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에 대한 회개


선지자선교회 1983년  3월 27일 주후 

 

본문 :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지금은 우리가 회개에 대해서 힘을 쓰고 있는 시기입니다. 회개는 순서적으로 쉬운  것부터 회개를 해서 차차 어려운 회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계명으로부터 십계명까지의 죄는 도덕 종류들의 죄입니다. 신앙 도덕들의  죄입니다. 이 죄가 제일 알기 쉽고 또 회개하기 쉽습니다. 이 죄를 회개하면 차차 그  다음에는 종교의 종류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이 계명으로부터 사계명까지는 종교 죄악을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종교의 모든  각종 죄를 회개하면 그 다음에는 원죄를 회개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일계명은 원죄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렇게 순서적으로 죄를 회개 하면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서적으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순서를 넘어서 초절적인 회개를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마는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적으로, 자기  마음으로, 자기 생각으로, 제대로의 회개지 참으로 회개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 종류의 회개는, 그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알기도 쉽고 또 회개하기도  쉽습니다. 종교 종류의 죄라는 것은, 기독교는 교리와 신조가 정확히 있습니다. 이런  교리도 좋고 저런 교리도 좋은 것 아닙니다. 교리와 신조는, 성경이 가르치는 정확  무오한 교리 신조는 하나뿐입니다.

교리 신조에 위반된, 성경대로의 교리와 신조를 가지지 아니한 그런 모든 종교, 그런  예배, 그런 신앙 그것은 다 종교 범죄입니다. 또 일계명은 원죄 범죄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한 말씀은 '원죄를 회개하고 다시 원죄를 범하지 말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알고도 있고 또 거게 해석하려 하면 시간 걸리기 때문에 오늘  오전에도 오후에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기쁨을 가지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기쁨을 가지지 못한 죄를 우리가  회개해야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그 사 계단의 죄를 회개하고 신앙 생활을 할 때에 그 신앙 생활이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신앙 생활의 열매를 가리켜서 여게 기쁨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기쁨이 없을 때는 신앙 생활이 바로 된 것 아닙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주 안이라는 말씀은 주님의 대속 안에 있는 기쁨으로  기쁨을 삼아 가지라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대속 안에 있는 기쁨으로 항상 기뻐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대속 안에는 이 기쁨이 있지마는 주님의 대속 밖에는 이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을 확고히 잡고 바로 믿을 때에 그것이 신앙인데,  바로 믿는 신앙이라면 반드시 여게 항상 기뻐하라는 이 기쁨이 그에게는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신 이 기쁨은 대단히 장성한 신앙가들이 가지는  기쁨입니다. 장성한 신앙의 열매입니다. 처음에 믿을 때는 세상적인 그런 기쁨을  가지고 그 기쁨에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 안의 것을 조금 첨부를 하니까 사람들이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때를 따라 변해지고 아직까지 실력있는  알찬 기쁨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쁨은 환경에 지배를 받게 되고 변동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차차 믿어서 주 안에 있는 이 기쁨을 가지게 되면 이 기쁨은 세상 어떤  것으로써 변해지지를 아니하는데 자신의 변동으로 이 기쁨이 요동됩니다. 요동되면  그 기쁨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그 기쁨을 본인이 잊어 버렸습니다. 잊어 버리고  있다가 다시 찾으면 또 찾아지게 됩니다.

 그런고로 이 기쁨은 단번에 가져지지 않는 것이오. 가져지지 않는 것이오. 우리가  힘을 쓰고 애를 쓰고 노력하면 이 기쁨을 차차 가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기쁨은 생각이라는 이 생각을 가지고 이 기쁨을 발견을 해야 됩니다.

생각으로 발견을 하고, 비판으로 심사를 하고, 평가로 또 이 기쁨을 심사를 하면  점점 이 기쁨이 새로와지고 강해지고 온전해집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 기쁨을  가지는 것을 연습하고 숙달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환경에 따라서  변해집니다.

 그래 오전에 말씀하신 대로 기쁨의 종류를 구별해 가지고 기뻐하라. 그저 항상  기뻐하라 한다고 벙긋벙긋 웃기만 하고 지내는 예수 믿는 사람 있습니다. 뼈 없는,  무골 호인이라고 뼈 없는 사람 창자 없는 사람, 비판 없는 사람, 아무런 감각 없는  사람, 뼈 없는 호인이라고 그저 좋아만하고 웃기만 하는 그런 사람은 아무짝도  못쓰는 바보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또 불교는 가만히 참신한다고 '음' 아무것  없이 그저 그 용모만 '음' 이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 얼굴은 사진만 봐도  보입니다. 그 속에 살아 역사하는 것은 없고 멍 하이 부처모양으로 생기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눈도 안팎에 가득 찼고 또 믿는 사람은 모도 수없는 모배기에  다각형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같이 비판이나 평가나 아무런  희로애락도 없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지기를 물씬물씬하게 보여져서,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예수 믿는 것들 이것들 보니까 이 안에 들어가면 내가 왕노릇 하겠다'  싶어서 뛰들었지마는 뛰들어와 가지고 막상 접촉을 해 보니까 어떻게 강한지,  하나님과 일치되는 데에는 아무 경계가 없고, 하나님과 진리와 배치되는 데는  아무런 그저 생명도 모든 세상것도 다 돌아보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단쇠  같다' 이래. 단쇠, 쇠물. 쇠물은 물컹물컹하이 물렁물렁하이 발가이 그러니까 한그릇  둘러마시면 좋다 싶지마는 마시면 타서 죽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 다음으로 모든 면에 대해서 정확하고 세밀하고 철저하고  정연하고 이렇게 되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을 표본으로 해서 원형이신 하나님을 닮아  모형해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저 예수 믿는 사람 항상 기뻐하라  한다고 여기도 기쁘고 '허' 하이 입만 벌리고 항상 웃고만 지내면 되는 줄 알고  이러지마는 성경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고 주 안이라고 말한 것은 기쁨을  구별해야 되는 것을 표시해 놨습니다.

 믿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되 이 기쁨이 항상 있을 기쁨인지 변할 기쁨인지 그  기쁨을 비판하고 평가해 보고 기뻐해라. 그러면 기쁨을 평가하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변하는 것, 없어지는 것 그거 하나, 하나는 변하지 않는 거, 없어지지 않는  것 하나. 기쁨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의 종류를 구별할 때는 그 기쁨의 원인을 심사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원인을 심사해라. 네가 지금 기뻐하고 있는 그 기쁨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원인이 영원히 변치 아니할 원인이라면 그 기쁨도 변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네가 기뻐하는 기쁨의 원인이 변해지고 없어질 것이라면 두 말 할 것  없이 그로 인하여 생겨진 그 기쁨도 변하고 없어질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기쁨이라면 웃는 것만이 기쁨이 아니고, 좋아하는 것, 안심하는 것,  기뻐하는 것, 평안히 여기는 것 모든 그런 것을 다 종합 해서 기쁨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심도, 기뻐하라는 이 기쁨 속에 안심도 들어갔는데, '항상 기뻐하라' 항상  안심해라. 영원히 변치 않는 안심을 가지라. 영원한 안심을 가지라. 영원한 안심을  가지려면 그것을 심사해야 되는데, 심사하는데는 그 안심의 원인을 네가 심사를  해라. 그 원인이 영원한 것이며 불변한 것이라면 네 안심은 영원하고 불변하다. 네가  일시, 또 사람이 뒤바꿔져 가지고 그런 안심을 가졌다가 그런 안심을 내 던지고  근심한다 할지라도 안심은 그대로 살아 있고 근심하는 네가 딴 것 변질만 했지 네가  했던 안심은 그대로 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그저 좋아하고 기뻐하고 안심하고 또  담대하고 평안하고 하는 그것을, 무엇이든지 좋은 것 오면 좋은 줄로만 알고, 좋은  게 변하여서 나쁜 것이 되고, 기쁨이 변하여서 슬픔이 되고, 삶이 변하여서 죽음이  되는데, 우리가 거게까지 계산하지 아니하고, 그저 좋아하고 기뻐하는 구별없이 그런  사람 되기 쉽습니다. 천하의 울음은 다 인간 웃음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의 웃음에서  나오지 아니한 울음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들의 슬픔은 다 기쁨에서 나왔습니다.

천하 인간들의 담대는 다 얼마 안 가서 공포와 비겁으로 화해지고 만것이 인간  역사입니다. 몇백 번 몇천 번을 뒤바꾼다 할지라도 항상 그 노름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원인을 생각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것만 가지고 네가 취하고  상대해서 그런 사람 되지 말아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 안에 항상  기뻐하고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항상 평안하고 영원히 평안할 수 있는, 항상  담대하고 영원히 담대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라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가질 수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지 못하고 찾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했고, 문을 두드리는 노력을 하지 아니 했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것에  들어가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담대하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안하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안심하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둘째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신구약 성경 계약 말씀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과 교훈과 소망과 법칙과 약속을 우리에게 간단 명료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인데, 신구약 성경은 첫째로 하나님을 가르치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본구원에 대해서 가르치고, 또 하나는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  나아갈 건설구원에 대한 것을 가르친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한 그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하여 이미 얻어 놓은 기본구원과 이미 다  허락되어 있는 이 건설구원 이 두 가지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우리가 가지지 않는 것이 죄악입니다. 이것이 장성한 신앙가의 회개할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별별 변해지는 현실을 주시는 것은 그 현실이 크게 말하면  기쁜 것도 있고 고통스러운 것도 있고 두 종류라 할 수 있습니다. 기쁜 현실을 주실  때는 잉어가 낚시에 달린 밥띠끼를 널큰 삼키면 잉어 저는 낚시대에 척 걸려 가지고  와서 죽어야 됩니다. 이렇게 기쁨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나 미끼로 척 던질 때에  이것을 먹나 안 먹나 보고 먹으면 낚아 가지고 훼훼 돌려 가지고 이제 거의 죽을  때가 되면 물에 끌러 놓습니다.

 네가 기쁨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막 삼키는 자, 이제 기쁨이 올 때에 오는 기쁨  그것을 구별함으로 '이 기쁨은, 이 성공은, 이 승리는 이 명예나 영광은, 이 지위나  권세는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항상 기뻐하라는 것에 소속한 것이 아니다.

이거는 마귀가 주는 것이다' 해서 시험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만 가지는지, 그 외에 딴 기쁨을 가지는지 시험하는 것으로써, 엉뚱한 기쁨 잠깐  가지고 그 댓가로써 십년도 이십년도 쩔쩔 매면서 고통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또 자기에게 큰 고통이 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오는 것은 네가 정말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 만유의 대주재시며, 자존자시며, 주권자시며, 모든 개별까지  주권 섭리하는 자시며, 목적을 정하시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징하시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이것을 관리하시고 섭리하셔서, 과연  하나님께서 구속을 위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것을 네가  말로는 잘 하는데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시험이 있다  이래서 자기 앞에 어떤 죽을 만한 일이 봉착돼도, 빌립보 깊은 옥중에 심히 맞아서  다 전신이 상하고 수족을 착고에 채워서 제일 깊은 옥 속에 묻어 뒀는데, 밤중에  그들이 찬송을 하니까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놓여 나왔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주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땅 위에 오든 어려움이 오는 것은 이 어려움의 몇 억억만 배라도 능가하고 남을 수  있는 대주재되신 하나님이 네 안에 계시는 것을 정말 믿나 안 믿나 하는 것이오.

 이리하여, '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서 영원한 멸망에서 영생을 나에게 주셨고,  대주재 하나님의 하시는 구속 역사에 내가 일꾼이 되어 가지고 주님이 나를 붙들고  일하셔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매 맞고 여게 갇혔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날 구원하기 위해서 참지 아니했으면 그 구원이 내게 왔겠느냐? 내가 여게서  시민권이나 쓰고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해 참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  고난을 내가 받지 아니하면 이 지방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겠느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과 하나님이 그렇게 전능의 능력을 가져 오셨지마는 그 사랑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는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본구원의 역사를 생각하고  건설구원의 역사를 생각할 때에 바울은 맞은 것은 간 곳 없고 어떻게 기뻤던지  찬송을 부르니까 지진이 났던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다니엘이나 그분들이 인간으로서는 참 산벼락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봉착했는데 그 만난 어려움이 어려움이 되지 아니하고 기쁨이 됐고, 그  어려움이 오히려 그들의 소원하는 바가 되었고, 그 어려움을 잘 이용해서 참 그런  어려움이 아니면 억 천만 금을 이용해도 그런 성과를 올릴 수 없는데 그 어려움을  잘 이용해 가지고 큰 성과를 올리게 되는 이 비밀을 그들이 생각해서 발견한 그  나머지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기도하고 담대히 다리오 왕의 간청에  어려워하지를 아니하고 사자구덩이에 던져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보이는 모든 것의 힘보다, 도움보다, 운동 보다 보이지 않는 이분이 더  크심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이분을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히 인정하고, 그분을  대접하고,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힘 입고, 그분을 동행하고 이럴 때에 이  하나님은 역사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기독교의 큰 역사를 하실 때에 당신이  '이렇게 하신다' 하는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서 역사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형의 당신을 유형의 것보다도 더 인정하고, 그분이 하신 말씀이나 그 분의 자체의  어떠하심을 인정하고 상대할 때에 그분은 그와 같이 그에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는 다 여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 세상적으로 기쁜 것이 올 때에 좋다하고 마구잡이로  삼키는 사람도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늘군대가 아직까지 못됩니다.

그런 사람은 마귀의 올무에 얼마든지 걸립니다.

 오는 기쁨도 오는 고난도 꼭 같이 평가해서, '이것은 주님이 이렇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는 기쁨이나 고통이나 필요의 가치는 같은 데 당신의 뜻이 어데 있는지  내대로 심사할 대로는 심사를 해야 되겠다' 하고, 심사를 해서, 물리칠 기쁨을  물리치고, 환영할 고난을 환영하고, 여게서 희로애락에 정평 정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찾는 데에서 정평정가를 가지게 됐고,  원인을 찾는 그 원인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 이 둘이 원인인 그 원인을 바로  찾아 가진 사람은 실패가 없습니다. 후회할 걸음을 걷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일조일석에 이래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우리는 평소에 내  기쁨의 종류가 어떤 것인가 해서, 가진 기쁨을 심사 해 가지고 잡된 기쁨은 제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잡된 기쁨은 제해 버리고, '나는 기쁨이 없다' 하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그 기쁨을 또 캐내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캐냅니까? 우리가 양심을 가지고 생각할 때에 일국의 정권 자만 사귀어도  좋아서, 그만 정권자 하나만 딱 들어붙어 사귀었으면 그 사람이 우쭐거려서 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그렇게 우쭐거리는데,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된 이 사실을  자기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아! 나같은 이런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이렇게  지극히 크신 분과의 이 관계를 주님이 맺어 주셨는가?'  이분을 앎으로 이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라는 것을 연구하고, 이 크신 분과  자기와의 관계가 가져진 이 관계를 인하여 자기가 온갖 거게서 겸손도 나오고,  감사도 나오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충성도 나오고, 기쁨도 나오고, 담대도  나오고,  인간이 볼 수 없는 이 하나님을 성경 말씀을 인하여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양심으로 느끼고 연구하고 하여, 이분을 내가 사모하고 생각하고 성경대로 연구를  함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고 형체 없는 이분으로 인한 기쁨이, 만족이, 겸손이,  담력이, 자기의 소망이 이렇게 생겨지고, 이분이 목적하신 목적에서, 다 말하려면  말할 수 없는데, 이분이 목적하신 그 목적 안에서 내가 지음 받았다.

 어떤 사람은 자 이거는 돈 가지고도 안 되고, 지혜 총명 가지고도 안되고, 열심  가지고 안 되는데, 어떻게 해서 내가 택함을 입었는지? 이거 하나를 가지고도 기뻐  못 견뎌. 그 기쁨이 뭐 몇 달 동안 계속 해서 날 어떻게 하나님이 택해 주셨을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지음을 받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계에  누구의 권세를 가지고 이 목적 안에 지음을 받을 수가 있겠나?' 세상 권세 다  끌어다 붙여다가 말해 봅니다. 저 혼자 자문자답해 보요.

 아무것도, 그런 걸 다 가져야 근방에도 가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해서 내가 이 목적  안에 지음 받았는가? 조그만한 우주의 별, 새끼 하나 중에 부스러기 한 지역, 한  나라 거기에 무엇 무엇이 도움이 되고, 제 소유라고, 저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제게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사람이 어깨가 벌어지는데, 영계와 물질계 모든 것을 내 구원  위해서 지었다니 이게 말도 아니다. 내가 뭐인데 이럴까?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나  위해서 지으시다니? 이거는 말도 아니다. 도무지 말도 아니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씀 하시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짓고는 그 사람이 그 이상 뭘 구할 것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가다가 모두 만족을 하고 충성으로 결심하고 발족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이것은 뭐 말로 가지고 할 수 없고, 자기가 명상 가운데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는 어떤 자인지?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 분이신지?  어떻게 하심을 받는 내인지? 나는 희망이 어떠한지? 만물과의 관계는 나는 뭐인지?  한없이 존귀하고 한없이 존영하고 한없이 권세 있고 한없이 위대한 데 소속해  있지마는 우리가 소경이니까 부인하니까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부인 하니까 역사가  없어. 우리가 이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해서 하나씩, 만물이면, 무슨 세상 사람들이 많이 뭘 가지고 있는, 세상 것이  부러우면 그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하나 인데, 그 모든 만물이 내 구원  위해서 하나님이 지어 주셨는데, 분명히 나 위해 있다고 성경에 말해 놨는데, 이럴  때에 그게 부러운 게 아니고 이 모든 사람들이 지저분한 이 모든 것이 다 내 구원  하나를 위해서 있다고 하는 이 달을 발표하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것이지마는 자기 혼자는 기뻐서 못 견디는 이것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이 기쁨, 주 안에서 담대하는 이 담력, 주 안에 있는 지극히 큰  소망 이것을 깨달을 때에 자기는 크기도 넓어지기도하고, 겸손해지기도 하고, 자기는  만족하기도 하고, 충성도 하기도하고 이렇게 우리의 생활과 인품이 제작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세상이 멸시하는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이 죄에 대해서 해결을 지었다 하는 이것도 어떤 사람은 몇십 년 연구합니다. 그  죄의 값이 얼마나 무서운지, 신구약 성경을 우리가 어긴 것이 하나 둘입니까?  이리하여 볼 수 없는 이 하나님을 자기가 인정하고, 주신 구원과 앞으로 받을  구속과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이 오든 것을 하나  하나를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법칙으로 삼고 지혜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하나 둘 따져 나가고 따져 나가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아는 이 일을 인해서,  기본구원의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에 어떻게 되어 있는 이  기본구원을 인하여,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공로가 모든 존재를 이용해서 내 구원  하나를 이루려고 하는 이 역사 이 사실을 자기가 생각하고 그 외에 더 구할 것이  없어.

 뭐 우리가 커지면 얼마나 커질 것이오? 그 이상 커질 게 없는데. 더 부요해질 게  없는데 더 존귀해질 게 없는데. 더 능력있을 것이 없는데.

 이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세상이 조롱하는 우리가 받아 있는 기본구원과  우리가 앞으로 이루어 갈 지극히 큰 구속 이 세 가지를 성경을 보고 연구하고  연구하는 가운데에서 자기에게 기쁨과 소망과 담대와 평강과 용기가 나와 세상이  해할 수 없는 이것이 여게서 눈이 트고 여게서 자라가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것이 큰 죄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종류의 죄를 회개를 해야 심령이 밝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물욕  하나 때문에 꼼짝을 못 하다가 물욕 그놈을 집어 던져 버리고 물질에 대한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초월하고, '내가 물질에 대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족하게  살겠다.' 물질 하나로 신앙을 해결지울 때에 자유해. 그 사람이 자유해. '모든  이제까지 밤낮으로 고민 고통하고 부리던 꾀가 다 소용이 없어. 다 물러가라.

하나님과 나와 진리의 법칙 이 셋만 있으면 된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예 하나 권세 하나 그런 것에 얽매인 그 죄악 하나 해결하면  자유입니다. 편합니다.

 마귀라는 놈이 우리 속에, 육체의 욕심이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해서 자기에게서  나온 욕심인데, 이놈 하나 있으면 이놈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이루려면 이렇게  해야 이루어진다. 요러면 안된다.' 이루도록 해놓고, 또 이루겠다 하면 또 그때 안  이루어진다고 애를 먹이고, 또 이루어 놓으면 또 그놈 또 깨진다고 또 보호하라고  이래 가지고, 어쨌든지 그놈이 거짓말 참말 해 가지고 일생을 끌어 가지고 망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도덕의 종류의 죄악을 제일 껍데기로 회개해야 됩니다. 이거 회개하고  나면 그 다음에 비로소 종교 종류의 죄악을 회개할 수 있는 그런 맑은 심령이  됩니다.

 요새는 기독교가 뭐인지, 종교 통일이오. 성경대로의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이런 교파가 별로 없습니다. 교파는 있을지라도 교인들이  없습니다. 성경대로의 신조와 교리 대로 흩어야 된다는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어.

이러니까 신조와 교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다 돌리고 돌리고 마지막에는 죽임을 당할  것이오. 이것이 사계명으로부터 이계명까지가 종교 범죄를 다 종합해서 강령을 말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죄를 회개를 하면 그 다음에는 원죄 종류를 회개하게 됩니다. 원죄 종류.

일계명은 원죄에 관한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말은 원죄를  네가 다시는 용납하지 말라 하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오.

 그러면 그 다음에 신앙이 됩니다. 그 다음에 신앙이 되면 그 신앙 열매에, 신앙  나무에 항상 기뻐하는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서 밟지 아니하고 초절적으로 밑에 기초만 세워 놓고 위에 상량 공중에  얹어 가지고 되는 그런 공중 누각을 짓는 것와 같은 그런 것이 기독교 아닙니다.

기독교는 허영의 종교가 아닙니다. 허망의 종교가 아니오. 도박 종교가 아니오.

실질적인 도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벌써 회개한 사람들은 회개를 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양심에  자책할 것을 찾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 고 말한 대로, 자기 양심에  이거는 틀렸다 하는 것은 다 회개하는 그것이 돼야 주 안에 있는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자기 마음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원죄적으로 회개를 했다고 해서  완전히 끝을 맺은 건 아니고, 회개하는데 또 일어나고 회개하는데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면 꺾어서 뽑고 또 일어나면 또 꺾고 뽑고 하기를 죽는 날까지 중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오늘 이 설교 말씀에서 보이지 않는 분을  자기 속에 성경대로 명상하면서, 그분을 명상하는 가운데서 제일 그분이 두렵기도  해서 떨기도하고, 그분이 모든 세력 보다 강해서 나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세력을  그까짓 거를 다 발아래 짓밟기도 하고, 그분이 나로 더불어 약속한 이 약속을  인해서 든든하고 기쁘고 즐겁기도 하고, 그분 외에 사모할 이도 없고 사모할 만한  이가 없고, 의논할 만한 이도 없고, 맡길 만한 이도 없고, 믿을 만한 이도 없고,  부탁할 만한 이도 없고, '나를 지도해 주십시오' 할 만한 이도 없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하여 그분이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을 발견하고 보니까, 그 분이 자기 안에  계시되 암 뭉텅이 모양으로 조그매라도 거치지 않소. 그분은 내 안에 와서 계셔도  싸래기 만큼도 거치지 아니해. 형체는 하나도 없어.

 그런데 그분이 전능자로 내 안에 계셔. 전지자로 내 안에 계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으로 내 안에 계셔. 내 밖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능히 통치하는 그 통치  주권자로 내 안에 계셔.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그분의 전이 되어서 그분이  나를 통해서 하는데 무엇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고로 보이지 않는 이분을 보이는 오든 것보다도 더 확고히 자기가 깨닫고  이분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무슨 실상의 그 움직임이, 실상의 무슨 충격이, 실상의  무슨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은 나를 돕는자시라'고 말해도 내 앞에 나보다 강한 세력이 와서  하는데 그 강한 세력 앞에 내가 그 세력을 보고 암만 담대하고 평안하려 해도,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느냐?' 열 번 스무 번 말을 해도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그분이 내 안에 계시지마는, 계신다는 것을 말은 했지마는 그분이 내  안에 계셔서 나와 함께하고 그 오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시는 이 사실이  자기에게 믿어지지 아니하니 소용없다 그 말이오. 믿어지지 않으니, 인정되지 않으니  이것이 그때 인정이 되고 싶다고 되는 줄 압니까?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일  처음으로 이것을 말씀했는데, 어쩌든지 우리 안에 계시는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을  보이는 모든 것보다 자기 안에 확실히 계시는 이 사실을 인정해서, 그분의 노여움이  내게 실상으로 내게 충격을 주고, 그분의 기쁨이 내게 주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내게 주고, 그분이 함께 하시는 능력이 내게 실지로 힘이 되어 가지고 역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무 때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이는 모든 것보다  실상으로 계셔서 역사하시는 이 사실을 믿는 것만큼 그 분은 일해 줬습니다.

인정하는 것만큼 일해 줬습니다.

 믿고 인정하는 것을 뭘 보아서 알겠느냐?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아느니라. 인정하는  그것은 그가 모든 이 세상을 향하여 사는 그 행동과 정신과 마음을 보아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집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회개는 단계적입니다. 제일 껍데기 도덕에서는 도덕 종류의 회개를 하기 전에는  종교 종류의 회개는 못 합니다. 이 회개를 하기 전에는 원죄 회개는 못합니다. 원죄  회개를 안 하고도 거게 떡상도 있고, 등대도 있고 제단도 있고 세수통도 있고,  향로도 있고 다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야 이제 성경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주님, 우리 안에 계시는 이 주님을 자꾸 발견해서  그분을 인정을 해요. 어떤 사람, 내 그 말 들었어요. 믿음이 없는 분인데, 천국을  말한다 하니까, 천국, '예수 믿는 것은 천국에 갑니다. 천국 믿습니까?' '나는 천국이  안 믿어진다.' '천국이 안 믿어집니까? 믿어야지요? 모든 사람이 하도 천국 천국  그래 하니까 그 사람들에게 고만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겠지'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자꾸 사모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어쩌든지 당신이  어떤 분이신,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어떻게 하신다는 이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실상으로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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