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구원의 어려움


선지자선교회 1984년 5월 9일 수새집회 

 

본문 : 마가복음 10장 17절∼31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라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러 시간을 걸쳐서 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찬송가도 한 번 하고 두  번 하면 재미가 적고 또 세 번 거듭 찬송하면 재미가 적어서 찬송 소리가 차차  작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무슨 연고인가? 찬송 안에 들어 있는 가사의 내용을 생각지  안하고 껍데기 그 곡음에만, 곡과 소리 그 곡음에만 치중하고 속에 들어 있는 그  찬송이 나타내고 있는 그 뜻을 그 사람이 생각지 않기 때문에 외식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된 것입니다.

 또 그 정도를 넘어서 찬송을 한번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두 번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세 번 하니까 더 은혜가 되고 그저 밤새껏 그 찬송을 하니까 더  은혜가 되는 것은 찬송하는 가운데에 그 곡과 음이라는 그 곡음은 어찌 됐는지  그만 저절로 되고, 곡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하나도 가지지 안 하고, 안 가질라  해서 안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곡음에 대해서는 고만 자연히 관심을 가지지 안하게  되고 그 찬송의 뜻의 내용을 자기가 생각하면서 찬송을 하니까 찬송이 해 갈수록  자기에게 깨달음의 주관적 깨달음이 있으니까 그 주관적인 기쁨도, 또 열심도  확신도 생겨지는 것이고, 또 그 정도를 넘어서 자꾸 그 뜻을 생각하면서 그 뜻과  자기와 일치가 되도록, 그 찬송의 뜻과 자기와 일치가 되도록 해서, 찬송 가사의  뜻과 자기 주관이라는 그 자기라는 것이 일치가 되어 가지고 찬송을 이렇게  하니까 이제는 차차 차차 샛별이 떠 올라서 그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연결이 되어 하늘에서부터 자기에게 비춰 주시는 빛이 있어서 자기  주관적인 깨달음 만 아니라 객관의 그 성신의 깨달음의 도우심이 자기에게  건너오고. 또 그 빛이 건너오니까 자기도 차차 더 보여서 처음에는 무심히  찬송했는데 자기의 외식인 것도 보니까 외식을 자꾸 피해서 진실되이 하고. 또  찬송하는데 자꾸 성령님이 빛으로 비추어 주시니까 자꾸 자기의 부족한 것이  이제 나와서 자꾸 굴하고 회개를 하면서 찬송을 하고, 또 성령님이 빛을  계속해서 비추어 주시니까 자기에게 대한 그 회개의 고개를 넘으니까 소망이  자기에게 생겨지고, 소망으로 인해서 이제는 기쁘고 즐겁고 담대함으로 찬송을  하니까 그 다음에는 능력이 와 가지고서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그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그  옥중에 여러 모로 착고에 채여 가지고 깊은 옥속에 지금 갇히어 있는데,  거기에서 찬송을 이렇게 하는데 자기가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찬송이 타져  그왔으니까 그 기도로써 고만 벌써 곡음에다가 치중했던 그것은 벌써 초월  했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 찬송가의 곡이라든지 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거라 그 곡이 우리에게 필요 없고 음이 우리에게 픽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음과 곡은 그 속에 있는 가사의 뜻을 우리에게 더 알려 주고 우리의 그 감정에  더 느끼게 하고 더 깨닫게 하게 해서 가사의 내용을 우리로 하여금 알고 느끼는  데에, 감상하는 데에 돕는 역사를 하는 것이 고것이 찬송가 곡이요 소리입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와 가지고서 찬송을 할 때에, 혼자 하든지 혹은 단체로  하든지 해서 그 경험을 해 봤다면 알 것입니다. 은혜가 와서 찬송하기 시작하면  그 찬송가의 곡이 어떻게 됐는지 그거 모르나 그 찬송가의 곡과 같은 곡이  되어지고 그 작곡한 사람이 참으로 기도 가운데에서 작곡을 잘 한 사람이라면  은혜가 와 가지고 영감으로 찬송할 때에 그 때에 그 영감으로 찬송하는 사람이  생각지도 안했는데 나오는 그 작곡과 그 작곡 해서 찬송가에 기록해 놓은 그  곡이 같이 되어지고 어떤 찬송은 얼토 당토 안합니다. 그때에 은혜 받아 가지고  자기가 찬송할 때에 나오는 그 곡과 작곡 한 사람의 그 곡과는 아주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그렇게 고 아주 인간 임의적으로, 인간 기술로, 인본으로만 해  놓은 것 있고, 바로 된 것은 은혜가 오면 그 곡이 자연히 되어지고, 또 그  가사를 보지 안하고 그 찬송을 처음에 이렇게 해도 찬송 못할 찬송이 없습니다.

다 곡이 됩니다. 그거는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뭐 그럴 때에는 찬송의 곡을 모르는데 이 곡도 찬송하면 찬송이 되는데 자기는  뭐 작곡가가 해 놓은 그 작곡에야 맞는가 안 맞는가 상관도 없이그 저 자기는  찬송하는데 제삼자가 들을 때에 그 작곡한 찬송가의 발표해 놓은 그 곡과 맞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맞지 않은 것은 그 사람 찬송의 곡이 조파로 되어 있고  이 작곡가들이 해 놓은 그 곡이 비뚤어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찬송을 이렇게 옥중에서 그 한 찬송은 벌써 곡이냐 음이냐 그런 것은 생각이  없었고 벌써 그 지나가 버렸고, 초월해서 가사의 그만 뜻을 생각하면서 찬송하는  그 단계도 지나가 버렸고, 벌써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찬양으로서 성신의 감동이 와 가지고 그렇게 자기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와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지금 감사하는 사은의 찬송이요, 또 하나님이  자기를 첩첩이 보호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그 희망이 무한히 청청함을 자기가  느끼는 가운데에서 아픈 것도 간 곳이 없고 옥중인지 뭐인지도 그런 것을 다  초윌한 그럴 때에, 그만한 신앙을 가지고 그만한 소망과 그만한 의지와 그만한  복종이 똘똘 뭉친 그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와  역사해 가지고서 땅이 진동하고 옥 문이 열리고 모두 다 붙들어 매여 있는 것이  다 해방이 되어졌던 그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찬송에 대해서 제일 껍데기가 뭐인고 하니 음이요, 소리, 음이요 고  안에는 곡이요, 또 고 안에는 노래의 그 내용인 가사요, 가사 안에는 자기의 그  주판이라는, 자기가 노력하지도 안했는데 마음도 뜻도 성품도 감정도 자기의  심신의 요소가 차차 차차 단체가 되어서 뭉쳐 가지고서 그 찬송을 불러 자기의  그 심신의 요소 전부가 합해 가지고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찬송이 되어지는  고것이고 알맹이요, 고 알맹이 안이 알맹이가 되면 이제 자기의 심령이 밝아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주는 그 빛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때사 빛을  비추어 주는 거는 아니고 하나님은 언제든지 빛을 비추고 있지만 자기가  어두워서 받지 못하다가 그렇게 단합이 돼 가지고 찬송을 하게 되니까 주님께서  영감 시켜 주시는 그 영감의 빛이 자기에게 오게 되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기와  주님과의 일체화되어서 주님의 형상으로 자기는 변해지고 또 하나님은 나를 통해  가지고서 무슨 일을 하게 되어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문을 열면 들어가서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 '나는 너를 통해 가지고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또 그 뜻을 행하게 된다. 또 너는 나를 힐입어  가지고서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명령인 곧 내 뜻 곧 너의 영생이 되어지는 그  영생을 네가 하게 된다'하는 그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찬송가로도, 찬송하는 목적이 뭐이냐 하면 주님과 나와의 그 결합되어서 그  결합으로 말미암아 그 빛의 생활, 영생이 이루어지는 그것이 목적인데, 찬송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역사가 아니라면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는, 이 구원을 이루는  이 일을 돕는 그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전능한 그 능력을 가진 말씀이요 또  성령님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하는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진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고 하니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서  영원히 우리의 중보자가 되고 하나님의 그 형상을 우리에게 전달 시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이제는 하나님과 연합되는 예수님의 이 대속을 우리에게 입히는 역사를 하시는  것이 성령님과 진리의 하시는 일이요, 또 예수님과 연결을 시켜 가지고서는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던 그 영감과 전리가 이제 우리에게 건너와 가지고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어디까지 나 진리도 보조를 하는 보조 역할을 하고 있고, 영감도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영감과 진리가 보조 역할하는 것은 우리의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곧 예수님과  연합이 되고 난 다음에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연합이 돼 가지고서 이제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모든 것을  다 하나님 앞에 유업으로 받고, 유업으로,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내게 주셨다.' 말씀하신 대로 유업으로 받고, 또 받은 것을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가지고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그 은혜 베푸시던 그  역사 하는 것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은혜 베푸는 역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의 그 몸으로, 지체로 삼으셔 가지고서  우리를 통해서 만물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 되면 모든 만물이 다 너희 것이  된다' 하는 것을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번에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시는 말씀이 뭐이냐 하면  외식을 버리라 하는 것을, 이 외식을 정리하는 말씀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 하나님께서 외식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하셨는데, 가기가 그 외식이  원수인 줄 알고 외식을 그것을 벗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 외식을 벗는 것은 기도 외에는 하는 길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은 이는  하나님밖에 못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늘 계속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지금 아직까지 마귀를 벗지 못하고 마귀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마귀는 자꾸 사람들을 외식하게만 만들게 됩니다. 이래서 사람들을  자꾸 이렇게 기이한, 유다서에 보면 '괴이한 그 색을 따라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변하여서 색욕거리를 만든다. 괴이한 색을 따라 간다.' 그라는데 그것을  마지막에 인간들에게 표현하기를 음행으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것은 껍데기로 마지막에 일어나는 하나의 마치 차가 지나가면 먼지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변하여 색욕거리 삼았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도리와 모든 은혜를  가지고 색욕거리라 말은, 괴이한 색이라 말은, 이 세상에 여러 모양으로  번쩍거리는 아주 이십 세기의 과학은 굉장히 매력이 있습니다.

 그 과학의 색 문화의 색, 문화나 과학이나 같지만 또 문화와 과학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예술들, 또 모든 물질들, 모든 운동들, 모든 재미 취미 또 영광 그런  것들 이런 것들을 치중하게 된다. 물론 기독교가 들어가며 차차 따라서 문예  부흥도 일어나는 것이고 문화도 자꾸 부흥되게 되고 경제도 부흥되게 되고 또 그  다음에는 사람 부흥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것이지만 고만 이 기독교의 이  진수인 신앙이 바로 됨으로 그런 것들이 이제 광채와 같이 나타나야 될 터인데  근본 뿌리인 그 본체는 없어지고 자꾸 거기에 치중을 해서 나아가서 이제는  기독교가 세상 운동 되어지고 문화 운동 되어지고 자꾸 그렇게 나간다, 이렇게  타락되 가는 것을 가리켜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변하여 색욕 거리를  삼았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혹 그것을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아. 이거는 간음이나 하고 음행이나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된 말이지 우리에게는 해당된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마귀라는  놈이 꼬우지만 그 사람은 통통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찬송하는 것도 찬송의 목적이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은 누구 하나님인고 하시 우리 하나님은 반은 사람이요 반은  하나님이신데. 이래서, 온전한 하나님이요 온전한 사람으로서 한 격위를 이룬  예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데, 예수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찬송인 것입니다.

 이래서, 찬송이라는 이 방편으로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 하고,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되면 픽연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또 진리와 연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찬송도 그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 말씀도 이 진리는, 성령은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고, 이  진리는 또 성령님과 함께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예수님을 우리로 하여금 영접하게 하고 예수님을 우리가 모시게  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예수님에게 왔는데  예수님에게 온 것을 그것을 우리가 상속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와 진리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송을 그렇게 자꾸 하면서 하나씩 둘씩 소극적으로는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이 모든 이 세상을 벗어 버리고, 또 자기를 차차 자기 아닌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속으로는 자꾸 차차 새사람을 찾게 되고 이제 나는  새사람이 되고 새사람을, 잊어 버렸던 새사람을 찾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된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 자기의 중생된 영을 찾아 영으로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또 주님을 통하여서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우리가 은혜에 접할 수 있도록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능력 있는 자가 얻는 것 아니오. 능력 있는 자가 얻는  것 아니고 어찌 하든지 열심 있는 자, 이렇게 부지런히 노력하는 자가 천국을  얻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 나라는 힘센 자가 얻는 것이 아니고 계속 힘쓰는  자가 얻는 것이 하늘 나라의 얻는 그 방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자꾸  거듭하고 거듭하고 거듭하고 이라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하나씩 씻습니다. 그래서  찬송으로 자기에게 때와 같고 더러운 것 자기에게 모든 피부병 같은 것 이런  것을 찬송으로 자꾸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그 속에는 들어 있는 암병 같은 그런  것을, 비유컨댄 그런 것을 이제 이 찬송을 함으로 자꾸 치료가 되고 자꾸  잡탱이가 치료가 되어서 깨끗하게 됩니다.

 (이 연기가 제속 나오네. 여러분들은 코에 연기가 안 들어옵니까? 아, 저  천막에 밥하는 데서 옵니까? 그랬으면 내가 해결이 되지. 요 위에 나는 밥하는데  말한다고서. 네, 응? 아 그래? 거기에 밥하는 거 그렇지. 우리가 밥하는가 싶어  그라는 것이지. 뭐 절에서 밥 하는 것은 관계 없고 우리가 밥하는 것말이요.

그런데 또 저 식구들 밥하는데 그런 것은 어찌할 수 없어. 그런 것은 마셔야지  그건 뭐 어쩔 수 없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씻는 거와 같이 자꾸 씻습니다. 찬송으로 자기를 씻는  사람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으로 씻는 것을 연습을 해서 자기를 잘 씻는  사람도 있고, 또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자기를 잘 씻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기도로 가지고서 자기를 잘 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 말씀대로 찬송을 함으로 쓸데 없는 욕심과  쓸데 없는 감정과 쓸데 없는 그 분노와 쓸데 없는 모든 그 관심 그런 것들이  차차 차차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씻는다 이렇게 말하는데 찬송으로  씻는 사람은 정서면을 타고 들어오는 악령의 역사를 막기가 좀 힘이 듭니다.

그게 좀 찬송으로 씻는 것은 그점이 단점입니다.

 또 기도로 가지고서 자기를 씻는 그 사람은 자기의 주관을 통해 가지고서  들어오는 악령의 그 역사를 막기가 어렵고, 그 유혹을 받아서, 씻었으나 나중에  깨끗하게 씻었는데 보니까 하나도 씻긴 것은 없고 그만. 그것을 가리켜서  불건전한 신비주의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가장 객관주의로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같이 말을 하나 들어 볼 때에 그 본인은, 순전히 자기 주판이 하나님이 돼  가지고서 자기 주관대로   하나님은 어지러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무비판 무평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반 사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반물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몰라 그렇지 속에 뚫고  들어가면 속에 진짜는 다 하나님의 복음과 딱 들어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모로 모든 것을 사색해서 연구해서 들어가고, 한 말로  말하면 그 모든 연구 전부가 다 자기를 깨끗케 해서 주님의 그 깨끗하심을  영접해 들일 수 있는 깨끗케 하는 것이 그것이 목적이요, 그래서 자기가 완전히  주님의 지체화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입어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의 그 속성과 자기 속성이 일치되어서, 자기의 속성 곧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의 형상 자기의 형상인데, 그 자기의 형상 자기의 모든 본질과  본성과 그게 커 나가면 자기의 모든 지식과 비판과 관념들. 모든 소원들,  소욕들, 취미들 그런 것으로 펴져 나가는 것인데, 그런 것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들이 있으니, 세상에서 나오는 것들은 과거에는 좋아서 못 견뎠는데 이제  자기가 되고 보니까 세상에서 나오는 것은 꼭 오늘 아침에 맡는 연기와  같습니다. 연기와 같아서 그거는 그렇게 좋던 것이 텁텁하고 참, 공해가 많아서  그것을 맡기가 싫고 맡으니까 못 견디고 이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  자기가 신성하고 참 마시니까 건강해지고 아주 쾌활해지고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  다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으로도 목적이 뭐이냐? 주님 만나는 것이, 주님  만날라고 하면 자기가 깨끗해지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오. 또 어떤 사람은  기도로써 주님을 만나는 일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서 주님을  만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서 주님을 만날라고 하는 사람은  잘못하면 고만 지식주의자가 돼 가지고서, 하나의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결국은  자기를 변화는 시키지 못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가 율법이 돼  가지고서 이 진리에게, 율법에게 자기를 붙들어 매어서 자꾸 정죄하는 사람만  돼져 버렸고. 이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이제 자기가 정죄 받았는데, 실상은  자기가 정죄 받았으나 그 겉으머리로 나타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간으로서 나타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지식은  교만케 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송이 좋으나  우리는 조심해야 되고, 기도가 좋으나 조심해야 되고, 우리는 성경이 좋으나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송은, 찬송, 기도. 성경 말씀 이 셋인데,  찬송은 반드시 찬송으로 시작했으나 찬송은 이 기도와 성경을 영접해서,  영접해서 성경과 기도를 높이 평가하고 대우하면서 이 성경과 기도를 대접하는  찬송이 되어야만 그 찬송이 찬송의 목적을 속히 달성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로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그 방편으로 시작한 사람은 그 기도에만  주력하고 하면 탈선됩니다. 기도에서 성경 말씀과 찬송을 영접해야 됩니다.

찬송을 영접해서 성경 말씀으로 자기를 분석하고, 자기를 모두 다 정리  정돈하고, 기도하면서 또 찬송으로써 자기의 모든 주관이나 감정이나 이런 것을  자꾸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깨끗케 하는 사람 되어져야 합니다.

 또 성경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필요합니다. 그 성경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찬송과 비슷합니다. 그 기도는 감정을 움직여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이고, 성경은 이성을 움직여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인데, 성경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기도가 필요하고, 또 기도만 하면 자기에게 있는  그 전체의 감정으로 말하면 빠지는 감정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에 활용하는 감정이 있고 찬송할 때에 활용하는 감정이 있어서,  찬송을 전혀 안하고 기도만 하면 그 사람은 활용하는 그 감정의 요소 중에 참예  못 하는 감정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들어서 다른 구원을 지장을 합니다. 자기  전부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주님과 결합될라고 할 때에 이지 저분한 남은  것들이 다 한테 뭉치지 안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을 하게 뒵니다.

 그래서 이 찬송과 기도와 성경으로 이렇게 주님을 찾아 만나가게 되는데 이  셋으로 주님을 향하여 찾아갈 때에 그것이 잘못돼 가지고서 탈선되기가  쉽습니다. 탈선되어서 마지막에 객관인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고만 그것이 잘못하면 돌아서 가지고, 돌아서 가지고서 찬송 과 기도와 성경이  자기만 자꾸 소개해 가지고서 자기가 똘똘 뭉쳐 가지고 찬송과 기도와  성경으로써 주님을 만나러 앞으로 전진해야 되는데 전진하는 것이 그만 그것이  중단돼 버리고 이제 전진하는 것이 뒤로 돌아서 가지고서 자기로 기 들어와  가지고 자꾸 자기를 소개하고 자기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이 탈선이 돼 가지고서 꺼꾸로 돌아오기가 쉬운데,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은 뭘로 치료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을  자기가 자꾸 기도하면 영감이 오는데, 기도할 때에 영감이 와서 '요렇게 해야  되겠다.' 이렇게 작정한 것을 또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또 하려고 하니까, 성경  말씀 가지고서 성경 말씀이 하라는 것과 기도에서 하라는 것과 둘이 일치될 때도  있고 둘이 일치되지 아니하고 서로 상충될 때도 있습니다. 상충된 것은 무슨  고장으로 상충이 됐느냐 하면, 그 성경도, 자기의 주관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서,  성경에 속하지 안하고 자기 주판이 성경을 자기 주관 중심에 따라서 분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되어진 그 자기 주관의 방해로써 그렇게 그 혼란이 생겨진 것이고  또 기도도 자기 주관이 들어서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그럴 때에 이 고장을 고치는 것은 무엇이냐? 어제 말하는 대로  이제 실행하는 것입니다. 실행하는 것. 실행을 하면 그 모든 것이 바로 수정이  됩니다. 마치 발명가들이 앉아서 이 명상으로써, 명상으로 그 발명을 합니다.

 '야 이리하면 됐다 됐다.' 이래 가지고서 발명을 해서 자기가 잊어버리지  안하도록 자꾸 글을 씁니다. 글을 써 가지고, 발명을 해서 이렇게 글쓴 그것이  나중에는 논문이 되는 것인데 자꾸 이래 글을 씁니다. 이래 글을 써 가지고 '아  요것이다. 이거는 됐다.' 됐다 하고서 그 사람은 그대로 그것으로 발표하면 큰  수치를 당합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무엇이 따라야 되느냐 하면 '되는가 안  되는가 내가 실험해 보자. 실험을 해보자 실지로 한번 실지로 행해 보자. 실험을  해 보니까 안 됩니다. 꼭 자기가 아는 대로의 논리는 꼭 됐는데 실험을 하니까  안 되요. 그러니까, 아는 대로 논리의 된 것은 자기 주관적 논리지 과학적  논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실지에 가 보니까 틀리더라 그거요.

 그래서 자기가 그 명상적인 그 발명을 해 가지고는 실험적인 발명이 되어서  둘이 일치가 되어져야 비로소 그게 바로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행하는  것은 실험하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실행하는 것은 실험하는 거와 같기 때문에  자기가 성경에서 작정한 것, 기도에서 작정한 것. 찬송에서 작정한 것을 실행을  하려고 하면 저기에서 모든 잡탱이들은 그 기다 벗겨지고 없어집니다.

 그 잡탱이가 어디서 벗겨지고 없어집니까? 이 모든 물질에서 물질이 벗겨주고  이 사회가 벗겨 주고 원수가 벗겨주고 이 모든 이 하나님이 나열해 놓은 이것이  들어서 이 장애물 같지만 서도 이것이 들어서 꼭 바로 된 것은 물질도 통과,  '예, 수고했습니다. 통과하십시오' 물질도 통과, 모든 이 사회도 통과, 세상도  통과, 마귀도 통과, 죄도 통과, 사망도 통과 전부 다 통과요. 전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차 전으로 다 전쟁해서 승리해 놓으셨기  때문에 승리한 세상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승리하시고  주님이 전투하신 거와 같은 그 전투를 연습하게 하실라고, 그 승리를 우리들이  체험하고 경험하게 하실려고 이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대속 받은 자들을  세상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속 받은 자들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 대속 받은 것을 실지로 자기가  입고 살아 볼라고 하는 것인데 입고 살아보니까 불편하니까 벗어 내버립니다. 그  현실에서 대속을 입힌, 사죄를 입혔으니까 죄 없이 사는 것 하나님에게만  피동대로 사는 것이 의요, 또 하나님 모시고 사는 것, 하나님이 자기중심의 자기  왕이 돼 가지고서 자기 마음에 제일 높은 보직에 주님이 내주하셔서 왕으로  계시고 자기는 성전이 되어 가지고서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이렇게 해서 사는 요것이 기독자의 생활인데,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탈선되게  된다 그거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실행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모두 다  수정을 해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참 믿음으로 가지고서 바로 수정된 것은, 바로 이렇게  수정된 것은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바로 수정이 된 것은 마귀도 내 것이요.

죄도 내것이요. 사망도 내것이요, 생명도 내 것이요, 세상도 내것이요 모두가 다  내것입니다. 내것이라 말은 그의 주인공이 된다 그 말이오. 이해가 됩니까?  사망이 내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요? ○○○선생. 이해가 돼? 네.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왜? 그것들의 주인이 됐어. 그것들 이 주인인, 주인은 이기신  주님이 주인이신데, 마귀 주인이 주님이시오. 죄의 주인이 주님이시오. 사망의  주인이 주님이시오. 주님은 사망도 당신 마음대로 통치, 주권으로 통치하시고.

생명도 통치하고, 마귀도 통치하고, 죄도 통치하고, 다 이 죄도 주님 앞에서는  꼼작을 못합니다. 주님의 이 주권의 통치 아래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겨서 점령을 해 가지고서 당신의 부리는  사망으로, 당신이 부리는 마귀로, 당신이 부리는 죄로 이렇게 다 하셔 가지고서,  구속 받은 자들을 이 세상이라는 당신의 그 시련소 연단소를 만들어 놓으시고  여기에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내놔 가지고서 '너는 죄된 것은, 죄가 있는 것은  붙들어라. 죄가 있는 것은 이 길을 가지 못하게 죄가 있는 것은 붙들어라.

마귀와 동행하는 것은 붙들어라. 이제 이 사망의 요소가 있는 것은 붙들어라.

그러나 완전히 나와 같이 되어서 내지체가 되고 내 몸이 되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오신 이가 주님이신데, 주님의 형상을 우리로 하여금 덧  입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 이렇게 연단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내 형상을  완전히 입어서 내 몸 지체가 된 것은 네가 통과 시키라. 이라기 때문에 주님의  그 지체가 된, 그리스도는 머리요, 하나님은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이라. 이렇게  완전히 바로 된 것은 어더든지 자유입니다.

 여러분들, 바로 된 것은, 이 세상에 장애물이 가득 있소. 장애물이 가 득  있어서 여기에 걸리고 저기에 걸리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걸릴 때마다  우리는 잘못하면 원망하는 사람 되기 쉽습니다. 걸릴 때에 원망하는 사람 되기  쉬운데, 그 걸리는 것이 우리를 해칠라고 방해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 그  장애물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장애를 받을 수 있는 그 불완전 한것을 통과시키지  안하고 완전케 깨끗하게 해 가지고서 통과시킬라고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장애의 것들을 보고서 네가 원망하면 심판에 걸린다. 원망하면 너에게는 지금  심판을 통과하지 못할 요소가 거기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원망하지 말고  거기에서 장애 있으면 그 장애에 넉넉히 통과할 수 있는 것으로 자꾸 딱고 삣고  깍고 씻어서 이 부둑살 이부둑살 이 암으로 뚱뚱 혹이 불어난 그 모든 것. 이런  것 그런 것을 다 치료해서 깨끗이 해서 이래 통과해라, 그것을 가리켜서  기독도는 하늘 나라를 향하여 가는 데에 보니까 그 앞길에 사자가 두 마리가  이래 떡 가로 막고 있으니까 갈 수가 없다. 네가 그리 가지 말고 네가 바로만  가면, 그 사자속에는 너 하나 들어갈 만한 그런 거리가 있어서, 다리가 이  오른편에도 사 자 뒷다리가 매여 있고 왼편에도 매여있어 앙 소리만 하지 네가  치우치지 안하고 가운데로만 가면 그 가운데 서서 있어도 사자라는 놈들이  고함만 지르지 네 몸에는 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을 해 놨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피로 값 주고 살 때에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는 벌써 주의 것이 됐는데 우리가  그걸 알지 못하고 망령을 부려서 주님의 구속을 입은 자가 나는 내것으로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고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 하는 그 사라는 것은 값 없어도 사라 그렇게 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참 그 살만한 댓가가 된다는 것은 아니오. 댓가는 안 되지만 네게 있는  것을 내놔야 된다 그말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내놔야 된다. 그 사라는 것은 뭐  내놓고 사라 하느냐 하면 곧 자기 내놓고 사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주님의 것이 되면 주님의 대속은 내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불로 연단한 금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금은 믿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믿음을 가리켜서  금이라고 말하는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그 말은, 불로  연단이라 말은 불이 태워도 타지 안하는 그런 순금으로 네가 부요하게 하라 그  말인데, 그거는 뭐이냐? 세상에서 이런 저런 핍박 이 방해를 해도 없어지지 않는  복종, 또 세상에 있는 네 소유를 다 뺏는 어려움이 와도 요동치 않는 복종,  마지막에 너에게 사형이 와도, 목숨이 죽었지 복종을 요동치 않는 그 복종을  가리켜서 불로 연단한 금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불로 연단한 금을 제가 차지하려고 하면 댓가를 내놔야 되는데 그  댓가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입니다. 자기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주께 자기를 다 바쳐서, 주님이 모든 것  다해서 나를 대속 하셨기 때문에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이 죽이든지  살리든지, 이렇게 쓰시든지 저렇게 쓰시든지, 자기의 몸이나 소유나 생명이나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당신에게 권리가 있는 것이지 그거는 내게 권리가 없고  그것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에게 권리가 있을 때에 주님의 대속은 내기에 권리가  있습니다. 그 대속은 내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복종이 어디 가다가  타 버리고 마느냐 하면 자기 때문에 타버리고 맙니다.

 옥토에 뿌린 씨는 백 배 육십 애 삼십 배의 결실을 맺지만 길가 뿌린 씨도.

돌밭에 뿌린 씨도, 덮불 밑에 우린 씨도 다 실패를 하고 마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속에 한 말로 말하면 자기 때문에 다 실패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고 자기가 자기 것으로 보존하고 자기가 주님의 것이요 주님피 뜻대로  쓰시는 것이라. 주님의 뜻,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목숨이 죽어도 주님의 뜻  이루는 데에 필요한 목숨이요, 주님의 뜻을 이루는 목숨이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기 소유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기의 건강이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기의 모든 것인데, 그것이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주님의  뜻대로 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하는 고 착각에서 우리들은 모두  다 실패를 당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기를 내놔야 된다.

 흰옷도 주님의 대속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인데. 주님의 대속도 자기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져야 주님의 대속이 자기것이 되어지는 것이지, 주님이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입혀 놨으니까 공심판에서는 우리야 알든지 모르든지  주님의 대속은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역사하셔 가지고서 공심판은 다 무난히 다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대속 하신 그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을 입고, 이  대속의 기초 위에, 이 대속의 기초 위에 예수님의 부활의 그 건설이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 세 가지 대속을 사야 그 다음에 건축인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도 예수님의 두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면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필연적으로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 '주의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면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리라.' 거기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자기의 주관의 노력을 말을 했고, 그 다음에는 부활에 연합 하자가 되는 것은  주관의 노력을 말하지 안하고 필연성으로 되어지는 것을 그 안에 말씀을  해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는 것은 우리 할 일이요. 죽는 거는 우리 할 일이요 사는 것은  주님이 하십니다. 죽는 거는 우리 할 일, 우리가 잘못하면 죽는 일을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일로서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두  가지 죽는 일 위에 이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 사람이 살 일이 그 위에  건설됩니다. 논리적 순서가 그 위에 건설돼요. 알겠습니까? 자꾸 구별 없이.

자꾸 구별 없이 이렇게 하기 때문에 어두워진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그 세 가지를 죽입니다. 세 가지를 죽여. 예수님께서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세 가지 죽이시는데 죽이시기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벌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세 가지를 죽일라면 예수님이 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벌 받을 것은 없지만 서도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이것을  생명까지 투자해서 죽이는 그것이 뭐이냐? 죄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죽어지는 것이오. 예수님의 세 가지 ○○○, 무릎 끓고 앉아도 어만 생각을  뒀어. 어만 생각 두면 헛일이야. 하나님은, 하나님은 시기와 질투가 굉장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서, 아. 시기가 살인도 하고 시기가 살인도  하고 이렇게, 가인이 시기해서 아벨을 죽이지 안했습니까? 이렇게 모두 시기가  살인하지 않습니까? 그 시기가 세상에 시기가 깜짝 놀라 '아 시기 그 놈 무섭다.

참 시기의 독이 무섭구나. 할 때마다 그 시기를 만들어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여러분들, 요거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런 독하고 무서운 시기를  만드신 그 분이기 때문에 그분 속에 시기가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라 하는 것은 사라 하는 것은 당신이 다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에게 대해서. 아주 당신은 무한이요  우리는 그까짓 거 천하고 더러운 것이지만 서도 우리를 다 하는 것을 당신이  요구 하십니다.

 이제, 내가 나를 다해야 사는 것이오. 그런데, 주님의 대속은 내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내것으로 두고 있으면 그것은 뭐이냐? 도적입니다. 도적이고  강도요. 상점에 우리가 조그마한 상점에 가 가지고서 물건 하나 사도 그 물건을  내가 이거 팔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살라 하니까 '예, 사십시오. 가격이  얼마입니다.' 얼마라 말할 때에 '예 그렇습니까? 그러면요 거 싸 주십시오. 싸  줍니다. 싸 주니까 턱 가지고서 고만 그냥 갑니다. '아 여보 여보 와 그냥 가요?  대금은 안내고' '대금은 무슨 대금을 내요? 내가 지금 싸 가지고 가지고 가는데.

그라면 그냥 가구로 두겠소? '안 됩니다. 그 물건 두고 가십시오. 돈을 안  냈는데, 댓가를 안 냈는데 어떻게 물건을 가지고 갈 수가 있겠소?' 그렇게  말하지 않겠소? '내가 지금 거머쥐고, 내가 딱 거머쥐고 있는데 내것인데 뭐  그런 소리하느냐?' 하면 '이놈, 도둑놈이로구나.' 그라면서 시비 안 나겠소?  그와 마찬가지라 그 말이오.

 우리가 이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하는 것. 우리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하는  어기게 하는 그 적을 우리가 죽이는 데에는 우리의 가다가 가다가는 마지막에논  최종적으로 생명을 내놓지 안하면 그 놈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하는 그놈을 죽일라면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목숨 을 다 해야 그놈을 이길  수가 있다 그 말이오. 또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이 피조물에게 피동되는  것. 자기에게 피동되고 피조물에게 피동되는 것. 피조물에게 피동되는 것이  자기에게 피동되는 것이요 자기에게 피동되는 것이 피조물에게 피동되는  것입니다. 뭐 누구에게 어떤 상관에게 피동됐다 해도 분석해 보면 자기 때문에  상관에게 피동했소. 이러니까, 이 주님에게만 복종하고 거기에만 피동이 되어야  될 터인데 이제 다른 것들에게 피동되는 그것을 우리가 죽일라고 하면 생명까지  바쳐야 되지, '내 제자가 될라고 하면 있는 것을 다 버리야 된다.' 누가복음  14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뭐이냐? 주님의 제자라 말은. 주님이 이제 다른 것에게 피동되는 그것을  주님이 다 벌로 받아 가지고 그 세력을 멸하사고 당신이 복종 하심으로써 칭의를  우리에게 입히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게 피동되는 것,  피동하게 하는 것 피동되는 그 놈을, 다른 것이 나를 피동케 하는 그것을  죽일라고 하면 우리가 있는 것을 다 내놓지 안하면 주님이 그렇게 이기심 같은  그 이기심에 연합을 못합니다. 주님이 이 기심의 그 이기심에 우리가 연합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디든지 하나님을 자기에게 모시지 못하게 하려고, 우상을 모시게  하려고합니다. 자기가 자기왕이 되게 하려고 마귀란 놈과 온 세상이달라 들어  애를 쓰고, 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왕이 되도록 하려고 애를 쓰고, 어떤  물건이나 영광이나 지위나 권세가 자기의 왕이 되어서 자기는 그에게 속하고  자기가 그것을 제일, 자기 심령 속에 제일 높은 좋은 보좌 위에 그것을 앉혀  놓고, 주님이 앉을 자리인데 주님은 쫓아내고 그것을 앉히는 앉히게 하는 이놈을  죽여서, 그놈을 죽여서 주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지  못하게 하는 세력들을 싸워서 이길라고 하면, 주님은 이기셨는데 이 이김에  동참해서, 이김에 연합되어서 이긴자가 될라고 하면 있는 걸 다 내놔야 내  제자가 된다, 있는 것을 다 내놔야 내 제자가 된다.

 계시록에,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라'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내 놓지 안한  것이 있으면 '아 나는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나는 지금 출전한 자이다. 이 세 가지를 죽이는 그리스도의 정병이다' 이렇게  말을 하지만 서도 네가 세 가지 이길라면 있는 것을 다 내놓고 무엇이든지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어떤 것이 지장이 오고 어떤 것이 깨어져도 나는 이  전쟁만은 지금 승리를 하겠다 그렇게 네가 하면 내 제자가 되어서 내 승리를  인계 받고, 네가 내 승리에 참예해서 연결이 되어지고. 한 가지라도 요것만은,  이 세 가지를 죽이는 싸움이 내 싸움이라 이 죽이는 일을 하지만 요거 한  가지만은 요거는 내 놓을 수가 없다. 목숨을 내놓지 못하든지, 명예를 내놓지  못하든지. 지위를 내놓지 못하든지, 돈을 내놓지 못하든지, 자기의 애착하는  가족을 내놓지 못하든지 무엇이든지 내놓지 못하는 것 있으면, '사로 잡는 자는  자로 잡힐 것이라 무엇이든지 하나 거머쥐고 갈라고 하는 사람은 거머쥔 것  고것을 통하여서 이제 낚시를 걸어 가지고서 고거 거머쥘라고 하니까 고거  거머쥐고 요거 안 놓을라고 하다가 고거 때문에 딱 원수의 낚시에 따 걸려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로 잡는 자는 사로잡힌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떻게 우리가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것을 지금  알아야 되겠는데, 도무지 오늘은 예수 믿는 사람이 기본구원 건설구원을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는 것은 마귀라는 놈이 그렇군 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예  기본 구원은 힘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 구원은 힘을 쓰나 안 쓰나 이미 내가  나기 전에 벌써 내것이 다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자들은  기본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택자들은 제가 아무리 개망나니 짓을 해도 지옥은 못  갑니다. 하늘 나라에 가 가지고 수치를 당하지 그 사람은 지옥에 가는게 아니요  제 성질로 보면 지옥에 딱 맞지만 하늘나라 가지 지옥에 못 갑니다.

 그러니까 하늘 나라 속성에, 하늘나라 속성에 배치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다 빗고 깍아서 싹 깍아 버리고 다 깍아 버리고 이제 하늘나라에 맞는  것만 딱 보내니까 이 뚱뚱한 자가 가 가지고 이리 저리 삐끼고 보니까 아무것도  없어 조그만 한이 가느다란 실라끈만한 것이 부활해 가지고서 이제 가게 됩니다.

 ○○○ 마귀가 ○○○ 조사에게로 들어 갔구만. ○○○조사에게 그 마귀가  들어가 버렸구만. 들어갔어. 안 들어간 것 아니라. 은혜야 받는 것 같지 그 놈이  그것도 알거든. 이래 가만 있으면 잔다 할 터이니까 그놈이 떡 시키기를 '머리가  끄떡 끄떡해야 감탄하는 줄 안다 자면서 (고개를 꺼떡임)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죽일라고 하면 우리는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며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금번에 봉독한 이 말씀 가운데에서는 이 세  가지를 죽이고 건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냐?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 이 건설구원보다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면 누가 할 수가 있겠느냐? 인간으로 할 수가 없다.

인간으로는 절대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네게 있는 것을 다해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간구하면 하나님이 볼 때에 당신이 해 주시면 되는데, 당신이 해  주시면 되는데 당신이해 주시는 것은 네가 값을 내고 사라. 값을 내고 사라.

당신이 해 주실 만한 그 만한 단계에 이르는 기도를 하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기도요. 우리를 회개케 하는  것이 기도요, 우리로 하여금 새 것을 바꾸어 가지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세 번이나 가서 기도 하시면서  '내가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주님으로서 그 육체, 심신이  약하다 그 말이오. 심신이 약하다 그 말이오. 육체라는 것은 뭐 삵스(  )라고 해  가지고서 범죄성이라 하는데 그거는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은 원 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하는 이 육체는 예수님의  육체인데 그 원어가 삵스랍니다. 나는 원어 모르는 사람이오. 이런데. 그러니까  그걸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 '예수님의 육체가 어디 약할 수가  있느냐? 이러니까, 그 육체는 우리 육체지 예수님의 육체가 아니다.' 이랬다  말이오. 내가 그래서 하도 그래서 '자 그라거든 그 육체가 복수냐 단수냐 그것을  한번 좀 해봐라.' 이러니까 단수로 돼 가지고 있대 요 단수로 돼 가지고  있으니까 예수님의 육체 아닙니까? 예수님의 육체인데 자꾸 억설을 댄다 말이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가지고서 이제  도와서 기도의 그릇이 찼습니다. 이제 그 큰 승리, 예수님의 큰 승리를 아버지의  영이 책임지고, 성령님이 책임지고.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지만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인성을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 책임을 지고 그 일을 다  완전히 승리를 이루게 하시는 그 허락을 받은 것이 예수님께서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자고 쉬라.' 그 승락을 다 받으시고 난 다음에 '이제 이제는 자고  쉬라'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만한 것을 받는 데에는 요만한 기도가 되어야 요렇게 저울질  할 때에 요만한 것이 되면 저쪽이 올라가지만 서도 가벼우면 장 저쪽이 내려와  있소. 이 올라갈 만침 해야 저게 올라간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도  이런 것 저런 것 받는 것이 많은 건데, 기도해 가지고서 적은 것 받는 것도 있고  작은 것 받는 것도 있는 것이니까 고게 합당한 기도의 그릇이 차야 그것이  하나님이 들어서 이루어 주시는 것이지 그릇이 차지 아니하면 이루어 주시지를  아니합니다. 왜? 왜 안 이루어 주십니까?  기도의 그릇이 차지 안 할 때에 주는 것은 자기 실력에 과분한 것을 주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도리어 그 사람에게 화근이 됩니다. 실력에 합당치 안한  지위나 권세는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그것을 하나님에게 받을 수 있는  그런, 받아서 간직하고 그것을 복되게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실력가가 되게 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가 기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해 가지고서 건설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은 힘쓸게 없다 이라는데 마귀라는  놈이 와 가지고서 이 기본구원 이것을 거머쥐고 말하다 보니까. 사람이 이  건설구원에만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도 이 건설구원이 참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거와 같겠으니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이 기도하는 요 길을 통해 가지고서 기도로써 성령님과  차차 차차 가까와져 가지고서 기도로써 내가 성령님에게 사로잡혀서 성령님의  것이 돼 가지고서 '요만한 정도면 됐다.' 인을 탁 찍으면 고 정도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 그 말이오.

 이렇게. 기도해 가지고서 이렇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만 마귀라는 놈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혼란을 시켜 가지고서 이래 거석하니까 자꾸 말하는  것이. 애쓰는 것이 전부 기본구원에 대해서 애를 쓰고 있다 말이오. 기본 구원  '그러면 지옥 간다. 그러면 지옥 간다. 그리 안 해야 천국 간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어제 기본구원에 대해서 몇 가지 말했지요? 몇 가지 말했습니까?  자, 네, 열 가지 말했습니다. 열 가지 말했어. 열 가지 이 구원이 중요한  구원이요 이 구원이 큰 구원이오. 이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써는 근방에 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공으로 은혜로 주신 것인데, 이 기본구원은 공으로  주신 구원이니까, 공으로 주셨으니 가치가 적다고 그렇게 생각지를 마십시오. 이  구원은 가치가 커서 인간의 노력이나 그 충성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이  기본구원을 살라고 하면 이 기본구원에는 인간의 완전한 그 충성이라 할지라도  이 인간 충성을 기본구원 얻는 데에 가지고 가면 기본구원이 깨져 버립니다. 왜?  기본구원은 인간의 충성 가지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인 양성 일위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입니다.

 인간의 그 지식이나 충성이 근방에 가지도 못한, 주님이 대속하신 것으로만 할  수 있는 지극히 고귀한 이 기본구원이요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공심판을  통과하는 이 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되는 이것은  기본구원은 이미 은혜로 다 받아 놨습니다. 받아 놨으니까,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의 수종을 들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우리가 일을 할 때에, 하늘 나라 가  가지고서 주님이 기뻐, 주님이 기뻐하셔서 주님이 '이거 해라' 할 때에 '예'  '저거 해 라' 할 때에 '예' 또 뭐해라 할 때에, 주님이 온갖 기뻐하심을 이제는  순전히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시고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시는데, 주님이 기쁨을 누리실라고 이제 떡 내놓고 기쁨을 누릴라고 한번  누려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 그 말이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 않소? 이런  음악의 감상도 음악 감상하러 가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무슨 감상이 되겠소?

 이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면 당신이  구속한 그 모든 당신의 몸에 보니까 '보자' 이 오른손을 보니까 오른손을 보니까  왼손에 대해서 필요합니다. 이 오른손인데 왼손에 가시가 들었는데 가시가  들어서 따금 따금한데 이 오른손을 사용하여 '오른손아 왼손의 가시를 재라'  이러니까 오른손이 가 가지고 더듬더듬 한 다 말이오. 이제 '눈아, 네가  오른손에 가시가 들었으니까 단단히 보고서 가르쳐 줘라.' 눈이 딱 보고  오른손이 가 가지고 쏙 잡아 빼니까 야, 오른손이 보배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이제 구속받은 주의 몸 된 우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에  아담으로부터 모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교파에 있든지 전부가 다  하나입시다. 이 거짓된 것은 하나 아니고 택한 자는 다 하나입니다. 택한 자는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가 하나라 말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지금 그 인적 요소가 들어서 자꾸  이렇게 저렇게 하고 있지 진리와 영감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하나된 것은  하나입니다. 진리도 하나이요 주님의 그 구속도 하나이요 영감도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이 셋은 또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셋으로 된 구속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인데 다 그것을 합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몸이니까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백 목사는 저  반대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 필요하고 그 사람은 나에게 필요해서, 이제  주님이 내가 제일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보니까 내가 필요하고 백 목사가 제일  미워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되면 '이 손은 괜찮다.' 가시 뺀거와 같이,  알아듣겠소? 가시 뺀거와 같이 '괜찮다.' 이랬는데, 이 손은 보니까. 이 손은 제  일만 할 줄 알지 이거는 다른 데는 쓸모없습니다. 그러면. 몸에 붙은 손이 이게  온 전신에 아무데도 쓸모없고 손 저만 따로 있으면 이 손은 병든 손입니까 필요  있는 손입니까? 병든 손이니까 이 손은 이거는 수술을 해야 돼요 안해야 돼요?  수술을 해야 됩니다. 그 수술하는 수술 장소가 어딘고 하니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오.

 이래서, 이제 모든 대내적으로 모든 택한 자들에게 필요있는 존재가 되어야  되고, 또 그 다음에는 이제 택한 자 밖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지는 이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가 바로 되어진 것입니다.

 이래서, 그 모든 택자들에게 필요있는 자가 되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에게 충만케 하는 그  충만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손이 자기만 그런게 아니라 이 손이 보니까, 손이 보니까,  주인의 양떼가 있는데 '저 양에 가서 젖을 짜라' 하니까 이 종의 손이 가서 양의  젖을 잘 짭니다. '아, 저 양이 지금 병이 들었으니 치료해 줘라. 치료를  잘합니다. '  양이 먹을 것 없으니까 먹을 것 줘라.' 잘 줍니다. 이것이 뭐이냐?  모든 피조물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쓸라하는 데 척척 잘 들여지니까 이것은  보배로운 주님의 지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되어지는 이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기본구원은 어림도 없어. 우리가, 건설구원 이것은 뭐이냐 하면  건설구원은 하늘나라에 가서 있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 필요하냐? 또  하나님의 교회에 어느 정도 필요하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느  정도 필요하냐 하는 이것이 이제 그것이 자기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자기의 영광이요, 그것이 모든 남의 영광이요 전체의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집을 지었는데 공력이 불타니까 다 수치를 당하고 어떤  사람은 공력이 있으니까 상을 받는다 하는 그런 것을 다 비유해서 가르친  것인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건설구원 준비 한 것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서  쓸모 있는 것으로서, 이제 불을 태우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심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최종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심판 전에  신사 참배도 심판이요, 6.25도 심판이요, 매일 매일 닥쳤을 때에 '아, 이거는,  꼭 오늘 주일을 지켜야 되겠는데요 문제가 있어서 안된다.' 이래 가지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 모든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라 하니까  어렵고 또 세상이 깨어지고 또 세상을 안 깨고 안 내버릴라 하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야 되어지고 요렇게 하는 고것이 다 시험입니다.

 고거시험 이 시험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요, 고것이 온전케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요,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 없어지는 그것이 무엇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치료되는 것이요. 그것이 수술되는 것이오. 주의  말씀대로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내 원수스러운 암병이 내장에  있는데 암병 그놈을 똑 잡아 몇서 내버리는 거와 같은 것이라 그 말이오.

 주의 말씀을 내가 순종함으로 없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기에 큰 영원,  암병과 같은 병인데 그것이 치료되어지는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또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의 없어질 것 같았는데 계명을 지켰는데 없어지지  안하는 그것은, 계명을 지키기 전에 없어질라 하다가 계명을 지키면 없어진다  없어진다 했는데 막상 계명을 지켜도 없어지지 안하고 있었으면 계명 지키기 전  그것과 계명지킨 후에 있는 거와는 다릅니다. 아주 그것이 가치로 폭등된 승격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이삭과 하나님의 그 만민의 구세주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은 후의 이삭과 다르다 그거요.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 지킬라 하면 죽고 그 총리도 다 내놔야 되고 빼앗기게  되고 이랬는데 이제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계명을 지켜도 다니엘이 살아남아  있고 다니엘의 또 그 총리의 그 지위가 남아 있고 한 그것은 제명의 그 연단을  받기 전 거와 그후와는 다릅니다. 다니엘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도 다,  계명 때문에 없어진 그 단계를, 계명 때문에 다니엘은 없어져도 제명을 지켰는데  제명을 지켜도 없어지지 안하고 유지되어 있던 그것은 계명을 지키기 전  다니엘의 그 지워와 다니엘과는 아주 다릅니다. 아주 딴것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 홀로 총총리가 됐지, 또 원수를 다 정복을 했지, 또 그로써 하나님께서  많은 영광을 받으셨지.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이것을 예비하는 예비 심판 그것을 가리켜서 사심판이라, 개심판이라.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스스로 자치하는. 스스로 짜기가 다스리는 자치 심판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계속 심판을 세밀히 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세밀히 심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비 심판이 적습니다. 예비 심판  그런 것이 많지를 않습니다. 예비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는 데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험은 하나님에게 받는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에게 시험  받는게 아시라 시험은 각자들 자기 속에 욕심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서 시험을  받는 것이지 욕심 그놈을 다 뽑아 버린다면 시험을 받지 않는다. 시험이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은 미래적 영감을 받아 가지고, 미래적 영감을  받아 가지고서 이제 미래를 두고서 벌써 미래를 지금 준비합니다. 미래를 지금  준비하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현재적 영감을 받은 사람은, 미리 당겨서  준비해야 되지, 기독교는 전부 예비 종교인데. 기독교는 전부 예비 종교요. 그래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미리 준비했으니까 다 잘됐고, 그때 임시 나서 가지고  날뛰는 사람들은 급한 꼴만 봤지 하나 도 준비를 못 했다 말이오. 기독교는 전부  준비의 종교요 다 준비의 모든 역사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비적 그런 예고하는 그런 영감을 받아 가지고서 미래의 것을  지금 보고서 준비합니다. 지금 보고 준비하는 사람 그 사람은 현재가 닥쳤을  때에는 다른 사람은 울고불고 야단인데 그 사람은 지금 벌써 현재 그런 거는  상판 없어. 현재 그까짓 거야 뭐 아무 상관없어. 무난히 통과됩니다. 무난히  통과되고. 현재에 있지 아니하고 또 날아갔습니다. 날아 넘어가 가지고서 지금  이 앞으로 닥칠 일 그거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슨 준비? 이 환난이 와 가지고서  어려움 닥치고 난 다음에는, 밤이지 나갔으니까 낮이옵니다. 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지나갔으니까 이 다음에는 어려움에 승리한 사람들이 이제  영광을 받을 것이고 권위가 있을 것이고 이래서 낮이옵니다. 알겠습니까?  어려움의 밤이 지나가면 상급의 낮이옵니다. 대우의 낮이옵니다.

 이러니까, 환난 올 때에 그 환난을 이길라고 떨며 모든 것을 하는게 아니라 그  환난은 벌써 예비 준비 해 놨기 때문에 그 환난이 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만 복종하는 것이  자기 생활로 단정을 지워 놨기 때문에 뭐 이러니 저러니 서슴을 것이 없고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다 말이오. 염려할 것이  없으니까 웃으면서 기쁨으로 지나가고, 그러면 그 환난 때는 그 사람 뭐하는가?  그 사람은 또 예비 준비해. 또 넘어갔어. 넘어가서 '아! 이 바람이 지나가면  잔잔할 것이고 엄동 설한이 지나가면 이제 움이 트고 꽃이 피는 따뜻한 봄이  오는 것처럼 이제 이 다음에 환난이 지나가면 모두 다 환난에서 거기에서 통과한  이 영광스러운. 이 환난 지나고 나면 기독교의 이 전성 시기가 올 터인데 그때에  마구 추켜 올릴 터이니까 얼마든지 올라갈 터인데 그때에 내가 올라가면  어짜나?' 그때에 안들려 올라갈 그 준비합니다. 그때 안 들려 올라갈 그 준비  하요.

 그러기 때문에, 파거 신사 참배에 이제. 승리한 걸. 주먹덩이 만칩만 승리한  것을 그 다음에 집채 만치 울궈먹은 사람도 있고, 또 그 사람을 그 사람이  울궈먹다 안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울궈먹은 것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주먹덩이가  아니라 몸둥이 만한 이 승리하고도 그 승리를 아무도 모르게 파묻어 놔서 이제,  다른 사람이 그것을 높이 들어서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지 안하려고 미리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그것을 나타내지 안하고 은밀한 가운데에서 그  모든 것을 해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아버지만 보시고 아버지만이 갚아  주시기를 원하는 그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 그것이 성도들이 걸어가는 예비적  준비입니다. 예비 생활.

 그러므로 우리의 이 기본구원은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관심  가질 수 없고 우리는 다만 건설구원 이것만이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건설구원은  꼭 우리가 이루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됩니다. 건설구원은 우리가  이루어야 되는데 이 건설구원은 인간이 이룰 수가 있느냐?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거와 같이 어렵기 때문에 절대 인간이 건설 구원을 못 이룹니다.

건설구원을 못 이룹니다. 못 이루는데 인간이 이루어야 됩니다. 못 이루는데  인간이 이루어야 됩니다. 못 이루는데 인간이 이루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냐?  하나님 앞에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라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 찾는  자가 찾아질 것이니라 구하는 자 마다 다 얻을 것이라.' 하나도 실패 없이 다  된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겠다.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너희가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고 그분에게 해 달라고 애걸하게 달라붙어서 되는 요 한 길을  우리에게 열어 놓은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떼 가운데에 보내는 거와  같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왜 이렇게 환경 어려운데 우리를 둬 두느냐?  그것은 당신의 욕심이오. 주님의 욕심이오. 주님의 욕심이라니? 주님의 사랑의  욕심이오. 주님의 사랑의 욕심.

 자, 그 남편도 - 우리가 그런 속성을 다 가지고 있어요. - 남편도 그 아내가  모든 것 다 형통하기를 원하는 때도 있지만 어려운 것을 원하는 때도 있습니다.

남편이 같이 가지 못하는데 그 아내가 어려움 닥칠까 해서 그럴 때는 남편이  없는 데는 아주 그 어려움이 없도록 형통케 하려고서 아내가 생각도 못 하는  것도 이것도 저것도 '아 그런게 무슨 필요 있습니까? 그거 안 가지고 갈랍니다.'  '아 그거 이럴 때 이럴 때 다 필요가 있으니까, 쓰일 터이니까 자꾸 아내가  모르는 것도 준비를 해 줍니다. 다 준비를 해 가지고 이렇게 하지만 남편이 있을  때에는 준비를 안해 줍니다. 안 해 주면 어려우면 '아이구 큰일났습니다. 이거  죽겠습니다.' 이러면 '허 괜찮아.' 턱 권위 있게 한번 척 권위를 써 가지고  해결하면 '아이구, 당신 하나면 다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서, 그렇게 해서, 당신은 일단 정신이 그것이오. 우리에게  '당신 한 분이면 다다. 당신 한분이면 다다. 모지랄 것 없다.' 내 전부를  당신에게 다 기울이는 그것을 원하십니다. 왜? 그것이 영생이오. 우리 전부를  하나님에게 다 기울이시고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만 의지하고 당신에게 복종하면  영생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형통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평안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건설구원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터인데, 이 건설구원을 얼마나 쉽다고 생각해 가지고서 자기가 하고 싶은  욕심대로 다 하고, 하고 싶은 욕심대로 다 하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자기 재미 볼 것 다 보고, 자기 볼일 다 보고, 자기 취하고 싶은 것 다 취하고도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아. 다른 것 다 됐는데 한 가지 부족한 그까짓 거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도다.' '있으니 가서' 요지를 침으로 쩔렀습니다. 요지를 딱  찔렀소 이러니까 고만 도망을 쳤습니다.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고 부자가 모든  백방의 노력으로써 어릴 때부터 노력해서 다 갖추었는데 한 가지에게 딱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 말이오. 한 가지에게 딱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을 몰랐어. 다 했으니까 주님이 사랑했습니다. '잘 했다 잘 했다 잘 했다 잘  했다. 다 잘했다 했습니다. 잘 했다 했는데 아직까지 해결은 안 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건설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고 하나에게 마쳐 가지고 있다 말이오.

그러면, 이제까지 한 것은 아닌 것인가? 이제까지 한 그것이 현실 현실에서 다  그것은 건설구원을 얻었습니다. 얻었지만 아직까지 다는 아니라 그 말이오.

 이래서, 고 사람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는 고것을 딱 말하니까  이제까지 영생 얻는다고 모든 것 노력했지만 고 한 가지의 중량 이 영생  중량보다 더 무겁기 때문에 영생을 박차고 주님을 박차고 이제 고 한 가지  고것을 따라서 갔다 그거요. 따라갔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경주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거 자연 제시인데 - 편씨름을 합니다.

 이래서, 그 편씨름 할 때에. 일학년이면 일학년 이학년이면 이학년 편 씨름을  하니까, 뭐 요새는 몰라 그 몰라. 그때는 우리는 왜정 때라. 왜정 때라서 빨간  모자 쓴 것은 아까(あか)고, 또 흰 모자 쓴 것은 시로(しる)인데, 이래 가  하면'아까까쯔 요우너'(あかかつよりに) 하고 또 '시로 가  선요우니(しるかつよりに) 시로까쯔요우니' 이기라고 이래 막 이래 만세를  부르고 막 손뼉을 치고 이래 쌓습니다. 이 씨름을 하면 하나하고 둘이 씨름 해  가지고 하나가 탁 그 붉은 모자 쓴 편이 이겼다 그 말이오. 또 흰 모자 쓴 편이  이겼다 말이오. 이기기는 이겼어. 이겼으니까 이제 차차 차차 자꾸 많이  이겼으니까, 이겼으니까. 많이 이겼으니 승리가 되어 있지 않소? 오십 명인데.

오십 명인데 밑에 사십구 명은 다 이겨 버렸소. 사신 구 명은 다 이겨 버렸고  이편에는 사신 구 명이 다 졌다 그 말이오. 다 졌어. 다 졌는데 마지막에 대장이  하나 있어. 대장 이게 하나 떡 나오더니만 저거 편은 사십구 명이 다 졌는데  그만 이게 들어서 당장에 오십명을 전부 다 이겨 버렸습니다. 그라면 어느 편이  이겼습니까? 어느 편이 이겼소? 이것을 가리켜서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될 자 많으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구속 안 되는  것 아니오. 개별적으로 구속이 돼서 그 하나 하나가 이겨서 이긴 것은 구속 이  됐지만 마지막이 어찌 되느냐? 마지막이 어찌 되느냐? 요 마지막에 하나를  버리지 못한 것.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라.' 하나 요것을 버리지 못한  고놈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고만 전체가 다 실패가 됐다 그 말이오.

 '네게 오히려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을, 그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나한  자에게 줘야 되는 것 아니오. 고게 속에 겉으머리는 재산이지만 서도 고 속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속하지 못하고 그것에게 속해  가지고서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있기 때문에 그놈이 왕이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놈 따라가고 그놈에게 속해지기 때문에 그게 안 됐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게 문제이니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얼마나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번에  우리가 알고 갑시다. 이 건설구원을 너무 쉽다고 봅니다. 이러니까 이 모두 다  우리 교인들이, 우리 교회들이 이 건설구원 이루는 것 자기가 자기를 압니다.

자기 꾀 다 쓰고 이리 저리 감아 붙여서. 이렇게 감아 붙이고 저렇게 감아  붙여서, 교회의 돈을 안쓰는 것 같고 월급은 조그매 받지만 요 구멍으로 통해  가지고서 쏙 잡아 빼 조 구멍으로 통해서 잡아 빼니까 십일조가 많이 나오지만  그 돈은 전부 그 사람이, 교역자가 홀끈 다 쓰면서도 교역자 사례는 몇 푼 안  받는다 그 말이오, 그 거 모양으로 요 꾀, 복술, 요 복술 꾀를 써 가지고서  주님을 위한다고 이렇게 대외 간판은 떡 붙여 놓고 속에는 요렇게 자기 욕심  취하고, 자기 주관 취하고, 자기 취미 취하고, 자기 애정 취하고, 자기 소유  취하고, 자기 영광 취하고 다 취하고 이제 꾀로 써 가지고서 이와 같이 하고  있으면서 이것이 구원인 줄 알고 복음 운동이라고 하면서, 순전히 자기 간판  운동 우리는 주님의 소유를 취하는게 우리 것 아니오. 우리는 주님이 만드신  만물을 우리가 취하는 것이 우리 것 아닙니다. 나만 주님의 것만 되면 됩니다.

나만 주님의 것만 되고 주님은 내 주님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요게서 해결이 다  되는 것이오.

 이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내 주님이 되었으면 내  머리가 되어지면 이제 모든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다 자기 것이 되어지는  이거, 그 일체성, 이 단일성 이것을 우리가 똑똑히 파악을 해서 해야 될 터인데,  모든 것 다, 세상에서 돈에 만치도 수지를 바치지 안하고, 돈을 취하기 위해서  만치도 수지를 바치지 안하고, 자기 직장에 만치도 수지를 바치지 안하고, 또  자기의 가정 만치 수지를 바치지도 안하고 전부 다 그런데 수지는 다 바쳐  버리고, 냄새나는 더러운 찌꺼기 이것만 주님에게 바치면서 고거조차도 주님에게  바치는 듯이 과장과 외식을 해 가지고, 어리석은 자를 끌어다 놓고서, 이 병신을  끌어다 놓고 성전 출입은 한번도 시키지 못하고 출물꾼으로 이것들에게 출물을  시키기 위해 가지고서 '요라면 누구가 좋아할 것이고 누구가 좋아할 것이고'  사람의 감정을 일으켜 가지고서 이제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까지 솔박 삼켜서  자기가 삼킬라는 요자가 뭐이냐? 데살로니가서에 말씀하신 대로 성전에서 내가  하나님이라 하는 자가 그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리요. 이리요.

이것이 절도요 강도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 한 자는 절도요  강도라 말은 주님의 것이 되지 안한 자는 땅위에서 절도와 강도 노릇한다  그말입니다.

 주님의 구속의 것이 되고, 사죄의 것이 되고 칭의의 것이 되고 화친의 것이  되고, 주님이 세 가지 죽이는 그 일을 위해서 당신이 죽으신 그 죽음에 연결되고  세 가지로 살기 위해서 당신이 죽은 그 죽음에 연결된 것. 예수님은 무죄자로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의로운 자로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살리기 위해서. 이 세 가지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죽었고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당신이 죽으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죽음에 동참을 해야 이제 그리스도의 이 부활하심에 연합돼 가지고서  새생명이 이제 자라게 되는 것인데, 새생명이 나기는 낮지만 이 두 가지 죽음을  먹어야 자랍니다. 이 두 가지 죽음을 먹지 안하고는 자라지 않습니다. 다른 것  먹고는 자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죽음을 먹고야 자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죽음은 새사람의 밥이오. 새사람의 양식이오. 이 새사람의 거처할  처소입니다. 그게 없으면 새사람이 거처할 곳이 없소. 그게 없으면 새사람이  먹고 자랄 양식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있다 마지막에 다시 살린다'  하는 것은 영생을 현실 현실에서 이루어 가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외식을 이번에 완전히 떨어 버립시다. 우리가  건설구원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 이 건설구원을 이루면서 땅에 있는 일을 하나도  물샐 틈 없이 땅의 일을 하나도 물샐 틈 없이 고것을 다 해서 구비해서 옛사람  자기에게 만족을 누리고 난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서 이 건설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어짜든지, 누구든지 이 건설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데에는 있는 것을 다 바치지 안하면 안됩니다.

 영생 얻는 것은 마음도 다하고 힘도 다하고 목숨도 다하고 뜻도 다하고 성품도  다하고 이러니까 다른 데는 보면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하는 것은 이를  위해서 내놓는다 그 말이오. 이 소유권을 내놓는다 그 말이오. 다하지 안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우리는 이렇게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의 정도의 어려움으로도 생각지  아니하고 '네기에 부족한 것 있다. 거기에 네가 매여 있기 때문에 너를 좌우하는  자가 있다.' 자기를 좌우하는 그 원수 자기 자기의 왕 자기, 자기를 붙들고 있는  그 자기, 고것이 가자 하면 '야 예수 내놓고 가자' '그래 가자.' '영생 내놓고  가자.' '가지 가자.' 그 가자 하면 얼마든지 복종하는 이런 우상을, 이런 우상을  자기 속에 얼마든지 두고, 그러기 때문에, 요한 일서 5장에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절에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삼가 우상을 멀리 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삼가 우상을 멀리 해라.' 자기 속에 우상을 두고서 우리가 속는 일 되기  쉽습니다.

 어짜든지 이번에는 외식을 떨어 버립시다. 외식을 버려야 됩니다. 이 외식을  버리는 데에는 건설구원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 어려우니까 인간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절대 불가능한데 다만 예수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이 있으니 그 약속이 뭐인가? 우리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무엇이 오는가? 기도하면 '밤낮 구하는 자에게' '밤낮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시고 진리가  오십니다. 이 진리와 성령은 우리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왔습니다. 이래서.

제가 이 집회할 때에 항상 시간마다 처음에 내가 여기 나와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다를 때도 그 기도하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이 공로가 나를 붙드시고, 이 공로로 말미암은 영감이  나를 붙드시고, 이 공로로 말미암은 진리가 나를 붙드시고 이 셋이 하나 되어서  이 시간 증거해 주시옵소서. 이 셋이 하나 되어서 나를 값으로 사서 이 셋의  것이 되었으니, 셋의 것이 되었으니 셋이 쓰셔서 증거해 주시고, 듣는 모든  형제들도 다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것이오니 주님의 피와 피로 말미암은 영감과  피로 말미암은 진리가 하나되어 다 이 셋이 하나된 이 셋의 것이 되어 듣게  하시고. 셋의 것이 되어 증거하게하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하고  옛사람은 죽여서 매장하고 새사람으로 완전히 장성함을 얻어 주의 영광의 찬미가  되는 이 실상을 이루어 가도록 주의 의와 이름을 위해서 이루시옵소서' 하는  것을 제가 늘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이 건설구원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공부  했습니다. 요기에 요긴한 것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이런데.

우리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뭐 부족한 것이, 부족한 것은 무슨 부족이냐  하면 무슨 부족이냐 하면 주님에게 복종할라 할 때에 복종치 못하게 하는 그것이  있다 그 말이오. 주님에게 복종할라 할 때에 그것 때문에 복종을 못 하게 돼.

그것 때문에 복종을 못 하게 되는 그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우리들입니다. 이  사람은 한 가지만이, 주님에게 복종할라 할 때에 복종치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소.

 또 주님만을 의지할라 하니까 의지 그거를 자유로 의지하고 싶다고 의지 되는게  아니라 의지할라 할 때에 세상이 협박을 합니다. 주님만 의지 못하게 하요. 못  하도록, 세상 의지하라고 협박을 하고. 주님만 바라볼라 할 때에. 첫째는 자기가  자원해서 스스로 그와 같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됩니다. 처음에는 돼요. 마귀들이 '뭐 그 까짓 거 죽은 것이기 때문에  단속할게 뭐 있나?' 이러니까 처음에는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것이  마음대로 됩니다. 처음에 믿을 때는 되어 지요. 처음에 믿을 때는, 우리가  경험이 그런 경험이 있어. 나도 처음에 믿을 때는 척척 돼. 처음에 믿을 때는  되어졌는데 차차 차차 이것이 어려워집니다. 할라 하니까 옆에서. 내가 나만  하고 싶으면 했는데 이제는 나만 하고 싶어도 하는게 아니라 못 하게 방해하는  것이 많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나중에 가서는 이거 할라 하면 참말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내 놔야 되지 안 내어 놓으면 안돼

 다 내어 놓으면 이제 이 세 가지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것이 되는데 다  내어 놓고 난 다음에는 또 뭐이냐? 다 내어 놓고 난 다음에는 이 소스락 벌거지  이놈이 무서워, 소스락 벌거지 이놈이 무서워요. 소스락 벌거지라는 놈은 사소한  것. '뭐 이까짓 거야 뭐 내 목숨까지 다 내어 놓고, 뭐 죽을 것도 결정 지웠고  다 모든 것 다 내어 놓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나?' 이랬는데, 그렇게 시뻐  봤는데. 그 '까짓 거 가랑비 오는 거야' 했지만 나중에 보니까 젖는 줄 모르게  옷은 다 젖어 가지고 있는 거와 마 차 가지로 사소한 그런 것. 사소한 데에  조심을 하지 안했는데 고게 들어서 차차 차차 하나 들어오고, 하나 둘 들어와  가지고서 자기도 모르게 그거에게 점령을 당하고 있더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충성되다. 지극히 작은 불의를 네가 용납하면 지극히 큰 불의를  네가 용납하게 된다' 지극히 작은 것 다 바친 사람은 이제는 뭐이냐 하면 다  바친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에 주의를 해야 됩니다. 처음에 초보에는 큰 것에  주의해야 되지만 마지막에는 이제 큰 것을 다 정리하고 난 다음에는 작은 것에  대해서 주의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이래서 요새는 뭐 바이러스균이, 그전에는  아메바(am○eba) 균이 제일 작 다 했는데 요새는 바이러스 균이 작다던가?  그놈이 작기는 제일 작은데 두렵기는 제일 두렵답니다. 그놈이 무섭기는 제일  무섭대요. 그것이 다 자연 계시입니다.

 그러고로 이번에 우리가 건설구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을 우리가 알고 허투리  시뻐 보고 이래 가지고서 뭐, 이 건설구원에 방해되는게 얼마나 있는데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는 고것을 말하니까 고만 그 사람은 주님도  버리고 영생도 버리고 이제까지 일생 동안 준비한 것도 집어 던져 버리고 그만  근심하면서 가 버렸습니다. 근심하면서 가 버렸소.

 우리가 앞으로 이 씨름하다가서 마지막에 대장이 하나 이기면 되는 것인데  이제까지 다 졌소. 다 졌소. 이제까지 일생 생활을 다 졌지만 마지막에 최고  승리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주께 바쳐서 바치는 그 사람 이 되어지면  마지막으로 승리할 수 있는 그것이 있는데. 그럴 때에, 그럴 때에 이제는  이제까지는 패전을 했지만 이제까지는 패전을 했지 만 최후 결정선이 되어지는  고때에 이제 '이제는 내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일을 하겠다'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때에 '네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래? 할 때에 아이구. 그것을 이거 어떻게 하노?'  그때 고민스러운 고 놈이 들어 가지고서 고것을 못 하게 해서 이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제 영생도 주님도 배반하고 달아나는 사람이 된다 그거요.

 거창 와 가지고서 어떤 목사님이, 그분이 아마 세상을 떴을 것입니다. 연세가  벌써 한 구십이 됐을 터이니까, 떴으니까 제가 말을 합니다.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인데, 그 목사님이 감옥에 가셔 가지고서 이 신사 참 배 안 하려고 같이  있다가 불과 한 육 개월인가 오 개월인가 남기고 난 다음에 그 사모님이  면접하러 와 가지고서, 이제 마귀라는 놈이 꼬았습니다. 면접하러 와 가지고서  '여보. 당신이 이렇게 와 가지고서 감옥에서 수고하시니 우리야 집에서 뭐  어떻게 고생한다 해도 좋습니다. 좋기는 좋지마는서도 참 분하기는 분합니다.

교인들이 저 벌써 딴 목사가 와 가지고서 교인들을 점령을 해 가지고서 그  목사의 사람들이 돼 가지고 뭐 우리 가족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압제를 하고  천대를 하고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 이 일본 사람들하고 하나가 돼 가지고  앞잡이가 돼 가지고 우리 가족들을 어떻게 천대하는지 자식이 이렇게 고생을  합니다. 천대를 합니다. 우리가 고생을 합니다. 천대합니다.' 경제적으로  무엇으로 이렇게 천대한다는 말을 자꾸 이래 하니까 살살 속에 이제, 정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되는데 요 정 요놈이 살아 있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차차 차차 요놈이 떠들고 일어나 가지고서 '그래, 응 그래도 뭐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지만 자꾸 그런 말하고 갔단 말이오. 갔는데, 그 아내가 또 얼마  있다가 또 와 가지고 지금 이렇고 이렇고 자꾸 지금 약을 또 올립니다.

 약을 올리니까 이제 거석해 가지고서 '그럴 수가 어디 있는가? 참 괘씸 하구만.

그래 뭐 나는 뭐 그래 그럴 권리 없어서 그러나? 내가 지금이라도 나가면 그까짓  목사 쫓아내 버리지. 쫓아내고 내가 들어서서 내가 하지.' 그만 그 투쟁이,  전투가 죄로 더불어 싸우는 이 전투의 시선이 달라졌다 말이오. 시선이 달라져  버렸어. 고만 거기다가 전투하지 안하고 정으로 기울어져 가지고서 전투의  대상이 그만 이 교인들과 이 교인들의 압제 주는 그것이 전투의 대상이 되고  말았어.

 이러니까, '그래, 알았소. 가시오. 내가 처리할 거야.' 떡 그라고 난 다음에  일본 나라에 반대 되니까 처리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럴 때에는 일 본 나라의  권세를 짊어지고 거기에 들어붙어야 되겠다 말이오. 턱 가고 난 다음에 이제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마귀라는 놈이 속에서 자꾸 분발시킵니다. 자꾸  분발시키니까 그만 못 견뎌서 마지막에는 '그래, 나도 이 가족들이 이러니까,  가족들이 이러니 이 가족들에 대해서 이럴 수가 어디 있습니까? 좀 안보를 해  주십시오. 좀 어려움을 좀 면케 해 주십시요.' 이러니까 '아, 목사님. 그  가족들을 우리가 그랍니까? 그 교인들이 그라지요. 이러니까 목사님이  지금이라도 나가시면, 우리야 목사님 편 아닙니까? 목사님 편이 돼 가지고서 그  뭐 당장 있는 목사 쫓아내 버리고 목사님이 그 강단 차지하시고 거기에서 또  있지 뭐. 우리가 또 배후로 밀어주고 하면 그 교인 그까짓 거 다 싹 목사님 앞에  다 굴복하고 다 목사님 사람 될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그 목사님 승리도 좋기야  좋소. 우리가 존경은 합니다. 하지만 또 가족들 구원도 생각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자꾸 이래 합작 이 돼 가지고서 그만 이거 합병 정세가 나왔다 그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이러니까 그만 할 수 없어서 육 개월 남겨두고 나왔어요.

육 개월 남겨두고 자복하고 나왔어요. 그 때, 육 개월 그때에는 아무 뭐  고행이나 고문이 나 그런 거는 없습니다. 없는 때요 그거 다 지나간 때인데 이  마지막에 애정 고것이 하나 남아 있어 가지고서 고놈 때문에 툭 튀어 나갔다  말이오.

 이 부자에게 재물을 애착하는 고거 하나 있어 가지고 그리 된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오히려 부족한 것 한 가지 있다 두 가지 있다 우리가 이것을 살펴서  고것을 잘 정리해서. 주님이 고것을 평소에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요럴 때 조럴 때 요것이 나타나 가지고서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자기를 삼가서 자기 속에 우상이 없어야 됩니다. 또 정과  욕심. 욕심을 그만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되고 정을 죽여다 되지 정을  남거두면 정 그놈이 우리의 감정을 이용해서, 참 무서운 것입니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으로 할 수 없는데 '밤낮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것 아버지의  성령은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우리의 해결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것을 깨닫고, 어렵다는 걸 깨닫고 이 구원이 이 세 가지가  되면 어제 5가지 복을 얻는다고 하지 안했소? 거기에 병 낫는 것도 다 들었소.

재산도 경제도 다 들었소. 자유도 다 들었소. 평강도 다 들었소. 쾌락도 다  들었소. 능력도 다 들었소. 다 들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바꾼다는 것 이것만. 세  가지만 바꾸면, 이 세 가지 바꾸면 다섯 가지 얻어지는 이것이 얼마나 보배라는  이 가치성을 우리가 깨닫고, 다음에는 이 가치가 귀한 보배지만 이것을  사람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인데 다만 기도로만 할 수 있다 하면. 이 다섯  가지의 보배성을 보배성을 아는 사람은 이 보배를 얻기 위한 세 가지 바꾸는  일은 기도만이 할 수 있다 하면 기도의 사람이 안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안될 수 없다.

 어제 제가, 여기모두 광고하기를 '일곱시 되면 여기 모아 가지고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시다. 이랬는데 여기 몇은 보니까 없어. 여기 엠프하는 그 사람들  내가 뭐 쓸라고 보니까 없어서 '기도하러 갔는가?' 이랫는데 여기 보니까 널펑이  누웠지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안해. 여러분들이 지금 아직까지도 이  건설구원의 어려움을 모른다 그 말이오. 이렇게 말해도 건설구원의 어려움을  몰라요.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바꾸어야 되는데 세 가지  바꾸면 하늘과 땅과 영과 육의 모든 것이 성공입니다. 모든 것이 성공이오.

 이러니까, 이 5가지의 보배성을 가치성을 아는 사람이 다섯.가지의 소욕을  욕심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냐? 성령의 소욕입니다. 이 다 섯 가지의  욕심을 가지는데 이 욕심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도 이제 이 5가지는 취해야  된다. 이 5가지는 내 소유와 몸과 생명보다도 더 가치가 높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것을 주고라도 이것을 바꾸어 가져야 되겠다고서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을  가질라고 하면 세 가지를 바꾸어야 되다. 바라보는 걸 바꾸어야 되고, 의지하는  걸 바꾸어야 되고, 복종하는 대상을 바꾸어야 된다. 자기에게 능동이 자기가  능동되지 말고 하나님은 나의 능동되고 나는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이것이  되어져야 된다 이 세 가지를 바꾸어야 되는 것이니 이 세 가지를 바꿀라고 하면  인간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니 이거는 기도로만 할 수 있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해서 그 기도의 그릇이 차 가지고서. 이 성령이 오셔야  된다. 진리가 오셔야 된다. 이래서, 내가 진리의 것이 되고 성령의 것이 되고.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차차 내가 진리의 것이 되고 성령의 것이 되어서  진리와 성령은 나를 딱 잡고서 나는 진리와 성령에게 볼끈 매여서, 이 진리와  성령의 쇠사슬에 볼끈 매여 가지고서 꼼짝 못 하고 진리와 성령이 끄는 대로  끌려갈 수 있는 완전히 자유가 정복을 당한 이 사람이 되어질 때에 되어지는  것이니까 이거는 기도로 된다 하는 것인데. 어제도 보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제가 있는 서부 교회에서는 얼마 몇 해 전에 기도에 대해서 저녁마다 와 가지고  기도하기로 해 가지고서 그때에 기도를 할 때에 교회가 다 부흥이 됐습니다. 또  그때에 이 환난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얼마나 안정이 됐든지  남침이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문제가 없다고 작년에 여기에서 집회할 때에 내가  그 설교를 했는가 싶습니다. '이제는 남침 염려는 없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기도 안 해도 된다.' 이래서 그때는 남침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남침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랬는데 지금은 또 위험성이 차차 차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신문에는 내지를 안하지만 지금 여기 소련은 그 세력이 강한데, 그 들은 지금  오지 말라 하는데도 저거 마음대로 오고 있습니다. 이북에 있는 그 모든  일본해에 가까운 그 모든 항구는 다 소련 배들이 다 정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련배 그 점령한 그 배만 하면 이 남한은 뺑 둘러 해변을 꼭 뺑둘러  쌀 수 있답니다. 뺑 둘러 쌀 수 있대요. 그렇다고 놀랄 것은 없어. 우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이리가 설치는 것어지 이리가 그 주의 양을 생명을 삼키지는  못해요,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만 하면 돼.

 이래서 다시 기도를 시작한 지가 언제부터 시작했지요? 작년 9월 22일부터  시작을 해서 기도록에 등록을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록에  둥록하고서 기도하는 사람의 수가 ○○○ 선생, 얼마입니까? 지금 얼마? 등록수.

오천 칠백 오십 삼 명이 등록이 되고 예배당에 와 가지고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 한 육백 명 칠백 명 되고 나머지기는 자기 처소에서 와서 기도하고 산에  가서 기도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앞으로 올 환난을 위해서. 또 이 건설구원을  위한 이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주시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성령은 물건 모양으로  내가 받는게 아시고 '성령을 받으라' 그 말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것이지,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에게 내가 전령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렇게 건설구원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앞으로  환난에서 생명을 바친다고 해 가지고 승리하는 것 아닙니다. 목숨을 내 놓아도  승리 못 하요. 목숨을 내 놓는다고 해도, 죽어도 비겁에서 죽고, 죽음에서도  원망과 불평과 두려움에서 죽고. 죽음에서도 예수님 다 내어 놓고 죽습니다.

이런데, 그때에 고통 당할 백분의 일만 오늘의 기도에 바 쳐도 넉넉합니다. 왜?  매일 기도하니까, 매일 조그매씩 조그매씩 이래 모아도. 티끌 모아 태산같다고  그렇게 미래를 위해서 자기가 이 어려움을 당하는 어려운 이 기도를 이렇게 해서  그 어려움 당한 이 어려움을 모아 놓고 보니까 생명이 딱 끊어지는 어려움보다도  더 중량이 무겁더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오늘에 우리가 이 기도로써 성령을 영접해야 되는데 도무지 기도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오늘도 열시까지 우리가 머무니까 어서 잠깐 밥을  자시든지 그리 안하면 자시지 않고 가서 기도하든지 기도해서 이번에 받은 이  말씀을 다 새김질해 가지고, 말씀을 새김질해서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힘이라야  되고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간절이라야 되고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  감동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도 세 가지 요긴한 것을 말해  줬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데에 세 가지로 찾는다, 세 가지로 찾는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세 가지로 가까이 간다. 세 가지로 가까이 가는데 이것은 이런 단점이  있고 저것은 저런 단점이 있고 저거는 저런 단점이 있고 단점들이 있다. 그  단점들을 이것을 다 치료해서 이 단점들을 다 제거해서 바로 하는 데에는 하나  방법이 있으니까 그 방편은 무엇이라고 했지요? 무엇이라고 했지요? 실행입니다.

실행이 그 위험성을 다 제거하고 방비하는 그 방편입니다.

 이러기에, 그랬으니까 우리가 이 배운 말씀을 자꾸 새김질합시다. 새김질해서  이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은 몰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귀중한 말씀을  지금 주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고, 왜 녹음을 편집실에 청하면  녹음을 해서 그 테이프 값만 받고 녹음하는 그 사람의 인건비는 얼마 안 될  터이니까 약간 해 가지고서 그래준다는 말은 무엇 때문에 난 말이냐 하면.

여기에서 녹음하느라고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자기가 이 영감을 받지 안하고  권능을 받지 안하고, 이 말씀-을 받을 때에는 영감과 권능과 진리 이 세 가지가  한목 가 가지고 거석하면 변화시켜야 되는데 녹음 하느라고 마음에 마귀라는  놈이 수지는 녹음이 다 따먹고 있다 그 말이오. 있으면 '이 테이프가 언제 딸칵  거릴 때에는 이거 바꾸어야 되겠지 하는 것. '그거 얼마 지나갈 터이니까  딸칵하는 그거야 한참 있다 그렇지. 이렇지만 우리가 속습니다. 마귀는 거기에서  벌써 계획하고 있어 딱 하는 그 때 내 마음은 녹음에 가 가지고 있습니다.

녹음에 가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게 있지 안하요. 또 녹음에 가 있다가도 그라고  난 다음에는 녹음에 가 있게 하고 녹음에 가서 있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  마귀의 술책이 뭐 입니까? 졸게합니다. '못 들어도 녹음에 있으니까, 못 들어도  녹음에 있으니까,' 녹음이 완전히 하나님 대신 우상이 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녹음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얼마든지 청하면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여기에서 녹음할 사람이, 녹음할 사람이 은혜 받기 위해서,  녹음은 여기서 책임을 지니까 녹음을 하지 안하고 이렇게 은혜 받는 사람들에게  한해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한해서 해 주는 것이오. 녹음 안 가지고 온  사람은 그 사람이야 뭐 애초부터 녹음을 안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해  줄 시간이 없고, 또 녹음을 하면서도 혹 대조해서 알아보자 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에게도 필요가 없고. 그거는 각자의 양심에 맡겨서 그와 같이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성신의 감화와  권능에 있기를 내가 원한다.' 그것 때문에 노력을 한 것입니다. 이미 한번 아는  그말이야 줄줄 하는 것이야 뭐 힘들 것이며 뭐 기도랄 것이 뭐 있으며 뭐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가 애먹는 것. 설교자가 애먹는 것은 뭐이냐  하면 자기가 전할 때에 진리의 능력과 성령의 감동과 자기가 말하는 그 말이  함께 역사하는. 감화와 능력과 그 말씀의 진리가 함께 역사하는 그 역사가 있고,  이 테이프 모양으로서 자기가 이렇게 사람의 말만 전하는 이런 일리. 그런  외식이 되지 않기 위한 그것 때문에 설교자가 애를 먹는 것입니다. 참 설교자가  바로 하면 일 중에는 제일 된 일이오. 목회 가면 그만 목회 가 가지고 병이  나다시피 마르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목회를 그대로 하고 목회 가 가지고서  이제는 아무 간섭하는 시어머니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이제는 여기에서 소골에 왕  노릇하는 것 이니까 거기에서 큰 소리나 떵떵 하고서 이래 가지고서 요리 빼내고  조리 빼내서 양의 젖이나 짜 가지소서, 양은 지금 먹이지는 안하니까 곯아  떨어지든지 말든지 자꾸 요래 짜고 저래 짜고 젖만 흘쳐내면 양은 턱 자빠져  가지고서 넘어집니다. 이러니까 교회가 안 되지.

 그라면서 살이 띵띵 쩌 가지고서 아무 설교, 장 하던 것이니까 그대로 하면  되는 것, '뭐 그대로 하는데 은혜 있는 설교도 있고 은혜 없는 설교가 뭐  있는가?' 속에 권능이, 성신의 감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또 '성경 아는 사람이  성경 가르치는데 뭐 거석할게 뭐 있어야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쉽소. 성경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설교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증거하라는지  저 말씀을 증거하라는지가 문제라 그 말이오. 성경 말씀을 인간 주장대로 택하면  인간 말이 되고. 하나님이 택해서 하시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지체가 되어서  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도 하나님 말씀을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택해 가지고서 이용하지 안  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점이 어렵다 그거요.

 그러고로 이제 열 시 넘었으니까 그동안에 어짜든지 이 말씀을 저게서 부터  깊이 깊이 생각해서 자꾸 새김질하고, 깨닫지 못 하는 것 있으면 자꾸 알라고  애를 쓰면 고 들은 말씀이 발견되어서 나옵니다. 나오지 못하며 나오지 못하면  자기가 그만침 어두워졌다 그 말이오. 어두워지니까 깨기까지 자꾸 애를 쓰면  나옵니다.

 과거에 그 신사 참배 때에 옥중에 있는 종들 말을 내가 들었는데 거기에서  찬송가를 하나도 별로 외우지도 못하던 분들이 가 가지고서 찬송가를 눈을 감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해서 육 년 동안에 찬송가를 자기가 찬송가 안보고,  찬송가를 못 보니까, 안 보고 자꾸 이래 명상으로 생각하고 깨닫고 깨닫고 이래  가지고서 뭐 삼백 장 외운 사람 사백 장 외운 사람, 뭐 또 어떤 사람은 이백 장  외운 사람. 그래 자꾸 이러니까, 자꾸 애를 쓰니까 주님과 가까와지니까 찬송은  다 거기 있는 것 아니겠소? 성경 거기 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요새  양성원에서는 외우는 일을 자꾸 많이 하라고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 읽어서  그만 치워 버리기 때문에 외우면 조금 달라 외우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기억 안  나는 것 자꾸 기억하려고 하면 자기와 하나님과 그래라도 좀 애터지게 좀 가까워  질까 해서 그런 방편을 지금 학생들에게 시키고 있습니다.

 네 이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도할 분은 기도하고. 산으로 갈 분은 산으로 가고. 강변으로  갈 분은 강변으로 가고, 자기 천막으로 갈 분은 천막으로 가고, 가서 어짜든지  이번에, 이제 몇 시간 했습니까? 월요일밤, 응? 다섯 시간. 다섯 시간 한 말씀을  자기가 새김질해서, 이 말씀에서 자기가 변화됩니다. 이 말씀에서 결심이  생기고. 이 말씀에서 확신이 생기고, 이 말씀에서 담력이 생기고. 이 말씀에서  욕심도 바꾸어져야 되고. 취미도 바꾸어져야 되고, 모든 평가도 바꾸어져야  됩니다. 이 말씀에서 과거에는 이것을 가치로 여겼는데 이 말씀을 새김질하고  보니 그까짓. 거는 가치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가치 있는 거는 따로 있다는  것, 이 주님이 가치 평가하는 대로 나도 따라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621 건설구원과 새 깨달음/ 에베소서 1장 9절-12절/ 820331수새 선지자 2015.10.23
620 건설구원과 신적요소/ 디모데전서 4장 6절-16절/ 820801주전 선지자 2015.10.23
619 건설구원에 대해 제일 힘쓸 일/ 사도행전 20장 29절-32절/880302수새 선지자 2015.10.23
618 건설구원을 이루는 방편/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80410주전 선지자 2015.10.23
617 건설구원의 시작, 과정, 결과/ 마태복음 13장 44절-46절/ 811101주후 선지자 2015.10.23
» 건설구원의 어려움/ 마가복음 10장 17절-31절/ 840509수새집회 선지자 2015.10.23
615 건축연보/ 마태복음 28장 16절-20절/ 820523주새 선지자 2015.10.23
614 게을 죄-설교준비/ 고린도전서 2장 1절-5절/ 861201월새 선지자 2015.10.23
613 게하시의 저주/ 열왕기하 5장 15절-27절/ 850521화새 선지자 2015.10.23
612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80705화새 선지자 2015.10.23
611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80701금야 선지자 2015.10.23
610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 880705교역자회 선지자 2015.10.23
609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41107수새 선지자 2015.10.23
608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12주새 선지자 2015.10.23
607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 880713수새 선지자 2015.10.23
606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10금야 선지자 2015.10.23
605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0금야 선지자 2015.10.23
604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2주후 선지자 2015.10.23
603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2주전 선지자 2015.10.23
602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90507주전 선지자 201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