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밭을 면하려면.. 영감의 깨달음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19일 화새

 

본문 : 마13:3-9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우리는 앞으로 거창집회를 두고 준비하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너무도 예사롭게 듣는 여기에서 다  실패를 합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마는 이 씨뿌리는 데서도 간단명료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길 가에 뿌린 씨도 헛일이요, 또 돌밭에 뿌린 씨도  헛일이요, 가시떨기 위에 뿌린 씨도 헛일입니다. 옥토에 뿌린 씨만이 구원에  유익을 이루었습니다.

 하루를 살든지 한 시간을 살든지 사는 생활이 자기 구원에 유익한 그 결과를  맺는 것은 길가 뿌린 씨가 되지 안해야 되고, 돌밭에 뿌리운 씨가 되지 안해야  되고, 가시 떨기 위에 뿌리운 씨가 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 가지 씨와 같이 하나님의 도를 받은 것이 되면 실패이니까  이 세 가지 씨를 받은 자가 되지 안해야 되겠습니다. 세 가지로 자기가 되지  안해야 되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든지 하나 되면 그만 하나님의 도를  들으나 안 들으나 꼭 같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깨달음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무 깨달음이 없고 그저 이 세상에 무슨 영화를 보는 것이나 또 무슨  세상에 그런 잡지나 소설을 보는 것들이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뭣을 가리키는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그런, 자기가 '행하지 안하면 안 되겠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는 그 말씀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찾아야 됩니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그만 길가 뿌리운 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일을 처리해야  되겠다.' 말씀을 들을 때에 '나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이 사건 처리를 이렇게  해야 되겠다. 또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아무것이와의 이 관계를 이렇게 해야  되겠다. 내가 지금 여러가지 경제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경제 문제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 말씀을 들을 때에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생겨져야 됩니다. 그것이 생겨지지 안하면 참 이것은 벌판이요  쭉정이입니다.

 사람들은, 원청간 저거 교회서는 저를 만나는 그 만나기가 어려우니까 조금  다른 교회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일반 교회들을 보면 그만 으례히 그  교인들이 무슨 크고 작은 모든 일이 생겨지면 교역자한테 물어 가지고 하려고  그렇게 생각을 가집니다. 또 자기 구역장들에게 물어 가지고 하려고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도 묻지 안 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기가 그저 자기 생각대로 하는  그것보다는 낫습니다 또 안 믿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묻든지 세상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 지도를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는 것이고, 그것은 죽는 것이고,  자기 할 일이 안 믿는 사람들이나 또 자기나 다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떠날 때에는 속에 주관하는 영은 악령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도 악령의 생각이요 또 아무리 고귀한 세상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도  악령의 생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 다른 어떤 사람들의  생각대로 하는 것 그것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기가 구역 식구를 권해 보든지 또 그렇지 안하면 어떤 교인을 그래  보든지 또 동역자 교역자를 이렇게 상대해 보든지 하면 그 사람이 뭐 뭐라고  뭐라고 이래 쌓아도 그 사람을 최후 최종으로 지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지도하는 그 사람을 발견치 못하면 구역장 노릇 암만 해 봐야 헛일입니다. 또  반사 노릇 암만 해 봐도 헛일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이 사람을 최종적으로 최고적으로 지도를 하고 있나?' 하는  그것을 잘 살펴서 찾아야 됩니다. 그러면 찾으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왕이요 또  그 사람을 지금, 마치 범이 짐승이나 사람을 아주 맥을 볼끈 꽉 물고 있으면  그뭐 꼼짝 못하고 결국은 거기 잡아먹힙니다. 그 모양으로 그게 삼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입에 물려 가지고 있는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당장에 해방시키면 분쟁이 나고 도리어 그 사람이 예수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듯 모르는 듯 둬 두고 설설 그 사람에게  그런 면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서 차차 차차 그 사람이 깨달아져 가는 그  깨달음으로 인해서 '내가 내 맘대로 해도 안 되고 인간 지도 받아 가지고도 안  되겠구나. 그러면 나는 나를 지도할 이도 한 분뿐이시고, 나를 인도할 이도 한  분뿐이시고, 내가 물어볼 만한 분도 한 분뿐이시고, 내가 상의할 분도 한  분뿐이시라. 내가 내 모든 일을 부탁할 이도 한 분뿐이시라.'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의 인도를, 또 그분으로 더불어 상의를, 그분의  가르침을, 그분의 도움을 이렇게 받아야만 하지 그외에 딴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확실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가 뭣입니까?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가 성경이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또 하나님이 가르치심이  성경이 가르침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또 하나님과 의논하는 것은 성경하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해 가지고 '이래야 되는가 저래야 되는가?' 이렇게  성경을 가지고 자기는 이래야 되는가? 성경에게 묻고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것은  기도하는 걸 말하는데 기도한다는 것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 야로 묵상한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의논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묻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그 사정을 고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인데 그것은  성경에, 성경이라는 그 책에다 고하는 게 아니고 성경을 나타낸 성경 진리  안에는 하나님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 말씀에 어떻게 하라고  하셨느냐?' 그것이 성경 법칙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그 말씀으로 인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을 거게서 들어야 됩니다.

 성경은 방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방언의 능력. 방언 방언을 뭐  요새는 방언을 말하기를 데데데데데… 이래 그만, 방언하는 사람들 자꾸 많이 주  지꺼리라 이러먼 그만 나중에 빨리 하면 혀가 안 따라갑니다. 빨리 하면 자기  생각에 혀가 따라가지 안합니다. 혀가 따라가지 안하면 나중에 그때 가서는 자기  마음만 말하고 소리는 그만 뭐 데데데데 그만 이런 말이 돼지면 '아, 이제  방언하기 시작했다.' 그래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을 시키는데,  방언은 어데서부터 방언이 나왔는고 하니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그때부터  방언이 나왔습니다 그때 방언이 나왔는데 그새 오순절에 나온 방언은 어떤  방언이 제일 귀한 방언인고 하니 한 나라 말로 하는데, 예를 들면 한국말로  하는데 한국말로 하는 그 설교를 미국 사람이 와 가지고도 그 말을 다 알아듣고,  일본 사람이 와 가지고도 그 말을 다 알아듣고, 중국 사람이 와 가지고도 그  말을 다 알아듣고 한 나라 말로 하는데 그 말을, 그 말을 모르는 사람도 그  말씀의 도리를 듣고 깨달아지는 그것이 방언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나라 말로 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하는 그것이 방언 역사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그것이 방언의  능력인데 엉뚱이같이 깨닫는 것은 생각지 안 하고 데데데데 거리는 그게  방언이라 하는 그게 순전히 마귀 놀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 유익은 있다고 하는 것이 뭐이냐? 그것이 내나 주관적 유익인데  자꾸 너무 하나님께 대해서 그만 하나님께 맹하게 자기의 감정이 일어나지  안하니 데데데데 그래 가지고서 자기 감정을 일으켜서 감정에 충격을 줘 가지고  감정이 일어나니까 감정 없이 하나님을 대 하는 것보다는 좀 낫아서 뭐 그래  가지고 뭐이 어쩌면 그러다가 걸려서 잘 될 수가 있겠다 하는 그런 하나의 자는  자가 잠 깨이는 것 모양으로 이래 충격되는 것 그게 행여나 될까 하는 그런  것이지, 오면 그만 가만히 그만 누워자고 그만 아무 감각 없는 사람보다는  그렇게라도 충격을, 데데데데 해 가지고 그렇든지 그리 안하면 뭣을 마구 노래를  불러 가지고 이래 가지고 사람의 감정을 좀 흥분시키든지 어짜든지 그와 같은  종류들입니다.

 실은 방언의 은혜는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깨닫는 그것이 방언의  은혜입니다, 깨닫는 것. 옛날은 사도 시대에 방언이, 처음에 방언이  그거였습니다. 한국 말로 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 말을 듣고 다 말을  알아듣게 됐다. 그것이 방언의 역사라. 방언이라는 것은 이 나라말 저 나라 말  그게 방언인데.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을 알게 하는 역사가 있다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나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나를 지도하고 인도하고 가르쳐 주실 터이니까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보자. 내가 들어보고 해결을 짓자.' 요 렇게 마음을 가집니다.

껍데기는 사람은 백 목사는 마치 이 스피카와 같이, 스피카와 같이 백 목사가  말하지마는 백 목사를 거머쥐고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사람이 들으면  설교는 한 가지 했는데 만일 사람이 천 명이 있으면 설교는 한 가지 했는데 한  가지 설교에 천 명의 그 형편 사정을 바로 지도하는 역사가 나오는 것이 그것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그것이 방언 역사요.

 그러기에 그날 아침에 돈에 대해서 말씀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더불어  시비 문제, 무슨 분쟁 문제가 있는데 그 분쟁 문제가 그 말씀에서 해결이  됩니다. 또 자기가 앞으로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나 하는 그 문제가 거게서  해결이 됩니다. '내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하나?'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그 해결이 거게 나옵니다.

 말씀은 하나인데, 말씀은 하나인데 천인 만인이 그 자리에 들으면 천인 만인이  그 말씀을 듣는 그 사람으로서 사정이 천 가지로 만 가지로 각각 그 사정이  있습니다. 각각 사정이 있는 그 사정마다 한 마디 설교에서 그 천인 만인에게 다  해당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지울 수 있는 그 영감의 인도가 있는 것이 그것이  방언 역사요 그것이 하나님의 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꼭 자기가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것이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또 자기 몸이 해야 된다고 생 각하는 것도  믿음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말하는 것보다, 말 하는 것보다 자기  몸으로 움직인 것보다 더 중한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  자기는 뭐 '내가 마음에는 그랬지마는 내가 말하지 안했는데' 녜 말하지  안했으면 세상법에서는 말하지 안했으니까 그것으로 안한 걸로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말하지 안했어도 행동하지 안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마음에 그랬으면 벌써 행동한 것이 됩니다.

 이러기에 말로만 할 게 아니고 행동으로만 할 게 아니라 그 마음으로 우리가  일해야 된다는 것, 그러기에 주일학교 반사들에게 명단, 학생 들의 명단을 적어  가지고서 하루 한번씩 쭉 읽어봐라. 학생들을 어쩌든지 구출하기 위해서 쭉  읽어봐라. 읽으면 그 마음을 가지고, 이 학 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 마음을  가지고서 쭉 읽으면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서 어떻다 하는 걸 자기에게  영감시켜서, 또 영감시켜 줄 때에 '주여, 이 학생들 위해서 어떻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안 해도 좋습니다. 기도해도 좋고 기도 안 해도  좋습니다. 그럴 때 '이 학생은 이렇게 돼야 되겠는데, 이 학생은 이 나쁜 동무와  끊어야 되겠는데 이 학생은 어떻게 해야 되겠는데.' 그 마음만 슬쩍 가지고서  지나가 버려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더 큰 성과를 가져오고 그보다도 이제는 자기의 인격을  다 기울이면 성령이 자기와 함께 해서 영감되는 영감으로 된 그 일이 제일 큰  성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비록 거게를 가지 못했어도 영감은 갈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은, 예를 들어서 자기와 서로 아주 불목한 그런 일을 맺어놨는데 그 불목한  그 일을 해결을 지워야 되겠는데 자기 마음에 안됐습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이  '그 사람이 어데 있는고 그거 해결을 지워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지가  암만 가져도 제 마음은 그 사람에게 찾아가지 못합니다, 어데 있는지 모르니까.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그 마음을  가지는 그 마음이 영감까지 도달하게 되면 영감은 거기 가 가지고서 그 사람을  방문해 가지고 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몸으로 일하려고 하는 사람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말로  일하는 사람이 수익이 더 크고, 말로 일하는 사람보다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수익이 더 크고,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보다 영감으로 일하는 사람이 더 수입이  더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신 영감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입을,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한 마디였는데 그 한 마디를  통하여서 영감이 역사하는 것은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있는 자에게  각각 직접 해당되는, 걸어갈 그 도리. 걸어갈 도리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가 사람에게 지도를 받으려고 말고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이 설교하는 그 설교에서 어떻게 들어 가지고서 뭘  해결할라 하는, 목사의 입을 퉁해 가지고 나오는 그 설교만으로써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참 자기에게 해당된 그 설교가 평생 한번 나오련지 안 나오련지  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평생 나오련지 안 나오련지 모르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대언자, 하나님의 말을 대신하는 대언자 그 대변자  그러니까 이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러기에 선지직을 내가 지금하고 있는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대변하는 지금 일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보자' 하는 것은 그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설교가  나오는 그 설교와 함께 영감이 나와 가지고서 천인 만인을 다 한 눈에 다 보시고  다 아시는 그 영감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시고 옳고 바르게 지도해 주시는 그  지도가 있으면 그 지도를 받으려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그 중에도 대개 기독자들이 다 그렇지마는 그것을 많이 발표를  한 사람 하나 있는데 강경자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 여게 있다가 세상을  떴습니다. 그 사람이 그 입장이 어려운 입장에서 살고 있었는데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을 '이거를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는 그 걱정을 언제  해결하려고 들고 있느냐? 밤이면 그 이튿날 새벽기도에 와 가지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서 그렇게 자기가 딱, 그렇게 알고 그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와 가지고 그날 아침에 듣는 가운데에서 모든 그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이 돼 버리니까 해결받고.

 해결받는데, 그러면 내가 여러 번 그런 걸 봤어. 가면 '내가 어제 이런 문제에  대해 가지고서 이렇게 지금 어떻게 할까 이걸 몰랐었는데 오늘 아침에-내가 그때  조사 때입니다.-조사님이 설교하시는 조사님의 설교를 듣고서 완전히 해결이  됐습니다.' 내가 한 설교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 이 어떻게 되는고  싶어서, 무슨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되나 싶어서 지금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건이었습니까?' 그 사건 말하는데 그 사건이 아침에 내가 설교한 설교와는 뭐  천리 만리 거리가 얼토당토 상관도 없는 설교를 내가 했습니다. 했는데, '그러면  그래 해결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그런  해결을 받고 작정을 받았습니다.' 그래. 그거 딱 맞았다 그거요 그거 옳게 바로  그래 하면 성경대로 바로 됐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하루 종일 산 것을 저녁이면 여러가지 숙제가 생겨지고  숙제 생겨지는 건 그 이튿날 아침에 또 해결을 받고 이래가지고서 한 걸을 한  걸을 그 생애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걸어가는 그것을, 내가 여러번 그분에게  물어봤습니다. 과연 그게 다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은 동감입니다.

 그 꼭 입으로 말하는 것 아니고 그 설교를 할 때에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서  각자에게 안 들으면 안 되고 없으면 안 될 그 필요한 지도를 해 주십니다. 그걸  받아야 됩니다.

 이러기에 길가에 뿌린 씨가 안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어떻게 할 그 결정,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그런  깨달음을 자기가 가져야 됩니다. 뭐 어데든지, 만일 은혜가 없는 그 교역자라  할지라도, 은혜가 없는 교역자라도 교역자가 은혜가 없어도 제가 은혜 있으면  됩니다.

 은혜 없는 교역자, 은혜 없는 교역자 그 이단자라 합시다. 이단자라도 이단자  있는 데 거기 가 가지고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가르쳐 주실 것이라.' 하면  이단자는 이단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단이다. 이것은 이단이기 때문에 이건 네가  강경하게 네가 대항을 해야 되지 안 하면 안 된다.' 하는 그런 깨달음을 무신론  강의하는 데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 뜨거운 신앙을 받을 수가 있다 그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한 자는 그저 설교하는 그 자리에서나 또 자기가 무슨 일하러  갑니다. 그날 부지런히 뭐 등짐지고 일하러 가는데, 일하러 가는 데서 '오늘  일하는 가운데서 주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는 인도를 받아야 되겠다.' 그러는  사람은 밤이나 낮이나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것 아니기 때문에 그 인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에게는 인도를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에나, 자기가 움직이는 무슨 일하는 작업하는 데에서나,  자기는 밥 먹는 데에서나, 길을 훨훨 가면서도 '주님이 이 길 가는 가운데에서  나에게 인도해 주시는 그 인도를 받겠다.' 어떤 사람은 변소 가 가지고서  용변하면서 '주님이 혹 여게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지 모른다.' 이러니까  용변하다가 그 일을 턱 하나님이 가르쳐서 '아이쿠,' 그러면 원청 복잡한  일이니까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그만 거게 가 가지고서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한번  퍼뜩 지나가 버리면 모르니까 거게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친 사람  비슷하지마는 자꾸 재독을 합니다. 수십 번 재독하요, 안 잊어버리려고. 수십 번  재독해.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 재독 하고서, 재독 하고도 그만  일어나서 용변 하고 뭐 닦고 뭐 일어나고 어짜고 그만 나와 가지고서 뭐 그만  씻고 어짜고 하는 바람에 잊어버려 버렸다 말이오. 잊어버리면 그렇게 여러번  재독한 것도 자기가 몰라서 나중에 찾으려고 해도 못 찾을 수 있어. 그건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의 영감의 인도를 받고 그 인도를 귀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네게서 거뒀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못 받아서 고민을 하고 하루 종일 생각해도 안 될 때  있습니다. 그러면 혹 그저 자기가 뭐 일할 때, 길 갈 때에 그때 뻐뜩 가르쳐  줍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것은 항상 마음을 네가 들고 살아라. 또 네가  내게 대해서 항상 바라보면서 '무엇을 지금 이제 주시련가?' 그렇게 '나의 사랑  나의 누이는 그 눈은 너울 속 비둘가 같다.' 그러면 너울을 탁 이래, 비둘기  같다 말은 비둘기는 짐승 중에 제일 수절하는 것을 가리켜서 비둘기라 그렇게  말합니다. '삼진의 저 비둘기 예절 있도다' 비둘기가 제일 수절이 있어서  비둘기는 재혼하는 일이 없다 이럽니다. 그뭐. 요새는 또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모르지마는 그런데.

 '너울 속 비둘기 눈 같다' 그말은 주님만 보고 다른 것 아무것도 안 보고  주님만 딱 그저 밤낮으로 바라보고서 거기서 뭣이 나오는 것을 거기서 주시는  것만 바라보는 그것이 주님의 사랑하는 신부라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길가 뿌린 씨가 되지 안해야 되겠는데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과연 이 처사를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이 문제 해결을 이래야  되겠구나. 이 사람과의 교제는 끊어야 되겠구나. 이 사람과의 교제를 가져야  되겠구나. 이 사람과는 교제를 가지되 조심을 해야 되겠구나.' 이제 그 모든  것을 성령이 옳고 바르게 자기에게 가르쳐 준다 그말이오. 가르쳐 주는 그것을  받아야 길가 뿌린 씨가 안 됩니다  그저 와 가지고 앉아 가지고 있으며 그날 아침에 새벽기도 와 가지고 아무런  그저 와 가지고 앉아 가지고 뭐 극장에 가 가지고 똑 극장 보듯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듯이 그 정도로 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그 이튿날 새벽기도  나올 맛이 없습니다.

 영감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새벽기도 안 나오고는 못 견딥니다. 또 자기가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에서 하나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기도 아니면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까, 사람이 와서 분주 복잡하면 그저 그 사람하고 겉어머리는 얘기하는  것 같지마는 속은 지금 다른 일하고 있다 그거요. 다른 일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볼 때에는 좀 너무 진실되지 않게 그렇게 보여질 수도 있어, 마음이 딴데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얘기도 하면서 또 딴것도 하면서 이래 하지 마는 마음은  딴데 있습니다. 또 그러다가 보면 그 사람 무슨 소리하는데 벌써 '이 사람  말하는 건 다 소용 없는 쓸데 없는 말이로구나' 딱 그렇게 판정을 지워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또 자기는 잔다 말이오. 그만 잠이 와 버려.

 여게 지금 새벽기도 나와 가지고 조는 사람들도 그렇소. 아예 그만 그것 없고  그저 '여게서 참 내 생사가 달렸다' 하는 그런 가치를 생각지 않는 사람은 그만  잠 와 버립니다. 그러면 '여게서 내가 죽고 사는 것이 여게 있기 때문에  어짜든지 들어야 되겠다' 이러면 잠이 안 오는데 '뭐 들어봐야 다 그것, 또 내가  아는 것.' 이리 되면 그만 잠이 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요번 집회 때 가 가지고 길가 뿌린 씨가 되지 안 하도록  하나님 말씀 들을 때에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그 깨달음을 자기가 받지  못하면 길가 뿌린 씨입니다. 꼭 설교자가 설교를 한 것만 들을 게 아니라,  설교를 하면 뭐 백 사람에게 해당되는 설교를 하겠소 어짜겠소? 그 설교는  찍해야 한 시간 해 봤자 몇 건밖에 못 합니다.

 몇 건에 대한 해당되는 설교를 했지마는 그 설교에서 천건 만건 각각 다  자기에게 필요한 대로 다 필요한 것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그 역사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몸으로 가야 되겠다 말로 해야 되겠다가 아니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나는 못 가도 성령은 가십니다. 또 내 마음도 날래지만 마음보다 성령이  무한히 날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 소망하고 성령의 역사로  일을 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츰 많은 일을 할까?' 아니오. 성령이  일해 줍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무슨 문제든지 새벽기도 나와 가지고  그 문제를, 목사한테 물을 것이 아니고 뭐 권찰한테 물을 게 아니라 여게 나와  가지고 '이래야 된다!' 하는 그 깨달음을 받지 않으면 헛탕했다 말이오. 와도  헛탕했어. 하나님이 다 옳고 바르게 가르쳐 주시오.

 그러니까 길가 뿌린 씨가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자기에게 깨달음이, 그러면 성경은 지금 예를 들어서 물질에 대한 성경인데  물질에 대한 성경을 제가 읽으면서 물질에 대한 성경을 읽는데 환난에 대한 것이  깨달아집니다. 그 성경 읽을 때 환난에 대한 걸 깨달아 '아, 이래야 되겠구나.

아이구, 이 면에 대해서 내가 기도를 해야 되겠구나. 이 면에 대해서는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 이 준비하는 것이 헛일이겠구나.' 그래 자꾸  깨달음이 온다 말이오.

 그것이 영감의 깨달음인데, 그러기에 그것이 신구약 육십육 권이야 요 얼마  됩니까? 요밖에 안 되는데 요 안에 뭐이 들었느냐 하면 다 기록하려고 하면 온  세상에 둬도 세상에 둘 곳이 없는 그런 복잡하고 수많은 것이 이 성경 속에  압축돼 있다 그말이오. 이 성경 속에 압축돼 있어.

 그러기 때문에 성경 한 절수 안에는 천인 만인의 그 모든 해결될 것이 영감으로  역사해서 다 소개합니다.

 그러기에 여게서 새벽기도 나오면 누구든지 자기 당면한 일을 뭐 사건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운 문제의 해결책을 받아야 됩니다. 그걸 안 받고 다른 뭐 사람에게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인본의 사람이오. 영감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도 강경자씨라 하는 그분은 어려움이 있으면 '내일 아침 어서 새벽이  왔으면 좋겠다. 내일 새벽에 가서 새벽기도 가 가지고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는  그 인도를 받아야 되겠다.' 그걸 딱 바라고 온다 그거요. 그러니까 안 오고 못  견디고, 오면 그 문제가 해결돼.

 그러니까 하루 종일 산 것을 검토하면 밤에 난제가 생겨지고 미진한 일  생겨지고 또 그 이튿날 새벽에 가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 또 깨달아지고 그러면  그날 또 한다고 그대로 하는 대로 또 해 보고 자꾸 이래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길가 뿌린 씨가 안 되는 것은 주님이 '깨달음이 없다'  이랬는데 깨달음이 없는 건 뭣이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인해서 각자  자기에게 '어떻게 해야 된다, 어떻게 해야 되겠다.' 하는, 자기가 어떻게 행할  것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길가 뿌린 씨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기가 요번에 거창 가는 데도 말씀 말씀에서 그 말씀에서 한 가지 한 가지  내게 해당된 걸 깨달음이 있기를 기다리고 그렇게 노력해서 깨달음이 하나 오면  '요번에 깨달았다.' 그래 가지고 깨달음은 자기 속에 감동이 돼 깨달음이 되기  때문에 깨달음의 그 깨달음에는 전능한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그대로 하면 전능한 능력이 동행해 버려요. 그래 가지고서 믿는 사람들이  초자연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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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부터 하기아동성경학교가 시작되므로 신축 일층 바닥을 사용토록 천막베를  깔려고 합니다. 도끼다시 한 자리가 깨끗지 못해 청소를 하려고 하니 남녀반에  청소 도구를 준비하여 오전 중으로 청소가 끝 나도록 많은 봉사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 또 기쁜 소식입니다. 이제 싹 딱 닦고 이제는 널찍한 데에서 좀  해 봐야 되겠습니다. 아침 자시고 걸레 또 이 대야 이래 가지고서 물 떠 가지고  또 대야에 또 닦아 가지고 씻고 닦아 가지고 이래 가지고 아주 반들반들해  가지고 오늘 인제 다른 것은 못 놓고 밑에 뭘 까는 걸 해서 깔겠습니다. 까는 걸  까는데 천막지를 깔아야 되련지 뭣 또 좀 더 좋은 걸 깔아야 되련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의논해 하겠습니다

 오늘은 무슨 요일이요? 화요일? 화요일이면 그래도 가다 한번씩은 이 결혼  상담해야 되겠는데 결혼상담에서 구역장이 안 나온 구역은 그만 그냥 지내가  버립니다. 지나가고 구역장 나온 구역은 그 거론을 한번씩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이걸 닦고 하기아동 성경학교를 시작하니까 그만 결혼상담은 좀  멈춰 두십시다. 사적으로는 하고 공적으로는 결혼상담을 그만 둘 터이니까 오늘  아침에는 안 할 터이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가 가지고 준비해서 일찍 와 가지고  이 소제도 하고 마음으로라도 하기아동성경학교를 준비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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