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믿음

 

1989. 1. 22. 주후.

 

본문: 마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오전에 증거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계속 들으면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닫는다  말은 안다는 말이 아니고 깨닫는다 말은 자기가 실행할 수 있는 지식으로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실행할 수 있도록 알아야 되지 그냥 그저 지식적으로  알면 자기를 교만케 하는 지식이 되고 맙니다.

 이 겨자씨를 심은 농부는 예수님을 비유했고 또 자기 밭이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가리켜서 비유하셨고 또 겨자씨 한 알이라고 한 것은  곧 중생된 새사람 참사람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전에 사람은 두 종류로 현재 세상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원죄와 본죄로  타락해서 변질된 사람이니 이는 생명이 사형받은 죽은 생명 가지고 날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 곧 마귀의 것이 되어 있고 사망의 것이 되어 있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한 종류로 하고 한 종류는 다 같이 원죄와 본죄로  타락해서 변질된 사람인데 예수님이 대속하신 사죄 칭의 화친의 이 공로로써  거게서 해방되어 네 가지로 다시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난 자를 가리켜서  새사람이라 참사람이라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한 종류가 있어  두 종류가 섞여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여게 겨자씨라고 말한 것은 곧  예수님의 대속으로 중생된 새사람 참사람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과 영과 그 악령으로 말미암아 된  불법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몸과 마음과 영과 이 세 가지가 합한  사람을 첫째 아담의 자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자손은 영육으로  되어 있는 사람 곧 우리가 믿지 않을 때의 우리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네 가지 생명으로 살아나는데 제일 처음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로 살아났고 그 다음에는 진리로 살아났고 영감으로 살아났고  하나님을 향한 영생으로 살아나서 이 넷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 또 참사람이라 새사람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변질된 타락된 죽어가는 사람이었고 죄인이었었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사죄의 구출함을 받아서 이제는 이 네 가지로 살아난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생명이요 곧  우리의 힘입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모든 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 힘은 절로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네 가지가 합하여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은 이 네 가지에서 비추어 나오는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새사람 참사람 자기는 자기 힘이 무엇이 자기 힘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자기 힘은 무엇이 자기 힘인지를 잘 알지 못하면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무슨 세상 사람들이 돈이 힘이 된다, 또 세상 이  사회 지식이 힘이 된다, 육체의 체력이 힘이 된다, 과학이 힘이 된다, 사람들의  많은 응원들이 힘이 된다 이렇게 모두 다 힘에 대한 그 힘관이 다 삐뚤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무엇이 자기의 힘인가 하는 그 자기의  실력관을 잘못 가지고 착각해서 힘 아니고 도리어 힘을 얽매여 죽이는 그런 것을  자기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한번은 속았다고 뒤에  후회하면서 넘어지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힘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그 어떤 힘도 그것은 우리의 힘은  아닙니다. 또 그들의 힘도 안 됩니다. 그들의 힘이 되는 것은 무슨 힘이 되는고  하니 돕는 힘이 되지 아니하고 그들을 죽이는 힘이 됩니다. 돈은 죽이는 힘이요,  권세는 죽이는 힘이요, 과학은 죽이는 힘이요, 세상 지식은 죽이는 힘이요,  인간들의 모든 응원의 힘들은 죽이는 힘이지 살리는 힘은 안 됩니다. 이 말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것이나 많이 기도하고 정신 차리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면 될 줄 알았는데 돈 그것이 참사람의 힘을 완전히 매장시켜  죽이는 역사를 하는 것을 우리가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은 어떤 게  힘인가? 우리가 네 가지 힘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네 가지 이것만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 네 가지 뭐?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 하나님을 향한 영생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 힘은 장생불사합니다. 이 힘은 늙고 쇠해지지 않습니다.

갈수록이 점점 더 새로와지고 강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겉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그렇게 말씀을 한 속사람 참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네 가지 힘이 우리 생명이 돼 가지고 살아난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동하는 우리가 행동한 산 행동은 어떤 게 산 행동인고 하니  우리가 행동하는 산 행동은 우리가 행동하는 진리 행동이 산 행동이요, 영감  행동이 산 행동이요. 또 죄 없는 행동이 산 행동이요, 의로운 행동이 산 행동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거 동행 하는 행동이 산 행동이요, 하나님에게 소망 두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이 행동 힘이 곧 우리 새사람의 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힘을 돈이 들어서 이 힘을 도울 수가 있느냐? 돈이 들어서 이 힘을  돕지 못하고 돈이 들어서 이 힘을 막아 죽여 버립니다. 세상 권세가 이 힘을 막아  죽여 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권세를 가지려고 해서 그 권세 때문에  이 네 가지 능력을 막아 버리는 일 많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은 그런 것들은  가지면 안 되느냐? 가질 수 있습니다. 가질 수 있으나 그까짓 거는 힘으로 가지지  말고 자기의 소지품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로 생활할 때에 그런 것들은  이용을 할려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 그것들에게 내가 매여서 거게 따라서  피동되면 벌써 그 사람은 죽음이 그 사람의 힘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산 힘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거 좀 어려운 설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과 힘을 잘 구별해서 자기의 실력을 갖추고 기르고 어데서든지  자기의 힘을 가지고 대적을 대항할 수 있고 힘으로 가지고 모든 일을, 건설도  하고 또 모든 일들을 성공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이 뭐입니까? 우리의 힘은  이 녜 가지가 우리의 힘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이 네 가지가 우리의  힘이기 때문에 이 네 가지 가지고 대적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건설도 하고  경영도 하고 자신도 보호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이제 세상 그런 것  가지고 보호하지 않고 진리로 자기를 보호합니다. 그래 진리의 띠를 뭐라  이랬습니다. 영감으로 보호합니다. 죄 없는 것으로 보호하고 죄 있으면 죽습니다.

의로운 것으로 보호하고 하나님과 화친으로 보호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이  소망으로 자기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아난 사람인데 몇 가지로 살아났느냐 하면 네 가지로  살아났는데, 네 가지로 살아났는데 네 가지로 살아난 것을 세밀히 말하면 일곱  가지로 살아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가 우리 힘이냐 이래 말하면  네 가지 능력이 우리 힘이다 이렇게 우리는 지식하고 대답도 하고 기억도 하고  또 이 힘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 힘이 사는 것이 내 생활이요 이 힘으로 사는  것이 산 자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된 나는 이 네 가지 능력으로 살아났는데 이 네 가지 능력은 늙는 것이  아닙니다. 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네  가지 능력으로 살아난 이 생명은 천 년이로 만 년이고 억만 년이고 영원  무궁토록 살아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능력은, 이 네 가지 능력으로 살아났는데 이것이 우리 생명인데 이 네  가지 능력은 곧 그것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래서, 어린 양의 보좌 밑에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는 생수가 흘러내려 오는데. 일천 척을 가니까 더  많아지고 일천 척을 가니까 더 많아지고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네 가지 힘이 나와 가지고 이  힘온 천 년 만 년 갈수록이 더 강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로 자기 힘을 삼은 사람, 영감으로 자기 힘을 삼은 사람,  예수님의 대속으로 자기 힘을 삼은 사람, 영생으로 자기 힘을 삼은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이 네 가지  생명으로 자기의 생명을 삼았기 때문에 그는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갈 때에 둘이 갈 때도 요단강이 갈라졌고 나중에 그  두루마기를 받아 가지고 돌아올 때도 그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그 갈라진 것은  뭣을 가리켜 말하는 건고 하니 사선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이  네 가지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가 없고 그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는  육을 벗는 것는 온전치 못한 것이 온전한 것으로 바꾸어 입기 위해서 벗는  것이지 그에게는 죽음이라는 그런 고통도 번민도 불만도 그런 무슨 약해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중생된 우리들은 우리 힘이 무엇이 우리 힘인가? 우리 생명이  무엇이 우리 생명인가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되지 이것을 모르고 껍데기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믿어서 오랫 동안 예수 믿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돼도 자기가 중생 됐다는 말만하지 중생이 어떻게 됐으며  중생된 자의 그 생명이 무엇인가 그런 것을 모르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이 네 가지가 우리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이  네 가지 힘으로 해야 됩니다. 네 가지 힘으로 해야 죽지 않습니다. 네 가지  힘으로 하지 않고 다른 무슨 물질의 힘이나 인간의 힘이나 그런 걸로 해  가지고는 죽습니다. 네 가지 힘으로 한 것은 죽지 않습니다. 진리로 한 일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영감으로 한 일도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한 것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힘인 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거게서는 요만하면  여러분들이 거게서 자꾸 생각해 나가면 하루도 열흘도 되고 일 년도 십 년도 뭐  몇십 년도 거게서 자꾸 생각하면 그 속에 연해서 생명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상하는 것은 어떤 게 상하는 것이냐? 우리가 상하는 것은 이  생명이 상하면 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해보는 것은 네 가지 이 생명이  손해보는 것이 손해보는 것이지 다른 거는 우리의 손해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 것을 깨닫고 우리의 힘이 무엇인 것을 요것을  깨닫고 바로 자기가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살지 않고 바꾸어 가지고 죽은 옛사람  자기 아닌 것이 살기 때문에 낭파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가 하는 일이 아니면, 우리가 하는 일이 있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 있는데 우리 하는 일을 진리가 할 때는 내가 하는 것이고 진리 없이 다른  걸로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옛사람 내가 하는 것이니 엣사람은 내가  아니고 나를 죽인 원수인 내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것인데 그것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를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때에 우리는  말하기를 자살 행위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생명에 대해서 말하고, 또 이렇게 주님이 하필 우리 중생된 사람을 다른  무슨 종자로 비해도 될 터인데 비하지 않고 이 겨자씨로 왜 비유를 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또 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있었으면'  겨자씨 말씀을 가지고 중요할 때마다 가르쳤습니다.

 이 겨자씨라는 것은 아주 씨 중에 작은 것이요 또 그 잎사귀가 터래기 같은  것이 요 세 개인가 요래 붙어 가지고 그 속에 겨우, 뭐 머리털 뿌리보다 작습니다.

그런 것이 속에 있는 그런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에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땅에 들어가면 죽지 않고 자꾸 땅을 파먹고 자라게 됩니다.

이와같이 기독자를 이 겨자씨로 비한 것은 겨자씨는 외형에 아무 볼 만한 풍채도  없고 가치도 없고 뭐 보기에 새들도 와서 먹을 만한 무슨 영양이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아주 그런 아주 가늘고 미약한 씨앗입니다. 그런데 이  씨앗이 외모가 뭐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순전히 겨자씨로 비유한 것은 속에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껍데기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속에  생명에 가치가 있다 하는 그것을 특별히 비유하기 위해서 겨자씨를 인용해  가지고 비유한 것입니다.

 기독자는 외형이야 잘났든지 못났든지 그것은 가치로 보지도 않고 그게 가치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걸어머리가 뭐 용모가 잘났다 경제가 훌륭하다,  사회에 학문이 넉넉하다, 기술이 풍부하다, 암만 해도 그런 것은 기독자의 가치가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의 가치는 그것이 가치가 아닙니다. 이거 모두  우리 교회도 보면 결혼 상담을 요새는 좀 돼 나가는가 모르겠는데 하도 결혼  상담이 침체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세 번 사회를 해 가지고 했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결혼이 여러 수십 건이 되기는 됐습니다. 이랬는데 결혼 상담  하면 모두 다 본다는 것이 외모만 보지 기독자의 정말 가치를 보지를 않습니다.

외모만 보고 모두 뭐 학력이 얼마나 있는가 돈이 얼마나 있는가 생활 박력이  얼마나 있는가 그런 것만 가치로 삼지 속에 이 생명력이 얼마나 있느냐 그것을  가치로 보는 사람들이 별로이 없습니다. 그 진리가 얼마나 강해서 밤이나 낮이나  어데서나 그 진리가 과연 실력이 있어서 모든 것을 정복하고 승리하는가? 그  진리나 영감으로 중생된 것이 아주 힘이 빈약해서 돈 보면 돈에 굴복하고, 권세  보면 권세에 굴복하고, 죽음 보면 죽음에 굴복하고, 행락 보면 행락에 굴복하고,  친한 사람들 보면 사람에게 굴복하고, 생명력이 심히 약한 자 있고 강한 자  있습니다.

 아주 일류 대학을 공부하는 그 미남 학생을 자세히 보면 껍데기는 미꿈한데  속에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게 말에도 행동에도 마음에도 생각에도 도무지 진리의  힘이 없고, 영감의 힘이 없고, 또 죄 없는 죄를 이기는 힘이 없고, 의를 행하는  힘이 없고, 하나님을 모시는 힘이 없고, 영생을 바라보면서 영생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런 힘이 하나도 안 보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하는 것도 썩어진  거 젊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썩을 것만 생각하다가 피이 하고 뒈져 버립니다.

그런 것은 아무 능력 없는데 인간의 가치를 거게 두지 말고 껍데기에 두지 말고  속에 생명에 두라 하는 것을 특별히 나타내기 위해서 겨자씨를 가지고 비유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자는 인생의 가치를 어데다가 둘 것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지금 결정을 지워야 합니다. 자기의 가치도, 자기의 가치도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가치를 삼아서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을 가져봤자  언젠간가 조만간에 송장되고 다 무로 돌아가고 맙니다. 다 헛된 데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썩는 양식 위해서 일하지 말아라, 또 썩을 것을 취한다,  육체로 심은 자는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둔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이런고로 인생의 가치는 이 생명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있으니 진리는  진리요 무한한 독자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진리요 영감은 하나님이요 예수님의  피는 완전히 대속하신 완전 공로요 또 영생은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자기의 가치로 삼아서 자기를 가치 있게 만드는 데에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더 풍부하게 하고 성장시켜서 자기 가치를 삼고 상대방을  평가할 때도 이것으로 평가해서 이것이 없는 그런 사람은 아무런 가치로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런 걸 가치로 삼아도 그 사람 세계에  강대국에 아주 제일 수령이라고 제일 수뇌의 사람이라고 수상이라고 이렇게  말해도 그 사람에게 이 네 가지 능력이 없으면 산 송장으로 우리는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 동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비록 존귀한  데에 처한다 할지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그거는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뭐, 그것은 지식보따리 그리 아니면 권세 보따리 다 이 세상에 돈보따리  이런 것만 되어지지 속에 영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영생하는 생명은 우리가 다  차지했습니다. 영생하는 생명은 우리가 다 차지했습니다. 영생하는 것은 진리가  영생하고 영감이 영생하고 죄 없는 것이 영생하고 의로운 것이 영생하고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영생하고 영원한 소망만이 영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생하는 완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삼아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여게서는 인생의 가치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생의 가치관. 인생의 가치관이 틀리면 안 됩니다. 교회라 하는 것도 요새  교회들이 모두 다 썩어져서 교회가 인생의 가치를 어데다 두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거기다가 가치를 두기 때문에 세상 일로 분주하지 이 인생의  참된 가치 진리나 영감이나 예수님의 대속이나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하는  것이나 또 하늘에 대한 소망 이런 것은 가치로 안 여겨 이러니까 '하 서울대학에  가야지.' 대가리를 싸짜매고 이것만 소망으로 하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아무 가치로 삼지를 않아.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평가하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 평가하는 것이나 그 평가가  같습니다. 정말 정평 정가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보는 것은 다 썩은  싯이요 교회에서 평가하는 것은 썩지 아니할 영생의 것, 완전의 것, 불변의  것이것이 교회 안에 가치라고 우리들이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가치관을  바로 가지라 하는 것을 지금 여게서 배우고.

 그러면, 이 겨자씨가, 우리 중생된 우리 기독자를 가리켜서 겨자씨로 비했는데 그  밭에 심겼다는 것은 중생된 우리들을 이 세상에 아직까지 머물게 처세하게 세상  가운데서 살게 하는 것이 곧 중생된 우리를 하나님의 밭인 이 세상에다가 심기워  놓은 것으로서 그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심겨 놨으면 이 겨자씨가 자라  가지고 나물이 되다가 더 자라 가지고는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되고 난 다음에는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고 말을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네 가지로 중생된 우리가 자라는 데에는 뭘 먹고 자라며  어떻게 자라게 되느냐? 자라게 되느냐? 자라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을 성경에  밥이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밥이라는 것은, 밥이라는 것은, 잘 여러분들이 잘  안 들으면 몰라요. 밥이라는 것은 먹고 나면 그것이 배설물로 나옵니다. 배설물로  나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흙이 겨자씨의 양식이 되는데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중생된  새사람의 양식이 되는데 요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양식은, 우리의  생명은 네 가지로 살아난 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진짜 양식은 네 가지만이 우리  양식이지 딴거는 우리 양식이 되지를 않습니다. 썩지 않는 것의 양식은 썩지 않는  것이 돼야 되지 썩을 것은 썩지 않는 것의 양식은 되지를 못합니다. 온전한 것은  온전한 것으로 키워 나가야 되고 채워 나가야 되지 온전치 못하는 것은 온전한  것을 키워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뭘 먹고 자라야 되느냐? 우리는 언제든지 진리로 자라가야 됩니다.

진리로 자라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한한 진리를 가지셨는데 우리가 진리로  충만해지고 충만해지고 자꾸 진리가 세를 들어서 진리가 하나 있다가 진리가 둘  있고 셋 있고 넷 있어 진리로 자꾸 부강해집니다. 진리로 부강해지는 거, 영감으로  부요해지는 거, 또 하나님으로 부요 해지는 거, 또 영생으로 부요해지는 거 이게  자꾸 부요해지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진리로 자라가야 됩니다. 진리로 자라가려고 하면 그 진리가  내것이 되면 진리 하나 내것 됐으면 진리가 그만치 커지겠고 진리 둘이 내것  되면 그만치 진리가 커지겠고 자꾸 진리를 먹고 자라가고 영감과 대속의 피와  영생을 먹고 자라가는데 어데서 진리를 먹고 자라가느냐? 신구약 성경을 자꾸  읽고 하면 그것으로써 자라 가는가? 아니오. 그것으로는 자라가는 게 아니고  진리를 양식 삼으려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요거 짤 안 들으면 몰라요.

 겨자씨가 땅에 심긴 거와 같이 이 세상세 우리를 심어 놨는데 우리 세상은  무엇이 우리 세상입니까? 우리 세상은, 내 세상은 내 현실만이 내 세상이지 현실  밖에 것은 내 세상이 아닙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 현실만 내 세상이지 현실 밖에  거는 내게 관련이 없습니다. 꼭 현실 이라는 요 현실만 내 세상이니 밭에다  심었다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요 현실을 가진, 현실을 담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다가 우리를 머물러 살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요 현실에 우리에게 현실이 올 때에는 이런 저런 모든 현실을 우리에게  바꾸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면 현실이 하나둘뿐 아니라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가지 굉장히 숫자가 많은 그런 현실을 우리에게 부딪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현실을 부딪히게 해 주시는데 그 현실을 만날 때에 그때 그 현실은 어떤  현실이냐? 그 현실은 신구약 성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진리요 또 무한한  영감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영감이 있는데 그 현실에 해탕되는 진리와  영감이 있습니다. 그 현실에 해당되는 진리와 영감이 있습니다. 요거 이해가  됩니까? 그 현실에. 그러면 진리와 영감은 아무데라도 해당이 됩니까? 아니오. 요  현실에는 요 진리 요 영감이 해당이 됩니다. 조 현실에는 조 영감 조 진리만 거게  해당이 됩니다. 딴거는 해당이 안 됩니다. 꼭 고게 해당되는 진리와 영감이 있고  거게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 거게 죄를 이기는 것이 해당되는 죄가 있고 거게  의를 이룰 해당되는 의가 있고 거게 하나님을 모시느냐 배척하느냐 하는 것이  거게 해당되는 것이 있고 또 거게 영생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 각각 따로  있습니다. 그 현실마다 그게 있습니다. 현실마다 그게 있는데 현실이 열 가지로  바꾸어 올 때에는 해당되는 이 네 가지도 열 가지로 바꾸어지기 때문에 사십  가지가 되겠습니다. 현실이 바꿔 현실이 하나 바꾸어지면 그 네 가지가 한 번  바꾸어지고 또 두 번 현실이 바꾸어지면 그 네 가지가 또 두 번 바꾸어지고  그러면 한 번씩 바꾸어질 때마다 진리, 영감, 대속, 영생이 하나씩 옵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우리에게는 그 현실에 기쁜 것도 있고 슬픈 것도 있고 고통스러운  것도 있고 온갖 그런 잡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가슴 치면서 우는 일도  있습니다.

 내가 며칠 전에 여게 어떤 성도툴 만났는데 자기 남편은 차사고로써 여러해를  고생하고 이제는 뭐 먹을 것도 없고 그래 가지고 고생을 당하고 있다는 그런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들을 때에 그이 현실은 답답하고 참 어려운 현실입니다.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때에 요 비유를 가지고 내가 그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 현실은, 이 현실은 분명히 자기 중생된 새사람을 장성하도록 하는  좋은 양식을 주는 현실이니까 이 현실을 양식삼아 먹으면 이제 좋은 날이 올  것이고 이 현실에게 삼키워지면 절단난다 하는 그것을 내가 말을 해 주지마는  그분이 뭐 갑자기 잘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같이 그렇게 보입디다.

 그러면 현실에, 알아듣기 쉽게 하나만 말합시다. 그 현실에 어떤 진리가 해당이  될 때에 그 진리를 내 진리를 삼으려면, 그 진리를 내 진리를 삼으려면 내가  기억을 해야 됩니까 외워야 됩니까, 내가 단단히 기억하고 외우고 있어야 그  진리가 내 진리가 됩니까 그 현실에 그 진리대로 살려고 하니까 살지 못하게  죽이니 살리니 이혼하니 뭐 쫓아내니 뚜드리니 패니 직장을 다 면직을 시키니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데 어려움이 와도 그 현실에저 그 진리를 버리지 않고  자기가 희생을 하면서 그 진리를 지킬 때에 그때에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됩니까  외우고 말로 한다고 자기 것이 됩니까? 어찌 됩니까? 진리로 행해야 자기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나 먹을  양식이 여게 있으니 나 먹을 양식은 이게 내 양식이다.' '어떤 것입니까?' '나를  빈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 양식이요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내  양식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거와 같이 우리들도 그 현실에저 그 진리를 행하면,  그 진리를 행하면 그 진리가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현실 주신 것은 그 현실에 해당되는 그 진리를 내가  행함으로써 비로소 내 진리가 되어지도록 하니 내 양식온 전리는 내 양식이요 그  현실은 그 진리를 내 양식 내 진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루는 그 모든  환경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 양식되어서 먹도록 만드는 것이고 그 물질은 모든  이런 저런 모든 사태들 그런 것은 우리 양식은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내가 이행해서 그 진리를 내것 삼으니까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똑 일관되는 그런 현실만 주시지 않고 변동되는  수많은 다수의 그런 현실을 주시는 것은 그 무슨 연고인가? 그것은 우리의  중생된 사람은 진리, 영감, 피, 영생으로 살아가고 자라가는 것인데 한 환경만 한  현실만 주시면 한 가지밖에는 우리가 먹지 못하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요새 말로  편식이라 그래, 편식. 편식이라. 조 사람은 여러가지를 골고루 먹지 않고 저  하나만 먹는 편식이라. 이러니까 편식이 되면 그 사람이 병들고 건전한 사람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도 자녀가 사랑하면 그 자녀가 원하는 것도 주지마는  원하는 것을 못 먹구로 제재도 시키고 원치 않는 것도 먹여서 어쩌든지 부모의  지식이 도달하는 데까지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여러 가지를 골고루 먹여서  편식이 되지 않으므로서 그 건강이 편벽되지 않고 원만한 그 건강을 가지도록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랑이 미약한 부모라도 우리들의 그 마음인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편식시켜 가지고 불구자 만들어서 요런 진리만  가지고 저런 진리는 못 가지고 요런 영감만 가지고 저런 영감은 가지지 못해  가지고 편식하는 거와같이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편벽된 기형적인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모든 수많은 현실들을 바꾸어 교체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이것을 다 알면 '너희들이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하는 말은  여러가지 어려운 현실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나님이 얼마든지  편하게 해 줄 수 있지마는 그러면 너희들이 기형적인 인물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구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해 가지고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중생된 영생하는 사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 하나님의 제자인 사람, 하나님의 몸이요 성전이요,  지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만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해 줄 수 있는 이런 참사람, 온전한 사람, 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 온전한 모형이 외는 이런 완전하고. 구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는 데에는 그 먹고 자라는 것이 온전하고 구비하면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먹고 자라는 사료가 식량이 온전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온전한  건강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로얄제리라 하는 것은 이 왕벌의 사료인데 같은 동봉의 종자를 갖다  놓고 왕봉 사료를 먹이면 왕봉이 돼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료를 가지고 그  종자가 아주 변해서 되어지는 것을 우리가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토록 하기 위해서 수많은 그 현실을 줍니다. 그러면 열 종류의 현실을  만난 사람과 천 종류의 현실을 만난 사람과 만 종류의 현실을 만난 사람과 많은  현실을 만날수록 그 사람은 온전하고 구비한 사람을 하나님이 일으키려고 구비한  양식을 먹도록 하기 위해서 구비한 진리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구비한 그런  여러가지 현실에서 현실마다 진리가 다르기 때문에 천 가지 현실을 당했으면 천  가지 현실에 해당된 천 가지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무죄 또 칭의, 이 화친, 영생  이것을 그 사람이 구비해서 갖추어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모르면 자기 형편이 등따시고 배부른 그 형편으로서  언제든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하지마는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기 형편이 점점  변해서 '주님이여 내게 어떤 현실을 주시든지 내게 필요해서 영원히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수많은 현실을 주시옵소서'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남이 모르는 현실 아는 현실 그 파란이라 하는 것이 자지를 않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안팎으로 뭐, 단순히 사업하는 사람은 그렇지만 언제든지 그  현실에 어려움의 난제를 부둥켜 안고 있기를 보통 열 가지 이하를 부둥켜 안고  있지 않고 열 가지 이상으로 그런 모든 난제들을 다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더 위대한 사람들은 더 많이 부둥켜 안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데에서 죄로 더불어 여러가지 죄로 싸워볼 수가 있고 여러가지  의의 건설을 하는 데에 노력을 할 수가 있고 여러면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수도 있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결합하는 수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영감을 받고 여러가지 진리를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환경이 많이 변해 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고 경솔히 우리가 낙망하거나 비관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반드시  이것은 나의 먹을 양식이 여게 있다. 나의 먹을 양식이 있다 말은 이 세상  현실이라는 현실 물질이 내 양식이 아니고 현실 속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이  거게서 역사할 수 있는 그것이 그 내부에 와 가지고 관련되기 때문에 거게서  우리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 생활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수입은 뭣이 자기 수입인가?  현실 생활하고 난 다음에 자기 수입은 진리가 자기 수입이요 영감이 자기  수입이요 죄를 이긴 것이 자기 수입이요 의를 행하는 게 자기 수입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자기 수입이요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영생을 가진 그것이  자기의 수입입니다. 이것이 자기 수입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수입인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꾸 바꾸어 올수록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할 때에 그는 참  인간들이 잘 만나지 못하는 어려운 그 현실을 만났습니다. 그는 평생 처음 만나는  현실을 만났을 때에 아브라함은 평생 처음 보는 기쁨을 만났습니다. 왜? 이  현실은 반드시 자기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에게 보다 과거에 없던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되고 실력 있는 사람도 되고 하나님과 가깝게도 되고 또 복을 누릴  만한 실력도 많이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현실에 이 비밀을 깨닫고 우리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이 현실에 그라면 현실에는 뭐이 오는냐?  현실에는 물질인 이 세상과 또 이 네 가지 진리 영감 피 영생 이 네 가지가 그  현실과 관련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그  현실 속에 묻혀 있는데 현실에서 이 네 가지를 뱉아 내버릴 수도 있고 이 현실  속에서 이 네 가지를 먹어 삼킬 수도 있습니다.

 먹어 삼킬 수 있는데 먹어 삼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요 현실 속에서 이 네  가지를 단행합니다. 행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거. 행하는 거. 그  다음에 이루는 거. 이것이 곧 거게 파묻혀 있는, 파묻혀 있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네 종류의 것이 현실 속에 파묻혀 있는데 그 현실을 통해서 그것을 내가 먹게  되는 것이니 현실을 통해서 먹게 되는 먹는 방법이 뭐이냐? 그 현실에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내가 차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버리고 그 현실에 딴걸 취하지  않고 이제 그 현실에서 진리만 자기가 취해서 가지고 딴거는 가지지 않고 그  현실에서 진리를 가지기 위해서 매를 맞고 죽고 모두 다 어떻게 다 뺏긴다 해도  그 속에 들어 있는, 현실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자기 것을  삼아서 먹는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래서 먹는 방편은 곧 단행하는 것이라. 그 현실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내가  행함으로 그 진리가 내것 되는 것, 영감을 행함으로 영감이 내것 되는 것, 거게서  사죄를 행함으로 사죄가 내것 되고, 의를 행함으로 칭의가 내것 되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하나님과 화친이 내것 되고, 하늘에 소망을 그 자리에서 이룸으로써  영생이 내것 되는 거 요것이 곧 우리가 양식을 먹는 방편이라 하는 것을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뒤에 이렇게 자각게 되면 어찌 되느냐? 그 결과가 공중에 나는  새들이 깃들이도록 나물이 자라서 나무가 된다 이랬습니다. 겨자씨는 나물입니다.

나물인데, 채소인데 그것이 잘 자라면 나무가 돼 버립니다. 채소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 나무가 된다.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을 만치 아주 숲을 가진 나무와  같이 커지게 됩니다.

 요건 뭘 가리켰느냐? 이제 그 채소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겨자씨는 채소의  이름인데 그것이 자라면 나무가 된다 이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겨자씨 껍데기  같은 그런 인간이라도 속에 네 가지로 중생됐기 때문에 요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현실 현실에서 양식을 먹으면, 이 현실에서도 진리 먹고 영감 먹고 예수님의 대속  먹고 하나님과 화친 먹고 영생 먹고 이래서 현실에서 그것만 자꾸 버리지 말고  또닥또닥 먹게 되면 자라고 자라서 나중에 나무가 된다 하는 것은 초인간이 된다  그말입니다. 초인간이 된다. 가치적으로나 권위적으로나 지능적으로나 모든 것이  초인간이 된다.

 제가 손양원 목사님을 거창습으로 강사로 청할 때에 제가 가 가지고 청해  가지고 왔습니다. 왔는데 손양원 목사님 오면, 그분이 뭐 외투도, 외투도 남자들  외투는 못 입소. 여자들 외투도 쪼그만한 꼬마 외투, 꼬마 외투, 여자 꼬마 외투  입고 있어, 항상. 키가 작아. 요만밖에 안 되니까? 요만밖에 안 되니까 꼬마  외투를 입고 있어요. 이래서 내 속으로 내가 꼭 마음에 거석한 것 같으면 저  손양원 목사님을 '목사님 내가 손양원 목사님을 이거 한 손으로 들어서 팔 한번  좀 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때 펴면 내가 잡고 펼 수 있어요. 지금 힘이 없어도  그때는 힘이 있어요. 이래 한번 들고 이거 손양원 목사님을 팔을 이래 한번 펴  보고 한 팔로 팔을 펼 수 있는 요 조그만한 어른인데 그분은 참 대인입니다.

 이래서 그분의, 제가 가니까 애양원 그때 문둥병 거석인데 저도 문둥이를 참  사랑했습니다. 사랑해서 뭐 문둥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모릅니다. 이러는데  애양원교회에 그때 손양원 목사님을 청빙하러 가니까 문둥이들이 있는데 가니까  그 문둥이들이 전부 성자라. 도무지 애양원 밖에서는 그렇게 내가 보기에 미인도  못 봤고 미남도 못 봤고 인격도 못 봤어. 그 전부 인격자요. 다 인격자고 전부  성자 성녀가 다 됐어.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그 문둥병원에 천여 명 되는 그  문둥이가 다 변화가 돼 가지고 성자 성녀들이라.

 그래서 저도 그때 그만 이내 올라 하는 것이 가 가지고 이 문둥이 방에도  들어가 가지고 좀 또 좀 놀고 저 문둥이 방에 가서도 놀고 이러다 보니까 시간이  좀 상당히 갔습니다. 그분이 뭐이냐? 그분이 이 양식을 먹고 나물이 자라서  나무가 되니까, 나물이라. 채소가 자라서 나무가 되니까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이  깃들인다. 그러니까 문둥이들이 깃들여 가지고 독차지를 하고 못 가도록 하니까  꼼짝 못 하다가,  해방이 됐습니다. 8·15,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에 그때는 아주 참 양식이 많은  그런 좋은 양식이 신사참배라는 그 현실로 왔었는데 그 현실에서 그 신사참배를  다, 신사참배를 통하여서 진리를 자기 진리 삼고 신사참배를 통해서 영감을 자기  영감 삼고 신사참배를 통하여서 의를 자기 의로 죄 없는,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고 하나님과 화친하는 거 영생하는 거 그것을 손양원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담뿍 먹어 버렸어. 담뿍 먹고 나니까 그만 그때 소문이 났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뭐 애양원교회가 붙들 수가 없어. 온 전국에서 그저 손양원 목사님 간다 하면 이  어데 부산 온다 하면 전국에서 부산으로 쫙 다 모이고 또 서울로 가면 서울에 쫙  모이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것이 뭐이냐? 그것을 가리켜서 공중에 나는 새들이  깃들인다.

 왜? 그분에게 오니까 모든 심령이 해결이 되어지고, 난제가 해결이 되고, 근심  걱정이 해결이 되고, 원망 불평이 다 평안이 되어지고, 원수로 저놈 내가 죽여도  어쩌든간에 내가 분을 못 풀던 원수로 하는 그 모든 불안이 다 해소가 되어지고  기쁘고 즐겁고 이제 모두가 다 이와같이 지금 평안하게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것은 햇빛이 쪼이니까 더워서 헐떡 헐떡거리며  그러다가 그 잎사귀 밑에 가니까 시원한 거 마찬가지로 이 세상 하나님의 공변된  이 보응이라는 이 자연 율법, 자연 궤도, 자연 보응이라는 이 모든 세상 법도  제도에 따라서 제 잘못한 것이 보응이 오니까 견뎌낼 겁니까? 다 제가 저지른  잘못인데 견디지 못해서 책임은 남에게 지우고 원망 불평에 고통하던 사람들이  이런 사람 하나 만나니까 그 모든 것이 해결해서 다 눈물로 흘리고, 눈물 흘리면  슬플 건데 눈물 흘리니까 기쁘고, 눈물 흘리니 기쁘고, 자기 잘난 자랑을 해야  좋을 터인데 자기 못난 사람으로서 자기를 발견하니까 더 기쁘고 이래 가지고 다  평안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래서, 그분이 나중에 그러다가 못 견뎌서 뭐 이렇게 애양원에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을 하기를 그때 그렇게 손양원 목사님이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여게 있으면 이 복음을 딴 데 할 수가 없는데 여러분들이 다른  데 건강 세계 가 가지고는 전하지 못 하는데 내가 대표로 가서 전하고  여러분들은 뒤에 기도단이 돼 가지고 기도하고 여러분들의 기도로써 내가 앞에  앞장나서 가지고 이와같이 지금 많은 데 전하게 되면 우리가 애양원 전체가 이  한국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 안 되겠느냐 하니까 그 환자들이 좋아서 밤낮으로  울면서 기도합니다. 밤낮으로 울면서 기도하고, 이러니까 손양원 목사님 말하기를  나는 내가 뭐 하는 게 아니라 내 배후에는 수많은 눈물의 성도의 기도가  있습니다. 자랑을 하고 나섰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뭐이냐 하면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것입니다.

 이래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크지 못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은 그렇고 그래도  그래 내가 볼 때에는 내가 큰소리를 합니다. 이 권사님들을 보고 말이지요.

권사님들 보고 내가 다 같이 늙어가면서 뭐 지금 팔 십이니 칠십아홉이니  칠십여덟이니 뭐 이래 나는데 그 팔십이 다 돼 가는 노인들 보고 내가 어떨 때는  뭐 야단을 칠 때가 있습니다. 야단을 치면 이래 하면서 내가 하는 말이 그런 말  하고 있어. 하나님이 하셨지마는 나 안 만났으면 손자 그런 것들 업고 똥이나  치고 할머니 아이 좀 보이소 이러며 그래 가지고 천한 물건되고 아이들 실컷  보고 나도 손자가 와 가지고 '야, 할머니 좀, 그래 할머니한테 좀 가거라.' '안  가요.' '왜 좀 가거라.' '안 가요.' '왜?' '할머니한테 무슨 내음새가 나요. 내음새가  나요. 안 가요.'  이렇게 송장 내음새가 날 터인데 이래 놓으니까 이게 겨자가 나무가 됐다  말이오. 초인간적인 인간이 돼 놓으니까 이 늙은 뭐 할머니 영감 이거 뭐  쪼그라져서 반송장인데 마구 어글어글 끓습니다. 어글어글 끓어요. 이래 가지고  OOO권사님 내가 좀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합니다. 이 뭐 주 뭐한다고 말이지  늙어서 지금 송장 내음새가 나려 하면 내음새 나는 줄도 모르고 마구 와글 끓어  가지고 그 송장을 또 매고 가도 또 간답니다. 또. 메고 가도 뉘 집에 가야 된대요,  또. 메고 가야 그 해결이 된대요.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이제 이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돼 가지고 많은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이 뭐이기 때문에 그런가? 이 사람이 자란 건 네 가지로  자랐어. 진리로 자랐지, 진리의 실력이 있지, 영감 실력이 있지, 죄를 이기는  실력이 있지, 의를 행하는 실력이 있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하는 실력이 있지,  영생하는 실력이 있으니 이게 다 하나님의 실력이라. 하나님의 실력이니까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과 비슷한 하나님의 대리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  인생에게 모든 절망 낙망 다 불안 고통 이런 사람들이 다 찾아와서 거게서  깃들이게 된다.

 이것이 마지막에 결말로 증표이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와 가지고 해결을 짓고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가지고, 이래서 아주  폐물이 와 가지고서 참 귀한 사람이 되고 세상에 아무짝도 못쓸 폐물이 세상에  보배로운 사람이 되어지는 이 역사를 이루는 것이 우리 기독자가 정상적으로  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굳게 잡고 결심을 합시다. 우리는 먹으면 굉장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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