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발표력

 

1987. 2. 13. 새벽 (금)

 

본문:골로새서 3장 1절∼1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났으면 말입니다. 살려주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심으로 살아났으면, “받았으면” 이것은 살아난 것은 영은 완전히 살아났고 우리의 심신도 예수님의 대속으로 법적으로는 살아나 가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살아나 가지고 있는데 다시 죽지만 안하면 되는데 법적으로는 살아났으나 실상은 죽음의 세력이 강해서 행동은 죽음의 행동하기 쉽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공심판도 다 벗어나왔고 우리 심신은 영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지마는 영은 완전히 산 것이나 이 심신 이거는 법적으로는 살아났지마는 속에 죽이는 독이 가득 차서 산 행동을 못하기 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 “벗으라” “죽이라” 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것은 영과 육이 다 같이 살리심을 받았는데 영은 다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고로 영생을 가졌고 이 심신은 법적으로 살리심 받았으나 실상 행동에는 아직까지 악령과 악성 악습으로 된, 자기 중심으로 된, 자기 위주로 된, 자기 본위로 된 그놈을 아직까지 쫓아내지 못하고 벗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은 그 행동하기 쉽습니다.

이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말은 그리스도와 함께란 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인하여 우리는 영육이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육이 구원받은 자인데 영은 완전히 받아서 다시는 악령 악성 악습의 유혹을 받지 안하고, 악령 악성 악습 이거는 내가 아니면서 내 심신에게는 내라고 이렇게 유혹을 시켜서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는 죽어버렸고 자기 아닌 자기가 자기인 줄 알고 그놈에게 속아서 자기 아닌 자를 자기인 줄 알기 때문에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은 자기기 때문에 자기를 유익되게 하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해치지 아니할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놈이 막바로 도둑놈입니다. 그놈이 자기를 전적 해하기 위해서 와서 있는 것이고, 처음에 들어올 때도 꾀워 가지고 해해서 이 심신 이것이 꼬임받아 가지고 범죄함으로 그만 심신이 범죄했는데 심신을 책임진 주격인 영이, 맞기는 영이 맞았습니다. 영이 맞아 가지고 영은 단번에 죽어버렸습니다.

그후 일반으로 난 모든 사람들이 창조될 때에, 그러면 하나님이 죽은 자를 창조했느냐? 죽은 자를 창조했느냐 그러면 창조되고 난 다음에 죽었느냐? 하는 그것이 신학적으로 많은 논단이 있습니다.

죽은 자를 창조했다면 하나님께서 죽은 것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은 하나님의 창조가 나쁜 것이 아니냐? 이리 됩니다. 죽은 것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완전한 창조를 하셨는데 창조되자 그것이 즉시 정죄를 받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은 우리 대표로 범죄했기 때문에 일단 사람이 되면 아담의, 대표자 아담이 범죄해서 정죄받은 그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육을 지으실 때는 깨끗한 걸 지으셨고 지어 사람이 되면 사람의 반열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람되어 사람 반열에 들어가는 그 동시에 아담이 정죄받은 그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래서, 그러면 영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께서 영을 한목 다 지어놓고, 하나님의 계획이 천 명을 짓는다든지 억만 명을 짓는다든지 몇백억을 짓는다든지 창조할 그 예산을 당신은 다 전지자라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없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영을 다 창조해 놓으시고, 깨끗한 영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 영을 하나씩 둘씩 빼다 쓰는가? 이미 육은 그 뒤에 창조되지마는 영은 한꺼번에 다 창조돼 가지고 그래 돼 가지고 하나씩 한 사람 만들 때에 한 영씩 한 영씩 넣어 가지고 사람을 만드는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틀립니다.

또 그러면 하나님께서 죽은 영을 창조해 가지고 또 그때 사람들에게 넣어서 한 사람씩 만들어 내시는가? 그것도 틀립니다.

그러면 사람은 창조될 때에 그 영을, 영육을 동시에 창조합니다. 영육을 한꺼번에 동시에 창조하는데 창조할 때에는 영육을 깨끗한 영육을 지어서 깨끗한 사람을 지었습니다. 깨끗한 사람을 지으셨는데 깨끗한 사람을 지어 가지고 사람이 척 돼서 사람의 이 반열 속에, 사람이라는 이 종류 속에 가담이 될 때에 그때에 인류를 대표해서 신인계약을 어긴 아담의 범죄로 정죄받은 그 정죄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거는 아담 단독이 범죄한 것을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게 아니고 아담은 전인류의 대표로 계약을 해 가지고 대표자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이 보통 부정모혈로 나는 사람은 다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정죄받은 순서가 처음에는 영육이 죄 없는 깨끗한 것을 지으셔 가지고 그것이 사람이라는 반열 속에 가입이 될 때에 그때에 정죄받아 가지고서 사망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은 왜, 예수님의 인성은 반쪼가리 인성이 아니고 온전한 참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한 사람인데 어떻게 죄가 없는가? 근본 그 원죄, 본죄는 예수님이 범죄하지 안했기 때문에 본죄가 없고 원죄가 없는 것은 아담의 정죄에 거기에 그 정죄에 포함되지 안하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포함되지 안한 그것은 아담의 범죄에는 전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대리자로서 범죄했기 때문에 전인류가 범죄한 것이지마는 예수님의 그 인성은 아담이 대표한 그 인류 속에 들지 안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은 원죄가 없고 그 뒤에 본죄라 하는 것은 본인이 범하는 죄인데 본인이 범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원죄와 본죄가 없는고로 그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받지 않습니다.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받지 않는데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받을 수 없는 분이시요 받지 안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정죄와 저주와 사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그말은, 여게 그리스도라 말은 내나 예수님이라 말입니다.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로 계셨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면서 하나님의 목적인 이 택한 자들을 완전케 하기 위한 책임을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그리스도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마는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가지입니다. 이름을 여러가지로 나타냈습니다. 그리스도라, 여호와라, 또 말씀이라, 성령이라 이게 다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 이름들이 한 하나님을 왜 이름이 여럿인가? 이름이 여럿인 것은 그 직책이 다른 데 따라서 이름이 달리 나타납니다.

이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 대해서 이제까지에 모두 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떠냐? 이 물질계의 것을 가지고 한번 상징을 해 가지고 가르쳐 보라.’ 할 때에 여러가지로 말합니다.

이제까지 나온, 그 통계에서 나온 것은 ‘태양과 같다. 태양인데 태양은 하나지마는 태양에는 온도도 있고 밝은 빛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나 한 태양이다. 태양에서 나오는 것이 열이 나오고, 빛이 나온다. 태양은 빛과 열과 그 차체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 태양은 성부요, 그 온도는 성자요, 빛은 성령이라.’ 이렇게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한 나무지마는 나무 뿌리와 또 둥치와 그 가지 잎과 같다.’ 또 이렇게도 말하나 그 맞지는 않습니다. 그저 하나인데 여럿으로 나타났다 그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래서 저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어떤 면에서는 호주라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어떤 면에서는 남편이라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라 그렇게 이름을 부른다. 한 사람인데 이름은 셋을 가지고 있다. 호주로도 가지고 있고, 남편으로 가지고 있고, 또 부모로도 가지고 있고 이렇게 가지고 있는 거와 같다.’ 한 하나님인데 그 직책에 따라서 요한복음 1장 1절에 있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그 말씀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 진리를 가리킴이 아니고 이 말씀은 제이 성자를 가리켜서 말씀이라 이랍니다.

왜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졌는가? 말씀은 사람들의 속에 내용에 있는 것을 그 말로 가지고 발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그 자존하신 하나님, 볼 수 없는 자존하신 하나님을 예수님이 나타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신인양성일위는 자존하신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이 피조물들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에 내시는 직책을 받았는고로 말씀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말씀이라기 때문에 그분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자존하신 하나님을 나타냈는가? 나타낸 것은 모든 창조로 나타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이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니 창조된 것은 그가 없이는 창조된 것이 없느니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나타내 증거하는 것이 첫째는 창조입니다. 창조로 증거했습니다. 창조로 증거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이 섭리로 나타냈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우주의 운행을 시키시고 또 이래 가지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나타낸 것은 인성을 입고 신인양성일위로 오셔 가지고 하나님의 영원 전 계획으로부터 영원 후까지의 모든 계획과 모든 섭리와 성취하시는 일을 완전히 나타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씀했고, 또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할 때에 “네가 이제까지 같이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 아버지와 나와는 꼭 같다. 나 본 대로 아버지는 그런 것인 것을 너희가 알아라. 이러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말은 신인양성일위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 이 대속을 가지신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말하지 안하고 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하는가? 그리스도는 예수님과 하나신데 그리스도는 예수님으로 나타나시기 전 이 하나님을 그리스도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오늘 여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하는 이 그리스도는 뭐인가?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놓으신 그 후의 하나님이십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인데 신인양성일위이신 그 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계시는 그 하나님은 이름이 뭐입니까? 이름이 뭐입니까? 그리스도라. 이러기 때문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들을 택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또 지금 여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하는 이 그리스도는 그러면 언제 있는 그리스도입니까? 양성일위이신 예수님 후에 있는 그리스도입니까 전에 있는 그리스도입니까? 후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요것을 구별을 안 하면 지금 ‘백지 까다롭게 이런가?’ 이 세상에 나가면 마귀 유혹이 가득 찼는데 이런 것을 똑똑히 모르면 다 유혹에 받습니다. 유혹에 빠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만 세상이 다 통틀어서 그만 하나가 돼 가지고 범벅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얼마나 구별을 하기가 어려운지?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여기서 말하는 것이 이것이 다 이제까지 깨달은 사람들은 있지마는 깨달은 사람들은, 대개는 깨달은 사람들은 이 영면으로 나가기 때문에 육면이 또 적습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은 다 성경 보고 기도하고 자기 신앙 생활에서 깨달아 나간 것이고 이거는 생각도 안 하고 다른 사람이 깨달은 것만 받고 자기는 모든 어학이나 이런 세상 지식에 전공한 사람들은 발표력이 많아서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이 발표를 하고 또 깨달은 사람들은 발표력이 적고 발표력을 가진 사람들은 깨달음이 없고 이래 가지고 이게 다 하나가 원만히 되지를 못하고 다 이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라면 다 하면 될 것 아닌가? 다 하면 깨달음 가지고 이것도, 이 발표력을 전공할라 하면 깨달음을 할 수 없고 깨달음을 전공할라 하면 발표력을 할 수가 없고 이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다른 사람이 깨달아 놓은 그것을 자기가 이용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연단받아 가지고 있는 발표력 그걸 또 이용을 하고 이래 가지고, 이 사람의 것을 자기가 가지고 저 사람의 것을 자기가 가져서, 깨달은 사람들은 이 발표력이 능한 그 사람들의 발표한 그것을 발표력을 이용할라 하고 또 발표력을 가진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걸 이용할라고 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이 종합이 돼 가지고 되는 것이 이것이 이 교리요 신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라 하는 사람들은 다 거의 온전함을 가집니다.

가지는데,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은 발표력이 능숙한 그 사람의 발표력을 무시하고 그것을 자기가 차용하는 거 한가지, 빌려서 차용하는 거 한가지인데, 이용하는 거 한가지인데, 이용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발전이 없고, 또 이 발표하는 발표력만 연단받아서 능숙한 사람은 발표력 그것만 중하게 여기고 깨달음을 무시하는 사람은 또 안 됩니다.

그건 깨달음을 전공해서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발표력 그것을 이용할라고 애를 쓰고 발표력을 필요하고 귀중한 줄 알고 이용할라고 애를 쓰고, 발표력을 가진 사람은 깨달음을 중요하고 보배로운 줄 알고 이용을 하라고 이래 해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자멸 행위는 뭐인고 하니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깨달음 그것만이 제일이지 발표하는 건 필요 없다 하면은 제것만 가지기 때문에, 둘이 합해야 되니까. 남자와 여자가 합해야 아이 낳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 깨달음과 또 발표력과 이 둘도 부부 한가지라. 이거 하나라.

이 둘 한가지인데 이 둘이 합해야 거게서 바로 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은 발표력을 이것을 귀중히 여겨서 자꾸 등용할라고 애를 쓰고, 또 발표력은 깨달음을 자꾸 따라갈라고 애를 쓰고,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없는 그것을 찾아 가질라고 다 이렇게 애를 쓰는 사람은 점점 온전함에 나아가지마는 자기 가진 것만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발표력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대개 말하면 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데 학자가 깨달음 받은 그것을 자기가 받아 자기 것 삼을라고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은 대신학자 말만 듣지 자기 구원도 못 이루고 다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해서 멸시를 당하게 됩니다.

칼빈이 유력한 것은 칼빈은 어떤 사람이냐? 칼빈은 그 사람은 뭣을 전공한 사람이냐? 깨달음을 전공한 사람 아닙니다. 칼빈은 깨달음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은 발표력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 법학을 한 사람인데 발표력을 전공한 사람인데 그 발표력 전공을 가지고 깨달은 사람들의 것을 다 주 모았습니다.

그때는 천주교가 세력을 부릴 때라서 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천주교와 반대되기 때문에 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천주교가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래서 옳은 진리를 증거하다가 죽고 죽고, 그러면 죽기를 얼마나 죽었는가? 한 달 동안에 그때 십만 명이 죽었다고 그렇게 계수의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거는 나는 계수를 못 해 봤습니다. 못 해 봤는데 그때에 계수한 사람들이 그 모든 계수를 통계 맞춰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 ‘한 달 동안에만 해도 깨달음에 전력 기울여서 살던 사람들은 다 죽임을 받았는데 십만 명이나 순교를 당했다’ 이렇게 발표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죽으면서 바로 깨달은 것을 그래도 갈라고 이래 애를 썼는데 그만 깨달은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나니까 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수가 점점 줄어지고 이 천주교에 다 끌려가 버렸었는데 그때 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다 죽어버리고 그 사람들의 그 모든 남아 있는 쪼가리가 깨달음이 이 사람에게 가서 종이 쪼가리 한 장 남아 있고 저 사람에게 한 쪼가리 남아 있고 남아 있다 말이오.

인제 그 깨달은 사람들이 깨달은 걸 말하니까 자기가 좋아서 필기를 해 가지고 필기로 적고 한 거 전부 이거 종이 쪼가리, 뭐 지저분한 종이 쪼가리,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자기가 깨닫기는 하고 깨달은 그것을 그때 종이 쪼가리에 깨달은 걸 기록하고, 그런 걸 뭐 문서화시켜서 서적으로 편집할 그런 시간도 없고 그거 할라 하면 저거 못 하기 때문에 깨달은 걸 적기만 적어 놨다 말이오.

적어 놨는데, 그것을 그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내놓지를 못하는데 이것을 이 사람에게 가서, 그 가치성을 알고 이 사람들에게 가 가지고 이런 종이 쪼가리를 구하고, 그 사람이 깨달은 거는 아니지만 깨달은 사람의 종이 쪼가리를 가지고 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모두 다 깨달은 사람들이 종이 쪼가리에 적어 놓은 그것을 전부 다 수집해 가지고 이것을 한테 이리저리 전부 뭉쳐 가지고 거게 깨달은 것을 한테 그것을 조직적으로 잘 나열해 가지고 편집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이래서, 칼빈주의라 하는 것은 칼빈이 그 사람이 혼자 깨달은 게 아니고 많은 사람의 깨달음을 그 사람이 다 이렇게 편집해 놨기 때문에 그거 말하기를 ‘칼빈의 깨달음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양성원에서도 공부하면 그걸 배울 것이고 또 신학에 가서 공부하면 그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 칼빈은 어떤 사람이냐? 칼빈은 발표력을 전공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발표력을 가지고 깨달음의 보배성을 알고 깨달음을 그것을 자기는 받아 가질라고 애를 써서 그거 하나 받아 가질라고 하면 다 생명 내놔야 되는데 그런 거 찾을라 하면은 가진 사람도 그때 내놓으면 죽기 때문에 안 내놓을라 하고 또 그것을 어디 있느냐 찾는 사람도 생명 내놔야 찾고 그런데, 생명을 내놓고 찾고 또 가진 사람들도 그걸 내 줄 때에는 생명을 내놓고 주지 그리 안 하면 주지 못한다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바로 깨달음을, 깨달은 이 종이 쪼가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너 그런 종이 쪼가리 있나?’ 이렇게 찾는 사람도 생명 내놔야 그 사람에게 가서 ‘그런 종이 쪼가리 있느냐?’ 하는 그런 것을 묻고 보배성이 아무래도, 그랄라 하면 그 사람이 그거 내놓고 올라 하면은 ‘지금 천주교 이거는 썩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래 가지고 우리가 안 된다. 이거 바로 깨달아야 되는데 너는 아무것이 제자니까 아무것이에게 배웠으니 혹 깨달음에 기록한 종이 쪼가리가 없느냐?’ 그걸 묻는 사람도 생명 안 내놓으면 그걸 못 묻는다 말이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또 그 종이 쪼가리를 내놓으면은 그때 한 달에 십만 명 죽였으니까 마구 죽이는 판이라 말이오. 그런데 깨달음을 제가 내놓으면 생명 내놓으면 그것을 내가 배운 어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내놔 줄 수가 있다 말이오.

다 그게 생명 내놓고 다 그것을 주장을 했고 그거 주장하다 죽었다 말이오.

그란다고 죽여버렸어. 죽여버렸으니까 죽임을 받은 사람의 제자가 그 종이 쪼가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칼빈이 수집하는 데에는 생명 내놓고 수집했고, 또 내주는 사람도 생명 내놓고 종이 쪼가리를 보관해 가지고 있다가 내줬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다 이 생명 뭉텅이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이 모두 오늘까지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모든 사람 깨달음을 수집해 가지고 편집해서 내놓은 것이 칼빈이오. 그러기 때문에 칼빈은 교리와 신조의 개혁을 한 사람입니다. 교리와 신조의 개혁을 한 사람이고, 루터는 이것을 선포해 가지고 이렇게, 칼빈은 문서로 개혁한 사람이고 루터는 온 세계에서 이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이 공회 앞에 가 가지고 발표를 해 가지고 개혁을 한 사람이오. 그 입으로 발표해서 개혁한 사람이요 저는 문서로 개혁한 사람이요, 그러기에 개혁은 했지마는 다 개혁가지마는 개혁한 종류가 각각 다르다 그말이오.

그 바티칸 공회에 가 가지고 그때는 생명 내놔야 되는 건데 루터가 생명을 내놓고 그렇게 담대히 진리를 외쳤다 말이오. 진리를 외치니까 그때 그들이 죽이고 싶지마는 하나님이 못 죽이게 하니까 죽이지를 못했어. 그때는 뭐 십만 명 죽일 때니까 그거 하나 죽이기야 문제 없지만 죽일라고 애를 썼지마는 죽이지를 못했어, 하나님이 못 죽이게 하니까. 그래서 그분이 개혁가라. 칼빈이 개혁가요 루터가 개혁가고 두 사람 다 개혁가인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서도 지금 어떤 사람이 벌써 그 사람이 죽어 버렸습니다. 젊은 사람인데 고신에서 젊은 사람으로서 본과 학생 쳐 놓고 그 사람이 제일 유력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인데 김승환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공부를 그때 학교에서 제일 잘했습니다. 제일 잘했는데 그 사람은 본과를 공부하면서 어학을 많이 공부하고 이래 가지고 발표력을 공부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눈을 뜨기를 그 깨달음이 제일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 발표는 좀 둔하게 해도 깨달음만 있으면 된다 하는 그걸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때에 제 뒤를 따랐습니다. 제가 고신에서 핍박을 받고 많이 박해를 당하고 이렇게 훼방을 받을 때에도 그 사람은 저를 따랐습니다.

저를 따라서 제가 제천 ○○교회로 부임을 시켜 가지고 거게서 부임해 가지고 있으면서, 제 집회는 오지를 못했습니다. 제 집회는 오면은 벌써 그때에 알면 아예 저놈 점을 찍고 출세를 안 시키기 때문에 집회는 못 왔어. 집회는 못 오고 자기 밑에 있는 학생들, 요새 ○○○목사니 또 해군 장로니 하는 그런 분들, 이런 분들을 집회에 보내 가지고, 그때는 녹음기가 없어. 그저 필기를 해 가지고 오면은 그 필기를 보고 이와같이 따르다가, 언제 한번 저한테 와 가지고, 그때 저는 조사입니다. 조사인데 ‘조사님’ 내 책상에 서재에 꽂혀 있는 노트, 노트가 그때 이만치 꽂혀 있었으니까 ‘노트 이게 보배인데 노트 이것을 저를 줄 수 없습니까?’ 그것을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그 노트를 주지 안한 것은 그 노트를 또 앞으로 뭘 어떻게 해 가지고 이거 모든 사람이 발표할지 모르는데 그걸 줘 버리는 날이면 내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노트를 안 줄라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게서 이동이 돼 가지고 나중에 내가 거기서 제명을 당하자, 제명당할 때에는 무슨 죄목으로 제명당했느냐 하면은 ‘상회 불복종으로 제명합니다’ 하고서 그렇게 서완선 목사가 그때에 총회 서기인데 그분이 통지를 보내 가지고, 제 통지 보낸 그 통지서가 제게 있습니다. 그거 다 그때 ‘이걸 가져야 이 앞으로 다 증명이 되겠다’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걸 다 복사를 해 가지고 교역자들 다 한 벌씩 가졌지만 교역자들은 그런 거 모릅니다. 저거는 지금 개혁할 만한 자격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그 뒤에 따라만 왔지 보배성을 몰라.

이러기 때문에 아마 거의 다 없앴을 것입니다.

그때 ○○○씨라 하는 그분이 우리 서부교회에 대해서 무슨 말 한 마디를 언급을 해서 그때 모든 교역자들이 이 문서를 다 가지고 갔습니다. 다 가지고 가서 보이니까 그 사람이 그때사 다 고신에 모든 걸 다 내용을 알고 다 보고 난 다음에 말하기를 ‘외나 진짜 고신은 여게 있구나’ 하고서 그분이 그것을 다시 취소하고 그런 말 하지 안하고 그 뒤에 집회도 더러 오고 이랬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분이 그 다음에 이제 나는 제명이 됐기 때문에 나와는 연결 가지지 못하는고로 그 다음에 그때 박윤선 목사님은 그래도 거게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 교회 가 가지고 둘이 원목사 부목사, 박윤선 목사님은 원목사로 김승환 목사는 부목사로 이래 가지고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그래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그 교회가 무슨 교회지, 이름이? 알아요? 서울? 기억 못 하겠습니까? 동산교회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서울 동산교회. 기억합니까? ○○○권사님 기억합니까? 동산교회? 녜, 동산교회입니다. 동산교회에서.

그러기 때문에, 제가 이 말 하는 것도 지금 말하는 것을 지금은 자유 있으니까 얼마든지 말하지마는 앞으로는 그것을 없앨라고 하기 때문에 이 설교록을 가지고, 내가 자꾸 사라 하는 것은 설교록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중에 죽임을 받을란지 모릅니다. 설교록을 뒤에 가지고 보존을 못 할란지 모릅니다. 그러면 설교록 이게 숨겨지고 숨겨지고 이래 가지고라야 보관이 돼지지 그리 안하면 보관을 못 할 때도 온다 그말이오. 또 필기 이런 거 보관을 못 할 수도 있는 그런 때도 와요.

왜? 이것은 전부 이 세상과 대립되는 이 말이기 때문에.

지금은 뭐 이 천주교가 어떻다 하는 그런 거 말하지만 앞으로는 천주교가 득세를 하면은 그런 말 하면 다 잡아 죽입니다. 지금은 천주교가 개혁교와 이렇게 지금 합한 것같이 이래 하고 있지마는 실은 본질적으로는 다릅니다.

그분들은 위주가 미사입니다. 그들의 천주교의 위주는 미사요. 미사는 동상이나 사진이나 내놓고 거게 이 절하는 것이 미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안 할라고, 신사참배 안 할라고 많은 옥고도 당하고 순교도 당하고 그렇게 또 수년 동안을 싸워 나왔고 이렇게 한 것인데 그분들이 그걸 잘 한다고, 미사라 하는 건 그 사진 박아 놓고 거게 절하는 것이오.

여러분들 지금이라도 가 보십시오. 여게 천주교, 여기도 아마 있을 거요. 여기도 천주교 있는데 천주교 가서 가만히 가 봐요. 아침에 가서 미사 시간에 가면은, 묻습니다, 이 교인이 개혁교 교인인가 싶어서. 이래 떡 가 가지고 이래 보면은 ‘나도 여기 뜻이 있어서 왔다’고, `마음에 생각이 있어서 왔다’고 이라면은 무슨 생각인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말이오. 이라면 ‘그러냐?’고.

이래 있으면 모든 사람이 들어와 가지고 이 사람이 와 가지고 미사를 하고 저 사람이 미사를 하고 모두 다 하면은, 어떤 사람 내가 그때 저게 용두산 있는데 그 천주교 있는, 그때 있었는데 거기 가니까 그 날 아침에 오는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사람 보니까 거게 사진 걸어 놓은 것이 칠십 몇 개인가 걸어 놨읍디다. 칠십 몇 개 걸어 놨는데 그 한 사진을 보면서 세 번씩 절합디다.

하나는 한쪽 발은 디뎌 섰고 한쪽 무릎팍은 이래 꿇고 요래 가지고 요 딱 요래 가지고 머리로 요래 꼬박꼬박 꼬박 세 번씩 이래 가지고 그래 죽 나가니까 그 칠십이면은 절 몇 번 했습니까? 이백십 번이지요. 이백십 번을 하루 아침에 나와 해. 그게 미사 드리는 것이오. 이러니까, 이렇지마는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그것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천주교와 우리 개혁교가 하나니까 하나 합해야 되지 않느냐 해 가지고서 합동 번역을 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게 뭐이냐? 하늘에서 주는 은혜가 아니면 예수 못 믿습니다. 자기 총명 가지고 믿는 것 아니오. 하나님께서 믿게 하는 자는 세상이 그렇게 십만 명을 죽여도 꼭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게 하는 자라야 돼.ㅡ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하는 이 그리스도는 처음에가 이렇습니다. 처음이 시작이 그리스도요 창세 전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로 우리 기독교가 그리스도로 시작했고, 또 그 다음에 중간에 이 그리스도가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신인양성일위 예수님으로 나타났고, 이 공로를 베풀고 난 다음에는 또 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성화, 무궁세계의 성화될 것까지를 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라 말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된 데서 시작해 가지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까지를 말한 것이고. 예택에서 사활의 대속까지를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고 대속으로부터 영원무궁 세계까지를 말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라 말했다 말이오. 그러면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예수라 그렇게 말한 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각각 다르지요? 이러니까 여기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다시 살림을 받았다 말인데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란 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우리가 살려 줌을 받았습니다.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살림을 못 받아요. 여게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 공로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활의 공로와 함께 이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리심을 받았다 그말입니다.

영도 중생했고 우리 몸도 법적으로는 살아났는데 살아난 게 안 죽으면 되는데, 살아난 게 안 죽으면 되는데 이 살아난 이것이 이 대속을 벗지 안하면 안 죽는데 현실에서 대속을 벗으면 요 살아난 심신이 대속을 벗고, 영은 벗지 않습니다. 영은 안 벗어요.

영은 안 벗기 때문에 로마인서 7장에 보면은 속에 영은 탄식을 하면서 안 범할라고 애를 쓰는데 원치 안하는데 고기덩어리하고 마음하고 이놈이 범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원치 안하는 죄를 범하는 건 내가 범하는 게 아니라 이 내 속에 있는 죄 그놈이 들어서 내 심신을 거머쥐고 범했다” 그렇게 로마인서 7장에 말씀해 놨다 그거요.

그러면, 이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야 우리가 살아나지 힘입지 안하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움을 받았다 말은 그리스도는 뭣 때문에? 그리스도 아니면 우리는 못 살아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움을 받았다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뭐와 함께 우리 살려? 우리만 살리면 될 터인데 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움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여기 들어붙였습니까? 뭣 때문에? 그리스도를 붙인 것은 뭐입니까? 왜 그리스도를 붙였습니까?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의 공로와 함께 우리를 살렸다 했어.

대속의 공로와 함께 살아났지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또 그렇게 말씀한 데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알겠습니까? 이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우심을 받았다” 말은 예수님의 이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과 함께 우리가 살리움 받았다. 대속이 우리를 대표해서 했기 때문에 그 대속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은 그 대속의 공로로 살아난 것을 자기가 가졌는고로 살아난다 그말이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죄의 형벌을 받아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죄는 멸하고 마귀도 죄도 다 멸해버리고 우리는 거게서 해방시켜 가지고 예수님이 대신 형벌 받고 우리는 안 받고 우리는 받은 자와 같이 돼 가지고 살아났다 그말이오.

예수님은 공법을 통과했지마는, 죽기까지 복종해 통과했지마는 우리는 공법에 대해서 하나도 손도 안 댔지마는 공법을 통과한 자가 됐다 그말이오.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지마는 예수님이 대신 화친했기 때문에 화친된 자가 됐다 말이오.

예수님이 다시 부활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영감과 진리로 영생했기 때문에 내 모가치로 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 모가치 삼고 보니까 나는 영감과 진리대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도 살아보지도 안한 그것이 내가 산 자가 되어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됐으니까 나는 뭣 됩니까? 나는 주님의 것 됩니다.

주님의 것 되니까 이제는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됐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나는 주님의 것 됐으니까, 주님의 것 됐으니까 이제 안 죽는 방편은 뭐이냐? 주님의 것 됐으니 주님이 내 속에서 사시면, 나는 죽었기 때문에 나는 권리가 없어. 나는 죽었고 주님이 내 속에 주인으로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주인으로 내 영육을 거머쥐고 사시면 그거 영생입니다. 알겠습니까? 살다 영은 그대로 사는데 심신이 범죄하면 그 죽음을 가리켜서 무슨 죽음이라고 말합니까? 그 죽음은 무슨 죽음으로 말하요? 둘째 사망이라. 살아났기 때문에 다시 죽었기 때문에 둘째 사망이라 그렇게 말한 것이라.

이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뭐, 말하는 것이 안 할 수 없어 말하는데 이게 여러분들에게 배 나갈까 싶어서, 배 나가서 어떻게 돼 나갈까 싶어서 지금 하는 것이지 실은 내가 늘 ‘이거 뭐할라고 이 사람들한테 이 설교를 할까?’ 이거는 대신학자들에게 설교해야 돼. 대신학자는 내가 또 간판 없으니까 또 그 사람들은 안 배울라 한다 그말이오. 또 여기는 배워야 모르는데.

이런데 내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뭐이냐? 조그만한 이게 나가 가지고 주일학생들, 이 중학생들, 고등학생들, 혹 이 젊은 사람 가운데는 배운 사람들이 있다 그말이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래도 똑똑히 몰라요. 아이들만치 몰라요.

이래도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까 당신이 이게 배어나갈 것 아닌가? 배 나가면 이게 인제 다른 데 몰라도 주일학교부터 배 나가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주일학교 어떻게 부흥되는가?’ 주일학교 부흥되는 것만 배울라고 오지마는 이제 알고 보면은 주일학교 부흥된 그걸 배운 가운데에서 이제 올바른, 예수 믿는 올바른 신조와 교리를 배우게 된다 이거요. 이래서 여기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 여러분들이 이 똑똑히 하나라도 배울라 하면 되는데 그 배울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몰라. 여기 남반들이 둔해요. 남반들이 둔해요, 보면. 여반들은 아는데. 어제 언제도 이래 물으니까 여반은 대답해. 뭘 물었지, 그때? 뭐 물으니까 손가락을 뭘 둘 이래 가르치는 거, 둘이 맞은데 이 남반에는 둘 가르치는 사람들이 별로이 없어. 똑똑히 배워야 됩니다.

이 말하는 것이 백지 이거 비비 꼬아서 말하는 거 같고 자꾸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것 같지마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게 어떻게 될 것인가? 언제 ○○○교인이 하나 와 가지고 ‘그거’ 내가 자꾸 이게 어렵다 해 자꾸 이래 말하니까 나중에 와 ‘율법을 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깨달은 것이 일반 다 학자들이 깨달았어. 그래 쉬운 게 아니라. 그 속에 알맹이를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 그거요.

그러니까 여게도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그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말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몇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신, 몇 가지 성호로 나타난 하나님을 말했습니까? 여기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몇 가지 성호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말한 것인가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이소. 한번 뻐뜩 들어 봐요. 막 이래도 하고 이래도 하고 여러가지 있다. 또 이래도 있고 또 이래도 하고.

이게 맞아, 이게 맞아. 똑똑히 이게 맞아. 창세 전 그리스도,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인데 그리스도, 또 그 공로 가지고 우리를 성화시켜서 하늘나라 옮겨갈라고 하는 그 그리스도, 이 세 가지. 창세 전 그리스도, 예수님, 또 사활의 공로를 완성한 후의 그리스도 이 세 가지 이름을 여게 말한 것이라 그말이오. 그걸 알아야 돼요.

이걸 알면 그 다음에 해석을 쫙 풀려 나가는데 이걸 모르면 그 다음 성경 해석이 풀려 나가지 않기 때문에 막 성경에 난해절이 꽉 찼습니다, 해석 못 한다고 하는 것이. 이제까지 해도 난해절로서 해석 못 하는 게 있는데 하나를 바로 깨닫고 나면은 그 다음에 쭉 바로 깨달아진다 그거요.

이것도 이러면 뭐 이걸 여러분들에게 말을 하면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 떠나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것만 말해 주면은 쉽고 여러분들도 깨달을 것이고 또 은혜도 받을 거고 뭣이 기도할 것도 있는데 그것만 안 되기 때문에 밑에 많은 이 해석을 이래 하니까 아이구 모르게 비비 꼬아서 도무지 모르게 할라 하는 것같이 이렇지마는 그걸 모르면 이 세상에 나가 가지고 미혹하면 이리 따라가고 저리 가고 다 미혹받아 따라가지 이 진리를 고수할 수가 없어. 생명 내놓고 고수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그런 말 하는데 그 말이 귀찮게 들려지니, 귀가 열리면 막 바짝바짝 뜨일 건데.

이러기 때문에 요 한 진리를 자기가 모르는 걸 깨달으면 뭐 죽을 만치 좋고 이렇게 뭐 야단이 나는 건데 암만 말해 줘야 귀넘어 듣지 들리지를 안한다 그말이오.ㅡ 여러분들이 오늘 기도할 제목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생명, 생명의 힘이 강하면 그 생명의 힘이 어데까지 뻗칩니까? 어제 아침에 실컷 가르쳐 놨는데 한번 말해 봐요. 생명의 힘이 강하면 어데까지 뻗쳐 나갑니까? 말해 봐요, 어데까지 뻗쳐 나가요? 생명의 힘이 강하면 그 사람의 모든 사물에까지 뻗쳐 나갑니다. 알겠습니까? 그 사람의 하는 일, 물건 거게까지 생명력이 뻗쳐 나갑니다.

또 그게 약하면 어데까지 뻗쳐 나갑니까? 그 몸에 뻗쳐 나갑니다. 몸까지만 나가지, 몸에는 생명력이 있지마는 활동은 못 하는 거. 몸은 살아서 움직이지마는 이 사물에 일을 하지 못하는 건 생명력이 약해서 거게까지 못 나가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생명력이 강할 때는 저 수원지 저 만당 아침마다 내가 갔습니다.

아침마다 새벽기도 딱 마치면 여기 나서 가지고 거게 올라가 가지고 기도하고 와서 아침 먹습니다. 저 제일 상날망. 거게 올라가는데 얼마 걸리느냐? 올라가는 데에 사십 분 걸려. 그렇게 빨리 안 가도 사십 분이라. 사십 분 걸려 올라가요.

올라가 가지고 거기서 기도하고 여기 내려오는 거는 한 이십 분이면 내려와요, 여게. 이러니까 올라가서 기도하고 내려오고 아침마다 그랬어.

이랬는데 지금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 반도 안 되는 저 양산동 거기도 올라갈라 하면은, 반이 뭐라? 삼분지 일밖에는 안 되는데 거게도 올라갈라 하면은 사십 분 걸려.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뻗친 힘이 약하다 말이오. 또 그때는 오만 일 다 했지만 지금 그렇게 많은 일을 못 해. 이 속에 육체의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못 한다 그말이오. 차차차 줄어져요.

이래서 백 리 공간을 돌아다닌다 말이오. 서울에도 장 한 달에 한번씩 갔었는데 이제 생명력이 약해져서 못 가요. 거기 갈라 하면 안 되니까 차차 줄어져요. 모든 하는 일이 줄어지고 접촉하는 물건이 줄어지고 차차차 줄어지다가 나중에는 그저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앉아서 손만 꼼짝꼼짝 말만 이래 하지, 못 하면 그때 사물에는 접촉을 하나도 못 한다 그말이오. 이 육체의 고기덩어리 마음에만 접한다 말이오.

몸에 접하다가 뒤에 가서 마지막으로 되게 빈약하게 될 때에는 어데만 접합니까? 마음에만 접해. 마음에만 접해. 이러니까 숨이 끊어졌다고 아주 죽은 거 아닙니다.

이 맥박도 안 놀고 숨도 딱 끊어졌지마는 아직까지 그 속에 마음이라는 정신은 지금 살아 있다 그거요. 살아 있어.

‘숨졌다. 맥이 지금 이제 맥이 끝났다.’ 이래도 온 고기덩어리 가운데서도 이 맥도 숨도 끝났지마는 아직까지 그 근육에는 생명이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근육은 지금 거기서 팔탁팔탁 뛰는 그것이 있습니다. 있고, 고기덩어리 다 완전히 이 생명력이 다 뻗칠 힘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어데만 남아 있습니까? 이 정신 마음에 남아 있다 말이오.

정신 마음에 남아 있는 그 증거를 이 심리학자들은 뭘로 증거하느냐 하면은 숨도 맥박도 다 끊어졌는데 그 사람 옆에서 모든 사람이 얘기를 했다 말이오. 얘기한 것을 나중에 그 사람이 기절했다가 깨어나고 난 다음에 그 얘기를 다 들은 것을 말한다 그말이오. 정신이 제일 늦게 죽습니다.

그러면 이 생명력이,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력이 없으면 생명 이게 끊어지면 뭣 됩니까? 그 다음에는 썩는 거라. 그 다음에는 썩는 거. 이거 뭐 이 육체를 말합니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강하면 우리의 생활에게까지 뻗쳐 나가기 때문에 사람 보기에 빛이 되고 의가 되고, 이 생명이 우리 내 자체에만 있으면 자체에는 활동이 있고 그 다음에 생명력이 영에게만 있으면 그 심신은 어째 됩니까? 영에게만 있으면, 생명력이 영에게만 있고 영 밖에 나오지 못하고 영에게만 겨우 비춰 가지고 있으면은 우리의 심신은 어찌 됩니까? 심신의 활동은 뭣 됩니까? 심신의 활동은 다 사망이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는 것은 이 심신의 활동이 사망이라는 것인데 심신의 활동이 사망될 때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떠나 버렸습니까 우리에게 있기는 있는데 그렇습니까? 그러면,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떠났습니까 우리에게 있습니까? 떠났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저 뒤에는? 저 뒤에도 들기는 든다. 우리에게 있어요. 어데 있습니까? 어데 있습니까? 중생된 영 속에 있습니다. 영에게만 있지마는 그 생명이 이 마음에 건너오지 못했다 말이오. 그 생명력이 우리에게 작용이 약해서 말이지.

그래서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기 때문에 생명을 우리 마음에서 영접하는 거는 뭘로 영접합니까? 우리 마음으로써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영접해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와서 있으면 우리 마음이 살고 몸에 와 있으면 몸이 살고 우리의 행동에 와 있으면 행동이 사는데 우리 마음에 첫째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와서 있어야 되는데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와서 계시도록 할라 하면은 어떻게 하면 그 영접할 수 있어? 어떻게 해야 돼요? 생각 사모면 돼요. 알겠소? 생각 사모.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잊어버린 생활은 다 죽었다고 어제 아침에 내나 말했지만 암만 들어야 몰라.

그러니까, 또 여러분들이 지금 뭐인가 복잡한 일만 있다 이러니까 이래도 이거 다 알고 행하기가 어려운 건데 알지도 못하며 행하기를 언제 행합니까?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이 그것만 기억하고 자꾸 하면 우리 심령이 자꾸 새로워져요.

사람이, 얼어서 죽은 사람이, 얼어 죽은 사람을 갖다 놓고서 목숨만, 숨만 붙어 있으면은 차차 차차 있으면은 나중에 조금씩 살아나옵니다. 이 숨은 쉬고 이래도 이 손은 죽어 있어. 이라면 차차 차차 오래 지나가면 손에까지 생기가 돌아 가지고 손까지 움직일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거 모양으로 주님만 자꾸 사모하게 되고 자꾸 이 사모하고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의 사활을, 일곱 가지 대속을 자꾸 생각하고 이라면은 우리 심령이 치료가 돼요. 우리 마음이 치료가 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치료가 되면은 우리 마음이 어두워집니까 밝아집니까? 밝아져요. 밝아지면 깨달음이 점점 더 깨달아져요.

이러니까, 여러분들 집회에 갔을 때에, 집회에 갔을 때 집회에 가서 집회 가기 전에 심령이 밝습디까 집회 중에 밝습디까? 어때요? 집회 중에 차차 심령이 밝아지는 것을 느껴 본 일이 있어요? 집회 중에 심령이 밝아지는 걸 느껴본 일이 있었어요? 모든 것을 바로 정상으로 생각한다는 그 심령이 정상되는 것을 느껴본 사람 있어요? 느껴본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다 느껴봤어, 예수 믿는 사람은.

저게 안 든 사람 있네. 저 뭐꼬? 쌀장사 ○집사 부인, 저 이름이 뭐이지? 왜 안 들어? 내 눈이 없는 줄 알아? 내가 다 보고 다 있어요. 그래 들었구만. 조그마이 들면 안 보여.

그게 뭐이냐? 그라다가 또 와서 이 세상에 와서 또 돌아와 가지고 있으면은 그 심령이 어두워져요 밝아져요? 어두워져요. 그때 밝은 것을 어두워지지 안하고 와 가지고 있을수록 점점 밝아지는 사람 있습니다. 점점 밝아지는 사람 있어요. 점점 밝아지는 사람은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하고 자꾸 주님과 이 관계를 끊지 안하면 우리 심령이 자꾸 밝아집니다. 이래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처럼 온전한 데 나아가야 됩니다.

대개 그러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 잘난 사람들이 예수 믿는 구원을 바로 가지지 못합니다. 제딴에는 잘 믿는 척 마구 ‘내가 잘 믿지’ 이라지마는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없어. 진리를 깨닫지도 못해. 죄를 이기는 힘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 때에 신사참배 이긴 사람은 다 잘났다고 한 사람 다 졌어요. 다 패전했어. 그때 참 간 작고 하나님만 사모한 그 사람들이 다 승리했습니다.

오늘도 여기 무슨 공산주의가 들이닥치든지 하면 잘난 사람은 도망 다 치고 앞서 다 달아나. 그때 뭐 ‘내가 의지’ 제 의지를 믿는 사람은 다 망합니다. 나는 약하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된다는 하나님을 전적 믿는 사람만 승리자가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잘난 사람은 다 패전 다 하고 못나고 하나님만, 자기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느끼는 그 사람만 승리해요. 이러니까 이거 좀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들 좀 정신 좀 차려야 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701 깨어 살려면/ 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800204월새 선지자 2015.10.27
700 깨어 사는 생활/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861005주후 선지자 2015.10.27
699 깨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4장 42절-47절/ 861006월새 선지자 2015.10.27
698 깨어 근신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11절/ 881126토새 선지자 2015.10.27
697 깨달음의 중요성/ 사도행전 1장 4절-8절/ 860620금새 선지자 2015.10.27
696 깨달음과 실행/ 요한복음 15장 1절-4절, 9절-12절/ 830521토새 선지자 2015.10.27
» 깨달음과 발표력/ 골로새서 3장 1절-11절/ 870213금새 선지자 2015.10.27
694 깨달음-결실/ 마태복음 13장 3절-4절, 18절-19절/ 84040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7
693 깨달음-결실/ 히브리서 10장 26절-31절/ 840310토새 선지자 2015.10.27
692 깨달음 다섯 가지/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60506화후집회 선지자 2015.10.27
691 깨달은 대로 설교할 것/ 고린도전서 15장 33절-34절/ 881002주새 선지자 2015.10.27
690 깨끗해지는 것/ 요한복음 15장 1절-8절/ 880916금새 선지자 2015.10.27
689 깨끗한 것/ 요한일서 3장 1절-10절/ 850412금새 선지자 2015.10.27
688 깨끗케 하는 현실/ 요한 1서 3장 1절-3절/ 840820월새 선지자 2015.10.27
687 깨끗은 본질과 본성대로 된 것/ 마태복음 7장 15절-27절/ 810410금새 선지자 2015.10.27
686 깨끗/ 야고보서 2장 10절-13절/ 890127금새 선지자 2015.10.27
685 깨끗/ 요한복음 15장 1절-4절/ 791116금새 선지자 2015.10.27
684 깨끗/ 요한일서 3장 1절-7절/ 820706화새 선지자 2015.10.27
683 길이 참아라/ 야고보서 5장 7절-12절/ 830724주후 선지자 2015.10.27
682 길과 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80315화새 선지자 201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