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실행

 

1983. 5. 21. 토새.

 

본문 : 요한복음 15장 1절∼4절, 9절∼12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명문되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글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과거 이 성경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감동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때보다는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가 매우 용이합니다.

 용이한 이유는 첫째는 문서 계시가 되어 있고, 또 수많은 간증자 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간증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찾아 가지고 실패한 사람들도  많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또 바로 찾은 사람들의 그 방편도 우리에게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앞서 걸어가면서 해 놓은 모든 간증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가 옛날보다 쉽습니다.

 그러나, 쉽지만 지금은 어디에서 어려워지느냐? 신구약 성경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보지 않는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노를 쌓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렇게 됩니다.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만 자기 현실에 당면했을 때에 내게 대해서, 이 명문된  어느 성구가 내게 해당된 주의 명령 곧 내가 지켜야 할 내 진리인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은 옛날 양심을 써 가지고 찾을 때나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지금도  쉽게 그렇게 찾아진다 해서 힘 안 쓰고도 아무나따나 그렇게 찾아지는 것  아니고, 또 자기가 어두우면 하나님의 뜻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또 자기가 어두워지는 그것도, 자기가 어두워진다고 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두워질 때에 사람이 자기가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  그 어두움을 확 틔워서, '흑암에처 드러나라' 하신 말씀대로 그 어두움을 참  뉘우쳐 회개를 하면 그 회개함을 인해서 더 빨리 찾아집니다.

 사람이 가치 없는, 가치가 적은 세상것 이런 것 저런 것 그것을 가지고, 아주  외식적이요, 참 그것은 너무도 아주 유약하다고 할 수 있는 인간 비판, 인간의  모든 여론, 인간 이해 그런 것에 맞추어서 흠이 없는 그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 되니까 자기 딴에는 된 줄로 아는데, 아무리 하나님은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하나님의 징계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어떤 무서운 시험에 빠져 버리든지, 무슨 좀 충격이 있고 무슨 자극이  있고 무슨 좀 활동성이 있어야 되지 그게 없는 그것이 제일 불행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뜻을 자기가 개인 개인이 행할 때에 그시 그시 당면된  하나님의 뜻 자기 진리는 찾는 것이 힘이 들고 또 신구약 성경에서 원리적으로,  원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그것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찾으려고  애만 쓰면 찾아집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오늘에 문서 계시가 있는데 문서 계시에서 자기가 걸어가야  될 자기 길, 자기 진리 이것을 찾는 것이 참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찾으려고 애를 쓰기를 옛날에 쓰던 그런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은 것처럼  지금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어려우니까, 우리가 '네 안에 기름부음이 너를 가르치고 있다' 하는 그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저 어리석은 인간의  비판, 인간의 이목 그것이 정죄하지 못할 정도라면 되었다 하고 안심하고 가는  그런 신앙에서 사람은 점점 타락해 갑니다. 타락이 되어 가지고 아주 허무하게  타락합니다. 이러니까 타락한 자신이 되어 놓으면 보는 모든 견해가 틀립니다.

 지난 밤에도 씨 뿌린 비유를 했는데, 씨 뿌리는 비유에 길가 뿌린 씨에 대해서  송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나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대단히 바로 깨닫고,  송목사님에게는, 벌써 박사도 되었고 이러니까 참 자기에게는 길가 뿌린 씨 그  씨를 바로 깨달아서 볼끈 잡았으면 뭐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해결입니다.

그래 보니까 잡은 것 같아서 참 마음에 기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둘째 세째  네째로 나가는 데에는, 네째는 안 했지만 둘째, 셋째는 아직까지 그 속에 진의를  파악을 하고 있는지 없는지 제가 모르겠습니다. 엊저녁에 들어 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걸어가는 데에는 그저 하나님이 이 정확하신 것만큼 그분  상대하는 그 상대는 모두가 다 정확해야 됩니다. 사람도 흐린 사람은 뭐 그저  흐려도, 그래도 상관없지만 정확한 사람은 흐린 것을 닥칠 때에 당장에 표시가  되고, 또 흐린 것을 닥쳐도 참 모르는 듯이, 또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바울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시고도 모르는 척 하고 가만히 계시면서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때가 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처럼 그렇게  권위있게 폭 넓게 역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가 진실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아니고 거짓된 사람을 당장에 압니다. 그 말 한 마디에 알고 행동 하나에  압니다. 그 속에 감추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압니다.

 혹 신앙 선배로서 자기에게 대한 하는 말이 억울한 것 같으나 양심을 딱 써서  그래 할 때에 '저분이 참 신이구나. 어떻게 속에 음미한 것을 그렇게 알아내노?'  하는 고 깨달음이 없으면, 그래 가지고 그것을 변명이나 하고 이러니 저러니 해  가지고 인간 말을 한다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해 놓은 그 말을 그런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어제 우리가 인사이동에 대해서 많이 말했는데,     목사님이 그  교회 가 가지고 인사이동에 대해서 한 말 했는데 그 말이 자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 버리지 않으면 목회는  성공 못합니다. 항상 실패지. 복술을 쓰지 말아라 하는 그 말을 엊저녁에도  말했는데 내나 그게 복술이오. 복술로 방어하는 말이오. 자기 딴에는 뭐이 된다  해 가지고 말하지만 딱 들을 때에 그 심리가 무엇 때문에 어디서 동기가 되고  발원되어 가지고 목적이 뭐인가 하는 것을 안다 그말이오. 우리가 아는데  하나님이 모르시겠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를 쓰는 사람보다 진실한 사람이 낫습니다.

못난 사람은 진실하면 그 사람이 틀려도 '저것은 무지해서 몰라서 틀렸지 저것이  뭐 이중이나 삼중이나 무슨 꾀나 그런 것은 없다' 그러면 등용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거기서 제가 무슨 굉장한 세상 인간은 뭐 너무 덧버선을 많이 껴  신었기 때문에 상상도 못할 만큼 속에 가리고 가리고 '이렇게 가리면 모르지'  싶지만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모릅니까? 다 압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진실함으로 나아가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간단하게 그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그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것은  역사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는 그것 아니오. 물론 역사에 그런 일이 있으면서  말하지만 역사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는 과거 역사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그것이 이치입니다. 이런 이치가 있으니까 이런 일에 해당하는, 이  이치에 해당하는 것은 전부 다 해당된다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해 놓은 그 이치, 그 이치를 네가 인정하나 안  하나? 네가 확실히 인정하나 안 하나? 그 인정하는 그것이 하나이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그대로 행하는 것 그 하나, 둘 뿐입니다.

 그 둘 외에 있다면 계속하고, 계속하고, 네가 네 자체가 생기기를 달걀  만큼밖에 안 생겼으니까 하나님도 그런 줄 알고 너를 표준해 가지고 끝없는  인내를 가지지 못하고 네가 얼마 가다가 기다리다 안 되니까 '안 됐다' 이래  가지고, 속단 속성을 바라는 너를 표준해서 그렇게 얼마 기다리다가 안되니까  '안 됐다 그만 낙심하자' 하나님은 또 뭐 하고 계시느냐? '네가 요렇게 지금  너를 표준해 가지고 그 기간을 판정하니 고놈을 내가 죽여야 되겠다' 해 가지고  하나님은 거기다 당신을 주력해서 고놈 죽도록 하니까 자기가 '아이구 그렇지만  한 달만 더 참아보자. 참아보자. 일 년만 더 참아보자' 일 년 참으려 하면  '그래. 네가 일 년 참으려 하면 일 년까지는 네가 참는 그것이 잡탱이고, 헛된  것 가지고 네가 참는 것이니까 일 년 넘어서 하루만 지내보자' 일 년 되면 딱  낙심하고 만다 말이오. 그거라.

 네가 그리 안 하고 그만 일 년까지 갈 것도 없고 끝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하신  것은 참되시다 인정하고 이대로 행하면 그것이, 당신이 능하신 분이요 완전하신  분이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인도하시는 것이니까 잘되리라 하는 것을 믿고,  믿는데, 잘 될 것을 믿는데 험악한 길을 닥쳐도 이것 조차도 잘될 그 원인으로서  이렇게 하신다 하는 그 믿는 그 믿음이 이제 정도에, 도수에 높은 것이라. 둘 만  하면 되는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칭찬한 것은 딴것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칭찬  받고, 참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자랑 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을 붙들고 모든 일 하신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딴것  없었습니다. 믿음 있었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믿으니' 하는 것은 이제 말한 두 가지를 말한 것인데,  우리는 행동도 있지만, 행동 그것이 귀하나 행동 그것이 그렇게 귀한 것  아닙니다. 행동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 행동보다는 자기 이성 비판 그것이 더  귀합니다. 이성 비판에 '이리이리 하니 내가 이래 해야 되겠다' 해서 속에 이성  비판이 들어서 행동을 해야 행동 가치가 생겨지지, 이성 비판 없이 꾀로도  얼마든지 행동할 수 있어요. 이 세상 것 바라 가지고도 뭐 정직한 체 진실한 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자기를 색깔 칠을 해서 요리 색깔 칠해  가지고 자랑하고 조리 색깔 칠을 해서 해 가지고 외모는 어떻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성 비판에서 '이래야 되겠다' 해서 하는 그게 가치가 있고, 그 이성  비판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 있습니다. 그 안에, 이성 비판도 마음에 있지만  마음이 있습니다. 그 안에 마음. 마음으로서 '내가 이래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으로 '이래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있어 가지고, 그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의 이성 비판이 복종 아니할 수 없고, 마음과 이성 비판이 하나 되니까 그  행동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게 가치 있고,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뭐이냐? 가치 있는 것은 본능입니다. 본능. 그러기에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본능에 가 가지고 회개하려 합니다. 본능에 가서, '내가  무슨 도적질 안 했지만 이 본능을 살펴 보니 내가 분명히 도적놈은 도적이다.

내가 분명히 내가 살인자는 살인자다. 분명히 내가 음행자는 음행자다. 내가 이  본능을 보니 이거 뭐 얼마든지 뻔뻔스럽게 할 수 있지만 본능을 살피니 음행자는  음행자이다'  그것보다도 더 한걸음 들어가서 양심입니다. 양심에 이제, 본능 위에 양심이  있습니다. 바로 양심. 본능은 바로 양심과 가깝게 있는 것입니다. 양심 그것은  자기에게 사정 두지 않습니다. 양심은 아무데도 매이지 않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똑똑히 살펴 본 사람은,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 편이  아닙니다. 양심은 자기 편이 아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 양심은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그런 기관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라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사자. 이것은, 왜? 자기 같으면  자기에게 대해서 다소 동정이 되고 편이 될 것인데, 자기 양심 같으면 자기에게  동정이 되고 편이 될 터인데 자기에 대해서 하나도 동정이나 그런 것이 없고 또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박하게나 그란 것이 없고, 뭐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조금도 판단하는 것이 다름이 없기 때문에 양심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본다 말이오. 그러나 양심은 인적 요소입니다.

 자기에게,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 양심이라면 성경 지식을 가지고 꼭 남게만 판단하려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이래서, 양심에서 우러난 그것이라야 가치 있고, 양심에서 우러난 그것이 가치  있어도, 그러면 대개 그것은 되어지지만 양심에서만 우러났다고 하면 그것도  역연 사망입니다.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증거했다 하는, 이제  중생된 영이 성령과 함께 자기에게 증거해서 양심이 거기에 지배를 받아, 양심이  지배를 받아 결정하고 보니까 본능이 받아 가지고, 양심과 본능이 이제 단합하고  보니까 거기에 마음이 따라가게 되고, 이것이 다 단합되니까 이성 판단이 그렇게  되고, 이성 판단이 그렇게 되고 보니까 행동은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수월하지  아니할래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마음에 붙들려서 예루살렘에서 나를 죽이려고 지금  죽임이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예루살렘에 안 갈 수 없다. 이 마음에 매여서 나는  사지로 나는 끌려가게 된다 양심이라는 것은 그것인데, 이제 거기에서 나와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 자기 행동에서 회개하려고 거기에서  달려드는 사람, 골만 빠지지 저는 안 됩러다 골만 빠지지 안 돼. 또  하나님께서도 이제 말한 그 위에 그것을 행동으로 받습니다. 겉으머리 이목 구비  수족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 행동을 행동으로 보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행동으로 보는 하나님인 줄 너희는 알아라, 이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행동에서 고치려고 하는 것보다, 그것보다 그 안에 들어 가서 이성  비판에서 보자. 따져 보자. 아, 따져 보니까 안 되겠구나. 해야 되겠다, 안 해야  되겠다 이성 비판에서 고치려고 애를 써. 이성 비판에서 고치려고 애를 쓰는  그것보다 마음에서, 마음에서 고쳐서 이런 마음은, 이 마음은 깨끗지 못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엉큼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더러운 마음이다. 마음에서  고치려고 애를 쓰면 좀 더 쉽고, 마음에서 고치려고 애를 쓰는 그것보다도  본능에서 고치려고, 본능에서 '아, 내게 본능적으로, 이것이 나도 생각지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이 물건을 보니까, 견물생심이라 물건을 보니까 마음이  왈짝 한다'  언제 신학교에-지금은 양복이 쌔 버렸지만 그때는 참 귀할 때인데-구제품  양복이 왔다 하니까, 양복이 왔는데 벌써 언제 봤는지 '양복 좋은 것 세벌  있더라' 뭐 온 신학생이 마음이 들신 들신해 가지고 이리 된다 말이오. 따져  보면 그럴 분들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런데 그게 본능이라. 보니까,  견물생심으로 물건 보니까 마음이 났다 그거요. 또 사람을 보니까 또 마음이  났다 그거요.

 본능에서 고치는, 거기에서 단속하는 것이 쉽고, 훨씬 쉽습니다. 그게 나가서  펴져 나가기 때문에, 사람도 그렇지 않소? 예를 들면 병균이, 처음에 병균을 한  병 넣어와 가지고 있는데, 병으로 있을 때는 그까짓 것 불에 넣어서 삶든지  굽든지 하면 그만 대번에 소독 되지만 병에 있는 병균을 마개를 척 열어 가지고  어북 한 되나 되는 물에 타 졌으면 좀 힘이 들고, 그게 벌써 공기 가운데 퍼져서  아무 동네에 지금 그 병균이 퍼졌다 하면 대단히 힘든다 말이오. 안에  조그라졌을 적에 그 때 소독하기가 쉽고 처리하기가 쉽다 이거요.

 이러니까, 본능에서 그것을 소멸하려 하면 쉽고 또 본능에서 소멸하는  그것보다도 양심에서 소멸하면 그것이 쉽습니다. 그것보다도 나는 중생된 영,  옛사람 새사람 이것, 새사람은 영에서 나온 것인데 옛사람은 이것은 아니기  때문에, 돌짝밭에 뿌려서 핍박과 환난이 일어나, 자기 아닌 옛사람 그놈  핍박이고 그놈 환난이지, 그놈은 죽으면 좋습니다. 그 핍박 환난으로 인해서  그놈이 죽어 버리면 속이 있는 사람이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고 나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첫째는 인정하는 데에 하나님의 큰 은총의 능력이 오고, 그  다음에는 행하는 자에게 옵니다. 그게 자꾸 순서가 있는데, 사람들은 알맹이야  어째 되었든지 사람들의 눈만 맞추어 가지고, 사람들의 귀만 점령하려고, 귀만  점령하고 눈만 점령하고, 아무리 귀에 무슨 소리를 해도 다 점령이 됩니까?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소? 귀에 대고 무슨 소리를 해도, 자기는 콩이라  이러는데 콩이라 할수록 듣는 사람은 '네가 거짓말한다. 팥이다.' 이래 본다  그거요. 또 '이러니까 아마 이럴 것이라' 했는데 또 그렇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외식하지 말고 지난번에 아브라함과 롯의 설교를 했는데 그만  그 한 사실만 기억하고 진실만 가져서 믿으면 아브라함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뭐 짜다라 많은 설교를, 고 하나만 자기가 지키면, 지키면 자기가  변화되고 자기가 변화되면 다 변화된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깨달은 것만큼 행함은 절로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과 행함은 꼭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가 행함이 없는 깨달음  그것은 아직까지 깨달을 대로 참말로 정말로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 본문 읽고 어제 재독하는 것을 들었으면 알리라  생각하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라, 그러면 포도원은 어떤 것이  포도원인가? 이 세상이 포도원입니다. 이 세상이 포도원이요, 또 이 포도원에는  포도나무 한 나무 뿐입니다. 여러 나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나무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이 포도나무가 하나 심겨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수많은 역사의 교인들이 다 거기에 속해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전소유, 전능력, 전노력 이것을 다 기울여서 무엇  하시는고 하니 포도나무 위해서 노력하십니다. 이 세 가지를 다 기울여서  포도나무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요걸 믿어야 돼요. 요것을 믿어야 돼. 믿는 데서  능력이 나오지, 인간은 믿으면, 믿으면 하나님과 접선되어 가지고 능력 나오고  믿음 떠나지면 그것 유명할수록 박살입니다. 아무 가치 없습니다.

 농부라는 것은, 농부가 포도나무 하나뿐인데, 포도원은 이 세상이 포도원이요,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요, 거기에 속한 택한 자들은 다 포도나무  가지인데,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가 되었으니까 농부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이를 가꾸신다 이랬는데,  그러면, 가꾸면, 하나님은 뭐 능치 못하심이 없고 무대가 넓고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아마 포도원에 포도나무도 가꾸시는 것 중에 하나로서 가꾸시는가 보다  이렇게 우리가 해석할 것이기 때문에 고 밑에는 해석을 해 놓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요것으로 다시 다른 각도로 해석을 해 놨습니다.

 자, 있는 소유 다, 또 능력 다, 활동 다 누가 누구 위해서 했습니까? 주님  배후에서 주님 위해서 했습니다. 주님 위해서 다 하셨고 계속 다 하셔서, 그러면  아버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되어 버렸어.

 어떻게 해 가지고 그와같이 되었느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사랑한다 이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신 고대로 예수님도 고  소유, 고 소유 그대로 다 가지고, 그 능력 그대로 다 가지고, 그 열심 다 가지고  아버지가 한 것처럼 우리 각자들에게 하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는데,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다 받느냐? 전 소유, 전능력, 전노력을 다 나  하나 잘되도록 기울이시는 이 은총을, 총애를, 사랑을, 총사랑을 내가 독점하게  되느냐 하는 그것을 해석해 놓은 것이오. 독점하게 되는 것은, 그 위에는 '열매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이를 더 깨끗케 하신다' 이래 말했고, 깨끗한  것이, 이미 일러 준 말로 깨끗하다 그말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본구원을 얻었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것같이' 전부를 다 기울여서 나를 위해서 하시는데,  하시는 그 총애를, 총은총을 내가 다 받게 되는 것이 그 계명을 지키는 그것으로  인해서 다 받게 되었다. 나도 너희들을 그렇게 사랑하니까 너희들도 내 사랑을  다 받으려면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들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면 내 계명은 뭐이냐? 내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 내 계명이다 그랬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하신 일은 이 사랑, 다시 말하면 우리를 대속 하신, 우리를  구속하신 이 일 외에 예수님이 하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도 이 일 위해서 났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순서  하나도 이 일을 위하지 않은 행동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지 않은  행동은 하나도 없었어.

 아버지는 순전히 예수님의 이 일만 하셨고, 이 일만 하도록 하셨는데, 오늘은  이 모든 만물, 모든 창조해 가지고 창조되어 있는 이 걸 뭐 하려고 하나님이  운영하고 계시는가? 이 일만 위해서 합니다. 다른 것 안 합니다. 하나님이 뭐  이렇게 무슨 공산주의 생각해 주고 민주주의 생각해 주고, 많은 민족들이 굶어  죽고 또 밥 먹고 그것 하나님이 상대하지 않습니다. 안 해요. 하나님을 이해를  못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목적 세우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예정했고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모릅니다. 쉬운 것 아니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하나님 사랑을 독점한다, 내 개인이 독점하려면 내 개인이  지키면 독점하고, 내 가정이 지키면 독점하고, 또 교회가 지키면 독점하고 뭐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지키면 지키는 대로 그대로 해 주마고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뭐이냐? 그 사랑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의 새생명. 여러분들이 뭐 수백번 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벗지 않으려고, 이미 입혀 주신 대속을 벗지 않는 그것이  뭐이냐? 벗지 않는 그것이, 벗지 않는 그것이 자기 구원되는 것이고 벗지 않는  그것이 제삼자의 구원이 됩니다.

 사울이, 사울이 억센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변론을 해 가지고 예수가 구주라고  아무리 떠들어 쌓아 봤자 사울을 당할 사람 없습니다. 언변 좋지 유식하지 누가  당하겠소? 그때 예수교인들은 시시하게 여겼는데, 다 무능자들이요 다 무식한  사람들이요 다 이런 사람들인데 사울이 꼼짝이나 합니까?  이랬지만 스데반이 돌쪼산 속에서 하는 그 행동에 사울은 이상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이 길만이 사는 길이요 가치 있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거기 대해서 절망이 생겼습니다. 생겨서 내친 바람에 나가기는  나가지만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게 뭐 인가?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과연  내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가?'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이 참 계시나  안 계시나 어디 계시나 이것도 실은 자기가 따져 보지 못했더라 그말이오. 전부  외식이라.

 이런 의문 가운데 있으면서 다메섹으로 가는 데에 나타나니까 다른 사람들은 못  봤지만 바울은 봤습니다. 바울은 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못 봤소. 바울은 소리를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이 무슨 멀건 날에 무슨 뇌성벽력이  나오나?' 이렇게 했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그만큼 거기에 대해서 벌써 고민 번민으로 심령이 밝아졌고 벌써 갈급하고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보여졌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제삼자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암만 전도를 한다고 해도 전도가 되는 것도 있지만 되어 봤자  외식이오. 되어서 교회 나와도 외식이라 말이오. 외식이고, 자기가 참으로  사죄를 벗지 않기 위해서-모두 다 세상 유익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전도하는 것  보니까 '전도하는데 돈이 많이 생기는가 보다 사람은 돈을 제일로 알고 이래  있는데, 돈이 절단나도 사죄를 벗지 않고, 직장이 절단나도 사죄를 벗지 않고,  가정이 깨져도 사죄를 벗지 않고 칭의를 벗지 않고 그 화친을 벗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도 벗지 않고 자기가 전멸 당해도 사형을 당해도 벗지 않을 때에 '야, 참  천국이 있든지 없든지 저 사람은 정말로 믿기는 믿는구나' 하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전하는 법입니다.

 그럴 때에 또 성령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 해서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책임지고 일을 해 주시니까 일이 되는 것입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과실 맺는 가지는 가꾸고 이를 깨끗케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깨끗케 하신다' 하나님이 이 전부를 다 자기 위해서 함이 되어지도록 이  은총을 받는 데에는 열매 맺는 것이라 다시 말하자면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라  그말이오.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라. 또 자기가 대속을 다른 사람에게 참 보여  주고 증거해 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또 그 대속을 보고 그 사람도 그  대속을 입게 되는 그런 것이 다 열매 맺는 것이라 그말이오. 첫째는 자기  대속이요, 자기 대속이 되면 그 다음에는 제삼자의 대속이 됩니다. 열매가 맺는  것이라.

 그 다음에는 계명을 지켜 사랑 안에 거한다 계명이 뭐고? '계명은 내가  너희에게 있는 것 다 기울여서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했다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오? 사랑했다는 그게,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 혼돈이 되어 가지고  세계가 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있는 것 전부 다 기울여서  너희의 대속을 이루었다 그말이오, 쉽게 말해서.

 이러니까,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이 말 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하도록 내 기쁨', 마귀 기쁨도 있고, 옛사람 기쁨도 있고,  죄악이 기뻐하는 기쁨도 있고, 주님의 기뻐하시는 기쁨도 있고 기쁨의 종류가 다  따로 있다 그거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으로 충만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러니까 요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믿으면 거기에 속한 것이오. 어째  들었든지 상관없소. 사람에게 들었든지 제가 보고 깨달았든지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진실되이 인정하면 되는데 인정하지 않고,  교역자가 제일 망하기 쉬운 것이 뭐이냐 하면 이 말씀을 들어다 말씀을 잘  손질을 합니다. 이 말씀을 잘 손질을 해 가지고 색깔 칠을, 붉은 것을 칠할  때에는 붉은 것을 칠하고 푸른 것을 칠할 때에는 푸른 것을 칠하고 또 다른  사학을 칠할 때에는 사학을 칠하고 또 자기 무슨 경험을 칠할 때는 경험을  칠하고 또 무슨 증거를 칠할 때에는 증거를 칠하고, 이래 색깔을 잘 칠해 가지고  내 놓으면 사람들은 좋다고 보고 '아, 좋다' 값을 내고 삽니다. 이것 팔아먹는  이런 것으로 일생동안 지내는 사람은 그 다음부터 절대로 제 자신이나 교회는  부흥은 안 됩니다. 그것으로 그만 끝나고 맙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행함을 낳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모든 것 독점하기 쉽소. 그러면, 지금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내가, 벗기를 누가 벗으라 합니까? 벗으라는 것이 세상  세력이 벗으라 하요, 세상 세력이 세상 세력이 벗으라 하는데, 세상 세력이  벗으라 하는데 벗으라는 세상 세력보다, 그 대속을 벗지 아니하면 획 하나도  가감이 없는 하나님의 총애, 하나님의 총 역사, 총 은총 이 전부를 자기가 입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벗으라고 하는 그의 위협에 떨어져 가지고 벗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되이 인정한다면 벗을 리는 천부당 만부당이오. 있을 수 없습니다. 왜?  나한테 벗으라고 말한 그까짓 것은 개미새끼 같고, 암만 나라가 그래도 세계가  그래도 개미새끼 같고 네가 그것을 안 벗으면 내가 네 증언자 되어 준다 하는  그분은 자존하신 분이요 지극히 크신 분 모든 것을 다 주권하신 그분이십니다.

그분을 믿으면 그런 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것이 실행을 낳을 수 있는 인정이 아니면  거짓부리오. 모두 가짜입니다. 실행을 낳을 수 있는 그런 인정이라면 그 인정은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이 포도나무 비유 이 비유는 또 아주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롯의 길 그  길보다도 더 적극성 있고 더 중요합니다. 믿으면 되어져요. 믿으면 되어져. 안  믿으면 헛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뭐 딴것 없어. 아브라함이 뭐 행동을 많이  했습니까? 아니오. 인정하는 그걸 의로 여겼습니다. 또 행동도 인정 때문에 그  행동이 나왔지 인정 안 하면 그런 행동이 나옵니까?  그러니까 행동한다고 인정 요것보다도 그 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인정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외식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기를 시험해서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자기가 스스로  확정을 지워야 되지 누가 그 사람 만만하게 말해 주겠소? 말해 주면 다, 말해 줘  가지고 진주는 밟고 물러 안 오는, 수성같은 수성으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별로 없어. 그러기 때문에 실은 자기에게 생명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이 깨닫게 해 줘야 되지 사람이 깨닫게 해 주면 안 되기 때문에 말 안 해  줍니다. 그것은 냅두고 말해. 그것은 냅두고 다음 둘째 것이나 셋째 것이나 넷째  것이나 그런 것 말해 주지 첫째 것은 잘 말 안해 줍니다. 말해 주면 억울하다고  시비할 건데 말해 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요런 생활을 해서, 그저 공연히 다른 사람이 회개하고  그러니까 저도 다 된 줄 알고 그렇게 하기 쉬운데, 회개한 사람에게는 뭐 남북  전쟁이나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야 되겠고, 또 공연히 참으로 회개도 아니 하고, 눈에 보이는  껍데기까지도 그래 놓고 자꾸 속이고 가리우고 덮고 눈을 속이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 것 다 정리 안 하면 안 됩니다. 더러운 것을 정리 안 하면 하나님과  밀접해지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 그것이면 다가 아니라. 행동 그까짓  것은 껍데기 중에 껍데기요. 그 안에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인간도 그렇습니다. 행동 보고 살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무슨 행동을 이리 암만 한다 해도 '그래. 네가 그 행동을 하는 속에는 어떤  도적이 들어 가지고 네가 그와 같이 하고 있다. 그 행동은 목적이 무엇이다.

네가 네 꾀에 속았지 그 꾀에 넘어 가지는 않는다.' 사람도 그러는데, 그러기에  거기서 가져오는 무슨 대접 하려 해도 그 사람이 대접하는 그것은 안 먹습니다.

사용을 안 합니다. 왜? 속에 독소가 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가치가 적어도  진정코 자기가, 상대방을 아끼기 전에야 무슨 대접을 합니까? 아끼고 위하고  하는 그것이 없이 껍데기로 '이것은 아마 물건 좋은 것이다' 하는, 물건이 좋고  이러니까 뭐 좋아하겠지 하는 그것은 벌써 무시하는 소리입니다. 유물주의요.

무시하는 소리.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없는 행동은 우리도 취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며 취하겠습니까? 스스로 속지 맙시다.

 우리 교역자들이 여기, 입각해서 살면 막 능력이 나오고 나올 건데  외식자들이라 말이오. 없다 그말이오. 욕심은 전부 땅의 욕심이오. 욕심은 땅의  욕심이고, 언제든지 시몬 모양으로 요 부분이나 저 부분이나 나오는 것은  자기입니다. 자기 나타내요. 나타내면 얼마나 나타낼 것이며,  암만 교회가 크다 해도 이 사회만 못합니다. 크기는. 사회가 아무리 커도  불사루어질 것이라고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외형 그것이 무슨, 가치가  없는 것이오. 하나님 그분과 이래 해서, 그분이 인정하는 지금 그게 문제이고  그게 가치 있지 그 외에야 뭐 세계가 다 움직이면 무슨 가치 있소? 어리석지  말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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