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믿음

 

1989. 1. 22. 주전.

 

본문: 마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여기 비유라고 하신 것은 그 실상이 아닌 것으로 실상과 비슷한 것을 인용해서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비유는 비유한 그 실상보다는 많이  성글고 정확지를 못한 것입니다. 비유보다 실상은 더욱 정확하고 세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비유에서 깨달은 그것보다 비유로 나타내고 있는 우리  구원 도리의 실상은 더욱 정확하고 세밀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상대해야  합니다.

 여게 사람이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갖다 심었다 이렇게 하는 이 비유는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주님을 가리켜서 말하고 또 자기 밭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는 무엇을  가리켜서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의 구속을 입어 중생된 새사람 참사람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변질된 타락한 사람이요 하나는 회복돼서  하나님의 형상 그 본질대로 되어 있는 참사람입니다. 세상에는 타락한 변질된  사람과 다시 중생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본질을 가진 참사람과 두 종류의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인류 시조의 원죄로 정죄받았고 또 우리의 본죄로 점점  죽어져서 완전히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다' 이렇게 에베소 2장 1절 이하에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요  악령이 우리 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다시 살려 참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셨습니다.

 이래서 여게 겨자씨로 말하는 것은 새사람 곧 참사람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기 전 옛날 그 사람이 아니요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중생된  새사람입니다. 믿기 전에는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이 원죄와 본죄로 그  생명이 끊겨져서 죽는 그 생명으로 생명을 삼아 가지고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 중생되지 못한 사람들은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마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하루나 일 년이나 지나면 지난 것만치 자기에게 있는 생명은 없어집니다. 끊겨진  그 생명이 다 없어지는 그래가 곧 세상에서 운명하는 그때인 것입니다. 마치  나무를 베어 놨으나 처음에는 생생하게 산 나무 같지마는 뿌리가 끊겨졌기  때문에 그는 시간이 가면 차차 말라서 완전히 죽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은 인생의 근본이신 창조주요 시은자이신 하나님과 그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죄로 인해서 끊어졌으므로 사람은 날 때부터 벌써 정죄  아래에서 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끊겨진 그 생명이 혹은 십 년, 혹은 팔십 년,  혹은 요새는 백 몇 세까지 사는 사람이 있다 하는데 백 몇 년, 그래 걸려서 그  생명은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 믿지 않을 때에는 사는 것이 아니라 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젊으면 저 사람은 아직까지 죽을  생명이 좀 많이 남아 있다, 어린 아이는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는  모른다. 저 사람은 어리지마는 그 생명이 다 끝나고 얼마 안 남았는지 모른다.

 이래서, 우리가 과거에 믿지 아니할 때의 그 생명은 생명이 하나님과 끊겨져서  죽어가고 있는 생명으로 우리들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랬는데 이제  영생하는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살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린 생명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대형 사죄, 대행 칭의,  대화친으로 이렇게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이 공로의 권세와 또 성령과 진리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진 이 영생 이 네 가지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네 가지가 우리들의 중생자의 생명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이 겨자씨로 비유한 이 참사람은 어떤 걸로 되어 있느냐? 몸과  마음을 합해서 육이라고 말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합새져 있는 육과 또 영 또 그  안에 생명인 이 네 가지로 된 생명 이래서 참사람이요 새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요 영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첫째 아담에게 난 사람은 영과 육, 육이라면 심신을 합해서 육이라고 합니다.

요사이 세계 신학에서 육과 영을 잘 구별하지 못해서 혼돈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마음을 영으로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은 곧 물질로 된 것이라  사람의 마음과 짐승의 마음이 차이는 있지마는 본질과 본성은 같은 것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영육으로 되어 있는 첫째 아담의 자손이, 생기를 불어 넣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졌으므로 산 영이 됐었는데 범죄함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죽은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죽은 영이요 죽은  몸이 되었습니다.

 영은 단번에 죽었고 그 육은 시간을 걸쳐서, 죽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영 죽은 사람의 육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형을  받으심으로 죄를 없이 하셨고 하나님의 공심판을 대신 행하셔서 우리를 공심판  통과를 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대신 우리와 원수된 것을 화목 제물이 되셔 가지고  하나님과 완전한 연결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존자이신 창조주이신 대주재이신 주권자이신 전지 전능의  완전자이신 이분과 우리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 죄를 대속했고 우리에게 없는  의를 대행해서 의를 갖추었고 또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의 결합을 시켜서 비로소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습니다. 살아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살아날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에 법적 그 해결을 지웠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대속한 사람들은 이 법적 죄, 의, 하나님과 불목된 문제를  해결을 하시고 때가 되면 그 사람을 중생시킵니다. 그러면 중생시키는 것은  본인이 모르게 중생이 됩니다. 이 중생관도 온 세계에 있는 교회 중에는 통일되어  있지를 않고 각각 달리 말합니다. 성결교에서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아서 한번 변화되면 그것을 중생을 그렇게 봅니다. 그것은 성경  교리상 틀렸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 이하게 보면 중생된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중생되지 많고  볼 수 없게 중생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게 비유로 나타내시기를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바람이 불어 지나가고 난 다음에 거게 피동된 모든  만물들을 보아서 바람이 동풍인지 남풍인지 바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중생되면 중생된 사람의 그후에 그 사람의 생애를 보아서 알 수가 있는데 그  신앙 행위라는 것은 중생된 지 즉시 되는 사람도 있고 몇십 년 있다가 중생된 그  행위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래서 성경에서.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고' 하는  그런 것을 차이 있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게 겨차씨로 비유한 이 겨자씨는 곧 중생된 새사람 참사람을  가리켜서 겨자씨로 비유했습니다. 하필 겨자씨로 비유한 것은 겨자씨는 씨 중에  작은 씨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겨자씨는 씨 중에 작고, 아무 볼품 없으나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땅속에 들어가서 썩지 않고 자라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들은 외모를 가치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보모라면  지식 능력. 그의 권세 그의 소유에 모든 이런 것들 고기덩어리의 미남 미인 이런  것들 건강 이런 것을 다 가치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독자의 가치는 거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자의 가치는 무식해도 좋고 유식해도 좋고 건강해도 병신돼도  빈부 귀천간에 상관없이 기독자의 가치는 그 속에 생명에 있다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겨자씨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새사람 참사람의 생명은 뭐인가? 우리의 영과 육이 이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생명은 무엇인가? 네 가지가 생명인데 이 네 가지로 우리 영이  살아났고 우리 육도 지금 법적으로는 살아났으나 실상은 산 행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산 행동을 하는 것이 자기 현실에서 이렇게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새사람이요 참사람이니 육과 영 그 안에 있는 생명은 네 가지가  생명이 되어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라 말은  힘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죽었다 말은 힘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능한  기사나 또 장사나 어떤 영웅이라도 그것의 전 힘은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  끊겨지면 그에게 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은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생명인데 네 가지로 된 이  생명은 끊겨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는 진리니 진리도 끝이 없습니다. 영감도 끝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저 학생 뭐꼬, O가가? 너? 반사하다가  되 놓으니까 조나? 졸면 소용 없어. 남 구원하고 제가 죽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과 하나님을 소망하는 이 영생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힘은 이 네 가지가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가치도 이 네 가지가  우리의 가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이 생애라 하는 것은 이 네 가지의 움직임의 활동이 우리의  생활이요 이 네 가지가 없는 불법이나, 불의나 죄나 인간 중심 위주 피조물 중심  위주로 활동하고 사는 그것은 다 우리 생활이 아니요 송장 놀음이요 옛사람의  생활이기 때문에 남의 생활입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 생활할 때도 있고 남의  생활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데 이 겨자씨가 처음에는 그렇게 아주 미약하고 보기에 아무 가치 없지마는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자란 후에는 이것이 뒤에 성장하게 되면 어찌  되느냐? 성장하게 되면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깃들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모든 정함이 없는 뿌리 없는 인생들을 가리켜서 공중에 나는  새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는 것은 새들이 태양 광선 직사를 할 때에 그들은  더워서 견디지를 못하고 피곤해서 이제 그 겨자씨 '나무 가지에 앉아서 쉼을 얻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 세상에 햇빛은 하나님의 정정한  정당한 공의성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성으로 인하여 인간들이 잘못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한 거게 대한 하나님의 공평된 이 공의성 심판성으로  인해서 인간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아이들의 얼굴은 다 보면 다 희희낙락하고 아름다운 미를 가지고 있는데  나이가 많아갈수록 얼굴이 흉한 마귀화됩니다. 마귀화 되어서 쭈그러지고 큰 근심  걱정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거는 왜 그런가? 자기는 모르고 자기 좋게 할라고 자기 욕심대로 자기  주장대로 행동했는데 그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공변된 그 심판의 보웅이 그에게  임하니까 피곤하고 더워서 견디지를 못해 가지고서 헐떡거리는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대통령도 헐떡거리고, 부자도 헐떡거리고 학자도 헐떡거리고  미남 미인도 헐떡거리고, 인생들은 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한숨으로 화해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피곤한 새떼같은, 매인 데 없고 정처 없고, 인간은 절대적으로  매여야 되는 것이고 뿌리가 박혀서 요동치 않는 것이 인생인데 이렇게 정처 없고  소속 없는 아무 소망이 없고 다 전부 절망 낙망 비관 고통 원망 시비 불만 불평  욕심 미움 이런 것으로 가득 차서 이거 있는데, 이러니까 이것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공평된 이 보응에 하나님의 이 모든 섭리는 그들에게 전적으로 다  어려움을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다 이 겨자나무에 와  가지고 깃들인다. 이 겨자나무가 뭐인지 깃들인다 참된 기독자에게 와 가지고  피난하고 은신하고 비로소 인간에게 평강과 만족을 누리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목적은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그것이 겨자씨가 잘  자랐느냐 안 자랐느냐 하는 그 실적인데 우리 겨자씨로 되어 있는 기독자들이  참된 기독자로 바로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하나 바로 자란 그런  사람들에게는 절망된 모든 인류들이 와 가지고 소망을 가지며 모든 원수 불평  그러한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가 예수를 잘 믿었느냐 못 믿었느냐 하는 그 표시는 뭐이  표시인고 하니 수많은 불행 가운데에 빠진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에 빠진  사람들이, 살인과 악독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와 가지고 변화받아 평강을 누리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와 가지고 깃들여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그것으로서 잘  자랐느냐 못 자랐느냐 하는 그 결과로 표시가 되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가 있는 산만당에도 사람이 끊쳐지지 않고 성녀가 있는 깊은  골짜기 섬에도 사람이 끊치지 않고, 사람은 세상이 악하다고 하지마는 참사람을  찾아서 모여드는 것이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참 겨자씨로 바로  자라지를 못해서 우리에게는 덕이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지를 못하고  해결을 해 주지를 못하고 평강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왔다가 도망쳐 가  버리고 와 가지고 편히 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겨자씨가 어떻게 자라면 이렇게 되는가? 이 겨자씨는 그 겨자씨를 방  천장에다가 달아 놓으면 암만 오래 있어도 그것은 나중에 좀먹어서 죽어 버리고  마는데 겨자씨의 성공은 흙입니다. 밭에다가 심어 놔야 겨자씨가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된, 진리와 영감과 피와 영생으로 중생된 기독자들의 성장과 성공은 어데  있는고 하니 이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 그것으로서 자기의 성공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밭이라고 비유 했는데 이 세상이 이것이 우리들이  심기워져 있는 우리의 환경이요 주위입니다.

 잠깐 그 겨자씨를 논한다고 하면, 흙이라 하는 것은 본질과 본성이 뭐 크든지  작든지 그들은 땅 만들고 흙 만드는 것이 저들의 본질과 본성입니다. 사람도 땅  속에 들어오면 흙을 만들고 쇠도 들어오면 흙을 만들고 나무도 들어오면 흙을  만들고 다 썩여서 흙을 만들라는 것이 땅의 본질과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 있는 겨자씨를 썩여서 흙을 만드려고 달려듭니다. 겨자씨에  달려드는 것은 땅에 있는 지기가 먼저 달려들 것이고 수분도 달려들 것이고  온도도 달려들 것이고 각종 비료의 그 모든 거름 기 운들도 달려듭니다.

 그것들이 달려들면 쇠도 썩여서 흙을 만들고 나무도 썩여서 흙을 만드는데 이  생명 있는 겨자씨는 그것들이 오면 썩지 않고 그것들로 더불어 싸워서 그는  썩이려고 하고 이 생명은 썩지 않으려고 시비하다가서 수분도 마시고 거름  기운도 마시고 땅에 각종의 모든 요소의 지기도 마시고 온도도 마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참 온도같은 아주 쫓은 무슨 폭리나 아주  폭등이나 횡재같은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하루 아침에 아주 잘되는 그런  일도 있고 아주 또 썩이는 거와 같은 모든 죄악이 와 부딪혀지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우리에게 참 시원하고 컬컬하고 아주 좋은 그런 물같은 고런 일들도 있고  땅에 지기와 같은 이 세상 모든 세력들 온갖 것들이 와서 부딪힙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중생한 이후에 신앙 생활 그 일생 동안을 만일  잔기를 기록한다고 하면 뭐 파란 곡절 굴곡 이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좋은 것도 오고 하찮은 것도 오고 고통도 오고. 기쁨도 오고 참 아주  요행도 오고 다행도 오고 불행도 오고 별별 일들이 가득히 와서 부딪힙니다.

 부딪히는 그것은 한 말로 말해서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세상화시키려고 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난 진리를 없애고 나를 세상화시키려고,  영감도 없애고 세상화시키려고,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도 없애고  세상화시키려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인 이것도 세상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 것은 좋은 것이 오는 것이든지 나쁜 것이 오는  것이든지 평얀이 오든지 슬픔이 오든지 괴로움이 오든지 뭐 수월함이 오든지  어떤 것이 오든지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현실은 한 가지가 아니고 거게 희로애락의 각양의 모든  것들이 와서 부딪혀 옵니다.

 부딪혀 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내가 중생된 이 새생명을 이것을 죽여서  죽은 자, 세상과 같이 죽은 자 만들기 위해서, 이 네 가지로 살아난 우리들을 죽은  자 만들기 위해서 와서 부딪혀 오는 역사입니다.

 그래 오나, 우리의 영은 다 살아났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고 우리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이 이것이 지금 법적으로 살아났고 주격이 살아났기 때문에 살아난  것인데 이 심신이 이 산 생활, 산 생활, 영생이 되는 생활, 진리 생활, 영감 생활,  무죄 생활, 의로운 생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생활,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 향하여 달리는 이 생활, 이 생활을 육체로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것들이 와서 부딪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이 비유에서 자기에게 희로애락의 어떤, 흥망성쇠의  어떤 그 현실이 부딪혀 오든지 이 부딪혀 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중생된 내  생명을 빼앗기 위해서 온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존 지식으로 알고, 그러면  이것이 오는데 그 결과는 어찌 되느냐? 이것에게 삼키워지면 나는 흙이 됩니다.

이것에게 삼키워지면 나는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삼키면 내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밥이라 말씀했습니다.

 삼키는 것은 어떤 것이 그것을 삼키는 것인가? 이 중생된 하나님의 형상인 이  새생명이 자라는 데는 뭘로 자라는가? 이 자라는 것은, 자라는 것은 뭘로  자라는가? 이것은 그 현실을 내가 먹어 버리면 자랍니다.

 현실을 먹다니? 먹는 것은 어떤 게 먹는 것인가? 요한복음 4장 34절에 보면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내 양식이 있다.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나 먹을 양식이  있다.' 너희들이 모르는 나 먹는 양식이라 말은 영생하는 생명이 먹는 양식이라  말입니다. 양식은 뭐이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그것이 양식이라고 주님이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어떤 희로애락 흥망성쇠 뭐 생사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그때에 우리가 그것을 먹으면 양식이 돼서 새사람은 자라게 됩니다. 먹는 거 어찌  먹는가? 그 현실에 어떤 것이 부딪혀 오든지 그때에 내가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단행합니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합니다. 그대로 행하고 그  일을 이룹니다. 이루면 그 현실은 나에게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건이 우리의 양식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양식은 주님의 피와  살과 진리와 영감이 우리 양식입니다. 우리 중생된 새사람은 진리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영감이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하늘나라의  소망이 아니면 먹지 않습니다. 그런 거 아니고 떡이니 밥이니 이거는  고기덩어리가 먹는 것이지 우리의 속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돼 있는 참된 인격  온전한 사람은 그런 걸 먹고 살지 않고 진리를 먹고 삽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 이 진리는 나에게 부딪힌 그 현실에 내가 진리대로  단행하는 이것으로써 내가 그때에 그 현실을 통해서 그 진리는 내 양식이 되고  내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자라가는 것은 진리로 자라가고 영감으로 자라가고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예수님의 피공로로 자라가고 영생으로 자라가니까 그것이 다  뭐입니까? 하나님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으로  자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자기가 충만해서 자라가고 이러니까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과  꼭 같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과 꼭 같기 때문에 절망된 모든 피조물들이  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와 가지고는 그들이 다 평안한 보금자리를 엎을 수가  있고 깃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거튼거튼 지나가니까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지금 시간이 다 됐고  오늘은 또 할 행사가 있어서 중단하는데 오후에 나오면 압니다.

 모르면 못 삽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땅위에 하룻밤 나그네를 보고  희로애락을 정하고, 영원 무궁을 보고 희로애락을 정하지 못하는 것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토록 있을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영생토록 있을 양식은 곧 이제 말한 이것이 영생토록 있을 양식인 것입니다.

오후에 나오면 그 남은 것을 계속해서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를 진리와 영감과 피와 영생으로 살려 주신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양식을 저들에게 증거하시고 우리에게 허급해 주시지마는 우리 단독으로서는  이를 이해하고 납득하고 시행하여 먹을 수 없는 저희들입니다. 우리 각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유한한 저희들이 지극히 크고 무한함을 저희들이  받아들여 양식삼아 유한한 것이 무한으로, 불완전한 것이 완전으로, 사망의 것이  생명으로 자라가는 이 역사이오니 주님이 성령으로 충만케 하사 우리 한 사람도  쭉정이 되지 말고 다 알곡 되는 저희들 되게 하사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의  실상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기도)  주님, 우리들을 비유하신 대로 영생하는 새생명으로 참사람으로 살려 주셨사오니  이제 심신이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되어 주님과 세상에 빛이 되며 모든 세상에  소망이 되고 참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의 이 모든 지체와 빛을 나타내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또 많은 형제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들은 주를 위해서  이렇게 사랑을, 깨닫고 수고하는 것이오니 주님이 그들에게 더욱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오늘 처음으로 나온 이 형 제들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사오니 모든 있는 것보다 크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기를 의심 없이  믿는 저희들이 되므로 이 세상을 염려 없는 평강 가운데서 살아나가며 헛되지  아니한 알속 있는 생애를 이루어 가도록 주님이 끝까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오늘 남은 시간에 모든 행사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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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건설구원의 어려움/ 마가복음 10장 17절-31절/ 840509수새집회 선지자 2015.10.23
615 건축연보/ 마태복음 28장 16절-20절/ 820523주새 선지자 2015.10.23
614 게을 죄-설교준비/ 고린도전서 2장 1절-5절/ 861201월새 선지자 2015.10.23
613 게하시의 저주/ 열왕기하 5장 15절-27절/ 850521화새 선지자 2015.10.23
612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80705화새 선지자 2015.10.23
611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80701금야 선지자 2015.10.23
610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 880705교역자회 선지자 2015.10.23
609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41107수새 선지자 2015.10.23
608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12주새 선지자 2015.10.23
607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 880713수새 선지자 2015.10.23
606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10금야 선지자 2015.10.23
605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0금야 선지자 2015.10.23
604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2주후 선지자 2015.10.23
» 겨자씨 믿음/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2주전 선지자 2015.10.23
602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90507주전 선지자 201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