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의 정상생활

 

1987. 12. 15. 새벽 (화)

 

본문:빌립보서 4장 4절∼7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믿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행동이나 또 사랑이나 이것은 다 세상에서도  최고의 그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기독자의 정상인 그 사상이요 사람이요  행위요 생활인 것입니다. 이 기독자가 뭐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렇게만  사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이 아니라 기독자의 정상인 그 생활은 항상 기뻐하고,  기쁨으로 살 수 있고, 항상.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의 정상 생활이요 또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관용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할  만치 그들이 오해할 만치 그렇게 관용한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면서도, 늘 염려하고 또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사람으로 사느냐 하면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영원한 행한 대로 갚을 보응을 가지시고 심판주로 나타날 것이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두려워 염려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이것이 정상 생활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곧 주님을 오늘 우리가 구름타고 재림하셔서 만나련지  어쩌련지 모르기 때문에 땅위에 있는 무슨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만 주님 오시면 그런 것은 다 끝나는 것이고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가 모든  정리 못한 것 정비 못한 것 주님의 전지하신 그 심판 앞에 나타나서 심판되는  대로 영원한 응보를 받아야 할 우리들이니까 제가 아무리 속에서 참 기쁨을  가지고 또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관용하는 생활을 하고 이래도 교만해질 수가  없고 항상 떨면서 두려워하면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다. 또 모든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 그런 것도 내가 아주 매우 적은 일로 생각한다. 또 나도 나를  비판하지 안한다. 내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나타나서 내 모든 것을 심판하실 터이니 내가  항상 이 때문에 마음을 놓고 살지를 못하고 항상 모든 일이 미진한 이런  불완전한 데에 있는 이 고민을 가지고 산다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땅위에  살려고 하면 세상을 상대해서 사는데 복잡지 않은 사람이 없고,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고, 낭파 없는 사람이 없고, 마음에 안타까운 그런 참 마음에 안타까와서  마음이 쓰여지고 눌려지는 그런 일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 사람 없는 사람이  없지만 잠깐 생각해서, 모든 염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는 것은 이 염려는, 땅에 속한 염려도  있고 하늘에 속한 염려도 있고 염려가 두 가지입니다. 땅에 속한 염려는 뭐 세상  사람으로 말하면 참 죽을 만한 어떤 산 벼락 같은 그런 일이 닥쳐도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 염려가 없고 다만 하늘에 속한 주님 만나서 어찌 되나 하는 그  염려만 있지 땅에 속한 염려는 아무 염려 없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의  정상인 것입니다.

“아무 염려도 하지 말고” 염려 있는 것은, 과거에 예수님 믿지 안할 때에는  염려할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제가 짊어지고 그걸 해결해 보려고서 참 잠도  못 자기도 하고, 또 병도 나기도 하고, 뭐 어떤 사람들은 자살하기도 하고 이렇게  그런 어려움이 있지마는 우리는 땅에 속한 염려는 아무 염려가 없을 뿐만 아니라  땅에 속한 그런 모든 염려도 염려가 변해서 모든 기도와 간구가 됐습니다. 염려가  변해 가지고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기도와 간구가 됐습니다. 기도와  간구가 됐어.

그러니까 땅에 속한 염려나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나 낭파되는 것이나 또  무엇을 내가 해야 될 모든 건설면이나 수습면이나 어떤 면이라도 그 모든 염려가  변해서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정상입니다.

처음에 큰 염려를 가지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로 돼서 염려가  기도로 변해지고, 또 그리고 난 다음에는 기도로 변해지고 난 다음에는 하늘의  것을 생각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주님에게 맡겼기 때문에 땅에 속한 염려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고 다만 하늘에 속한 일에 대해서 그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을 가지고서 사는 것이 정상의 기독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을 기도하려고 기도의 제목으로 가지고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려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너희 구할 것을” 구한다 말은  너희에게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그말이오. 구할 것이라 말한 것은 낭파가 있을  때에는 해결되기를 우리가 구할 것이고, 가난할 때는 뭐 먹을 것을 구할 것이고,  추울 때는 따실 것을 구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 우리가, “구할 것을” 이렇게 기도하는데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뭣이 되느냐 하면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껏 해 봐야  나중에 가서 하나님 앞에 그저 고하는 정도입니다, 고하는 정도. ‘이렇습니다’  고하는 정도.

고하는 정도는 왜 고하는 정도냐? “감사함으로 아뢰라” 자기가 어떤 은혜를  입은 자며, 어떤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는 자며, 어떠한 사랑을 입은 자며, 어떠한  관계와 소속을 가진 자며, 어떤 전지 전능자의 욕망과 소망이 되어 있는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는 자인, 자기가 이미 얻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이 은혜와, 앞으로 얻을 은혜와, 자기의  소속과, 자기가 지금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어떤 이 권위를 가진 자기 입장  처지를 생각하다 보니까 울며 불면서 기도하던 것이 그저 ‘내 사정이  이렇습니다’ 아뢰는 것으로 물러져 버립니다.

그렇게 뭐 울고 불고 하던 것이 그저 하나님 앞에 ‘내가 이런 일이 있습니다’  아뢰는 정도로 알리는 정도로서 그만 마음에 다 해결이 돼 버립니다. 알리는  정도로 다 해결이 돼.

또 더 들어간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 알리는 게 아니라 ‘주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전지 전능자가 계시니 내게 대한  모든 형편과 처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내가 염려하기 전에 당신이 다 이렇게 다  잘해 주실 터인데 맡기지 못하고 날뛴 것이 미안하고 죄송하게 돼서 주여 내가  이렇다고 이렇게 내가 한 것 내가 주님 앞에 맡기지 못하고 참아 기다리지  못하고 한 이 조급한 나의 이 모든 이 어린 것을 다 용서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렇게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말이오.

자꾸 파고 들아가면 평안이요, 파고 들어가면 담대요, 파고 들어가면 부요요, 파고  들어가면 영광이요, 파고 들어가면 뭐 전지 전능의 권세를 가졌는데 껍데기로  나올수록 자꾸 가난해집니다.

겉으로 나오면 자꾸 가난해지고 불쌍하고 고통이고, 이러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은  w하고 죽는 것ct3  t2사망이요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니라”  들어가면 편해. 우리는 주 안으로 들어가면 평안하고, 그러면 또 공연히 무슨  마취제 먹은 것 모양으로 공연한 위안제를 마셔서 그렇게 거짓되게 위안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실상 평강이고 실상 중에 실상이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가  자꾸 밖으로 나와 가지고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모든 지각에 뛰어난” 인간이 아무리  ‘이렇게 좋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제가 제 지식 가지고서 실컨  소원한다고 해도 그런 소원으로서 근방에 가지도 못한 인간의 그 소원이나  지식이나 이런 것을 무한히 탁월한, 무한히 초월한 이런 상상도 못 할 고차원의  그런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의 평강이라 말은 하나님이 가지신 평강이라 말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라 말입니다.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 말은 그리스도라 말은  영원 전을 지금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제일 먼저 자존하셨고 하나님이  자존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사 중에 제일호 역사가 뭣입니까? 일호  역사가 뭐이요? 일호 역사가 목적이라.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거든.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일호로 당신이 처음으로 당신의 의지를 내디딘  의지의 제일 시발이 당신의 유일한 목적이라 말이오. 목적 하나 정하셨는데 목적  그게 뭐이냐 하면 곧 우리를 당신의 목적하신 대로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광의  찬미가 되기까지 창조하시고 성화시키려는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 그것이  우리의 예택이라. 그러면 예택이 어데서 됐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게서부터 영원 전 천지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이 목적으로 정하신 그 일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지,  신인양성일위가 우리의 죄를 인해서 대신 죽으셔서 대형으로 사죄를 하셨지,  대행으로 칭의를 하셨지, 대화친으로써 이 세 가지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이  세 가지 대속을 이루시고 또 창조주가 피조물로 부활하셔 가지고, 부활하심은 사람 보면 부활을 좋다고 지금 하지만 부활은 우리가 좋지  주님에게는 좋을 게 없는데 우리를 사랑함으로 좋은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노릇 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부활입니다. 높아지기를 좋아지지  낮아지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피조물 되는 것은 우리가  똥구덩이 구더기 되는 것보다도 무한히 천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천해지시니까 당신의 사랑이나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이지 사랑이  아니면 만족하고 좋을 것 한내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래서 부활 주일에 부활 찬송을 하면서  일희일비라, 한없이 참 마음에 슬프고 기뻐. 나 때문에 주님이 피조물 되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안 됐고 또 그로 인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서  구원 받는 걸 생각하면 또 기쁘고, 참 일희일비라.

이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리스도” 영원 전 하나님의 목적이신  예택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예수” 예수님의 사활로, 죽고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 주신 이 구원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는 예택 그 모든 예정 그 순서를 말하고  예수는 사활의 대속을 말하는 것인데, 대속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마음은 무슨 마음인데? 우리 마음은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의 마음  평강의 생각, 하나님의 평강의 마음 평강의 생각, 또 감사의 마음 감사의 생각,  모든 것에 충만해서 만족하고 만족하는 만족의 생각, 이 생각으로 이렇게  마음으로 항상 살 수 있는 것이 이것이 기독자의 정상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정상의 생활이오.

이렇게 모든 면이 이 현실을 초월하고, 시공을 초월하고,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이  무한한 생명과 평강과 쾌락의 행복으로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의  정상인데 이 정상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정상 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놓을라 하니 아깝고 또 하늘은 것은 잡히지 안하고 이래 가지고 도리어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사람 있어.

안 믿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기쁘고 죄짓는 것으로 이래 살지마는 죄도 짓지도  못하지 안 짓지도 못하지, 이러니까 이리도 못가고 저리도 못가고 중간에서 고통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 말이오.

이런데, 이렇게 우리의 기독자의 정상의 생활은 항상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이요 모든 사람 앞에 참 누글누글하게 누그럽게 관대하게 관용하게,  ‘이 사람은 이 물질 문제가 닥쳤으니까 그 사람이 지금 아마 내게 와 가지고  지금 뭐 칼을 가지고 달라들든지 뭐 지금 인제 이뭐 큰 생사가 인제, 생사의  난리가 날 것이다.’ 이랬는데 보니까 그 사람 아무 그런 게 없어.

‘그 사람 참, 돈으로 한번 쿡 찔러봐도 요동 안 하고 그 사람 권세 있는 걸 확  뺏들어봐도 요동 안 하고 그 사람에게 똥박지기를 갖다 퍼다부어도 요동 안 하고,  이 사람은 이것 천치가 바보가?’ 차차 차차 알아 보니까 ‘이 사람들이 가치로 삼는 것은 우리가 가치로 삼는  없어질 것 땅에 있는 이것을 가치로 삼지 안하고 이는 참 아주 무한한 고차원의  것으로서 인간이 상상도 못할 참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한 여게다가  가치를 두고서 욕망을 두고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라” “보여 줘라” 이 사람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언제든지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사형을 받아도 기뻐하고, 매를  맞아도 기뻐하고, 또 자기의 모든 산업을 다 억울하게 뺏겨도 기뻐하고, 뭐  억울하게 애매하게 오만 매장을 다 당해도 기뻐하고, ‘이 사람을 지금 이 전국 교회가 매장을 시키니까 이 사람 아마 병이 들어  죽었거나 그리 안 하면 오그라졌거나 아마 이럴 터이니까 이것 아무래도 찾아가  봐야 되겠다’ 하고서 찾아가 보니까 그 사람 뭐 기쁨이 충만하고 아주 행복  속에 살고 있으니까 도리어 ‘지금 근심해서 죽지’ 싶어서 위로하러 갔는데  도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위로를 받고 도로 큰 소망의 힘을 얻고 오게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이 다 관용을 보이는 것이라. 보이려고 보이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

관용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고, 아무 염려 없는 사람으로 살 수 있고, 또 기도와  간구를 하는데, 기도와 간구를 하는데 나중에 그러면 ‘주여 이것 안 됩니다’ 막  굶고 어짜고 야단을 지기고 단식하고 지금 ‘이것 안 되면 내가 죽겠습니다’  이렇게 야단을 지길 수 있는 참 영 호독거릴 수 있는 아주 자기 속에 불벼락이  떨어진 이런 일이 있는데 처음에는 기도하려고 시작하더니만 나중에 가서는  찍해야 ‘아이구 이 사정이 이렇습니다’ 알리고, 알리고 난 다음에는 또 조금  있더니만 ‘아이구 죄송합니다.’ 왜 죄송해? 나를 이와같은 입장, 처지, 형편, 이런 자를 만드시고 이런 행복과  이런 지위와 소속을 가지게 된 그걸 생각하니까, 자기 아들이 부자의 아들인데  자기 아들이 돈 한 만원 때문에 졸리고 닳고 이것 지금 그 큰 일이 나 가지고서  아주 밥도 못 먹고 지금 이래 가지고 있는데, 이래 가지고 ‘이걸 어데 가서  어떻게 뭐 도적질을 해 올까 이것 누구한테 빚을 낼까?’ 이래 야단을  지기다가서 찾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달라 하면 줄 거다’ 이래  가지고서 ‘이것 그러면 달라 하면 내가 어떻게 달라 할까? 막 죽는 척하고 이래  가지고 지금 이래 가지고 할까?’ 이러다가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고 지금 그뿐 아니라 돈 만원뿐 아니라 여러 수백억이라도 지금 저 위해서  쓰려고 다 가지고 준비해 가지고 있고 하는 이 내용을 알았다 말이오.

이 내용을 알고 보니까 이제 ‘너 뭐 때문에 그러지? 얼마나 돼?’ `아이고  아버지 내가 이래 내가 참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못난 자식입니다. 아버지에게  내가 이것 뭐 잘못 쓸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것이니까 이것 아뢰면  얼마든지 주실 터인데, 주실 터인데 이거, 이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오만 또  죄지을 생각도 다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렇게 못난 자식입니다.’ 왜? 자기가 그 수많은 부자의 맏아들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보니까, 깨닫고  보니까 그런 경거망동한 것 그런 못난 자로서 그렇게 없는 자로 약한 자로서  그렇게 무능한 자로, 자기는 실상 그렇지 안한데 그런 자로 살았던 것이 부끄럽고  죄송하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게 이 사람이 자꾸 되어져  가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너희 인간들의 지각을 초월한 ‘좋아봤자 이만치 좋겠나?’ 가 보니까  그보다 더 좋아.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 좀 또 더 좀 생각해 보니까 측량  없이 그보다 무한히 좋아. 영원히 가고 가고 얻고 얻고 얻어도 다 얻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말했습니다. 믿음은  새로 얻는 것 아니요? 소망은 바라보는 것 아니요? 영원히 소망해도 남아.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이 주신 평강이 시공에 제한  있는 평강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존재적으로 무한하고, 가치적으로  무한하고, 권위적으로 무한하고, 가진 행복적으로 무한해. 모두 무한해. 무한한  이게 다 지식을 초월한 것인데 이런 평강이 너희 마음을,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지키시리라” 그러면 그 평강이 언제부터 시작했는데?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언제부터 시작했소?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부터? 영원 전. 뭣만 있을 때? 하나님만  계실 때. 그러면 몇 호, 존재로 말하면 몇 호라? 이호라, 이호.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일호고 하나님이 이제 행동이 그 시발되는데 행동 중에는 일호라.

그때부터 하나님이 목적으로 정하신 그 뿌럭지 깊은 거게서부터 시발되어  예수님이 하나님이 도성인신 해 가지고서 사활하신 이 구속으로 말미암은 이 뭐  무한이라.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에 가득 차게 되리라” 이랬습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정상의 이 생활이요 사상이요 정신이요 감정이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행복이 어느 구멍에서 나옵니까? 이 행복이 어느 구멍에서 나오요?  그것만 대답하면 이제 마치요, 그만. 예? 그 행복이 어느 구멍에서 나와? 기쁨의  구멍에서, 기뻐함의 구멍에서 나온다. 기뻐함의 구멍에서 나오는데 그러면  기뻐함의 구멍에서 나오면 기쁨은 어데서 나오는데? 녜, 주님의 열여섯 가지 이  대속을 자기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깨닫고 느끼고 자꾸 이렇게 하는, 열여섯 가지  대속 속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 모든 초인간의 생활이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자기가 사모하고 생각한 데서 나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라. 참된 음료로다.” 이러니까  대속을 자꾸 생각하니 그 인격이 말할 수 없이 배부르고 힘얻고 강건하고 점점  장성해 간다 그거요.

이러니까 “감사함으로 아뢰라” 이 감사 뭐 감사한다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  신앙 행위의 권능은 감사입니다. 감사 없는 기도가 소용 없어. 감사가 뭐 백지  공연히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위천교회 있을 때에 감사  할머니가 있어. 그래도 그리 감사해도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요. 어데 갔다가 그  넘어졌는데 가서 ‘아이구 다쳤지요?’ `그거 그랬어. 감사합니다.' `넘어져서  팔을 꿈쳤는데 뭐 감사합니까?’ ‘넘어졌는데 죽지 안했으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또 그래 깨달아. 감사.

이러니까 감사해야 권능 있고, 감사해야 기도도 듣고, 감사해야 우리에게 행복  오고, 감사해야 모든 은혜가 옵니다. 감사해서 뭐 자꾸만 감사만 하면 됩니까? 뭘  말합니까? 주님의 열여섯 가지 그 대속을 생각해서 대속으로 인해서 감사함을  우리가 가졌을 때에 그때에 우리에게는 권능이 옵니다.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게 뭐고 기뻐하시는 게 뭣입니까? 당신이 영원 전부터  전부를 기울여 가지고서 우리에게 사랑의 은혜를 베푸신 그것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섭섭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감사함이 없는 신앙 생활에는 하나님이 제일 섭섭해 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다 외우고 명상하고 실행 실천해서 경험과  체험의 지식을 받아 가지고서 그래 학생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지하철 공사가  지금 어제도 또 말이 났었는데 지금 그 문제가 있습니다. 위협을 주기를 뭐라고  위협 주는 게 아니라 이 기둥 안 뺄라 하면 이천만 원을 돈을 내야 되는데 그래  그렇다고서 그래 말하더라고. 우리 ○집사님이 ‘그것 그러면 공문서로 해  가지고서 연락을 해라 그러면 우리가 거기 대해서 조처를 하겠다’ 이러고  말았다 하는데 그것 기도를 많이 하이소.

그러고 우리가 하루 삼십 분 기도 잊으면 안 돼요.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것  잊어버리고 나서 앞으로 인간이 감당 못 할 환난에 승리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기도 하고는 승리 못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정 말년 때도  그렇고,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항상 그렇습니다. 미래의 것을 깨닫고  자기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부탁하는 그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승리케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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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자의 정상생활/ 빌립보서 4장 4절-7절/ 871215화새 선지자 2015.10.26
624 기독자의 전 생활은 감동생활/ 마태복음 7장 13절-16절/ 881106 남권찰회 선지자 2015.10.26
623 기독자의 장수법 건강법/ 마태복음 16장 23절-28절/ 881029토새 선지자 2015.10.26
622 기독자의 업에 대해서/ 미가 3장 9절-12절/ 860613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