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신조,행정-간판,찬송가


선지자선교회 1989년 5월 9일 화새집회

 

본문 : 이사야 3:1-4: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 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관장을 삼지 말라 하리라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첫 시간에 말씀을 전한 것같이 우리 구속받은 사람들은 우리가 변해서 하나님도  따라 변해져 모두 다 완전 멸망에 빠졌던 저희들입니다. 이랬는데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양성일위이신 예수님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완전을 이루어 복구하셨습니다. 회복뿐만 아니라 완전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완전한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영원 완전의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완전한 관계가 맺어졌는데, 그후 우리가 차차 차차 하나 변하고 둘 변하고 하니  하나님도 부득이 하나 변하고 둘 변해 이렇게 하나님도 우리 따라 변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이시며 불변이신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변한다고  우리에게 따라서 변해질까 이렇게 생각하기 쉽겠습니다. 우리가 변해질 때에  하나님이 변해지시는 것은 하나님이 불변자시요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변해집니다.

 우리를 높이 들어야 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드시고 우리를 낮추어  꺾어야 할 때에는 그분의 사랑이 변치 않고 그분은 완전자시요 어데서든지  피조물들에게 조그마치도 충격받지 않고 변질되지 않고 공의와 정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것이 화가 와도 그게 사랑이요,  사랑이 화로 왔고 또 우리를 돕는 은혜가 우리를 꺾어서 멸하는 것으로 온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정확 무오한 이 도리를  우리가 선포받았은즉 우리는 이를 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완전  판계 맺어진 것이 우리가 변해져 가지고 하나님과의 이 관계가, 우리를 돕는 그  모든 하나님이 우리를 헐고 꺾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에 보면은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지 안하고 모든  민족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아주 짓밟힘을 당하게 된 현실인 것을 우리가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그러냐 하면은 거게서 변해지지 아니한  사람들은 여전히 변해지지 안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리라고 이렇게 선포해 놓은 그 계약대로 이루어 감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 신자가 되지 말고, 또 지식 신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도를 자기 위해서 악용하는, 이용하는 이런 일을 하지말고 우리가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가감이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이런 정확한 도리를, 교훈을, 지도를,  명령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있으니 이 도리를 준하여 이 도리를 근거해서 우리가  하나씩 둘씩 변한 것을 찾아서 고침으로 또 하나님도 내게 대해서 변하신 것이  고쳐져서 우리 자신이 고쳐지고, 또 우리의 모든 내적 마음 행위가 생각이나 모든  것이 다 고쳐지고, 우리 행동이 고쳐지고, 또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가 고쳐지고  모든 원수들이 보기에도 우리들에게 있는 나타나는 모든 광채들이 다 고쳐지는  이 결과가 맺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이러니까, 금번에는 우리들이 지식으로만 듣는다는 것보다도 고쳐서 모든 것이  다 고쳐짐으로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고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지는 이 결과가 맺어지도록 우리가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사활의 대속을 하셨고 도성인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따라가지 맙시다. 우리는 모든 교계를 따라가지 맙시다. 단일성의  하나님께서 통일 교회를 만드시는 것은, 문선명씨 말한 통일 아니오. 단일성의  하나님께서 통일 정치로 통일 교회, 단일 교회를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또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예수님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와 하늘의 소망을 따라  이렇게 우리가 단일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앵무새 모양으로 지식으로는  가져서 '단일 교회, 단일 교회' 말하지마는 단일 교회는 통일성을 가지신 자존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다 비추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단일 교회입니다.

단일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이대로 믿는 이것을 많은 수가 하나된 것을  가리켜서 통일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단일 교회 통일 교회는  문선명씨 통일. 교회라 말 아니오. 벌써 그들은 마귀는 먼저 선수 떠 가지고  그것을 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막느라고 그 이름을 먼저 말했습니다. 원수가  말한다고 옳은 말을 못 쓸 이유가 없고 바른 길을 못 갈 이유가 없습니다.

원수들이 우리가 갈 바른 길을 저희들이, 먼저 넘덕거리니까 저들 따라간다  싶어서 못 가는 그자도 못난 자입니다. 우리는 한 권이신 이 신구약 성경과, 성경  안에 내재해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이 운동 전체가 다 나타내 역사해서 완성해  놓은 이 완전 대속과, 이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는 땅의 소망 가지지 안하고 위엣  것을 찾는 이 소망, 위엣 것은 피조물의 것을 찾지 안하고 위엣 것은 자존자이신  완전자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그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시요, 예수님의 피도  하나시요, 소망도 하나시요, 생명도 하나시요, 힘도 하나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생명도 하나요. 한 생명 가지고 우리가 다 삽니다. 한 지혜 가지고 한 힘 가지고  우리가 다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데까지 약하고 어려도 그는 바라보는 것이  자존자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 이분을 바라보고, 어데까지 장성했든지 어데까지  무리의 수가 많든지, 많으니까 그것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신 그  분보고 따라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깨닫고 이렇게 말하니 우리도 그들을  참고해서 그들 따라가야 되겠다.' 벌써 썩었습니다. 내가 따라갈 지도는 신구약  성경 뿐이요, 성경보다 그 안에서 계시고 내 안에 계셔서 인도하시는 기름 부음,  나를 중생시킨 성령님을 따라가고 주님의 대속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모든 주위 환경의 배경 피조물들을 의지하고 따라가고 타협하고  협동하고 이렇게 가려는 사상과 교회들 많고 온 세계가 그리 될지라도 내가  인도받고 가르침받고 지도받고 소망하고 따라갈 것은 오직 영원 자존자이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뿐이라, 나를 여기에 인계시키고 연결시킨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뿐이라. 요렇게 요것만 따라가는 요것이 우리가 깨닫는 교리요  신조요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행정입니다.

 이래서, 제가 오랫 동안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고 많이 기다렸습니다. 이러나  이제는 선포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제는 저와 같이 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변질돼 나가니까 이제는 선포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총공회  간판이라는 이것 때문에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찬송가 때문에도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공연히 총공회라는 그런 이름을 가졌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라고 하는 이 간판은 우리 이름입니다. 우리 이름은 이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이 이름을 가진 자의 잘못은 우리가 잘못이니까 그 책임을  우리가 진다는 그 책임을 선포한 것이 그것이 우리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은  아무것이 아무것인데 아무것이 아무것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이러한 행정을  가졌고 이러한 교리와 신조를 가졌다. 이 교리와 신조와 이 행정이 틀린 것은  우리 총공회가 다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옳은 것은 또 칭찬을 받게 되리라는,  자기가 행동을 할라고 하니까 행동하는 데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똑똑히  선포하지 안할 수가 없어서 그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온 세계에 종교가 많은데 예수교라고 해서 우리가 예수교를 따라서  우리는 예수교라는 그 교를 믿는 우리들로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종교  가운데에 우리는 예수교다. 예수교라 말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예정하시고 그 정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대로 창조하시고 또 창조된 것을 보존하시고, 또 그것들을  활용하여 섭리하셔서 하나님이 도성인신으로 사람되어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실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구약에  선포하시고 구약 말기에 와서 이 대속의 실상을 이루시고 우리를 대속하신 이  도를 믿는다, 이 길을 우리는 걸어간다, 이 교를 믿는다.

 이러기 때문에,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그분이 선포도 했고, 그분이 단독이 성취도  했고, 그분 단독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거게서부터 근원되어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도교를 믿는 이것을 우리가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교를 믿는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 예수교면 다 예수교지 뭣 때문에 장로회는 말하는가? 장로회는,  예수교가 나왔는데 예수교와 예수교의 깨달음이 다르고 행정이 다르니까 자연히  맞지 안하고 마찰이 됐습니다. 예수교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결심하고  정신을 똑똑히 차려서 실행하면 구원 된다' 하는 주장들이 있었으니 그 주장과, 또  '이는 인간이 행할라고 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하니까 둘이  합해질 수가 없습니다. 갈라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파를 하나 예를  들면은 펠라기우스파라고 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도리를 보기는 보고 행하기는  인간이 다 힘써 행하면 된다. 인간들은 못 행할 것이 없다.' 하는 그런 주장으로  하니까, '우리는 행할라 해도 안 되더라. 하나님이 행하게 해 주셔야 되지.'  이러니까 깨달음의 사상이 다르고 또 모든 행동이 달라지니 갈라져서, 갈라지기  싫은 예수교가 펠라기우스주의로 갈라졌고, 또 예수교 가운데 간추려 말하면 어떤  교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적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가 거부만 안 하면  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 그저 반대만 안 하면 우리 구원은 이루어진다.' 그  주장을 하니까 어떤 사람의 깨달음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반대를 안 하는 사람  가운데도 천층 만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반대만 안 하면 된다는  이거 하나로 주장을 세우는 것도 이것이 틀렸다.' 해서 그들은 이게 맞다 하고 간  것이 하나 예를 들면은 루터파입니다. 지금도 루터파의 모든 교회들이 많고 또  신학들도 많고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섭섭하기를 '예수교는 거부만 안 하면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힘쓰는 동시에 사람들이 힘을 써야 된다. 둘이 힘을  같이 써야 된다.' 하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이대로의 모든 행정들도 하고 있는  것이 갈라져 나가고 서로 나뉘어진 것인데 그것이 웨슬레주의로서 감리교가 그  교리에 우리와 다른 것이 그것이 그것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갈라지고자 해서 갈라진 게 아니고 갈라진 데는 교리와 신조가  달라서 갈라진 것도 있고, 행정이 달라서 갈라진 것도 있고, 지역이 달라서 갈라진  것도 있고, 감정으로 갈라진 것도 있고, 어떤 한 사람이 왕이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의 왕되는 운동으로 갈라진 것도 있고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리교와 장로교가 갈라진 것은 요것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그들은 다  사람과 하나님이 합동해 가지고 이룬다 하는 요것 하나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하나 떨어지니까 다른 달라진 것들이 많이 자꾸 생겨납니다. 또  장로교와 성결교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성결교는 '사람이 중생되면 그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에 그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성경을 보고.

성경 요한일서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는다' 이래서 그들은 '중생되는 것은  완전이다' 그 말하기를 완전주의라 하는 것이 곧 성결교입니다. 성결교 교리의  강령입니다.

 이러니까 '사람이 중생되면 완전자라. 이는 다시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그  깨달음으로, 그 주장으로 나가고 교훈하고 있는데, 우리는 '중생은 그 사람이 예수  믿은 후에 중생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믿기 전에 중생이 먼저다. 본인은 중생된  걸 모르고 중생된 지 오랜 후에 예수님 믿게 된다.' 이것이 장로교 교리입니다.

 이러니까 성결교와 또 합해질 수가 없습니다. 또 안식교는 '구약 시대에 지키던,  토요일 지키는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이 있지 주일을 지켜서는 구원이 없다.' 다른  것도 틀리지마는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그것을 골자로 해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안식교입니다. 또 침례교는 일반은 물을 뿌려서 세례를 주는데 '그거는 틀렸다.

물속에 잠갔다가 나와야 된다, 침례를 줘야 된다.' 하는 세례, 침례로 말미암아  갈라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 달라지니 거게서 지엽적으로 자꾸 달라지지마는 깨달음이  달라졌고 모든 정치라 하는 것은 행동인데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거는  부득이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우리와 다 같이 예수  믿는데 왜 그 사람들과 우리가 갈라집니까? 그들은 땅 부활을 말하고, '우리  구원은 땅에서 육체가 부활해 가지고 천 년 동안 산다.' 그런 땅 부활을 말하고,  '부활되는 구원얻은 사람은 십사만 사천 인에 한계 돼 있다'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또 우리와 사상이 달라서 또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장로교는 '우리의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분의 주권 개별 섭리에 따라서 우리가 피동되어  구원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단독 능동적인 행위는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또  달라져서 이것이 칼빈주의입니다. 칼빈주의에 제일 큰 것은 뭐이냐? 하나님의  주권이오.

 이러기 때문에 주권을 믿고 보니까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 이를 믿다 보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안 믿는 사람도 있고 하니  성경과 현실이 같기 때문에 '이는 제한적 구원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택한 자를 한해서 대속하셨지 택함을 받지 안한 그 모든 사람들까지  대속하신 것이 아니다.' 이라니까 또 교리와 신조가 달라서 갈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데 있었는가? 장로교입니다. 장로교에 저는 고신에 속해 있었습니다.

고신이 갈라지게 된 것은 행정 때문에 그 주동이 됐고 따라서 뒷받침으로  교리들도 따라 일어났습니다. 왜정 말년 신사참배가 나기 전에는 장로교는 한국에  하나뿐이었습니다. 하나뿐인 장로로가 왜 갈라져서 고신이니 합동이니 기장이니  예장이니 이렇게 모두가 갈라지게 됐는가? 안 갈라질라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많이 써서 고신은 고신 주장대로 예수 믿자 하고 자꾸 그렇게 믿자고 주장했고,  또 합동은 합동대로, 예장은 예장대로, 기장은 기장대로 이렇게 주장을 해서 많은  세월을 거쳐서 거기서 논쟁도 있었고 신강도 있었고 이라다 보니까 한 교인이  깨달음이 다르고 믿는 게 다르니까 갈라지니 '너거와 우리와는 같이 믿을 수  없으니까 너거가 나가거라 우리가 나가거라' 해 가지고 예배당 소송 문제들도  생겨나게 됐던 것입니다.

 그때에 갈라진 것은 첫째가 '신사참배는 죄다. 이거는 우상 숭배한 죄다.'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지 그것이 어떻게 죄냐?' 이래 가지고 많은 시비가 있다가  마지막에는 끝까지 그것은 국가 의식이라 하는 그 파는 그 파대로 나눠 갔고, 또  '죄는 죄지마는 그것을 그렇게 자꾸 되씹고 주장할 게 뭐이냐?' 하는 파는 그대로  갈라져 갔고, '이는 죄다. 다시는 죽어도 이 신사참배 같은 이런 우상 숭배의 죄는  안 범해야 된다.' 신사참배를 가장 강조하고 이 죄를 범하지 아니할라고 강하게  제일 굳게 서 가지고 있는 그 파가 고신파였습니다.

 이라다가 그 가운데서 저는 첫째 서로 이렇게 충돌된 것은 신사참배 그런 것  때문에 충돌된 것 아닙니다. 나도 신사참배 안 해야 되고 그거 죄인 줄 알았고  했기 때문에 충돌 안 됐습니다. 신사참배 때문에 갈라져 가지고 예배당 소송  문제가 생겨졌을 때에, '이 예배당 이것 때문에 서로 우리 믿는 사람이 시비하고  재판하고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6장에 형제끼리 불의한 불신자 앞에 가 가지고  이것을 계산하는 것은 이것은 성경에 위반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것을 나는 강하게 주장했고, 그것을 전국에서 제일 강하게 주장한 것이  저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마는, 그것 때문에 거게서 예배당 소송을 해야  된다는 제일 주장하는 송상석 목사님 황철도 목사님 그들과 나와 대립이 됐고  그때는 한상동 목사님, 오종덕 목사님, 이인재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이런  분들과는 나는 하나였습니다.

 이라다가 나중에 가서 고려신학교에 정치학을 가르치는 그 정치학, 또 파수꾼  잡지를 하나, 교계에 선포하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을 다 없애 버리고  이 국제 무대에 사업으로 이렇게 나가는 그 일에 대해서 대립이 됐었습니다.

I·C·C·C 에 가담되는 것을 대립했고 반대했고 I·C·C·C 에 그들의 학위,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참가하러 가는 것도 반대했습니다. 그  반대한 것이 한부선 목사님과 몇몇 사람들이었는데 갔다 오고 난 다음에 제가 그  학위받은 목사님에게 갔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돈도 남만 못하고, 지식도 남만 못하고, 권력도 남만 못하고, 인품들도 못난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나님과 진리 하나만 가지고 나선 것이 우리 아닙니까?  우리인데, 그걸 뒤로 두고 지금 기독교 정치주의인데,-I·C·C·C는  정치주의입니다. 그분이 제일 선포한 일호가 반공입니다. 그 둘째 호는  보수입니다.-그들은 기독교를 정치로 이용해 가지고 할라는 기독교 정치주의인데  거게 우리가 가담해 가지고 받을 수 있습니까?' 말할 때에 그분은 나에게  말했습니다. 요것도 다 하나님 앞에 다 갈 것 아닙니까? '형님, 내가 나도 그걸 안  받을라고 애를 썼는데 어찌 됐는지 그만 그래 그만 그 학위를 받게  됐습니다.-명예 학위입니다.-학위를 받게 됐습니아. 다시는 그 행사만 안하면 되지  않습니까?' 내 손을 붙잡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한상동 목사님이 나에게  나하고 단둘이 앉아 가지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행정적 모든 상치되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차차 차차 이래 가지고 그때부터도 내가 말한 것은 내가 깨달음을  다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말하면 정죄받을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 말해서  정죄받은 일이 있어서 그때는 좀 달리만 말하지, 행정 문제가 커서 행정 문제  때문에 마지막에는 나를 자꾸 이동하라고 하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계획이 달라  가지고 하라 하기 때문에 나는 이동을 못 한다.' '이동하라, 이동 못 한다.' 하고  거게서 그들이 강제로 이동 시킬라고 했지마는 '나는 온 교인이 다만 열 명만  그때 한 삼백여 명 됐는데-열 명만 반대해도, 반대표가 나와도 나는 이동하겠다.

그러나 한 사람도 반대표가 안 나오면 하나님의 뜻이 있으라 하는 것을 내가  사람 말 듣고 내가 사람에게 순종할 수 없다.' 그분들이 와 가지고 증인 서고  투표해 가지고 한 결과에 그때 일곱 표가 부표 나고 열 표 안 됐습니다. 일곱  표는 그것이 곧 우리 가족들이었습니다. 너무 괴롭고 하니까. 그래서 마지막에  끊겨 나오기를 '상회 불복종' 이라는 그런 죄목으로 나한테 통지가 와 가지고 제가  거기서 제명됐습니다.

 이것은 행정이 앞섰고 행정 때문에가 그 갈라진 동기였고 그래서 제가 강도사  인허 설교를 할 때에 그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진리와 성령만이 있지  다른 것은 모든 교회들을 당할 수 없는데 이제는 이것을 뒤로 두고 국제  무대에서 사업주의로 명예주의로 이렇게 나가니,' 그거 나가는 증거는 뭐인가?  교계에 파숫군이라는 진리를 그 들은 안 들을라 하는데 파숫군이라는 이 교리  신조를 기록해 가지고 그들에게 전하는 이런데 이것도 돈 없어서가 아니라 요게  싫어서 요것은 정간을 해 버리고, 중단을 시켜 버리고 딴것으로써 그때 국제에  I·C·C·C에 가담될라고 하는 그 때입니다.

 이래 가지고 제가 강도사 인허 시취 설교를 그래 했으니까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이는 강도사 인허를 줄 수가 없다' 시비를 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왜 그  설교야 맞은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안 된다.' 이렇게, 그때는 총노회  때입니다. 고신이 그렇게 갈라지고 뭐 그럴 때가 아닌데, '그러면 이거는 거수로  해 가지고 다수로 이렇게 결정을 하자' 해 가지고 거수로 결정을 해 가지고 그때  수가, 저를 지지한 수가 삼분지 이가 됐고 반대하는 수가 삼분지 일쯤 돼서 제가  비로소 강도사 인허를 그때에 받았습니다. 아마 역사에 강도사 인허를 그래  가지고 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됐겠습니까? 그 행정이 첫째 다르고  그 다음에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땅위에 있는 모든 이 국제의 이 기독교를,  기독교. 이것을 바라보지 말고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만으로써 우리의 전부를 삼아  가지고 나가자'하는 요 사상으로써 대립이 돼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때 한상동 목사님이, 오전 마지막 시간에 제가 강도사 인허  설교를 했는데 오후에 나오시더니마는 호통을 치면서, 나는 맨뒤에 앉았었습니다.

'백 조사 무슨 이유로 그런 설교를 하느냐?'고 세 번 고함을 지릅디다. 그래서  그때에 저는 거기 앉았다가 마지막에는, 두 번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뒤에  앉았다가 내가 발개를 찌트리고 내가 다리를 올려놓고서 내가 아주 그 하는  소리가 너무 마음에 안됐고 가증스러워서 이래 했었습니다. 그 세 번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인허는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상회 불복종으로 제명 처리를  받아 가지고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이래서 행정과 교리를 가지고 아무리 합  할라고 합해서 거기 있을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안하고 이래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내가 나온 게 아니라 쫓겨 나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이 총공회는 여러분들이 줄줄 그냥 따라오지 말고, 총공회는 그들과  합할 수 없는 행정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합할래도 합할 수 없는  행정이 있어서 총공회가 된 것인데 이 행정을 싫은 사람은 여게 있으면 안  됩니다. 가야 되지. 왜? 자기는 행정으로 움직이는 것이오. 행정은 행함이오.

행정으로 움직이는 것이오. 교리와 신조는 자기가 성경보고 깨닫는 것이 교리요  신조는 그대로 믿는 것이 신조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교리와 신조는 일반 장로교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합해질 수  없어. 우리가 안 합해질라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합하지 안하고 쫓아내기 때문에  있을 수 없어 쫓겨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자기가 이것은 천하에 제일  좋은 교리요 신조다 하는 그 교리와 신조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말하기를 '우리는 첫째 할 일이 뭐이냐?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올바른 성경을 가지도록 우리는 첫째 노력해야 된다. 올바른 성경  가지도록 노력해야 된다. 둘째로는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기울여서 가치를 여게 두고 찾아야 된다. 셋째로는 올바른  행정을 자기는 가지고 이 행정에 속하기를 위해서 전부를 다 기울여서 우리는  찾아야 된다. 하는 것을 얼마든지 많이 말했고, '우리는 교리와 신조를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야 된다.'  왜? 우리 생명과 우리의 몸은 교리 신조에게 바쳐서, 교리 신조가 우리를 죽이면  죽고, 살리면 살고, 가두면 가두고, 교리와 신조를 자기 생명보다 높이 평가하지  안하고 자기 생명을 높이 평가한 사람은 이 교리와 신조를 버리고 자기 생명  따라 갈 것이고, 생명보다 가치로 삼는 높은 교리와 신조를 가진 사람은 죽어도  이 교리와 신조는 뺏기지 않겠다. 하는 그 사람으로 우리가 못 해도 가치를  나타난 데로는, 나타나지 안한 대로는 차치를 하나님에게 두고, 둘째의 가치는  우리를 연결, 하나님과 연결시킨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다가 가치를 두고,  셋째로는 성령에 가치를 두고, 넷째로는 문서 계시에 가치를 두자 하는 그것이  우리의 교리요 신조입니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이, 아무리 유력한 천하의 학자들이  다 달라들어도 우리가 믿는 교리와 신조와 하나되면 스승으로 모시고 우리는  따라가고, 세계의 일대 학자라 할지라도 온 세계가 인정해도 우리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와 다르면 우리는 배격하고 따라가지 않는 요것이 총공회의 교리와  신조입니다.

 이래서 아무리 총공회에 소속해 믿어도 '우리는 세계 교계와 다른 교리와 신조를  가졌다. 장로교와 합해지지 않는 교리와 신조를 가졌다.' 다른 요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요 다른 요것을 긍정해서 다른 요것이 옳으니까 모든 교회서 배척을  당해도 '나는 요 깨달음과 요 믿는-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 말이요 신조라 말은  믿는다 말인데-'요렇게 깨닫고 믿는 요것을 나는 버릴 수 없다' 요것을 깨닫고  요렇게 '이 교리와 신조가 생명을 뺏겨도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다. 서로  흥정해서 서로 타협해서 너하고 흥정해 가지고 너 반 양보 나 양보 반 이래  가지고 타협을 하자, 타협할 수 없다.' 요게 생명이요, 요게 생명보다 귀하다는  요것을 아는 사람이 총공회의 교리와 신조를 믿는 사람이요, 이것 때문에  어데까지 어려움을 당해도 '이 교리와 신조가 제일이라, 이 교리와 신조로써 나는  가르쳐야 된다, 이 교리와 신조에서 내 생명도 바치고 이 교리와 신조로써 나는  전하기도 해야 된다.' 제일 이 교리와 신조가 좋다고 인정이 되면 제가 이  진영에서 일을 할 수 있을 짓이고, 이 진영에서 일을 할 때에 다른 사람이야 '저놈  미쳤다' 하더란대도 '나는 이게 제일이다' 이래야 제 속에 힘이 있고 제가 이렇게  주장을 하고 가르칠 수가 있지, '우리는 이 교리와 신조를 믿지마는 교리와 신조는  저게 나은데,' 하면서 이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두말 할 것  없이, 내가 욕하는 말이 아니라 그는 외식자입니다. 왜 제일 좋은 거 옳은 길을  전하지 왜 제이가 되는 길을 왜 전합니까, 전하기를? 제일 좋은 길을 전하지. 또  제일 좋은 길 전할라 하니까 거게 새로 터전 잡을라 하면 안 되니까 여게 붙은  데 붙어 있다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은 밥통 목사지, 밥통 신자지, 저는 믿는 것  같지마는 밥이 위주지 그게 근본 위주되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가 제일 옳고 바른 교리와 신조다. 이게 우리  구원을 바로 이끄는 길이다. 자기 생명도, 못 해도, 못 해도 나는 이 교리와  신조에는 소유와 몸과 생명도 다 바쳐서 이래 사는 요것이 옳은 줄 알고 긍정은  하고, 긍정은 하지마는 행하지 못할지라도 긍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여게 있을  가치가 없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걸 말하는 건 아닙니다.

 자기가 가치로 여기기를 이렇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제일 옳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고신에 있으면 고신 가야 되고, 총신에 있으면 총신 가야 되고,  기장에 있으면 기장 가야 되고, 불교에 있으면 불교 가야 되고, 유교에 있으면  유교 가야 되고, 회회교에 있으면 회회교 가야 되고, 몰몬교 있으면, 힌두교에  있으면 거게 가야 됩니다. 제일 옳고 좋은 바른 거게 가서 하는 게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지 어떻게 밥에 팔려서 외식, 그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바라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거게 가야 그것을 강하게 주장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자기 속에 힘도 나올 것이고, 양심에 '이게 옳다! 이리 따라라!' 해야 양심에 가책  없어, 자기의 이성 판단이 찬성을 해, 양심이 찬성을 해, 자기의 모든 소망이  찬성을 해, 이래야 힘이 나는 것이지 이게 없이 목회하니까 무슨 힘이 납니까?  내가 어제도 어떤 사람을 그래 만나 가지고 교회를 물으면서, 교회가 숫자가  작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여게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항상  외식쟁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왜 제일 좋은 것을 교인들에게 지도하지 제일 좋은  것을 버려 버리고 제이 제삼을 말합니까, 제일을 말할 수 있고 그럴 자유가  있는데?  이래서, 우리가 갈라진 거는, 하나될 수 없어서 갈라진 그거는 첫째가 교리  때문에, 깨달음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를 전국에서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이 그것이 얼마나 많이 있었지마는 이제 차차 차차 삭아져서 없어졌는지,  그들이 이해를 해서 없어졌는지 없어졌으나 이단이라고 하는 그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이번에, 그 일반 교회들이 우리를 이단이라고 한, 한 번  교리와 신조로 나왔던,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그런 것을 좀 간추려서 기록해라  하는 그것을 내가 말을 해서 빼 가지고 줬지는 빼 가지고 주지를 안 했습니다.

서영준 목사가 있을 때에는 '요것은 일반에서 정죄받았다, 정죄받았다, 정죄  받았다,' 하는 것을 다 기록을 했을 것인데 지금 다른 사람들도 기록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는 게 이 교리와 신조를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또 둘째로는, 우리가 행정이 달라서 갈라졌습니다. 이번에 OOO 목사님과 서로  나뉘어진 것도 그분도 나 좋아하고 나도 그분 좋아합니다. 내가 그분을 내가  믿음의 아들로 내가 여겼던 것이고 또 그렇게 대우도 해 줬고 그렇게 관심도  가졌었습니다. OOO목사님은 내가 그렇게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지마는 그분도  우리가 데려가다 교육시켜 가지고서 목사 장립시켰고 또 우리가 그 개척 교회를  지도하고 이렇게 한 사람입니다. 그분들이 갈라진 것은 교리 신조 때문에 갈라진  것 아닙니다. 행정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이번에 아마 여기 안 왔을 것입니다. 그  총공회서 '이분들은 우리 총공회서 탈퇴했기 때문에 우리 총공회서는 제명이  됐습니다' 하는 그 신문 공고를 그때 총공회서 의논해 가지고 그것이 아마 신문에  공고됐던 모양입니다. 이라니까 그분도 또 멍군 장군으로 '우리는 총공회에서  탈퇴했습니다' 하는 것을 신문에 공고를 했더라고, 그거는 뭐 욕이 아니라 그  탈퇴했으면 탈퇴한 것으로 그래 한 게 현명한 것입니다.

 왜? 탈퇴하고 나면 행동이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자기가 했으면 자기가 지고  나는 아무것이라, 아무것이 이 행동은 내가 책임진다 이래야 되지 행동은 제가 해  놓고 이름은 딴 이름을 가지면 행동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비양심이라 그거요.

 갈라진 게 뭣 때문에 갈라졌느냐? 내가 직접 전화해 가지고 '왜 그렇게 하느냐?'  '예, 내가 교훈은 좋습니다. 교훈은 내가 받아들이고 집회 때도 오지 말라 하면  모르지만 내가 가기는 갈 것입니다.'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교훈 좋다 말은  교리와 신조로서는 갈라지지 안한 것입니다.

 '그러면 뭣 때문에 그라느냐? 노원 소원이 있으니까, 노원 소원을 내 가지고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얼마든지 주장을 하고 나이 많은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  주장을 하고, 자꾸 이 원로파라고 이라니까 그래 가지고 소원 젊은 사람들을 서른  명 나이 많은 사람들은 열다섯 명, 마흔다섯 명으로 노원 소원을 내서 이래서  얼마든지 우리가 바른 길을 갈 수 있지 않느냐? 얼마든지 옳고 그른 것을  시비하고 논쟁할 수가 있지 않느냐?' 여러분들이 이거 말하는 것을 지금 교훈  아닌 줄 알아도 모든 사람들이 여게서 죽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것이오. 평생  가도 못 들을 수 있는 이 지금 교훈인 줄이나 알고 들어야 됩니다.

 그라니까 '나는 노원 소원이 있을 때에 소망을 가졌는데 거게 보니까 노원  소원은 심의 기관이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찾을 심(審)자 하나님의 뜻 의(意)자,  의논 의(議)자가 아니고. -심의 기관이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관이요 의결은,  그 뜻에 대해서 의논해서 결정하는 것은 진리라 이렇게 말해 놨으니 성령 받은  사람들이 목사까지 돼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단합해 가지고 의논이 통일되면  그것이 진리요, 그것이 바른 것이요, 그것이 영감이요, 하나님의 뜻이지, 이러니까  노원 소원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심의 기관이요 의결 기준은 아니라, 의결은  진리가, 진리만이 의결할 권리를 가졌다. 의결은 진리가 한다. 이래 놨으니까 내나  그전과 같은 것 아닙니까? 내나 목사님 말하는 대로 하자는 그 말 아닙니까?  성경은 목사님이 주장하는 성경 우리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내나 목사님  주장대로 하자는 그 말 아닙니까?'  그래 내가 많은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개인보다는 많은 숫자가, 다수가 좋기는  좋지마는 다수라고 따라갈 수가 있느냐? 진리가 있지 않느냐? 이러니까 그래서  대표로 심의 기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가서 그 뜻에  맞으면 영생이요 그 뜻과 틀리면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소망하고 지금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너도 나도 이라면은 아는 사람은  알지마는 선진들의, 선배들의 혜택을 후배들이 입기가 어려우니까 제일 믿음 좋고  장성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마흔 다섯 명을 뽑아 가지고 이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관이라, 하나님의 뜻이 뭐이냐?'  '어떤 사건이 하나 생기면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거겠느냐  저거겠느냐?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이며 성경에 맞기를 어느 게 맞으냐?  하나님의 뜻에 어느 것이 맞느냐? 그것을 찾는 기관으로서 마흔 다섯 사람을  대표로 냈고, 그것이 의결 기관은 아니라, 마흔 다섯 사람이 다 똘똘 뭉쳐서  어떻다 할지라도 성경에 위반될 때는 그거는 우리는 인정할 수가 없다. 인정만은  하나님의 성경이 보증해서, 이거 성경에 보증해서 성경이 이렇다 하는 성경  보증이 나타났을 때에는 우리는 그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는 이것을 말한 것을  반대해 가지고 그는 갈라져 나갔습니다.

 여러분들, 천주교와 예수교가 왜 갈라진 줄 압니까? 천주교와 예수교가 왜  갈라졌습니까? 갈라진 그 이유가 천주교는 그들은 처음에 갈라진 게, 시발해서  조그매 틈난 것은 '구원은 천주교에만 있다. 베드로를 모신 데에만 있다.

베드로에게 열쇠 줬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구원이 있다고 그들이 말하고  베드로에게 구원이 있으니까 베드로는 우리 천주교 계통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  베드로가 받은 열쇠는 우리 천주교에 상속됐다. 천주교에만 구원이 있다.' 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몰아쳤습니다. 숫자가 많으니까 그리 막 따라갔습니다.

 또 그라다가 이제는 '교황은, 교황이 깨달은 것이라면 곧 성경과 같다.' 성경은  우리가 정확 무오를 믿는데 '교황이 깨달은 그 교리, 교황의 교리와 신조는 그는  정확 무오하다.' 교확 교리 정확 무오를 말하는 것이 천주교의 제일 뼈다구요  줄기입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은 성경에 말씀하기를 이거 더하지도 못하고  덜하지도 못한다고 요한계시 22장에 말씀해 놨기 때문에, '교황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정확 무오한 교리로 우리가 믿을 수는 없다. 틀린 것도 있고 옳은 것도  있다. 옳은 것은 따라가지만 틀린 건 받아들일 수 없다.' 하는 것으로서 얼마나  사람들이 죽었느냐 하면은 여러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거 주장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교황의 깨달은 교리 신조도 성경과 틀리면 틀렸다.

성경으로 판정해야 되지 교황의 교리 신조를 정확 무오하다는 권위를 세워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 많고 그것은 교황 교리라면, '교황이 깨달은  것이라면 정확 무오하다' 하는 것이 이것이 천주교가 전부가 그리 흘러 나와  가지고 된 것입니다.

 오늘 그러면 우리가 의결 기관은 아니고 심의 기관이라 하는 데 반대해서 '우리  목사들이 단합해 가지고 의논했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지' 하는 그것이  천주교와 다릅니까 같습니까? OOO조사님 말해 보이소. 천주교와 같소? 꼭  같소? O목사님 어떻습니까? OOO목사는? 어떻소? 그들이 지금 '목사들이  의논해 가지고 다수 결의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우리는 옳은 것  찾으니까. 정확 무오한 거 옳은 걸 찾으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진리라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거와 교황의 교리 정확 무오로 믿는 거와 다릅니까?  '목사들이 단합해 가지고 이렇게 결의하면 성경에야 삐뚤어졌든지 말았든지  성경은 내비두고 그 결의면은 다 바르고 옳다.' 하는 거와 '아무리 그 결의라도  모든 사람의 말하는 것보다 권위를 세우지마는 성경에 틀릴 때는 안 된다.

성경대로 성경에 맞아야 그 의논의 결의를 채택할 수 있다.' 하는 거와 대립이  됐는데, 그러면 여러분들은 '안수받은 목사들이 의논한 것이라면 그는 성경을 보지  말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대로 결정해 나가자.' 하는 거 하나 있고,  '그 결정 가지고 결정을 못 한다. 성경대로 됐을 때에 계정을 하자.' 하는 거 요  둘이 됐는데, 그러면 천주교와 그 단체의 결의로 그대로 결정해 나가자 하는 것과  성경으로 결정해 나가자 하는 이 둘이 있으면 어느 것이 천주교와 하나입니까?  이게 천주교와 하나입니까? 이게 천주교와 하나인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이것이  '그 목사들 뭐, 성령 받아 가지고, 지금 목사 안수 받아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노회원 모든 총회원들이 결의한 것이면 이것은 성경 볼 것 없이 그 결의한 것은  정확하기 때문에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따른다.' 하는 이거와 천주교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게 총공회라! 알고 믿어야 돼요.

 그러면 모든 목사들이 다 의논하면 그것이 맞다고 하는 그 주장도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에 좀 은혜받은 사람들이 힘써 찾아 가지고 못 찾는  사람들을 지도하자.' 하고 '찾아서 결성하는 것은 성경대로 결정하자.' 하는 그것이  사람의 말 아니오. 백 목사 말 아니오. 노원 소원을 구성하고 '그것은 심의  기관이요 의결 기관은 아니라' 하는 그것이 사람 말이 아니오.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래서, OOO목사님은 우리에게 논문을 두 장을 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는  민주주의냐 독재주의냐?' 그래 하나 제목으로 냈고, 하나는 '성경은 민주주의냐  독재주의냐?' 그래 두 제목으로 논문을 냈었습니다. 이랬는데 그 논문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씩 평해 나가기로 했는데 그때에 모든 교역자들이 '이거 고쳤으먼  좋겠다' 하는 주장을 그때 몇 문제가 됐습니까? 그 문제 총수가 몇 문제가  됩니까? 사십 몇 문제 아닙니까? 사십 몇 문제인데, '성경은 민주주의냐  독재주의냐?, 기독교는 민주주의냐 독재주의냐?' 하는 이 두 논문에 대해서는  순서가 아직까지 닥치지 안했기 때문에 그것을 한번 우리가 의논해서 어느 게  맞은가 하는 그것을 한번 심의회에서 의논해 가지고 판정하자 하는 그 판정을  하기 전에 나가 버렸습니다.

 우리 총공회 행정은 처음부터 '우리는 종다수 가결이 아니다' 하는 것을 벌써  처음에 고신에서 나올 때부터 그것 때문에 갈라져 나온 원인이 또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다수가 말해도 진리가 아니면 따를 수가 없다. 아무리 소수가  말해도 우리는 진리면 따른다.' 다수 가결을 반대한 것이 우리요 성경 가결을  주장하는 것이 이 총공회가 나온, 처음에 거게서 나은 움싹의 이 행정입니다.

 이러니까 이래 나왔기 때문에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독재주의다.

기독이라 말은 그리스도는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독재주의자다. 성경은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고 독재주의를 가르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달라서 갈라졌습니다.

민주주의라 말은 종다수주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다수를 따라가자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독재주의라 말은 영원 자존하신 한 분 그분에게 따라가자는 것이  그것이 독재주의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모든 것은 결정을 하자'하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해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이 다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그분이 그렇게 존귀하게 된 성공한 것이 원인이 어데  있습니까? 그분이 독재를 당했습니까 독재를 했습니까? 예수님이 독재를  했습니까 독재를 당했습니까? 독재를 당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재 당했습니다.

말 한 마디도, 생각 하나도, 움직인 거 하나도 당신이 단독이 자기 주장으로 한 일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 독재를 당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므로' 하는 말은  아버지에게 완전 독재를 당했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높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대해서 독재를 하십니까. 민주주의를 하십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독재하십니까, 민주주의 하십니까? 독재하십니다.

아버지에게 독재당한 것처럼 우리에게 독재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에게  독재당한 것같이 너희들이 나에게 독재를 당해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말씀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서 그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정하는 것같이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 명령에  복종하는,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독재입니다. 그리스도는 독재요. 성경은 독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독재를 말하요. 또 우리 독재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았으면 죽어도 그대로입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서로 흥정해서  얼마큼 이렇게 양보해 가지고 타협하자 하는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행정이 다른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총공회의 교리와 신조가 행정이 다른 이것을 아는 자는 여게  있을 수 있고 이것을 알지 못하고 '뭐 별소리 다 하네.'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여기 있고 죽어도 이 가운데 죽지 딴데 가지 않을  것이고, 이걸 모르고 공연히 썩은 새끼에 매인 것 모양으로 '밥통에 매였다,  이제까지 해 놓은 일이 그렇기 때문에 어짤 수 없다.' 말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은  여게서 일해도 앞으로 이 도의 효력은 보지 못합니다. 권능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도 인생이 변해서 하나님도 변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완전히 변해서 사망되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 관계의  정상을 만들어 놨다. 흠과 점이 없이 만들어 놨다. 만들음을 받은 우리들이,  중생된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씩 둘씩 변해가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 계약의 결과가 변해지고 있으니 우리가 이 자리서 하나씩 고치자. 고쳐  나가자. 변한 걸 고치면 하나님도 나에게 변해진 것이 고쳐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변했으니까 내게 대해서 하나님의 대응은 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칭찬하던 분이 책망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변치 않기 때문에  칭찬이 책망으로 변해졌지, 우리가 변해지니까 변해진 우리에게 변치 않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상대하시니까 변해지는 것이지 그분이 변해져 그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안 변한 것이오. 칭찬하던 자가 책망받을 일을 하면은 책망하는 그것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요,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행위십니다.

 이래서, 여게서도 배울 때에 하나 하나가 이는 일반적 교리와 신조와 다르다.

이는 일반적 교리와 신조와 다르다는 요것을 깨달아서 다르면 이 다른 게 좋고  새것이 자꾸 좋은 게 아니라 새것보다 옛것이 좋은데 옛것이 틀렸을 때는 안 돼.

새것보다 옛것이 좋아. 자기는 이미 알고 있는 그 교리가 지금 새로 발견한  교리보다도 그게 옳으면 좋아요. 더 좋아요. 틀렸을 때는 할 수 없어 내가 가진  것이 좋지마는 가진 것이 틀릴 때는 우리는 집어 던져야 되지 가지고 있으면  죽어. 이러기 때문에 여게서도,  그래 내가 말하기를 이제까지 모두 다 기성되어 있는 모든 주석들이 있으니까  그 주석과 다를 때는 이것은 지금 다르면은 이거 새것이라고 요새 유행 모양으로  취할 게 아니라 '다르니 이거 큰일났다. 내가 이제까지 알기는 이렇게 알았는데  그렇게 아는 게 틀렸고 이렇게 알아야 된다고 하니까 이거 문제다.' 그럴 때에는  그것을 그냥 저버리지 말고 또 그냥 따라서 고치지 말고 이제까지 내가 깨닫고  믿고 하던 거와 다를 때에는 우리는 거게서 심각하게 해 가지고 '어느 게  틀렸느냐 옳으냐?' 죽고 사는 것이 거게 매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고 사는 거게  매인 가치의 중요한 것을 깨닫고 이것이 옳으냐 삐뚤으냐 하는 것을 살펴서 이래  가지고 정 새것이 옳으면 아깝고 원통하지만 새것을 따라가야 되겠고 옛것을  버려야 되겠고, 새것보다 옛것이 옳으면은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더 확신을  가지고 든든히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러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지마는 목사된 분들은, 그래도 성경을 많이 읽은  분들은 '이러면 이제까지 이래 믿었는데 이러니까 이거 다 이거 틀렸느냐 옳으냐?'  하는 것을 심각하게 다뤄서, 생명보다 귀중히 다뤄 가지고 이것을 판정해서 바른  길을 찾아서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아무나따나 받아들일 것이 아니고. 시간  어찌 됐어? 그라면 그만 시간 많이 갔네.

 제가 엊저녁에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는 것을 해석을 했었습니다.

요것도 믿는가 안 믿는가? 맞는가 안 맞는가? 공연히 까다롭게, 공연히 자꾸  쪼개서 나누기만 나누는 말이라면 정죄받아야 됩니다. 안 쪼개야 될 것 쪼겠으면  정죄받습니다. 심판받습니다. 쪼갤 것을 안 쪼겠으면 그것도 심판받습니다. 주  만군 여호와 거게 대해서 지난밤에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이 달라져  가는 것을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달라져 가는 것은 필연한 일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사람이 차차 사람이 변화돼서 사람이 점점 옳은 면으로 변해져  가면은 그 사람의 깨달음이 점점 옳은 면으로 자꾸 전진돼 나갈 것이고, 그  사람이 잘못 삐둘어지면 그 사람의 깨달음이 점점 잘못 깨달음으로 점점 퇴보돼  나갈 것이고, 이러니까 나는 언제든지 깨달아서 이는 역사에 변동 없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설교록이라는 이름을 했어. 우리는 오늘 깨달았는데 잘못  깨달았으면 고칠 수 있습니다. 고칠 때는 '이거는 틀렸다. 내가 잘못 깨달았다.

이거는 고친다.' 선포하고 그 책임을 져야 됩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게 말을  했었는데 이거는 잘못 깨달았다. 이거는 고친다.' 또 지금 이렇게 깨달았으면 '이게  바르다' 이렇게 우리는 성장돼 가는 과정에 있고, 또 점점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고, 행동도 행동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어제보다 오늘  새로와져야 되고 오늘보다 내일 새로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와지는 건 죄가 아닙니다. 새로와지는 건 죄가 아니오.

새로와지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는 이렇게 말한  걸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그거 지금 어느 게 옳으냐? 그거 찾아 가지고 이게  옳으면 '이게 옳은데 과거에 내가 잘못 깨달았다.' 잘못 깨달음이 없다는 그  사람도 역연 제가 완전이라는 그런 주장입니다. 안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고칠 수 있습니다. 고쳐서 옳고 바르게  점점 옳고 바른 걸로 고쳐서 우리가 깨달음도 고칠 수 있고, 믿음도 고칠 수 있고,  행동도 고칠 수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이랬는데 지금 '과거에 이렇더니마는 지금은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는 데 거게 억눌릴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그래 깨달았는데 오늘  깨달은 것이 그때 깨달음보다 좋으냐 나쁘냐?' 좋으면 감사할 것이고 나는 그때  그만큼 어렸고 어두웠고 많이 삐뚤어졌는데 점점 옳은 데로 가까이 와 가지고 좀  더 옳아졌고, 더 발라졌고, 더 깨끗해졌고, 더 밝아졌고, 그러면 좋지 않습니까?  이래서, 오늘 아침에는 우리 총공회라는 이것이 뭣 때문에 이렇게 됐느냐?  깨달음을 양보하면 문제없습니다. 깨달음을 양보하고 행정을 양보하면  문제없습니다. 여게도 '이것은 그만 다수 가결로 모든 사람 의논한 대로 그래  하자.' 요것만 고집하지 안하고, 고집이라 말은 굳게 잡았다 말이오. 요걸 고집하지  안하고 풀어 놓고 다 이렇게 '다수 가결로 하자' 하면은 우리 총공회도 많이  커졌을 것이요, 나가는 사람들이 가지 안했을 것입니다. 행정 문제로 가게 됩니다.

지금도 가게 될건지 모릅니다. 안 가는 걸 바라지마는. 부탁하는 것은 자기가  제일 '올바른 깨달음이라, 올바른 주장이라, 올바른 행정이라.' 제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못할지라도 그걸 따라가는 것이 양심의 사람이요,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지 안하는 사람입니다. 옳은 줄 알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이요, 옳은 것은 딴데 있는데 그런 줄 알고 거기 붙어 있는 것도  외식자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한번 있어야 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했습니다. 오전에 이제 이사야 3장에 있는 이 말씀을 계속할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잘 읽고 거게서, 잘 읽고, 그저 백 목사가 말하는 데에 잘못된 것을 말해 주면  내가 내 선지자로, 선생님으로, 목자로 모실 것이고, 또 옳은, 비판해 가지고  옳으면, 옳다 긍정하는 그런 외식자가 되지 말고 옳으면 '여게는 내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내가 기울일 곳이 이곳이다' 하는 것을 확정짓고 단행하는 사람으로 요  진실성을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해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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