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신앙

 

1986. 1. 10 금새

 

본문:누가복음 11장 5절∼13절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을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리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 떡을 구하여 얻는 비유를 하셨고 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비유를 하셨고, 또 자녀가 부모에게 식물을 달하는 그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 전체에 우리가 하나 깨달을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떤 종류의 은혜를 얻든지 그 은혜는 순전히, 은혜 자체는 순전히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우리에게 공으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신앙의 이런 저런 노력이 있다고 해서 그 노력이 우리가 구하고 얻는 그 은혜에 다만 털끝만치이라도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그것을 만드는 데에는 참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어데까지 큰 은혜를 받았든지 또 특수한 그런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자기는 그저 주님에게 공으로 얻은 것뿐이지 그 은혜 자체에 대해서는 무슨 자기의 노력의 공로가 거게 가공된 것은 아닌 것을 우리가 똑똑히 구별해야 됩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신앙의 어떤 큰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하나님께서 순전히 그 은혜를 이루어 놓은 것을 자기가 공으로 받은 것뿐이라는 이것을 잊어 버리고 자기의 공로가 그 은혜에 뭐 다문 백분지 일이든지 천분지 일이든지 자기의 수고의 노력이 그 자체를 만드는 데에, 이루는 데에 다소라도 가담되었다고 이렇게 자기 공로를 생각하기 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은혜든지 그것은 순전한 은혜입니다. 자기가 만일 성경 도리를 누구보다도 많이 깨달아서 성경에 대한 대 학자가 되었다고 하면 그 학자된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인해서 그 학을 연구하고 배워서 된 것이라고 그렇게, 자기가 학자된 학에 대해서 자기의 공로를 거게다가 조그만치라도 가담시키기 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성질이 아주 이탈됩니다. 자기가 일생 동안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든지, 또 하나님의 무슨 이런 것은 의를 행하는 그런 어떤 큰 참 승리의 가치있는 행위를 했다든지, 복음 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자기는 하나님이 혼자 이루어 가지고 놓으신 것을 자기는 공짜로 받은 것뿐입니다.

어데까지 해도 자기는 받은 노력뿐이지 그 은혜는 하나님이 순전히 주신 것이지 자기의 무슨 공로가 그 은혜 자체를 만드는 데에는 털끝만치라도 상관이 없는 순전한 은혜입니다.

이러기에, 노력이 없이 받은 그런 은혜도 있고, 비유에, 오다 가다가 그 보화를 만난 사람도 있었고, 또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만난 사람도 있었는데 오다 가다 만난 사람이나 찾아다니다 만난 사람이나 그것은 순전히 그 보화는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것이지 그거 자기의 공로가 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 방편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없이 되는 것 있고 많고 있어 되는 것 있을 때에 없어 되는 것은 그것은 은혜라고 사람들이 인정하지마는 많은 노력을 가해 가지고 된 것은 자기의 노력이 그 은혜를 이루는 데에 다소라도 그 공로가 거게 가입되지 안했느냐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을 언제든지 우리는 똑똑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은혜를 주실 때에 꼭, 자기가 하면 되고 안하면 안 되고 자기가 그 공로를 말미암아 자기가 한 것같이 여겨지는 그런 방편을 통해 가지고 한 하나님은 언제든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방편을 통해 가지고 주시는 것은 그 은혜를 우리가 받아 가지고 우리가 잘 감당하고 끝까지 그 효력을 자기가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은혜 받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을 만드는, 자격을 만드는 데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것이지 은혜 자체는 순전히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고, 또 전 시간에도 많이 말한 거와같이 벗됨을 인하여서는 주지 안하지마는 강청을 인해서 줬다 하는 것은, 벗은 서로 친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말로 믿고, 말로 믿고 또 이 모든 믿는 의식 행위를 우리가 해서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고 또 주일날 예배를 보고 뭐 이렇게 그저 믿는 행위를 보편적으로 하는 그것도 좋지마는 거게서는 하나님의 그 역사가 특별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주님에게 무엇을 얻어야 되겠다. 주님에게 무엇을 얻어야 되겠다. 벗이 밤에 친구가 와서 대접할 게 없어 가지고서 가서 말할 때에는 그 사람이 그냥 아무 그런 것 없이 거짓말로 꾸며 가지고 떡을 달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강청함을 인함이라고, 강하게 청했다. 강청함을 인함이라는 것은 강청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강청이 되는 것이지 강청이 그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장사하는 사람이 외상값을 받으러 갔을 때에 자기가 참으로 양식 팔 돈이 없어서 돈받으러 간 그 사람의 심정과 또 자기에는 여유있는 재산이 있는데 그저 내가 지금 생활에 곤란하다고 그렇게 말로 꾸며 가지고서 가서 돈을 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과는 상대방이 환하이 알게 그 속에 어떠한 참 어려움의 강청이라 하는 것을 꼭 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이 알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거게는 이뿐 아니라 그 모든 전신에 그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저 간절히 구한다는 그 하나의 형식보다도 주님에게 이거는 받지 안하면 안 된다. 주님에게 받지 안하면 안 된다. 이거 주님에게 아무래도 내가 얻어야 되겠다 하는, 얻어야 된다는 그 필요성, 중요성 그것이 자기에게 있는 것만치 필연적으로 강청이라 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강청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 예수 믿은 우리들이 주님 앞에 얻어야 될 것이 뭐 평생 가도 얻어야 될 것이 남아 있고 우리는 영원 무궁 세계 가서 사는 데에 주님에게 지금 얻어서 필요한 그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자꾸 살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은 모든 마음이 세상에 기울어져 있지마는 언제 떠나 주님의 나라에 갈런지 모르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진 사람은 자꾸만 그 나라에 가서 살 그 모든 준비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력하게 됩니다.

여자들 보면은, 결혼 말이 있기 전에 그저 그때는 벌로 덤비지마는 이제 꽉 약혼이 돼 가지고서 성혼이 되게 되면은 시집 가게 되면은 그저 그 마음 전심은 시집을 가야 되겠으니까 시집 가 가지고서 거게 가서 어떻게 사나 하는 거게 대한 모든 것의 필요에 대해서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은 결혼하게 돼서 여유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여유의 시간을 줘 가지고서 거게서 상당한 그 마음 준비나 모든 준비가 있도록 그렇게 해서 했지마는 요새는 결혼을 빨리 시킵니다. 왜? 이것은 다 넉넉히 준비할 만치 거게 대해서 모두 발달돼 가지고 있는데, 날을 받아 놓고 오래 있으면, 약혼해 놓고 오래 있으면은 그 가운데에 사고가 생겨서 하나님의 축복이 다 제감되기 때문에 그저 그 고속으로 빨리 약혼하고, 약혼식은 하지 안하고 고만 결혼하는 것입니다. 약혼식을 해서 얼마 두고 그것이 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청이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 하는 고것을 우리가 단단히 여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또, 강청 그것보다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는 이것은 꾸준한 노력을 말한 것인데, 그 강청하는 그것은 우리 마음과 우리 입에서이지마는 꾸준한 노력이라는 이 노력이 그보다도 더 필요합니다. 강청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마는 강청보다 노력이 더욱 더 필요하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구하고 찾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말로 구하고 찾을 수 있고, 또 마음으로 그렇게 노력할 수 있고, 또 우리의 행동으로 노력할 수 있고, 우리 자체로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구하는 데에는 말도 좋고 또, 마음 없이 말하는 걸 서로 압니다. 보면은 사람은 영물이라서 나타난 것만 아는 게 아니라 나타나지 않는 그 영물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대략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에게 우리가 얻어야 될 것도 많고, 또 우리가 지금 모르는 걸 찾아야 될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자꾸 이래 보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찾을 것이 얼마나, 찾아서 만나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또 성경 뿐 아니라 이 자연 이치에서 우리는 찾아야 할 것을 거게서 발견해야 됩니다. 이래서 신구약 성경은 특별 계시라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모든 만물과 또 인간의 마음이 요리조리 모든 구조 그런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비밀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셨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리켜서 일반 계시라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참 찾을 것이 얼마나 많으냐? 우리가 지금 모르는 거,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으며, 만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으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모든 걸 구하고 찾고 또 우리가 점점 이 세상은 뒤로 두고서 진리의 세계로 자꾸 들어가야 되겠고,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야 되겠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성의 세계로, 하나님이 속성의 세계로 점점 지식도 자꾸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지식도 사이비한 지식에서 좀 더 정확한 지식으로, 정확한 지식에서 절대 불변의 진리의 지식으로 자꾸 이렇게 온전함을 향해서 자꾸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참 여게 비유한대로 문을 두드리라, 또 찾으라, 구하라 말씀하신 대로 여게 대한 꾸준한 네 가지의 노력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말로 노력해야 되겠고 우리 마음으로 노력해야 되겠고, 우리 행동으로 노력해야 되겠고, 우리 자체가 변화됨으로서 노력해야 됩니다.

하나니의 은혜를 이렇게 가만히 연구해 보면 뭐 하나님이 우리가 달라 하는 걸 그렇게 얼마나 간구를 해야 되고, 또 우리가 오랫 동안 애를 써서 구해야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달아 가지고, 우리를 달우어서 마치 사랑하는 부부끼리 서로 좋아서 남편이 아내에게 뭐 주면서 좀 달아 가지고 주고 또 아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하고 이런 거 모양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구하는 그 모든 것을 깊이 연구해 보면 뭐인고 하니 당신은 즉시 지금 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또 주고 또 받고 또 새것 자꾸 줘서 이래 지금 전진하고 향상해야만 하겠는데 그 시일을 요하는 것은 뭣 때문이냐? 우리 자체가 그 은혜를 받아서 감당할 만한 그 자체로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성화가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받아서 감당할 만한 우리 자체의 변화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간구하고 또 줄 듯이 하다가 또 안 주시고 자꾸 이래 하는 것은 그것이 뭐이냐? 우리 자체의 그 은혜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서 변화되는 그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있는 것이지 그 뭐 딴 것 아닙니다. 그것만 자체만 받을 수 있는 자체만 되면 즉시 즉시입니다.

우리가, 이 경제라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줄을 다 아십니다.

경제가 필요한 줄 알고 또 경제가 있어야 이런 거 저런 거 의의 열매를, 의의 결과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것도 다 당신이 알고 계시는데 요는 뭐이나? 우리가 어느 정도 구하는 그릇이 차야 된다. 구하는 그릇이 차야 된다는 것은 뭐 얼마 동안 네가 시간의 그릇이 차야 된다. 네가 수고의 노력의 그릇이 차야 된다는 것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과연 물질을 줘서 네가 갖다가 필요 있게 쓰느냐? 네게 효력 있게 쓰느냐, 네 구원에 유익하냐 이 물질로 말미암아 네가 손해 보지 안하고 네 구원에 유익이 되느냐 하는 그게 문제입니다. 그것만 되면 즉시 즉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모든 은혜는 다 회개, 잘못된 걸 고친 데 따라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네 가지 면으로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노력이 있는 것는 노력이 있되 아무리 자기가 암만 노력을 해도 성화가 안 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노력하라는 것은 말로 구하고 마음으로 구하고 행동으로 구하고 하는 그것은 내 자체가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뭐 평생 구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일을 어떤 사람은 깨닫고 즉시 구해 가지고 얻습니다. 즉시 거게 대해서 아, 내가 이런 사람이 돼야 이 은혜를 주시겠고 감당하겠다 하는 그것을 깨닫고 즉시 자체가 회개가 빠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속도가 빠릅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구해도 은혜의 속도가 아주 지연되고 평생해도 못 받고 마는 사람 있습니다. 그거는 왜? 자체가 성화되지 않는 데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좋지마는 제일 중요한 것은 여게 말했습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 배암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이겠느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게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는, 그저 어짜든지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바른 기도를 하든지 삐뚤어진 기도를 하든지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자꾸 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주님에게 이런 거 저런 거 소망을 두고 자꾸 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에게 소망을 두면 자연히 주님에게 소망이 있고 딴 데는 안 된다.주님에게 구해야 된다. 이는 주님 밖에는 주실 이가 없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이는 주님뿐이다. 내가 의지할 이도 주님뿐이다, 내 안보도 주님뿐이다 내 모든 가난도 주님뿐이다, 주님에게 구해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주님에게 전 소망을 가지는 것을 주님은 좋아하십니다. 그 소망을 가지면 어쨌든지 주님에게 그래도 생각이나 마음이나 그런 것이 많이 기울어지고 주님과의 관계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게 대해서 성경에 보면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그런 말하는 그것은 뭘 가르쳤는고 하니 하나님 앞에 버릇없이 하는 거, 하나님 앞에 그걸 말 한 번하고 두 번하고 버르장이가 없기 쉽다 그거요. 이 사람들을 접촉해 보면 고만 저를 제라 하고서 이렇게 그저 참, 저를 아주, 인격은 이 밑에, 땅에 떨어져 있는 저를 인격을 이래 자꾸 인격을 높여서 이렇게 대우하면 높은 인격이 되라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인격 대우를 하면은 나중에 그만 버르장이가 없어 가지고 만만해 가지고서 그만 도리어, 도로 역효과로서 점점 아주 방종한 그런 인격이 되기 쉽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럴 때는 자연히 그렇게 돼서 멸시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모양으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나중에 하다가 보면은 버릇 없는, 아주 방탕한 그런 버릇 없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뭐 예사로이 버릇 없는 그런 죄를 범성죄를 범하는 그런 일이 될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알고 구하든지 모르고 구하든지 삐뚤어지게 구하든지 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아들이 떡 달라 할 때에 배암 주지 않는데, 또 알 달라 할 때 전갈 주지 않는다. 이제, 너희가 무엇을 이렇게 구할 때에 네게 필요한 것은, 네 주관이 나빠 가지고서 잘못 헛된 욕심을 가지고 이렇게 구한다 할지라로 그것도 자꾸 구하라 왜? 그렇게 구하면 나쁜 거 주지 않습니다. 나쁜 거 주지 안하고 달라 하는 대로 주지 않습니다. 여게 보니까 떡 달라 할 때에 떡 줬다 그렇게 말하지 안했습니다. 떡 달라 할 때에 나쁜 거 주겠느나? 구하는 데에 나쁜 거 주지 않는다는 걸 여게 단정을 지워서 말씀해 놨고, 또 떡 달라 할 때에 떡 줬느냐? 떡이 필요하면 떡 주고, 고기가 필요하면 고기 주고, 안 주는 게 필요하면 안 주고 이렇게, 그렇기에 구할 때에 좋은 것을 준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것을 굶기는 게 좋으면 굶길 것이고 먹는 게 좋으면 먹일 것이고 이렇게 좋은 걸 준다 이 말씀을 우리가 주님에게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소망 두고서 어짜든지 이런 거 저런 거 무엇을, 자꾸 구하면 잘못 구한 것은 그것은 주님이 그 구한 대로 안 들어 주시고 또 구한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 없고 딴게 필요하면 콩을 구했는데 팥을 주실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어쨌든지 구하면은 아이도 안 그렇습니까? 아이가 지금 자기에게는 해로운 위험물을 달라고 자꾸 그렇게 울면은 이제 그걸 달래기 위해서 뭐 사탕도 주고 뭣도 주고 필요한 걸 자꾸 그에게 줘 가지고서 바꾸어서 필요한 대로 주신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것을 깨닫고, 제일 중요한 것은 뭐이냐 하면은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있는데 말씀한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나님의 아들. 지금은 여자들이 있지마는 그때는 하늘에서는 여자가 없습니다. 전부 아들이오. 그러기에 장자라 했어. 장자의 총회라. 우리가 다 전부 여반도 장자요, 남반도 다 하나님 아들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이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만드시기 위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했습니다. 모든 걸 예정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했습니다. 그러면, 예정한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면은 얼마나 큰지, 얼마나 큰지 참 어마 어마합니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아들을 삼기 위해서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예정을 하셨고, 예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창조를 하셨고, 그러면, 나를 위해서 모든 일들이 전개 되는 것 볼 때는 아, 나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만드실려고 이 모든 것이 예정됐다. 그 예정된 것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나를 아들 삼을라 하는 그것이 예사로 여길 게 아니라 큰 것을, 큰 것을 들였습니다. 큰 밑천을 들였습니다. 큰 밑천을 들였습니다. 이렇게 큰 것을, 무한한 것을 예정하셨으니 이 큰 예정을 무한하신 예정으로 가지고서 나를 아들 삼았는데, 이러니까 그 큰 것을 들여서 삼았기 때문에 자연히 내가 크다 그말이오.

또, 창조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그도 또 참 지극히 큽니다. 나를 위해서, 나 위해서 이러 거 다 만들어 놨는데, 나 위해서 이것 저것 다 만들어 놨는데 그 분이 내게 대한 관심이 어떻다는 것을 만들어 놓은 걸 볼 때에 알 수 있다 그말이오. 이것 보니까 나 위해서 이것도 만들었고 저것도 만들었고 만들어 놓은 걸 볼 때에 참 그분이 내게 대해서 관심이 얼마나 세밀하며 얼마나 독특하며 얼마나 구비하며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깊이깊이 널리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걸 내게 필요한 것을 만드신 것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가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어데를 가고 없는데 이 아이가 살살 농을 뒤벼봤습니다. 아, 농을 뒤벼 보니까 ‘뭐 이거는 뭐꼬?’ 보니까, 어머니가, 보니까 뭐 콧물 흘리는 데 이런 데 저런 데 알지도 못하는 걸 어떻게 주 만들어 놔서 했는지 그걸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보니까 어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세밀히 모든 것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하는 그걸 볼 때에 비로서 어머니가 자기에게 대한 관심을 넓고 깊고 세밀한 그 사랑을 깨달은 것처럼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있고 또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를 당신의 아들 삼기 위해서 하늘의 모든 부요를 내놓고 우리가 부요를 내놔 봐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함으로 누구를 위해서 자기의 소유를 이렇게 투자하는 거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사랑해 봐야, 자기가 사랑해 봐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사랑해 보기 전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길러 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내게 하신 그거와 비슷한 것을 이 세상에서 해 봄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한다는 거, 그러면, 하나님이 하늘의 부요를 나 위해 내놨지, 내가 무엇을, 내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뭐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서, 내가 어북 사랑한다는 뭐, 사랑하는 교인을 위해서 무엇을 내가 희생을 해 볼라고 할 때에 그때에 그 희생하기가 어렵다. 내게 있는 소유를 다 내놓는데 하나님은 그 많은 부요를 나 위해서 내놨으니 그분이 날 버릴 리가 없고, 날 잊어 버릴 리가 없고 소망이 내게 있는, 그러기 때문에, 에베소 1장에는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기업으로 삼았다. 기업으로 삼았다. 이 집 식구는 뭐 먹고 사노? 이 집 식구는 단지 이 집 식구의 생명이다.

이 집 식구의 무슨 기업체가 하나 있으면은 그 기업체가 하나 있어. 뭐 가정에서 조그만한 가내 공업을 하고 있는데 이 가내 공업 이거는 이 여덟 식구의 목숨이 여기 달렸다, 의식주가 여기 달렸다. 이러니까 막 얼마나 귀중히 여기겠습니까? 그뭐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온 가족이 아끼고 그를 위해서 잘 되도록 할라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그걸 가리켜서 기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전소망이 우리에게 있어서, 예정하셨지, 창조하셨지,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나를 당신의 아들 삼기 위해서 내어 놓으셨지, 또 당신의 높은 지위와 권세를 나 위해서 다 희생하셨지, 또 그뿐 아니라 이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지,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이 나를 버릴 리가 없다 말이오. 또 이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사람으로 부활한다는 거는 이거는 하나님이 피조물을 입는다는 거 이거는 우리가 똥 입고 사는 거, 송장 입고 사는 거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송장 입은 것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다시 사람되어서 부활하신 이 당신의 내게 대해서 역사하신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주님과 나와의 이 부자간, 아버지와 아들된.

이 관계의 어떠한 것을 점점 깨닫게 돼.

관계의 어떠한 것을 깨달을 때에, 이제 우리가 어떤 생활할 때에 이 관계를 깨달은 이 관계로 말하면, 말하자면 뭐 태산으로도 비유할수 없는 이 큰 관계가 맺어져 가지고 있는데 여기 쌀내끼 동가리 쌀 동가리만한 이것 때문에 당신이 날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를 모른다 하지 않습니다. 이런 무슨 문제 때문에 당신이 나를 놓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무엇을, 벌써 나에게 들여 놓은 것이 크고 나를 이미 사랑한 게 크고, 나에게 대해서 기대가 크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주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된 이 인연, 주님과 나와의 인연,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은 그 결과를 말하는 것이고, 주님은 그 결과를 이룰 수 있는 모든 공작을 이룬 것까지를 다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중보자시요 주님으로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됐습니다.

이것을 자꾸 우리가 명상하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데 대해서, 필요한 걸 구하는 데 대해서 아버지가 주신 것을 확신이 되고 확신이 우리에게 생기고, 또 우리가 어떠한 위험한 자리에 대적이 많은 자리라도 주님이 나를 놓지 안 할 것에 대해서 확신이 생겨지고, 안보에 대해서나 우리가 구하여 얻는 데 대해서나 우리에 책임진 데 대해서나 내게 필요한 것을 당신이 담보하는 데 대해서나 내게 모든 알리는 지식에 대해서나 거게 대해서 확신이 생겨집니다.

그러면, 우리 하는 모든 구원은 ‘믿는대로 되리라’ 말해. 믿는 대로 되리라, 믿는 대로 된다는 말은 인정하고 확신하고 고대로 사는 데에 다 이루어진다 말이오. 그러면 이게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어데서 생겨지는가? 이거는, 아버지와 아들. 주님이 나 위해서 어떻게 한 이 원인을 자꾸 생각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음료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피로 말미암은 이 공로를 자꾸 생각하니 우리 속에는 이제 뭐이 생겨지느냐? 하나님 아버지의 그 모든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이 생겨지고, 또 확실한 소망이 생겨지고, 당신이 나에게 무한히 주시는 거, 안보하시는 거, 내게 대해 희망을 두시고 나를 붙드시고 이래 무한한 향상 과 전진을 하시는 이 사실에 대해서 내가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지니까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해서 주실 수 있어 가지고서 믿는 대로 되니까 내 믿음이 생겨지니까 믿는 대로 자꾸 모든 것이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늘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믿음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혹 생각할 때에 그런 생각 가지기 쉽겠습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 전부를 위해서 했지, 전부를 위해서 이렇게 하셨지 내 뭐, 내 먼지 같은 내 한 존재에 대해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저 하나님의 교회 이 전부 택한 자의 전부에 대해서 이렇게 하셨지.’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런 유혹을 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몸, 우리를 한 몸이라 했습니다. 한 몸이라면 우리는 이 손가락 끝이지마는 이 손가락 끝이나 여게 가시를 찔러도 온 전신이 아프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것으로 한 몸이라는 이것을 가리켜서, 한 몸이라는 말한 이거는 하나의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이 몸으로 이 비유는 이것으로 밖에는 비유 못 하기 때문에 한 것이지 이 몸으로 비할 수 없는 무한한 연결의 이거는 끊을 수 없는 요 진리 연결이 돼 가지고 있고 영감의 연결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전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곧 나 하나가 전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확실히 믿는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인 그저 신앙 종교 의식 신앙 의식 그런 거보다 강청이 있어야 되고, 강청이란 뭐 끝 내 간절히 청한다는 게 아니라 강청은, 내가 자꾸 간절히 원하는 그것보다도 하나님에게 내가 받아야 된다는 그것이 확고한 그게 있는 것이 강청이지 내가 주여, 뭐 달라고 이래 간절히 구하는 그거, ‘간절히 달라고 하지만 뭐 달라 하노?’ 금방 달라 한 거 잊어 버렸다 말이오.

내가 하나님께 얻어야 되는 이 사실 그 실상에 대한 내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고 없으면 안 된다는 그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그것을 가리켜서 그 표현이 강청이 돼야 되는 것이지 그거 없이 형식으로 말로만 이와 같이 해도 아무 소용없어 무슨 금식 기도 하는데 ‘너 뭐할라고 금식 기도하노? 뭐하노?’ 아무, 물어 보면 아무것도, 아무 목표도 똑똑히 없이 잡을 것이 없이 그렇게 하기 쉽다. 그런 게 다 외식인 것입니다.

그래, 꾸준한 노력도 중요하지마는 그것보다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관계성 이 관계성을 우리가 자꾸 생각하고 깨닫고 해서, 나는 하나님을 영원히 아무래도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은 나를 버릴 수 없고 하나님과 나와는 과연 머리와 몸과 하나된 것처럼 이렇게 하나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점점 깨달아서 이 신앙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 전능자가 손가락을 누가 끊는데 냅두겠소? 전능자가 누가 손가락을 끊는 데 내주겠소? 권력 있는 자가 자기 손가락을 누가 끊는 데 내 주겠소? 내주겠습니까? 안 줍니다. 전능자에게 내가 속한 이것을 알 때에 어떤 것이 와도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다소라도 깨달은 사람들이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에 대해서 웃으면서 다 이겼습니다. 그들이 와 가지고 날마다 심문한다 해도 그저 웃으면서 그들을 참, 오히려 보면은 놀려 줬지 그들에게 협박당하지를 안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말한다 해도 이분과의 관계를 이걸 자꾸 생각하는 데에 그분이 크신 걸 생각하니 그분이 크시니 내가 크다 말이오. 이러니까, 나와의 관계되는 그까짓 거야 한 문지 같은 것인데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잊지 말고 꼭 계속합시다. 이 기도로써 이제 우리가 큰 환난을 면합니다. 그저 하루 삼십 분 씩 보태면은 한 달이면, 한 달이면 얼마입니까, 하루 삼십분 씩이면? 반 시간씩 이니까 반 시간씩이니까, 하루 반 시간이니까 얼마요. 열흘이면 얼마요? 한 달에 열 다섯 시간이가? 한 달에 열 다섯 시간, 한 달에 열 다섯 시간, 그것도 많습니다. 한 달에 열 다섯 시간, 일 년이면 뭐 백 팔십 시간입니까? 백 팔십 시간, 우리가 어떤 담을 뛰어 넘는데, 담을 뛰어 넘는데 담을 뛰어 넘는데 한 시간에 자기가 뛰어 넘기를 한 번에 뛰어 넘는데 만일 한 석 자를 뛰어 넘는 힘을 백 번 모으면 얼마됩니까? 삼백 자 뛰어 넘을 수 있지요. 천 번 모으면 얼마 되겠소? 삼천 자 뛰어 넘을 수 있네.

그거 모양으로 우리의 기도하는 것이 자꾸 모입니다. 모여서 이것을, 마치 폭탄과 같습니다. 모이고 모이고 모인 그게 그때 폭발될 때는, 이제까지의 노력한 거, 만일 그 사람의 삼백 배가 되어야 그 어려움을 통과할 수 있는, 자기 힘의 삼백 배 그 넘는 그런 일이라도 평소에 이걸 주 모아서 자꾸 삼십 분 기도로 모아 모아 놓은 이 힘이 모여 가지고서 그때에 그것을 능히 초월하고 넘어갈 수가 있다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리기 때문에, 삼십 분 기도라 하는 걸 이것을 놓지 맙시다. 놓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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