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구원

 

1980. 7. 5. 토새

 

본문: 디모데후서 1장 9절 - 10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가 도리를 배우는 것은 예수 믿는 이치를 배우는 것과 또 예수 믿는 그 길이  어떠한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비유컨데 여기서 어떤 그 나라를 갈려고 미국이나 그런 나라를 갈려고 자기가  목표를 하고 그 나라를 갑니다. 그 나라를 가는 데는 가다가 갈래길이 많이  있는데 그 갈래길을 닥쳐서 이 길로 가면 미국으로 가고 저 길로 가면 무슨  불란서를 가고 또 어디로 가고 어디로 가고 이렇게 갈래길이 있으면 그 갈래길  만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미국 가는 그 길을 바로 들어서 지금 비행기를 타고  간다 합시다. 그러나 가다가 이제는 미국으로도 가고 다른 나라로도 가고 이럴  수 있는 그런 갈래길을 만났습니다.

갈래길 만나기 전에는 상관이 없지마는 갈래길을 만났을 때에 자기가 길을 잘못  알았으면 엉뚱한 나라로 안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엉뚱한 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처음에 들어섰던 그 길은 발랐지만 그 다음에 갈래길 있는데  거기에를 자기가 길을 몰랐기 때문에 거기 가서는 그만 이탈돼 가지고 다른 데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는 그 길을 들어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미국을 틀림없이 갈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지 못합니다. 같이 우 타고 가지마는  그 사람이 미국을 갈는지 불란서를 갈는지 어데 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 나라로 가나 저 나라로 가느냐 하는 그 갈래길 만났을 때에  그때에 미국으로 가는 길을 그 사람이 택해서 가면 이 사람은 미국으로 가는  가보다 하지마는 갈래길이 그 다음에 없으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미국으로 가는  사람이지마는 또 그 다음에 갈래길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미국으로 가는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갈래길로  갈래길에 갈래길에나 닥쳐 가지고 그 사람이 어느 나라로 갈는지 그 두 나라 세  나라로 가는 길이 그 앞에 있으니까 어느 나라로 가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나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 이렇게  하지마는 믿는다는 그 믿음 안에는 이렇게 믿는 자도 있고 저렇게 믿는 자도  있는 이 갈래길 모양으로 여러 가지 그 믿는 이치 믿는 길이 있으니까 지금은  예수를 믿지마는 그 사람이 어느 이치로 어떤 이치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모른다 그기요.

그러기에 그 사람이 가다가 자기가 하나님에게까지 닥치는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하는 그 길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기는 가지마는 그  중간에 그 길을 잘 모르니까 그 중간에서 이 길이라 하면 그 사람이 그 길을  벗어날 수가 없고 삐뚤어진 길이라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기 있는 그 길을 알아서  하나님에게 딱 도달하기까지의 그 길을 제가 바로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어데서 탈선이 될 줄을 모른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그 한 교리는 바로 그  사람이 이제까지 걸어온 그 구원을 다 절단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과거에는 지금보다 그때 성령의 충만함을 모두 받았고 모두 그랬는데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에 성령을 물 붓듯 부어준다고 말씀을 했는데  물 붓듯 부어줌을 받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마음들이 강퍅하고 자기 욕심으로  어쩌든지 자기위주, 자기중심 사욕 이것이 어떻게 말세가 돼 갈수록 강한지  이래서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말세에 성령을 물 붓듯 부어준다는 말씀도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이고,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이 말씀도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이니까, 그 두 말이  참말이니 믿음 보겠느냐 하는 그 말씀은 성령에 그 은사를 입은 사람을 보겠느냐  하는 말씀이니까, 두 말을 다 참말로 인정한다면 그 안에 답안이 뭐이 나오느냐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주지마는 강퍅해서 받지 않는다 하는 그 답안 밖에는  해석이 나올 길이 없다 그 말이오.

이런데 그때는 그런데 지금은 뭐 교리야 이렇든지 저렇든지 뭐 이래 말한 사람도  있고 저래 말한 사람도 있고 뭐라고 말하든지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그 글을  써놓은 거 보면 이리 말한 사람들은 이리 말하고 저런 사람들은 다 그리 말한  사람 있는데 너는 어째 믿노 하면 저 믿는 거는 없어. 뭐 이렇게 저렇게  말하니까 나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것은 뭐냐 그 다음에 이 길로 가면  어찌되며 저 길로 가면 어찌되며 그 길을 가는 것을 제가 그 걸어보지 안했든지,  그러면 그 길을 제가 논리해 보지 안했던지 궁구해 보지 안했던지, 안했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가다 하는 그 말입니다.

교리나 신조나 그 뚜렷이 같다 그것으로 제정을 해 가지고 이것은 장로교 교리다  감리교 교리다 성결교 교리다 하는 그것이 뭐냐? 그 교파는 그렇게 믿는다 하는  것인데 그러면 감리교는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둘이 합해 가지고 구원을  얻는다. 그러기 때문에 감리교 신앙은 그 신앙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적 구원 그런 것이 다 흐려져 버리고  말았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러면 구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하느냐? 인제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신성이 부인이 돼 버리고 말았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그  주권성이 부인되고 말았단 말이오. 하나님의 단일성이 부인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자 그러면 구원얻을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아 천하 인간들이 다  구원을 다 받을 수 있다 만인 구원설이라 그거요.

그러면 그 택함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이 사람은 요 사람은 구원을 잘  이루겠다 못 이루겠다 그 사람을 보고 택해서 구원을 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예지 예택이다. 미리 알고 택한다 어떤 걸 알고 그 사람이 구원을 이룰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보고서 택한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말미암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난 이 성구에는 또 거리낀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 성구에도 거리끼지  아니하고 저 성구에도 거리끼지 아니하고 모든 성구에 전체가 거리끼지 안해야  그게 바로 되는 것인데, 이러니까 교파로서 그 나가는 것이 성경에 뚜렷이 이  성구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러면 그 교리가 잘못됐으면 그 성구를 바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달리 해석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미리 그 사람이 이 사람은 구원을 잘 이룰 사람이라 그러면 그  자격보고 회사서 빼 쓰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이지, 이러면 하나님 고 면에  대해서는 자 능동입니까 피동입니까? 그 능동이요 피동이요. 그러면 그 면에  대해서 하나님이 피동적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왜 그러냐?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둘이 합해서 구원 이루지 하나님 단독은 못 이룬다. 이러기 때문에 틀렸다  그거요. 그거 그리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 장로교 교리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전  구원얻을 자와 안 구원 얻을 자와 구원 못 얻을 자와 그걸 구별해 가지고  하나님이 하셨다. 모든 사람이 다 타락되어 있는데 그 모든 사람이 다 타락된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너는 내가 구원시켜주마' '너는 구원 안해준다' 전체가  꼭같이 택해 가지고 있는데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뭐이냐 하면 그 창조 이후의 된 그 후택설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거기 대해서 시비가 또 무슨 시비가 나오느냐? 그러면 자 다 같이 타락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누구는 택해주고 누구는 택해주지 안 할 수가 있겠느냐?  하후하박 하느냐? 이제 이 시비가 걸린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 시비가 걸리니  그 답변을 뭐라고 말하느냐? 그것은 타락을 제가 했기 때문에 그 타락을 제가  했으니 그 사람을 구원하든지 안하든지 그거는 하나님의 그 자유로 하시는  것이지 제가 하나님에게 이의 달 것은 뭐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말한다 그기요.

이의 달 것이야 없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면 하후하박하고 누구에게는  후하게 하고 뉘에게는 박하게 한다. 이것이 문제가 돼진다 그거요.

또 그러면 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놓고 타락하니까 타락하는 가운데 그렇게  되어지니 택한 자들도 앞으로 또 어떤 변동이 있을지 모르니까 변동된다면  하나님께서 거기 대해서 또 당신이 그 시, 그 시 따라서 수시로 그 계획을 세울  것이고 그 새로운 그 행사를 발동할 것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도 변한  하나님이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인정이 안된다. 이것이 한 가지이지마는  따져 나가지 안하기 때문에 따져 나가지 안하기 때문에 그렇지 따져 나가고 자꾸  궁구해 나가면 그것은 뒤에 나가서 혼돈되고 말고 구원이 완전히 삐뚤어지고  만단 말이지요.

악령은 이것을 그 하나님 다음에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까? 삐뚤어진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맞설만치 삐뚤어진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삐뚤어진 지혜를 가지고 끝까지 사람들을 자꾸  미혹시켜 가지고 탈선되어서 삐뚤어진 제 지식에 굴복 굴복을 시켜 가지고  거기에 소속을 하도록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디까지는 가다가 그 다음에 지나가서 새로운  갈래길을 당할 때는 거기는 모르니까 어느 길이든지 끄는 데로 갈거라 그  말이오. 또 제 마음대로 지금 갈거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끝까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그 길을 자기가 바로 알아야  되고 바로 걸어가야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뭐 요새는 그런 세상이 됐소. 아! 신조가 이렇거나 저렇거나 뭐 이래 믿고  저래 믿고 뭐 상관이 있느냐? 결국은 종착지는 같이 된다 그거야. 기본구원이야  같지마는 그 행위구원 건설구원 성화구원은 자기 행동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인데 그걸 통해서 되어지는 것인데 아무나 따나 가도 될 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인간의 행동은 아무것도 없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그것뿐이라면  하늘나라는 똑 동등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하늘나라에 구원에 차이가 이렇게  많이 있다는 그거 성구는 그건 누가 조작배기로 만들어낸 성구냐 그말이오.

그러기에 그것이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둘 다 좋다 하는 그 사람 자체가 뭣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지를 못하지요?. 한 번  말해 보십시오. 대답해 보십시오? 교역자들.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요? 누가 아는 말하는 것 같은데. 어? 예. 그 사람은 거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아무리 유명한 학자라도 거룩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실이 있다면 이기 참이다면 참이 어찌 둘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참은 둘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러면 자기는 지금 이것도 저것도 잡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연구 중에 있으면 그 사람은 지금 진실을 찾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지식 하나라도 삐뚤어졌으면 그건 진실이 아니요 고만침 삐뚤어졌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이긴지 저긴지 모르니까, 자기는 이면에 대해선  진실을 가지지 못했다. 이면에 대해서는 온전하고 완전한 그 바른 거 참된 거  곧은 고 하나인 고것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 면에는 그 면으로서는 거기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무엇이 없단 말이오. 그 면에는 진실이 없단 말이오. 또  거룩이 없단 말입니다. 거룩이 없다 말이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진 제 일곱 교회 중에 제일 빌라델비아  교회가 제일 신앙을 바로 가졌었는데 거기 대해선 거룩하고 진실하사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했어. 수많은 것이 있지마는 요것보다 요게 옳고 요것보다 요게  옳고 해서 수많은 것을 구별해 가지고 옳은 것 하나에 딱 도달하신 이기  주님이시라 말이오. 고 하나인 참인 고걸 잡으신 이가 주님이시라. 그걸  가리켜서 나는 거룩하고 진실하다.

주님 당신을 소개한 것인데 그러기에 이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아무나따나  괜찮다는 그 사람은 고거 하나로서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요것은 이긴지 저건지 나는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지금 내게 궁금 중에  궁구 중에 있고 고민 중에 있다.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하면 거기까지는  따라가서 거기서 섰어야 돼.

자기도 거기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지금 이게야 이 길인가 저 길인가? 그것을 갈  기 아니라. 두 갈래길이라면 어느 길인지 확실히 모르면 확실히 알기까지 거기  섰어야 되지, 뭐! 좋소. 이기나 저기나 같으니까 이 길로 가든지 저 길로 가든지  마음대로 가십시오. 그 사람이 미혹자라 말이오. 거기는 갈 수 없어 더 갈 수  없어. 자기가 똑똑히 모르는 길을 어떻게 가겠소? 가기를. 거기서 중지해 놓고  봐야 되지.

그러기에 이거 교리사를 공부하는 그런 것도 하나 알면 열도 백도 알 수가 있어.

그러면 이 교파는 그 다른 교리가 뭐이며 저 교파는 다른 교리가 뮈인고 교리와  교리를 구별해 가지고 이것도 좋다 좋아. 이거는 이렇기 때문에 이거는  잘못됐다. 이 잘못됐으니 요거 하나 잘못 됐으니까 앞으로 이 교파는 어떻게  되는고 보자, 그러면 이 교리가 잘못된 그 이후에 그 교파가 어떻게 뻐드러져  나가는 나간 것을 보면 아 요게 틀리니까 이렇게 많은 탈선이 되어지고 이것이  틀려지는구나. 이것을 자기가 알지 못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고걸 공부하는 것이  구경하는 것이라.

다른 사람이 남을 보아 깨친다고 다른 사람이 탈선된 것을 보아서 자기 탈선을  방지하고 다른 사람이 그 길을 잘못 갈까 싶어서 마구 벌벌 떨면서 그것이  생명과 같은 것으로 알고 이렇게 바른 길을 갈려고 애를 써서 그보다 더 생명을  기울려서 하고 그게 틀렸으니까, 사람 죽이는 것을 사형을 다 시키고 이렇게  하는 그것을 다해서 나는 이렇게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바로 구별하지 아니하고  이렇게까지 생명을 기울려 생사에 이 목숨 보다 큰 문제로 중요시 중요시하지를  아니하니까 내가 여기 대해서 위험성을 가졌다. 탈선되기 쉽겠다.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자기 아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기에 제일 우리 사람에게는 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행동입니까? 몸입니까?  마음입니까? 영입니까? 무엇 제일 중요하지요? 우리 사람이란데 대해서는 그  주격체는 주인을 뭐이 주인이지요. 뭐이 주인입니까? 영이 주인이지요. 영이  주인이면 사람에 대해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부분 영에 대해서 뭐  영이든 영을 마음이라 하든지 생각이라 하든지 이성이라 하든지 영은 없고  마음을 영이라 하든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제일 중요한 이면을, 자!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고 영이라고도 말했고 영혼이라고도 말했고 마음이라고도  말했고 몸이라고도 말하고 이랬으니까 이기 뭐인가? 이기 제일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 사람이든지 그 교파든지 그 학자든지 그 뭐이라  말이오. 제일 중요한 것을 중요한 문제라고 연구 과제라고 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지당한 일입니다. 다 알 수 없소.

이러나 거기 대해서는 뭐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 거기 대해서 무시하고  인간들이 그 영 외에 마음에 작용만 중요시하고 그것보다도 마음으로도  만물으로도 접촉한 껍데기로 나타난 그 행동만 중요시한다면 무엇이 됩니까?  완전히 외식자 아닙니까? 행동보다는 마음의 작용이 어쩌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음행은  그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음행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행동에 나타났습니까?  또 주님이 계시록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 해놓고 사람의  마음과 뜻을 보시는 자라. 그걸 행동으로 보지 안 했습니까? 사무엘도 말하기를  나는 외모를 보지 아니하고 뭐 본다 했습니까? 사람의 중심을 본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그게 더 중요하지 안하요? 마음보다 영이 중요하다는 것은 영이  주격이라는 것은 다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영에 대해서 이 문제를 교리적으로 즉 영에 대한 그 정의를 세우지  못하고 되나 안되나 다른 사람이 이제까지 칼빈이 말한 고대로 그 이상 나가면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면, 그런 사람들이 정죄, 억억만이 정죄해도 요만치도  두려울 거 없습니다. 요만치도 매우 적은 것입니다. 성경에 정죄해야 문제지  여기 배우는 사람 가운데도 여러분들이 지금 속는 일이 있습니다. 나는 어학자가  아니요. 나는 사학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역사로는 내가 틀린 말을 할 거요. 나는 그 동서독인데 나는  남북독으로 그렇게 내가 말했소. 남북으로 갈라졌는지 갈라졌다 말만 들었지  남북으로 갈라졌는지 동서로 갈라졌는지 그것이 도가 아니요. 그것 틀렸다고  아이구 동서로 갈린걸 남북으로 갈렸다 하는 거 보니까 저걸 모르니 저 사람이  무슨 뭘 알겠느냐? 내가 그걸 가르치는 것 아니.요 나는 예수 믿는 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길을 가르치고 있소.

그런데 고거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 가운데 내가 증거하는 도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도인이 되어 있는 도인이 되어 있어. 요 도를 사랑하고 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몰랐는데 요걸 가르치니 감사하다고 요 길을 아는 사람 요 길을  아는 요 도를 가르치는 도를, 요 교훈을 자기 것이 되고 애끼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 저 증거하는 도리에 권위성 사람의 권위성 저것이 만일 무시되면 이  도 증거하는 이 도가 이 참된 길의 도가 이것이 가서 다른 사람에게 잘못하면  무시당하기 쉬운 그 사람이 도를 받지 못할 터이니까 요것을 어쨌든지 네가 말을  해서 고쳐야 되겠다. 요걸 말하지 아니하면 또 다른데 다 말하면 아이구  동독인지 서독인지 모르고 남독이니 북독이니 하는 거 보니까 그렇게 무식하니  무슨 도를 받겠느냐?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멸망을 받으니 그거는 제가 고 어두워서 멸망을  받았지마는 가르치는 사람이 더 책임있지 마는 멸망받은 제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에 무슨 어학 역사 배우러 왔습니까? 이러니까, 아! 그걸 모르니  가르치는 자는 그걸 알아서 바로 가르치면 그 사람이 미혹 안 받을 터인데 바로  가르치지 못하니까 미혹을 받으니 손해요,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에게 백  프로 알리는 데에 그게 손해 갔으니까 손해요. 또 듣는 사람이 그걸 가지고 고만  고것을 가지고 도를 전적 무시해 버리니까 저는 멸망을 받았소.

이러니까 그 도가 제 도가 됐으면 이것은 동독하고 서독하고 이것은 그런게  아니고 참 북독하고 남독하고 아니고 거기는 동서로 갈라져서 동독 서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걸 달리 받는다 그말이오. 받는데 고걸 딱  두고서 어떤데 써먹느냐? 고거 지식자들이 그저 반대해 가지고 그런 기라. 고래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위주로 하고 그 지식을 그 도에 속하라 하는데 저는  지식을 도보다 위에 높일라 하는 기거든.

이러니까 고걸 가지고 있다가 봐라 동독 서독을 남독 북독으로 말하지 않더냐  그러니까 이것도 틀리지 안했느냐? 목사님 말이라고 다 그렇게 인정할 수가  있겠느냐 고 말은 좋지마는 고걸 거기다가 써 가지고 도를 그 고 도를 좀 권위를  떨어뜨리고 무시하도록 그렇게 만들고 제 지식을 필요하고 높인다는 고걸 높이기  위해서 고와 같이 하는 자니 고 맘이 복이 있는지 또 자기가 고것을 가지고  있으면 손해는 누가? 제가 손해 봅니다.

하나님의 참된 도를 들을 때도 고것이 들어서 마귀란 놈이 고거 가지고 봐라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그것 뭐 뱃장이든지 황충이든지 메뚜기든지 미꾸라지든지  송어든지 그 무저갱에서 나와서 했으면 그것이 그 도에 큰 차는 없다 그거야.

사람의 욕심에서 다만 무저갱이 뭐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내가 그런 것을 명사를 잘못하면 그것은 어떤 때는 모세를  엘리야라 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 베드로를 말할 때 가룟 유다로 말할 것이라 그  말이오. 그것은 말이 잘못 나와 그런 것이니까 그게 고거 가지고 이게 틀린 거  보니까 도가 다 틀렸다 그거는 말이 틀릴 수가 있다 말이오.

있으니까 아 이거는 아마 베드로를 지금 유다라 하는 것이로구나. 다른 도를  들어 보면 알기라 그기요. 그래 소화해야 제가 구원이 돼지고 복이 있고 유익이  돼지지. 봐라. 요거 봐라. 이게 베드로가 언제 이랬노. 가룟 유다 할 건데, 이거  베드로가 이랬다고 하지 안했느냐? 이러니까 도가 다 틀렸다 고걸 가지고 고때  써 먹어서 요 도를 훼방하기 위해서 쓴 것이니까 고게 틀렸다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고 정신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망합니다. 나는 그 역사 공부를 안하요.

안하기 때문에 유니온 신학교고 프린스 신학교하는 그것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게 말합디다. 그말을 해서 들었다 말이오. 들어서 난 그런가 그거는 뭐 큰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랬는데 자기네들은 벌써 내가 그런 말을 여러해  전부터 그런 말을 썼으니까 고걸 나한테 말해주지 아니하고 어제사 또 말이  나오다 보니까 떡 그 말 했다 말이오. 고것이 그자는 자기가 나한테 수많은 것을  배웠는데 고거 하나 나한테 가르칠 수 없던가 그말이오. 그게 악한 자로 본다  말이오. 악한 자로 그 지식으로 망해.

내가 다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도만 말하기 때문에 단어도 틀릴 수가 있고  또 역사도 틀릴 수가 있고 또 무슨 명사도 틀릴 수가 있습니다. 그나 건 사소한  것이라. 그게 틀려도 내가 가르친 도를 도가 틀렸나 안 틀렸나 그것을 도가  틀렸으면 문제지마는 그런 표시하는 무슨 명사가 발랐으면 좋지마는 인간은  완전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틀림으로서 그 사람을 자중하게 만들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완전자처럼 나타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기라. 나는 완전자가  아닌 줄 알아.

내가 무슨 교리나 신조도 이것을 틀리게 말한 기 있으면 그걸 나를 자기 선배로  생각하고 내가 증거하는 도를 제 도가 됐다고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아 요거  하나가 틀렸으니까 요것을 요기 지금 모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래라도 해 가지고 이것이 틀린 것이 밖에 나가지 안하도록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손해 보지 안하도록 그렇게 하라는 말을 여러 수십 번  말했는데 안해도 그럴 긴데,  나는 김현봉 목사님한테 가서 그때 몇 번 참석할 때 그분이 증거하는 그것이  바로 증거하는 건 바로 증거하기 때문에 그 도를 내 도로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  도를 애껴서 한번 이 피가 죄다 이 피 자체가 죄다 이 고기덩어리 이 살덩어리  이 자체가 죄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만 못 견뎌서 아무도 없는데 그 목사님  혼자 계시는데 가 가지고 목사님 지금 이 피란 이건 순전히 물질인데 이것을  다스리는 마음이 그렇고 또 그다음에 악령이 들어서 이렇게 미혹을 해서 의로운  병기니 불의에 병기니 이렇게 되지는 이거는 한 도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용하는데 따라서 의에 이용이 되면 의에 병기라 했고 죄에 드려서 이용되면  죄에 병기라고 이렇게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이랬는데 이 세계에서 벌써 이 물질은 죄악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돼 가지고  교리가 서 가지고 있데 이리되면 이단이 물질이 악이라 이라 가지고 물질이 다  악한 것이라 물질계 악설이라느니 벌써 이단으로 정죄돼 교리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기 나가면 도 전하는 것이 혹 여기 제재를 받을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좀 참고로 해서 연구해 주십시오. 내가 이래 말했다 말이오.

이래 말하니까 그분은 그 다음에 그것을 고맙다는 표시로 그것을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와 있는데 배우려면 와서 배우기나 하지 오히려  가르치려고 한다고 그렇게 오해를 합디다. 난 그런 사람 아니요. 그래 가지고  고것이 발단이 돼 가지고 나를 교만한 사람이라 낙인을 찍어 가지고 그 시간에  바로 설교할 때에 그 말을 강단에서 말했습니다. 난 그런 사람 아니요. 그 진작  가르쳐 주지 안했다는 걸 지금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목사님이 지금 그 말을 하는데 내가 그래서 그러면 내가 여러 번  말했는데 왜 진작 나한테 말해 주지 말해 주지 안했느냐? 내가 거 책망을  했습니다. 나는 이대로 믿고 가면 그만이오. 또 죽으면 그만이오 이런데  여러분들에게 이것이 바로 들리지 아니하고 바로 알아지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의  구원에 힘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 도가 여기서 가르친 이 도가 자기 도가 됐다고 하면 이 도가 정죄를  안 받아야 될 것이고 대외에 나가서 할 때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안해야 될 것이고 정죄받지 안해야 되지 않겠소. 이 도가 제도가 된다면  애낄 것이라 그말이오. 그거야 또 역사인데 그거 그뭐 그 신학이 앞에 섰다 뒤에  섰다 그까짓 게 앞에 섰건 뒤에 섰건 무슨 큰 차이가 있습니까 있기를 그거 도가  아니라 그말이오.

어떤 사람 내가 공과를 가르치니까 요새 자꾸 바꿔 싸니까 무슨 단어인지 난  모르겠소 이 말은 무슨 말이고 모르니까 몰라 이건 모르겠다 공과를 가르치면서  이거 무슨 말인지 무슨 말인지 몰라 요새 나 지금 한국말 모르는 말이 뭐 몇 십  개 되는지 모릅니다. 아 자꾸 변해 싸니까 내가 따라 안 나가니 모르겠다  그거야. 저거 맘대로 자꾸 그 알고 표시되면 될 수 있는 대로 과거 있는 것을  변동 안하는 것이 복잡 안 주는 것입니다. 단어도 필요 없는 단어 새 단어를  낳을 필요가 없어. 그 단어가 아니면 안될 걸 쓰요.

구원은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이걸 구별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절단 나 있기  때문에 안 할 수 없어. 그런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자 기본구원에 대한 그걸  모른 사람은 지금 만 명을 모아 놓고도 너 지금 구원을 얻었느냐? 지금 다 구원  얻어 놓은 구원 얻으려고 노력을 하는 중에 있다 하지 구원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 사람 단어 그거 틀린 거 보고 아이구 무식하다. 아무리 유식하다 할지라도  그걸 따라 안 나가면 어찌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소. 그거 가지고 그 면에  대해서 무식하다 하는 것은 좋아 이분은 자꾸 말이 지금 새 말이 나오는 새 말이  나온 새 말에 대해 무식하다. 고건 바른 말이오.

고것 가지고 도를 증거하는 대도 도 증거도 무식이라 이러니까 도를 제가 못  받아서 그것 때문에 탈선 나가 가지고 이 도를 받지 못하고 지금도 불쌍한  사람돼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이 도를 받지 못해 그 만침 제가 모르니까  구원을 못 이룬다 그 말이오. 모르는 것을 어찌 행하며 모르는 방언을 어찌하며  모르는 것을 어찌 정죄하며 모르는 것을 어찌 물리치겠습니까? 모르는데 대해  소망을 어찌 가지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 교리와 신조라는 것은 그것은 뭐  그걸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면 거기까지 갈 때는 필요가 없지만 그 다음에는  자 어떻게 믿을 끼냐 그 말이오.

그러면 네가 예수를 믿으면 지금 네 구원이 그 언제부터 시작했느냐? 난 예수  믿는 날부터 시작했다 그러되게 말해 믿는 날부터 시작이 됐으면 그것이 뭐냐?  자기 주관으로 된 것이고 자기 주관으로 된 것이고 자기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된 믿는 행위 이것이 구원에 근거라 그말이오. 그런 거 아니겠소. 구원에  근거라면 그로 논리 따져 나가면 구원에 근거니까 네가 행위가 구원에 근거니까,  네가 이런 행위는 어떻게 하며 이런 행위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 사람은  정죄받아 가지고 구원이라 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논리를 안해 그렇지. 그런 미혹이 없느냐? 위급할 때 그 미혹이 있다 그말이오.

나중에 목숨 내놓고 예수 믿는 예수 믿는 것을 목숨을 내놓고 믿느냐 안 믿느냐  할 때에 이리 돼지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목숨 내  놓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말이오. 행동은 이래 놓고도 내 행동하면 구원되는데  이래 놓고도 또 뒤에 행동 이렇게 하면 구원이 돼지는 거 아니냐? 이리 된다  그기요.

또 진실한 사람은 자 이러니까 내가 다 고쳤으니까 구원이 되겠다 이랬지마는  난중에 어떤 집회 때 가니까 자 네가 여기 대해서는 어떻게 했느냐? 거기  대해서는 잘못했다 그말이오. 아이구 내가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새로 모르는  죄가 모르는 죄가 들라서 가지고 지금 또 회개해야 되겠구나 이러니까 이 집회  가면 몰랐던 죄가 또 나오고 또 나오니까 내가 모르는 죄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니 내 구원이라 하는 것은 확신이 없다. 진실한 사람이면 그럴 것이고  거기까지 궁구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가다 만 사람은 그대로 있을 것이고,  이러니까 우리는 따지고 따져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 그 노정을 다 알고, 나와  하나님과 결합되는 여기까지 들어붙는 데까지 고 길을 알지 아니하면 못 갑니다.

영인지, 마음인지 모르는 그 사람이 영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어떻게 방어할 것이며 어떻게 변증할 것이며 어떻게 미혹을 그가 미혹인지  미혹이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것입니까?  참 문제입니다. 내 밑에 지금 배웠지마는 하나도 지금 내가 아는 것을 받아서  이것을 뭐 내가 이 계시론에 대해서 계시론에 대해서 다 말했고, 신론에 대해서  다 말했고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말했고, 인론에 대해서 말했고, 죄악론에 대해  부활론에, 영생론에, 천국론에, 말세론에, 악령론에, 그 인간의 요소론에 대해서  말 안한 게 없어. 다 말했어. 이걸 엮어서 말할 자가 없다 그말이오.

내 후배는 지금 없습니다. 내 후배는 없소. 지금 똑똑히 말해서. 후배 될만침  광범위하게 신령하게 그 새꼬리만 뭐이 요 조그만한 토끼 꼬리 만한 요 지식  이것이 큰 줄 알고 이것을 잡고 우상같이 숭배해 가지고 이걸 팔아먹으라고 이걸  높여서 이기 크다고 자꾸 자랑하려고 이러다 보니까 딴 거 붙여 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저 혼자 좋지 교인들이 들을라 해야지 그 부흥이 안된다 그말이오.

부흥이 안되면 뭐 부흥 안되는 기야 이단은 더 부흥이 많이 되고 뭐 문선명이  제일 부흥이 많이 된다. 문선명이 예수 바로 믿는 그 교리로 부흥이 됩니까?  세상으로 끌여 들여서 부흥이 돼지지. 그 사람들이 믿는 것이 우리가 배운대로에  이 교리와 신조대로 그 정조 받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거 가서 대서  위로 받아야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갑니다.

우리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가 받을 사람들입니다. 심판받는 거 세  가지 있는데 하나는 그 사람이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 그 심판 받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 자체가 어떤 지식을  가진 어떤 자이냐 그거 심판받습니다.

이러기에 뭐 인간이 틀렸다고 한다고 섭섭할 게 아니라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건 좋은 소리요. 틀렸다고 하는 그것은 틀렸으면 어서 고치고 아  틀린 것을 모르고 지금 나가는데 틀렸다는 거 안 틀려도 야! 틀렸다 그 말만해도  좋다 그 말이오. 왜 안 틀린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기가 저와 같이 걸어갈  걸어가는데 저 사람 저 넘어지겠는데 안심하고 철벅철벅 걸어가는데 저  넘어지겠는데 하니까 긴장을 해 아이구! 넘어 질라 조심합니다. 내게 경성을  주고서 경고를 주고 해 주는데 도와 주는데 무엇 때문에 나쁘겠소 나쁘기를.

그러기에 이단이라고 하는 그것이 욕하는 것이나 자기에게는 손해가 없어.

손해가 없는데 다만 다른 이를 위해서 그것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 자기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인데 그 뭐 나쁜 소리하면 어서 고칠 것 그 나쁜 게  없으면 나쁠까 조심해서 예방하면 되는 것이고 또 나쁘다고 하는데 나쁘지  않는데 안해도 억울함을 가만히 듣고 참고 있으면은 또 복되고 모든 것이  유익뿐이지 해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칭찬은 그것이 자기에게는 해뿐이지 유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받을 것이 있어서  칭찬 받아도 해 없어서 받아도 해 놀림으로 받아도 해, 해뿐이지 유익이 하나도  없어. 이런데 이 교리 신조를 이것을 자기가 똑똑히 알아서 이걸 사람들이  진실히 있으면 그런가 저런가 이 궁구해서 알기 전에는 틀리게 알아도 틀리게  알아도 요게 옳다 요것이다. 하나로 단정지우고 마는 그 사람은 진실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 면을 몰랐지. 그 사람은 진실성은 있는 사람이요.

어떻게 궁구해서 궁국에 도달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중간에서 중단 세우고  합니까? 이래 가지고 저거 하나 아는 고것 틀려 가지고 요것 틀렸으니가 다  틀렸다고 그러면 손해는 제가 받소.

그러기에 우리가 말하는데에 도가 되는 말이 있고, 그것을 도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에 말이 있고, 도와 도의 방편에 말 방편과 다릅니다. 도를 표시하는데 이  사람이 표시를 잘못하고 또 농부 농사짓는 것도 표시하고 집 짓는 거로 표시하고  고기 잡는 것도 표시하고 정치하는 거로 표시하고 별 것으로 표시하지 않습니까?  표시하는 것은 표시하는 그 방편이 잘못되면 그 도가 전해지는 것이 그것이  완전히 전해지지 못하고 제재를 받지요. 그러나 그건 도가 틀린 것은 아니라  그거요.

이거 너무 허망해서 우리 구원이 그러면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영원한 때 전  우리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그 뜻으로 당신 뜻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뭐이지요. 완전한 뜻이지 불변의 뜻이지 영원한  뜻이지 이러기 때문에 우리 구원에 하나님의 신성이 필요하다 그거요. 우리의  구원에 지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신성이 필요해.

이러니까 자기가 믿는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하나님의 신성에 접촉이 돼지고  저축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신성에 거리낌이 되어지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데에 틀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잘못된 그것은 모든 도와  마지막에는 전체가 잘못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뻐하신 뜻대로라 그러면 무슨 뜻인데 여 지식한 유식한 사람 그렇소 저거 단어  한마디 말 한마디 뭐 고것 가지고 나는 그것을 모르고 했기 때문에 내가 도 전한  것이 백프로 수입이 없습니다. 나는 그렇지만 자기는 고거 하나 숨겨 가지고  고래 했다가 마지막에 뭐 될거야? 또 그러면 아! 그 뭐 그거 하나 틀린 게 큰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걸 뭐 말할 기  없다. 저도 그리하는데 다른 사람은 또 어쩔 것인고 말할 기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으시니 얼마 살겠느냐? 그 살아 있는 동안에 배울 것만 배우고  포기야 버릴 것은 버리고 가려서 배우지 또 이제까지 어릴 때 배워서 자랐는데  뭐 지금 이리 지리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말하기를 원하는데 말해주지 안하는 그  자는 알고 고런 나쁜 맘 가지고 말해 주지 아니하면 그자는 내가 가르친 그것도  저희에게는 다 헛일이 되기를 내가 원합니다. 왜? 왜? 요것을 배워 가지고 고걸  가지고 요걸 뒤에 달리 요기를 해 가지고 지금 자기를 기를 것이기 때문에  그자에게 없는 게 낫지. 도인이 되면 안 그래.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내가 무슨 표준어를 산지 아니하고 사투리 말을 쓸 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사투리 말을 쓰든지 마든지 도만 배울 터이니까 그런 말이나  사투리 말이나 표준말이나 도에는 그 뭐 상관이 없다. 이렇게 자기가 손해를 안  보거들랑 있고 또, 또 다른 사람이 손해 안 볼 것이라면 있고 손해 볼 것이라면  아이 요 말은 혹 표준어로 아니하고 사투리말로 쓰니까 이러니까 요런 것은 요  좀 표준어가 요러고 요런게 나한테 가르쳐 주면 내가 겸손히 내가 감사히 내가  받을 것이라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 줘요.

고라고 여기서 뭐 고때 나 죽고 나면 그럴 기라 이바 이런 말봐. 이런 말이 맞나  저런 말이 맞나 여 녹음돼 있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그거 가지고 뒤에 이 도를  밟고 제가 올라설라고 하면 그 사람은 권능은 절대 못 받습니다. 영감을 못  받습니다. 제 말 가지고 하고 지식 가지고 하지 성신의 권능은 동행 안해.

이러기 때문에 지식 있는 사람이 위험성이 많다 그 말이오. 내가 이거 나 때문에  하고 있소. 그 지식 있는 사람들 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이 그러면 우리 구원을 영원한 때 전부터면 우리 구원과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우리 구원과 예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목적이 정해졌습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에 정해진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해졌소.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하나님이 그리스도십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런 이름으로  나타냈는데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직책을 나타내서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 다음으로 존재케 된 그 순위입니다. 존재 순위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이 됐다니 그러면 그 목적이 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뭐인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타내기를 기름부음이라고 나타냈는데 기름부음은 신정국가에서는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붓는 것으로서 그 행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됐다. 제사장 안에서 구원됐다 선지자 안에서  구원됐다 왕 안에서 구원됐다. 그러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 그리스도 적이라.

그리스도 대라 그리스도 대로라 제사장 대로라 선지자 대로라 왕대로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 선지자 왕이신 그리스도 이 하나님이 그분이 사람되어  오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은 그리스도십니다. 또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면으로 또 나타냈습니다. 이랬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완성시킬라고 하는 것은  뭐이냐 우리를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왕으로 만드는 이 완성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처럼 온전케 그러면 제사장이 뭐인데 제사장이 뭐입니까? 제사장은 신정 국가에서 약간 나타났습니다. 나타났는데 그  제사장은 뭐냐 제사장은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피조물과 그 사이를 잘 조화한 잘  조화시킨 이것이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요것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는 걸 완전히 흠없이 잘 향해지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향할 때 완전히  향해지도록 하나님과 우리와에 관계를 완전케 한 이것이 제사장직입니다.

선지직은 하나님의 그 지식이 이것이 피조물에게 전달돼서 하나님의 지식이  피조물의 지식이 되어지게 하는 이것이 선지자직이요.

왕의 직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이 피조물에게 가  가지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피조물의 움직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이것이 왕직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이렇게  하려고 영원 전 당신의 의지 안에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런데 이것이 자꾸  따져 들어가는데 이것을 따지지 아니하고 궁극적으로 끝까지 나가지 아니하고  중간에 가다가 그거는 모르겠다 신학자라도 따져 들어가면 모르기 때문에 그  답은 말해 놓지 안했어. 지금 영 문제, 영 문제 여기 대해서 우리가 자꾸  궁구해서 이제 영이 나서야 이 세대를 감당하지 영이 나서지 아니하고 이 세대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순전히 유물 세상이기 때문에 마음  고깃덩어리뿐입니다. 마음은 기독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심리학에서 그들이 요런  말대로 수천 수만의 마음이 있는 것을 다 종합해서 이런 마음들이 있다. 그들이  더 많이 알고 있소. 그들은 영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뿐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요. 영은 그 사람들이  모릅니다. 마음의 구원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고로  지금은 영 또 이 기본구원이 중요합니다.

구원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나. 그러기에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했어. 예수 그때 있었습니까? 그때 없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그  말은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서부터 거기서부터 시발돼 가지고 이것이 지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나타났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기본구원이란 이것을 구별해 가지고 기본구원은 영이 다 받은 것인데  영이 받은 기본구원을 지금 이 육이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노력입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은 영이 받아 가지고 있으니까 제 주격이 가지고 있소 가지고  있는데 그 주격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몸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을 마음도 몸도 가져서 이 구원대로 살고 구원대로 쓰고 구원에 권능에 쓰고  구원에 행복을 누리고 하도록 하려고 마음과 고깃덩어리에게 자꾸 이렇게  말하는데 마음과 고깃덩어리가 안 들어.

이러니까 이것은 믿으면 돼. 받으면 돼.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나면 돼 버렸소.

나사로야 부를 때 부를 때 나오니까 됐소. 제가 나왔소. 그거는 부르는 권능으로  제가 나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기본구원을 얻었는데 어떤 자는 이 기본구원이 자기에게 말할 때에  들을 때에 그때 행함은 현실을 들을 때에 살아난다 했소 들을 때에 들을 때에 그  마음이 나는 이러니까 기본구원을 얻은 자다 마음이 벌써 확고하게 가져서 어떤  현실을 당해도 그대로 살 수 있는 마음이 된 자는 벌써 다 살았다 그말입니다.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 시험하는 것은 현실을 당할 때 그대로 사느냐? 기본구원  얻은 마음으로 사느냐 기본구원을 가진 마음이냐 기본구원을 가지지 못한  마음이냐? 기본구원을 지식만 가지고 아직까지 기본구원을 제가 소유하지  못했나. 기본구원에 마음이냐 기본구원에 그 몸이냐 그 기본구원에 행동이냐  하는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구원이면 구원이지 뭘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성경이 말했는데  왜 제가 주제넘게 말하고 있어. 건설구원을 말했는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라  변화를 받아라. 또 반석 위에 지어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어라. 이거 다  비유지마는 건설을 말했다 그 말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것을 말했는데  왜 뭘 못하게 합니까? 이 기본구원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이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우리나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기본구원은 우리와 우리 구원과 꼭 같습니다.

다만 행위 구원, 건설 구원, 성화 구원, 그 다 같은 말인데 요 면으로 말하면  행위 구원이라 말하고, 요 면으로 말하면 건설 구원이라 말하고, 요 면으로  말하면 성화 구원이라, 요렇게 하는 것이 내나 한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 심신이 자기가 받아 있기 때문에 영에게 와 있기 때문에 이 심신이 그 구원을  받아 가졌는데 요것이 그 구원으로 행사하면 살고 행사 안하면 죽느니라.

여러분들이 내가 가르친데 대해서 얼마든지 논리해서 단어 틀린 것 말해 주는  것을 내가 고맙게 여기고 그보다도 교리가 틀린 것을 말해 주는 그것은 내가  굉장히 귀중히 여기고 내가 그분에게 그 면에 대해서 선생님으로 모시고 내가  하나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정죄받을 것을 요기서 정죄받지 아니하도록  수정하면 얼마나 그 은사입니까? 지금 고치는 세상인데 뭐라고 꺼꾸로 옳게  됐든지 인간에게 인정만 받으면 된다는 어리석고 그거는 정신 빠진 죽은 자  행위입니다.

이러니까 배운데 대해서 틀린 것은 말해 돌라 그 말이오. 이래서 내가     목사님하고 그 사모님하고 두 분에게 내가 노우트를 줬어. 여기서 이래  듣다가 처음으로 들으면 틀린 거  잘 표가 날게 있으니까 틀린 기 있거들랑  기록해 도라. 이랬는데 기록한 책을 지금까지 안 줘요. 거 뭐 별게 없다고  이러면서 별게 없다고 하는데 그런 거 말 한마디도 자기 아는 대로 주면 자기  살고 나도 유익되고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래요. 그래서 지금 묻어 두는 게 아닙니다. 얼마든지 앞으로  논리가 됩니다. 논리가 안되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논리가 됩니다. 너는 요면에  대해서 잘못 알았다. 요 면에 대해서 잘못했다. 요 면에 대해서 잘못 증거했다.

그것을 지금은 미결이지만 따져 들어가 보면 전체가 거기 근거가 됩니다.

요새는 세계서 뭐 정상회담이라. 정상회담 그 결정을 말해 제일 위에 최고의  위에 그러면 그 밑에서는 다 따라 가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그 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요 교리보다 그 위에 것 요 교리보다 그 위에 교리가 있고 요 교리보다  그 위에 교리가 있고 요 교리보다 그 위에 교리가 있고 그 위에 위에서 하나님께  딱 들어붙기까지에 우리의 가는 길이 있으니 그 교리라 그 말이오. 그 예수 믿는  이치라 말이오. 예수교에 이치라 그 말이오.

성경인데 성경을 보고 깨달아야 인간이 가지지요. 주관으로 가져야 되지  성경으로 암만 있어 봤자 소용 있습니까? 이러니까 성경을 자기 주관으로 깨닫는  것이 교리라 그 말이오. 그 교리가 위에 있고 신조는 이제 교리가 되고 난  다음에 요렇게 믿는다 하는 그게 신조입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요기까지는 바로 알았다 할지라도 고 다음에는 지금 갈래길  수많은 갈래길이 있으니 그 다음에는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 다음에는 모르면  그 다음에 관한 행동은 있을 수가 없다 그 말이오. 다 같이 사람이 한 행동을  해도 껍데기 그 고깃덩어리 행동만 있을 수 있고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마음과  고깃덩어리 행동이 같이 있을 수 있고 행동을 하되 그 사람이 마음으로 행동을  하되 이면까지 맞춰서 저 면까지 맞춰서 자기가 아는 교리대로는 그 교리에 쭉  하나님께 까지 그 교리를 맞춰 가지고 이제 끄트머리 그 행동을 표시했기 때문에  다 같은 행동이지마는 그 행동에 깊이와 높이와 길이라는 것은 그거는 한없이  차이가 있다 그거요. 그것이 행위구원의 차입니다. 햇빛과 그 모래알의 그 차와  같은 영원한 차가 그 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쩌든지 배워서 알아야 되 세밀히 알아야 되 궁극적으로 끝까지  알아야 되 끝까지 아는 거기까지 나가지 그 다음에는 모르는 데는 제가 거기에는  마음을 쓸 리가 없지요. 행동은 해도 거기까지는 맞춰 하지 안하지요. 거기  생각하고 하진 안하지요. 거기까지 보면 하지 안하지요. 그러면 거기 오면 저는  방어 못하지요. 자기 행동은 거기 대해서 방어 안됐지요.

이렇게 중간에서 말기 때문에 중생된 영이 죄를 짓나 안 짓나 하는 이것도 지금  논리가 돼 가지고 교리에서 교계에서 신학자들이 해결을 짓지 아니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법을 해야 된다 그 말이오. 이 세상 법문을 공부한 사람은 세상  법에서도 따져 들어갑니다. 따져 들어가니까 이거면 이거고 이기면 이기고  저러면 저러니 법을 가지고 법을 공부한 사람은 그거 대번에 알 수 있다.

불신자라도 어떻게 사죄가 없이 칭의가 있을 수 있으며 칭의가 없이 완전무결의  하나님과 결합이 생명인데 결합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오. 불의하고  하나님과 결합이 되겠는가 말이오.

그러면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아 하나님과 결합됨으로서 살아진 그것이,  그것이 다시 죄를 진다면 죗값은 죽는 것이니 죽지 그러면 영생하는 것 아니지  죽었다가 살았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그리 되는 것이지 영은 두 번 살아나지  아니하고 단번에 살아나 영생합니다. 그것은 알면서 성경에 있으니까 선배들이  말해 놓은 그거 있는데 이것을 다 종합해 가지고 연결시켜 보면 알 터인데 이걸  체계적으로 연결시키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거는 그것 때문에 따로 따로 이거는  이것대로 따로 돼 가지고 둘을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중생된 영이 죄를  짓는다 안 짓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중생은 영원 중생이요. 단번 중생인 것을 장로교에서는 벌써 교리적으로  재정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 중생된 그것이 와 그렇게 지금 범죄하느냐  안하느냐 그거 어데서 나왔느냐 그거 원인이 어데 나왔느냐? 영이 마음이요  마음이 영이러기 때문에 중생된 제 마음을 보니까 하루 열 두 번도 더 변하니  범죄 안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하나 틀리면 다 틀리 버려요. 이게 이단이 뭐 많이 틀린 기 있습니까? 하나  틀리면 다 틀립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이 죄를 짓나 안 짓나 그 문제가 해결  안됐으면 그 사람의 신앙이나 논리나 모든 수준은 어데 수준에 있다는 것을  판정됩니다. 그 위에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있어. 지금 그러기에 그 사람은  앞으로 그 위에 있는 미혹은 지금 알지도 못하고 방어도 못하고 그 위에는  방어하고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그 만치 그 신앙이 저급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661 기본명령, 건설명령/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22절/ 850122화새 선지자 2015.10.27
660 기본명령, 건설명령/ 신명기 28장 1절/ 850125금야 선지자 2015.10.27
659 기본구원의 젖줄기/ 에베소서 1장 9절-12절/ 830626주전 선지자 2015.10.27
658 기본구원을 입은 자로 살 것/ 요한복음 1장 1절-18절/ 831118목새 선지자 2015.10.27
657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구별/ 마태복음 13장 1절-58절/ 870609화새 선지자 2015.10.27
656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고린도전서 3장 10절-15절/ 831002주전 선지자 2015.10.27
655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로마서 6장 4절-14절/ 820327토새 선지자 2015.10.27
654 기본구원, 건설구원/ 마태복음 10장 17절-20절/ 820628월새 선지자 2015.10.26
653 기본구원 일곱 가지/ 디모데후서 1장 9절-10절/ 800704금야 선지자 2015.10.26
652 기본구원 일곱 가지/ 디모데후서 1장 9절-10절/ 800629주후 선지자 2015.10.26
651 기본구원 10가지, 건설구원/ 에베소서 1장 3절-14절/831002주전 선지자 2015.10.26
650 기본구원 10가지/ 에베소서 1장 6절-10절/ 831002주후 선지자 2015.10.26
649 기본구원 10가지/ 에베소서 1장 9절-12절/ 831016주후 선지자 2015.10.26
» 기본구원/ 디모데후서 1장 9절-10절/ 800705토새 선지자 2015.10.26
647 기본구원/ 디모데후서 1장 9절-10절/ 800629주전 선지자 2015.10.26
646 기름준비-지능준비/ 마태복음 25장 6절-13절/ 811113금야 선지자 2015.10.26
645 기름준비-목회지도/ 마태복음 25장 3절-13절/ 800823토새 선지자 2015.10.26
644 기름준비/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890721금야 선지자 2015.10.26
643 기름준비/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840212주전 선지자 2015.10.26
642 기름준비/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800817주전 선지자 201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