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중요성

 

1986. 6. 20. 금새벽

 

본문:사도행전 1장 4절∼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난 밤에 양성원 학생들은 김해 묘지에 가 가지고 철야하고 모두 그래 온 줄 압니다. 여러분들이 밤에 산에 가 가지고 기도를 하면서 이 말씀을 잘 새김질 했으면 뭐 여러번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자기가 기도하는 가운데서 ‘다 필연성이로구나’ 필연성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뭣을 억지로 힘들여서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 거기서 확신이 생길 것이고, 이 길 외에는 구원 얻는 길이 없다, 이 길 외에는 구원을 이루는 길이 없다 이렇게 알게 될 것인데, 또 그라면 힘이 생겨지고 변화가 올 것인데 그런 것 없이 그저 이래 듣고 지식적으로만 가지는 거게서 다 문제가 생겨지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 목사님이 테이프를 갖다 줘서 그 테이프를 제가 두 개가 왔는데 두 개를 다 들었습니다. 또 한 개는 재벌 들었습니다. 너무, 성경은 한 권이지마는서도 사람은, 믿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 각각 다릅니다. 또 악령이 수없이 많은 그 숫자의 악령이 역사하는데 악령의 그 미혹도 참 셀 수 없을 만치 미혹의 수가 많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많은 주석들이, 각각 다른 많은 주석들이 나왔고, 또 교리와 신조도 그 종류가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어느 것이 맞든지 하나만 맞지 둘이 맞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둘이 아니고 하나지 뭐 둘 셋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만 되는 그 진리가 어떤 것이냐 하는 그것이 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예사롭게 다룰 수 없는 것은 내 금생과 내세의 영원이 고 깨닫는 거기에 다 달려 있습니다. 깨닫는 고거로써 금생과 내세가 다 실패 될 수 있고 또 자기와 다른 사람까지를 다 실패케 할 수 있고, 바른 깨달음에서 금생도 내세도 자기도 다른 사람도 고 구원을 바로 이루어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요것이 뭐 자기 돈보다 중요하고, 또 자기 몸보다 중요하고, 자기 생명보다 중요합니다.

왜 이거 잘못 돼 놓으면 그거 뭐 가져 봤자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다 세상에서 나지 안한 게 낫지 세상 산다는 것은 영원한 불행을 마련하고 멸망을 마련하기 때문에 참 가룟 유다와같이 나지 안한 것이 좋을 뻔 했다 할 만치 기본구원은 얻지마는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그렇게 비참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객관 역사로 되는 기본구원은 변동이 없지마는서도 심신의 구원인 이 건설구원은 그렇게 비참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진리라도 바로 알면 바로 안 그것이 힘이 됩니다. 한 진리를 바로 알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또 내가 그 진리에 통치를 받고, 또 그 진리가 나를 돕기 때문에 하나 바로 안 고 진리로 인해서 다른 모든 진리들도 바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 한 진리가 잘못돼 놓으면,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잘못 알아 놓으면 그것이 들어서 나를 자꾸 잘못되게 만듭니다.

이래서, 이단자 된 것이 보면은 뭐 여러 가지가 틀려 가지고 이단자 된 게아니고 하나가 틀려 가지고 이단자 됩니다. 왜 하나 틀렸다고 이단자가 되는가? 하나 틀린 그것도 그만 가지고 또 다른 것 가지면 될 터인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 평소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지마는 마지막에 사람이 극단에 이릅니다. 마지막에 종극이라 하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극단이 있는데 극단에 가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을 가질 수 없고 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를 가지게 되는데, 극단에 하나를 가지게 되는 그것이 다 깨달은 것은 실행을 통해서 되기 때문에, 실행 단계에, 사람들이 책상 위에서 논리적으로 연구한 그 발명가가 논리 연구를 해 가지고는 그다음에는 실지로 실험하는 실험 연구를 하면 논리 연구가 맞은 것도 있고 틀린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깨달음을 실행하는 것이 마치 실험 연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은 것은 또 하나님께서 고 현실을 주셨기 때문에 그 현실에서 깨달은 것을 그것을 자기가 이래 깨달으나 저래 깨달으나 그대로 실행하게 됩니다.

실행하게 되는데 실행하게 될 때에 그때에 자기는 고 쉬운 것을 택해서 실행하기도 쉽고 또 그게 어렵다 할지라도 안 대로 실행을 합니다. 안 대로 실행을 하면은 그 실행할 뿐만 아니라 실행한 것만침 그 사람이 돼 버립니다.

안 대로 실행하면 실행하고 난 다음에는 실행한 것만침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되는 것은 마음도 그것의 것이 돼 버렸고, 몸의 기능도 그만침 그것의 것이 됐기 때문에 그것이 자꾸 내게서 주장을 합니다.

주장을 하니까 하나 잘못된 그게 주장하니까 모든 자기 생각이나 깨달음을 거게 맞출라고서 그리 집중을 시킵니다. 이러기 때문에 고게 맞춰서 일치할라고 애를 쓰고, 또 마귀는 무슨 역사를 하느냐 하면은 삐뚤어진 게 있으면 ‘네가 이거 지금 다른 사람들이 삐뚤어졌다 하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주장성, 또 그 자주성이라 하는 그것, 또 원죄라는 자기 중심인 그 원죄의 악성이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나 그게 마귀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 마귀란 놈이 ‘네가 이걸 주장을 하는데 이 주장을 지금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니까 네가 이 틀렸으면 어찌 되느냐? 그러니까 이거 틀리지 안했다는 것을 네가 증거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러니까 그 틀린 것을 안 틀렸다고 변증하기 위해 가지고서 모든 성경을 연구할 때에 자기 틀린 그것이 자기 주관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중심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를 꺾지 않고 자기를 멸시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그렇게 꺾어지고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꾸 거게 대해서 변증을 하고 변호할 수 있는 그 성구를 자꾸 택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꾸 그거 변호를 합니다.

변호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하나 잘못 깨달았지마는 잘못 깨달은 그것을 변할라고 또 한 성구를 보고 거기다가 들어붙여서 이 성구가 이렇게 증거한다 이래 가지고 자꾸 그것 변호하기 위해서 모든 성구를 자꾸 적응을 시켜 버립니다.

적응을 시키면 나중에 가서는 한 성구 잘못 깨달았는데 두 성구가 일치되고 세 성구가 일치되고 잘못된 것으로 일치돼서 자꾸 일치되다 보니까 결국은 그 사람이 고것을 자기가 독특한 자기의 깨달음으로 가지고 있으면은 고 깨달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모든 깨달음이 거게 집합돼 버립니다. 집합해서 고것을 긍정하도록 고렇게 자꾸 성경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가서는 하나 잘못 깨달은 것이 전성경 잘못 깨달음이 돼 가지고서 이단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단자되는 것은 그것은 뭐 많은 게 아니라 하나가 그래 가지고서 나중에 가서는, 그 하나 그릇된 것을 고것을 그만 잘 됐든지 잘못 됐든지 이래 판단해 가지고서 자기를 내놓고 옳으냐 그르냐 이래 찾으면은 고것이, 자기를 내놓고 이 사건이나 이 깨달음이 옳으냐 그르냐 모든 사람들의 깨달음과 비교해 가지고서 이렇게 그걸 찾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양심.

자기에게 가깝지도 안하고 남에게 가깝지도 안하고 아주 그거는 다시 별 개체로서 그래 독립성을 가지고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을 정상적인 양심이라 이라는데, 고 양심도 자기를 옹호하는 그런 양심이 돼 가지고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고 양심이 자기에게 화인을 맞았습니다. 자기 양심이라. 자기 양심이라 하는 화인이 돼 버립니다.

양심이 화인 맞는다 말은, 화인이라 말은 그 화인의 것이라 그말이오. 도장을 무슨 계약에 도장을 꽉 찍었으면 그 계약은 도장 찍은 그 사람의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책임지는 거라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것은 벌써 그 양심이 자기 양심이 됐으면 그 양심은 언제든지 자기 옹호, 자기 위주, 자기를 위해서 변호하고 자기를 중심해 가지고 모든 비판과 평가를 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그것이 화인 맞은 양심이라 이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 원죄를 벗는다는 것이 쉽지 않소. 원죄가 그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것이 원죄인데 그것을 벗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깨닫는데 잘못 깨달은 것을 그 원죄가 들어서 잘못 깨닫게 됐는데 하나 잘못 깨달았으면 그다음에 모든 것을 다 잘못 깨달은 데다가 들이붙여 가져서 그것을 두둔해 가지고 잘못 깨달은 그게 옳다 하는 그걸 확고하게 세우게 됩니다.

세우는데 그때에, 모든 성구를 거기다가 들어붙여 가지고서 잘못 깨달은 이것을 바르다고 변증을 하고 이것을 주장을 하고 이것을 굳게 세우는 그것은 누가 그러느냐? 자기가 그렇게 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데 자기 속에 그라면 뭣이 그렇게 합니까? 양심이 들어서 그렇게 합니다. 또 자기 중심인 원죄가 들어서 그렇게 합니다.

이러기에, 하나 잘못 깨달으면 고것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잘못 깨닫게 되기 때문에 벌써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교리와 신조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 그러면 벌써 교리라 하면은 자기 깨달음이 교리이지마는서도 교리라는 것은 벌써 이 역사성을 가지고 사회성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깨닫는데 자기 깨달음을 다른 사람의 깨달은 거와 연합을 시켜 가지고서 자기 깨달음이 다른 사람의 깨달음과 일치된다, 또 역사에도 이리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자꾸 역사도 꿰어 맞추고, 또 이 사회는 저만 깨달은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래 같이 깨달았다, 또 이것은 이 시대만 깨달은 게 아니라 전 시대도 저 전 시대도 여러 세대로 이렇게 깨달았다, 거기다가 자기 잘못 깨달은 것이 벌써 사회적이며 역사적으로 이렇게 되어진다고 하면은 벌써 그거는 잘못 깨달은 것이 견고히 섰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나중에 가서 잘못 깨달은 것을, 잘못 깨달았는데 자기 주장하기 위해서 잘못된 줄 알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고 그게 참 바로 됐다고 자기가 여기기 때문에 그걸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자는 틀린 줄 알고 틀린 것을 말하는 사람은 절대 이단자가 아닙니다, 그거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지 이단자가 아니오. 그는 잘못된 것을 잘못된 줄 모르고 그것이 바로 된 줄 알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 이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사람에게 뭐이든지 그 속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은 그놈이 들어서 나중에 가서 그 고장을 냅니다. 우리 신체에도 다 잘 됐어도 뭐 암이라는 그 혹 조그만한 것 하나 있으면 고게 들어서 말썽 일으켜 가지고 고게 들어 가지고 자꾸 거기서 새끼치고 새끼쳐 가지고 나중에는 전신을 망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리도 꼭 그와 같습니다.

요새는 늘 말하기를 이 깨달음이라 하는 이것이 중요하다.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게 깨달음인가? 이 신구약 성경을 보고 성경대로 아는 것은 그것이 깨달음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고 나는 여게 대해서 어떻게 하나,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해당되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성경에 대해서 자기 나아갈 길, 걸어갈 길을 고것을 깨달은 것이 고것이 깨달음입니다. 고것이 교리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고, 성경은 성경대로 내비두는 거는 자기는 상관없습니다.

성경을 이렇다 저렇다 무슨 소리 한다 해도 나는 이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고것을 자기가, 나는 어떻게 행해야 되며, 어떻게 믿어야 되며, 또 어떻게 다른 사람을 지도해야 되느냐 자기가 고게 대해서 행할 바를 깨달은 고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인 만인이 깨달은 그것이 자기에게 상관없고 자기가 어떻게 깨달았느냐 하는 그대로 자기는 걸어가야 되고, 그대로 행동해야 되기 때문에 고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칭찬을 받겠느냐 정죄 받겠느냐 하는 고것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깨달음을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것을 자기 소유보다 더 중하게, 자기 몸보다 더 중하게, 자기 생명보다 더 중하게, 이게 바로 깨달았느냐 잘못 깨달았느냐 하는 여게 대한 이 가치를 자기 소유보다, 몸보다, 생명보다 가치를 더 높이 두고 전 가치를 여게다가 두는 그 사람이 되어져야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저 아무나따나 이래도 저래도 되고, 또 가르치는 사람도 이래도 저래도 많은 사람에게 인기만 끌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아주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6장에, 도의 초보를 버리고 거게 여섯 가지를 말했는데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이래서, 영원한 심판이라 하는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심판이라는 그 심판은 우리가 다시 그거 버리고 다른 터를, 다른 신앙 기초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행위 구원을 이루는 기초다.

‘다시 닦지 말고’ 하는 것은 그 기초를 버리지 말고 그 기초 위에다가 세워라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 기초는 그것이 버려야 될 기초다. 중요하기는 중요하지만 그거 버리고 온전한 데 나아가라’ 해서 그 기초를 다 버릴 기초라고, 그 기초는 다 버릴 것이고 이제 딴 기초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해서 깨달은 사람들도 있고, 바로 그것이 영원한 기초다. 그 기초를 다른 기초 닦지 말고 그 기초 위에다가 내나 그 기초대로 세워라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거냐 저거냐 하는 데에서 그 사람의 생활은 이리 되고 저리 되고 되는 것입니다.

그 기초적이니까, 자기의 신앙의 전 생활은 그 토대 위에 선다 그거요. 토대 위에 서기 때문에 그거 이래 깨닫느냐 저래 깨닫는 데에서 멸망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 중대한 일이지마는서도 이것을 그렇게 중대하게 평가하지를 아니합니다.

올바른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자기의 명예만침 평가하고, 자기 지혜만침 평가하고, 인기 끄는 인기만침 평가하고, 자기의 무슨 돈만치 평가하는 사람은 이 진리의 길을 못 걷습니다.

이 바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보다, 명예 지위 권세보다, 자기 몸뚱이보다, 자기 생명보다 높이 평가해서 이 이상 평가할 것이 없다고, 자기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는 이 깨달음이 이렇게 중요한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이걸 다루어야 되는데 이거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여게 대해서 아무 가치성을 두지 안하기 때문에 암만 말해도 안 된다 말이오.

오늘 아침에도 이 성구를 읽으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아이구 또 그 성구 읽는다’ 아마 취미가 없었을 것이고 재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 설교는 한 번 듣고 두 번 들으면 안 들을라 하기 때문에 설교를 두 번하지 말고 한 번 하고 난 다음에는 또 다른 설교해야 되고 이래야 된다, 혹 그뒤라도 어찌 돼도 본문이나 같고 제목이나 같지 그 설교는 될 수 있는 대로 본문과 제목은 두 번 쓸지라도 그 설교는 두 번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요새 일반 다 교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또 교역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그렇게 원하고 있고 교역자들도 그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반대인 것이 한 교리, 바로 한 교리를 바로 깨달으면 고 교리를 자기 생명보다도 귀중하게 한 교리를 바로 깨달으면 그 교리는 놓지 안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성경을 자기가 깨달을 때에 이 깨달음이 강하게 견고히 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마찰이, 이와 마찰되면은 부득이 이것을 버리지 안하고 견고히 생명같이 이렇게 생명보다 귀하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이걸 버리지 안할라 하면은 자기 깨달음이 이와 일치되지 안하면은 그게 깨지게 됩니다, 이게 강하니까. 깨지게 되니까 바로 깨달으면 모든 것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 그것이 그 필연성이요 일반성입니다.

또 하나 잘못 깨달아서, 그 깨달은 것을 뭐 시시하게 보면 그렇지만 그것을 자기 생명보다 귀중하게 깨닫는 것, 자기 생명보다 더 가치를 높이 삼아서 귀중하게 그렇게 견고히 깨닫고 있는 그 깨닫고 있는 것이 바른 깨달음이라고 하면은 고 하나 가지고서 온 성경은 다 바로 깨달아 나갈 수가 있습니다. 또 고거 하나 그걸 자기가 생명적으로 깨닫는 뭣이 하나 그것이 삐뚤어져 가지고 있다고 하면은 그것은 모든 깨달음이 다 삐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호주에 있는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 와서 선교할 때에 그 환등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환등이라는 것은 사진을 박아 가지고서 그 환등에다가 비추면은 그 실물만침 사람도 커다랗게 그렇게 그 확대해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 가지고서 이 성경에 있는 것을 환등을 해 가지고서 사람들에게 실감 있게 할라고 그렇게 해서 환등 그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또, 환등을 그렇게 가지지 못한 분들은 이 칠판같이 이렇게 세워놓고, 거게다 여기 뭣을 이래 들어붙이면 잘 들어붙는 이런 무슨 뭐 전같은 것, 무슨 우단 같은 것 그런 걸 부풀스럼한 것을 이래 놓고서 거게다가 뭘 사진을 붙이면 떡떡 들어붙도록 하는 그런 것 놓고서 이 사진 저 사진 이렇게 거기다가서 붙여 가면서 해석을 합니다.

베드로라 하면은 베드로 이렇게 사진을 붙여 놓고서 그 해석을 하고 또 저렇게 무슨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 사진을 붙혀 놓고서 그렇게 해석을 하는 그런 사진 설교를 많이 했고 환등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모두 다 뭐이든지 이 그림을 그려 가지고, 아따 무슨, 내가 그때 여게 ○○○ 교회 ○○○목사님이 그걸 가르친다 해서, 벧엘 그 성경 연구법이라 하는 것 그런 것도 전부 막 그림을 그려 가지고 이래 합니다. 그러면 그 그림이 그때에 실상의 그림이냐, 그런 게 아니고 자기네들 추상하는 대로 그립니다.

추상하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 하는 것을 그려 가지고서 성내게 그려 가지고 딴 그림 되고, 웃게 그려 가지고 딴 그림 되고, 또 근심하게 그려 가지고 딴 그림 되고 내나 그 사람 그림이지마는 그 사람이 웃는 걸 그릴 수도 있고 성낸 걸 그릴 수 있고 또 근심하는 걸 그릴 수도 있고 그렇게 그 그리는 사람 자기의 그 주관의 추상대로 그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실물도 아니라 그말이오.

이걸 가지고서 자꾸 이렇게 해서 가르치는데 그 가르치는 것을 그것을 누구든지 우리 한국에서는 반대한 사람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알기로는 제가 반대를 했습니다. 제가 반대를 해서 제가 ○○ 고등 성경학교 다닐 때에, 그때 가르치요.

강사로 다닐 때에 그때 그것을 반대를 해서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을 가르칠 때에 예수님은 당신이 글씨 하나도 안 남길려고 글을 땅에다 썼다가 뭉케 버리고 이렇게 흔적도 안 났는데 예수님의 필적이 하나 남았다면은 필적이라면 지금 돈도 많을 것이고 굉장한 그뭐 보물이라고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 필적도 하나 안 남겼습니다. 또 자기 당신의 음성을 하나 녹음했거나 그런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 가운데에 예수님은 이러하신 분이라 이렇게 성경 보고, 성경 서적에는 성경 가운데 보니까 예수는 이런 분이라 그 소개하고, 그보다는 성경 가운데에 성령이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 이렇게 소개해 주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따라서 이렇게 가도록 이렇게 하셨지 그 무슨 뭐 필적 하나도, 환상 하나도, 초상 하나도 그렇게 냅두지를 안했습니다.

안 한 것은 왜 그러냐? 그거 하면은 그만 사람들이 그리 집중해 가지고서 모든 마음과 신경과 정신들이 그리 집중해 가지고 거기 가서 다 스톱해 버리고 거기 가서 다 집결하고 집합하고 집중돼 버리고 그것을 넘어서 가는 그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빨리 인도하는 것 같아서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마는서도 그 고개를 넘지 못하고 그것을 초월해서 그 너머에ㅡ거게 있는 거는 아니고ㅡ주님은 거게 있기 때문에 그 넘어서 있는데 거게까지 인도하기는 쉽지마는서도 여게는 아니니까 여게서 한 걸음 더 가야 된다 하는 그것을 인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의 구원이 거게다가 다 중단돼 버리고 말기 때문에 이거 성화 놀음은 틀렸다 이것을 주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주장할 때는 다른 사람들 욕을 했지마는서도 아마 차차차차 그 주장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성화, 이 성화라 하는 그 성화 놀음이 적어서 뭐 그때는 뭐이든지 성화가 제일이고, 또 거게다가 달력 같은 것도 다 성화를 해 가지고서 이렇게 하고 천주교는 그걸 성화를 그려 놓고 거기다가 아침마다 전부 절 세 번씩 합니다. 한 성화에, 제가 가 봤는데 절 세 번 딱 한 쪽 무릎을 꿇고 한 쪽 무릎은 요리 옆으로 딱 요래 서 가지고서 거기다가 대고서 요래 요래 요래 세 번하고 또 요리 또 가는 걸 봤습니다.ㅡ나는 머리로 흉내 내지는 안 합니다. 저는 신사참배한 것을 말할 때도 손가락으로 내가 이렇게 이랬지 내 머리로 그런 흉내 내지는 안했습니다. 이제까지 흉내 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라다가 보니까 사람들이, 베드로를 사모하고 마리아의 동상을 보고 ‘마리아는 저래’ 마리아의 동상 앞에서 서 가지고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마리아의 동상까지는 인도하는 데에 사람들이 잘 따라가지마는서도 동상 그거는 필요가 없다 말이오.

없는 것인데 동상을 넘어서 성경 가운데에 마리아는 어떤 신앙을 가졌으며, 어떤 사상을 가졌으며, 어떤 인격을 가졌으며, 어떤 행위를 가졌으며, 어떤 공적을 가졌는가 거게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만 거게 가서 중단되고 만다 그거야.

그래서 그 성화 놀음을 많이 반대했는데, 이라니까 내가 요새 보니까 우리 교회에 잘 안 와 그런지 다른 데는 몰라도 아마 이거 성화 운동 이것이 시짐하게 이것이 그렇게 많지, 그렇게 필요하게, 사람들이 그때는 처음에는 아주 예수님인 줄 알고 모두 어북 잘 믿는 장로들도 집사들도 이라면 예수님은 낯이 기단하고 멋지게 수염이 굴레수염 나고 아주 미남으로 이렇게 생겨졌다 이랬는데 또 요새는 또 언제 한번 보니까 예수님을 또 이상한 얼굴로 저거 마음대로 이래 그려 이래 하고 있다 말이오.

그런 것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데에 방해가 된다 이렇게 한 것이 그때는 이해가 안 됐지마는서도 자기가 참으로 예수님을 만날라고 이렇게 할 때에 그때에 자꾸 그것이 나타나 가지고서 그런 예수로 돼 버리고 말고 그것을 초월해서 예수님은 신구약 성경에 가르치는, 신구약 성경은 똑똑히 보면은 예수님의 사진판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나타내 놓고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이오. 또 예수님을 더 똑똑히 나타내고 있는 것은 영감이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처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고 하는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고서 그라고 난 다음에 창조를 했는데. 그때부터의 예수님, 또 도성인신, 신인 양성 일위, 부활, 이 예수님,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그 예수님을 찾을라고 할 때에 예수님의 이 초상이라고 하는 이 초상이 방해한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고, 이거는 방해물이다, 이거는 예수님을 찾는 데 성경 가운데 있는, 성경이 나에게 알려 주는 예수님, 또 영감이 나에게 알려 주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을 찾는 데에는 이 성화라는 이것이 큰 방해물이 된다 하는 그것을 본인이 찾을라고 애쓴 사람이면 깨달았을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모두 다 그게 좋은 줄 알고 그거 유익된 줄 알고 저 호주에 있는 선교사들은 전부 그걸 다 사용을 했습니다. 제가 그것 봤는데 그 칠판 붙혀 놓고 이래 떡 사진 하나 떡 붙여 놓고 또 해석하고 또 붙여 놓고 해석하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어째 보면 잘 증거해서 잘 알려 주는 것 같지마는서도 진짜 예수님의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는 데는 그것이 가로막고 방해돼 버리고 맙니다. 그다음에를 넘어가지 못한다 그말이오.

여게 저 ○장로라 하는 분 그때 왔는데 그분이 저를 따라다니면서, 여기 와서 고아원을 몇을 세우고 뭐 이래 가지고서 뭐 지금 부자라는 말 있는데 내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죽었고, 따라다니면서 그라는데 나한테 한 번 와서ㅡ그분이 열심히 따라다닙니다.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그래 막 기뻐하고 즐거워해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참 이제는 내가 예수님의 피를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보니까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이래 가지고 피를 뚝뚝 흘리는데 내가 그 피를 받아 먹었습니다.’ 이라면서 와서 말해요.

인제, 그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 줘도 자기가 그거 벌써 고것이 인식이 되고 딱 그래 봤기 때문에 그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그 피를 한 방울 두 방울 받아 먹어야 이제 기도 한 것 같이 그리 안 하면 기도한 것 같지 않고 이래서, 그뭐 그 주장을 해서, 그게 틀렸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그걸 아마 그 사람이 내 앞에서는 그렇다고 해도 그만 좀 기도하다가 힘을 내 가지고 보면, 옆에서 보면 열심을 내 가지고 할 때에는 나중에 가서 물어 보면은 피 받아 먹었다 말이오. 그 환상을 봐야 힘이 나고 이렇지 그전에는 힘이 안 나. 그게 전부 악령이 들어서 사람을 미혹시켜 가지고서 그와같이 하는 것이지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것도 지금 오늘 아침에도 이 성구 하지만 자꾸 이 성구에 대한 해석을 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이라다 보니까 다른 자꾸 서론 준비 이거 말하다 보니까 못 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바 성령 세례를 받으라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고 실상으로 자기의 복음으로 받아서 참 여게 대해서는 생명을 바칠 수 있도록 요렇게 깨닫고 요 교리를 굳게 잡았다고 하면 요만하면 다른 것 다 돼요. 다 돼 가요.

이런데, 자기가 기도 가운데서, 명상 가운데서,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요렇게 확고 부동한 교리로 우리가 잡아야 되는데 그렇게 잡지 안하고 있기 때문에 암만 해야 껍데기뿐이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 말은 사람이 무엇이든지 영원한 심판을 바라봐야 되요. 이 교리와 영원한 심판을 연결시켜 가지고서 영원한 심판에 이 교리만이 선다. 이 교리를 나는 의지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이 교리가 이렇기 때문에 나는 요대로 나는 했습니다 하고서 요 교리가 나를 변호해 주고 요 교리가 영원한 심판에서 나를 변증해 주고, 영원한 심판에서 나를 구출하고, 영원한 심판을 이기고 남음이 있게 요 교리가 해 준다 요렇게 심판과 연결성을 가지지 안한 깨달음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말이요.

이러니까, 요새는 보면 모든 교리라 하는 것이 심판에는 상관도 없습니다. 전부 현실에 인기주의요 모든 사람들이 다 주관으로 되어 있는 그 주관주의,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은 주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사람들 다 주관 있지 않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의 주관, 그 주관을 좋게 하고 그 주관의 소원, 그 주관의 소원 성취, 그 주관이 기분 좋게, 그 주관을 맞춰서, 그 주관의 뜻에 맞으니까 그 주관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이 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주관을 부흥시키는, 이러니까, 사람들은 얼마나 좋아해서 **겠습니까? 이것은 옛날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두개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사두개교가 있고 바리새교가 있었는데 사두개교는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서 예수 믿는 것이 사두개교였었습니다.

그러기에, 이거 참 교리를 이거 바로 깨달아야 되는 건데 이거 못 깨달으면 안 돼.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뭐, 할 것 없이 요것을 좀 잡으라고요. 잡는 데는 누구 가르치는 것 가지고 안 돼. 가르치는 거 안 돼. 자기가 실천하면 알게 돼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건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기 때문에 그 박해를 피해서 떠나는 것인데 박해는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느냐? 박해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공로만 내놓으면은 그 자리에서도 그만 환영이지 박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지금 입어야 됩니까 입고 있습니까? 입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요. 녜, 이거는 다 입고 있다는 것을 이제 요거는 견고히 요거 잡았지만 어느 정도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에 만일 수만 명이 모인 데 가 가지고서 뭐 수십만 명 모인 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지금 우리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가 입었습니까 우리가 힘을 써 가지고 입어야 됩니까 하면은 거게 대해서 바른 그 교리를 가지지 못하고 입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아마 많을 것입니다. 얼추 그럴 것입니다.

제가 그때 그 ○○ 신학교 때에 어떤 선교사가 그때 와 가지고서 사경회를 하는데 그때 묻기를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구원을 앞으로 지금 우리가 받아야 됩니까 어찌 됩니까?’ 이라니까, ‘나는 아직까지도 구원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내가 구원 받도록 해 줄 터이니까 구원 받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 원하는 사람은 전부 손을 드십시요’ 하니까 그때에 내가 보니까 두 사람인가 세 사람인가 손 안 들고 나머지기는 손 다 듭디다. ○○ 고등 성경학교니까 ○○신학교 학생들 다 거기 있고 다 있을 때요.

있을 때인데 저는 그때 ○○ 고등 성경학교에 그때 강사로 가서 그때 제가 유다서를 가르쳤습니다. 가르쳤었는데 언제, 한번 말하기는 나는 아주 초면인데 그 사람이 ‘유다서 그때 강의 받은 그 유다서 가지고 나는 지금 목회하고 있습니다.’ 고것만 가지고도 목회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때 그 사람이 구원 받도록 해 주겠다 하니까 전부 손 다 들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우리가 구원은, 구원은 벌써 받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받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가 입고 있는데 입고 있는 것을 마귀가 모르게, 못 입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또 입고 있는 이 대속을 지금 앞으로 열심히 입으라 이렇게 말하고, 이거 입는 것 아니오. 우리가, 대속을 벗지 안할라고 애쓰는 것이지 입을라고 애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그라면 그 여섯 가지요 세 가지인데, 노를 푼 것이 세 가지요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세 가지인데 한 가지는 세 가지 노를 푼 고것이 기뻐하시는 것 중에 하나고, 또 둘 기뻐하시는 것 요래서 기뻐하시는 것 세 가지이고 노를 푼 것 세 가지인데 나중에 그걸 한테 합하면은 몇 가지 됩니까? 여섯 개 됩니까 다섯 개 됩니까? 다섯 개 된다 그말이오.

이것을 자기가 입고 있는 것을 알고 자기는 입은 자로 살라고 할 때에 오는 환난, 이것을 입은 자인 줄 알고 입고 살라고 할 때에 오는 환난, 이것을 벗지 안할라고 하니까 오는 환난, 그러면 그 환난을 주는데, 예루살렘 환난을 주는데 그 환난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환난을 줍니까? 누가 환난을 주지요? 예루살렘의 환난,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 때문에 그 공로를 내가 벗지 안할라고 함으로써 내게 나를 괴롭게 나에게 박해를 주고 내가 또 입고 살라고 함으로써 박해 주는 그 박해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박해 주는 자가 누구지요? ‘주님’ 그거는 뭉싱이 대답이라. 그거는 구별 없는 대답이라.

그것이 누가 주느냐 하면은 그 주는 것이 악령이 줍니다. 또 악령에게 벌써 정복을 당해서 미혹받아 가지고 있는 악령의 군졸이 누구입니까? 악령의 군졸이 누구입니까? 악성입니다. 요걸 단단히 여러분들이 알면 뭐 될 건데. 악성입니다.

또 악령과 악성의 부하가 뭐입니까? 악습입니다. 이거 암만 말해도 말만 그렇지 이것을 자기가 기도로 새겨 보지 못하고 실지로 살면서 느껴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말이오.

그래 내가 어떤 성도 하나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있다 말하기를, 산에 가서 기도하니까 모든 것이 환하게 열리는데 이는 참으로 예루살렘에 이 사활의 공로 때문에 당하는 박해 이 박해를 당하지 안하고는, 이 박해가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고 전부가 이 대적인 악령 세상이요 악성 세상이요, 악령 세상이요 악령에게 미혹 받은 인간 자기 중심의 이 세상이요 또 그대로 행동한 악습 이거 다 뭉텅인데, 이 세상이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안할라고 입고 살라고 하면은 그 박해가 오는 것은 필연적이지 안 올 수가 없다, 또 그 박해가 올 때에 박해를 받아도 이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아니할라고 하는 그자가 아니면 성령은 영접할 수가 없다, 이게 아니고는 옛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이게 아니고는 새사람으로 살 수가 없다, 이건 다 필연성이고 이거는 불변성이지 그것이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그것을 깨닫고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 좀 기도 가운데서 그리 깨달은 걸 말하기 때문에 마음에 조금 참 기뻤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여러분들 지금 가서, 뭐 많이 배워 필요 없어. 하나 바로 알면 다 됩니다. 하나 바로 알면 그만, 하나만 바로 알고 그것을 생명보다 귀중하게 바로 아는 것 꽉 잡고 있다면은 그 바른 것 하나가 들어서 천도 만도 다 바로 만들어 버리요.

이런데, 가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사활의 공로를 내가 입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나와 마찰이 있다. 사활의 공로를 벗지 안할라고 하기 때문에 악령에게 속한, 악령에게 속한 게 뭐입니까? 세상 불신자는 전부 악령의 군졸 아니요? 악령의 군대 아니요? 그들과 영 사상이 다르다 그말이오. 다르고. 또 중심이 달라.

그들 중심이, 세상에 중심이 몇 개나 됩니까? 세상에 많은, 수십억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중심이라는 것이 몇 개지요? 몇 개나 되지요? 몇 천이나 몇 만이나 됩니까? 얼마나 됩니까? 예? 중심이 몇이나 됩니까, 세상에? 한번 대답해 봐요.

세상에 중심이 수십억 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심이 몇이나 되는지?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둘, 또 어떤 사람은 하나 이라는데 이 둘이 맞습니다. 뭐 천인 만인이 제 중심 다 가지고 있지마는 그건 다 도매금으로 하나요. 피조물 중심 창조주 중심 이 중심 둘뿐입니다.

요것도 확고하게 가지면 이만 해도 다른 것 다 알게 돼 버려요. 뭐이든지 확고하게 가지면 하나 알면 그게 들어서 모든 것을 점령해 가지고 다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수십억이 살고 있지마는서도 창조주 중심이 하나 있고, 피조물 중심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천인 만인 수십억이 살고 있지마는서도 중심은 둘뿐이라.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악령 중심 하나님 중심 둘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벗지 안할라고 하면은 뭣이 우리의 대적이 됩니까? 뭐이 대적이 됩니까? 하나님 중심이 대적이 됩니까 악령 중심이 대적이 됩니까? 그러면 우리 대적이 몇이나 됩니까? 숫자가 몇이나 되겠소? 요새는 뭐 사람이 몇 억이라? 예? 얼마? 사십 팔억 인구라 하나? 온 세계에? 그러면 원수가, 사십 팔억인데 거게서 예수 믿는 사람이 한 팔억이나 될란지, 예수 믿어도 장로도 전부 보면은 다 그 중심이 딴거요. 장로도 보면 이제 피조물 중심 거게 속해 가지고 있지 조물주 중심이라는 그 중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를 못해.

뭐 어떤 데는 수만 명이 모였지마는서도 조물주 중심이라는 것을 구별도 못 하고 조물주 중심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거기 끼여 있지 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나를 박해 주는 것은 조물주 중심이 아닌 것은 전부 나의 적이 돼 가지고 나를 박해를 주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그라면 이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하고 입고 살라고 하는, 박해가 와도 이 공로를 벗지 안하고 입고 사는 것은 온 세상을 점령한 것이오. 입고 살았으면 제가 입고 죽었더란대도 온 세상을 점령해서 세상은 제것 됐습니다.

하늘과 땅의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다 네것이라 하고서 다 유업으로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이 많은 이 싸움인데 이 싸움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지 안해. 이 싸움을 자꾸 싸워서 한 사람들은 뭐 지금 어려움이나 앞으로 공산주의가 올 때의 어려움이나 뭐 다른 게 없는 어려움이라.

그런고로, 또 오늘 아침에도 서론만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는 이제 내가 내일 아침에는 가 가지고 서론을 냅두고 요것만 해야 되겠다 하는데 와 보면 또 그 서론을 그걸 말해야 되지 본론만 말하면 또 너무 초절돼 버려서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니까 또 서론, 서론 말하고 난 다음에 이어서 이 말하면 좀 알아 들을 터인데 시간되니까 또 이거 중단해 버려야, 중단되고는 그 동안에 다 잊어 버렸으니까 또 서론 말해야 되지 또 무슨 말인지 또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옥토에 뿌린 씨는 자기가 하나님의 도를 받았는데 그 도를 자기의 그 심령이라는 자기의 마음, 좁게 말하면 자기의 마음이요 크게 말하면 자기 그 심신입니다.

자기 심신을 어떻게 하는 게 옥토에 뿌린 씨입니까? 자기 심신을 그 들은 바의 진리의 말씀이 다 먹은 것이 옥토에 뿌린 그 씨입니다. 알겠습니까? 다 먹은 것.

길바닥이나 돌짝밭이나 덤불밭에 심은 것은 자기 심신을 들은 진리의 말씀이 다 먹지 못하고, 혼자 도식하지를 못하고 다른 것들이 돌이 먹고 덤불이 먹고 또 단단한 길바닥이 먹었기 때문에 그 하나도 먹지 못하고 옥토에 뿌린 씨는 그거 다 없는 것이 옥토에 뿌린 씨이기 때문에 자기의 들은 바의 그 진리의 말씀이 자기 마음도 다 먹어 버렸고 고기덩어리도 다 먹어 버리고 다 먹어야 그래야 옥토에 뿌린 씨가 됩니다.

이런 건데, 우리는 금방 말씀 듣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만 다 버려 버리고 돈이 먹지 사회가 먹지 세상 염려가 먹지 근심이 먹지 사업이 먹지 뭐 친구가 먹지 또 인정이 먹지 또 행락이 먹지 취미가 이놈 다 갈라 먹어 버리고 이 들은바의 말씀은 빼빼 말라 가지고 하나도 차지 못하기 때문에 헛일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산에 지난밤에 기도하러 가도 그날 가 가지고 그날 밤에 기도할 때 어느 성구라도 좋아. 어느 성구라도 내 마음과 내 몸이 전부를 그 성구가 다 먹었으면 그 성구는 벌써 능력이 있어 가지고서 그 성구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백 배는 뭐요? 인간에 대해서도 그 성구가 승리합니다. 마귀에 대해서도 그 성구가 승리합니다. 또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 성구가 승리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요거 여러분들이 어짜든지 요걸 가지고 보십시요. 이 깨달음은 생명보다 가치를 높이 두는 요것을 바꾸도록 노력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지난번에는 성경 연구에 알곡과 쭉덩이, 알맹이와 쭉덩이 그것을 창세기 1장에서부터 ‘요렇게 하는 것은 쭉덩이고 껍데기고 요거는 알맹이다, 요거는 껍데기이고 알맹이다.’ 요렇게 해서 구별하라 했는데 내가 그 써낸 것 보니까, 거게 대해서 자기가 깨닫고 좀 은혜를 받고 참 좋아했다 보니까 양성원 학생들이 그렇게 성경 시간이 많아서 그거 좀 연구할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내가 좀 소망을 가졌습니다.

고걸 자기가 연구해서 1장으로부터 알맹이 껍데기 요렇게 자꾸 구별해 나가보면은 성경이 쫙 갈라지는 게 그만하면 벌써 성경에 대해서 눈이 거의 어슴어슴하게, 어슴어슴하게 한 칠십이나 팔십 세 되는 노인만치 눈이 밝았을 것이라 말이오. 그 좀 몇 가지만 그래 좀 거석해 놓으면 눈이 그만 젊은 아이들 모양으로 환하게 밝아져요. 이 눈이, 성경 깨달음의 눈이 밝아야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습니다.

어제 그래서 어떤 목사님 보니까, 갱신이라 하는 데 대해서 계시 2장으로부터 3장까지에 일곱 교회를 근거해 가지고 이 갱신이 옳은 갱신이라 해서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 갱신이라 하는 것이 나와는 정반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런데 그 사랑은 참 중요합니다. 이라는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은 자기 몸을 주어서 불사르고 자기 소유를 다 그 형제를 위해서 다 내어 준다 할지라도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랬다 말이오.

그 형제를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투자하고 몸을 투자하고 이렇게 이 사랑 아닙니까? 이 사랑 해석하는 것이 그 사랑이라 말이오. 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들의 그 신앙은 그래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소유를 다 주고 몸을 주고 생명까지 그 형제를 위해서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그러면 그 사랑 없이 자기 몸을 그 형제 위해서 희생해 주겠습니까? 소유를 희생해 주겠습니까? 이 사랑과 사랑이 달라서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사랑이요 제일 생명이 많은 것이 사랑이니까 사랑과 사랑을 구별해야 될 터인데 이제 그 테레비에서 말하는 사랑, 불우의 이웃 돕기에서 말하는 사랑,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람 그 사랑과 꼭 같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거 뭐 천 리 만 리 가 가지고 아주 딴판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이거 깨달음이 딴판이니까 이거 문제가 아닙니까? 모두 다 서로 사랑하라. 여기 보니까 이웃 화평 사랑 다 좋은데 그 사랑이 인간 사랑이지 성경이 말해 놓은 사랑하라는 것은 인간 사랑 하지 말고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라 그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어요.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랑을 가진, 사랑은 하나뿐입니다. 그러기에, 배암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 두 가지가 있다 이렇게 말해도 예사로 듣는다 말이오.

이게 사람이 일생을 죽고 망치는 것인데, 이거 지금 만일 배암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래 갈라서 이렇게 말한다면 막 굉장하게 떠들 것입니다. 이제 속에 숨어서 이거 그저 한쪽 구석에서 살살 이라니까 배어 나가는데 이 설교록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대요. 설교록을 보고서 ‘그놈 죽어 버려야 된다. 그런 거는 때려 죽여야 된다. 백 목사 그런 거는 때려 죽여야 된다.’ 이라더래요. 설교록 보고.

‘왜? 왜 그러느냐?’ 이라니까, 이제까지 내려오는 전통을 깨뜨려서 이렇게 깨뜨린다고서. 그 사랑도 그라면 전통 깨뜨린다고 때려 죽인다, 나중에 마지막에는 거게 맞아 죽을란지 몰라요, 내가. 거게 맞아 죽으면 그거 나는 옳게 바로 하다가 죽었으면 순교 쳐 놓고는 그보다 더 좋은 순교가 없어.

여러분들이 바로 깨달아야 돼. 이거 양성원에 와 가지고서, 양성원에 다른 데 모두 다 신학 대학 졸업 맡고 다 모두 신학교 다 졸업 맡고 여기 와 가지고 공부하면서 해서 여게서 ‘다른 데와 다르다, 다른 교리와 신조와 다르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어, 그거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데는 이것을 신앙의 초보라고 말하는데 이 백 목사는 이것을 영원한 터라고, 이 기초는 헐지 말고 이 기초를, 이것을 요 기초 위에서 완전한 데 나아가라, 요 기초 위에다가 완전을 세워라.

이랬으니까, 폐하지 말고 완전의 기초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완전의 기초가 아니고 그거는 다 폐해서 없앨 것들이라 이렇게 해석하니까 이거 어찌 됩니까? 같소, 조금 차이 있소, 정반대요? 양성원 학생들 대답해 봐. 정반대입니까 조금 차이 있습니까? 조금 차이 있다고 생각한 분들 손 들어 봐. 정반대라고 생각한 분 손 들어 봐. 정 반대야, 정 반대. 이러니까 이 설 주장하는 데는 다 그럴 것 아니요? 이래도 뭐 놀랠 줄 모르고 예사라.

그러면, 영원한 심판을 버려 버리고 뭐 하겠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려 버리고 뭐 하겠소, 하기를? 어두워지면 이렇게 어둡다 말이오. 그게 뭐이냐? 자기 주관들 해석에 고집이 있기 때문에, 잘못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해석한 그것을 맞도록 할라 하면 이것도 그래 해석을 해야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한 교리가 틀리면 모든 교리가 다 틀리게 돼요.

이거 이해가 돼져요, 이 학생들? 이해가 안 되면 소용 없습니다. 여게서 가르치는 것이 온 이 교계에서 가르치는 거와 같은 것도 있지마는서도 다른 것 있다. 다른 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것을 깨달아야. 이러기 때문에 원 묵은 둥치는 같지마는서도 지금 어찌 해야 되느냐 하는 새 움이 나는 것이 그 다르다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이것도 이거 설교록에 나가면 이 보는 사람이 또 욕할 거라. 이게 전부 다르다니? 그라면 다르면 다 틀렸다 말인가, 저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 말인가? 이래 되니까 이거 여러분들 때문에 말을 하는데 이거 참 문제는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6장 1절에 있는 해석도 정반대이니까 그거 나가면 전통 깼다고 야단일 것이고, 그거는 칼빈이 그렇게 해석해 놨지, 또 ○○○ 목사님도 그렇게 해석해 놨지, 이랬으니까 이제 그거 다 대학자요 우리의 다 신앙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 분들인데 이래 놓으니까 이거 문제가 많아.

여러분들이 배우는 것은 이런 문제가 있으니 이 문제로 더불어 싸워서 내가 이게 옳으면은 이거를 세워야 되고 이거 세우기 위해서 내 생명을 바쳐야 될 거라 말이오. 이게 틀렸으면 백 목사를 죽여야 될 거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생명적으로 생각지 안하고 예사로 생각하고 있다 그거요.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701 깨어 살려면/ 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800204월새 선지자 2015.10.27
700 깨어 사는 생활/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861005주후 선지자 2015.10.27
699 깨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4장 42절-47절/ 861006월새 선지자 2015.10.27
698 깨어 근신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11절/ 881126토새 선지자 2015.10.27
» 깨달음의 중요성/ 사도행전 1장 4절-8절/ 860620금새 선지자 2015.10.27
696 깨달음과 실행/ 요한복음 15장 1절-4절, 9절-12절/ 830521토새 선지자 2015.10.27
695 깨달음과 발표력/ 골로새서 3장 1절-11절/ 870213금새 선지자 2015.10.27
694 깨달음-결실/ 마태복음 13장 3절-4절, 18절-19절/ 84040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7
693 깨달음-결실/ 히브리서 10장 26절-31절/ 840310토새 선지자 2015.10.27
692 깨달음 다섯 가지/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60506화후집회 선지자 2015.10.27
691 깨달은 대로 설교할 것/ 고린도전서 15장 33절-34절/ 881002주새 선지자 2015.10.27
690 깨끗해지는 것/ 요한복음 15장 1절-8절/ 880916금새 선지자 2015.10.27
689 깨끗한 것/ 요한일서 3장 1절-10절/ 850412금새 선지자 2015.10.27
688 깨끗케 하는 현실/ 요한 1서 3장 1절-3절/ 840820월새 선지자 2015.10.27
687 깨끗은 본질과 본성대로 된 것/ 마태복음 7장 15절-27절/ 810410금새 선지자 2015.10.27
686 깨끗/ 야고보서 2장 10절-13절/ 890127금새 선지자 2015.10.27
685 깨끗/ 요한복음 15장 1절-4절/ 791116금새 선지자 2015.10.27
684 깨끗/ 요한일서 3장 1절-7절/ 820706화새 선지자 2015.10.27
683 길이 참아라/ 야고보서 5장 7절-12절/ 830724주후 선지자 2015.10.27
682 길과 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80315화새 선지자 201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