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가 근심없이 사는 법

 

1981. 3. 25. 새벽(수)

 

본문:요한복음 14장 1절~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편집한 자료임=녹음대조 요함)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의 근심이 어디로 좇아 나며 또 이 근심을 없이 하는  방편을 무엇인 것을 가르칩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근심이 있게 되는 이유는 대충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서  근심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은 믿지 못하고 이 피조물 된 이 사람과 만물만을  보고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치 못하는 데에서 성도의 근심이 나오고 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가지고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예수님을 인정치 못하는  데서 근심이 나오고.

또 하나는 천국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근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을 주신 것은 이 세상을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주신 것이 아니고  세상을 주신 것은 세상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마련하도록 하늘나라를 마련하는  데에 이용할 비용과 같고 이용할 재료와 같은 하늘를 마련하기 위해서 주신  세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치 못하는 데서 근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근심 나오는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서 잘못 알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잘못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잘못 믿는 데서 믿는 사람의  모든 근심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근심 없는 자로, 항상 기쁘고 평안한 자로 살 수  있는 방편과 길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고, 또 우리가  영원히 가서 살 하늘나라를 믿는 데서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겠고, 하나님을 알도록 성경을 보고 연구를 해야  되겠습니다. 또 아버지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을 수 없고 부모도  자녀를 믿을 수 없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친구가 친구를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언제 방송을 들어보니까 서로 믿고 살자고 하던데, 참 허무한 소리입니다. 그  말하는 것은 백성들은 정치가를 믿고 정치가는 백성들을 믿도록 이렇게 사람들의  정신 통일을 시켜보려고 하는 말이지만 참 허무한 소리입니다. 그런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 변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그렇게 변하는가? 변치 않으려  해도 변치 않을 실력이 없으니까 변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 속일 마음이 없습니다. 자녀도 부모를, 친구가 친구를 속일 마음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바로 해보고 싶고 자기대로는 좋다고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말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잘못되더라 말입니다.

인간이 미래를 두고 이렇게 저렇게 경영은 하지만 미래를 알 지혜가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아무리 좋게 해주고 싶어도 모르니까 바른 지도를 바른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을 믿고 그 말에 절대성을 두고 지도를 받았는데, 미래가  현재로 닥치니까 다르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왜 못 믿느냐 고의적으로 그  사람이 나를 해치려고 해서가 아니라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얕은 세상에서 보면, 부모가 자식을 참 좋게 해주겠다고 그 어린 것을  끌고 ‘네가 복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이렇게 해야 한다.’ 하면서 깜깜한 밤에  산골로 데려갑니다.

뭐 하려고? 자기가 공 드리는 바위 앞에 데리고 가서 빌어야 복 받는다고 끌고  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에 우상 섬기는 자는 망한다고 했으니 부모가  자식을 망치려고 끌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로서는 몰라서 망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를, 불교 믿는 사람들은 불교에 공을 드려 잘 되도록  하려고 하는데 성경을 보면 그것은 전부 망치는 길입니다.

또 무지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녀에게 대해서 ‘너는 아무래도 고생시킬 수  없다. 편히 살아라.’ 하면서 땀 안 흘리고 수월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데,  그래 가지고 이발소에 취직을 시킵니다. 이발소는 항상 마른자리에서 손만  놀리면 되니까 이발소에 취직시킵니다.

또 손톱 밑에 흙 넣지 않고, 천한 노동일 하지 않고, 좋은 방안에 앉아서 가위로  원단을 재단하면서 편히 살도록 하려고 양복집에 취직시키고, 또 요릿집은 만날  기쁘고 즐거워하고 춤추고 노는 곳이니까 그곳에 취직해서 항상 기쁘게 살아라,  해서 부모들이 그렇게 취직을 시킨다 말이오.

그렇지만 지혜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왜 자녀를 그런데다가  취직을 시킵니까? 저 자전거방이나 철공소나 건축일 하는 데 보내서 어릴 때부터  된 일 할 줄 알고 땀 흘릴 줄 알고 고생할 줄 알고 수고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들어 놓으면 문제가 없는데, 왜 하필 자녀들을 못 쓰는 그런 곳에 취직을  시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부모 지혜로는 거기 취직을 시켜야 자식을 제일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자식을 뒤에 춤추러 돌아다니는 아무짝도 몹쓸 한량을  만들었고, 죽을 때까지 죄만 짓고 돌아다니는 몹쓸 길 망할 길로 인도했지요.

이발소에서 일해서 무슨 성공이 있을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다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작은 일은 알 수 있지만  큰 것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자식 공부를 그만 시켜라. 네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지식도 한정이 있으니까 네 정도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 줄 알지만 진리를 거슬리면서 할 것은  없다. 그만 그 아이는 중학교 공부 정도 시킨 다음에 공장에 보내라.’ 하면 ‘목사님 자기 아들 공부는 시키면서 왜 우리는 공부시키지 말라고 하는가?  우리를 멸시해서 그런가? 교육열이 없어서 탈이니까 다 팔아서라도 고등학교를  시켜야겠다.’ 해서 공부를 계속시킵니다.

시키지마는 형편이 어려우니까 넉넉히 시킬 수 없습니다. 또 그 아이가 말하기를  ‘어쨌든지 내가 대학만 하면 가정은 문제없습니다.’ 이러니까 또 대학을  시킨다고 시작하지만 한 일 년 하고 나니까 등록금이 없어서 공부를 못  시킵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이제까지 살면서 제가 본 대로는 눈이 열려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사는 것을 보면서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저렇게 길러야  하는데 우리 부모는 이렇다.’ 해서 반항합니다. 또 실력은 없는데 눈은  높으니까 일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짝에도 못 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공부를 못한 사람은 국민학교 공부만 하면 생활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학 공부한 사람은 국민학교 공부만 해서는 아무 필요 없고  그까짓 것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자기가 못 가본 길이라서 그 길만 가면 될 줄 알았는데 가보면 아니라 말입니다.

인간이 다 욕망을 가지고 붙들지만 가지고 보면 또 아닙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걸 찾습니다. 자꾸 올라가면 만족될 것 같은데 올라갈수록 불만은 더 커집니다.

사람들이 다 무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만사를 바로 아는 전지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가 안다 할지라도 실력이 없기 때문에 해주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내게 행복이 되는 줄 알아도 그 사람이 해줄 만한  실력이 없으니까 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의 지혜가 모자라고  능력이 없으니까 불충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도 어떤 경우에는 사랑이 되지만 어떤 경우를 닥치면 원수가  됩니다.

제가 위천에 있을 때인데 이 정권 때입니다. 자녀가 빨갱이 공산주의인데, 부모  집이라고 찾아오니까 부모가 음식을 해서 먹이면서 뒤로는 신고를 해서  죽여버렸습니다.

또 공산주의자들이 우익인 부모를 잡아다 놓고 자녀에게 ‘네가 부모를 안  죽이면 너는 총살당한다.’ 하니까 부모 목숨보다 제 목숨이 중한지 자식이  부모를 죽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뭐 사랑 사랑 하다가도 돈 몇 푼만 관계가 되면 당장 원수가 됩니다. 이런  형편만 당하면 달라집니다. 배만 고파도 달라져요. 급한 일만 있어도 달라져요.

6·25때입니다. 고부 사이가 그렇게 좋았는데, 피난 내려오다가 며느리가 파편에  맞아서 창자가 나왔습니다. 창자는 나와도 죽지를 않으니까 엄마를 부르는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위에서는 자꾸 내려오니까 약한 힘으로 끌고 가지도 못하겠고  그곳에 있다가는 다 죽을 판이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할 수 없이 혼자 피했다가  나중에 가서 보니까 그 자리가 불에 타서 새까맣게 되어서 없어졌더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간사랑은 다 한정이 있습니다. 지혜도 한정이 있어서 아는 것만 알지 모르는  것은 더 많습니다. 그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면 다른 일도 다 할 줄 알 것 같지만  또 다른 일은 못 합니다.

이렇게 지혜도, 능력도, 사랑도 모자라기 때문에 땅 위에는 정말로 믿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믿고 삽시다,  믿고 삽시다!’ 하는데, 그런 소리는 다 철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믿을 만한 분은 어떤 분이라야 하겠습니까? 사랑으로 말하자면 죽어도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라야 믿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  중단되지 않고 생명까지도 나를 사랑함으로 바칠 수 있다면, 어떻게 다급하고  어렵고 소유가 요동되고 고문과 고형을 당해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 변치  않을 수 있는 분이라면 그 사랑은 믿을 수 있지요.

또 알지 못하심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야 하겠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우주와  영계 만물 모든 것에 대해서 환하게 아는 전지하신 분이면 믿을 수 있지요. 그  지혜는 믿을 수 있습니다. 또 하려고 하면 못할 것 없는 전능한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그러나 전지전능을 가졌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없다면 믿을 수 없습니다.

전지 전능자가 당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당신의 전부를 날 사랑함으로  영원히 기울일 수 있는 이 신실한 약속, 변하지 않는 분이 약속을 했다면 믿을  수 있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만일 이 사실이 없으면 너희들에게 말할 것이다. 뭘 말입니까?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하신 것은 백 년 만 년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무궁이라는 말입니다. 「많다」는 것을 공간적으로 많다는 말이 아닙니다.

「있을 곳이 많다」는 말씀도 여기도 저기도 있을 곳이 많고 넓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간적으로만 많은 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많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영원무궁합니다. 또 평강적으로도 많습니다. 얼마든지 평강이요, 영원히  평안합니다. 기쁨으로도 영원히 많은 그런 세상이라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근심은 세 가지를 바로 알지 못해서 오는 것이요, 세 가지를  바로 믿는 데서 모든 근심은 물러갑니다. 세 가지를 바로 아는 사람은 땅위에  인간이나 어떤 만물이나 이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 세상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이백년 전에 왔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다  망하고 죽었습니다. 이런데 세상에서 장생불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소망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은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믿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만물이나 세상은 내 구원에  이용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이용물인 줄 압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것이 내게 오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것이 그들에게  갑니다. 하나님의 것이 인간을 통해서 내게 올 수 있는 은혜의 기관이요,  하나님의 것이 나를 통해서 그에게 갈 수 있는 은혜의 기관입니다. 이러니까  나에게 하나님 다음으로 귀중한 것이요, 나도 하나님 다음으로 그에게 귀중한  책임을 진 자입니다. 인생이 이렇다는 것을 바로 알고, 아무것도 없을 때 혼자 계신 당신의 사랑이 발동을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발동했습니다. 발동했다는 말은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차가 시동이 걸려야  움직이는 것처럼 자존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처음 움직임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움직임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당신과 같은 자를 만드시려는 목적이 움직였습니다.

목적이 정해졌다 말입니다. 또 목적을 위해서 당신의 전지의 지혜로 예정이  시작됐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예정한 그대로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존자 당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완전한 기쁨으로, 완전한 뜻으로,  완전한 목적으로, 완전한 예정으로, 완전한 능력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이분이 이 모든 걸 운영하시고 관리하시고 홀로 섭리하시고, 이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도성인신 하셔서 십자가 대속으로 구속하시고 지금도 책임지고  노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위에 근심 없는 자는 어떤 자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할 것이며」 이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도성인신 하신 신인양성일위인 대속주 주님을 믿고,  하늘나라를 믿고, 세상 모든 것은 사랑하는 주님이 홀로 거머쥐고 섭리하시는  것이니 우리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이 구원 역사를 믿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라는 말은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니 조급할 게 없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고, 어딜 가더라도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까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형을 당한다고 해도 죽음은 겁나지 않고, 이 사형의 배후에도 주님이  역사하시니까, 내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사형이 왔으니 어찌할까? 주님이 나를  사랑함으로 하시는 역사요, 주님의 사랑의 권능이니 여기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책을 보니까 부부가 선교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작은 배를 타고  가는데 어떻게 풍랑이 일든지 그만 사람들이 다 혼돈이 되어 있는데 남편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습니다.

부인이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잠만 자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마구 흔들어  깨우니까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스럭거리더니, 칼을 찾아서 쑥 빼더니  아내를 찌르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전도하러 가면 한 손에는 성경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전도했는데, 칼을 찾아서 쑥 빼더니 아내를 찌르려고 하니까  그걸 보고는 부인이 까르르 웃습니다.

남편이 왜 웃느냐고 물으니까,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난하는 줄 아니까 웃지요.’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하나님  아버지가 지금 우리를 사랑함으로 희롱하시는데 왜 그렇게 겁을 내느냐?’ 그럴  때 부인이 회개를 했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솜씨 아닙니까? 그분이  전능자입니다. 물에 빠져도 건져 올릴 수가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믿나 안 믿나, 의지 하나 안 하나, 바라보나 안 바라보나,  네가 나를 사랑하면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하는 걸 보시려고 아브라함에게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너무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당신보다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번 시험했던 것인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분의 약속을 신실히 믿으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조급하고 걱정하고 있습니까? 먹을 것이 없으면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뜻대로 그 자리에서, 신앙 양심대로 그 자리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식구들이 밥을 굶는데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예수 믿는 놈들은 저렇게 한다.’  하면서 욕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에게 닥친 일을 부지런히 합니다.

양심대로 일하지 않는 것도 성경에 위반된 죄요, 거짓말하는 것도 죄요, 속이는  것도,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자기에게 닥치는  일만 부지런히 하면 어디까지든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들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으니까  당신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언행심사로 주님의 뜻대로 할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다가 배가 고파서 굶어 죽게 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 되니까 죄를 지어야 밥을 먹겠다.’ 하는 사람 있겠습니다.

또 ‘아버지가 주지 않는 것을 죄지어 가면서 먹고 마실 수는 없다.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라야 먹을 수 있으니까 기도해야 되겠다.’ 해서 ‘당신이 주는 것  외에는 굶어 죽어도 안 먹습니다. 계명 어겨서 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고파 죽겠으니까 먹을 걸 주십시오.’ 이렇게 아버지께 구하는 신앙도  있겠습니다.

또 ‘당신이 다 요량하시고, 내가 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내가 뭘 달라고 구할 게 없다. 이 시간에 내가 할 일은 배가  고파도 당신 사랑함이 변치 않고 요동치 않고 당신의 계명 지킬 것뿐이라.’  하면서 전적 그분에게 다 맡기고 그분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세 층으로 말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신앙을 원합니까? 배고프니까 계명 버리고 달아나는 사람, 배고파도 계명 버리고 달아나지 않고  계명을 지키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 든든히 당신을 믿고  의지하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놓고 자기 할 일은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이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신앙이 되기를 원해야  하겠습니까? 이분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알지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당신의 생명을 다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분을  든든히 믿고 의지하면서 당신이 원하시는 뜻이 있으니까 다 맡기는 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또 최고의 신앙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두 번째도 좋습니다.

‘배고파 못 견디겠습니다. 좀 주십시오!’ 하고 달려드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좀 어린 신앙이지요.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입니다. 주님은 하나님만도 아니요 사람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양성 일위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지 않으셨지마는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인성이 죽을 때 하나님이 이 죽음의 고난에 다 참여했습니다.

당신은 죽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이 고난에 다 참여해서 고난은 당신이  받았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이런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한 죽음으로 무한한  숫자를 다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과 세상이 어떤 것임을 알고 믿는 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또 믿을 수 있도록 성경을 보고 연구합시다. 그리고 한 가지  할 일은 눈감고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실지로 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차차 차차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주님 믿는 믿음과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는 이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믿음을 달라고 오늘 아침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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