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싸움,신조싸움,행정싸움

 

1989. 5. 27. 토새.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13절. 우리의 씨름은 현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남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음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전 번역은 '우리의 싸움은' 이랬는데 다시 개역에, 개역 번역에 우리의  씨름이라고 말했는데 요 싸움이라고 말하면 좀 서로 대립되는 면이 강해지는 그  힘이 있고 또 '씨름' 하면은 상대방을 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해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그대로 둬 두고 이 자기편이 실력을 길러  가지고 그보다 앞서는 그런 의미를 말하기 때문에 싸움보다도 씨름이 거기에  있는 뜻이 잘 나타나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모든 신앙생활에 시비하는 것은 상대방을 원수로  삼아 가지고 상대방을 멸하는 그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고 상대방이야 어떻게  하든지 나는 상대방에게 지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이기는 데만 전력을 기울이는  이것이 우리의 이 싸움, 우리의 전투의 본질과 본성입니다.

 이래서 왜정 말년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해방 직후에 제가 마산에 집회를  청해서 갔었는데 가니까 거기에 모두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있으면서, 대개는 신사참배 안 하고 이긴 분들이 다 부인들인데, 나이  많은 노인들 할머니들인데, 그때 남자는 이긴 사람들 많지 못해요. 부인들인데  그분들이 말하기를, '그래 그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어떻게 했느냐?' 나중에  인사하러 왔기 때문에 내가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그때 아주 이를 갈아붙이고 '네 이놈들, 너거가 우리를 지져 먹든지  볶아 먹든지 마음대로 해라.' 이라고 '저놈들이 어찌 됐던간에 박살이 나야 될  터인데' 하는 그런 뜻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서 박하게는 말을  못하고, 참 우리가 신앙 전투는 세상 전투와 다른데 그게 결국은 악이 거석했기  때문에 죽일 놈을 살렸고 죽일 놈을 길러서 저렇게 더 그게 강하게 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도도 해도 기도하면서 잘못하면 자기중심의 악, 죽여야 될  옛사람 그놈을 자꾸 기르고 그놈이 더 강장해지는 그런 일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우리 서부교회서는 기도에 대해서 힘을 많이 쓰는데 산기도를  가는데 그전에는 혼자 가도 성조가 울고,  성조 이거는 성경대로는 아니오. 이거 다른 사람이 웃을 것입니다. 내가 신앙  경험에 조금 믿음이 좋아지고 은혜가 되고 바로 돼지면 그 새가 와서 울고 바로  되지 안하면 그만 안 울고 가 버리고 그래서 내가 그 이름을 내가 성조라고  지었지 그거 누가 들으면 웃을 것이고 그거 또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신앙 경험에 체험인지 주관인지 그저 그러한 것뿐이지.

 그랬는데 요새는 양산동에 기도실 관리하고 있는 분에게 물으니까 '요새는  성조가 별로 울지 않습니다. 많이 울지 않습니다.' 이래서, 내 속에는 생각이  있어서 '그러면 아무 구역이 와도 울지 않더냐?' 이라니까? '어느 구역이 왔을  때에는 많이 웁디다.' 그 사람이 그때사 착안해 가지고 또 인제 '어느 구역이 올  때는 많이 웁디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래 내가 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 그 구역 장에게  물어서 '자기네들이 여기에 양산동 기도 왔을 때에 성조가 울더냐?' '예, 떠날  때까지 계속 웁디다.' '또 그러면 저 꽃마을, 대신동 공원에 꽃마을에 가  가지고, 그 산에 가 가지고 기도할 때는 어떻더냐?' '그 산에 갈 때도 계속  웁디다.' 그래 또 내가 묻기를 '그라면 낮에도 울더냐? 밤에도 울더냐?' '낮에는  가도 안 울고 밤에 웁디다.' 그렇게 말해. 그전에는 이 낮에도 울고 가면  언제든지 울었었는데,  그래서, '이거 우리가 열심히 이렇게 기도를 해도 기도한 결과가 뭣이 뚜렷이  나타나지 안하는 것은', 그 표시판이 없다 그거요. 우리가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또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기쁘게 행복 되도록 이렇게 해 주시는데  아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무슨 상응하는 그런 무슨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거요. 그래 무엇인가 잘못된 게 없는가 싶어서 그래 제가 찾다가 그런 것을 한  두 아침인가 계속해서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러 가 가지고 그만 다른 걸 다 못할라면 간단하게 해서 나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나님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과거에 지나간 모든  광거에서는 어떻게 했느냐?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그런 과거로  통과했느냐 현실 만났을 때에는 하나님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렇게  통과했느냐?  다음에는 또 나보다 진리를 더 사랑했느냐 진리보다 나를 더 사랑했느냐? 어느  것을 잡고 어느 것을 네가 내줬느냐?  또 그 다음에 셋째로 말하면 사람인데 사람을,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겼느냐 현실에서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더 위하고 다른 사람을 덜 위해서  모든 사람은 나를 위해서 있게 해 달라고 있어지도록 소원을 하고 있고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있는 자기라는, 주체권이 어데 있는지.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고 하지 안했느냐? 그러면 결국은 이것은 악을 기르기도 쉽다, 자기중심  자기 위주를 기르기 쉽다 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씨름은' '우리의 씨름은' 하는 여기에서도 아주 그 재미있는  뜻이 있는 것은 이 씨름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뭐 그때 일시 밉기는 하지마는  상대방을 죽여 없애 버릴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라다가 상대방이 무슨 다리가  뿔라지든지 뭐 이랬으면 좋겠다 그런 게 아니고 상대방을 상우면 상우는 책임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상우지 아니하고 다만 실력 대결로만해서 내  실력을 길러서 실력이 그보다 위에 가기를 원하는 이것이 씨름의 성질이요  싸움의 성질과 다르다 그 말이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 신앙 투쟁을 할 때에 잘못하면 상대방이 멸해짐으로써  내가 존재하고 상대방이 자꾸 망해지고 약해짐으로써 내가 그 으뜸가기를 원하는  이런 그 성질의 것을 가지게 되면은 안 되니까 상대방도 얼마든지 올라가고  강해지고, 우리 상대방이라면 마 귀요 죄인데 죄도 얼마든지 강해지고 올라가고  나는 그 올라가는, 강 해지고 장성해가는, 마귀와 죄와 그 세력이 커지는데 나는  그보다 더 세력이 커 가지고 그런 것을 이길 수 있는, 다만 실력 대결로서  실력을 기르는 이것이 우리의 그 목적이라 하는 요것을 단단히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신사참배 시킨다고 일본 나라 이놈의 나라가 바싹 깨졌으면 그랬더니마는  그만 팔월 십오일날 그만 깨졌다고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 들으시고  깨진 것은 아닐 것이라 말이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자기와 대립될 때에 대립의 그 세력이 없어지고  망해지기를 원하는 그것은 우리가 할 일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댈  일이 아니고 다만 나는 내 자신이나 내 편의 실력이 그보다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우리 밑에 가고 우리는 위에 가도록 요렇게 하는 요것이 우리의 전투의  성질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이거는 혈육 문제가 아니라  그말입니다. 혈육 문제도 아니요 또 혈육의 힘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라. 그러면  혈육 문제라 말은 옛사람 문제라 말인데 옛사람 문제가 아니요, 옛사람 문제가  아니라 그말은 그 죄악의 사람도 그렇지마는 첫째 아담의 자손의 그 성패를  위해서가 아니고 둘째 아담의 자손의 이 성패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렇게 깊은  속에서는 뜻을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이것을 말하면,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진동될 없어질 이 우주를 소망 하고,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것을 소망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이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것보다 높은 고차원의 그런 영원 무궁세계의 것을 두고서, 그것을 가치로  삼고 두고서 우리는 경쟁한다. 다시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 무궁세계, 영계와  물질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 나라의 것을 가치로 삼아 가지고 그렇게  우리가 소망하고 산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한 행실도 경건도 땅위에서는 박해만 당하는 것뿐이지 아무  유익이 없는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우리의 생각은 항상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그러니까 우리가 소망을 두고 가치로 삼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온  우주가 다 불타 버리고 또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나타나는 그때의 것을 가치로  삼아 가지고 그것을 소망 하고,  그러니까 우리 마음과 생각은 항상 이 세상 너머, 주님의 재림, 내가 살고 있는  이 산 너머, 죽어 부활 무궁세계의 것을 가치로 소망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야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는 그 두 가지 의를 마련할 수  있다.

 두 가지 의는 하나는 하나님의 의요 하나는 자기 의니까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입고서 그 입은 의의 그 주는 그 힘을 힘입어 가지고 자기 의를 만드는 것을  가리켜서 '의의 거하는 바'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러면 혈육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고  또 혈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계의 것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요  물질계의 그거 힘을 가지고 싸울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계를 초월한 것, 신령한 것,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다 한 순전히  이것은 신적 요소 그 자체를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고, 신적 요소 그 자체를  내가 소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요, 또 신적 요소의 무한하신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완전한 능력인 그 힘을, 그 힘으로써 영원히 멸하지 안하고  완전하고 변치 않는 힘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라 하는 말입니다.

 이래서, '아니요' 그러면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라 영들에 대한 것이라 그러면 위에 우리가  가치를 뭘로 삼아 가지고 싸우나 하는 것을 말해 놓고 난 다음에는 이 가치를  내가 취해서 달성하려고 하기 위해서 전투하니까 전투하는 데에 나에게 방해되는  것들은 다 정사,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공중의 악한 영들이 대적이  된다, 그것들이 방해가 된다. 그게 아닌 것은 방해가 안 되는데 그러면 그게  방해가 된다.

 그래서 그러면 정사가 아닌, 그런 것을 우리가 무슨 취하기 위해서, 정사로  더불어 대적한다 그말은 내가 신앙생활 할 때에 이런 것들이 대립이 되고 방해가  되니까 결국은 그거하고 싸우는 것이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은 다만 나를,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이것만을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입니다. 또 능력도 이것 만을 능력으로 우리가  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와'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하는 것은 주 안의  힘은 뭐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힘인데 이 힘은 우리에  인식적으로써 제일 가치 있기 때문에 힘이 되어지는 것이고, 또 이것은 우리를  권고하는 힘이 강한 것이고, 그 속에 내재해 가지고 있는 실지의 그 실력이  무한히 강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완전자가 들어있고, 전지 전능자가 들어 있고, 주권자, 대주재자,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 들어 가지고 계시는데 그분이 내 안에 들어 가지고  계셔서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삼위일체가 합동해 가지고 이룬 사활의  대속이 완전 대속이기 때문에 사활의 대속 이거는 완전, 대속이라, 완전이라,  모든 것이 완성이라, 조금도 부족함 없이 완성해 놓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선물이 그게 지극히 크고 강하고 완전하고 또 그 대속 속에 역사하고 있는 그  역사 자체가 강해서 그 힘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해서 승리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대구 집회에서도,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피동돼  가지고 첫찢 아담에 속한 것이 그것이 그 능력에 피동돼서 영원히 살아 있는  그것뿐만 아니라 실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신적 요소가 와  가지고 우리가 됐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됐다 말인가? 녜, 우리가 하나님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됐습니다. 그것은 오해하기 쉽지마는 실제로 삼위일 체의 하나님과 진리  자체가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성부가 확실히 내 주하고, 성령이 확실히  내주하고, 또 성자가 확실히 내주하는데 성자는 신인양성일위로 우리 안에  확실히 내주해 가지고 삼위일체 중에 제 이위인 성자는 신인양성으로 그 신성은  하나님과 하나되고 그 인성이 있어서 우리 인성과 연결되어 우리의 중보자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와 가지고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씨로 났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피조물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피조물이란 말인가? 하나님이 이렇게 신적 요소가  첫째 아담 속에 와 가지고 역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고  말했는데 다만 그것은 분식이 아니고 연합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역사하는 그 하나님이나, 또 영계에서 지금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이나,  다른 형제 속에서 역사하는 그 하나님이나 한 하나님이요. 그 속에도 온전한  완전하신 하나님이 내주해 계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주해 계시고 내 안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주해 계셔서 다만 그분이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똑똑히  구별하려고 하면은 그분은 주격이요 우리는 그분의 집이라, 성전이라, 또 그분은  머리요 우리는 그분의 지체라, 이래 가지고 그분의 완전하 심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이번에 많이 말씀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치로 삼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만을 가치로 삼는데 이  사활 대속을 우리가 영은 완전히 입고 있지마는 우리의 심신은 말로만 입고  지식으로만 입지마는 실상으로는 입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 실상으로 입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원하노니' 하는 건 하늘에서  오는 처소는 뭐인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우리가 영원히 그 속에서 머물고  살 것인데 그러면 이 대속을 입지 못하고 벗고 살기 쉬워서 '벗고자 함이 아니고  덧입고자 함이라 그러면 지금 육체의 이 첫째 아담에 속한 이것을 없애기를  원함이 아니라 덧입기를, 하늘에 오는 것을 덧입기를 원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그라면은 죽도록 지금 힘을 쓰는 것은 우리가 벗으려 함이 아니고  덧입고자 함이니 곧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죽을 것은  뭐입니까? 첫째 아담의 자손은 다 죽을 것들인데, 멸해질 것들이라, 완전성이  아닌 것들인데 이런 것이 완전에게 삼켜져서 완전의 것이 돼서 이제는 영원히  완전 속에 들었고 완전으로 말미암아 살려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이 가치로 삼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가치로 삼는데  사활의 대속이, 요걸 말하기 위해서, 사활의 대속은 어데 있 는가? 사활의  대속은 우리에게 줄라고 신구약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담겨 있는데 그 신구약 성경에 담겨 있다는 말은 신구약 성경을  그라면 우리가 다 본다고 해도 각각 깨달음이 다른데 신구약 성경을 바로 깨닫는  그 깨달음 속에 우리가 가치로 삼고 있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담겨 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세상 정치와 권에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의 악한  영으로 더불어 대립이 돼지는가? 대립이 되어지는 것은 우리가 에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담겨 있는 신구약 성경을 보고 성경에 깨달은 그 깨달음이 뭐인가?  교리라. 또 우리가 믿는 것이 그걸 가리켜서 신조라. 우리가 깨달은 교리 신조  또 우리가 그대로 살라고 하는 모든 행정, 그러면 우리가 깨달아 가진 교리 신조  행정 이대로 우리가 살라고 하니까 정치가 대립이 됐다가 또 이 세상 권세가  대립이 됐다가 그 모든 그런 것들이 대립이 된다.

 그러면 뭐 교리 신조 행정 때문에 대립될 게 뭐 있는가? 이 속에 우리가 입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이 있다. 우리가 입는 것은 그라면 지금  언제까지나 입어야 되는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우리 영은 단번에  입었지마는 우리 심신이 이거 사활의 대속을 입는 것은 죽는 날까지 입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많이 입고 어떤 사람은 적게 입고 했으니까 입은  이것이 곧 우리 구원의 영광의 차이가 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뜻대로만' 자꾸 이렇게만 말하고  '진리대로만 말씀대로만' 이렇게 말했는데 이제 좀 이걸 그래 말하니까 안됐어서  그래 교리와 신조라 이렇게 자꾸 지금 내가 발표해서 '나는 뭐이냐? 교리  싸움이라, 나는 신조 싸움이라, 나는 행정 싸움이라, 그러면 행정 싸움 교리  싸움 신조 싸움이 내 싸움이라. 내 신앙생활은 뭐인가? 내 신앙생활은 교리  생활이요, 신조 생활이요, 우리가 성경대로의 행정 생활이라 이라는데 이것이 뭐  인가?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입는 것이요, 입고 사는 것이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 아니하려고 하는 것이 교리 신조와 이 행정을 내놓지 안할라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게 무슨 교리 신조를 만일 그거는 무슨 신학자들이나 알  것이고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또  인식들이 많이 박혀서 자꾸 교리 신조를 자꾸 말하는 것입니다.

 교리라 말은 우리가 믿는 이치니까 신구약 성경을 보고 우리 깨달음을 가리켜서  교리라고 말하고, 또 신조라는 것은 우리가 깨닫고 어떻게 내가 믿느냐? 우리  믿는 거는 요래 믿어야 된다 조래 믿어야 된다는 믿는 모든 것들을 가리켜서  신조라고 그렇게 말하고, 또 행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요래 믿으면 우리 행동은  어떻게 해야 되나? 행동은 요렇게 해야 된다. 우리 행동을 가리켜서 행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라는 데에는, 대적하는 데에는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입는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주권자이시고 주권 개별 섭리자이신 이 전지 진능하신 이  완전의 능력이요 가치적으로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능력인데 그러면 능력을  힘입는 것이니까 그 능력은, 그 능력은 뭐인가? 그 능력을 만들어 가지고 완성을  완제품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만들어 가지고 완제품을 우리에게 줬으니 곧  그것이 뭐인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다.

 그러면 또 완제품은 가지지마는 현재 계속 완제품을 한 그 능력이 역사하는 그  능력은 어데 있는가? 그 능력이 와야 내가 이 능력 있게 살겠는데 그 능력이  어데 있는가? 그 능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안에 들었다!  대속 안에 들었다.

 이러기 때문에 전신갑주라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부를 완전히  호수(護守)하고, 우리의 것을 완전히 보호하고 지켜서 아무런 해할 것이 없이  영원한 평강과 영생을 가질 수 있는 그 보호 그 은혜의 이름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우리 전신에 뭐 하나 어느 세포 하나도 상함 없이 완전한  참 우리를 보호해서 우리를 우리의 호신이 되어지는 이것이 갑주인데  전신갑주라.

 그런데 이 갑주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니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다른 게 아니라  사활의 대속이라. 이 사활의 대속만 자꾸 잊어버리지 안하고 자꾸 입고 있고  사모하고 이 사활의 대속을 자꾸 이렇게 생각할 때에 그 속에 무한하신 능력이  있어 가지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요거는 체험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모두  찬송가 지은 사람들, '피에 능력 있도다. 능력 있도다.' 피를 자꾸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은 체험에서 지금 말하고 있다 말이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는 이 세 가지 죄의 형을 멸한 것이 예수님의 피요,  또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의 의를 공심판을 통과케 하는것이 예수님의 피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원히 친부자간을 만들어서 피조물을 창조주와 하나되게  하는 이런 지극히 큰 능력의 역사가 예수님의 피의 역사라 말이오.

 이러니까 피만 생각하니까, 자꾸 피를 생각하니까 보여지고, 피를 생각하니까  보여지고, 피를 생각하니까 힘입어지 고, 피를 생각하니까 그 능력이 실지로 내  안에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이 체험과 경험인 것입니다.

 이래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변화가 되어지고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듣고 행한 그 진리, 행함으로, 이제 내나 그 진리 인데, 행한 그 진리를 네가 참  알게 된다. 말만 들어서 귓동냥만 해 가지고 알고 실행을 해 보니까 그 진리를  참으로 알게 된다.

 그러면 알게 되면 그 진리를 네가 바로 가치를 알고 존귀를 알아서 네가 그  진리를 모시고 그 진리는 네가 넉넉히 피난할 수가 있고, 그 안에 보금자리 칠  수 있고, 그 진리의 혜택을 네가 입으면은 모든 피 조물들이 다 종이 되고 해할  수 없기 때문에 네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완전히 그리스도를 완전히 입으면  모든 피조물은 네것이 되어 지고야 만다는 이런 내용이 담긴 것을 알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에서 사는 것이나, 사적 생활이나, 우리가 혼자 방안에  있으며 사는 생활이나 우리의 씨름은 교리 신조 행정 씨름입니다.

 내가 성경 깨달은 그것이 교리인데 내 깨달은 교리 신조 그대로 나는 살려고  하고 그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그대로 또 행동하려고 하고 그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고 하니까 이것이 곧 교리 신조 행정 싸 움이요, 이것이 믿음  싸움이요,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가 뺏기지 안하고 나는 입고 살라고  하는 이 싸움이라. 그러면 이 안에서는, 이 안에는 무한한 능력이 그 안에  내주해 가지고 계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렇게 할 때에는 대적하는 자들이, 방해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방해하는 자들이 모든 세상 이런 저런 조직 제도 정치 이런 것들이  방해를 하고, 또 이런 저런 모든 권세, 돈 권세, 사람 권세, 지식 권세, 뭐 사법  권세, 또 국회 뭐 의회 권세 그런 것, 그런 것들이 다 방해를 하고, 또  어두움에서 이 세상 주관하는 거, 어두운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방해를 하고, 또  공중에 악한 이 영 그러면 외부는 이런 것들이요 외부 속에 내부적으로서는 이  악성 이것들이 와 가지고 역사를 한다.

 그래서 그 속에 알맹이 그놈을 말하기를 악령이라고 우리가 말했고, 악성이라고  말했고,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걸 악성이라 말했고 자기 모든 행동 속에 들어  있는 걸 가리켜서 악습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지금 지키는 것은 교리 신조 행정을 지키는 것이요 이것으로  이대로 살라고 할 때 방해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라. 이것이 뭐이기 때문에?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라. 사활의 대속이 교리로 나타났고, 행정으로  나타났고, 신조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것을 벗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는 것이요 이를 입고 사는 것이 사활의 대속을 입고 사는 것이라.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이 모든 네 가지 종류의 것들이 우리로 더불어 대립이 되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오늘 총공회 교리 신조 행정을 말했는데 이거는 우리가  장로교에서 일반적으로 다 상식하고 있는 교리 신조 행정 그것보다 새로운 또  깨달음이 되고 그것보다 보다 좀 나은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서 그대로 할라  하니까 과거에는 다른 사람들은 '이전대로 이래 하자' 또 '새로 깨달은 대로  하자' 이 싸움이 나는 것이 그것이 총공회 이단이라고 정죄받고 싸우는 것인데  이 싸움이 어데까지 나갈 것인가? 이 싸움이 모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과 공중에 악한 영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닫고,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 사람들의 교리 싸움이요, 신조 싸움이요,  그것이 모든 행정 싸움으로 된 것이라. 왜정 말년 그런 것도 다 교리 신조 행정  싸움들이라. 또 모든 순교자들이 다 교리 신조 행정 싸움들이라. 가정에서 그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욕 한 마디 얻어먹는 그것도 교리 신조 행정 싸움들이라.

 또 자기가 모든 사업을 할라 하는 데에도 자기 혼자 사업할라 하는 데에도 그만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획 아주 그만 성공이 되겠고 또 다른 사람하고 잘못된  타협을 하면 되겠는데 그래 할라 하니까 교리에 걸리고 신조에 걸리고 행정에  걸리니까 내가 그와 같이 하지 못하고 대립이 되어진다.

 이 대립이 되어져서 마지막에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령으로 더불어 대립이 되어지는 것인데 이 지금 총공회의 이 간판 가지고,  조금 대립되는 거 간판 그것도 저거 감당 못 하고 간판 혜고 숨기고 하는 그런  자들은 이 교리와 신조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지는 자들이 어떻게  정사하고 대립이 될 때에, 세상 권세하고 대립이 될 때에, 저 혼자 해도 지금  교인 안 온다고 떼고 뭐 갈고 하는 그까짓 게 무슨 정사와 권세와 이거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으로 더불어 대립이 될 때에 싸워 나가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이 교리와 신조를 우리가 지킬라고 하면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서 그 네 가지와 대립이 될 때에 이 땅에 속한 네 가지는 다 버려도 이제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것은 버리지 않겠다. 교리 신조는 버리지  않겠다. 교리 신조 속에 그게 담겨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는 혈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가 치로서는 요  혈육의 싸움이 아니라.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을 안 일을 때 같은 그 성공  땅에 속한 거 멸망에 속하고 없어질 것이고 사망에 속한 그런 것들의 차원에  우리가 싸움이 아니라 그게 아니고 그걸 초월해서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의 것  그런 것들을 가치로 삼아 가지고 우리가 싸우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다시 말하면 옛사람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새사람을 위해 싸운다  그 말이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옛사람 그것을 길러 가지고, 이 가서 가만히  회의를 보면은 이런 순전히 옛사람들 모여 가지고 옛사람 주장이요 옛사람  세력부리고 옛사람 방편 부리고 이라니까 그거는 죽일 놈을 지금 자꾸 기르고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죽일 놈을 죽이니까 듣기 싫으니까 '이 교회는 아니꼬와 못 오겠다'  이제 가 보니까 죽일 놈을 치켜 올려서 칭찬해 주니까 좋다고, 그런 인간들  교만한 인간들은 전부 옛사람 살려서 저를 왕으로 삼는 그 일을 높여 주니까  좋다고 지금 그런 강단 밑으로 가니까 그거는 그대로 하면은 끝이 멸망이 되고  마는 것이라. 그게 십자가의 원수들 이요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반사 선생님들이 할 의무, 또 부장 선생님들과 은사 위치에  있는 분들이 자기에게 소속한 자를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가 하는 의무, 또 하루  삼삽 분 기도 잃지 말고,  이 OOO집사님 보니까 이 신앙생활 하는 데도 이 조직적으로 해요. 과학적으로  내가 하는 걸 보고 있습니다. 한번은 꽃마을 가고, 한번은 또 양산동 가고,  한번은 또 교회 있고, 한번은 또 낮에 하고, 한번은 밤에 하고 이래 자꾸 이래  기도하는 것을 번갈라 가며 이래 하니까 행여나 여기에나 저게나 어데든지 더  은혜 많은데, 또 하나도 골고루 해 가지고 그래 하나도 빠지지 안하고 그렇게,  욕심 많은 모양이라.

 그런데 그거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만 똑 짐승 길들여 놓은 거 모양으로  꽃마을서면 항상 꽃마을, 그저 교회서면 항상 교회, 또 양 산동서면 항상  양산동, 여기에도 가 보고 저게도 가 봐 가지고 골고루 해서 어짜든지 은혜 있는  길을 찾아 갈라고 하는 것이 슬기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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