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있는 우리의 실력을 표준해 가지고 당신이 평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실력이 많으면서 적은 의를 행한 것과 아무리 실력이 없는  미약한 힘이라도 자기에게 있는 대로 다해서 하나님 명령을 순종한 것과 있을  때에는 그 다해서 순종한 것을 하나님이 의로 보시고 힘을 남겨 두고 한 그  순종을 의로 보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해서 당신의 명성을  순종하는 요것을 당신이 요구하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때에 우리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당신 명령을 순종하는 것으로서 이 일은 감당이 안 되나?  또 그러고 자기가 연약해서 미달됐을 때에는 이것은 주님 앞에 고하면 고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사함받지 않겠나?  고해서 사함받는 것과, 또 고쳐서 회개로 용서받는 것과, 하나는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순종함으로 의를 행해서 해결받는 것과, 있는 힘을 나해서 순종하지  못하고 한 십분지 팔이나 칠쯤 기울이고 이삼을 게을부려서 했으면 그것은  고범죄가 아니요 자기의 게을의 연약한 허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허물 고범이  아니고 그거는 게을해서 연약해서 허물죄니까 그 죄는 주님 앞에 고해서  사함받지 않느냐?  이래서 이 세 가지 방편이면 우리가 노아 때와 같이 앞으로 하나님의 불심판이  올 때에 하나님 명령을 순종치 아니한 것은 반드시 순종치 않은 그로 통해  가지고 불의 재앙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멸망을 시킬 때에 우리는 모든  순종으로서 이것을 능히 방어할 수 있는, 노아가 방주를 든든히 예비한 거와 같이  우리는 불심판을 방어할 수 있는 든든한 믿음으로 가지고 이것을 해결할 수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러면 우리의 할 얼은 뭐이냐? 아는 대로 빨리 고해서 사함받는  이것이 첫째 문제고, 또 자기가 알고 행한 그런 고범죄나 알고 범한 죄 이거는  어서 이것을 고치도록 노력해서 고치는 이것이 둘째로 해결이 되겠고, 또 하나는  자기가 있는 힘껏 주님 명령 순종으로 아는 대로 순종을 하고 순종하다가 미달된  것은 주님에게 고해서 사함받는 것으로서 해결되지 않느냐?  이래서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돌려 가면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고 하신 대로 우리가 다해서 이렇게 불심판을  방어하려고 하면 방어할 수 있는 길은 있다 하는 것이 제 해석으로서는 발견이  됐습니다.

 우리가 이 불심판을 완전히 면할 수 있는 해결 방편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만  하면 할 수가 있다 하는 그 길이 있다는 것을 저는 발견을 하고 얼마 전부터 이  면에 대해서 늘 생각하면서 이것을 제가 언제인가 한번도 말했고 아무래도 또  지금 한번 말해야 되겠다 해서 오후에 이 말씀을 합니다.

 어쨌든지, 뭐 그래 준비해도 뒤에 가서 너무 준비해서 손해갈 거는 없으니까  어쨌든지 불심판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이 순종한 요것으로만 불의  해독을 방어할 수가 있지 순종한 거 외에는 불의 해독을 방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그거 의인데 의로만 불심판을 방어할 수 있지 의 외에 딴거는  방어할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한 의로, 마치 쇠로 만든 그 철선같이  우리는 완전한 의로 철벽같이 우리는 튼튼한 불심판의 방어를 할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있다, 하려면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공로가 없으면 하지만 예수님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할 수가 있다 하는 그 길을 오후에 여러분들에게 같이  증거를 받고 이 면을 연구해서 노력할 것을 이제 증거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뭐 땅위에 조그만한 심판도, 과거 신사참배 심판이나 6·25 때에 인민군  심판이나 개별적으로 이런 저런 심판하는 것 다 꼭 같은 성질이요, 다 같은  성질입니다. 결단코 우리에게 오는 해는 의만이 방어할 수 있고 의로 방어만 하면  없는 것보다 훨끈 좋습니다. 홍수가 노아에게는 아주 좋았습니다. 앞으로  불심판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지 손해가 절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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