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물생심


선지자선교회 1985년 9월 16일 월새 

 

 본문 :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는 죄를 생각할 때에 잘못하면 죄를 찾지 못하고 잘못된 이름으로 듣기  쉽습니다. 죄는 삐뚤어진 것이 죄입니다. 삐뚤어진 거. 하나님과 나와 관계에  삐뚤어진 게 죄요, 사람과 나와 관계에 삐뚤어진 게 죄요, 모든 일에 대해서  삐뚤어진 게 죄요, 물건에 대해서 삐뚤어진 게 죄요, 내가 말 한 것이나 행동한  거나 그 모든 것이 다 삐뚤어진 게 죄인데, 그러면, 삐뚤어진 게 죄라면 무엇을  무슨 법을 표준해 가지고 삐뚤어진 게 죄냐? 대한민국의 법이냐, 혹은 세계에  유명한 로마 나라의 법을 표준해서냐. 또 일본 나라의 법을 표준해서냐 뭐  민주주의의 법을 표준함이냐, 그렇지 않으면 공산주의의 법을 표준 함이냐? 그런  거 아니고, 신구약 성경 말씀인 하나님의 법을 표준해 가지고 이 법에 삐뚤어진  것이 다 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삐뚤어진 게 죄인 줄 알면 삐뚤어진 걸 잘  찾을 수 있는데 죄라 하면 무슨 자기가 이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거  그런 거 외의 거는 다 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가집니다.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법인 신구약 성경 말씀을 준해 가지고 거기에 뻐뚤어진 것이 다 죄인  것입니다.

 이 산상 보훈은 해석들이 아주 분분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기에, 바로 깨닫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혹 다른 주석들을 보면 참고는 하지만 그만 여기서 배운 것이 저  밖으로 끌려나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들이 자기와 가까운 것을 잡을라고 애를  씁니다. 자기 견해와 자기 지식과 가까운 것을 인정을 하고 잡을라고 하고 자기  지식과 거리 먼 것은 이해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잡기를 싫어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대개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으로 살던 것이 우리인데.

옛사람으로 살았다는 말은 성령의 감화를 받지 못하고 악령의 감화를 받아서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 중심 그것이 악성입니다. 원죄입니다 그것이 자기  위주 그것이 원죄입니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한 행동 한 행동해서 그 행동을  모아 놓은 것이 그것이, 연습해 놓은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 그것을 구습이라  이랍니다. 구습. 안 믿을 때에 안 믿는 행동을 한 번 두 번 자꾸 해서 이것이  저축된 것을 가리켜서 그것이 구습이라 옛날 연습 해 놓은 것이라 그 말이오.

예수님 믿기 전 연습해 놓은 것이라 그거요. 옛사람으로 사는 연습해 놓은 거라,  그래서 '구습을 버리라' 이랬습니다. 모든 구습을 버려야 되지 구습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술 먹고 돌아다니던 그 사람이 술 먹고 돌아다니는 그  술 친구하고 술 먹는 그 사회에 꽉 뿌리가 박혀 가지고 그저 밤에도 그 생각.

낮에도 그 생각, 만나면 그 사람들, 이러니까 그 자리를 떠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노름하는 사람도 그 구습에 붙들려서 거기서 벗어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또 장사하던 사람들도 그 구습에 붙들려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조사 내가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교편 잡고 교편 생활 한 지가  이십 오년입니다. 그 이십 오 년간을 늘 학교 교단에서 그저 가르치는 일 교편  잡은 그 일을 해 나왔는데. 그때 제가 한번 만나 가지고 나이를 물으면서 '만한  연령이라면 벌써 세월이 거의 지나갔다. 시기가 지난다. 네가 돌아설 맘 없느냐'  이랬는데, 그러면. '이렇고 이렇고 사정이 이렇다' 해서 그래 이렇게, '할라면  지금 돌아서야 된다' 이랬는데, 그때에 그만 그것을 사면하고 다시는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답니다. 물론 만나자고 많이 하겠지만 만나지도  안하고 딱 단절을 하고. 그러면, 구습을 단번에 버린 사람입니다. 구습을 단번에  버릴 수 있다는 거. 술 먹는 그런 것도 구습이고. 담배 피우는 것도 구습이고.

제가 안 믿을 때에 이런 사회에서 저런 분위기에서 살고 이런 일 저런 일 했던  그런 것이 다 구습인데 그런 것을 딱 끊어 버릴 수 있는 그것이 용기입니다.

어제 내가, 전화가 왔는데 들으니까 장년반은 마흔 다섯 명이 예배를 봤고 또  주일학교는 쪼끔 내려서 98명인가 그래 예배를 봤다 그런 말 들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도,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와 거리가  가까운 거 그런 것은 사람들이 취하려고 해도 거리 먼 거는 취하지 안하려고  합니다. 또 자기가 무슨 행동할 때에 자기 의사와 거리가 먼 그런 것은  순종하기를 싫어하고 자기 의사와 거리가 가까운 그런 거는 순종을 하기를  쉬워합니다. 그건 자기와 많이 틀리지 안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자기와 거리 먼 그런 것을 탁 잡고 그만 그래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이든지 끊는 거는 쪼매씩 절제해서 끊어야 된다,  담배를 열 갑 피우던 사람이 아홉 갑, 또 여덟 갑. 다섯 갑 두 갑, 이라는  사람은 담배를 잘못 끊습니다. 그저 단번에 딱 끊어 버리는 사람은 그만 그거는  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에 나와 거리가 비슷하게 가까운, 내  동무가 되고, 나와 같은 동류가 되고 같은 사상이 되는 그런 계명만 잡고  취하려고 하지말고. 그 너머. 나와는 거리가 정반대 된. 거리가 먼 그런  성구들을 보고 단정을 짓고 '이대로 행하겠다' 하고 나서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다 용감스러운 사람이요 또 회개가 빨리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이 빨리 돼 갑니다.

 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마음이 빈  사람으로 이래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또 마음이 겸비한 사람이라 겸손한  사람이라, 겸손한 사람으로 겸비한 사람으로 그렇게 또 해석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자기가 자기를 과대 평가 하지 안하고 자기를 과소 펴가한 사람,  자기, 자기가 모든 것을 장점만 보는 게 아니고 단점을 봐서 그렇게 자기의  부족점을 찾는 사람이 심령 가난한 사람이라 그렇게 해석한 것이 제일 유력하게  해석한 것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는데 어떤 복을 받느냐 하면 천국 복을 받는다 그렇게 해석해 놓은 것이 다  일반적입니다.

 저는 깨달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비슷한 거 같지만 아주 다릅니다. 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왜 가난하게 됐느냐? 가난하게 된  이유는 천국 때문에 가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보니까. 천국이 자기  것이 돼 있기 때문에 천국을 보니까, 천국을 보기 전에 세상을 볼 때에는 모든  가난이 세상에 있었는데 '아 아무것이 집에는 피아노가 두 대 세 대 된다. 또 그  사람들은 지금 집을 일억짜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 친구 아무것이는 삼억짜리를  집을, 주택을 가지고 있다 또 그 사람들은 지금 한 달에 수입이 얼마가 된다'  자꾸 그것을 보니까 거기에 대한 가난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있다고  그걸로 족하는 게 아니라 또 보니까 그 위에 부자가 있으니까 '아이구, 이까짓  거 뭐.'  그 남편이 있다가 '여보, 이만하면 됐지? 주택 이만하면 됐지?' 이랬는데  '아이구 네. 좋습니다. 만족합니다. 이런 좋은 주택을 주셔서 참 수고했습니다.

당신은 내 남편 될 자격이 있고, 참, 참 내가 아주 존경하고 만족합니다.'  이랬는데 삥삥삥 돌아다니면서 좀 한번 바람 한번 씌어 보니까 아무가 주택을  가졌는데 주택 속에 가 보니까 큰 동산이 들어앉았고 거기에 보턴을 누르니까 이  방이 저 방 되고 저 방이 이 방 되고 뭐 어덴지 그만 뭐 혼막해서 알지 못할  만한 그런 집이 있는데, '이런 집은 얼마나?' '이 집은 지금 아마 몇 백 억은 갈  겁니다.' 그 집을 가보니까 그만 저거 집을 생각하니까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서 와 가지고 시투른 합니다. '여보, 왜 시투른  하요?' 이러니까 그저. '뭐 괜찮아요' 이래도, 시투른 하니까 남편은 또 아내를  사랑 하니까 이거 마음이 만족해야 될 터인데 이놈의 마음에 만족이 없으니까  그걸 알아야 되겠다 말이오. 물으니까 '아무데 그 사람들한테 한번 갔는데, 저거  집에 가자 쌓아서 그래 한번 갔더니만 그 집은 뭐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이런데, '그 집을 보니까 우리 집은 통시집 같아요. 변소간 같아요'  이라며 시투룬하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걸 보면 자꾸 거기에 대한 가난성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권세를 가졌는데, 이제 동장을 하고 난 다음에는 '아, 이만  하면 됐다. 내가 동회에 말단 직원으로 있다가 동장이 됐으니까 족하지 않나?  동장이 구청장을 보니까 동장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 구청에서 동장을  대우하기는 하지만 동장을 구청장에 가서는 뭐 아주 종으로 잡아 부리고  이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만 동장으로 만족지 안하고  동장으로서 이제, 동장으로 가난성이 된다 말이오. 동장 그걸로서는 그건 아주  가난한 감이 생겨져서 '내가 언제 구청장이 한번 못 되나?' 이것도 또 자꾸  올라간다 그 말이오. 나중에 가서 시장 보니까 그래, 시장을 보고 그러니까, 또  장관 중에도 머리 장관이 또 있다 말이오. 시장이면 거의 장관 거석하지만. 저  진해 시장으로 있던 분이 그분이 '이제 시장으로 있으니까 족하지?' 이러니까  '아이구, 뭐 진해 시장이 어디 시장입니까?' 또 부산 시장을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 그 말이오. 자꾸 이래서, 그걸 보면, 자꾸 좋은 걸 보면 자기 가진 것이  가난한 감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교육계에서 아주 자기 권위가 유력한데, 그래서 자기 권위로서  족하게 여기고 가족들이 모두, 우리 남편이 제일 일등 교수고 이랬는데 떡 다른  세계 국제에 나가 보니까 그 학교 뭐 더 높은 학교들이 있는데 그 학교에 무슨  박사 무슨 박사 무슨 교수 무슨 교수 하니까 그만 거기에 봐 보니까 이거는 뭐  종이요 입학생이요 이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에이,  내가 안 되겠다. 내가 진작 내가 이런데 널리 봤더라면 이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어서 내가 공부를 해서 준비를 했을 건데 내가 준비를 못했다.

지금이라도 교수 이까짓 거 치워 버리고 내가 준비해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또  보니까 또 올라가야 되겠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 나가 보니까 또  아무것도 아니고 또 올라가야 되겠고 이래서, 자기의 가진 것으로써 너무  빈약성을 느껴서 자기 가진 것보다 크고 높은 것을 보니까 자꾸 거기에 대해서  욕심이 생겨지고 자기 가진 것에 대해서는 그 가난을 느끼고 부족을 느끼고 더  좋은 거 높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다 가난성이라 이랍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돈 가난에서 사는 사람 있고. 돈 가난에서 산다  말은 돈이 없어 가난한 그 가난보다도, 가난이라 하는 건 돈이 없어 가난이  아니고 자기의 돈 가진 것보다도 더 크고 많은 돈을 봄으로 가난성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아주 재산이 없습니다. 재산이 없어 가지고 그저  쌀 한 되밖에 없습니다. 한 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쌀 한 되 가졌으니까  그까짓 거 쌀 몇 십 가마 몇 백 가마 가진 사람 재산의, 몇 천 만 원 가진 사람  요량하면 쌀 한 되 있으니까 그까짓 거야 거 지 아닙니까? 거지이지만 그 쌀이  과거에 없었던 사람은 '아이구, 오늘은 쌀이 한 되 있다. 쌀이 한 되 있으니까  우리 가족들이 이제 밥을 해 가지고 먹을 수가 있다' 그렇게, 쌀 한 되가  있으니까 아이구 이렇게 쌀 한 되가 생겼다고 만족하고 뭐 좋아하고 기뻐하는,  그럴 수도 있고. 이제 쌀 한 되 있는데 그 위에 다른 사람 쌀가마 있는 거  보니까 '아이구, 우리 집에는 쌀 한 되 이거, 그 집에는 쌀가마니를 재어 놓고  먹네.' 이래 가지고 쌀가마니를 보니까 쌀 한 되 이게 마음에 가난 안 하던 그  가난감을 느끼는 그런 것을 다 가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저도 처음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이제, 그때는 양식 팔기가 어려워요. 쪼끔 뭐  지금보다 좀 어려울 때인데. 나는 왜정 말년에는 왜정 말년에 양식이 없을  때에는 그때는 양식은 얼마나 많았는지. 그라기 전이오. 양식이 그렇게 많이  있기 전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없었는데, 이제는 내일은 학교를 아이들도 가야  될 거고 밥을 그래도 해 줘야 될터인데 뭐 해 주는 건 송기, 소나무 껍질을 찧어  가지고, 그래 찧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밀 껍데기에다가 이래 뭉쳐 가지고 이래  가지고 먹기도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딱 떨어졌으니까 문제라 말이오. 문제인데,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옵니다. 와 가지고 농사 안 짓고 양식은 없고 하니까 '쌀  안 팔랍니까 하면서 온다 그 말이오. 물으며 쌀 한 되 가져와. 그때는 그거  귀해요. 쌀 한 되 가져오면 쌀 한 되를 '아, 고맙습니다. 우리 양식이  떨어졌는데. 낼 게 있습니까? 그러면. 얼마입니까?' 그 값을 주고 쌀 한 되를 사  놓으면 그만 흐뭇하다 그 말이오. 흐뭇한 것은 없다가 그게 있으니까 흐뭇했지  또 더 많은 거 보면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 그 말이오. 가난이라 하는 것은  그 많은 걸 보고 자기 가진 것이, 가진 것보다 많은 걸보고 자기 가진 것은  그보다 적은 것이 되었을 때에 그때에 가난성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어리석게 자기 부인, 만물보다 거짓된 부인, 순 저급의, 아주  낮아서 인간 가치도 모르고 천국도 전혀 모르고 땅 위에서 눈에 보이는,  실쭉해서. '여보 오늘 왜 실쭉해요? 왜, 왜 어디 뭐 기분 나쁜 일이 있어요?'  '어디, 괜찮아요.' 나중에 파 물어 보니까 '그 집에는 뭐 무슨 피아노도, 피아노  뮈 제일 좋은 거 무슨 피아노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 피아노 이거는 순 국산,  쓰지 못할' 그것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이라면 또 남자라 하는 건 또 그것을  만족케 해 줄라고 죽자 살자하고 벌고 이래 가지고. '우리도 사면되지 까짓 거  못 살 거 있나?' 없어도 있는 척 해 가지고 자꾸 이래 가지고 이제 빚을 내고  이래 가지고 자꾸 한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일생 동안 마누라 기쁘게 하기 위해  가지고 살다 망치는 그런 어리석고 불쌍하고 가련한 남자들도 이 땅 위에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 가지고 양복 입고 막 이래 가지고 이래 뻐기고 이래  가지고, 뻐겨야 또 좋아하거든. 아내가. 이러니까, 이러니 참 세상에는 뭐 천층  만층 구만층도 더 되는 세상이오.

 그런데 여기에 심령이 가난하다 그 말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을 이제  심령이 가난하니까 복으로서 천국 준다 그말 아닙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천국만 자꾸 보니까. 천국만 자꾸 보니까  이제 가난해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심령에 대해서 잠깐 좀 고난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증거를  하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 때에 사는 그 생활이 층어리가 많습니다. 제일 저급의  사람이 어떤 사람이 저급의 사람인가 하면 남의 눈에 띄지 안하고, 남의 귀에  들리지 안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안하고 남의 입에 불리우지 안하고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고 사는 사람 있습니다. '누가 말하더나?' '아무도 말하는 사람 없다.'  '누가 봤나?' '아무도 본 사람 없다.' '누가 혹 들었나?' '들은 사람도 없다'  '됐다.' 이 자리에 사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오? 우리 ○○○집사. 그 사람 어떤 사람이지? 겪어 보질 안하니까 모를  거라. 그것도 다 해 봐야 돼요. 자 어떤 사람이오? 예? 외식? 어떤 사람이라?  도적. 도적은, 도적질하는 사람은 '아, 누가 봤나?' '아. 본 사람 없다' '또  누가. 누가 그런 거 들었는가?' '아. 들은 사람도 없다' '누가 혹 말 하더나?'  '아무도 말 안 하더라' '됐다.' 이런 세계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거 아주  저급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보다 좀 나은 사람은 말에서 삽니다. 말에서. '내가 말했다.

말하니까 그 사람이 곧이 듣더라. 내가 말한 거 곧이 듣더라' 말을 해서  거짓말이거나 참말이거나 그거는 상관없이, '사람에게 말을 하니까 그 사람이  이해를 하고 그 사람이 납득을 하더라. 그래서 내가 말한 대로 그 사람이 그렇게  지금 알고 있다.' 그러면, 일이 삐뚤어지겠느냐 안 삐뚤어지겠느냐 그런 거는  생각지 안하고 말을 자기가 해 가지고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이나  참말이나 이해를 시키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내 말한 대로 알고 그 사람이  속으로는 '아닌가' 이래 해도 말하니까 아니라고 반박하지 안하고 조금 먹혀  들어 가서, '말하니까 그런가도 싶고 안 그런가도 싶고 조금 반은 먹혀 들어가서  그렇게도 여기는 거 같기도 하고 또 그렇찮게 여기는지도 모르기는 모르지만  어쨌든지 그 사람이 날뛰는 것은 그 입은 막았다. 내가 말을 해 가지고, 그렇게  그 사람이 다는 인정하는지 몰라도 인정은 다소라도 하게 됐다' 이래서,  거짓말이나 참말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해 가지고 그 사람이 틀렸다고 반박하고  달라들지 안하고 그만 말해서 다른 사람이 반박을 안 하고 그 말을 다소라도  이해하는 상 바르면 '이만하면 됐다' 이래 가지고 말에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그렇게 했지만 실상 행동과는 다른데, 내가 행한 것은  그렇지 안한데.' 자기 행한 것과 말과는 다르니까, 말을 그리 해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었다 할지라도 그 행동과 다르니 그 행동이 언젠간가 나을 것 아닌가,  나올 거 아닌가? 이러면, 행동 나올 행동에서 사는 사람 은 행동 그게 나올  터이니까 행동이 되고 말이 되고 이래야 돼지지 행동 안 된 그게 말만 돼  가지고는 안심이 안 된다 그거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제 내가 그렇게 했다. 뭐 내가 그대로 했으니까, 내가  말한 것이 내가 행한 대로 말했으니까 뭐 다를 게, 뭐 어떨 게 뭐 있느냐?'  이러나. 어떤 사람은 그 행동에서 살지 안하고 그 실지의,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그 실지의 일이 어찌 됐으며 물건이 어찌 됐느냐 거기에 대해서 물건도 잘됐고  일도 잘됐고 통과가 됐습니다. 일도 잘됐다고 통과가 됐고 물건도 그 물건이  내게 대해서는 손해 없이 그 물건이 벌써 내 손에 잡히게 됐고, 또 그 일은 다  무사하게 다 통과가 됐고, 이러니까. '일은 무사하게 통과가 됐고 또 물건은  내게 유익이 돼서 벌써 내것이 돼 가지고 있고 이러니까 됐다.' 그 일과 물건,  사물에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이제 물건만 내 물건 됐으니까 됐다. 또 일은 잘  해결을 했으니까 됐다' 이 사물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물건은 내가 취하기는 취했다. 물건은 내가 잡기는 잡았다.

내것이 됐다. 또 일은 다 그 일이 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이 모든 일이 다 해결이  돼서 잘 됐다.' 그러나 찌찌분합니다. 께끄름합니다. 께끄름해서 못 견디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사람이냐? 그 사람은 양심의 사람입니다. '암만  이렇게 내가 물건은 취했지만 사실 이게 양심은 아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가지고 설득을 시키고 이 일을 이렇게 이리 뒤집트리고 저리  뒤집트리고 뒤집트려서 일은 이렇게 이 일을 성사를 시켜 놨기는 놨지만 참  양심상은 께끄름하다' 이래 가지고 께끄름해서 못 견뎌서 '에이 이거 못 견뎌서  이래 됐지만 지금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어라, 이거 '토해 내트려야 되겠다.

내가 그만 이거 게워 내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양심으로 사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끼기 때문에 그게 할 수 없어, 그게 된 것으로 만족이 없으니까 양심대로  살게 된다 말이오. 양심대로 살아서, '이 일을. 이렇게 물건은 취하기는  취했지만 양심을 속여서, 사실상 이거는 뭐 도적질 아닌 도적질이지 이거 뭐  딴게 뭐 있느냐?' 이러니까. 양심에 가책이 되니까 그 일을 도로 게워 내놓고,  도로 그것을 내놓고. 일 그게 잘 수습된 그걸 새로 뒤벼 가지고 이렇게 그것을  새로 양심상 그것을 바로 정리하려고 애를 쓴다 말이오. 그러니까. 세상은 그걸  알면 칭찬할 것이지만 '됐다' 하고 뒤집트려서 쳐박습니다. 쳐박으니까 묶여  들어갑니다.

 들어가도, 들어가니까, '에 이, 내가 이 양심으로 살아 가지고는 처세술이 안  됐다. 처세하는 것이 양심대로 살았다가는 내가 공연히 이겨서 나무에 올라갔던  자가 쳐박혀서 내가 매장되게 되니까 이거 안 되겠다' 그만 양심을 집어 던져  버리고 또 수단 방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아, 내가  과거에 내가 그 일이 잘 수습이 됐고 유익이 되기는 됐지만 내 양심에 고통을  느껴서 이걸 다시 반복해 가지고 이걸 다 포기하고 정리를 했는데. 그때 내가  양심의 고통이 지금 이 사람들에게 뒤집트려져 가지고 '네가 이놈, 고의적으로  도둑질해 먹으려 이래 하다가, 속여서 이래 하다가 안 되니까 이와같이 지금  네가 안될 상바르니까 지금 게워 내놨지' 이렇게 말하면서 날 어떻게 말한다  할치라도, 이 억울함으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먹고 천대받는 것보다는  그 때 양심 고통이 더 고통이 심했다" 하는 사람은 양심 평안을 위해서 외부적인  고난을 당하는 그것을 쉬하고 양심 고난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양심  생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또 자기 양심에서 사는 그 사람은 뭐 자기 양심에 거리끼지 안했으면 됐다  이랬는데, 그 양심대로는 하기는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내가 뭐 양심에  거리낄 게 뭐 있나? 이거 양심대로 하지 안했느냐? 양심에.' 양심대로는  틀림없이 하기는 했는데, 양심에는 거리끼지 안하는데. 거리끼지 안했는데  뭐인가 속에 좀 께끄름 한 게 있습니다. 양심에는 거리끼지 안했는데 께끄름한  것이 있다 그 말이오. 께끄름한 것이 뭐인가? '이것이 내가 뭐 양심에는 내가  틀림이 없이 양심대로 했고 또 이게 법에도, 법을 붙여도 법에 정당성을 했고  이랬는데 아무래도 이리 되면 그 결과가 그 사람에게 구원에 무엇이 도움이  되겠나, 또 주님이 나를 내게 이 일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서 뭐  만족하실 수 있는 주님 기쁘시게 한 일이 뭐 되겠나 이 면을 생각하니까  께끄름해서 못 견디겠다 그 말이오. 이래서, 그 사람이 어디서 사는 사람이냐  하면 영혼에서, 영혼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영혼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영혼으로 사는데, 영혼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뭐 다른 사람에게 복음에나 뭐  또 하나님의 법에나 그런 거 거리낄 거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다 명령을 지키기는 지켰다 그 말이오. 지키기는 지켰는데 내가 여기서 더,  지금 이것보다도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길이 없겠느냐? 이것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더 감화를 줄 수 있는 그런 길이 뭐이 없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 길을  다시 고쳐서 심령으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심령이라는 그것도 인간의 인적  육체의 요소입니다. 영의 요소가 아니고. 영의 요소가 아닌데 그 심령은 우리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껍데기로 생각하고, 또 그 다음에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면 양심이 나옵니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양심이 나옵니다. 또  양심에서 살다가 또 깊이 파고 들어가면. '내 양심대로 했으면 됐지! 이랬는데  양심대로 한 그것이 제삼자의 구원이나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는 아무런 자기 대해서는 상관없는 일 했기 때문에 이제 그 면을  생각하니까 또 마음에 불안해서 못 견디는 그것이 영혼으로 사는 것이오.

영혼으로 사는데, 영혼으로 살면 이래 됐는데 또 깊이 자꾸 생각하니까, '이  일이 어찌 되나, 이 일이 어찌 되나? 이 일이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겠느냐?  하나님이 만족하시겠느냐? 하나님이 칭찬하시겠느냐? 내가 하나님을 만족케  했느냐? 하나님이 칭찬하시겠느냐?' 또 이 면을 생각하니까 또 께끄름해집니다.

이 면을 생각하니 께끄름해지는 그게. 그렇게 자기 마음으로써 제일 깊이 깊이  제일 깊이 제일 깊은 속에 있는 자기 마음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심령으로 산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 아브라함에게 소돔 고모라성 왕이 와 가지고 말할 때 아브라함이  그 때에 내가 하나님을 두고 말하노니 너희의 것은 내가 실라끈 하나도 취하지  않겠다. 내가 취하는 것은 너 적산물로 가지고 내가 치부되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됐다는 것을 내가 생각할 때 의심을 가지게 되고. 거기서. '아  이는 참으로 그런 것도 다 버렸는데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사람이다. 축복으로 부요한 사람이지 그 사람 뭐 그럴 때 의례히 적산물은 제가  전쟁에 이겼으니까' 적이 가졌던 것은, 적산물 그거는 전쟁이긴 자의 물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성경에도 그렇게 말씀했고 이러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내가 취하게 될 때에는 혹,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와 가지고 축복으로만  나는 부요한 것을, 내가 그것을 바라는 사람인데, 조건보다도. 모든 현재에  보이는 그런 것보다도 하나님의 축복 하나로써만 나는 부요해질라고 하는 내인데  만일 내가 그 다음에 축복으로 되면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이거는 그때 소돔  나라와 전쟁 붙었을 때에 아브라함이 와서 전쟁을 승리하고 그때 원수들의 모든  재산을 뺏들어서 된 그때에 아브라함이 부자 됐다' 혹 그렇게 생각치 않겠느냐?  이러니까. 내가 하나님 한 분이면 되는데. 이것이 영광이 하나님 한 분에게만  돌아가지 안할 이런 우려성이 있다. 이래서 신들메 하나도 차지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는 그 마음은 그것은 심령으로 산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렇게 껍데기로 살지를 맙시다. 어떤 사람은 뭐 남이 못  봤으면 됐다. 못 들었으면 됐다. 남이 그걸 말하지 안하면 됐다 하는 그런 아주  참 위험천만한 낮은 세제에서 사는 그런 사람이 다 우리였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그런 살이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다 그런 자리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우리가 이제 거기서. 껍데기에서 살지 말고 좀 깊숙이  생각해서, '아. 말로는 그렇게 거석 하지만 실상이 돼지나? 말만 그렇지 뭐.

일이 돼야 되지 말 가지고 되나' '일은 됐다. 일은 되기는 됐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이야 뭐라고 하든지 내비두고 내 양심상 어찌 되느냐? 양심에 거리낌은  없느냐? 아, 양심이 거리껴 안 됐다' 양심에 거리낌으로써 거리낌 없이 살아  놓고. '이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았으니까 됐다.' '양심에 거리낌 없으니까  됐다?' 예수님이, 대속하신 주님의 피를 먹고.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보니까  이거 께끄름해서 안 됐습니다. 께끄름해서 안 됐으니까 '아니다. 이 것은 이제,  세상에서는 뭐 이거야 법으로서나 내 양심으로나 괜찮지만 예수님을, 대속하신  주님을 바라보니까 이제 좀 깨름하다' 이래서. 그것을 주님의 피에 걸리지  안하고, 주님의 피 운동이 전달돼 나갈 때에 그 전달돼 나가는 데에 전달에  도움이 돼야 될 터인데 전달에 도움이 되지 안하고, '이거는 뭐 정당성으로 내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살았지 뭐 예수님의 피야 상관 없고 제삼자의 구원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는 그런 일이 됐으니까 이거 께끄름해 안 됐다' 그래 가지고  그 길을 찾아 가지고 다시 양심 생활에서, 양심 생활에서 좀 깊이 깊이 마음을  찾으니까, 우리 마음은 깊습니다. 우리 마음은 깊어서 찾으니까 양심이  나왔는데. 양심에서 또 깊이 깊이 찾고 보니까 이제 예수님의 피의 운동이 또  자기가 생각이 나오니까 '이거 안 됐다' 그래 또 그 밑에 새로 파 가지고 나온  그 마음대로 내가 살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영혼으로 산다 하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살았는데, 영혼으로 살았으면 다 됐느냐? 영혼으로 살았는데 자기  마음에서 '또 이제 더 없겠느냐?' 또 파고 들어가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만족할  수 있는 그게 되느냐? 그러면, 이보다 더 하나님이 만족할 길은 없겠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실 길은 없겠느냐?'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기뻐하실 그것을  자기가 찾으니까 또 그 밀에 들었다 그 말이오. 그보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고 정말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만물들이  칭찬할 수 있는 그것이 그 속에 들었는데 나는 껍데기를 했다 그 말이오. 그  속에 그것을 파고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사는 사람이 심령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는 말은 인간들의 마음으로서는 파고 들어가고  파고 들어가 가지고 제일 밑자리, 제일 속에 들었고, 제일 속에 들었고 제일  근거가 되고 제일 인간의 마음의 주격이 되는, 인간의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인간의 마음의 주격이 되는 것이, 이 껍데기 이것들은 다 부하라 말이오. 뭐  자기 생각이니 마음이니 자기 아는 지식으로서 이제 법적이니 하는 그런 거는  껍데기 중에 껍데기인 것입니다.

 이랬는데 파고 들어가서 자기 마음 속 제일, 양심보다도 더 깊은 영혼으로  영혼보다 더 깊은 그 심령에 들어가 가지고 심령에 맞추어서 이래 들어가 보니까  들어가서 사는 그 사람이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인데, 찾아서 심령을 찾으니까 그  심령은 생각하는 것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심령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을  생각하지 안하고 그 심령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다냐?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다가 그 보다도 하나님의 심판 너머,  그리스도의 심판 너머 영원 무궁세계의 그 세계의 모든 조직과 그 세계의 운동과  그것을 생각하니까 '아, 나는 된 줄 알았는데 안 됐다.'  이래서, 사도 요한이가, 그는 성자 중에 성자요 사도들 중에 제일, 생활이 제일  미덕스러웠고 영적 생활에 제일 깊고 영적으로 높은 생활을 했는데,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가지고. 이놈은 이거 죽일 수는 없고 귀향을 보내야  되겠다고, 사람 없는 섬으로 보낸 것은 거기에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거기서 죽는 것이라 말이오. 사람 없는 성, 거기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니까.

사람 없는 섬에서 거기서 갇혀 가지고 있을 때에 그때에 주일날을 당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이제까지의 받은 영감 그보다도 탁월한 높은 영감을 받았다  말이오. 높은 영감을 받아 가지고 보니까 그때 높은 영감을 받아 가지고 볼 때에  그가 볼 때에 처음에 눈에 뭐이 보였습니까? 자기 뒤에서 음성이 났습니다.

 자기 뒤에서, 이제까지 자기가 상대한 것은 아니라 그 말이오. 이제까지 상대한  것은 다 껍데기 외부를 상대했고 자기 상대한 것의 반대, 속의 알맹이 상대할 게  있다 말이오. 이제 돌아설라고 할 때에, 돌아설 돌아서 보니까 뭐이 보였습니까?  돌아서 볼 때에 처음에 보인 게 뭐이 보였지요? 예? 일곱 금 촛대가 보였습니다.

돌아서 보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셔 가지고 신인양성일위가 십자가 못 박혀  죽으셔 가지고 이제 건설한 교회가 있다 말이오. 건설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가, 그 교회가 영영히 얼마나 빛나는 교회며 얼마나 깨끗한 교회며 얼마나  힘든 교회며 얼마나 공든 교회냐 이래 가지고 교회를 보니까 껍데기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세상에 피조물 중에는 교회가  제일 빛나기 때문에 그것이 일곱 촛대로 보였습니다. 빛나게 보였다 말이오.

이러니까, '아' 자기는 보니까 교회 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교회운동 했다는 것이  교회 운동 된 것은 별로 얼마 되지 안하고 다 껍데기 쭉정이 그런 것만 자꾸 주  모아 가지고 이래 했지 속에 외나 알맹이 교회는 만들지를 못했다 그 말이오.

이래서. 보니까, 눈이 열리고 보니까. 영감받아 눈이 밝아지고 보니까 교회가  일곱 금 촛대가 보였습니다.

 또 보니까 촛대 사이에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다닌 것은, 보니까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그렇게 제사장 옷을 입고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 이렇게 알뜰히  돌아보시고 이렇게 순행하시고 이렇게 하시는, 이 만유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쉬지 안하고 알뜰히 돌보시고  있는 이 교회라는 것을 자기는 몰랐다 그 말이오. 자기가 교회에 대해서 기울인  성심 성의가 너무 소홀하고. 서운했다 그 말이오. 이랬는데, 다시 눈을 뜨고 더  영감받아 가지고 더 똑똑히 보니까 예수님에게는, "머리털이 희어서 눈과  같더라" 주님에게는 털끝만 한 것도 보니까 성결치 안한 것이 하나도 없어.

털끝만한 것 하나도 성결치 안한 게 없는게, 주님 뭐이랬는데 저는 보니까 뭐  전부 새카만 터래기입니다. 그 사도 요한이 보니까 자기는 뭐 털털한 이거 뭐  모든 거 털털 한 뭐 시커먼 터래기이지 자기는 주렁주렁 이거 모두 다 허영이니  허욕이니 이런 거, 모두 떨어진 더러운 이거, 모든 거지 옷을 입고 모두 다, 이  다음에 하늘나라 가면 다 조롱하고, '저런 추한 옷을 입고 있다' 할만치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더러운 그런 추한 옷을 입고 있는 그 자기를 보니까 이거 부러워  못 견디겠다 말이오.

 이라다가 눈이 더 밝아 가지고 주님의 안면을 보니까 주님의 안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거와 같다고 했습니다.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다. 주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거, 자기에게 행하신 것과 자기가 주님에게 대해서 행한 것과,  주님이 모든 인류 구원에 대해서 행하신 것과 자기가 인류 구원에서 행한 것과  이거 보니까 도무지 부러워서, 부끄러워서 주님의 안면을 보니까 안면이 부셔서,  안면이 부셔서 부러워서 견디지 못해서 자기가 거기서 기절했던 것입니다.

기절해서 죽은 자와같이 꺼꾸러지니까 주님이 위로하시는 말이 뭐라고  위로했느냐 하면 '나는 산 자라.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내가 그 전에, 십자가  못 박히기 전에 너거와 같이 있을 때에 같이 먹고 같이 돌아다니고 할 때에  너희들이, 네가 나에게 대해서 얼마나 만만하게 여겼으며 얼마나 예사로  여겼으며 얼마나 나를 평가하기를 어떻게 평가했으며 비판을 어떻게 평가했느냐?  그럴 때, 너거의 그저 한 동무 중에 한 동무 선생 중에 한 선생님으로 그렇게  여길 때도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네가 내 몸에 의지하고 내 품에 안기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하고 이래 기대서 이래 지내지 안했느냐? 그때에, 그때에, 오늘 네가  보고 놀래는 내가 네 눈이 밝아지니까 오늘에 이렇게 달리 보여진 것이지 내나  그때도 지금 네가 보고 놀래는 내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

이러기 때문에, 내가 그때도 너를 보고 사랑했었는데 네가 나를 못 봤지만 나는  너를 봤었는데, 그때도 내가 너를 이해하고 너를 용납하고 사랑했었는데 오늘  이만침 됐는데 너를 버리겠느냐?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면서  위로하면서 다시 소망을 줬을 때에 사도 요한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눈이 밝아진 까닭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심령이 가난하다 그 말은 하늘나라가 자기 것이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보니까 자꾸 하늘나라의 가치들이 나타나고 하늘나라의 이  모든 실상들이 나타나고 보니까 자기는, 하늘나라에는 하나님께서 제일 주인이  돼 가지고 계시고 거기에는 모든 성자들과 성녀들과 모든, 모든 순교자들  순생자들 수많은 성도들의 그 모든 성화된 것만 남았다 말이오. 성화된 거. 이제  된 것만 남았는데. 거기 가 보니까 거기 본 거는 전부 참 정금같고 전부  깨끗하고 다 하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뭐, 숨어서 아주 천대를 받는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한 거. 또 박해 가운데서 사랑한 거, 멸시받는 데서 사랑한 거.

일생을 곤고한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한 거 이런 것을 이렇게 보니까 너무 자기는  산 생활이 참 엉망이라서 견디지 못해서 자기의 그 생애한 것이 그만 교만은 다  없어져 버리고, 자기 한 것이 너무 외식이고 너무 빈약하고 너무가 자기는 모두  다 영리주의라. 하나님 앞에 한 것도 나중에 내가 따져 보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이 이렇게 해 주시겠지' 하면서, 주님은 영리주의로 아니고 주님은  끝없이 우리를 사랑 하셔서 이렇게 했는데, 하신 그분을 볼 때에 내가 한 것은  너무 약고, 너무 약삭빠르고, 너무 장사꾼 모양이고, 너무 보수적이고, 너무  여수적이 그 너무 영리적이고, 너무 추하고 더러워서 못 보겠다 말이오. 이래서  이제 자기 된 것이 너무 빈약하고 이래서 가난성을 가지는 그 사람이 복이 있다  말씀한 것입니다.

 복이 있다. 왜 복이 있느냐? 그 사람의 심령이 가난하게 됐느냐?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천국을 보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성경 해석하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가 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문제인데, 이렇게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 복은 무슨 복이냐? 제가 첫  시간에 이 복에 대해서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 이 복은, 어떤 회사에 가니까 그  회사에 모두 직원들이 다 있지만 그 회사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은 제일 권세있는  사람, 제일 기능이, 기능이, 제일 기능이 탁월한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는데,  기능 탁월한 사람 가운데에도, 다같이 탁월한데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쓸려서 견디지를 못하고 다 찬성이 되고, 다 같이 기능 일등 기사가 두  사람이 있는데 이제 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감탄이 없지만 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모두 그 사람의 양심을 빼앗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뺏들었고  그 사람의 정신을 뺏들어서 그만 그이라 하면 녹아 버렸다 말이오. 그 사람에게  대해서 감화 감동돼서 녹아진 그 사람이 있다 그 말이오.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제일 복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지금 알겠소 '아 그 사람은 기술 있다. 그 사람 은  무섭다. 그 사람은 실력 있다. 야. 그 사람. 나도 그와같이 그렇게 권위 있으면  좋겠다' 좋겠지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감탄되는 일은 없고 무섭기만  하는데. 다 같은 기술이 있으면서도 이 사람은 그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기를  '아, 내가, 그 기술이 있는. 내가 어떨 때 잘못 재를 저질렀는데 그 사람이 와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나에게 해 가지고 그때 내가 그 사람 때문에 그 곤욕을  면해서, 내가 그래 아니면 여기서 쫓겨났을 건데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여기  유지하게 됐다. 아 그거 내가 못해서 내가 발동을 하니까 그 사람이 와 가지고  이랬다' 그 사람의 높은 기술의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감탄돼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 사모하고 앙모하고 존대하고 감탄된 그 사람 있는  그것이 제일 복 있는 자리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복 있다는 것은 그런 복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모든 것이 전개 될 때에 하나님도 감탄하고 모든 택한 성도들도 감탄하고  모든 만물들도 감탄해서. 다. 그분의 실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실력 높은 그  실력이 다 내것이 되고 내게 혜택이 됐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감탄하는 그  위치에 있는 그것이 복이요 복이라. 그 복을 가리켜서 여기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그것은 복도 뭐 다른  복도.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는 그런 복도 있지만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함으로, 왜 심령이 가난해겼느냐? 천국 본위로 산다 말이오. 천국 본위로  살기 때문에 이 사람의 가난은 무슨 가난입니까? 세상 가난이오 무슨  가난이지요? 천국 가난이라 말이오, 천국. 이랬으니까 그복은 이런 복이 된다 그  말이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이런 복 자리에 가 서 앉게 된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오늘 아침에 말하는 거는.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다 깨닫게 하는  성경 해석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거는 그것입니다. 사람이  말이오, 씨름판에 가면, 씨름판에 가면 '하. 내가 씨름 한 번 잘해 봤으면' 싶은  마음 다 생기는 것입니다.

또 이거 테레비에 뭐 그거 뭐꼬? 시합이가? 뭐라 하노? 그거 뭐라 하노?  시합하는 거 뭐라 하더라? 예? 예? 뭐 시합하는 거 그거 모두, 뭣이라 하더라?  올림픽이라 하나? 뭐 올림픽 하기 전에 그거 뭐야? 올림픽 말고 왜 저 세계  사람들 모아가지고 하는 거 운동하는 거. 운동, 그거 뭐라 하지? 스포츠라 하나?  그런 데 가면, 그거 구경하면 또 그게 마음에 납니다. 그게 마음이 나요. 또 춤  잘 추는 데 가면 그만 사람이 그만 춤 잘 추는 사람되고 싶습니다. '하, 나도  한번 춤 한번 춰 봤으면 좋겠다.' 이거 노래를 감상하러 가면서, 음악 감상하러  가면, 음악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아, 참 나도 음악 잘했으면 좋겠다.'  그런고로 이게 뭐냐? 견물생심이라, 견물생심이라. 물건을 보니까 생각이 난다  마음이 난다. 피아노 안 봤는데 좋은 피아노 보니까 '우리도 그런 피아노가  있으면 좋겠다.' 영광 있으니까, 막 송축을 하고 영광 있고 권위있으니까  '하나도 저런 영광스럽게 한번 돼 보면 좋겠다' 자꾸, 우리 가 눈으로 보는  데에서 거기에 대한 욕심이 생겨지고 귀로 듣는 데에서 욕심이 생겨지고 또 내가  접촉하는 데에서 욕심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밤낮 돈만 사모하는 자는 그 사람은 망하고 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돈을 사랑한다 말은 돈만 생각한다 그  말이오. 돈 생각하는 사람은 자꾸 돈에 대해서 가난이 나서, '야, 너 그만하면  먹고 살 건데?' '아이쿠, 이까짓 게 뭐야? 누구는 몇 십 억을 가졌는데 몇 백  억을 가졌는데, 뭣이 동생이 어떤데' 자꾸 이래 가지고 보니까 돈만 사모하는  사람은 돈에 대한 가난성을 가지게 됩니다. 가난성을 가지게 됩니다. 또  권세만을 보는 사람은 권세에 가난성을 가지게 됩니다. 또 이런 가정 저런 가정  가정의 행락들을 보면 가정의 가난성이 생겨집니다. 또 기생을 보는 사람은  기생에 대해서 가난성이 생겨집니다. '아, 그 기생 예쁜 기생'  그래 가지고 자기 생각이, 자기 생각이 어디 있느냐 그것을 우리가 좀 살펴  보라, 오늘 아침에 말하는 거는 그것입니다. 네 생각이 하루 24시간 가운데에  어디 네 생각이 많이 머물고 있느냐? 반드시 많이 머물고 있는 거기에에 욕심을  너는 가지게 된다, 이러니까, 네 마음이 24시간 가운데에 어디 많이 있느냐  그것을 네가 생각해서, 네 마음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죽음이라든지 인간의 중대한 문제에 네 마음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갈증이  되고 가난성이 생겨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네 마음은 하늘에 조 직되어  있는, 하늘을,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하늘의 사람들. 하늘에 있는 천국 사람들,  하나님, 거기에 있는 어떤 것이 빛날 것이며 가치있는 것인가 이래서, 자꾸  하늘만 생각합니다. 천국을 생각하니까, 소망을 하늘에 두고 천국만 자꾸  생각하니까 이제 갈증이 천국에 있다 말이오.

 자꾸 천국만 생각하면, 마누라가 천국만 생각하면 남편이 있다가, 이제 남편이  '하, 오늘은 이거 좋지요' 이래도 실쭉하이 속으로 우습다 말이오. '아이구,  그까짓 거 오늘 내가 죽으면 떠날란지 내일 죽으면 버릴란지, 아무 소용없는 거  껍데기 그런 걸 가져와서 그라고 있네.' 그라니까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오.

좋아하지 않는데, 떡 기도하고 가 가지고 그래 해 가지고 뭘 천국을 하나 발견  해 가지고 '여보, 이거 뭐 이거 알아요?' 이러니까 아, 부인이 따르르르  웃으면서 '여보. 그게 뭐요? 좀 해석 좀 해 주이소.' 이래 이리 저리 해석을  하니까, 그만 해석해 주니까 그 마누라가 좋아서 남편에게 대해서 그만 못 견뎌  합니다. 아주 좋아서 '아이구 여보 그걸 어떻게 발견했어요? 거기 대해서 좀  해석 좀 해 줘요. 이러니까 이 남편이 '아예 우리 마누라는 돈 줘도 소용없고  이거 뭐 좋은 집 줘도 소용없고 어쩌든지 천국 것만 갖다가 보이니까  좋아하는구나. 천국 가면 더 좋아하겠구나' 이러니까. 그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자꾸 천국을 준비한다 그거요.

 ○○목사님이 목사 된 것은 자기 부인에게, ○○목사님이 인민군. 6. 25때에  거기서, 내무서에 서장노릇을 했습니다. 공산주의 말이오, 내무서장노릇 했어.

서장노릇 하고 인민군이 후퇴했으니까 잡힐 거 아닙니까? 서장노릇 했는데  인민군들 가고 난 다음에 상급을 받았어.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 순전히,  내무서의 서장노릇을 하면서 그 지방민들을 다 보호하고 그들을 완전히  이용했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아주 그 위기를 단단히 해서 그들에게 손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주 잘난 사람이오.

 이랬는데 그라니까 술도 잘 먹고 뭐 노름하는 데도 잘 돌아다니고 뭐 껄렁한  그런 사람인데. 그래 인제 섣달 그믐날 이래 놀다가. 노름하다가 보니까 그만  날이 새버렸으니까 이제. 아침에 들어와야 되는데 집에 돈은 한 푼도 없지 쌀  하나도 없지 아이들은 뭐 설치레 그런 거 하나도 보지도 안했지 이래 놓으니까  이거 탈이라 말이오. 이랬는데, 보자. 가만히 점을 치기를 '내가 가 가지고,  오늘 가면 지금 집에서 야단이 날 것이고 이거 뭐 참 아이들이고 뭐이고 야단이  나겠는데 뭐라 해야 될까? 무슨 말해야 될까?' 이러니까, 떡 가 가지고, 이제  하나 연구했다 말이오. 가서 '에 이 인제 내가 이거 다시는 그깟 놈의 술 안  먹고 내가 그랄 거야. 내가 이제 이거 다 치워 버릴 거야. 이거 다 망하는  일이야 나 이제 예수 믿겠어' '예수 믿겠어' 하니까. 그만 그 말 하나 가지고  하니까 그만 부인이 해결 다 됐어. '이거 뭐 공연히 옷도 준비도 못 하고 양식도  준비도 못 하고 돈도 준비 못 하고' '여보, 그래도 뭐 아직 굶을 거, 굶지는  안하고 먹을 거 있습니다. 괜찮아요. 염려하지 마이소.' 이러니까, 그 말하면 다  되거든 이거 이제 지혜를 배웠다 말이오. 뭣이든지 예수 믿겠다 하면 돼 예수  믿겠다 재를 저절러 놓고도 또 예수 믿겠다 하면 되고, 이러니까, 그것이 그  속에 맺혀 가지고, 이제 '내가 예수 믿겠다 하면 좋아하니까' 예수 믿겠다 하면  좋아하고, 예수 믿겠다 하고 난 다음에는, 예수 믿기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교역자 되겠다 하니까 좋아 하니까 그만 그 사람이 일사 천리로 교역자가 돼  가지고 목사가 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부인이 남편 살리는 것이 이것이오. 만날 가서 집에 거석하면  '아무것이 뭐 있네' 전부 보는 것이 세상 것만 보고 세상 것만 불만스럽다고  자꾸 이러니까 남편이 그것만 마련하는 데 전력을 쓰니까 그거 세상 사람되고  멸망 밖에 더 하겠습니까? 인제 그걸 보지 안하고 하늘 나라를 보면서 하늘나라  것을 그렇게 여기면 그만 된다 그 말이오. 여기도 그런 사람 더러 있어요. 그래  내가 있다가, '저게 세상으로서는 남보다 앞서 도망을 치고 달음질을 하는. 아주  세상으로 달음질하는 달음질 선수쟁인데 저게 어찌 됐는가?' 살펴보면 그 속에  사랑하는 아내가 들어서 그렇게 만들었다 그거요. 남편도 그러하고 아내도  그러합니다.

 자 따라합니다. 견물생심이라! 견물생심이라! 하늘나라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을  봅시다. 그것만 자꾸 생각해요. 자꾸, 일을 하면서도 그거 생각하고 짐을 지고  가면서도 생각하고 또 장사하면서도 그걸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면 내 눈이  하늘의 것을 보는 눈이 밝아져서 내 소원은 하늘의 것이 되어지고 하늘의 것에  모든 모자라고 부끄러울 것을 자꾸 내게 보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고치고 고쳐서  복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꾸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복 있는 마음으로  만들고. 자기 욕심을 복 있는 욕심으로 만들고, 자기 행동을 복 있는 행동으로  만들고 자꾸 내가 그렇게, 내가 내 천국을 내가 만들어야 되지 누가 만듭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 가지고 우리가 만드는 거는 아니고,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공짜배기로 받을 수 있는 실력이 된다 그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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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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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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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 결과 있는 믿음이 믿음/ 마태복음 9장 1절-8절/ 870221토새 선지자 201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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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 결말/ 야고보서 5장 7절-11절/ 811101주전 선지자 2015.10.23
574 결말의 가치/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851009수새 선지자 2015.10.23
573 결혼 중매에 대해서/ 시편 1장 1절-6절/ 880819금야 선지자 2015.10.23
572 결혼식에 대해서/ 요한복음 6장 56절-57절/ 850319화새 선지자 2015.10.23
571 겸손/ 베드로전서 5장 5절-6절/ 800228목새 선지자 2015.10.24
570 겸손/ 베드로전서 5장 5절-6절/ 800305수새 선지자 201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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