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과 경건이 자기수입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16일 금새 

 

본문 : 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수님께서 먼저 공중 재림하시고 그 다음에 땅에 재림하십니다. 공중 재림하실  때에는 땅에는 아마겟돈 전쟁이 맹렬해지고 또 일찍부터 예수님 믿고 죽은  사람들은 그때 다시 죽지 안하고 썩지 않는 몸으로 다 부활해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부활한 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과 같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할하신 몸은 우리의 육체와 꼭 같으면서 먹을 수도 있고 안먹고 영원히 살  수도, 있습니다. 또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이 넓어도 좁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주라는 것이 넓지만 우주에 다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한 몸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동양에도 예수님의 부활한 인성이 계시고  서양에도 계시고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부활한 몸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과 꼭 같습니다. 구멍이 작아도 그리 통과할 수 있습니다. 또 구멍이  없어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무쇠 덩어리 속이라도 상관없이 자유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안하고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안하는 몸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제자들과 같이 손잡고 동행했고, 또 옆구리에  못자욱과 창자욱을 보라고 해서 도마가 만져 봤고, 또 그 몸이 안 보일 때는 안  보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는데 들어 오시고 또 같이 이야기  하다가 가시고 난 다음에는 그들이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음식을 같이먹고 또  대접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 부활을 해 가지고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만, 그 몸은 그렇게 부활하지만 기능으로서는 그 기능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있습니다. 부활할 때의 기능은 어떤 기능인고 하니 거룩한 기능입니다. 거룩한  기능이라 말은 모든 것을 구별해서 이것은 죄다 의다 그렇게 구별하는 것이  그것이 거룩입니다. 땅 위에서 거룩을 연습해 가지고 숙달된 기능이기 때문에  영원히 아닌 것을 닥치면 아니라고 즉시 그것을 정죄하고 옳은 걸 취하는 그런  기능이 숙달됩니다. 이래서 그 앞에는 영계에 있는 물질이나 영계에 있는  영물이나 물질계에 있는 물질이나 성도 앞에는 더러운 것이 나타나지를  못합니다. 거룩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라 해서 정죄해서 멸하기 때문에,  이거는 옳다 하고 찬성하기 때문에, 그런고로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숙달된  기능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한 자의 기능은 거룩의 기능이요, 또 경건의  기능입니다. 경건의 기능은 하나님을 위 주로 중심으로 하는 기능입니다.

 세상에서 그 기능 연습입니다. 자기 현실에서 경건을 가질려고 하면 자기의  가진 것을 희생해야 됩니다. 경건을 가질려고 하면 어떨 때는 직장을 빼앗기는  일도 있고, 자기의 소유가 손해가는 일도 있고, 자기 몸이 손해가는 얼도 있고,  또 자기의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이런 것들이 손해가는 일도 있습니다. 또 자기  하고 싶은 것이 손해갑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합니다. 자기 욕심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취미대로 하지 못하고 어쨌든지 자신이 이 경건을 가질려고 하면  경건 때문에 희생을 당합니다. 또 거룩 때문에 희생을 당합니다.

 그러면, 경건과 거룩 때문에 희생을 당하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희생당했으니까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없어진 것이 사람 보기에는 없어졌으나 없어진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다 죄악의 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인데,  죄악의 눈으로, 저주받은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 없어진 것은 하나님이 축복과  영생하는 세계로 옮겨졌기 때문에 없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피공로 때문에. 진리 때문에. 영감 때문에 없어진 것은 멸망할 위치에서  없어져서 영생하는 위치로 옮겨진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망할 것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으로 바꾸어진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모든 더러운  것들이 깨끗한 것으로 바꾸어지고?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진 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데 믿음 없는  사람들은 못 하게 됩니다. 왜?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때문에 손해 가는 것이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 영원히 완전이 되어지는, 완전히 자기의 것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실은 유익인데 외부에 이 육체의 눈으로 보는 데는 또 이 세상  지식을 가지고 보는 데는 손해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보는 데는  유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그런 일을 닥치지 안해도 자기  소원이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모든 심신의 기능은 하나님을 위하는 기능이  될라고, 하나님의 중심으로 사는 기능이 될라고, 또 진리대로 사는 기능이  될라고, 영감대로 사는 기능이 될라고,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대로 사는 기능이  될라고 평소에 소원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소원하고 애를 씁니다. 네 마음의 기능이나 네 몸의 기능이 네 욕심대로  이용되고 싶으그 진리대로 이용되고 싶으냐, 네 뜻대로 이용되고 싶으냐 주님의  뜻대로 이용되고 싶으냐, 그것이 네 것이 되고 싶으냐 진리의 것이 되고 싶으냐,  네가 진리대로의 마음의 기능이 되고 싶으냐 인간의 모든 아는, 마귀의 이치 그  이치대로 되고 싶으냐? 다 진리 대로 되고 싶고 진리대로 살고 싶고, 영감대로  살고 싶고 영감대로 되고 싶고, 주님의 피공로의 합당한 자가 되고 싶고 주님의  피공로를 거절하고 배반하는 그런 자가 되지 안할라고 소원을 합니다.

 다 소원을 하지만, 그 지식이 외부 지식이요 확고치 못한 자는 정말로 그와  같이 바꿀 수 있는 시기가 오면 그만 첫째 아담에게 속한 거 땅에 속한 거 이런  것들이 더 좋고 이것은 확실히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대로  해진 것은 그것은 있다고 말하지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됩니다. 그건 왜  그러냐? 그는 자기의 양심으로 따지지 안하고 이성으로 따지지 안하고 자기의  육안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로서는 세상 법대로 있는 것은  있다 확실히 확고하지만. 세상 법대로 있다 하는 것은 확고히 있다 인정이  되지만 진리를 아는 이성이 따질 때에는 이성은 이거는 있어도 다 죽을 것이요,  끝장은 없어질 것들이요, 다 망할 것들이라 그렇게 이성 판단은 그러합니다.

이성 판단보다도 그 사람 속에 선한 양심이 있으면 양심 판단은 주저할 것  없습니다. 양심 판단은 이것은 있으나 멸망이라는 것을, 있는데 멸망당하기 전에  그것이. 멸망 뭉텅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지식이 둘이라,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있는데 인간의 지식은 그 뱀에게서 나온 지식인고로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산 지식이요 영원히 살리는 지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있다 없다, 귀하다 천하다, 살았다 죽었다, 또 의롭다 불의하다, 이것은  곧다 굽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함이다 자기를 위함이다 하는 여게 대해서  지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이 두 가지가, 하나는 뱀의 지식이요,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은 신구약 성경 외의 거는 전부 뱀의 지식입니다. 뱀의  지식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대로 이런 것을 비판하는 비판이 있고, 또 인간의  지식대로 비판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식의 비판은 하나님의  지식대로의 비판과 언제든지 반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도 땅에 것을 위주로 하고 살며. 또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것을 위주로 삼느냐? 그것은 땅의 것을 위주로 삼는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해도 세상 지식을 표준해 가지고 세상 지식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사람이요, 또. 하늘의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 두 가지 지식이 있지만  신구약 성경 외에 인간의 지식은 천인 만인이 '있다' 해도 그까짓게 다 소용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없다' 하면 없어질 것으로 믿기 때문에 비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는 한 사건을 당할 때에 세상 지식으로  해석하면 불행인데 하나님의 지식으로 해석하면 유익되는 수가 있고 또 세상  지식으로서는 손해인데 세상 지식으로서는 손해인데 하나님의 지식으로는  유익되고, 세상 지식으로는 유익인데 하나님의 지식으로는 손해가고 그렇게 정  반대로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뭣이든지  옳다 하면 틀린 줄 알아라. 이것은 귀하다 하면 천한 줄 알아라. 네가 보기에  이거는 천하다 싶으면 귀한 줄 알아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을 당할 때에 이 두 가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대뜸 뭐이든지 닥치면 '이거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그렇게 비판을 하면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제일 숙달돼 있고 무슨 지식이 제일 주인공이 되어 있느냐  하면 대개는 이 세상 지식이 주인공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을  당할 때에 이것은 옳으냐 그르냐? 거룩이라 하는 것은 옳으냐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이 거룩인데 옳으냐 그른 것을 따져 가지고 틀린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취하는 것이 거룩인데, 무슨 일을 닥칠 때에 '나는 거룩을 가져야지' 하면 그  사람이 '아, 어느 게 옳으냐. 어느 게 그르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실패합니다. 제가 옳고 그른 걸 모릅니다. 그보다도 먼저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지식을 준하느냐 인간 지식을 준하느냐?' 그것부터 선정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지식을 준하느냐 표준하느냐, 인간 지식을 표준하느냐, 무슨  지식으로 내 앞에 닥친 이것을 선악을 구별하겠느냐?' 자기는 세상 지식을 가지  그 만일 선악을 구별한다고 '나는 경건을 가져야 되겠다' 하고, 구별한 다고  하면 세상 지식 가지' 그 구별하면 구별해서 옳다 바르다 좋다 하는 것은 전부  악한 것이요 사망에 이르는 것이요, 또 제 세상 지식으로 나쁘다 하는 것은 다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을 언제든지 조심해서 거룩하도록 해야 되겠고, 또  경건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되고,  또 거룩하고 경건한 희로애락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기쁜 것도  거룩한 기쁨 경건한 기쁨이 돼야 되고, 거룩한 기쁨과 경건한 기쁨이 돼야  되겠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에서 나는 거룩하고 경건한 이목 수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목 수족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돼야 되겠습니다. 내 언행이라  하는 것은 말하는 이 언(言)이요, 행이라 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 행(行)이요,  심이라 하는 것은 그 안에 마음 움직임이요, 생각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사자는  생각 사(思)자입니다. 언, 말 언(言)자, 행할 행(行)자, 심. 마음 심(心)자, 사  생각 사(思)자, 언행심사가 거룩과 경건한 언행심사가 되도록 노력을 자꾸 해야  되겠습니다. 거룩한 언행심사가 되도록 노력을 하는 데는 거룩하고 경건한  희로애락이 돼야 됩니다. 자기가 아무리 경건한 그 언행심사를 할라고 한다  할지라도 취미가 벌써 땅에 것이 됐으면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는 자기에게  재미가 없고 자기에게 그 취미가 없고 자기에게 싫으니까 안 합니다. 사람은  싫은 것은 안 합니다. 좋아하는 거는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점점  숙달되어지고 싫은 것은 점점 그것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되도록 자꾸 애를 씁니다.

애를 쓰면 나중에 가서, 애쓰고 기도하고 하면 거룩하고 경건한 이제 희로애락이  됩니다. 희로애락이라 말은 기쁜 것을 회라 기쁠 희(喜)자 희, 노는 성낼  노(怒)자로. 또 애는 또 슬플 애(哀)자 애, 또 락은 즐거울 락(樂)자 락,  희로애락이 거룩한 희로애락이 돼야 되겠고 경건한 희로애락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차차 차차 뭐를 만들어 내는고 하니  거룩하고 경건한 희로애락을 만들어 내고,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와  희로애락이 나중에는 뭘 만들어 내는고 하니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

 그냥 아무나 들어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그거 할라고 죽자 살자 하고 돈이고  그까짓 거 지위고 권세고 직장이고 공부고 다 팽개쳐 버리고 이게 제일이다,  여게다가 전력을 기울여도 될똥 말똥한 건데 그게, 그저 실실 듣고 그래 가지고  뭐이 뒬 줄 압니까? 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건설구원 이룬다는 데 대해서  너무 사람들이 관심이 없이 너무 낙관하고 있습니다. 요새 예수 믿는 사람들  조그매만 뭐 좁게 믿으면 그만 너무 치우쳤다 그래. 치우치기는? 제가 죽자 껏  치우쳐도 치우친 거는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미달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멸망에서 멸망할 것이 영생으로서 이렇게 그 화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데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다. 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하나도 찾지 못했다.

온전한 행위로서만 비로소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게다가 눈을 뜨고 이 가치를 알고 여게 욕심을 내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것은  다 똥 오줌같이 다 여깁니다. 바울도 다 똥 오줌같이 여겼고, 다 똥 오줌같이 다  여깁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러기 때문에 그걸 어짤 수 없어 그렇게 그 사람들을  따라서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지 거게 대해서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거룩과  경건을 팔아 가지고 돈 모을라고, 거룩과 경건을 팔아 가지고 지위와 권세를  차지 할라고, 거룩과 경건을 팔아 가지고 이 세상의 썩어질 기술 가질라고,  거룩과 경건을 팔아 가지고 이 세상에 무슨 대통령이고 왕이고 하라 해도 안  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참 믿는 사람들은 이게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껍데기는 다 같아 사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허허허'  이라고 있지 이제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땅의 것을 인해서 거룩을 손해보지  않고 경건을 손해보지 않습니다. 어떤 걸 다 투자해도 거룩과 경건에 전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 미쳤네. 저 사람 왜 땅의 것은 그렇게 보지 안하고 하늘의 것만  보고 사는가?' 그 사람은 벌써 깨달았기 때문에. 땅의 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배설물로 다 여긴다' 배설물이라 말은 똥  오줌이라 말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 과거에 귀하게 여겼던 것 존귀히 여겼던 것  세상에 그걸 제일로 여겼던 것 그거는 바울이, 학벌 지식 또 문벌 이 세상의  명예 지위 권세 그런 것을 다 귀중히 여겼는데 이제는 그런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 했습니다. 그런 거는 다 똥 오줌으로 여긴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너는 뭘  귀하게 여기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그것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이  다음에 부활할 때에 자기가 그 부활 할 때에 부활한 기능으로 되어지는 그 기능  만드는 데에 전심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가 배설로 여겼다 말은 음식을 먹으면 영양을 취하고 난  다음에는 배설물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생활하는 데에는  배설물과 같이 껍데기 것이 있고 그 속에 알맹이는 뭐인고 하니 거룩하고 경건한  그 기능, 심신의 기능을 만드는 그것이 알맹이요, 기능을 만드는 가운데에 이  껍데기 되어지는 것은 이 세상 이런 분야 저런 분야, 이런 형태 저런 형태,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거룩과 경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룩과 경건 만드는 게 위주니까 거룩과 경건이 만들어지면 세상 것이 바짝  깨어져도 상관하지 안하고 거룩과 경건이 깨어지면 이 세상 것이 아무리  존귀해져도 절단 나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다 물리치고 싫어하고 거룩과  경건 위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과 경건을 위주로 해서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먼저 되도록 노력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뭘 만드느냐? 거룩하고  경건한 뭘 만듭니까? 희로애락을 만듭니다. 그 사람은 취미를 바꿨습니다. 그  사람이 차차 바꿔집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뭐이 됩니까?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과 경건을 우리가 항상 현실에서 살펴 가지고 이것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는데, 하는 데에는 '아, 나는 거룩과 경건을 해야 되겠다  거룩과 경건을 해야 되겠다' 내가 거룩한 언행심사가 아니라면 거룩한  희로애락이 아니라면, 거룩한, 내가 사람이 안 된다면 그까짓 거 다 불탈 것이요  망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 없다. 이래서 거룩과 경건을 가치로 알아서  그것을 가치로 알아 가지고 거룩과 경건을 가질라고 만들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만들라고 애를 쓰면 됩니까? 그거 거룩과 경건을 만들라고 애쓰기 전에,  애쓰기 전에 할 일이 뭐입니까? 한번 말해 보이소? 할 일이 뭐입니까 여기  남반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할 일이 뭐입니까? 자. 모르는지 아는지 내가 다  물을 수는 없고 이제 내가 답을 할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속으로 답을 해  놓으십시오. 아, 거룩과 경건을 만들기 전에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를 만들기  전에, 거룩하고 경건한 희로애락을 만들기 전에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을 만들기  전에 내가 먼저 가져야 될 것 있다, 거룩과 경건을 내가 찾을라고 애쓰기 전에  내가 먼저 가져야 할 것이 있다 하는 그 가질 것이 뭐?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가지십시오.

, '아, 뮐 가져야 된다.' 작정했습니까? 뭘 가져야 된다는 걸 다 지금  작정했습니까? 뭘 가져야 되는지. 자기는 '뭘 가져야 된다' 그렇게 자기  마음으로서는 판정한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네, 거의 다 드는데. 뭘 가져야  되는지 아직 모른다, 모르겠다 하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모르겠다 하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손을 들어 봐요 퍼득. 모르겠다 하는 사람들, 들여야  거짓말쟁이가 아니지 여기서도 거짓말 하면 어짤 건고? 네, 그러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가르쳐 드릴 터이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배워서 알면 될 것이고,  또 잘못 안 사람도 아이구 나는 이리 틀렸으니까 예수 이래 믿으면 헛일이겠다.

바로 고쳐야 되겠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과 경건을 찾기 전에 먼저 지식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내가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아서 그 지식을 표준해 가지고 거룩과  경건을 찾을까, 또는 이 세상 학 박사. 뭐이 세상 지식, 온갖 지식 그 지식을  가지고 내가 거룩과 경건을 찾을까 이것입니다. 지식부터 그 것을 바로 잡아야  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세상 지식을 가지고 거룩과 경건을 찾을라고 하면  거룩과 경건 찾아 놓은 것은 정반대입니다. 불경건이요 불거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이 세상 지식으로 내가 표준해 세상 지식이 전체가 틀렸다 해도  하나님의 지식이 옳다 하면 옳은 것으로 나는 긍정하는 이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지식은 다 거짓말쟁이의 지식이요 거짓말쟁이 아비의  지식으로 딱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세상 지식은 과학은 옳은 것 아닙니까? 옳은  말 같은 것 아닙니까? 과학은 실질적으로 그와 같이 하면 되어지기 때문에  그러면 과학은 바른가? 과학도 전부 거짓말 지식입니다. 왜? 과학 그거 자체는  바르지만 그 과학을 어떻게 이용을 하느냐 어떻게 가치를 평가하느냐? 그러기  때문에 그 가치 평가. 과학의 평가가 틀렸지. 과학의 이용이 틀렸지, 과학의  동기가 틀렸지, 과학의 목적이 틀렸지. 이러니까 과학의 동기도 틀렸어 과학의  목적도 틀렸어, 과학의 이용도 틀렸어, 과학의 평가도 틀렸어. 과학의 비판도  틀렸어, 다 틀려졌는 데 다만 그것은 물리 그것만 맞았지만 다른 게 다 틀렸기  때문에 다 틀린 지식. 거짓말 지식이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지식은 아주 거짓말  지식, 또 반 거짓말 지식, 어쩌든지 사람을 미혹시켜서 인간을 멸망시킬라고  사탄이 온. 그 사탄이가 유혹받은 사람들을 오늘까지 꼬와 가지고 나와서 만든  것이 세상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다, 거짓말 지식. 반 거짓말 지식.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 하나님의 지식 신구약 66권 도리이지 식만이 산 지식이요  살리는 지식이요, 이 지식만이 참되고 옳고 바른 지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지식부터 바꾸어야 됩니다. 내가 현실에 이 거룩이냐  경건이냐, 이것이 불거룩이냐 불경건이냐, 이것은 지식부터 바꿔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내가 비판해 봐야. 자기 현실에 당한 일을 하나님의  지식에 하나님의 지식이 뭐라하노? 아, 이거는 하나님의 지식에 틀렸다 한다.

이거는 하나님의 지식에 옳다 한다. 이거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위함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위함이 아니고 자기 위함이라고  말하셨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지식에는 바르다고 했다. 이 세상 지식에는  틀렸다 했다. 이러니까 지식부터 먼저 어느 지식을 데 지식으로 삼을 것이냐?  지식부터 먼저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고 난 다음에 모든 비판과  평가를 해야 거룩과 경건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세상 지식 가지고 하면 하나님의  지식으로 맞은 것은 다 틀렸다 하고, 하나님 지식은 옳다 하는 것은 다,  삐뚤어졌다 하고 이라기 때문에 그 지식을 바꾸기 전에, 거룩과 경건을 자기가  찾아 볼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거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바꾸기 전에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들, 요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꿔 가지고 거룩과 경건을 찾아야 되지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꾸지 안하고 세상 지식 가지고 거룩과 경건을 찾을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못 찾습니다. 세상 지식을 가질수록 점점 파묻히지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내가 밥을 먹든지 일을 하든지 사람들하고  잠깐 교제를 하든지 이야기를 하든지 뭘 하든지 뭐 다른 사람이야 뭐 뭐라고  씨불거려도 그까짓 거는 상관없어. 다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거 그까짓  거 눈을 꼼짝 거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식으로 이것이  거룩하고 경건한 말이냐, 거룩하고 경건한 행동이냐 거룩하고 경건한 내 마음  움직임이냐, 거룩한 경건한 생각이냐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비판해서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를 할라고 우리는 노력해야 됩니다. 어떤 현실에서도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만 됐으면 큰 수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  현실에서 돈을 어떻게 모으고, 지위가 어떻게 올라가고, 자기 권세가 얼마나  올라가고, 자기가 얼마나 점령하고, 자기 만족을 누려서 자기가 어떻게 승리를  하고 득세를 하고 이렇게 했다 할지라도 거룩과 경건한 언행심사를 못  만들었으면 그 시간은 전부 이 도적 맞은 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생활한 거 일 년이나 이 년이나 혹은 하루나  이틀이나 또 하루 동안에는 몇 시간이나 그것을 계산해서 밤에 따져 볼 때에  오늘은 거룩과 경건한 언행심사가 얼마나 됐느냐 할 때는 하나도 없는 때가  있어. 순전히 마귀 노릇만 할 때가 많다 그말이오. 또 자기는 아 오늘은 한 시간  살았다, 오늘은 반쯤 살았다, 오늘은 거룩과 경건한 생활을 했는데 거게 어느  일을 할 때. 누구를 만났을 때에 그 마귀란 놈이 침입해서 거룩과 경건을  빼앗겼다, 요것을 계산을 따지는 것을 가리켜서 모세가 날 수 계산이라  했습니다. 날 수 계산. '하루는 어떻게 살았느냐?' 그 날을 계산하는 그게  있어야 되지 그거 돈 계산 암만 해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거룩과 경건한. 거룩하고 경건한 언행심사가 자기 수입이요.

거룩하고 경건한 희로애락이 자기의 수입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희로애락은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거룩과 경건이 미워하는 것은 영원히  미워해야 됩니다. 거룩과 경건이 노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노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자기의 사람이 되는, 이목 구비 수족이 돼야 됩니다.

 이제 그렇게 해서 이 세 가지 수입이 자기 수입인 줄 알고 우리는 수입해야  되겠고. 이 세 가지 자기 수입인 줄 알고 이것을 수입할하고 평가하고, 어느 게  그거냐 찾는 데에는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꾸고 난 다음이라야 이런 것이  있지 바꾸기 전에는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681 강도/ 본문: 누가복음 23장 39절-43절/ 800324월새 선지자 2015.10.22
680 강청신앙/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860110금새 선지자 2015.10.22
679 강청신앙/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860109목새 선지자 2015.10.22
678 개교회-1계명-하나님의 속성/ 출애굽기 20장 3절/ 870325수새 선지자 2015.10.22
677 개인 교회를 건축해 나가는 방편/ 에베소서 6장 10절-20절/ 880615수새 선지자 2015.10.22
676 개인신앙 성공의 요소/ 에베소서 6장10절-20절/ 880612주전 선지자 2015.10.22
675 개인과 우주의 종말/ 베드로서 3장 8절-13절/ 820101금야 선지자 2015.10.22
674 개인과 우주의 종말/ 베드로후서 3장 1절-18절/ 811227주전 선지자 2015.10.22
673 개인과 우주의 종말/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811227주전 선지자 2015.10.22
672 개인과 우주의 종말/ 베드로후서 3장 8절-12절/ 820102토새 선지자 2015.10.22
671 거듭남/ 요한복음 3장 3절-8절/ 880717주새 선지자 2015.10.22
670 거듭남/ 요한복음 3장 3절-8절/ 880629수야 선지자 2015.10.22
669 거룩과 경건/ 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830613월새 선지자 2015.10.22
668 거룩과 경건으로 주의 날 준비/ 마2장 42절-51절/ 890514주전 선지자 2015.10.22
667 거룩과 경건으로 주의 날 준비/ 이사야 53장 4절/ 890420목새 선지자 2015.10.22
666 거룩과 경건을 만들어야/ 마가복음 10장 29절-31절/ 870823주후 선지자 2015.10.22
» 거룩과 경건이 자기수입/ 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850816금새 선지자 2015.10.22
664 거룩과 진실/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831202금야 선지자 2015.10.22
663 거룩의 방해물과 긍휼을 입는 법/ 고린도전서 4장 3절-5절/ 830617금새 선지자 2015.10.22
662 거룩한 행실과 경건 연습/ 베드로후서 3장 6절-15절/ 870714화새 선지자 2015.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