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믿음

 

1984. 11. 7. 수새벽

 

본문 :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이 참 믿음이 보배다 하는  것을 깨닫고 '믿음을 좀 부요하도록. 믿음의 부자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간청했습니다. 이라니까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믿음에 대한 능력을 여기에다가 말씀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뽕나무는 나는 가 보지 안했지마는 주석들을 보면 거기에  있는 나무 중에 거기에는 뽕나무가 제일 큰 나무라 합니다. 이렇게 큰 나무를  네가 아무 사람의 공을 들이지 안하고, 인공을 들이지 안하고 뽑혀라 하면 그게  순종해서 뽑힐 것이요 또 바다로 옮겨져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심기워져라  하면 물 위에 심기워질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거는 다, 그런 뿡나무가 뭐 사람이 인공을 들여서 캘라고 하면은,  캐지지마는 여기에 인공을 들이지 안하고 그 뽕나무가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그것은 이제까지의 역사에 없는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또 그것을 옮기는  것도 물론 사람이 인력을 가지고 옮길 수 있지마는 옮긴다는 그것도 사람 손  대지 안하고 옮겨진다는 그 모든 것이 다 초자연의 역사입니다. 또 그것이  바다에 심기워진다는 것도 물론 인공으로써 바다를 메워서 육지도 만드는데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인공을 들이지 안하고 그 뽕나무가 큰 뽕나무가 물 위에  심기워진다는 것은, 그것도 다 초자연의 역사입니다.

 믿음은 초자연의 역사를 가진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 말씀하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모든 이제까지의 온 세상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세상에 이제까지의 노아 홍수 때까지를 다 말하면 약 육천  년이 돼 가는 인간 역사요 인간 통계인데, 인간 통계 인간 역사 그것이 세상인데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아무리 육천 년 동안 세상이, 세상의  통계가 이렇다 할지라도 그것의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이라도 의심치 안하고 그걸  단행할 수 있다.

 그러면 온 세상을 다 부인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진 것이 믿음이다. 또 역사에  없는 그런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모든 피조물을. 모든  피조물을 다 능가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하는 그런 것을 여기에 보여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면이 다 그러하지마는 하나 간추려서 말한다면 뽑는 것이나 또 옮기는  것이나 심는 거기에 대해서 이 모든 자연의 방법이나 자연의 그 정도나 자여의  그 힘으로가 아니고 전부 방편이나 능력이나 그 결과가 다 초자연적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사람의 이 자연의 무슨 힘으로 또 방편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결과가 아니고 그런 모든 초자연의 결과들을 다 맺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뽑는 데도 다 이제까지 역사에 없는 그런 것. 또 자연에 없는 그런 것  그런데, 뽑는 것이나 옮기는 것이나 심는 그것은 이 어떤 피조물이든지 그  피조물을 다 자유 자재로 그것을 지배하고 다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믿음의 능력은 모든 피조물을 자유 자재할 수 있는 그것이  믿음이다. 또 믿음은 이제까지 역사에 없는, 인간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  능력으로 새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인데 모든 것이 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 믿음의 능력인데, 특별히 뽑는 것  옮기는 것 심는 것이 세 가지를 들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이 구속  받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속을 받는 데에 뽑을  부분이 있고, 뽑아야 하는 그런 부분이 있고 또 옮겨야 할 그런 부분들이 있고,  또 영원히 심어야 할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이 모든 구속의 온갖 그 역사가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겨자씨 믿음이다. 겨자씨는 그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  생명은 모든 땅에 있는 그 지기를, 지기를 양식으로 먹고 사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모든 땅에 있는 이렀 기운 저런 기운 이런 요소 저런 요소 어떤  요소든지 그것에게 피해를 보지 안하고. 그것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그것의  세력에게 삼켜지지 안하고 다 그런 것들을 다 능가할 뿐 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으로 커지고 그것으로 강건해지고 그것으로 참 양식을 삼아서 먹을  수 있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다 하는 것을 말씀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피조물을 양식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지 모든 피조물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지 피조물들에게 피동되거나 또 억압 되거나 피해를  보거나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그런 위치에 있지 안하고 그런  것들을 다 양식으로 삼아서 먹는 그런 것이 믿음이다. 이 세상에 뭐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두려운 것이나 부드러운 것이나 악한 것이나 선한 것이나 마귀나  죄나 사망이나 저주나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어떤 것이라도  그런 것에게 지배를 받을 만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에게 삼키워질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런 것들을 다 초월한 것들이다 하는 그것을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한 말로 말차면 이는 피조물의 요소가 아니고 이는 창조주의 요소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모든 영계나 물질계나 있는 모든 피조물 그와 같은 그 유사  안에, 그 종류 안에 든 것이 아니고. 그 종류 안에든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동류의 것이 아니고 이는 다 창조주의 요소다. 영원 자존 자의 요소요, 전능자의  요소요, 전지자의 요소요, 창조주의 요소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이든지  피조물에게 제재를 받지 안하고 피조물을 다 통치하고 능가하고 그것을 그저  필요있게 이용만 하는 것이지 이용하고 다스리고 또 그것들을 다 복되게  숭상하고 할 수 있는 모두 자연의, 자연 그 이상의 것이다. 초자연의 것들이다.

 그러기에, 이 능력을 가진. 이 지능을, 지능을 가진, 이 가치를 가진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마는 특별히 신자에게 대해서는  뽑는 역사. 옮기는 역사, 심으는 역사 이 역사를 그렇게 초자연적으로 할 수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뽑는 것은 우리 속에 첫째로 옛사람을 뽑아야 되겠고 옛사람을  뽑아야 되겠고. 우리가 과거에나. 과거에 생활해 놓은 그 모든 죄를 뽑아야  되겠고 옛사람 뽑으면 뭐 그거 딧 뽑히기는 뽑히는 것인데 죄를 뽑아야 되겠고  악령을 뽑아야 되겠고 자기 아닌 자기를 뽑아야 된다는 이것이 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옮기는 것도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둘째 아담의 소속으로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다 가능하고, 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거,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옮기는 거, 모든 피조물 소속을 창조주 소속으로 옮기는  이런 것이 우리의 성화구원인데 이 성화구원이 다 가능하게 된다. 또 심기워지는  것도 하늘의 것을 우리 피조물들에게 심어서 신적요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의 속성 이 모든 신적 요소가 인적 요소 속에 와서  영원히 내주하실 수 있다 하는 이런 것이 다 가능하다 그렇게 여기에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가 옮기는 역사, 뽑는 역사. 심으는 역사도 다 이것이 초자연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의 자율이나 주관이나 인간의 인적  요소로 하는게 아니고 신적 요소의 그 능력으로 하게 된다. 이래서, 이 세 가지  뽑고 옮기고 심으는 이 일이 다 인적 요소로 되는 일들이 많은데.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은 그 시험은 믿음을 잘 연단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그러면, 믿음을 연단한다는 것은 마치 금을  연단한다면 금 속에 잡철이나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을 다 태워 버리고 순전한  순금, 정금만 만들기 위해서 연단하는, 연단을 통과하면 모든 잡것은 다 없어져  버리고 순금만 남는 거와 같이 이렇게 우리에게 모든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게  이렇게 하는 것은 믿음을 연단하기 위함이다.

 믿음의 고신적 요소로 된 완전성. 영원성, 불변, 완전한 거 불변한 거 영원한  거 이거는 영원히 없어질 수 없는 그런 모든 초자연으로. 초피조물로 초피조물로  된. 순전히 영원 자존자, 전지전능자. 완전자 그분의 것으로 그분의 것으로 없는  가운데서 우주도 창조됐고 영계도 창조됐는데 이 창조한 그분의 것으로, 그분의  것이 이 피조물 속에 와 가지고 그분의 것이 피조물 속에 와 가지고서 이루어진  그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뭐 피조물로서 어떻게 한다고 해도 피조물로 이걸  제거할라 하는 것은 피조물로 된 것이 피조물로 제거돼서 피조물 중에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제거하고 이래 하지 피조물이 다 달라들어도 제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다 피조물을 초월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요소의 것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능력도 전능의 능력으로 된 것. 전지의 지혜로 된 것. 또 본질과  본성도 하나님의 그 완전한 속성으로 된 거.

 그러면, 하나님으로 된 것인데. 하나님으로 된 것인데 하나님 본체로 된  것이냐? 하나님의 본체로 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본체가 우리에게 분류돼  나와 가지고서 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본체가 역사하는 그 역사로 된 것이다.

본체가 역사하는 그 역사로 된 것이다.

 이러기에, 우리가 이 중생된 것이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중생됐는데, 이 중생은. 일차 창조로 하나님께서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을 이  능력이 창조했는데. 일차 창조한 이 창조한 것들을 이것들을 다 하나님의 능력이  창조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이 일차에 창조하 이 창조된 이것들을 다 통치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이 믿음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된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자존하신 그분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힘인데. 이 힘은. 내나 영계와 물질계의 것을 창조한 그  힘도 하나님의 힘이요, 또 우리의 믿음 속에 와서 있는 역사하는 힘도 그 힘은  힘인데, 이 힘이 모든 창조 되어 있는 그 모든 그것을 능히 다 영원히 새롭게 할  수 있고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영원히 충만케 할 수 있는 그 능력이다. 다  믿음의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창조된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됐는데,  창조된 그 모든 것을 이렇게 보존하고 통치하고 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 역사하는 그 능력이 곧 믿음의 힘이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이거 다 신적 요소다. 신적 요소가 인적 요소 속에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그것이 믿음인데, 인적 요소 속에 와서 역사하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와서 대속의 공로를  위해서, 대속의 공로를 위해저 성령의 이 역사와 이 진리의 역사가 와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하는데 이 역사는 일차 창조의 역사를 통치할 수 있는 그 역사다.

내나 하나님의 역사는 역사지마는 그를 통치할 수 있는 그 역사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이 순전히 객관의 것이요 다 하나님에게 속한 신적 요소의  것인데 인적 요소의 것이 피조물의 요소의 것으로 되어져 있는 이런 모든  잡철들이 많다. 이 모든 유한한 것들, 다 변질될 것들, 다 불완전한 것들 이런  것들이 많아 이런 것들로써 믿음이 되어 있다. 이런 것들로 믿음 되어 있는 그런  것을 다 태워 버리고, 이 유한한 사람에게 무한이 들어오고, 이 피조물, 피조된  것들 속에 창조된 그 창조의 능력과 같은 능력인데 창조한 그 능력과 같은  그것도 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의 하나님의 능력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된  그것을 영원히 통치하고 보존하고 할 수 있는 그 능력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통해서 우리에게 와진 것이 그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여러가지 형편 사정을 자꾸 우리에게  바꾸어 오게 하는 그것은 이 피조물로 된 그 모든 그 유한한 그런 요소로 되어져  있는 그 요소를 다 불살라 버려서 이 피조물, 유한한 피조물을 다 능가할 수  있는 피조물을 영원히 통치하고 새롭게 하고 그를 온전케 할 수 있는 그 능력이  들어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만 남겨 두고 나머지기를 다 없애기 위해서  연단을 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겨자씨 믿음은' 하는 것은고 생명의. 생명성을 해석해서 생명성은  이 모든 땅을 이것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지 그거에게 속하거나 거기에 지는게  아니고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모든 믿음은  피조물들을 다 양식으로 삼아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 피조물에게 거기에  피해받는 그 이하의 것들이 아니고 그것보다 좀 아주 좀 차원이 높은 것들이다.

그런말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것이 다  과거사입니다. '있었더면' '믿음이 있었더면'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를  명하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이것도 다 과거사입니다. '그러면  또 그것이 순종하였으리라' 이것도 과거사, 다 필연성의 것이요 다  과거사입니다. 현재사도 미래사도 아니고 과거사인데 과거와 현재에 소속한  것인데. 그러면, 이 믿음이 어쩐 것이냐? 믿음이 뭐이냐? 그 믿음은 다 이런  결과를 맺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것이 믿음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이 피조물을 초월한 고차원의, 피조물을 초월한 요소의  것이 믿음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순전히 신적요소다. 이 피조물의  요소가 아니고 신적 요소다. 신적 요소가 피조물 속에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구속받은 자들을 이 대속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살렸는데, 죽은  영을 살렸는데. 이러기 때문에, 참 타락으로 죽은 것이 참 좋습니다. 일차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좋습니다. 죽기 전에는 그 생명이 범죄 안 하면 안  죽을 수 있는 그런 생명이었지마는 그것은 다 이 피조물적인 그런 요소였고 신적  요소는 이렇게, 신적 요소도 변동될 수 있는 그런 방편의 요소였습니다. 신적  요소는 변하지 안하지마는 그러기 때문에, 신적 요소가 임했다가 말았다가  이래서 구약 영감과 신약 영감을 달리 봅니다. 구약 영감은 외부적이요 또  중복적이요, 신약 시대의 영감은 내부적이요 영원 불변적이라 요동치 않습니다.

이런 면을 아마 발트가 이런 면에 좀 착안을 하고 나서 그분이 말하는 것이 위기  신학을 말하고 있는 거 위험한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안했나 그렇게 싶습니다.

 우리가 중생된 것은 이것은 순전히 신적 요소가 와 가지고서 우리를 중생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중생시킨. 우리의 중생된 중생을 시켜 우리를 살려낸 그  능력이 뭐이냐? 그 능력이 곧 성령의 능력이요 진리의 능력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능력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 능력이 처음에는 예수님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그 사활의 결과를 맺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도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으셔서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율법의 완성을 만족을 이루도록 그렇게  했고 또 사는 것도 지성과 지공의 그 율법, 하나님의 온갖 요소의 만족.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한 그런 생명으로 예수님이 살으셨고. 또 그 하신 역사도  소속한 자에게 대해서 하신 일이 완전 대속, 완전 구속을 이루는 그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 안에 와서 역사하던 그 능력이 내나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그 능력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내나 우리 안에도 와 가지고서 뭐 하느냐? 죽는 성공하고 사는 성공하고. 또  모든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점령하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지극히 존영한  위를 차지하는 그 일을 역사하고 또 그 역사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만족해서 주라 시인하여서 영광을 아버지께 돌릴 수 있는 그 일을, 첫 열매인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 속에서 역사 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능력이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외부적으로 말할라고 하면은 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는 이 말은 이 원인이 어데서 생겨졌느냐? 이 원인이  자존자에게서부터 출발해 가지고 또 하나님의 그 목적을 통과해서 또 하나님의  목적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통과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그 섭리를 통과해 가지고 온 줄기고 줄기고 줄기는 모든 피조물들을 다  통치할 수 있고 피조물을 지배할 수 있고, 피조물은 의례히 거기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피동되고 복종하고 또 피조물들을 이렇게 다 복종시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순전히 위에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성이 인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신적 요소의  그 능력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피조물이 그와 같이 돼진다.

 그런고로, 이는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돼 가지고서 가는 것이 아니고 절대자이신.

자존자이신 그분에게서부터 발원돼 가지고서 오는 이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발원되어 처음에 한 것이 창조의 역사를 하셨는데 이제 이는 창조의 역사 그  역사보다도, 내나 창조 역사는 창조 역사지마는 일차 창조의 것을 탁월한, 일차  창조의 고차원의, 일차 창조의 모든 것을 다 이것을 잘 보존하고 통치하고  영원히 복되게 할 수 있는 이 고차원의 신적 요소가 와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그러기에, 일차 창조된 모든 피조물의 주인공으로, 피조물의 중보자로, 그  피조물들의 모든 생명의 기관의 그 복의 기관으로 그렇게 되어져 있는 그 요소가  그것이 믿음이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으면' 하는, '그렇게 돼진다' 이라니까 이것을  잘못 깨닫고 그저 내가 믿음 의심 믿음 의심 이 의심에 대한 것도 좀 그  깨달음을 잘못 깨달아 가지고 믿음 의심 우리 주관이, 우리 주관이 의심하지  안하고 우리 주관이 믿기만 하면 돼진다 그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암만 믿어  봤자 그 믿는 거, 인간 주관이 믿는 거 그것도 내나 피조물의 요소인데 피조물의  요소 그것 가지고 암만 해 봤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자존자로 말미암아 시발된 이차 존재. 제 이 순위로 존재한 것이 하나님  목적이요. 삼 순위로 존재한 것이 예정이요 사 순위로 존재한 것이 창조요 이제  하나님의 의지 세계에서 이 순서가 돼졌고 또 인제 역사 세계에서 이 순서가  되어겼는데, 의지 세계의 순서로써 이와 같이 말하면 위의 자존자로부터 죽 목적  예정 창조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 이래 가지고 섭리 중에 하나가 대속인데 대속,  이래 가지고 중생된 자에게 내려와 가지고 지금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그게  내려온 그 줄기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하면 이는 모든 피조물들을 다 의례히  능가하는 것이요 피조불들을 다 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들이 다  고대하면서 탄식하는 것은 이 믿음의 역사들을 다 고대하고 있다. 이 믿음의  역사로 모든 것이 다 살아나고 그로 말미암아 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는 그 말은 이것을 벌써  과거사로 이미 기존된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있었더면' 이 말은 자존자로  말미암아 시발되어서 나온 것이 있었으면 그것은 모두가 다 그대로 다  이루어지고야 만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이라니까 믿음이 어디 있나,  믿음 이것은 참 지극히 큰 능력인데. 하나님과 직통이 돼 가지고 하나님과  직통이 돼 가지고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 속에 와 가지고서 일하시는 것인데,  일하되 무슨 일을 하느냐? 일차 창조의 그 모든 것보다도 탁월한 그 능력을  가지고 일차 창조의 것을 잘 보존하고 행복되게 하고 할 수 있는, 일차 창조의  능력이나 다 같은 능력이지마는 그 능력보다 더 고차원의 그 능력이지마는 그  능력이 더 높은 차원에서 역사한 그의 역사가 믿음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는  피조물 요소가 아니고 창조주 요소라. 그러기 때문에, 이 믿음은 이런 능력을  가진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고다음에 해석을 하기를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어떤 이에게 종이 있으면 밭을 갈고 양을 먹이고 이렇게 돌아오면 앉아서  먹어라 하겠느냐? 주인이 이제 의례히 할 일 했기 때문에 앉아 먹으라고 하지  안하고 주인 먹을 것을 예비하고 주인이 먹을 동안에 다 수종들고 그렇게 하고난  다음에 네가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또 그렇게 했다고 해서 칭찬을 하겠느냐? 또  그들이 '우리가 이렇게 많이 했으니까 참 대단히 주인에게 유익한 것을 했다'  주인이 네게 대한 모든 것의 평가보다, 주인이 네게 대한 모든 평가보다 네가  주인에게 대한 그 모든 행동의 평가가 앞서 가는 이런 일이 되지 않는다.

이러니까, 이렇게 죽도록 충성하고도 주인이 내게 대한 것은 그 평가가 가치가  무한한데 내가 주께 한 그것은 그저 하라는 거 했지마는 그 가치를 비교하면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참 무익하다 이 결론이 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양 먹이든지 밭 갈든지 하고서 와 가지고서 앉아 먹으리라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고, 또 거기에서  뭐 양 먹이고 밭 갈고 하는 이것은 순전히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들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된다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또 예수님을.

예수님의 모든 대속으로 말미암아 된 이 세 가지 역사가 그들 속에 가 가지고서  역사하도록, 내 속에 와서 이 세 가지 능력이 역사해야 이 능력이 그들 속에  가서 역사하도록, 피는 피로, 피는 피로 전해지고 성령은 성령으로 전해지고  진리는 진리로 전해지지 다른 걸로 안 되니까 나를 통과해서 된 것이 또  이웃에게 전해서 가지는 이것이 내나 양 먹이고 밭 갈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생활을 자기가 하는 가운데에서 '이제 이만큼 했으니 주인이 내게 대해서  대우가 오리라' 하는, '대우가 오리라' 이런 성질에 속한, 이런 성질에 속한 그  생애에서는 하나님의 이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올 수 없다. 지극히 큰  능력이 올 수 없다. 그렇게 하고도, 그렇게 하고도 또 주인의 먹을 것을 지금  찾고 있다. 뭘 또 오늘 낮에는 뭘 대접을 해야 될까 이거 뭘 해야 될까 이것을  찾고 있다. 그러면, 다른 말로 말하면 죽도록 충성 하고도 그 충성이 보이지  아니하고 또 죽도록 충성하고도 어떻게 충성해야 될까 하는 충성을 욕구하고  충성을 지금 갈망하는 요게서 요 사람으로, 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요걸  깨닫고 예수님의 대속이 그 값이 크니까 이렇게 하고도 장 뭐. 참 값에 비해서,  대속에 비해서 이거 아주 댓가 노릇을 하지 못하는, 값은 많이주고 사 왔는데  이것이 값에 비해서 너무 허무한 이것을 깨달아서 이렇게 느껴지는 고것이 다 이  겨자씨 믿음을 가져오는 방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믿음은 지극히 큰  능력인데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건너오는 데에는 물론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이미 있는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 베풀어서,  자기에게 은혜 베풀어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 생활을 한 그것은 자기에게 왔기  때문에 자기가 가담된, 하나님과 사람이 합해 가지고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와 가지고 있는 은혜 역사입니다. 은혜 역사에 거기에 대해서도 자기가  평가하기를 무익한 종으로 평가하고, 그분의 와서 역사하는 그 역사는 지극히  컸는데 내가 거기에서 삭감을 시켰고 내가 가로 막았고 이라니까 항상 자기에게  한 것이 보여지지 안하고 그렇게 그저 죽도록 충성하고도 충성에 대해서 갈급,  '충성이 모자란다' 충성에 대한 가난 죽도록 충성해도 충성의 갈급과 충성의  가난, 또 그라고 난 다음에도 항상 비교해서 '나는 그저 하나님에게 해만 끼치고  있는 자이다' 하는, 요 자기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하나님  역사가 역사해 놓은, 이미 기존 역사도 기존 역사도 부인하고, 이 말이 내가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안하고 바울이 말하기를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안하고 내 앞에 있는 것을 잡을라고 지금 간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그는 자기가  충성 못 한 그것만이 자기 눈에 보였지 다른 것이 보이지 안하는 요렇게  자기에게 이미 부패성으로 있는 것이든지 와 가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와 있는  것이든지 있는 그것을 자꾸 만족하지 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안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안하고 자꾸 갈급해서 새 것을 요구하는  그 요구 거기에서 이 지극히 큰 것이 조그매씩 자꾸 배 들어온다. 들어와  가지고서, 이와 같이 와 가지고서 이제 하나님이 그 안에서 역사할 수 있다 하는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큰 이 겨자씨 믿음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께 피동되는 그것인데. 앎으로, 앎으로 그분이 와서 일할 수 있고  피동됨으로 그분이 일할 때에 우리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태복음 20장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그  말은 인적 요소와 또 하나님의 은혜의 요소 이 두 가지를 거기에 대두해서  말씀해 놨는데, 인적 요소의 충만하고 구비한 그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그 은혜의 요소가 힘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자는 자기의 인적  요소에 속해 가지고 있고 어떤 자는 인적 요소를 부인하고 믿음의 요소에 속해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된 자는 인적 요소에 속했고 나중 된 자는  믿음의 요소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이 승리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일차 피조물된 이걸 귀중히, 귀중하기는  귀중하지만 일차 피조물의 이것이 없는 데에서, 없는 거와 비교하면 이거  귀중하지마는 이 귀중한 이것이 다시 이차 창조.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지는 그 은혜에 대해서는 거리끼지 안해야 된다. 그 은혜에 대해서는  여기에 거리끼지 안해야 되지 거기에 거리끼면 이것이 안 된다. 그 와는 이와는  차원이 아주 딴 차원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면 양을 먹이든지 밭을 갈든지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 이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겨자씨 믿음의 이 줄기가. 하나님의  줄기가 우리에게 연결된 것이 이것이 믿음이라. 신적 요소가 우리에게 연결된 그  줄기, 그 줄기, 그 줄기 그것이 믿음인데. 믿음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것이  우리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그 연결을 믿음이라, 그라기  때문에 외부 행위는 복종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것이 어데 막혀 가지고 못 오느냐? 내나 양 먹이고 밭 갈고 이래  가지고서 하는 것이 그 요소가 와 가지고서 이렇게 했는데, 거기에 앉아  먹을라고, 앉아 먹을라고 하는, 앉아 먹을라 하는 거기에서 딱 막혀버린다.

거기에 막혀 가지고서 그만 못 들어온다. 앉아 먹을라 하는 것 때문에 못  들어오고, 앉아 먹지 안하고 '이제 주인을 뭘 대접할까?' '대접할까?' 다시  말하면 주의 뜻을 뭘 복종할까 내가 뭘 주님에게 복종해,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복종할까 주님에게 내가 뭐 할까 이것을 자꾸 찾아서, 주님 잡수실  거라 말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에게는 잡수시는 음식이  뭐이냐 하면은 당신의 뜻 이루는 것이 그것이 당신의 양식입니다. 양식인데  그렇게 죽도록 충성해 놓고 난 다음에도. 충성하고 난 다음에 그 충성은 보이지  안하고, 충성해 놓은 그 충성은 이미. 충성은 보이지 안하고 어떻게 충성해야  될까 고것을 갈망하는 고걸, 고 줄기를 통해 가지고, 고 구멍으로, 고 구멍으로  지극히 큰 능력이 너거 인적 요소에 와 가지고서 역사하는 것인데 그게 없는  자는 안 된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교만한 자는 그만 헛일입니다. 교만한 자는 그거는  그만 끝나 버리고 맙니다.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가로막고 말고 겸손이  하나님 은혜를 입는다 그 말은 내나 겸손이 이것이 첫째 아담의 요소도 알고  둘째 아담의 요소도 알고 또 하나님이 그를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오는 그  무한한 은혜의 그 모든 미래의 무한의 건설적인 이것을 아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만하면 안  됩니다. 교만하면 안 되고,  그러기에 이 인적 요소, 이 일차 아담이 미혹받아 가지고 일차 아담을 통해서  그는 건너오는 다리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왔는데.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으로 더불어 배암의 후손과 서로 전투가 있다 하는  그것으로써 배암이 쫓겨나간 것 아닙니다. 배암이 쫓겨나간게 아니고 배암이  그만 점령한 것을, 점령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투쟁은 계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속하기 전에는 일 대 일로 투쟁을 했고 투쟁을 했는데  예수님이 도전을 해 가지고서 승리를 해 버렸습니다. 승리를 해 버리니까 그때의  투쟁과는 다르지. 그때의 투쟁과는 다르지마는 지금도 늘 패잔병으로서 침략하는  투쟁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 배암의 것으로 가지고서 되어진 이 뭐 세상에 있는 모든  과학이든지 그 모든 인문학이든지 뭐 자연학이든지 뭐이든지 이렇게 땅위에 있는  무슨, 세상, 온 세상이라 하면 다 들어갔겠습니다. 온 세상 그것 가지고는  그것이 이 믿음을 방해할 것뿐이지, 믿음을 방해할 것뿐이지 믿음에 도움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 가지고 생명의 일을 할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빛이 오되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 말은 생명이 오되 죽음이 생명을  영접하지 못한다 죽음이 생명을 돕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죽은 것이 산 것을  돕지 못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천국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 요소 이것 가지고 하늘나라가 건설되리라고 생각하고서,  세상, 세상에 있는 이것 가지고 하늘나라가 건설 되리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준비하고 이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요새 모든 신학교들이 말하고 그게  차차 차차. 처음에 어떤 개혁가는 좀 때달아 가지고서 이렇게 바른 줄기에  연결됐다가 마지막에는 지식 위주로, 지식 위주의 벌써 교육 기관이 됐으면  그거는 완전히 마귀의 것이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뿐이지 거기에  와 가지고 있는 거 아니고, 거기에는 그 요소는 와 있지 않다. 그러면, 방해를  하면 방해를 할 수 있느냐?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믿음의 요소는 방해를 못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 겨자씨 믿음으로 비유한 거와 같이 작지마는 안에 들어가서  온 땅을 삼키고 만다 그걸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이 너무 협착해서 자꾸 미혹을 받는데. 그러기에,  자기에게 있는 거 모두 부인이라 말은 세상을 부인을 말하는 것인데, 세상  부인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냐?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랬습니다.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 세상 요소, 온  세상의 무슨 지식이라든지 재물이라든지 권위라든지 자기 개적의 또 선천 후천의  어떤 요소라든지 역사 육천 년 동안에 쌓여 가지고 나온 뭐 어떤 세상이든지,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서 이 일 하리라고,그것이 다해서, 그것이 다해서 이  생명 요소를 간구하는 거기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이걸 부인하고  간구할 때 그 역사가 와 가지고 할 수 있는데 자꾸 이것을 부인하지 안하고 이걸  세우기 때문에.

 그런고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냐? 가난한 자  부된 거 부된 이것이 그 위치를 바로 생각하고 부된 이것이 이 생명의 역사  이것으로 말미암아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또 이것이 그것을 이용해 가지고  이용당하고, 그것에게 이용당하면 사는 것이요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이것이 가치 있게 되어지는 이 아주 위치를 바로 정해야 되는 것인데 바른  평가가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은 다 오히려 실패가 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깊은 속을 내비 두고 겉으로 말해도 하나님이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만치 우리에게 역사 돼지는 것이지 인간에게 움직여지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믿으십시오. 모든 일이  될 때 하나님의 예정이라 제가 이래서 저랬다 하는 그것도 조브라운 말입니다.

그것도 어린 때 하는 말이지 이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저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니 그분이 날 사랑하시고 지극히  크시고 광대하심을 가지고서 예정을 했으니까 뭣 때문에 예정했느냐 거기에 가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잘못됐다고 눈물 흘리는 것도 좋기는  좋지마는 잘못된 것을 깊이 느끼고 이것은 어떤 결과를 맺는다는 그것을 보고  거기에서 '왜 이렇게 하나님이 예정을 내게 하셔서 이 예정을 내게 주셨느냐? 이  선물, 내게 분명히 선물은 선물인데, 이 예정이 내게, 이 타락이 내게 예정  됐으니 이 예정이 내게 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뭐이냐? 이 실패가 실수가  이것이 뭐이냐? 또 이 성공과 승리가 이것이 예정됐으니까 이게 뭐이냐?' 당신의  지극히 크신 그 뜻이 뭐인가 그것을 찾아서 자꾸 더듬어 갈라고 해야 당신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가 있고 역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만한 자기를 자랑하지 맙시다.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자기를 인정하는 자는 다, 자기를 인정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환난을 주는 것입니다. 환난을 줘 가지고 환난에서, 자기로 말미암아  되어진 거는 다 불살라지고 다 죄가 되고 맙니다. 죄가 되고 마는 거기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오셔 가지고 성령과 진리가  있으니까 그 성령이 나를 지배하도록 진리가 나를 지배하도록 하나님의 피공로가  나를 지배하도록 하는 이것이 다 하나 중보자의 역사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이제  자존하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님의 신성이신데, 자존하신 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서 우리의 그 생명이 됨이 아니고 우리 안에 와 가지고서 생명의  원인이 됩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 역사하심이 우리의 생명이오.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 그분이십니다. 그러면, 그런고로 그분은 우리의 주시요  우리는 그분의 성전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줄기에서라야 생명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전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을 안정하는 여거에서 다 막혀 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하는 것은 이 위에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된 이 이차 창조.

이차 창조는 진동되지 안할 것을 창조한다 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라면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몸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왕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이제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그래 가지고서 이 결말적으로 이 모든게 합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어지는 영광의 찬미가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순전히.

그러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요소로만 되어지는 것이지 일차 창조의 것을 이걸  변화하고 또 이걸 변질시키고 이것을 발등상으로 삼아 가지고서, 이것을 껍데기  발등상으로 삼아 가지고서 이것을 통하여서 모두 다 발휘 되고. 발휘 되고  발산되고 하는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이것이 큰 능력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의 그 일군 비유를 잘 좀 생각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또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게 더 쉬우리라 그렇게 말씀하신 그것이 뭐이냐?  일차 아담에게 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찾는 요소요 또 하나님의 것이 와 가지고 역사하는  데에 하나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언제 설교할 때에 힘을 한번 설교를 한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힘이라. 그 힘은 이 과학의 힘이 힘이 아니오. 또 물질의 힘이 힘이 아니오.

우리 육체의 힘이 힘이 아니오. 힘은 순전히 뭐이냐? 진리의 힘, 성령의 힘,  예수님의 대속의 힘이 힘만이 힘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힘은 이 양면을  걸쳐서, 이 일차 창조의 것과 다시 이차 창조의 것을 둘을 가진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힘이요, 성령의 힘은 이 두 가지를 가진 것을 우리에게 강조해서  실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성령의 힘이요 진리의 힘인 것입니다. 이게  힘이지 무슨 자기가 지식이 있으니까. 배암의 지식이 있으니까 뭐 과학이  있으니까 선천적으로 자기가 잘 타고 났다 뭐 어떻게 돼 후천적으로 어떻게  수양을 많이 했다 하는 그런 것들 힘으로 삼으면 이 힘은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힘은 순전히 세 가지 힘.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목회할 때에, 어리석기가 말이오, 배짱을 내고 '내가  주먹을 내고 내가 엉크리면 된다' 그 불쌍하고 가련해서 참 눈물이 나올 만치  가련하지 그 힘을 그까짓 걸 두려워할진데야 세상을 어찌 이기겠습니까? 그 힘  두려워하는 것이 어떻게, 모든 정권을 가진 정권들이 해도 그저 안타깝고 비웃고  조롱하고 이렇지 거기에 대해서 억압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힘, 이  악독의 힘, 혈기의 힘, 또 자기의 활동의 힘, 자기 선천 후천의 그 인적의 자기  요소의 힘, 또 무슨 과학의 힘, 자기 지식의 힘 지위의 힘, 권세의 힘 뭐 이 힘  가지고 이 생명 세계에 와 가지고서 이것을 일할라 하는 것은 그것은 정  반대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저희에게 지금  주실라고 하는데 이 무한하심이 올 터인데 이 무한하심을 막아 버리는 자멸하는  자망하는 이것만 하지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걸 가지고서 오늘 우리 진영에도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언제 자주 말하기를 '우리 진영에는 이거 뭐 성령의 힘.

진리의 힘, 주의 피의 힘보다도 고기덩어리의 힘 젊음의 힘이 제일 강하다. 또  악독의 힘이 제일 강하다.' 막 엉크리고 악독만 부리고 독만 부리면 쭉쭉  돌아가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 총공회의 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생명운동을  어거하고 자유 자재 할라고 하는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고 어리고  불쌍하고 가련합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런데 대해서 오히려 불쌍하고 그렇지 뭐  저 죽을 줄도 모르고 그라는데 미움을 가진다면은 아는 사람이 범죄했습니다.

주님에게서 쫓겨나가고 도로 후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참힘을 찾읍시다. 참힘. 겨자씨 믿음, 이 참힘 지극히 큰 능력을  찾아야 합니다. 지극히 큰 능력은 자기와 세상을 부인하고, 자기와 세상은  어디다 써 먹느냐? 자기와 세상을 일차 부인하고, 부인한다면 어떤 면에 부인  하느냐? '이것으로써 생명의 역사는 못 한다' 부인하고, 이 자기와 세상 모든  것은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이 새것,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생명 새것 새 역사로 일하는 이 새것 이것이 오는 것을 갈망하고 기대하는  이것뿐입니다. 갈망하고 기대하는 거. 이 썩은 것이 썩지 안 하는 것을 갈망하게  하는 영감과 진리로써 이 전부를 다해서. 우리는 이 갈망하는 데에 이 새것을  요구하는 데에 이 모든 걸 다 기울이지 이게 뭐 쓸모 있는 것 아니라. 요구하면  그게 와 가지고서 이 썩은 것을 다 새롭게 살리고 또 이것을 통해서 도구와 같이  살려서 이런데, 그러니까, 쟁기를 잡고 일을 하지만 쟁기 그게 무슨 일 합니까?  농부가 와야 쟁기를 잡고 일하지 농부가 안 오면 쟁기 그까짓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능력이 와야만 이 모든 것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인하면  그 능력이 와서 있는다, 그 능력의 것이 되면 되어진다 자꾸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조심할 것은 여기 OO 교회라 하는 그 교회가 있고,  OOO목사님 또 OO이라, 그 사람이 새 나라라 이렇게 새 나라 운동을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간절히 원할 때에, 간절히 원할 때에 자기가 광명이  비치워서, 광명이 비치워 가지고서, 잠깐 동안 뭐 광명이 비추어서 '아, 아니다.

새것이 있다. 새것이 온다. 새것이 와서 일한다.' 새것에 대해서 일시 감동을  받았는데. 겸손치 못하고 고만 그것만 가지고 이래 떠들다 보다 보니까  OO교회라고 이래 엉뚱스러운, 그 다음에, 처음에 새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이제 영감과 진리로 발견해서 잠깐 구경을 했는데. 구경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교만하고 오만해 가지고서 고만 이 세상 적 새것을 다 했기 때문에. 새  나라, 새 나라 운동 OO운동 이래 가지고서, 빛을 하나 보고 난 다음에 그거  가지고서 자기가 자랑하고 싶고 그것으로 떠들고 이랬기 때문에. 오만한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시작 했다가 육체로 마쳐 가지고서 그래 된 것입니다.

그 발트라는 사람은 죽었지마는 대신학자인데, 그 사람이 긍정 부정을 말하고  있는 그 위기적인 하는 그 사람도 다 요런 걸 하나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고.

요한 웨슬레도 또 자기대로의 하나 보고 고만 고게서 고만다. 보고 고게서  오만하면 고것에서 끝나 버립니다. 오만하면 끝나고 오만하지 안해야 자꾸  무진장이 들어오지 오만 그거는 벌써 자기 요소이기 때문에 은혜의 적입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지금도 신학의 온갖 조류들이 나오는데 그 조류들을 보면  '아, 이거는 어데 까지 와 가지고서 어데서 이것이, 그만 탈선됐다, 탈선됐다'  하는 그런 것을 다 환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농부 비유와 또 이 겨자씨 믿음 또  이제 그러면 이 도적질한 것. 도적질한 거. 소유권 도적질 사용권 도적질 세  가지를 말했는데. 어제 보니까 세 가지를 말했는데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하나는 뭐이냐? 하나는 씨는 심어라. 양식은 네가 먹어라. 고 두 가지 사용의  사용 명령이 있는데. 그러면, 소유권 도적질을 했던 고것을 두 가지를 회개하고,  다섯 가지 이 명령, 사용권 도용한 것, 용도 도용한 용도 도용한 이 도용을 다섯  가지를 회개해서 도적인 줄 알고 그걸 자꾸 벗어나, 고거 하나라도 벗어날라  해도 또 돼진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어짜든지 이 믿음은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여서 여기에 복종하지  안하면 구원은 천리 만리 거리가 멉니다. 이러니까, 요새 이거 뭐 복음 운동이  뭐 어떻다 어떻다 이라지마는 너무 복음 운동이 가리워져 가지고 있습니다.

가리워져 가지고 있고, 전부 사람 운동이고 사람 자랑이고 사람 높여요. 또 보면  '이거 무슨 사다리가?' 그러면 뭐 통지서가 올 때에 '그러면 여기 뭐이 왔는가?'  그래 나는 그것만 봅니다. '이거는 무슨 사다리고? 이거는 무슨 사다리고? 누가  올라가는 사다리고?' 그거 봅니다. 올라가는 사람이 그러면,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또 사다리도 있고 '무슨 사다리인데 이 사다리에 누가 타고 올라갈  사다리이다' 보여진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외식하지 말고 세상에 물들지 말고. 우리는 겸손히 참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이는 사람이라야,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성품 다하고 이것 다해야 된다고 했는데 죽도록 충성이라  했는데, 온전한 행위라야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너무 헐하게 봤다  말이오. 너부 헐하게 봤기 때문에, 이 구원 이루는 역사를 너무 과소 평가 했기  때문에 우리가 다 미끄러지고 맙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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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건설구원과 신적요소/ 디모데전서 4장 6절-16절/ 820801주전 선지자 2015.10.23
619 건설구원에 대해 제일 힘쓸 일/ 사도행전 20장 29절-32절/880302수새 선지자 2015.10.23
618 건설구원을 이루는 방편/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880410주전 선지자 2015.10.23
617 건설구원의 시작, 과정, 결과/ 마태복음 13장 44절-46절/ 811101주후 선지자 2015.10.23
616 건설구원의 어려움/ 마가복음 10장 17절-31절/ 840509수새집회 선지자 2015.10.23
615 건축연보/ 마태복음 28장 16절-20절/ 820523주새 선지자 2015.10.23
614 게을 죄-설교준비/ 고린도전서 2장 1절-5절/ 861201월새 선지자 2015.10.23
613 게하시의 저주/ 열왕기하 5장 15절-27절/ 850521화새 선지자 2015.10.23
612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80705화새 선지자 2015.10.23
611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80701금야 선지자 2015.10.23
610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 880705교역자회 선지자 2015.10.23
»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41107수새 선지자 2015.10.23
608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12주새 선지자 2015.10.23
607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 880713수새 선지자 2015.10.23
606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10금야 선지자 2015.10.23
605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0금야 선지자 2015.10.23
604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2주후 선지자 2015.10.23
603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2주전 선지자 2015.10.23
602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90507주전 선지자 201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