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선지자선교회 1988년 6월 29일 수야 

 

 본문 : 요 3: 3-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것이 공과입니다. 학생들에게 주입을 시켜서 그 속에 들어 있으면 자기 생활할  때에 이 도리가 나와서 그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좀  복잡한 것을 피해서 간단 명료하게 외워서 그 마음 속에 주입하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 전에 반사 선생님들과 의논하고 공과를 간단하게 그렇게 만들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래서, 이 공과는 반사 선생님들이 다 외워야겠고 또 외우고 자기가 현실에서  실행해 보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외우고 그대로 실행할라고 애를 써서 실행을 하면 어떤 사람은 실행 이 많이  되고 어떤 사람은 적게 되고 힘만 쓰면 실행이 많이 되든지 적게 되든지 실행이  되기는 됩니다. 그러나 힘쓰지 안하면 실행이 안 됩니다. 힘써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깨달음이 있을 것이고 또 느낌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에 그  깨달음에서 힘도 나오고 꼭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기억하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그 필요성도 자기가 깨닫게 되고 그런 간절한 깨달은 마음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학생들속에도 반사 선생님의 깨달은 마음과 같은 마음이 그 속에  생겨져서 학생들도 그대로 실행을 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간단하다고 해서 그만 그저 공과를 어디든가 처박아 두고 그렇게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외우기 쉽고 실행할라고 애를 쓰기 쉽도록 해서 이라는  것인데 힘을 써도 모자라니까 될 수 있는 대로 힘을 쓰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해 놓은 것인데 그걸 또 거기서 게을 파 가지고 힘을 쓰지 안하고 게을  파면 이거는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행동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제목을 주욱 외우고 요절 외우면 그만 그 공과를 이다음에라도 알 수  있을 만치 제목은 학생들은 일 년 제목을 주욱 같이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또  요절도 할 수 있으면 일 년 요절을 죽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이래서, 앞으로는 그 상을 줄 때에 일 년 외운 제목과 요절을 외우는 것을  우등상으로 그 실력상으로 주는 그런 제도를 하나 세우려고 생각합니다. 제목과  요절을 외우는 그 사람이 실력 있는 사람으로, 속은 모르지만 외부적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이라 해서 시상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론에, 이 서론.

 아담으로 난 사람은 다 지옥 갑니다. 아담으로 난 사람은 다 지옥 갑니다.

그러면 우리도 다 아담으로 난 사람이기 때문에 다 지옥 갑니다. 지옥에 가지는  안했어도 지옥 갈 것으로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예수님께서 거기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죽으시고 지옥 가시고 우리를 거기서 구출해서 구원됐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첫째 아담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원죄와 본죄로 다 지옥 가게  됐는데, 지옥 가도록 돼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지옥에서, 구출돼서 다 하늘나라 가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둘째 아담으로 거듭난 자는 다 천국 갑니다 이랬습니다.

 거듭난다는 뜻은 중생이라는 말인데 중생이라는 것은 한문 글자로 해서  중생이라 이라고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 나라 말로 거듭난다고 이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중생이라 하면 외우기는 쉽지만 거듭나는 이 뜻을 알기가 좀  어렵기 때문에 거듭난다는 말을 써서 거듭난다 이랬습니다. 또 성경에서 거듭난다  이랬고.

 거듭난다 말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 있고,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 있고 또 아담에게서 우리가 쪼갱이가 떨어져 나와 가지고 사람이 됐습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난 자손들은 다 첫째 아담의 뿌스러기가 떨어져 나와 가지고  그것이 자꾸 커서 이렇게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차 나무가지를 꺾어서 잘 관리하면 뿌리가 나 가지고 새로 그 나무가 돼서  살게 됩니다. 그것을 뭐라 하더라? 꺾꽂이? 저 사람은 원예학교 졸업했기 때문에  그거 알아요. 꺾꽂이. 꺾어서 심으면 납니다. 꺾꽂이와 같이 전부 첫째 아담에게서  난 자손들은 다 그렇게 났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꺾꽂이로서 아담에게서 갈비대  하나 꺾어 가지고 이제 그게 하와가 됐고 이제는 인류 조상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조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자손들은 아버지에게서 조그매  꺾어내고 어머니에게서 조그매 꺾어내고 두 군데서 꺾어내 가지고 잘 보호하면  자라서 사람이 됩니다.

 전부 그러기 때문에 첫째 아담에게서 난 자손들은 다 분식입니다. 나눠 가지고  번식된 거 분식, 나눠 가지고 번식이 돼서 분식이라, 첫째아담의 자손은 분식  방편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번식하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은, 둘째 아담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두번째 난  사람들은 분식이 아니고, 분식이 아니고 연합식입니다. 연합식.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된 자가 되면 또 부활에 연합된자가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합된 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거듭난 것입니다. 중생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접선을 못 합니다.

 왜? 성령은 지극히 거룩하기 해문에 우리가 접선하면 우리는 즉시 전멸이 돼  버리고 맙니다. 마치 불에 섶이 대이면 섶이 불에 닥치면 타 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이요 완전자시기 때문에 우리의 더러운 것이  닥치면 완전이기 때문에 불완전이 절단나 버립니다. 하나님은 깨끗이기 때문에 이  더러운 것이 닥치면 심판 받아서 당장 절단나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접할 수 없는데 예수님 중보자로 인해서 접하게  됩니다. 예수님 중보자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대형해서 우리 죄를 다 대신  도맡아 가지고 형벌을 대신 받으셔서 이 죄를 없앴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해서  형별받을 일이 없고 죄 없는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혼자 어떻게 그리 했는가? 예수님은 한 사람인 그 사람의  인성과 또 하나님이신 그 신성과 둘이 한 격위가 돼 가지고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것을 대신했기 때문에 유한한 것이 숫자가 암만  많아도 무한한 자로서 대속할 때에 대속하고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유한이  많다고 해서 무한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유한이 암만 많이 모아도 무한에  거기에 차지 못하고 비교가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한 예수님이 우리 많은 사람을 다 대신 사죄했고 대신 행해서  칭의했고 대신 화친을 일으킨 것은 예수님은 인성뿐이라면 한 사람밖에는 그렇게  대속할 수밖에 없는데 신성이 같이 하기 때문에 대속하고도 남음이 무한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우리들이 믿어서 이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나,  대속을 믿으나 법적으로는 사죄가 다 됐지만 우리가 살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래서 대속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우리가 연합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대속을 인해서 진리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와 우리가 연합해 가지고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거듭난다, 중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데에 속 뜻은 하나는 죽었던 것이 새로 살아난다는 그런 뜻을  가졌고 하나는 성령으로 났다, 성령으로 출생했다, 성령으로 생겨졌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하나님이시니까 성령은 신적 요소인데 신적 요소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인적 요소가 됐다 말 아닙니다. 창조주의 요소가 피조물에게 와서  피조물의 요소가 됐다 말이 아니고 창조주의 요소가 피조물 요소 속에 들어와  가지고 피조물들을 살렸으나 항상 창조주는 창조주요 피조물은 피조물이지 그  원소가 바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요소가 인적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신적 요소가 인적 요소 속에 들어와서 역사해서 인적 요소가 신적  요소의 그 능력을 힘입어서 산 행위 빛의 행위 영생을 하기는 하지만 그 힘이  우리를 붙들고 해서 그 힘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사는 것 아니기 때문에 억만 년 살다가도 그분과 끊어진다고 하면 그는 다시  즉시 죽어 버리고야 마는 그런 관계로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세상에서 무엇으로 비유할라 해도 비유가 잘 안됩니다. 왜?  이 세상 물질계에 있는 것은 다 유한한 것들이기 때문에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한 것을 뭐 비유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무한한 것이 있어야 무한을 비유할  터인데 무한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유한한 것으로 비유를 한다고 해도 그 비유가  백프로 들어맞는 것이 아니고 억억만분의 일도 들어맞지 않지만 혹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한다면 사람은 마치 우리 예배당에 있는 이 전구와 같습니다.

전구. 전기불 켜는 저 전기 다마, 전구. 전구와 같은데 저 전구는 어떻게 만들어져  가지고 있느냐 하면 전기가 오면 전기를 받아들여, 가지고 환하게 빛을 낼 수  있도룩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전기가 오면 그 전기를 받아 가지고 빛을  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것이 전구입니다.

 그러나, 그 전구는 아무리 잘 만들어져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전기에 접선되지  안하면 거기서 빛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영육으로 만들어졌는데 영육으로 만들어진 이것은  하나님의 세 가지 능력 진리와 성령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이 세 가지 능력을  접선할 때에 그때에 접선된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의 힘으로 영감의 힘으로  대속의 공로의 힘으로 이 중생된 사람은 진리의 행위를 할 수가 있고 영감의  행위를 할 수가 있고 또 죄 없는 행위를 할 수가 있고 공심판 통과하는 의로운  행위를 할 수가 있고 완전자로 더불어 화친한 부자간 행동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구가 환하게 블을 켜고 있는데 불을 켜고 있는 것은 그것은 전기의  힘으로 불이 켜 가지고 있는 것이지 전구의 힘으로 불이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또 전기가 아무리 있다 할지라도 그 힘을 받아 가지고 빛을 낼 수 있는  전구가 없으면 전기는 아무리 여러 백 마력 전기가 와 있어도 빛은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그냥 시커멓게 돼 가지고 있는데 뭣이 닥치면 버쩍 타서 없어지지만  빛은 내지는 못합니다.

 제가 그 일본 있을 때에 보니까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 수천 마력인데 선이 딱  끊어져 있는 것은 선이 딱 끊어져 있을 때는 그저 철사지 아무 표도 없습니다.

철사지 아무 표도 없어도 그 선에 뭐이든지 닥치면 타 버립니다.

 그뭐 쇠도 닥치면 타고 나무도 닥치면 타고 사람은 보니까 접선하니까 그만  새카매져, 새카맣게 타는데 붙어 타지 안하고 그 탁 그란니까 대이니까 탁  그라면서 탁 튀어 나가는데 벌써 새카탕게 숯덩이만 하나 툭 떨어져 버려. 그래도  아은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이, 단독 가지고는 안 되고 이 세 가지 능력이 사람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한 참 사람의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진리가  사람 행위를 할 수 없고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성령이 사람 행위를 할 수가 없고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피공로가 사람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능력이 사람들과 접선될 때에 그 사람은 진리의 생활할 수 있고 영감 생활  할 수 있고 사죄, 칭의, 화친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이 중생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전구가 전기에 접선되면 이 볼을 켜는데 불을 켜 가지고 환하게 빛이  나오는데 그러면 전기가 어디까지 가 가지고 있습니까? 이 전기가 전구의  스위치까지만 가 있습니까 저 안에 있는 선까지 끝까지 그 전기가 가 가지고  있습니까 접선되는 데만 가 가지고 있습니까? O부장. 발전소? 발전소라?  발전소에서 전기가 왔겠지. 그러면, 전기가 전구에 대이면 이 대인 데 접선만  됐습니까 이 전기가 전구 저 속에 빛이 나는 데까지 전력이 가 가지고 빛의  전력으로서 그렇게 빛이 나옵니까 여게 딱 접선만 되니까 나옵니까? 접선만 되면  나옵니까 그 전기가 그 속에 빛이 나오는 데까지 끝까지 전력이 들어가 가지고  그 전력의 힘으로 나옵니까?  접선만 되면 나온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끝까지 전력이,  접선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전력이 끝끝내 전력이 가서 있는데에 빛이 나오지  전력이 거게 끝까지 안 간 데는 빛이 안 나오고 간데만 빛이 나오는 줄로 그렇게  아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그 이런거야 다 알 수 있지 않소? 가는 데까지라,  가는 데까지. 가는 데까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의 행위를 할 때는 내가  입으로 진리의 말을 하고 내가 또 생각으로 진리의 생각을 하고 내가 성질로  영감의 성질을 하고 또 내가 손으로 영감과 진리의 행위를 하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무죄 행위, 의로운 행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행위를 이렇게 할  때에는 내가 손으로 그 의로운 행위를 하면 이 피와 성령과 진리의 힘이 내 손  끄트머리까지 와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와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와서 있습니다.

그 전기 비유는 바로 맞지는 안하지만 비슷합니다. 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그 빛의 행위 하는 것은 순전히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그 능력으로 인해서 내가 빛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1장에 말하기를 세례 요한은 그때 세상 빛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이렇게 존경을 하고 따랐는데 사도 요한이가 말하기를 세례 요한은 세상의  빛이 아니라 이랬다 말이오. 빛이 아니라.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라 했으니까 우리 성도들이 빛이라 했는데 우리 성도들  자체가 빛입니까 빛을 맡은 자입니까? 빛입니까 빛은 맡은 자입니까? 네, 빛이  아닙니다. 빛은 진리, 성령,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만 빛인데 이 세 가지 능력이  나를 통해서, 그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내 행위가 세상에 빛이 된  것이지 그 능력을 힘입어서 그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해서 내가 빛의  행위를 한 것이지 우리 자체에는 빛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라니까 잘못 알고 우리가 다 빛인 줄 알지만  우리 자체에는 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능력이 온 것만치 우리에게는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그렇게 말했어. '그 가운데 생명이 있으니' '그 가운데 생명이  있으니' 요한복음 1장 4절 이하에 있는데 그 가운데 생명이 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가운데 생명이 있다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다른 말로 한번  해석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 생명이 있으니 하는 말이 다른 말로 해석하면 무슨  말입니까? '그 가운데는 생명이 있으니' 저 OOO목사님. 그 가운데에는 생명이  있으니 그 말은 네, 대답이 맞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과 연결이 있다  그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가운데 생명이 있으니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과  연결이 있다,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되는 연결이 있다.

 '생명이 있으니' 연결이 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의 사람들의 빛이라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연결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말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과 연결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말입니다. 세 가지에 연결되면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나타난다 그말입니다. 맞아요, 이치가 맞아요? 그거는 뭐  이렇게 말해 주면 그건 어린 아이도 다 알 수 있는데 모를 게 없어  이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거듭나는 것을 말씀해 주시니까 '거듭나다니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는데 다시 또 어떻게 두 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묻는 것이 자기의 지식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라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거듭난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에는 육으로 나왔고 두번쩨는 성령으로 났다, 성령으로 너희들이  다시 살아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으로 난 거는 영이니' 그러면 우리가 중생은, 중생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는데 중생은 영이 다시 살아난 것을 가리켜서 중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의 기능이 현실에서 살아나는 것은 죽은 기능이, 우리의 마음과 몸의  심신의 기능이 죽은 기능이 살아나는 것은 그것은 중생이라고 합니까 성화라고  합니까? 성화라고 합니다. 그건 중생이라고 하지 안하고 성화라고 합니다.

 또, 우리의 심신의 기능과 몸이 예수님 재림 때에 한목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그것은 뭐라고 말합니까?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부활. 성화. 중생.

 그러면, 이 심신이 거듭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성화라, 변화 받는다 성화라 또  아주 살아나는 것은 부활이라, 또 영이 살아나는 것은 중생이라.

 그러면 우리가 중생했다. 중생한 사람이라 말은 영육이 다 중생됐다 말입니까  영만 중생됐다는 말입니까? 영만 중생됐다는 말입니다.

 이런데, 내가 며칠 전에, 옛날 OOO목사님이 나한테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 그게 성경상 틀렸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 이단으로 몰릴  터이니까 아예 그걸 좀 연구해 가지고 고치라 하는 그 편지를 내가 보니까  편지가 한 십여 장이 만리 장서로 와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입니다.

 십여 장이 만리 장서로 와 있는데 내가 그걸 보고 참 그 OOO목사님에 대해서  존경을 했습니다. 그분이 틀렸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만리 장서를 써 가지고  내한테 수차 했기 때문에 그 다시 그 편지를 볼 때에 마음에 그분의 참 성의가  고맙고 또 자기는 그것이 내가 그래 말하는 게 이단인 줄 알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단되면 안되겠으니까 살려 구원해야 되겠다 하는 그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편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내가 OOO목사님께 전화해 가지고 감사의 인사를 할라고, 암만 틀린  말은 틀린 것이지만. 틀린 말이지만 자기 딴에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것이라  말이오. 그 전화를 할라고 했는데 과거 전화하는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니까,  교환소를 통해 전화를 하니까 그런 사람이 없다 이래서 전화를 못 하고 그 뒤에  전화 번호를 좀 알려 달라고 OOO전도사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보니까 그 편지에 쓰기를 항상 그래 써놨습니다. 중생된 영혼이라  이렇게 써 놨어. 그러면 영과 영혼을 구별하지 못한 데에서 착각이 생긴  것입니다. 중생된 영혼은 없습니다. 중생된 영이지 혼은 중생하지를 안 했습니다.

그거는 잘못 알고 말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분들은 영, 혼을 같은 것으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혼은 육이요 영은 영물입니다.

 이래서, 그래 니고데모가 그래 말하니까 말하기를 '육으로 난 자는 육이요' 첫째  아담의 자손은 육으로 났고 또 둘째 아담의 자손은 이것은 성령으로 났습니다.

 첫째 아담의 자손의 이 육으로 난 것은 영은 그때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그렇게  했고 부모의 것이 분식돼 가지고 우리에게 생겨진 것은 어떻습니까? 영육입니까  육뿐입니까?' 첫째 아담에게서 분식돼서 난 자는 영육입니까 육뿐입니까? 네,  요것이 세계에 신학에 문제돼 있는데 육뿐입니다. 육뿐입니다. 영은 부모에게서  나온 영이 아닙니다. 영은 날 때 하나님이 그때에 창조하셨습니다.

 이래서, 부모의 영육이 분식돼 가지고 이래 와 가지고 사람이 되느냐? 이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유전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유전이라. 유전이라 하는 유전성으로  그렇게 보는 신학들이 있고,  또 하나는, 이미 많은 영들을 만들어 놔 놓고 한 사람 나을 때 한 영씩 한 영씩  육에다 끼워서 이렇게 보내서 영이 많이 쌓여 있다고 전재설로서 주장하는 것도  있습니다. 엉이 이미 많이 만들어져 가지고 있다 하는 전재성, 전재성으로 이렇게  말하는 주의도 있고,  또, 그 영을 창조성으로 이렇게, 그 사람의 육은 부모의 육을 분식 시켜서 육이  되는데, 심신이 분식되어서 심신이 되는데 분식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은 직접  만들어 내셨다 이래서 창조설 이 세 가지 설이있는데 나머지기 말하는 거는  그까짓 거 말할 것도 없고 세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 제일 정통이요 성경대로  바로 된 것은 창조설입니다. 영 창조설. 영은 창조돼. 영 창조설이기 때문에 영은  부모에게서 분식된 것이 아닙니다.

 이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하는 것을 예사로 보고 있지만 그것은  부모에게서 난 것은 육만 났지 영은 부모에게서 유전으로 난 것이 아니고 거기서  분식돼 나온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여게서 또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배우는 것은 이 일반 교계에서 자꾸 생각지 안하고 논리하지  안하는 그런, 자꾸 신앙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게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이  겉어머리서는 괜찮지만 거기 좀 더 들어갈라 하면 또 새로 더 들어가는 것만치  거거서 또 구별이 있어야 되겠고 또 거기서 바로 또 찾아야 되는 것이지,  아무리 서울 가는 사람이 김천까지는 바로 갔다 할지라도 김천서 더 가지  안할라면 이미 간 그 길이면 됩니다. 더 갈라 하면 그다음에는 뭐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또 새 길을 또 거기서 찾아가지고 가야만 서울까지 갈 수 있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도리도 과거 십팔 세기까기는 그런 정도로 믿었지만  20세기에 지금 이 모든 마귀의 이거 원자가 다 발견되고 사람이 달에까지 갈 수  있는 이런 이 세대가 됐기 때문에 지금은 이 진리를 더 연구해 가지고 더 밝아서  더 바른 진리를 발견해야 되는데,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교회에 청년이 없다고  합니다. 왜 청년이 없느냐? 이 과학만 해도 하늘나라 가는데 뭐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늘나라 가느냐? 그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거 얼토당토 안한 소리지만  거기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교회 청년이 별로 없어. 다 모두 노인들만 앉아 있지,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하늘나라 가고 거듭나지 안한 사람은 다 지옥가는데  거듭난다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서 새로 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은 뭐이 나온 겁니까? 육이 나왔습니다. 육이 나왔어. 육이 나왔는데, 다시 나야  된다는, 다시 나야 된다는 것은 다시 살아나야 된다는 말과 다시 네게 네라는  존재가 생겨나와야 된다, 네라는 존재가 다시 생겨나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와 가지고 역사하기 때문에 나에게 새로운 이 자체가, 새로운  자체가 생겨나오는 게 아니라 자체의 힘이 새로 생겨나왔고 자체의 움직임이  새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중생한 후에, 영이 중생하고 이제 믿음으로 살  때에는, 마음과 몸이 믿음으로 살 때에는 그때에 그 사람의 행동하는 것이 과거에  있던 행동입니까 새 행동입니까? 새 행동입니다. 과거에 있던 힘으로 삽니까 새  힘으로 삽니까? 새 힘으로 삽니다. 새힘이 생겨졌습니다.

 새 힘이 생겨졌고 새 지혜가 생겨졌고 새 인격이 생겨졌고 새 온전한 사람이  생겨졌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생겨졌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참사람이라 새사람이라 말합니다. 온전한 사람이 생겨졌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생겨졌으면 뭐로 말미암아 생겨졌습니까? 성령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진리로 생겨졌습니다. 대속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생겨졌습니다.

 생겨졌으면 진리가 요거 똑똑히 들어 진리가 내가 됐습니까 성령이 내가  됐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내가 됐습니까? 내가 된 것 아니고 내것  됐습니다. 요거 잘 구별해요. 내가 된 것 아니고, 내 자체가 된 것 아니고 내것이  됐습니다. 성령과 진리와 대속의 공로가 내것이 됐습니다.

 내것이 됐다 말은 그것을 내가 소유했다 말입니까 내가 그것의 것이 됐다는  말입니까? 내가 그것의 것이 됐다 말입니까 그것을 내가 소유했다는 말입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소유하지 작은 자가 큰 자를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소유하는 방편은 작은 자가 큰 자의 것이 돼 가지고 큰 자에  들어가 가지고 큰 자의 것이 완전히 되어서 큰 자에게 쓰여지면 작은 자가 큰  자의 것이 되면 큰 자의 그 모든 것은 작은 자 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요거 이해가 됩니까? 요거 얼마나 세밀하고 구별한 논리인데 이걸 그냥  껍데기로 뭐 그래 가지고는 이런 논리를 듣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거듭난 것은 그 능력에게 내가 붙들리고 그 진리에게 붙들리고 성령에게  붙들리고 예수님의 대속에 붙들려서 내대로 살지를 못하고 완전히 자유를  박탈당해서 완전히 부인 당하고 진리가 나를 붙들고 살고 영감이 나를 붙들고  살고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이 나를 붙들고 살기 때문에 내 생활은 전부 진리  행동이요 영감 행동이요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행동이라. 요 세 가지  행동이라.

 이 세 가지 행동은 내가 하는데 이 세 가지 행동을 하는 근거가 내가 아니고 이  세 가지 행동은 내가 하는데 근거는 이제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의 대속이시요  진리입니다.

 요 도리를 깨달으면 눈이 밝아지면 이제 미혹을 받지 않는데 이걸 모두 오늘  기독자들이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종교 통일이니 망령을 부리고 지금,  망령을 부립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면 그렇게 인간이 담대한 짓을 못 합니다. 어떻게 진리를  제가 박차겠소? 어찌 진리를 정죄하겠소? 진리를 거부, 진리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진리하고 하나님하고 하나이지 진리 따로 하나님은,  진리는 거부해도 하나님은 환영할 도리가 절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환영하면  진리 환영, 영감 환영, 예수님의 대속 환영 이 셋은 하나입니다.

 뭐뭣이 셋이 하나, 뭐뭐 서이가 하나라 했습니까? 성령, 물, 피, 이 셋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저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반대하고 제가 말하는 진리는 좋아하고 그  사람하고 저하고 친할 때에는 그 사람 진리를 환영하고 그 사람하고 사이가  벌어지면 그 사람 말하는 진리도 거부하고, 그러면 그 사람의 힘은 진리의 능력에  붙들려 있는 사람입니까 제 주관에 붙들려 있는 사람입니까? 요만하면 환하게 알  수 있어.

 그러므로, 요 공과를 잘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도 이제 그만하면  알았습니다. 이제 거듭나는 것은 현실에 우리가 힘써야 이 거듭난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거듭난 행위를 할 수가 있는데 영은 단번에 거듭났지만 우리 심신은  단번에 거듭나지를 못하고 평생 거듭나야 되는데 언제 거듭나느냐? 현실에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현실에 거듭날라면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현실에 우리가 거듭날라고 힘을 써야  된다 했는데 거듭나는 건 뭘로 거듭난다 말이요? 현실에 우리 심신이 뭘로  거듭납니까? 진리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거듭납니다.

 그러면, 거듭나는 것은 내 자체가 거듭납니까 그 능력이 와 가지고 나를  변화시킵니까? 나를 변화시키고 행동을 새 행동 하게 됩니다. 주관을 그가  주관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그가 주관하고, 그가 주관도 하고 행동도 하고 또 그러니까  대우도 받고 이러니까 내가 한 게 아닌데, 하나님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것이 내가 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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