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거창집회


1981년 8월 12일 수새집회

 

본문 : 사 53 : 10-12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가 예수님에게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이 여호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에 어느 위가 아니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작정을 인간들에게 나타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된 이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알리시고 또 이 일을 친히  이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신인 계약성에 대해서 특별히 역사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서 여호와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하는 그로라는 것은 신인양성 일위로 제  이위이신 성자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도 아니요. 사람만도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된 분이신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따로 사람은 사람으로 따로 이렇게 되어 역사하시는 분이신가?  그것도 아닙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데 하나님과 사람이 한 인격  존재로 나타나시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이 한 인격 존재로 나타나시 가지고 한  책임을 맡으시고 같이 함께 같이 역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책임도 양성 일위이신 이 인격 한 인격 존재가 이 책임을 맡아 한 인격  존재로 이 책임을 이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의 신격이신 그 신격은 예수님의 주격체요 예수님의 그 인성은 예수님의  소유격체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일위로 나타나신 신성만도 아니요. 신성과  인성이 둘이 합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한 인격체로  나타나신 분이신데 그러면 신성은 창조주시요 인성은 피조물이신데 그만 신성 인성이 한 격위가  되었으니 인성도 하나님되고 창조주되고 창조주도 피조물되고 이렇게 이것이 다  혼합이 되었는가? 아닙니다. 신성은 언제나 피조물로써 한 격위를 이루어 가지고  역사하는 것 뿐입니다.

영원토록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신성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는 한 격위로 나타나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만물은 지음을 받았고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라 그가 세상도 만드셨고 그가 모든 사람들의 영원 통치의 왕이 되신 것을  요한복은 1장에 말씀했습니다.

세상에 그분이 당신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당신이 만드신 세상에게 당신이 만드신  당신의 땅에 와도 인간들이 몰라서 대접지 아니하지만 하나님 대접하게 하는 그  성신의 감동을 받아 이를 참 하나님이시요.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력이 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 예수님은 영원 무궁토록 신인양성일위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다시  변해지지 않는 양성일위의 분으로써 신성은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사람인데 이  둘이 물건 합한거와 같이 기계를 조립한 거와 같이 둘이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화합된거와 같이 그렇게 된 존재가 아니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데 이  신성과 인성이 한 격위를 이루어 가지고 나타나신 분입니다. 한 격위 신격 인격이  한 격위가 되어 가지고 나타나신 분입니다.

한 격위 신격 인격이 한 격위가 되어 가지고 나타나서 이 나타나신 그때부터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인 이 한 격위로된 분이 한 격위로 된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인 이 한 분이 모든 목적인 이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 영감 말씀 이 말씀이  아니고 제 이위 성자를 이름을 말하기를 말씀이라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말씀이라' 이름한 것은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로써 물체로 없고 무형의 존재인  것은 그는 완전자요 무한자이시기 때문에 이 형체속에 들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유형할 수 없고 무한자시기 때문에 유형할 수가 없어.

이 물질의 형체 물체도 없고 영의 형체 영체도 없으신 완전자이신데 그분의 그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알려줘서 필요한 것은 다 알려주시는 이 직책을 가지고  역사하실 때에 그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쳐서 말씀이라 이렇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구약 성경은 이 말씀이 말씀하신 그 말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는 그 말씀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 아니고 제 이위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서 말씀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도성인신하셔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으로 그로 예수님으로  상함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상함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이 잘못된 그 댓가인 그 형벌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를 원하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형 대행 대 화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의 행할 것을 대신 행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대신  이 화평을 이루신 이 역사의 형벌의 고통과 이 수고하는 이것을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담당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신인간에 관계를 맺은 이 하나님께서 이 대속의 일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온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이 일을 담당하는 것을 기뻐하셔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름중에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들의 대표인  사람과의 관계된 그 관계점에 이 계약성을 나타내시고 이행하시는 그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칠 때에 여호와라 이렇게 이름을 해서 나타냈습니다.

또 볼 수 알 수 없는 무형의 완전자로 계시는 이분의 그 본체와 이분의 속성과  이분의 역사를 피조물들에게 나타내서 알리는 선지 역활과 같은 이런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을 이름해서 말씀이라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질고를 당케하셨은즉" '질고를 당케하셨은즉' 하는 이 말씀은 모든 죄 값으로  말미암아 오는 죄가 원인이 되 가지고 오는 모든 것을 그 해를 예수님으로 다  담당케하셨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죄 값으로 오는 불행이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죄  값으로 말미암아 오는 불행은 전혀 없습니다. 죄 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그  성질에서 우리 정죄해서 그 정죄한 죄 값으로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이런  것이나 저런 것은 하나도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에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죄 불의 불목의 그 심판 댓가인 불목을  심판하시 가지고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에서 심판하시 가지고 거기에 대한  댓가인 모든 불행 사망 저주 질병 근심 걱정 고통 이런 것은 하나도 예수님이  없이 다 담당을 해서 다 대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안 믿는 사람들과 꼭같은 그런 형편을 당할 때  많이 있습니다. 병들 때도 있고 재앙을 받을 때도 있고 또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있고 또 죽는 것도 있고 다 있습니다. 있으나 예수님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당하는 것과 우리가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것은 자기의 죄 불의 불목 그 값으로 원죄와 본죄의  값으로 당하는 것이요. 우리들이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공심판에서  예수님이 이것을 다 대신 담당하셔서 공심판을 면했습니다. 공심판에서는 완전히  죄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 영원 확정되고 인정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공심판이 우리를 추호도 해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는 우리가 됐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 이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심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점령하신 성리하신 정복을 하셔서 사망도  예수님이 정복해서 예수님이 취해서 당신이 마음대로 하시게 된 사망도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고, 생명도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고, 마귀도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고,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전부가 움직이려는 그 움직임은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대속을 하신 후에 다 예수님에게  주셔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마태복음 28장 17절 이하에 보면 "하늘의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이 권세 가지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과  함께 하겠으니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들에게 분부한 이 문서계시  영감계시 섭리계시를 그들에게 알려서 순종을 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도록  해라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이 세례의 형식에서 머물지 말고 이  세례가 실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라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 아래에 있는 우리들이 아니고 공심판에서  예수님의 피로 대속해서 건저낸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판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공심판에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면제됐고 예수님의 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공심판은 정죄해 가지고 영원 멸망을 시키는 죄의 벌을  받는 것이 공심판이요.

고린도후서 5장에 5장12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터인데 선악간의 자기의 행함을 따라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이  그리스도의 심판 이 사심판 앞에 우리가 설 것입니다. 이 사심판은 벌을 정해주는  심판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상급과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정하시는 이  심판이십니다.

이 심판에서 자기가 땅위에서 의를 많이 했든 적게 했던 죄를 많이 이겼든 적게  이겼든 하나님과 결합되어 많이 살았든 적게 살았든 산 것은 전부 이 그리스도  심판에서 가리기를 노아 홍수 때에 모두다 홍수를 멸하는데 노아의 여덟 식구만  가려 가지고 홍수 심판을 면케 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오십 년 칠십 년 팔십 년 백 년 믿었든지 백 몇 십 년을 믿었든지 간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게 순종한 하나님으로 동행한 믿음을 지킨  고 양은 많든지 적든지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갈라 가지고 그 사람이 부활할 때에  그 사람의 능력으로 주십니다.

그러면 그 능력을 가지고 무궁 세계에 자기 능력으로 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오래동안 살았지마는 하나님으로 동하고 정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산 이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기본구원 얻어 하나님의  자녀되어 하늘나라에서 영생은 하지마는 자기가 마련한 건설의 그 구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은 하기는 하지마는 능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능한 자로 하늘나라에서 사니까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쓸모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만 받았지 하나님 시키시는 일을 그때에 하고 싶고 참  원통해서 하고 싶지마는 세상에서 하는 연습을 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서는 못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연습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연습이  있습니다. 연습한 것만치 자기의 실력이 된 것입니다. 연습을 할 때에 자기에게  있는것만 다하면 어떤 연습이 닥쳤든지 모지라는 것은 주님께서 다 보강시켜서  그 연습을 숙달하도록 하시는 것이 현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쉬운 일은 더 두렵고 쉬운 일은 수입은 적고 쉽게  생각해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쉬운 일은 낙관하다가 넘어지기 쉬우니까 참 두렵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만 달려들어서 다하면 나머지기는 다 하나님께서  보충해서 그 일을 감당케 하기 때문에 그럴 때에 보충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이 수입이 좋다고 어제 (안효일) 선생이 백점 대답을 한 것을  제가 지금 기억을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심판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  그리스도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하는 것은 그때에 분리되서 다 지옥불에  들어가버립니다.

아무리 택한자의 그의 심신의 얻을 기능이지마는 자기가 사죄받은 자가  사죄받은자로 살지 안하고 현실에서 사죄받은 것을 집어던지 버리버리고 죄를  좋아해서 죄로 그 시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님이 대속해주신 대로 살지  안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버리고 다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는 예수님이  담당할라면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혀 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을 해주신 대속받은 것을 제가 현실이라는 이 시험에서 져버리고  다시 범죄한 것은 예수님을 두번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이 죄기 때문에 예수님이  두번 십자가에 못박아야 대속이 되니 못박지 안하기 때문에 대속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가르쳐서 성경에 단번에 죽고 단번 대속이라는 것을 로마서  6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두번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슴을 히브리서 6장에 보면  말씀해놨습니다. 그런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져러리고  무죄자가 죄없는 자가 사죄받아 무죄자가 다시 범죄한 그것은 심판에서 정죄해서  하나님의 공심판에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타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주격체 영은 하늘나라  갔고 몸도 마음도 부활은 했지마는 그것의 기능이 될 것은 다 하늘나라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서 같이 타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아이가 같이 한자리에서 살지마는 한 아이는  열심히 노력을 해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있는 실력을 갖췄습니다. 한 아이는 갖출  수 있는 기회인 이때에 노력하지 아니하고 다 게을부리고 방탕 방종해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기능을 갖추어야 할 그 기회에 기능은 갖추지 안하고 죄짓는  연습만 했습니다.

제가 부산에 가서 간지가 삼십여 년이 나는데 거기에 보니까 부산에 있는 이  청년들 보면 어릴때부터 공부에 열중한 사람은 공부로 말미암아 기능을 얻었고,  가정이 어려워서 어릴 때부터 공장에 가 가지고 돌벌이를 열심히 한 사람은  돈벌이한 기술을 배워서 국민학교도 못나간 것이 공장에서 공장장입니다.

이런데 돈없는 것은 안 벌면 죽을 지경이니까 그래도 하지마는 부모들이 벌어서  자식이 자꾸 이래 우야 우야 하니까 울면 불면서 나 죽겠다고 이래 날뛰니까  돈을 조금씩 조금씩 주니까 공장가서 일하기 싫어 공부하기 싫어, 요게  돌아다니면서 도둑질하는 것 계집아 머슴아 돌아다니면서 여나무살 먹은 것이  벌써 돌아다니면서 못된 짓 하는 것 요것만 늘어 가지고 요것만 숙달됐소.

이래 놓으니까 다 같은 청년인데 인간이 가질 기능은 하나도 못했고 돈벌이 하는  그것도 못했고 돌아다니면서 죄짓는 요것만 숙달이 되어서 어떻게 능숙한지  버득거리면 접촉만하면 가시나들이 절단납니다. 이래서 그런것들을 삼가라고  멀리하라고 조심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접하면 다 말려들어가고 감염되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 삼가라고 해서 그것이 한 사십세나 되면 그때는 나븐 놈이야 제  자식을 기르니까 자식이 그짓하니 마음에 그때사 깨달아져 가지고 그것을 나쁜줄  알고 대항할 줄 알지 그리 안하면 모릅니다.

지금 부산같은 그런데는 다른데 나 잘 모르지마는 사십세 오십세 되도 거기에만  능숙해 가지고 그것만 일생동안을 이렇게 행하니까 제 행복도 거기에 다  매장됐고 천대 멸시받는 그것은 다 거기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이래 가지고  비참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래놓으니까 이거 나이가 서른살이니 서른 몇살 되어도 장가를 못갑니다. 이  계집아들 하고 머슴아들 하고 이래 가지고 그럴때는 사귀는 죄는 짓지마는  그것을 막상 데리고 일생동안 아내라고 남편으로 살맛은 없으니까 결혼의 대상은  안 되니까 몽달이 총각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시집 못간 처녀들이 꽉 찼습니다.

장가는 못 갔으나 여러 수십번 장가는 갔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인간의 실력을  기룰 수 있는 어떤 아이들은 마음에 기능 도덕의 기능 이런 기능을 갖춰 놓은  것은 마구 이런 총각 하나 있으면 서부교회도 다 권찰회때 결혼 이 총각은  이렇고 저렇고 이 기능을 갖췄다 하면 마구 처녀들이 뭐 대학이고 대학도 막  기나옵니다. 뭐 어떻게 그 지원자가 많은지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늘의 기능을 갖출 수 있는 그 현실인데  현실에서 기능 갖춘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낱낱이 그것을 등용시켜 무궁  세계에서 등용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의 이모를 순종했든지 저모를 순종했든지 이런 종류의  순종을 저런 종류의 순종을 했든지 순종한 한번 순종했든지 백번 순종했든지  한번 순종했으면 기능이 고만큼 발달됐고 열번 순종했으면 고만침 익숙이 됐고  한 그것이 다 부활할 때의 권능입니다.

이래서 빌립보 3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세상에서 귀하게 여겼던 것을  다 이제는 배설물로 똥 오줌과 같이 이제 여기고 그것은 똥 오줌으로 삼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음식 먹어 양분 취하고 나머지기 똥 오줌 되는 것처럼 이  세상 이런 못된 사건 저런 물질 이런 사회 접촉을 할 때에 고게서 알맹이  하늘나라의 영향 하늘나라에 영원토록 쓸 수 있는 그 기능 알맹이 그것은 만말  그것만 취하고 땅위에 두고갈 이런 것들은 다 배설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도 배설물인 이 외모인 이 세상 지위 권세 명예 돈 행락  건강 이 껍데기 가정 이 세상과 세상을 떠날 때에 두고갈 것 가져가지 못할 것  이런 것 다 외모인데 외모 이거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가지고 이것도  한번 연습해보고, 저것도 한번 연습해보고, 하나님의 이 말씀 순종도 한번  연습해보고, 저 말씀 순종도 한번 연습해보고, 네가 죽도록 참아라 하는 참으라는  연습도 한번 해보고, 원수 철저한 원수되어 이 원수를 한번 사랑도 해보라 하는  연습도 해보고, 이런 것 저런것 연습해서 모든 면에 기능이 숙달되는 일을 하게  해서 연습하라고 이 모든것을 잠깐 맡겼는데 아 맡긴 이것이 제것인줄 알고 그것만 욕심내 가지고 어떤 사람은 맡겨주니까  이렇게 한번 척 사용해 보고 저렇게 한번 사용해보고 아이들 소꼽장난 만들어  주니까 집도 지 보고 다리도 만들어 보고 탑도 만들어 보고 자꾸 또 부셔 가지고  새로 만들어 보고 하는것처럼 이런 것 저런 것 연습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자는 하나도 연습하지 아니하고 자꾸 주 모으기만 모음니다.

연습은 하나도 안하고 남에게 연습 할라하는 거는 뺏들지 방해도 하고 전부  모아놓고 내거라 했는데 '오늘 밤에 너는 오니라' 그 연혼을 부르니까 모아 놓은  것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다 두고 그냥 가버립니다. 이래 가니까 오니 심판대  그리스도의 심판대 들어가니까 '야 이 어리석은 놈아 네가 그 뭐 연습하고 왔노?'  '너 배운 기술이 뭐고 보자 내놔라 보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습하라고 준 것인데 연습하지 안하고서 그게 내것될 줄 알고 그것만 모아놓고  다른 사람 쓸것까지 다 도적질을 하고 훔치고 싸워서 뺏들고 이렇게 했느냐?'  '너는 기능을 하나도 갖추지 안했으니 너는 부활을 해도 기능없는 부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자기가 갖출 수 있는 기회 갖추지 안 했으니까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좋은것만 추리 가지고 하늘나라 갈 것맞 추리고 나머지기는  공심판에 던지버리는 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공심판은 거기는  하늘나라에 갈것은 하나도 없고 모조리 지옥갈 것들만 다 심판해 던지버리는  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공심판은 거기는 하늘나라에 갈것은 하나도 없고 모조리 지옥갈 것들만 다  심판해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공심판이요 그리스도의 심판은 하늘나라에  갈것들만 간추려서 이렇게 구별해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심판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이것을 면제해서 해결지웠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을 한 심판이 있으니 각각 자기의 행한대로 갚음을  받습니다. 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은 행함에 그 행동은 하늘나라에 가서  자기가 입고 다니는 자기의 영광의 옷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그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고 있으니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그렇게  요한계시 19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발가벗고 실내끼 이 실내끼 한내끼만 몸에 감고 있습니다. 한내끼만  감고 있어. 실내끼 한내끼 감아봤자 어데를 감추겠소. 한내끼만 감고 있습니다.

한내끼만 감고 돌아다닙니다. 감고 돌아다니면 저 사람은 세상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 순종한 현실에서만 한 현실에서 한번만 순종했으니까 실낙 하나가  그 몸을 가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 전신을 가루고 있는데 그 베짜는 데에 그 얼졌다고 하지 않소. 그  얼졌다고 한 씨가 한 씨가 안 들어가면 얼이집니다. 두 씨 안들어 가면 두 얼  집니다. 이러니까 입기는 입고 다니는데 보니까 버금 버금 버금 버금 하니까 그  여기에도 벌거이 나오고 저게도 벌거이 나오고 버금 버금 이러니까 가루기는  있지마는 그것이 그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소.

그전에 나는 그 제가 클때에 참 우리 어머니는 일을 많이 하신 어머니인데  장날이 되면  벼를 내놔 가지고 팔려 가라고 내놓으면 그 아버지가 검사를  하기를 요거는 요게 얼이 하나도 안 있으니까 이거 참 돈 많이 받겠는데 이래서  그 얼진 것을 보고 그러니 얼진 것을 아 지금 어찌 깁기나 할 줄 알지 그때는  짜집기 할 줄 모르니까 그 얼진 걸 짤 수가 없어.

그런데 처음으로 베를 베우는 그 우리 누님이 베를 배우는데 보니까 베 되도록  베를 베우는데 베를 가르치는데 배우니까 버금 버금 구멍이 째인데보다 안  째인데가 많아 버금 버금하이 구멍이 버금버금하이 그런것 가지고 하늘나라에  옷을 해입고 다닙니다.

예를 들면은 말이요. 세마포 옷이라는 것은 그 성도의 옿은 행실이라 이랬는데  옳은 행실 하나밖에 엇으니까 한 올만 걸쳐요. 또 하나도 얼없이 총총히 있으니까  이것은 얼이 하나도 없지. 이러니까 오늘에 주홍같고 진홍같이 얼이 있을찌라도  예수님의 구속에 들어가서 오늘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서 온전한 행위로 다시 하면  세마포 옷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을 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가이 양털같이 희게된다 하는 이런 좋은 기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죽기 전에라는 기회가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대로 가지고  가면 그대로 되니까 그 행함은 하늘나라의 그 사람의 영광의 옷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영광이 온전하고 그 사람은 실락끈 한개의 영광만 있소.

그러니까 그것이 영광되겠소 수치가 되겠소? 수치가 되지요.

하늘나라에는 수치가 없는 줄 압니까? 내가 여러 한 이십오 년 전에 하늘나라에  수치가 있다 하니까 고신에 성경으로 제일 잘하는 유력한 목사님인데 제가  서부교회있는 대신동교회에서 어느 장로 장립식할 때에 '아 이 옆에 교회서 어떤  조사는 하늘나라에 가도 그 구원에 차가 있다고 거도 부끄럼이 있다 한다고서  예수님의 대속인데 무슨 부끄럼있느냐' 하고서 이래서 욕을 한마디 앴는데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에 되면  "구원을 얻으나 불가운데 구원을 얻은 거와 같다" 그  공적이 다 불탔으니까 구원 얻었다 하는 그것이 영광이라 말이요 수치라 말이요?  (이원일) 목사님 뭐이라 말이요? 뭐이라 말이요? 여러분들 오늘 아침에 이래 말하는 이 교리가 기독교의 강령입니다. 이 교리가  이렇게 조직 신학에 다 나와 있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신성 인성에 대한  그런것은 과거에 그 하나가 큰 시비가 나 가지고 참 사대회의에서 그것을  밝혔는데 이제 거기에서 밝히지 안한 그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 알면은 다 이단으로 정죄를 모두 받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단단히 알고 이러면 현재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을지라도 앞으로는  승리를 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떤 중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도적 설교 그런것 아니요. 도덕 설교  그런거는 자다 들어도 일 없어요. 자다 들어도 다 알 수 있어. 윤리 설교도  그렇소. 그러나 이 하나님게 대한 신성 이 인성 이 그리스도관 신관 이 대속관에  대해서는 제가 자다가 들으면 모릅니다.

이래서 우리는 두 가지 심판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이는 공심판을 예수님으로 대신 받도록 예수님에게  부담시키기를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고통을 당케 하셨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죄 값으로 오는 것은 다 우리에게 오는 것을 대신 당신이  담당하셨기 때문에 죄 값으로 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지어도 공심판적인 죄 값으로 오는 그이에게 그 형은 없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 징계는 옵니다.

징계는 오는 것은 공심판에서 정죄해서 오는 그 멸망의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꾸 죄를  지으니까 그냥 안 되니까 매를 때리는 매 때리는 것은 벌로 때리는 게 아니고  고쳐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징계와 벌이 내려집니다.

우리에게는 죄 값으로 오는 벌은 없습니다. 죄를 범하니까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징계 하는 징계를 주시요 우리 기독자들에게 오는 모든  질고나 모든 고통이나 가난이나 어떤 어려움이나라도 오는 것은 징계요 벌은  아닙니다. 요것을 단단히 구별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에게 어떤 그 고통이 와도 두말할 것 없이 우리는 하나 단정  지울 것은 이 구원이 이 고통은 내 구원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고통입이다.

너 멸망하라고 이 고통주는 것 아니다. 이 잘못된 벌로 값으로 주는 고통이  아니다. 이는 너를 깨끗게 온전케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는 고통이니 이  고통을 네가 필요있게 잘 이용해야 되지 이 고통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물러가면  안 된다. 잘 이용해야 된다 어떻게 이용해야 되느냐? 이 고통이 네가 모르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담당했지마는 담당한 이것이 무죄자가 또 죄짓는 자로 삽니다. 이러니까  제 행위가 아닌 못쓸 행위가 하는 고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고짓을 하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있고, 네가 죄는 짓지 안했지마는 앞으로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네가 죄짓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미리  예비적으로 찌르는 가시로 주는 것일 수 있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그분은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는 깨끗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주 모진 그런 신병이 자기에게 있었습니다. 신병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그 병을 고쳐달라고 세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네게 준  은혜가 족하니 나는 약한 데에서 너의 강한 능력이 나타나느리라.' '이런데 네게  요만침 약해지면은 요만치 너를 부인하면은 요만한 능력이 네가 들어갈 수 있고  이만침 네가 약한 걸 깨닫고 참 약한 자로 살면 이만한 능력이 들어갈 수 있는데  네가 약해지지 안하고 다른 사람들이 마구 수건만 흔들어도 병이 낫고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 높이주고 또 일을 많이하고 하니까 높이주고 이래서 너를 모든  사람이 높이니까 네가 우쭐해 가지고 네가 교만해질까 해서 네가 교만치 못  하도록 조절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찌르는 가시를 줬으니까 만족히 여기라' 해서  세번 기도한 후에는 다시는 기도하지 안했고 그 병이 물러 가지 안하고 평상같이  했습니다.

네. 이러니까 우리에게 오는 병이 제가 잘못을 자꾸 그런 못된 버릇을 하니까  징계하기 위해서 온 것이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앞으로 그런 은헤를 받지 못하고  교만해서 물리침을 당할까 해서 미리 조절로 그렇게 주시는 것이든지 어쨎든지  구원에 필요한 것 뿐이지 구원에 필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필요한 것이니  거기에는 소망을 가지고 달라 들어서 필요한 그 필요를 효력을 네가 노리야 되지  효력을 얻어야 되지 거기에서 망령을 부리 가지고 낙심하고 내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가 이런 낙심해 돌아가는 것은 이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질고를 다 담당하셨다고 우리 질고를 다 담당하셨다고 성경에 선포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 질고를 당게 하셨은즉 하는 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하고 믿어야  됩니다. 그래 믿는 사람이 가다가 어떤 차에 치어서 변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그이에게 주신 것이고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기한 있는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기한전에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살대로는 잘살고 그 생명이 하나님에게  그런 변사하는 것으로써 이용이 된 것입니다.

'야 너 그리 갈라하면 어찌되노' '가까운대로 나가야지' '요리가야 되지' '어데  나갈거라 나갈라면 가까운 데로가지' '저 먼데로 어디로 나갈라하고 있어.' '그냥  앉았을라면 앉았고 오줌누렵거든 그 누가 비니루 포대기 줘요.' '그만 대고  누구로' '아 그래야 돼.' '그 아이들 가져오고 그래야 되요.' 그 요번에 차에  올때에도 다 그거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오줌 누루운 사람은 그 오눔눠야 되고  게우고 싶은 사람은 거 게워야 되고 아이들 어머니는 그걸 다 가지고 다녀야  되는건데 그걸 안 가지고 신에도 우선 눠라 그것도 좋습니다. 예 그거는 이등이지  일등은 아닙니다. 들고나가는 것보다 그게 낫습니다.

어떤 그 장로님 아들인데 그 요 왔을기라 아무 주일학교 때에 이 성 탄일 때에  성탄일 축하 때에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너무 좋아 가지고 오줌 준비 안하고  왔다 말이요. 그 오줌이 누렵다 그러니까 그래도 안 나가고 옷에다가 참 다지  싸버렸다 말이요. 옷에다 싸 가지고 옷이 홈박 다 젖어서 제 순서가 나오면  순서가 나오면 막 이러고 오줌은 싸 가지고 옷은 적시 가지고 그게 남자라.

그리 하나님 바로 못 믿는 사람에게 빛이고 오줌을 싸요. 안 되면 참는 것보다  싸는 게 낫소. 참아 병돼. 그자리 싸 가지고 뭐 그래도 예배 시간에 은혜  받으려고 안 나갈라고 오줌 쌌으니까 오줌은 의롭게 싼 오줌이지 병으로 싼  오줌은 아니라 그 나가지 말아요. 우리는 죄 값으로 온것은 주님이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어떤 것이라도 필요해서 온것입니다.

부산에서 어떤 집사님이며 권찰님이신 한분이 차에 치어서 세상을 떴습니다. 내가  그때에 출상 예배를 드릴 때에 성령이 내게 충만히 감동 되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고 거기에 동참한 사람들이 전부다 눈물을 머금고 다 통회를 했습니다.

그분은 특색있는 것이 한번도 남보고 성내는 일이 없었고 안 웃는 일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청하면 거절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랬는데  심방가면서 그 시간은 없지 이러니까 심방가는데 그만 조급해서 자꾸 이래  기도하다 보니까 심방하는데 갈급하다 보니까 가고 싶은 마음이 갈급하니 버스기  그 정류하기는 하는데 지금 그 가 가지고 심방을 해야 되겠는데 지금 늦게 가면  못 만나겠는데 이런 지금 요런 조건이 막 뭉치 가지고 있는데 이러니까 차가  버스가 그렇게 빨리가는 버스지마는 안 가는 것같고 아 정지를 하니까  시작했는데 벌써 차는 정거한 것 같고 이러니꺼 거기에서 내리다가 고만 세상을  떴습니다.

그 일분도 덜 살지 안하고 수명대로 다 살고 죽었소. 그렇지마는 그 죽음은 주님  생각하고 인간들의 그 구원을 생각해서 구원 위해서 갈급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거와같이 그 구원코자 하는 그런 간절한 소원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변사된 것입니다.

그 심정 그래 죽을줄도 모르고 그렇게 급하게 뛰내리는 그때 그 조사를 해보니까  그 누집에 심방갈라 했는데 고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가버리고 없다 말이요.

이러니까 버스가 달리지마는 마음에 안 가는 것 같단 말이요. 고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주의 사명감의 불이 붙은 고 불붙는 것으로써 마지막의  변사됐으니 모르는 사람은 생각할 때에 저 예수 믿는 사람도 차에도 치여 죽고  뭐 다른게 뭐 있느냐? 이런데 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여럿있습니다. 있는데 그분에 대해서는 그게 참  순교의 죽음과 같에요. 난중에 가되면  그 사람 하나로 인해서 그래 모든 울면서  그이의 인격을 사모하고 그냥 그만 병들어 죽었으면 그렇잖을 텐데 그래노니까  그 사람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눈물이 나오요. 그 사람만 생각하면 아  그렇게까지 했는데 우리는 이렇게 꾀를 부려 되겠느냐고 또 박신한 조사님이라고 서부교회 조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남권찰로 심방을  돌아다니는데 심방을 다니다가 심방을 이렇게 다니면서 우리가 산에 기도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와서 또 위로를 해주겠다고서 아 수고 하십니다. '저도 여기  기도하면 안 됩니까' 이래서 '아 심방을 해야 되니까 아 심방을 하러 가이시시소'  '예 심방하러 가겠습니다.' 심방을 이래 다니는데 그날 할 심방을 거기 올라오다  보니까 심방이 몇집 시간이 늦어졌단말이요.

그래 그 심방을 다하고 그 심방을 다하고 마지막에 오면서 보니까 심방을 다하고  오는데 낮에 기별이 와서 내려가니까 드러 누웠는데 '그래 그 심방을 오늘 할  것을 다 했느냐' '다 했습니다.' 다 했는데 마지막 심방할 때에 좀 피곤하고  안됐는 것을 아 그래하고 들어왔는데 와가지고 이래 됐다고 하면서 심방하고 와  가지고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 있다가 세상을 떴습니다. 고렇게 죽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서 주의 일을 합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 그 사람 급하게 죽었다고 급사했다고  하겠지마는 그 아는 사람은 참 눈물이 납니다. 그래 놓으니까 그분을 장례할 때의  서부교회의 교인들이 뭐 안 우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이 (박) 조사님이 죽으셨을 때의 이것을 모든  사람이 감동받아서 통곡하는 이 통곡이 백 목사 죽었을 때에는 이 통곡이 없었을  것이다.' '왜 내가 여러분들 알기에 이 박조사님 처럼 이렇게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서 하나님에게 충성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감동은 여러분들에게 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쳤으니까 그 말씀의 감동을 받으라' 내 그런  말을 하고서 그때 나도 눈물을 흘렸소.

이런 충성 그런 것도 다 필요해서 그에게도 필요하고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차에  죽음도 그에게도 필요하고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어떤 사람 병이 들었는데 몸이  약하니까 몸에다가 피 대신 주사를 맞아 가지고 일을 합니다. 내가 야단을 쳤소.

'아 자기 힘 가지고 할 때로 하는 것이지 그 힘해서 기진하게 하는 그것도 치우친  것이라 잘못된 것인데 아 일 할라고 그 아주 급하게 위급할 때에 쓰는 그 주사를  놔 가지고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 어데 있느냐' 나무랬는데 나중에 내가 알고보니 일을 할것 있고 심방은 해야되고 가면 말 한마디하면  가정이 살아나는데 말 한마디 하면 사람이 살아나는데 이렇게 필요한데 가기는  가야 되는데 기운이 없고 이러니까 피 주사 피 주사를 맞아 가지고 피 주사를  맞고 갈라고 하는 그것을 나한테 들켰다 그말이요. 야단을 쳤소.

그 병이 내게 대해서는 크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주의 일을  할라하는데 나는 피 주사 안 맞고도 그런 주사 안 맞고도 할 수 있는 일도 내가  안하고 지금 꾀을 부리고 있다. 내가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것이 본인에게는 건강해 가지고 남은 힘 가지고 하는 것보다도  있는 힘 다 기울이니까 있는 힘 다 기울이게 만드니 그 본인에게 대해서 참 지사  충성이 되어지고 또 보는 나에게도 회개가 되어지고 이래가다 피곤해서 눕다가도  아이구 그분만 생각하면 안됐다 이것 아 피 주사 맞아가며 일도 할라하는데 이것  할 수 있는데 안해 되겠느냐. 일어났다가도 그래 좀 생각해보면 아 내가 지금  일어나 가지고 일하다가는 나중의 다른 일도 못하고 도리어 마이나스 되겠다 안  되겠다. 이것은 이 눕는 것도 아무리 수지계산을 맞추어도 누워야 겠다 눕는 것도  수지 계산을 맞춰서 그래 눕고도 떡 내가 담대히 말합니다. 눕는 것도 주를 위해서 눕고 자는 것도  주를 위해서 자고 먹는 것도 주를 위해서 먹고 싫은 먹기 싫소 용역해서  그렇지마는 그것 안 먹으면 일 못한다 그거요. 어느 단게에 가면 사람들이 먹고  자는 것도 노는 것도 쉬는 것도 먹는 것도 전부 주를 위해 한다. 그 말쟁이 물에  여도 물에 불지 안할 말 한다 아니요. 어느 단계에 가면 다 주를 위함이 안될 수  없는 단계에 가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내가 그때 거창와 집회할 때에 보니까 집회하고 설교하고  나오니까 폭 깔아져서 고대로 있으면 고만 가는거라. 또 주사를 놔 가지고 또  이용해 먹고 뭐 주사 놔 가지고 이용할 대로 우리가 다 짜라 먹을 대로 다 짜라  먹고 나머지기 찌기 그것만 공산군들이 가지고 갔지 그래 했는 그것도 얼마나  가치있게 했는지 모른 것이 요 믿음에 입각하면 아 위하는 것 밖에 없지 해롭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기에 믿는 사람을 죄의 징계로 오는 것도 있고 그 사람의 생애를 더  하나님에게 충성된 가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분들 어떤  사람이 연보를 하는데 백만원 있는데 만원 연보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백만원을 고만 재산이 없어지고 만원밖에 없습니다. 만원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연보가 만원인데 톨톨 털어서 만원 한것과 백만원의 십분지  일한 거와 그 가치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지요. 있는 것과 바쳤거든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있다 그말이요.

그이에게 하는 것이 더 충성되게 하기 위해서 더 가치있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덕과 빛이 더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더 그에게 있는 것을 다  바치는 다 바치는 고 성심 성의 고 솔박 다 받게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라고 그 결혼의 첫사랑에서 비참 꿀과 같은 단 연애 그것 연애 그까짓것은  그림자요. 주님과 성도 그 사이에 주님이 속속들이 알뜰이 사랑하시고 세밀히  사랑하시고 그 뭐 오줌 한번 주는 것도 간섭을 하는데 예 자기에게 물방울 하나  뛰어오는 것도 간섭을 하는데 이래 가지고 이래 간섭을 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길을 턱 가니까 어떤 사람이 그때사 말고 가서 이 도시에도 이 뭐 무리한  사람들은 고만 부억 설거지 해 가지고 거 길에 휙 던져버립니다. 확 던지는데  하필 지나가다가 모든 더러운 것 씻은 구정물이 자기에게 뛰어 왔습니다. '왜  사람 가는 것 안보고 사람에게 구정물 찌그리요' 시비하지 안하고 말이요. 이러면  '오 주여 내게 무슨 더러운 것이 있습니까.' '이 모든 씻근 더러운 구정물로  가지고 나를 이래 두터씨우니 이것은 내게 무엇이 더러운 것인 것을 가르쳐  주십니까' 아 그러면 또 구정물을 그 구정물 갖은 것이 있다 그 말이오.

자기에게 이러니까 그걸 회개하면 또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얼마나 은혜를  주시는지 이러니까 전부가 주의 사랑이요 주의 연애요 주님의 간섭이요 주님의  세밀이요.

예.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그 질고에 속한 그  어려움이 오든지 재산이 가도 와도 무의미하게 재산만 오고 가는것 아닙니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뿍 들어있어. 사랑의 역사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러니까 가는 데에도 주님의 사랑을 자기가 깨달을 수 있고 더 유익되는 것을  취할 수도 있고 오는 것도 그러하고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런 모든 인간이  불행이라 하는 것 행복이라 하는 것 어떤 것이든지 반드시 거기에서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그 유익이 오기 위해서 그 유익의 앞잡이로 표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믿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래서 우리신 깨닫지 못할 것도 깨닫게 되고 교만할 것도 겸손해지고,  우쭐해졌던 것이 딱 겸손해지게 되고, 자기가 조심 안했던 것을 조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꼬임받을 때에서 깨어서 꼬임받지 안하게 되고 이런고로 우리에게는 좋은 것이 오든지 나쁜것이 오든지 주님이 피흘러 나를  구원하신 이 주님의 피 흘리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전지 전능하시고  지극히 작은 개미 한마리 수염을 이렇게 흔드는 것까지 고 개별 그 고것도  섭리하시는 요 개별 섭리를 주권을 가지고 하시는 이분이 못할 것 없으신 이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요렇게 개별 섭리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요 사랑의  대상이 되야 됩니다.

아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도무지 그 상대가 되지 아니하고 떡 이  남편이 그 아내의 손에서 물이 한그릇 얻어먹고 싶어서 '아 목마르다 목마르다'  이러니까 뻐쩟 마른 쑥떡을 갖다 떡 줍니다. 이것 참 불통입니다. '아 배고프다'  이러니까 농안에서 옷을 떡 내 가지고 입으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그 통하겠소  안 통하겠소? 그러면 통합니까 안 통한다 그말이요.

떡 와 가지고 와 가지고 척 않는데 조금 마음에 피곤한상 바르니까 아 얼른 거  뭘 마실 것 먹을 것을 '아 좀 피곤하신데 조금 요구를 하십시요' 그러면 이제  피곤이 좀 풀립니다. '아 내가 피곤치도 안한테' '얼굴 빛을 보니 피곤한 것  같습니다.' 얼굴 빛만 보고 압니다. 말을 해도 모르는데 얼굴 빛만 봐도 아요. 떡  와 가지고 기분만 보니까 '아 밖에서 무슨 상한 일이 있고 일이 잘못됐구나' 또  위로를 해줍니다.

자 얼굴만 봐도 아는 그 통함이 있어야 되겠고 그리 안 하면 말을 들어서는  알아야 되겠고 모르면 행동해서 먹는 '물 가져와' 그러면 그대로 알아야 될터인데  이것 모르고 빡빡하니 이것 막혀 노면 어찌 살겠소. 이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오만  좋을 것 다 가하는데 우리가 속히 마음이 딴데 있다 그말이요.

남편이 지금 어려운 문제가 있어 수심을 떡하고 들어오는데 그만 와서는 떡  들어오는 데도 몰랐습니다. 와서 앉는데 눈으로만 쳐다보지 보는 데도 몰라요. 또  옷을 떡 벗으니까 그것도 보고 떡 섰고 '정신 빠졌어 뭣해' 고함을 꽉 지르니까  눈을 떠 가지고 '아 오셨습니까.' 마음이 어디가서 있었지? 저 춤추고 돌아다니는 간부하고 춤추고 돌아다니고 저  요리집에서 놀고 저 산속에 다니면서 놀고 하는 그런데 그 생각하고 그것만  연상하고 있으니까 눈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 그말이요.

예 고 못쓸 여자 고런 것 모양으로 성도들이 주님을 부르기는 부르지마는 돈  욕심에 명예 욕심에 세상 욕심의 이 사욕의 육체의 소욕의 이 육체의 소욕이  가득찼으니 하나님이 보여집니까 이러니까 감각이 없어. 이러니까 이 설교를  들어도 귀에 안 들어와 자꾸 조름이 오지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질고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이러기에 우리에게 오는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시고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못한 것이 올 때에도 당신이  무엇인가 좋지 못한 고것을 통해서 주시야 줄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좋지 못한 고것을 통해서 주셔야 할 고것을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한 표적으로 길잡이로 한 중매쟁이로 이래 보내는 것이고 또 우리에게  좋은 것이 오는 그것도 좋은 것 그것만이 아니요 좋은 것 그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육체로 이 신경으로  감각할 수 있는 이 모든 희노애락의 모든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것은 눈으로  귀로 들을 수 없는 볼 수 없는 신령하고 영원하고 완전하고 무궁한 이 하늘의  생명과 신령한 속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것으로서 우리를 칠벅거리는  것이라 그말이요.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가 먼눈 뜨고 있으니까 그러다가는 차에 바쳐 죽겠다 그  말이오. 먼눈 뜨고 있으니까 사랑하는 남편이 흔듭니다. 아 저 차가 오는데 거  섯으면 안돼. 이리나와 이렇게 칠벅거리는 것처럼 우리를 이렇게 칠벅거리는  것이라 그 말이오.

아 목마르다고 지금 목마르다고 그 물이 약이 타 있는데 이 목마르니까 이 가  가지고 그 약 먹겠다 그마리요. 그러면 죽을끼라 말이오. 이러니까 약 먹지  못하도록 찔벅 거리면서 이러니까 '아 나 목마른데 물 마실라하는데 질먹거리  쌌소.' '그런 게 아니라 그 물은 독약수 독약을 푼 독수니까 먹으면 죽어 여 먹지  마십시요.' '아 목마른데 그 못 먹루로 해' '목 말라 죽겠구먼' '아 그 물을 먹으면  안 먹는만 못 하니까 먹지 말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시비를 합니다. 꼭 그와  같은 여자요.

예 우리 교인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님에게 대해서 이렇게 미련하고 이렇게  악하고 이렇게 독하고 이렇게 헛된 바람 피우고 이런 자기 신자가 되여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자꾸 서부교회에서는 매일 일곱 시 반으로부터 아홉시 반까지  지금은 삼십 분 기도를 하는데 와서 하고 자기 집에서 산에 가서 이렇게 하는데  오면 어떤 사람은 고만 주님이야 어데 있던지 말든지 자기 요구만 합니다. 뭘  필요하고 뭘 필요하고 뭘 필요하고 뭘 필요하고 뭘 필요하고 꼭 줘야 합니다.

이래도 주님은 하도 우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히시기는 좋아하시지마는 좀  답답하다 그 말이오. 그것은 자기 마음 어리석은 자기 마음에 필요하지 주님이  주시면 안될 것들을 많이 요구한다 그 말이오.

어떤 분들은 기도하러 오면 딱 와 가지고 주님 상부터 봅니다. 보자 주님이 내게  대해서는 뭐 섭섭함이 있나? 안타까움이 있나? 뭐 만족히 하심이 있나? 마음이  애타하심이 있나? 나에게 뭐 부탁할 것이 있나? 요 구할 것이 있나? 명령할 것이  있나? 내가 이분에게 뭐 거슬릴 게 있나? 자꾸 생각합니다. 자꾸 생각해.

이것 생각하다 보니까 뭐 삼십분 됐습니다. 시간도 생각하니까 아 생각해보니 말  안할 수가 없어. '아 이것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내가 그때  요렇게 요래 가지고 요래 해버렸더니마는 고만 그러면 될줄 알았는데 그게  잘못됐습니다.' 그때사 생각이 납니다. '아 잘못됐습니다.' '아 내가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말씀한 것을 내가 알아 들었는데 감동을  받았는데 깨달아 졌는데 아 그것을 고만 분주한데 잊어버렸습니다.' '아  잘못됐습니다.' '내가 다시 하겠습니다.' '기회는 지나갔어.' '다시 할 수 없어.'  '그건 지나가서 헛일 됐고 이것을 해.' '내 죄송합니다.' '네 꼭하겠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이제 조금 더 나오고 이런데 '그때 내가 그 일 할라 할 때에 주님  어데 갔습디까' '내가 그 일 할때 암만 찾아야 안 계시고 내가 이랬는데 그래  가지고 그걸하다 못 하지 안했습니까.' '그때에 누구를 통해서 말하지 않던가'  '그게 내가 아니가 내가 그때 누구를 통해서 말하지 않던가' '그리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했어.' '또 내가 그때 자기 마음 속에 생명 내대야 한다 내가 이 말을  했는데 그 소리가 안 들리든가' '아 참 그때에 내가 죽도록 충성이라 이랬는데  이게 생명 안내놓으면 안 되겠다 그런 마음이 내게 설득 지나갔습니다.' '그게  내지 누구라' 이래 노니까 이제 주님하고 속삭거립니다.

이래서 주님만나니까 고만 고것 이야기하다 보니까 시간이 고만 삼십 분 지내 한  시간도 지나 이러다보니까 고만 잘 시간으로 작정한 시간은 지나가버렸어. 그래  시간도 못 지켰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또 그 다음이 만나니까 그래도 시간을  지켜야 되지 고걸 지켜야 되지 아 또 이담엔 지키겠습니다.

주님과 만나 가지고 만나면 좋아 가지고 주님 검어쥐고 자꾸 이러다 보니까 그만  다른 면은 지키지 못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치우칩니다. 안 됩니다. 이러니까 아  거기에서 오면 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현실은 주님과 자기와의 교제하는 이게 뭐이요? 에덴동산이요,  밀실 골방 황후의 왕의 후궁이요, 밀실이요, 잠근 동산 주님과 동행하는 곳이요,  주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밀실이요, 골방이요, 왕을 만나는 후궁이요.

예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질고를 담당하셨다하는 요것을 믿어야 됩니다. 요  자기가 지식으로 암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자기에게 딱  어떤 현실이든지 당했을 때에 그때의 요 질고를 담당했다는 요 성구를 믿는 것이  믿음인데 믿는 게 있느냐? 자기에게 이해 못할 어려움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이것은 죄  값으로 온게 아니고 나를 망하라고 온것이 아니고 나를 해할라고 온것이 아니고  이것은 주님이 나를 이것으로써 깨우치시고 나에게 새로운 것을 주시고  고쳐주시고 나쁜것은 고쳐주시고 새로운 것을 보강시켜 주시고 나를 깨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는 주의 사랑의 이 역사라는 것을 자기가 고때에 믿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딱 달라드는 그것이 주님을 바래보는 것이요 주님을 믿는 것이요.

주님을 교제하는 것이요. 주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게 믿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모든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도리를 다 알아도 현실에서 고  사실을 인정해서 고게애 대해서 순종하는 일이 없으면 그 사람은 자기 아는  지식이 이 다음의 자기를 정죄할 심판의 율법이 되어지지 자기에게 복음은  되어지지 않습니다.

고 다 말아도 믿는 것은 자기가 인정한다 인정한다 암만 인정해야 그건 아닙니다.

인정도 현실에서 해야 됩니다. 인정도 현실에서 해야 비로소 고게서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순종도 써먹는 것도 현실에서 해야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날은 길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 고 씨를 본다  그말은 씨를 본다 그말은 구원의 종자가 시작된다 그 말이오. 씨를 본다 말은  이제 하나님의 목적이 씨가 성립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이 씨에서 자라면 또 씨가 맺고 씨가 맺고 그러니까 한 밀알 예수님께서  땅에 떨어져 죽으면 움이나서 많은 결실을 맺느니라 말씀하신 요 주님을 한 알의  밀알로써 말씀하심 같이 이 구원의 씨 하나님의 목적의 종자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목적의 종자 인제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박히심은 대속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의 이 구원의 종자입니다. 양이 적어 그렇지 완성된 것입니다.

완성됐소. 고기에서 완성된 이 구원이 모든 택한자들에게 분급되 나가는 것이지  고기에서 나온 것이지 고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다 고 종자 고기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씨를 보게 되며  이제는 씨가 맺어서 이 구원의 종자가 이루어집니다.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것이요. 이제 이 종자로 된 것은 영원 무궁 무궁을 가르쳐 영원 무궁 전부 영생  완전 영원 무궁 불변 이렇게 전부 그게서 이 종자에서 나온 것을 전부  완전성입니다. 영원성입니다. 불변성이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고로 대형 다 했고, 대행 다 했고, 대화친 다한 이 하나님의 목저기을  종자적으로 완성했으니 그 종자에서 나온 것은 영원 무궁하며 모두 완전이며  불변의 영생의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 영혼을 속건 재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 영혼을 속건 재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예수님의 신성도 이 고난에 참여는 하셨지 참여하신 것은 이 피조물이 그 신성을  고난케 못 합니다. 신성에게 벌을 못 줍니다. 고통을 못 줍니다. 그 사랑이 고통을  당한 것이지 고통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영도 죄를 짓기 전의 마귀나 이 피조물들이 그에게 형을 가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을 주지 못 합니다. 고통이 거기에 가까이 가지 못 합니다.

다만 그 영의 사랑이 영의 사랑이 예수님의 그 심신이 십자가에서 이 세상이  형을 줄수 있는 그 저급의 것 형을 줄 수 있는 이 물질의 것 그것을 줄 때에 그  형의 영이 동참했고 하나님의 신성이 동참한 것은 그 사랑이 동참한 것이지  이것이 형을 줄 수 있어 형을 받을 수 있어 한것 아닙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영은 그 형의 고통을 사랑으로 동참했습니다.

사랑이 그 죄 지은데 대해서 고통스러워 여기에 사람되기까지 오셨고 또 그 죄의  값을 받는 그 육이 받는 그 형을 받는 거기에 대해서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  고통을 당신이 느끼시고 참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재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당하신 이 마음과 육 이것이 이 피조물들에게 형을 당했고  예수님의 영과 예수님의 신성은 그 사랑의로써 지공과 지성에 대해서 이 책임을  지고 그 사랑이 고민한 그것이 이 대속의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으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신 것을 그  영혼의 주격인 신성과 인성이 함께 그 소유되어 있는 이 재물로 이 외부의 이  물체를 이 마귀들 피조물이 형을 줄 수 있는 그 형은 이 육 밖에 형을 줄 수  밖에 없는데 육이 형을 받는 그 형에 하나님이 사랑의 아픔이 동참해서 이  대속은 무한한 대속 영원한 대속이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영혼을 속건 제물로 내주어서 두 가지 외부를 했고 한 가지 내부를  행한 이 일 다 완성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이 영혼이 이 대속의 일을 다  담당을 했습니다. 담당을 했으니까 이것은 죽은 것이요 예수님의 몸은 죽었소?  예수님의 육은 죽었소? 예수님의 영혼은 죽었소? 죽었습니다.

이 죽었는데 죽어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의  죽으심은 외부적으로는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형으로 죽으셨습니다.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형으로 죽었습니다. 무슨 죄, 말씀을 어긴 지 자기가 주장이 되  가지고 한 그 불의의 죄 하나님과 원수가 된 그 원수의 죄 이 세 가지 죄를  멸하기 위해서 그 형을 받아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이것은 그 죄 값으로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이  공심판에서 예수님께서 그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그 육체가 육이 죽었습니다. 또  죽으신 그 내적은 그렇게 형을 받아 죽으시면서 형을 받아 죽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켰습니다. 이런 형을 받아 죽으시면서도 다 지켰습니다.

자 예를 들어서 저서 쌀을 한 가마니 지고 오너라 이랬는데 쌀 한 가마니 지고  오는데 잘못됐다고 잘못된 값으로 다리를 부질랐습니다. 다리를 뿌질렀는데  뿌지라진 다리로 쌀 한 가마니 지고 오는 것이 쉽습니까 성한 다리로 지고 오는  것 쉽습니까? 성한 다리로 지고 오기가 쉽지요. 부지러진 다리로 지고 오기가  힘들지요.

주님은 이 세 가지 죄 값으로 우주적인 이 형을 받으시는 형을 받으시는 그  영혼으로 형을 받으시는 그 심신으로 그들에게 영은 할 수가 없어. 이 형을  받으시는 이 심신으로 하나님의 법을 다 이행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조금도  어기지 아니했습니다.

요렇게 형을 주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우리의 형을 대신  담당하시겠다고 소원을 하니까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자유성으로 원하시는데 안 된다고 강제로 못 합니다. 주님께서 자원하신 그  자원을 하나님의 지공에서 통과가 됐습니다. 지공에서 본인이 꼭 원하면 할 수  없어 대신 담당했던 것입니다.

대신 담당하니까 지성법에서 죄지은 것을 낱낱이 형을 다해야 됩니다. 다 형을  줘야합니다. 이 형을 예수님이 다 형을 받으시면서 형만 받았으면 쉽겠는데 형을  받으시면서 일면의 그 이면에서는 형을 받는데 마귀란 놈은 요 형을 받을 때  고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할라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안 어겼습니다.

형을 받는 요 때의 하나님에게 순종 못 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순종하지  못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을 다 했습니다. 요렇게 형을 받으니까  하나님으로 더불어 불목한 형 받으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을 이룰 그런  정신이 어데 있겠소. 그러니까 화목을 이루지 못 하도록 하려고 이렇게 마귀는  백방으로 노력했지마는 이 불목의 벌을 받으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해서 버렸소. 정죄해서 버렸습니다. 버려도 주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친을 놓지 아니했습니다. 이 불목의 벌을 받으면서 화친의 이 줄을 잡고  화친을 놓지 아니하므로 마지막에 끝났습니다.

하나님에게 그 거역한 이 자기 자율대로 산 이 불의의 값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이 일을 같이 겸하여 하시면서 하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의 벌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는 범하지 않는 요  일 일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신 양면이십니다.

이러시면서 당신의 심신의 그 세포 하나까지도 이렇게 하나님의 지공법 지성법을  이루어 만족케 했습니다. 이래서 로마서 8장에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케 했다"  하는 말씀을 거기에 기록했습니다. 이러시면서 예수님의 그 영과 예수님의 이  신성은 이 인성과 신성의 이 일위는 하나님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지성을  향하여서 모든 것을 다 받혔습니다.

지성을 향하여서 모든 것을 다 받혔습니다. 세포 하나도 고통에게 외모로는 매를  두들겨 맞지마는 고통에 머물지 아니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지성을 향하여  소망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삼단 대속입니다. 삼단 대속,  이러니까 이래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는 다 이루었다" 이것도 하나님이 예언하신 고 예언을 바탕이 되서 이제는  다 이루었다 지공 지성 공심판도 다 이루었고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법도 다  완성을 했고 형도 다 받았고 순종도 다 했고 하나님에게 받침도 지성에 다  받혔고 이랬으니까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는데 신성 인성의 일위는 이대로 되어 있지마는 이 심신은 그걸  담당하느라고 벌써 담당하느라고 죽어있습니다. 담당하느라고 죽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것은 예수님의 그 담당하신 그 육을  아버지 손에 부탁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 있습니까 심한 통곡을 했습니다. 다시 살릴 수 있는 이  하나님에게 심한 통곡으로 간청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담당하면 담당으로  죽을터이니까 죽으니까 죽은 가운데서 살려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 부탁한  그 약속대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한 그때에 다시 하나님께서 대속의 재물이  된 그것을 다시 살려주시기를 간구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죽음 가운데에서 그 인성을 영원한 대속물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신인양성일위가 다시 됐습니다. 신인양성일위가 다시  이제는 신인양성일위가 같이 되어 영원토록 그 인성은 우리 사람 편 그 신성은  하나님 편에 이래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에 다  붙었어.

삼위일체는 예수님의 신성의 다 붙은 하나님 신성 인성이 영원히 떨어지지 못  하게 결합이 되기를 돌과 돌을 결합시킨 것처럼 부속품과 부속품을 조립시킨  것이 아니고 둘이 한 격위를 이루는 밀접한 이 격위를 이룬 이 신인관계가  우리에게 영원히 뻣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손에 영원히 다 올 수 없는 이  관계가 뻣쳐졌고 잇겨졌습니다. 이것이 법적으로 된 것이 실상으로 우리의 실제와  이루어진 시작이 중생입니다.

그 다음에 지금 미완성된 것이 우리의 육이 부활된 것은 기본에 들었지마는  우리의 활동할 기능이 이것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이미 완성의 기능을 완성할라고  지금 역사하고 있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래서 11절에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영혼의 수고라는  것은 영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심신을 말합니다. 심신만 이 세상에  형을 줄 수가 있지 그 영에 범죄하지 않는 그 영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에게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이 여기에 대해서 그 아픔의 동참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십자가에 대속의 이 대형 대행 대화친이 이  재물이 된 이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것이라 만족히 여길것이라 누가 만족히 여길  것이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만족히 여길 것이라, 이 하나님이 만족히 여길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만족히 여길 것이라,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이 만족케  여길 것이라, 삼위의 성부도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신데 그 본체는  하나이십니다.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십니다. 한 하나님이 이 일 할 때는 이  이름으로 저 일을 할 때는 저 이름으로 이 일을 감당하실 때에는 이 이름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위에는 직책이 따르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만족히 여길 것이며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나의 의로운 종이 나의 의로운 종이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 삼위일체 하나님이나 한 가지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나의  의로운 종, 온전한 종, 의로운 종 의로운 종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되면  "아브라함에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그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 거기에 예수님을 종이라고 똑똑히 밝혀서  말씀했습니다. 이거는 신인양성일위로써 하나님에게 순종한 면을 가르쳐서 말씀한  것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이 자기 지식이란  말은 육십 육권 도리의 문서계시 이 특별계시 또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섭리  모든 인간들의 그 구조 이 모든 자연 만물의 일반계시 또 섭리계시 하나님의  영감계시 이것이 당신의 지식입니다.

당신의 지식 자기 지식으로 이 계시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택한 자들을 다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언이기 때문에 '담당하리라' 미래사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또 하나님입니다.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신인양성일위신 사람된 예수님으로 이 하나님의 존귀에 같이 참여하게 하며" 그  분깃을 같이하게 하며 내가 이겨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 같이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은 아버지의 위치에 앉어 하늘의 것이나 땅에 것의 것을 다 예수님이  대신 다 받으신 그것을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이 분깃을 얻게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분깃이 무엇인지 (정경수) 목사님 이 분깃이 무엇이지? 이 분깃이 무엇이지요?  이 분깃이 무엇이야? 여러분들 이것은 그렇게 쉬운 것 아닙니다. 요게 한마디에서  이단이 열도 백도 나옵니다. 요게는 이 절정인데 어떤 데라고 알고 졸고 있어.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 나 죽고 나면 난중에 뭐이  될지 몰라요. 요게까지 하나가 되야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가고 하나가 됩니다.

교회가 수많은 교파가 많지마는 그 교파 가운데에 교파가 개인이나 개교회나 요  끝까지 절정까지 바로 되져야 고것이 반석위에 지은 집이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이지 중간까지 가다가 만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되면   오늘의 정통이라는 자가 내일의 이단의 선봉자가 됐습니다. 얼마나 이 교리  문제가 어려운 줄도 모르고 그냥 꾸벅 꾸벅 졸고 있습니까. 아무나다나 말하는  것인줄 아요.

이 지금 이 말하는 것이 세계있는 모든 신학자들 모든 고등 비판가들 다 이를  향해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없어집니까 서방에 있는 신학자들이  이것을 듣고 지금 비판을 할 것입니다. 요점이나 조점이나 수많은 고등  비판가들이 다 이것을 검어쥐고 요 모퉁이 하나만 있으면 고것을 들고나서  가지고 이제 이단을 만듭니다.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존다 그 말이오. 그 어려운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요게 한마디만 틀리면 고것 하나 가지고 이단 되는 것입니다.

뭐인줄 알고 그렇게 쉽게 알아 들어 줄줄 말하는 줄 압니까.

세계의 조식 신학을 지금 향해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이단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모든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면은 이게 정통이  아닙니다. 올바른 정통에 하나가 되지 안하면은 이거 바른 교리와 신조가 아닌  것입니다.

어제 어떤 목사님이 기독교 교리사라는 그 책을 저한테 선물을 하나 주어서 내가  받았습니다. 내가 보들 못 했지마는 잠깐 초두에 목록을 봤습니다. 거 내부는  모르지마는 목록은 다 정통적인 목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내가 잠깐 봤습니다.

그러나 목록은 그럴찌라도 그 다음에 수많은 갈레길이 나기 때문에 갈라진다 그  말이오.

그 사람이 신성 부인할 때는 정통 신학자가 됐다가 인성 문제가 났을 때는  이단이 된 그자가 이름이 누구입니까 이때 금방 시험치고 다 잊어버렸나요. 그  이름이 뭐이지? 아 지금 요새 신학하는 사람들도 몰라. 예 아폴로나리우스 이렇게  정통을 말하지마는 그 속에 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라가고 가고 끝까지  하나님에게 까지 가는 데까지 고게 바로되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마는 신성에 잘못된 사람 인성에 잘못된 사람 신성 인성 그 관계의  잘못된 사람 또 신인양성일위이지마는 그의 역사에 잘못된 사람 대속에 잘못된  사람 얼마든지 삐뚤어지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을 지금 공부하고 있는데 여 다른 평신도들은 혹 그럴지라도  목회할 사람이 졸면 뭣하는거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존귀한 자는 하나님을 가르쳐  신성을 말합니다.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존귀한 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도 하나님이 얻는 이 위치를 얻는 것을 가르쳐서 표현한  것입니다. 신성 인성이 나누이지 아니하고 영원히 신인양성일위이지마는 일위  가운데에는 인성이 들어있다 그 말이오.

인성도 이렇게 이 역사 함을 인해서 존귀한 자의 분깃을 같이 받게 된다. 내가  승리하고 아버지의 보놔에 함께 앉은거와 같이 너희도 이기면 내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 하는 이것이 여기에서 부터 우리의 분깃이 나온 것입니다.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강한자와 함께 탈취한 자를 나누게  하리니" 강한자라 말은 신성인 하나님을 가르쳐 말하고 하나님과 인성 신성과  인성이 함께 승리의 분깃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으니 하는 그 하늘의 것과 땅에 있는 것을 다  받으신 그 분깃은 신인양성일위가 받았으니 신성도 받았고 인성도 받았습니다. 예  그것을 말합니다.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의 하나같이  헤아림을 입었음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정죄와 저주와  사형을 받은 것을 가르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지마는 그러나 실상은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는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그 주격인 영은 기도했습니다. 영혼은 속건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삼면을 완성한 죽으심입니다. 삼면을 완성한  죽으심입니다. 제일 외부는 무엇입니까? 자 이제 한번 이제는 여러분들이 평생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단단히 기억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외부의 완성하신 일은 무슨일입니까? 예? 몰라. 외부는 이 형을 담당해서 죄를  멸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죄를 멸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그 안에 내부는 죽기까지 하셔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었고 하나님의  요구 명령을 완전 순종했고 죄를 완전히 이기시는 이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지성에 만족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에 만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지성과 완전 그 결합의 완성을 이루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이런고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완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는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죽기까지 고민했던 것입니다.

피와 땀이 얼킨 기도를 했지마는 그 기도가 모지랐습니다. 하나님에게 다시 힘을  달라고 해서 하나님이 그 천사로 예수님의 영혼의 힘을 도와서 그 영혼이 기도의  완성을 했습니다. 완성을 하시고 난 다음에는 죽기까지 고민하신 고민이 이제는  기쁨과 안심이 됐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시고 완전  승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것은 우리 대신 형을 일을  완성하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내가 영원히 형벌을 그 형을 예수님이  대신받으셔서 나에게는 이 형이 없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형이 없습니다. 영원히  없습니다. 우리에게 형같이 보이는 것은 형이 아니요 사랑의 징게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할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명령하신 것  명령은 죄 짓지 말라고 명령이고 요구는 당신의 뜻에 복종하라고 요구하시는  명령 요구하는 이것을 우리 대신 다 행하신 죽으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하는 것을 빌립보 2장 8절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성에 지성에 감히 연결을 가지지 못 할 우리들을  우리대신 하나님의 지성에 연결을 가졌습니다. 연결을 가져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 다음의 위치를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이 교회의 위치입니다.

이래서 "모든 피조물은 발등상이 되고 하나님은 머리가 되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 만물 모든 천상천하의 통일된 그 나라에서 영계와 물질계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충만을 그들에게 충만을 줄 수 있는 충만에 시은의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중보의 위치에서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 교회가  된 것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큰 일을 위해서 모든 걸 예정하셨고 모든 걸 창조하셨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들고 오는 총도 따발총도 독침도 그것을 지으신 분이 주님이시요.

내 구원 위해서 지으셨소.

전선에서 '죽인다 말해라' '예수 팔아라' 그말 하는 그 움직임이 주님의 섭리요  움직이심이요 영원전 예정하신 것이요 그것이 나를 위해서 주님의 사랑의 목적을  영원 자존하신 사랑이 자존하신 기쁨이 자존하신 만족이 소원이 이렇게 이것을  이루어서 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독침속에 주의 사랑이 들었고,  주의 경영이 들었고, 주의 예정이 들었고, 주의 창조가 들었고, 주의 목적이  들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자녀로 사랑하시는 아내로 당신의 수족으로 삼으시는 이  일 이루시기 위해서 왔으니 내가 독침 앞에서 어떻게 해야될까? 거기서 울어야  될까? 하나님을 나타내야 될까? 독침의 호령을 쳐야 될까? 자기 일을 저할 대로  하고 나는 어떻게 대속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떻게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절대로 그 결합이 요통치 않는 것을 그에게 보여줄 것 뿐이요 나타날 것 뿐이지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지 거기서 얻은 힘이 아니라면 하늘의 소망만 가지고  이래야 영광받으실 것이다 하면서 억지로 발발 떨면서 죽는 그 죽음도 귀한  것이지마는 실상 그것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될란지 모릅니다.

네. 순교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고 순생이 그렇게 쉬운 것 아닙니다. 올바른  지식에서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성이 있어야 되고 인간 신인 관계성이  있어야 되는 것으로 가르쳐서 믿음이라 인인 그 인인관계성이 있어져야 되는  것을 말해서 덕이라 그런데 고것이 또 하나님의 이 뜻인 이 진리에 맞아야 되기  때문에 지식 성경 이래야 된다. 믿음의 덕에 덕에 지식을 말했습니다. 요것이고  단일성이 안 되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순교의 융화적이라고 6. 25가 지나고 나니까 뭐 순교한 사람이  많지마는 세상에 들어 가지고 목사 내놓고 박사하고, 목사 내놓고 장관하고, 목사  내놓고 돌아다니다가 그러다가 죽은 자로 그게 순교가 될란지 뭐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새는 목사는 그까짓 것은 가치가 없고 박사가 가치있기 때문에 목사 이름은  내버리고 이제 박사 이름 가지고 아무것이 박사라 이러지 안해요. 목사는  하나님에게 속한 성직입니다. 아 기름 부을 때의 하나님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름부은 목사직이요 박사직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거기에  기름 붙지를 안 했소. 이것만 봐도 기가찰 끼라 그거요.

어떤 사람 어제가다 말들으니까 여 왔다가 고만 보따리 들고 갔데요. 아마 간  사람은 내 생각에 내가 조금 말을 잘못해서 갔는지 그분이 잘못들어 갔는지, 단식  기도하는 가운데에 단식 기도가 참 좋은 것이지마는 요새는 단식 기도를  간판으로 자기 출세의 밑바탕으로 자본으로 삼기 때문에 그게 나쁘다 하는 거지  그거야 나쁘지 않다 그 말이오.

아 단식하는데 속으로 지금 사십일만 채우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해서 사십일  단식 기도 한것을 막 자랑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 사람은 틀린 사람이라 그  말이오. 단식 기도를 했으면 참 했으면 사십일 단식 기도하고 나왔으면 그 사람이  저 어머니한테 가서 머리도 들지 못하고 그게 들어가지고 오그락망탱이가 되  가지고 무지 무능 죄인 괴수 죄인이 되 가지고 그걸 자랑할 여지가 없는 그  사람이 옳은 단식 기도 한 사람입니다.

내 그 단식 기도 주장하는 걸 잘 지금 선정해서 잘 간추려서 그 소지해 주었는데  그 뭐 듣기 실타고 가고 있어. 그 틀렸어. 그러면 안 돼. 바로 수정 받아야지.

이제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으심이라고 해야 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을 한 말로 해서 피흘림이라고 피흘림은 그 생명이 끝난것을 하나  표시해서 하는 말인데 고것을 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피로 값주고  샀다 주님의 대속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는 이 세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5절의 "그 죽으심을 본받아 거기에 연합 한자가  되야되고" 그 부활하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야 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고것을 요 다음 시간에 시간 있으면 말씀하겠습니다. 오늘 이제 가르친 것을  여러분들이 똑똑히 모르면 자기만 가지고 구원에 써먹지 벌로 나가서 말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고 마귀란 놈이 유도작전 할라고 요렇게 말한 것을 요렇게 말하지 고렇게  말합디다. 거기에서 살작 뒤비트려 가지고 요렇게 말하지 않던가 그래 분별을 못  하니까 아 그때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요렇게 말하지 이러면 정통으로 말한 것  저 이단을 꾸며 가지고 이단은 제가 만들어 가지고 이단이라고 이렇게 소문을  퍼트려 가지고 집회 올라하는 걸 못 오도록 그런짓 한다 그 말이오.

이 다음에 똑똑히 그런데도 정죄를 해요 무엇 때문에 이단이라고 이단이 아니라.

정통중에 정통이라. 안심하고 따라와요. 여기 뭐 신학자들도 여럿이 와 있고  박사들도 와 있고 다 와 있는 줄 알아요. 이단이면 이단이라고 딱 꼭 찝어  말해요. 내가 말해 줄터이니까 나는 정통 중에 정통인 것을 나는 믿고 있어요.

확실히 정통입니다. 그런 미혹 받지 말아요.

그러나 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말을 하기를 아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말하기를  죄를 지어 놓고 손으로 죄를 지어놓고 손으로 도적질 해 놓고 말하기를 '내가  도적질 했나?' '나는 죄 안 지었다.' '손이 죄 지었지' 이러는 목사가 여 부산  교회에 있다 이렇게 말하드래요.

나를 말하기를 그 육이 뭐인지도 모르고 영이 뭐인지도 모르고 육이 죄를 지은  것이 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을 영을 자기로 알고 육이라 하니까  고깃덩어리 이것만 육으로 알고 하니 그 목사가 감감한 목사인데 그 목사가  부흥회를 하니 무슨 교회가 되겠소.

여러분들 남의 말을 모르고 정죄하면 자기 정죄가 되고 맙니다. 그 사람 안타까와  하는 것이지 정죄받는 게 섭섭해 그러는 것 아니요. 정죄 받으면 그 사람 안 될까  싶어서 그라는 것이지 옳은 것을 정죄하면 "거 짓걸로 핍박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의 상급이 크니라" 고면은 기쁘지마는 그 사람들이 모르고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니까 그 안타까움과 겸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뭐  손해갈까 시퍼서 그러는 줄 압니까.

누가 말하기를 '거기 이단이라' 그러는 통에 전도가 잘 안 됩니다. 내가 그런 목사  있어. '네가 하나님 기뻐 안 해서 보내주지 안해서 그렇지 그것 때문에 안 되는  것 아니다.' '그러니까 더 조심해서 네가 살면 더 부흥이 될거다' 아버지가 보내는  자 누가 못 가게 할 것이고 네가 안 되서 그래놓고 엉뚱한 소리 하나? 제일  근거지인 부산서 야단을 지기지마는 부산서 제일 큰 교회 삼 배가 되는 교회가  서부교회다. 장년반 유년반은 한 육칠배 된다 와 아버지가 보내는데 와 안 와. 안  와. 그거다 다 마귀 소리다 마귀소리다.

어쩌든지 아버지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그분만 기뻐하면 교회는 점점  부흥됩니다. 수단 방법 부려 안 돼. 모두 오면 말이지 와 가지고 여기에 보자  무슨 수단을 부리고 무슨 방법을 쓰고 그 수단 방법 저 그래 가지고 암병  고칠라고 안 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 병 고쳐지면 사람이 병들어서 표적으로 난 그 병  그까짓거야 다 사람 병은 실상이요 속에 끄뜨머리 육체의 병은 네가 속의 실상  이런 병이 있다 하는 그 표시로 그런 것을 나온 것이니까 이 원체가 본체와  실체가 없으면 그까짓 게 그림자 그까짓 게 저절로 없어지지 문제가 뭐 있는가.

이래 노니까 여 와 가지고 그림자 육체의 병 고쳤다는 것 많이 있지 그걸 광고를  안하고 광고를 안해. 그겋지 그걸 간증을 해서 팔아 먹을라면 금이 몇십말 나올  것이요. 그런 것은 다 육체이기 때문에 그것보다도 사람 고쳐 살리는 게 중한  문제라 그 말이오.

우리는 참 자 주님만을 바라보나 안 바라보나 뭘 바라보나 보다 무엇이냐 하는  고때에 믿는 것이 고것이 요지입니다. 고게 있어야 돼. 고게 없으면 소용없어. 뭐  지식으로 알고 있고 믿고 아무 소용이 없어. 고것이 실상이 되는 데에는 현실을  딱 만났을 때 고기에서 실상을 만듭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성경 가운데 있는 모든 소망하는 이 모든 우리에게 허락된 이  구원을 실상으로 얻는 그런 실상을 만드는 그런 공장은 어디 있습니까? 현실에  있습니다. 현실 입니다. 요걸 잡아요. 그 외식하지 말고 껍데기로 믿지 말고  간판을 따라 다니지 말고 하나님을 바로 봐요. 하나님이 간판보다 나아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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