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우주의 종말


선지자선교회 1981년 12월 27일 주전

 

본문 : 벧후 3:10-13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공연히 분주합니다. 공연히 분주하고 공연히 근심하고 공연히 우쭐하고  공연히 교만하고 또 공연히 비겁합니다. 참 정신없는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왜? 역사에 왔다간 천하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헛된 생활을 하고  갔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는 "허다한 간중자들이 구름같이 둘러 있다" 그말은 이  역사에 온 사람들이 별별 생활을 하고 그게 제일인 줄로, 얻기 위해서 예의도  체면도 피곤도 생사도 가리지 아니하고 날뛰면서 얻어 놓고 난 다음에는  만족했지마는 그것도 허사, 그게 부러워서 일생을 눈물로 지낸 그 눈물도 허사,  그것을 경영하면서 저 이상 큰 경영자가 없는 것처럼 날뛰었던 그것도 허사,  많은 사람들은 허사를 하고 벌써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많은  간증자들 다음으로 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많은 참고가 되고 참  간증이 됩니다.

 언제나 모든 존재는 조물주가 있어 가지고 생겨졌습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이 한  분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또 지은신 모든 것을 지금도 그분 혼자 관리하고  보존하고 또 먹이고 입히고 모든 움직임인 움직임 나고 죽는 것 다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있는 거 그런 것으로  비교할 수 없이 절대성을 가진 주재권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계신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이것이 천하에 지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지식 전부보다 몇 억억만배도 더 큰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모르는 그 자는 천하의 인간의 저서를 다 통달했어도 그는 무식한  사람이요,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책을 한 권도 읽어 보지도 못하고  몰라도 '아! 모든 존재에는 지으신 주인이 있다.' 하는 것 이것 알았으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 아닙니다.

 무식한 인간 그것들이 모아서 말할 때에 무식한 것 같지, 무식한 사람  아닙니다. 그 사람은 큰 지식을 가졌습니다. 천하의 인간의 대가리에서 짜내  놓은 그 지식을 다 통달했다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지으신 분이 계시고 그것의  주인이 계시고 그것을 주권적으로 관리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은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두움에 파묻혀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이 말하면 그만침 인정하고 열 사람이 말하면 그만치 더 많이 인정하고 천  사람 만 사람이 말하면 더 많이 인정하고, 권세있고 큰 자가 말하면 인정하고  따라갔던 그런 어두움에 속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수가 많든지 적든지,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이 '조물주가 말씀하신 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가고 이분이 말씀한 이 말씀만 참되다.' 이렇게 아는 지식을 가졌으면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유식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배를 째고 고름을  내고 뭐 인간의 생명을 지금 과학이 만들어내. 그까짓 거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분이 앞으로 큰 처리를 해서, 탁 모든 것을 결단지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야 되지 거기에 안 맞추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을 받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이렇게 나열해 놓으시고 보존하고 계시는가? 잘 먹고 잘 입고  인간이 욕심대로 이렇게 저렇게 쥐 뜯고 밀고 뺏고 하는 거 그거 하라고,  '20세기에 사람이 달에 갈 수 있다, 별에 갈 수 있다.' 하는 그런 노리개  장난하라고 해놓은 것 아닙니다.

 별별 변태 발명 발달 천태만상의 형용으로 이렇게 진화 진보 요동되는 이것은  그분이 혼자 운영하시는 그 운영인데 이 속에 인생들이라는 인생을 내 놓고 '이  세계에서 자유로 한번 살아봐라, 다만 이 모든 것의 주인공되신 주재이신 내  법칙이 있으니, 요 법칙에 따라서 어떤 자는 멸망을 이 모든 것을 사용하면서  마련할 것이고, 어떤 자는 이 모든 가운데에 접하고 사용하는 가운데서 구원을  마련할 것뿐이라. 멸망할 자는 멸망하고 구원할 자는 구원하는 이 일이 끝나면  그다음에는 이 모든 것은 다 끝을 낸다. 그때까지 보존해 두는 것이다. 그때까지  간수해 두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 사실을 믿는 지식을 가졌으면 그  지식이 산 지식이요, 지극히 큰 지식입니다. 밥 한 술을 대할 때에도 이 밥이  무엇 때문에 있느냐? 아, 조물주가 있게 해서 있다. 그러면 이 밥을 내가 먹도록  하는 조물주의 목적이 뭐이냐? 이거 먹고 네가 먹으면서 살면서 멸망을 네가  마련하느냐 구원을 마련하느냐? 먹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고 마심으로 끝난 게  아니고 없음으로 끝난 게 아니고 부요함으로 끝난 게 아니라. 부요하든지  가난해지든지 거기에서 조물주의 뚜렷한 법칙을 인간에게 주셨으니 그 법칙을  따라 영원한 멸망을 네가 마련하든지 구원을 마련하든지 하라는 이것이라. 밥 한  술을 대할 때도 이는 내 구원과 멸망을 마련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 모든  만물이 다 그러한 것이라 들리는 소리도 보이는 것도 접해지는 것도 모두는 다  인생의 영원한 멸망과 구원을 이 가운데서 마련하도록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구비해 놓은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잊어버리지 않고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  생각에서 사는 그 생활이 깬 생활입니다.

 공부를 해도, 무슨 사업을 해도, 그 사업이나 공부나 정치나 문화나 예술이나,  자기의 슬픈 현실이나 기쁜 현실이나, 그것은 우리의 누릴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누릴 세계가 아니오. 그것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입니다.

머물고 있는 장소요. 인간의 참 최악의 현실을 만났어도 그 악은 결단코 내것이  아닙니다. 그 악이 내 불행이 아닙니다.

 악이나 선이나 내게는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악에서 하나님의 주신  법칙을 준해서 거기에서 내가 영원한 멸망을 마련하느냐 영원한 구원을  마련하느냐? 그것이 내 생애요, 그것이 나 할일이요, 그것이 내 몫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벗습니다. 아무리 흉해도 벗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우리의 처소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그분의 선포한 법칙을 따라 내가 멸망을 마련하느냐 구원을  마련하느냐? 요 두 가지만 내 생애입니다. 내 몫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벗을래야  벗을 수 없고 때낼래야 때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에 대해서 조물주와 주재와 주관자가 계시는 이 사실을 우리가  안다고 하지마는 실생활에서는 부인하는 생활하기 쉽습니다. 부인하면 어떤  인간이 주인, 제가 주인, 주인이 많이 나옵니다. 주인은 한 분뿐이시오. 그분이  주인이요. 저 사람도 보관자, 저 사람도 보관자 나도 보관자 모든 것 다 그  보관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뭐하려고? 인간의 영원한 멸망과 구원을 마련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어떤 현실이든지 거기에 당면되는 현실이 그것이 자기의  행불행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의 것 아닙니다. 길을 가는 사람이 한 자욱 한  자욱 길을 밟아서 지나가는 것처럼 그것은 나의 영원한 멸망과 구원을 마련하고  지내가는 한 처소에 것입니다. 그저 거기에서, 나는 멸망이냐 구원이나? 그것을  마련하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자기의 현실관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현실관이오. 어떤 자는 어떤  현실을 만냈다고 자기는 비참하고 불쌍한 자라고 하는 그자도 정신없는  사람이요, 어떤 자는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구비한 현실을 가지고 행복스럽다고  하는 그 사람도 정신없는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오. 어떤 것이나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이용 가치가 꼭 같습니다. 인간의 최악의 현실이라도 그 현실은 내  구원과 멸망을 마련하는 데에는 이용 가치가 꼭 같습니다. 아무리 또 좋은 그런  현실을 만났다 할지라도 그 현실도 최악의 현실이나 이용 가치가 같지 높은 거  아닙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한 대로 현실관을 바로 가지고 사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마련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 그 한정이 차면 그  개인은 세상에 더 있고 싶어도 있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끝났기 때문에  불러갑니다.

 또 이 우주도 어리석게 언제까지나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도 땅도 다 불로 다  사뤄서 이제 있던 하늘과 땅은 없어진 다 했습니다. 이 우주적으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끝이 나면 그것은 이 우주의 종말이요 지금 있는  우주의 끝입니다.

 그 우주의 종말과 개인의 종말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알게 해 놓으시면  도리어 인간에게 화가 되기 때문에 알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자기는  현실만이 자기의 생존 시간이요 자기의 현실만이 우주의 보존 시간으로 이렇게  알고 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내일에 대해서 있다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월권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남은 때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많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자기 계산이오. '이런 죽음의 법을 비추면 나는 안  죽겠다' 죽음의 법이 이 하나뿐입니까? 죽음의 종류가 수가 많습니다. 수많은 그  종류를 갖다가 자기에게 비추어 보면 자기는 다음 시간에 어찌 될지 거기에  대해서 안 죽겠다는 그런 아마 자신을 가지는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서 살아라  그날을 사모하면서 살아라. 사모하되,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아라.' 그  간절이라는 그 뜻은 우리의 생각을 다른 데 두지 말고 있는 걸 다 거기에 다  기울여서 생각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남은 것이 없이 거기에다가 생각을 다  기울이라.'  무슨 날? 나는 죽는다 하는 죽는 날,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모든 것은 다  불덩어리가 돼진다 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날을 생각하고 살아라! 계산은  그날을 두고 계산해라! 그날에 불타 없어질 것인지 그날에 없어지지 아니할  것인지 이것을 기준해서 계산을 해라! 그날에 없어질 것이면 그것을 있다고 네가  평가하지 마라! 그날에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이라면, 영원한 존귀의 것이라면  세상이 몰라 줘도 너는 그것을 높이 평가해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날을 생각하면서 그날을 두고 평가하면서 사는데 간단합니다.

그날에 가치있고 그날에 우주와 영계를 하나님 앞에 상속받고, 모든 존재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 제사장으로 중보자로 영접함을 받을 것은 거룩한 행위와 경건  요 두 가지뿐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 두 가지뿐입니다.

 온 세계가 찬란 하다고 환영과 칭찬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이 다  뭉쳐서 이것만은 가치있다고 놓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인간 대  인간에게 인간의 다수가 세력있지, 조물주 대 인간은 인간의 다수 그까짓 게  아무 소용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코에 호흡있는 그까짓 것을 수에 헤아릴 게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대 인간에게는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크고, 두 사람보다 세  사람이 크고, 그 수의 권위와 가치와 세력이 있지마는 이 조물주에 대해서는  인간의 수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수가 하나님의 법칙을 반대한다고 하나님이  거기에 끌리는 하나님 아닙니다. 많은 숫자가 그것을 환영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그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근본 자존자시요,  근본 그분은 주권자십니다. 아무도 상관 하지 않소. 주권자시오. 그분의 의지도  주권 의지요, 그분의 역사도 주권 역사요, 그분의 목적도 주권 목적이요, 그분의  심판 평가도 다 주권 심판이요, 주권 평가입니다.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그저  그분에게 따라 움직여야 되지 그분에게 거슬리면 그뭐 무엇이 한다 해도  그분에게는 조금도 영향이나 피동이나 충격이나 가감이나 그런 것이 없는 이  절대자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만물을 창조하시고 6천년 동안이라는 이런 긴 기간에 모든 것을 구비해  놓으시고 당신이 추수하려고 하는 추수는 당신이 요구하시는 열매는 두  가지입니다. 거룩한 행실 경건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과 욕, 정의 행동과 욕의 행동, 정의 사람과 정의 행동, 욕의  사람과 욕의 행동, 요 두 가지가 적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배암이 와서 해와를  꾀운 것이 그를 욕으로 꾀웠습니다. 욕으로 꾀웠고, 완전 패망하게 되는 것은  정으로 패망시켰습니다. 배암은 해와를 욕으로 미혹을 시켜서 넘어트렸고,  해와는 아담을 정으로 넘어트려서 패망을 시킨 것입니다. 이 정과 욕은 우리  인류 시조 때에 우리를 죽인 악령의 방편이요, 독이요, 무기입니다. 지금도  그때와 꼭 같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예수믿는 사람들은 정과 욕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예수믿는 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름을 가지고 중생된 사람이라도 정과  욕으로 살 때에는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지금 멸망을 만물 가운데에서 마련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큰 사실을 하루 한 번씩 생각할 것이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이나 1년에 한 번 생각할 것 아닙니다. 이 생각이 떠날 때는 자는 사람입니다.

이 생각을 가졌을 때에 깨어 있는 사람이요. 이 생각에 준해서 이 생각으로 살  때에 그때가 영생입니다.

 산 행위입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이 시간에 머물러 사는 이 모든 현재라는 이  시간을 우주의 종말 시간, 자기의 종말 시간, 그 시간에다가 근거를 두고  현재라는 이 시간을 살피고 나비어야 합니다. 이 현재라는 시간을 우리는  나비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주와 자기 개인의 종말 시간 그것을 떼 놓고 현재라는 시간을  어떤 가치 있고 분망하다고 해서 거기에 이 현재라는 시간을 연관시켰으면 벌써  그 사람은 죽은 생활입니다. 신앙으로 자는 생활, 자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별별 천태만상의 소망 중에 삽니다. '나는 학생으로서는 공부를 해서  어떤 출세 입신 양명을 하겠다! 성인이 되면 나는 어떤 사업을 해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 어떤 지위나 권세나 잡았으면 내 목표를 어데다 두고 하겠다!' 이렇게  수많은 자기 희망, 욕망 이것이 가득차서 동서양을 막 헤매면서 줄을 널어서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그날의 소망, 이 소망으로 움직임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다  죽은 생활입니다. 다 죽은 자요. 정신없는 자입니다. 스스로 속는 자입니다.

그는 만물에게 저주받고 자기가 자기를 저주하는 그 일 이 조만간에 닥쳐올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성도들에게 '그날에 소망 둬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봐라! 그날에 소망을 두라!' 말입니다. 그 날에 소망을  둬라! 간절히 사모하라! 네 모든 생각을 거기에다가 집결시켜라! 집중시키라! 네  생각은 거기에 집결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네 현재 현재에 뻗어 나오게 해라!  뿌럭지를 거기에 둬라! 네가 수많은 인간들이 희망하는 생활 할지라도 네 소망은  그날에 두고, 그날에 소망을 이루기 위한, '모든 현실의 이것은 다만 처소라.

그날의 소망을 이루는 처소라, 그날에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이용되는  이용물들이라. 조물주가 이거 하라고 나에게 어느 기간동안 자유로 활용하도록  해주신 선물이라.' 하는 것을 기억해서 우리는 현실마다 이 두 가지를 두고 게속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무엇을? 네 현실에 정과 욕의 생애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생애냐? 요 두  가지입니다. 어느 것이냐? 우리는 이것을 평가해 보지도 비판해 보지도 아니하고  만물보다 거짓된 흉측한 죽였어야 해독이 없는 마땅히 죽여야 하는 이 정욕,  이것에게 끌려 가지고 그것에게 미혹을 받아서 자멸하는 정의 성공 욕의 성공 이  두 가지 성공을 위해서 애낌없이 투자해서 달립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제딴에는 성공을 했다, 성공이 됐다고 만족을 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일반인이 다 이것이 일반인입니다. 여기에서 특수한  특수인,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이 땅에 것들을 생각지  마라! 상대하지 말아라! 하늘의 것을 상대하라!' 우리는 혈육의 정이든지,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움직이기는 무슨 정으로 움직이나? 혈육의  정으로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는지? 혈육의 정 그것에게 내가 피동되어서 혈육의  정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동류에 정의 생애를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남녀 이성에 이성 정의 생애를 하고 있는지? 청각 '감'의 정인지  시감의 정인지, 무슨 지금 이 정으로 내가 움직이고 있는지? 이것을 우리가  현실에 살펴서 내가 땅에 인간에 가진 수많은 그 정 그것이 주장이 돼 가지고  그대로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성신의 감화에 내가 감동 되서 그 감동으로  살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정으로 사는 것은 멸망입니다. 어떤 정으로 살았든지  멸망입니다. 그 정으로 고민한 것도 헛일, 기뻐한 것도 헛일, 욕심낸 것도 헛일,  노력한 것도 헛일, 성공한 것도 헛일입니다.

 영원히 타지 않고 망하지 아니할 것은 성신의 감동이 움직이는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 만입니다. 우리는 영감으로 가정 생활할 수 있고, 영감으로  부부 생활 할 수 있고, 영감으로 세상 모든 생활을 할 수 있어, 모든 현실에.

영감 생활을 그 현실에서 연습합니다. 영감 생활을 그 모든 현실에서  실험합니다. 모든 현실에서 영감 생활을 성장시킵니다. 발달시킵니다.

연단시킵니다.

 자기가 어떤 욕이든지, 어떤 사람은 물욕 안일욕 행락욕 뭐 지위 권세 별별  욕심, 우리는 인간의 욕심으로써는 살 수 없는 사람 됐습니다.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말은 인간의 소욕,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 신지어 건강욕도  살고 싶은 생의 애착욕도 우리는 가지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소욕으로,  하나님의 소욕으로 우리는 사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욕으로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입을 수도 위생을 할 구도 건강을 가질 수도 살  수도 있습니다. 다 같이 하고 있지마는 그가 자기 소욕으로 사는 것도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소욕으로 사는 것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 정과 욕으로 더불어 우리는 싸워야 하고 여기에  걸리면 뭐되느냐? 여기에 걸리면 그날에 대해서 희미해집니다. 인간의 종말  시간에 대해서 희미해집니다. 그만 거기에 '끌려' 살면 인간의 종말 시간이  희미해집니다. 정으로 욕으로 살아 그것에게 끌려서 살게 되면 그놈이 첫째 하는  일이 뭐이냐? 개인, 우주 종말 시간에 대해서 흐리게 만듭니다. 이 종말, 종말을  가리워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종말 보이지 않게 하고 현실 보입니다. '야! 종말  보지마. 현실! 현실!' 자꾸 현실만 보이기 때문에 그만 종말이 희미해집니다.

종말 시간이 희미해집니다.

 그러기에 지혜있는 자는, 잔치 집보다 초상집이 났다 그말은 인간의 종말  시간이 새로워지는 곳을 가라 그말입니다. 이 정과 욕이 이놈에게 붙들려 놓으면  어쨌든지 그 현실이라는 그 현재라는 이 시간만 자꾸 자기에게 강조해 주지,  인간과 우주의 종말시간이라는 이것을 가리워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종말 시간에 멸망과 구원인 이 종말 성패, 종말의 이 가치를  우리에게 희미하게 합니다. 현재의 가치만 자꾸 보여줍니다. '이게 좋다, 이것  실패했다, 이거는 나쁘다, 이거는 좋다, 이거는 귀하다, 이거는 천하다,' 이 정  운동과 욕의 운동은 시간상으로 종말 시간을 보이지 못하게 하고, 이 현재만  자꾸 내보여서 고만 거기에 눈이 쏠려서 종말을 모르도록 현재의 가치만 자꾸  보여주고 현재의 가치만 보여주고 종말 가치를 우리에게 가리워서 보이지 않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 현실주의로 그날 하루 하루를 살고 인간의 그 종말을 준해서  사는 이 생애를 하지 못하도록 혼미시켜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이거와는 싸워야 됩니다. 그 정이 내 몸 밖에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의 것이 있어 내 안의 것과 네 밖의 것이 연결됩니다. 욕도 내 안에  있는 것과 내 밖의 것이 연결됩니다. 욕과 욕이 단합되고 정과 정이 단합돼  가지고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뱀이 해와를 피울 때에, '네가 하나님 된다. 이렇게 네가  존귀해진다. 이런 참 먹을 만하고 유익될 만하고 지혜롭고 참 아름답다' 할 때에  그 해와를 욕으로 살라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지 않고 네 욕심으로 살라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지 말고 네 욕심으로 살라고 자꾸 꾀울 때에 해와는 그때에  어린고 무식하기 때문에, 자기 욕심으로 살면 멸망이요 성령의 욕심으로 살면  영생이라는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욕심으로 하나 해한 것이 선악과 먹은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차적으로 아담을 넘어뜨리지 않으면 마귀는 완성을 못하는  것인데, 해와는 그때에 정을 가지고 아담을 유혹할 때에 아담은 해와의 정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선악과를 먹어서 인류는 완전한 패전을 했던 것입니다. 첫  아담은 패전을 했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욕으로 꾀우다가 안되면  정으로 꾀웁니다.

 우리 현실에서 반드시, 우리 안에 아직까지 우리가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악령의 그 패잔병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영원 완전히 중생이 됐지마는 우리의 이 심신인 육은 아직가지 죄  아래 있다'고 이랬습니다. 우리 안에 이 욕이라는 이 미혹의 이놈도 살아 있고  정이란 이놈도 살아 있는데, 이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악령은 이것을 일으켜  가지고 우리 현실을 정으로 살도록, 욕으로 살도록 이렇게 애를 씁니다. 그거는  내 정이요, 내 욕심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예수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는 것은 내 정으로 사는 것 아니오. 하나님의 정으로 사는  것이오. 하나님의 정으로 사는 이것을 가리켜서 '그의 영감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정 영감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이요, 우리 욕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욕심인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야 될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항상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넘어뜨릴려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이것이 역사하는 이 역사는 우리에게 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자, 나는 지금 살고 있지마는 지금 추수가 암만  돼야, 지금 암만 수입이 돼도, 암만 성공이 되어도 소용이 없다. 내 수입과  성공은 마지막 날에 있다. 종말에 있다.' 종말 수입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 두  가지뿐이니, 거룩한 행실이, 곧 영감이 거룩한 행실을 이루려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경건을 이루려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당했을 때에는 악령과 악성과 이 모든 죄악들도 단합돼서  역사하지만은 우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 그날의 준비를 하려고 할 때에는  대주재이신 성령이 응원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이 응원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이 진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려고 진리가 기다리고 있고, 우리에게 능력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려고 성령이 기다리고 있고, 허물과 실수가 많은 온갖 잘못된 것을 다  책임지고 보장해 주려고 주님의 공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만 깨어 가지고 이 일을 힘쓴다고 하면 됩니다.

 거룩한 행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그대로 행한 것이 거룩한  행실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넉넉히 찾을 수 있습니다. 정습니다. 나를  표준해서 내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표준해 살려고 하면 환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표준해서 살려 하는 거기에서 어두워지고 거기에서 함정에 빠집니다.

 자기 표준하여, '내야 어찌 됐든지 하나님이 어떠냐? 내야 죽든지 살든지  괴로와지든지 손해나 유익이 어찌 됐든지, 내야 어찌 됐든지 내 몸에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게 내 생애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이 뭐이냐?'  하나님의 뜻이 뭐이냐? 자기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두어지지 자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소원이 뭐이냐? 하나님의 뜻이 뭐이냐?' 요것만 찾으려면 환하게  가르쳐 줍니다. 핑계 못합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욕, 하나님의 소욕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소욕, 내야 어찌 됐든지 내 자체는 하나님의 소욕대로 살 자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자이니 요대로 살 요것만 찾으면 더듬어지지 않고 서슴지  않습니다. 바로 즉각 찾아집니다. 이럴 때에 이 생애가 절대로 빈약한 생애나 이  생애가 곤고한 생애나 천한 생애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을 가리켜 성령이라  했는데 -이 하나님이 이 역사를 할 때에 그분이 전적 도우려고 책임지고  있습니다. 우주를 통치하고 나열하는 이 진리가 이렇게 살 때에 우리를 도우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 불의, 하나님과 대립된 이 모든 어려운 문제,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이 문제를 시간 시간마다 걸리면 해결해 주고 걸리면  해결해 주려고 이 공로가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순서가 전부가 이렇게 사는 자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고 돕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날에 소망을 가지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으로 자기의  정과 욕으로 더불어 살려고 하는 이것을 대항해서 싸우는 여기에는 응원대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웅원대요, 진리가 응원대요, 예수님의 공로가 응원대요,  모든 피조물이 다 응원대요. 움직이는 모든 순서 그 순서, 이미 작장된 그  순서가 전부 응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걸음을 걷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의 입장에  섭니다. 진리도 우리의 원수입니다. 예수님의 이 공로도 대립입니다. 모든  존재도 대립입니다. 모든 움직이는 그 역사가 전체가 결말적으로는 우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공은 종말에 있는 것인데 그 종말에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그, 이룰 수 있는 그 성취는 우리의 현실에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은  종말에 있는 종말 것인데, 종말 것을 언제 만드느냐? 우리가 현실에서 만들어야  됩니다. 종말 것을 현실에서 만들어야 되는데, 현실에서 만드려고 하면 이  싸움이 있어야 됩니다.

 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마련하려고 하고 이 정과 욕은 제 정대로 욕대로  이대로 살도록 하려고 하는 이 두 가지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싸움 그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세력 속에 끼여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유한하지마는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주권을 하나님이 맡기셨습니다.

 주권을 맡기셨기 때문에 거룩과 경건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역사하는 이 다섯  가지 이 세력이 우리를 응원하고 기다리고 있지마는 내가 부인하면 안됩니다.

내가 부인하면 만물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공로도 소용없습니다. 진리도 성령도 내 현실에서는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이 악령의 역사의 그 정도 욕도 이 악령도 악성도 그 정의 정과 욕이 악성이요,  그 생애가 악습이요, 그 발원자가 악령인데, 이것들이 아무리 별별 수단 방법을  가지고 나로 하여금 종말 시간을 보지 못하게 현재만 보고 그날의 성패는 보이지  않고 현재의 성패만 보이면서 별별 유혹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사이에 끼어서  주권자입니다. 내가 이것을 물리치면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물리칠  때에 성령도 진리도 주님의 공로도 만물도 전체는 나를 협조해서 이것을  버립니다. 물리칩니다. 내가 물리치면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아무리 나 위해서 공로를 크게 베풀었지마는 내 현실에서 내가  하나님을 배척하면 하나님은 배척을 당해야 됩니다. 진리를 배척하면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면 하나님의 뜻은 배척을 당해야 됩니다. 주님의 공로를 내가 배척해  버리면 주님의 공로는 나에게 배척을 받아야 됩니다. 나는 이것들과 합해집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활동한 내라는 이 요소 내 요소, 내 요소는 중생된 영도  거기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성화된 기능도 가담하지 않습니다. 순전히 저는 죄  아래 있는 것이 이리 붙으면 살 터인데, 이리 붙지 않고 이리 붙으면 그것은  영원히 그로 더불어 단합됩니다. 그로 더불어 영원히 단합되면 그것은 둘째  사망으로 영원한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 현실에서 여기에서 자기가 이것을 물리치고 주님을 향하는  이보다 주님을 더 대접하는 일이 없습니다. 더 기쁘시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더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의 현실에 요 두 가지 세력 속에 들어 있는데 '그날을  바라보라. 그날에 소망을 두라! 네가 현실 이 두 세력 속에 들어 있는 이  현실에서 그날에 소망을 내가 지금 가지고 해라! 지금 현실을 소망을 가지지  말아라! 그날에 소망을 가지고 이 두 틈바구니 속에서 네가 그날에 소망을  당겨서 그날에 소망을 가지고 이 현실을 살아라! 그날을 생각하면서 이 현실을  살아라!'  그날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만이 남아 있는 것이요, 나머지기는 다 불타고  없어지는 것이니까 이 시간에 네가 거룩과 경건을 취하느냐, 거룩과 경건을  취하느냐 네 정대로 살고 네 욕심대로 사느냐? 하는 이것이 결정되는 것이니까  너 현실에서 어느 것을 차지 하겠느냐?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준 자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투요 우리의 생애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모든 존재는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열해  뒀다. 이 역사가 끝나면 다 마지막에는 불살라 버리고 만다. 이 역사가 끝나면  너는 이 세상에서 떠나야 된다. 있는 동안에는 멸망이냐 구원이냐? 이 두 가지를  네가 자유대로 어느 것 취하든지 취하라고 모든 것을 구비해 놓았고 이 사회에서  살게 한다. 네 현실에는 네가 보이지 않는 강한 정과 욕의 세력이 네 왼쪽에서  지금 너를 당기고 있다. 네 오른편에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 너를 당기고  있다. 너 어데 속할 것이냐? 어디로 갈 것이냐? 어데 속할 것이냐? 이 두 가지를  판정 지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룩한 행실이요 경건이냐? 네가 정과 욕의 행실이냐? 이 둘 중에 어느 것이냐?  어느 것이냐? 이것이 결정되는 현실이니 어느 것이냐? 네가 참고로 그날을  바라보라! 그날을 바라보라! 네가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그날을 바라보라! 네  생각이 이 현실에 있지 말고 그날에 있거라! 그날에 있는, 그날에 네 생각을  그날에 옮겨라! 네 생각은 전적 그날에 두고 이 현실 처리하라! 네 생각이  그날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처리하라! 그날을 소망하면서 현실을 처리하라!  그날을 소망하고 그날을 생각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 정과 욕에 다 넘어져서  실패하게 된다. 인생아,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에 소망, 그날에 소망 그날에 생각  이것을 가지고 네 현실을 밟아라! 이 현실에는 왼쪽에 무서운 정과 욕이라는  강한 세력이 너를 끌고 있고 오른편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 너를 끌고 있다.

어느 것이냐? 오른편에 속하면 하나님도 네 편이요, 진리도 네 편이요, 대속의  공로도 네 편이요, 지음을 받은 모든 존재도 네 편이라! 모든 움직임의 순서들도  요렇게 사는 자를 위해서 다 정해 놓은 순서라!  이러니까 담대히, 네 현실에서 담대히 정과 욕을 배척해라. 그놈은 너의 인류의  조상을 죽였고 너를 죽였고 다 죽여 삼키고도 그 정과 욕은 삼키고도 아직까지의  배가 덜 차서 너도 지금 삼킬려고 기다리고 있다. 네가 일생동안에 정과 욕에  삼켜서 얼마나 삼켜졌느냐? 얼마나 죽었느냐? 남은 때도 마지막 시간까지 그놈은  삼키려고 날뛰는 것입니다.

 인생아! 네가 지금은 무슨 움직임으로 살고 있느냐? 네가 노력하고 경영한 것이  다 끝은 네 경영에 대해서나 현재에 지금 노력에 대해서나 네 희로애락의 그  모든 것이 뭐이냐? 정의 피동이냐 욕의 피동이냐?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피동이냐 진리의 피동이냐? 네가 이루어놓은 것이 거룩한 행실이냐 경건이냐?  정욕대로의 성공이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해놓은 건 뭐이냐?  이것을 우리가 판단해서 살아야 됩니다.

 아무리 좋아 봤자 홍수 속에 다 매장된 것처럼 오면 다 그거 별별 그 생각할 것  없이 많이 알아봤자, 많이 있어봤자, 많이 좋아봤자, 많은 것들이 지지패가  되어서 많은 것이 지지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 이분 한 분이 지지해야 됩니다.

이분 한 분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시간에 자기의 정에 악한 세력과 욕에 악한 세력 이놈에게 끌려서 울고 불고  웃고 욕심내고 뛰고 굴리고 날뛰고 발동하는 이놈이 원수인 줄 알아야 됩니다.

정과 욕 이놈이 원수인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정과 욕으로 살 자 아닙니다.

우리는 영감과 진리로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영감과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야  될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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