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전투의 도


선지자선교회 1986년 8월 4일 월밤집회

 

본문 : 마태복음 4장 1절∼1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우리 기독교는 전투의 도입니다. 인류 시조 아담도 전투의 대상을 가진 사람이었고 둘째 아담도 전투의 대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이 계약과 모든 대리권과 상속권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에게 받은 바의 지극히 큰 이 권세와 축복을 그가 영원히 가지느냐 혹은 빼앗기느냐 하는 그런 입장을 가진 것이 첫아담이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그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사탄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처음에는 사탄이 없어서 그저 모든 것이 다 생명과 평강인 거로만 있었지만 그 중에 권세 가진 천사가 하나님을 시기하고 그 지위를 제가 가로 취하려는 그 탐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것이 곧 흑암에 갇힌 유리하는 천사요 사탄입니다. 그것이 공중에 권세 잡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그 지위에서는 타락한 후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 죄값으로 본지위에서 쫓겨나 타락하여 곧 하늘나라보다 어두운 공중에 권세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 지구에는 사탄이 없었고 죄도 없었고 곧 우주 밖에 징계 밖에 그 위치에 자리 잡고 사탄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물질계라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육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모든 창조물 중에 뛰어난 지위와 권세를 주셔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의 권세를 가지고 모든 걸 정복하고 통치하는 이런 세력을 가졌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 시조의 에덴 동산 타락하기 전 본지위입니다.

그 본지위에 있을 때에 이 우주 밖 영계 밖인 그 자리에 머물고 있던 사탄이 뱀을 입고 에덴 동산에 와서 하와를 미혹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하와는 무지해서 몰랐지만 사탄은 벌써 하와를 점령하여 하와로 통하여 아담을 점령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해 놓은 인류를 점령할 그런 욕망을 가지고 이 지구상에, 이 우주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가지고 하와를 꾀워서 저와 같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살지 말고 하와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자 되면 하나님같이 존영하다고 하는 그런 그 유혹의 소망을 가지고 꾀웠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 인류 시조 하와는 그 마귀에게 꾀임받아 가지고 하나님만이 알고 하나님만이 중심으로 위주로 하여서 하나님 앞에 복종 하나로만 살고 하나님만 소망하고 이래 살던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중심과 또 자기 위주로 하나님 외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피조물에게 소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피조물 곧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같이 된다는 그 유혹을 받아 가지고 선악과를 먹어서 마귀는 하와를 점령했고 하와는 마귀에게 완전히 유혹받아서 점령을 당했습니다.

마귀에게 점령당한 그 하와가 이제부터는 마귀의 심부름꾼이 되고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어 가지고 마귀에게 받은 그 감염과 그 사상을 가지고 아담을 꾀워서 아담이 또 그 유혹받아 가지고 완전히 이 사탄 곧 뱀인데 뱀을 점령하고 이용한 그 사탄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했습니다.

정복을 당해서 이 아담을 정복한 사탄은 아담이 받아 가지고 있는 모든 이 상속의 유업을 제가 가로 뺏들게 됐고 아담은 이 사탄의 종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사탄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이 물질계의 것은 다 저의 것이 되었고 물질계는 저의 나라가 되었고 저는 물질계의 왕이 되었고 아담과 하와는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종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이 인류가 본지위에서 타락한 것이요 그때부터 사람은 본지위의 권세를 빼앗기고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마귀와 죄와 사망 이 셋은 하나인데 이 셋의 종이 됐습니다. 마귀의 종된 것은 곧 죄에 종이 된 것이요, 마귀와 죄에 종된 것은 사망에 종된 것이요 이 세 가지를 합해서 세상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당을 말하기를 세상 임금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시조 첫아담이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해 가지고 패전하였으므로 완전히 우주는 마귀가 이 대리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고 인류는 이 사탄에게 종이 되었고 사망과 죄에 종이 되어 가지고 있는 이런 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그대로에서 전인류는 영원한 사망. 영원한 죄악, 영원한 마귀의 이 통치하에 있게 된 것이 전인류였습니다.

그랬는데 거게서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에 특별히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으로 정하신 그 예택받은 이 사람들을 구출하시기 위해서 사람되어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또 참사람인 신인양성일위를 가지시고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에 나타나신 그 목적은 죄와 사망과 이 마귀를 멸하고 그것에게 지금 완전히 점유되어 있는 택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는 세 가지의 이 전투를 하지 안하면 안 되는 그 역사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되고 또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되고 마귀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우리들을 구출할 수 있기 때문에 여게서 구출하시는 데에는 첫째로 하나님의 이 완전하신 그 율법을 다 이행해서 자존하신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 부정받았던 것을 다시 인정을 받아야만 하고 또 인정을 받는 데에는 이 죄를 다 없애야 하기 때문에 죄를 없이 하는 대형의 공로를 베푸셨고 또 죄를 없앨 뿐만 아니라 이 사탄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겨야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이 전투는 죄로 더불어 싸우는 전투요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전투요 마귀로 더불어 싸우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것을 멸하려고 오셨다 그렇게 성경에 당신이 발표하셨습니다. 이것을 멸하려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죄를 멸하는 데에는 대신 죄의 값의 형벌을 받아야 죄가 없어질 수 있고 또 이 사망을 멸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입법하신 그 율법을 완전히 이행하여야 사망을 멸할 수 있고 또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결을 사져야 생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예수님의 전투였습니다.

거게 있는 모든 죄나 사망이나 그 권세는 그저 그 권세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다 그 권세대로 압박만 하지 아무런 활동적 그런 작용은 다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망 안에서 사탄이 역사하고 죄 안에서 사탄이 역사해 가지고 이라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전투는 죄와 사망과 전투하는데 그 전투에 최고적인 이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이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하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전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출하러 오신 것은 첫째 아담이 이 사탄에게 패전한 값을 다 정리해야 되겠고 또 아담을 승리해서 이런 모든 사망과 죄를 일으켜 놓은 그 죄와 사망도 정리해야 되지만 그것을 일으켜 놓은 이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하는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에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래서 첫째 아담이 패전한 그 패전을 예수님이 다시 전투해 가지고 승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사탄에게 도전한 셈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도전을 했기 때문에 여기 마태복음 4장에 그 사탄으로 더불어 나타나게 전투하는 것은 지금 이것이 처음입니다. 처음으로 전투하셨고 그 전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사탄이 일찍부터 잉태될 때부터 방해를 했고 또 자라실 때도 방해했고 탄생할 때도 방해했고 이라다가 이제 이 사탄이 예수님이 사생활할 때도 늘 침노를 하다가 공생활에 시작하는 때에 그때에 이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하는 이 도전이 그때에 정식적으로 시발됐던 것입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이 4장에 읽어 보면 사탄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이 따라갔습니다.

성전 꼭대기로 가자 할 때에 성전 꼭대기로 따라갔고 또 높은 산에 가자 할 때에 높은 산으로 예수님이 따라갔습니다.

여게 대해서 예수님이, 사탄이 성전 꼭대기로 가자 할 때 성전 꼭대기로 가고 또 높은 산으로 가자 할 때 높은 산으로 가고 또 예수님이 무슨 문제를 말을 하면 거게 또 따라서 가서 말을 하고 이렇게 했으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이 사탄에게 순종했습니까 하는 그것이 성경에 난해 중에 하나입니다.

마귀가 무슨 말을 한다 할지라도 마귀에게 뭐 따라가서 거게 대해서 말할 게 뭐 있습니까. 마귀가 이 말을 하면 거기 또 따라가고 저 말하면 저기 따라가고 산에 가자 하면 산에 따라가고 성전 꼭대기에 가자 하면 성전 꼭대기에 따라가고 이렇게 이 따라가는 일을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이거는 이 사탄에게 순종한 것이 아닙니까, 능동이 아니고 사탄에게 피동된 것이 아닙니까 하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들 많이 말을 해서 저한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석을 많이 보지 안해서 주석에 뭐라고 해석을 해 놓았는지 모르나 거게 대해서 그렇게 예수님이 피동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난제를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들이 혹 주석을 본 이는 그 칼빈 주석 봤으면 칼빈 주석에는 뭐라고 말해 놨습니까 해석을? 나는 그 주석은 내가 그거는 안 봤습니다.

누가 칼빈 주석 읽어 봤습니까, 거게 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또 흑기 주석이나 내촌감산이나 그런 이 주석에는 뭐 어떻게 말했는지 그거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묻는 것을 많이 제가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피동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은 뭣 때문에 피동이 되느냐? 예수님이 승리하신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은 아직까지 승리를 하지 못하신 분이고 인류를 대표해서 나서 가지고 지금 다시, 승리한 사탄에게 도전으로 이렇게 지금 전투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거는 사탄은 승리자요 예수님은 아직까지 승리도 패전도 한 분이 아니시요 승리자는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승리자의 그 승리를 내가 전투해 가지고 내가 다시 그 승리를 빼앗아서 내가 승리할라고 하는 데에는 승리자인 그 사탄이 요구하는 대로 내가 그 전투에 응해 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 첫째에 떡으로 가지고 말하는 그 사탄의 말에 예수님께서 응해서 사탄이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그말 하는 데에 따라서 예수님이 대답을 하셨고 또 성전 꼭대기로 가 가지고 거게서 마귀가 서로 전투하자 할 때에 거게 또 거게 가 가지고 응전을 했고 또 높은 산에 가 가지고 전투하자 할 때에 높은 산에 또 가 가지고 응전을 했던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전하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가 승리한 자이기 때문에 승리자가. '자. 여게서 한번 전투하자' 하고 하니까 저게 따라가지 안하면 그 전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승리를 원하시고 노리시는 예수님께서는 거게 응전하러 가지 안할 수 없는 그 응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거는 작전상 그에게 응전한 것이고 전투해서 승리하기 위해서 응전하러 가신 것이지 사탄에게 거기에 피동돼 가지고 복종으로 간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됩니까? 해결이 됩니까? 이 문제가 많은 난제로 신학교에서도 많은 말들을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응전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이 전투를 하는데 여게 4장 1절에 보면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래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시험을 누가 치르도록 이 시험 치르는 데에 이 마귀에 시험을 받도록, 마귀하고 시험받는다 말을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또 첫째 아담과 같이 넘어뜨리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패전하지 안하고 그 시험을 승리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한번 다시 한번 도전을 해 봐라, 도전을 하도록 이 도전을 시킨 것은 성령님이 도전을 시켰습니다 그거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라고 오셨을 때에 구원하시는 데에는 이 승리자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를 해 가지고 승리를 해야 되지 승리하기 전에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하도록 인도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이 전투로 인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전투에 승리를 했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해 가지고 이 전투에서 승리해 가지고 사탄은 예수님에게 패전해서 예수님의 종이 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후는 사탄은 예수님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고 세상에 왕노릇하지 못하고 종이 됐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지금도 어떤 사람에게는 왕노릇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왕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불택자들에게는 지금도 왕노릇하고 영원히 왕노릇하지 만 택자들에게초 왕노릇을 하지 못한다고 로마서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해 가지고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해 가지고 사탄을 이겼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은 사탄을 주장하는 주권을 가지신 분이 돼서 사탄의 것을 다 점령했으니 죄도 점령하셨고 사망도 점령해서 예수님은 모든 죄악을 다 점령했고 사망도 다 점령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이 전투해서 고 모든 것을 다 정복하고 승리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한 것이 없지만 죄를 이긴 사람으로서 죄를 정복했고 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함으로써 의의 승리를 했고 사탄을 완전히 정복했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사탄에게 종이 되어 결합됐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정복해서 사탄을 격퇴하고 이제는 사탄을 격퇴하고 하나님과 이제는 완전히 결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전투인데 예수님은 이 전투한 것이 사탄으로 더불어 공심판 앞에서 전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투는 하나님의 공심판 안에서 이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했는데 이 전투에서 승리해서 우리는 공심판은 다 승리했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는 공심판에 정죄함이나 또 공심판에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벌써 영원한 때 전부터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요한복음에도 말씀하셨고 로마서에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에 관련된 이 심판은 받지 안하지만 우리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심판을 우리가 받게 됐습니다. 우리는 공심판은 안 받으나 사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인데 사심판이라 말은 전인류를 심판하는 심판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속하신 그 대속받은 택한 중생된 이 성도들만을 심판하는 것을 가리켜서 사심판이라, 공심판이 아니고 하나의 사적 심판이라 해서 사심판이라 하고 이것을 또 다른 이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그리스도가 대속하셨는데 대속하신 분이 내가 대속을 너희에게 네 대신 내가 대속을 해서 대형 대행 대화친해 가지고 너를 대속 구원 하였으니 내가 대속 구원한 이 대속 구원을 네가 믿음으로 참으로 받아 가지고 있느냐 이 믿음으로 네가 이 대속 구원을 네가 받은 것을 믿느냐 또 이 대속 구원을 네가 다시는 팔지 안하고 더럽히지 안하고 이 대속 구원을 네가 보존하고 있겠느냐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속받은 자로서 공심판은 면제됐지만 이 사심판에서, 대속하신 그분이 내가 너를 죽기까지 해서 대형을 했고 죽기까지 해서 대행을 했고 또 죽기까지 해서 화친으로서 이 세 가지 대속을 입혀서 너는 영생을 가지게 되었고 하늘나라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렇게 된 이 대속을 입혀 줬는데 네가 입은 이 대속을 네가 어느 정도 이 대속을 입고 있느냐? 비유컨대, 이 대속을 네가 믿기를 혹은 백분지 일쯤 믿느냐 천분지 일쯤 믿느냐 이 대속을 네가 그러면 네가 빼앗기지 안하고 이 대속을 보수하고 이 대속받은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네가 전체의 천분의 일 행동하느냐 만분의 일 행동을 하느냐 천분의 천 행동을 하느냐 만분의 만 행동을 하느냐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 것입니다.

우리의 심판은 사죄 칭의 화친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었기 때문에 이 대속을 네가 어느 정도 믿느냐, 이 대속의 가치를 어느 정도 네가 평가하고 있느냐 대속의 사람이 어느 정도 됐느냐. 대속의 권위를 어느 정도 네가 입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들의 심판이요 시험인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사탄으로 더불어 전투한 이 전투는 다시는 없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이 한 이 전투는 다시는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영원 대형이요, 영원 대행이요, 영원 대화친이기 때문에 영원한 완전한 승리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다시 뭐 도전이나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사탄은 패전했기 때문에 이제 도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탄에게 도전했는가? 도전했는 것은 그것은 사람의 인성을 타고 났으나 첫째 아담의 계통으로 오지 안됐고 첫째 아담과 다른 그 특수인, 성령으로 잉태한. 부정 모혈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한 특수인으로 왔기 때문에 사탄으로 더불어 도전할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 이 사탄이 다시는 도전 못 하는 것은 저는 그와 같이 지금 패전한 그 사탄이 아닌 딴 사탄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도전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럴 수는 없지만 만일 지금 타락지 안한 새로운 그 어떤 천사가 타락을 해 가지고 어떻게 된다 하면 그럴 수 있으나 만일 처음에 타락한 그 천사에게 유혹을 받아 가지고 타락한 천사는 앞으로 얼마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예수님에게 도전할 권세는 없는 것입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고것을 좀 구별해서 알아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기독교는 전투 교회라. 우리의 근본인 둘째 아담이 이 전투를 안 하고는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전투로 승리해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구원 주신 분이 우리들을 시험합니다.

내가 은혜로 줬는데 이 은혜로 준 것을 네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느냐? 만분의 일을 가지고 있느냐 억만분의 일을 가지고 있느냐 만분의 일을 믿고 있느냐 억만분의 일을 믿고 있느냐? 우리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은 말로 가지고 아니라 실제로 가진 것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을 하나님은 시험해 보지 안해도 다 아시지만, 아시지만 자타가 환하게 공개하도록 다 하기 위해서 우리를.

승리하신 주님이 당신의 종으로 잡아 부리는 지금 사탄입니다. 지금 사탄은 마귀는 당신의 종으로 잡아 부리는 사탄이요 마귀인데 잡아 부리는 이 사탄과 마귀를 어떻게 지금 사용을 하고 있는고 하니 '네가 지금 내가 대속을 해 가지고 이 대속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 이 성도들이 이 대속을 어느 정도 받고 있고 믿고 있고 가지고 있는가 이 대속의 권세를 입고 있는가 하는 것을 네가 시험해 봐라.' 하는 이것이 사탄이 지금 맡은 일입니다. 시험해 보라는 것이 이것이 사탄이 맡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시험은 무제한적인 시험입니다. 요거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무제한적인 시험이라. 무제한적인 시험이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을 두고 지금 그리스도의 심판은 네가 이렇게 네가 했다 하는 그 행동을 조사해서 행동대로 판단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인데 그리스도의 심판은 무제한적인 심판이 아니고 제한적인 심판입니다. 제한적인 심판.

주님께서 어느 정도의 한계 내에서 시험하라 할 때에 그 한계 내에서 시험을 하지 무제한적으로 이렇게 시험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그는 미쁘고 의로우사 감당치 못할 시험을 우리들에게 주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 반드시 시험 주는 것은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사탄에게 하지 못하도록 제한적 시험을 해 줬습니다.

제한적 시험을 허락하시고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 내 주신다. 그래 가지고 감당케 하신다 하는 그 말은 우리의 실력에 조금 넘은 우리 실력에 넘어서 우리 실력으로서 승리할 수 없는 그런 시험을 우리에게 하실 때에는 그 시험이 닥치기 전에 우리에게 예비적인 그 모든 훈련을 시켜서 예비 실력을 길러 가지고 시험할 때에 승리하도록 했기 때문에 '피할 길을 내사' 하는 것은 그것은 그 시험을 실지 시험을 닥치기 전 예비 훈련을 받아 가지고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했다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야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은 무슨 심판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 선지자 왕돼 가지고 우리를 구출하셨는데 이 구출하신 구출을 어느 정도 네가 받아 가지고 실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을 시험하는 심판이라서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말하는 것은 우리를 대속하신 분이 그리스도요 우리가 예택받을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받은 분이요 그리스도가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예수님되셔 기지고 우리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속하기 전에 도성인신 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요 도성인신 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예수님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잘 안 들으면 안 돼요. 이 기독교가 뿌럭지부터를 모르기 때문에 이 마귀에게 자꾸 밟힌다 그말이오. 뿌럭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 뿌럭지를 알아야 되는데 이거는 생각지 안하고 어데든지 가면 무슨 감정적으로 해 가지고 무슨 기분이나 좋고 뭐 당장에 도둑놈 모양으로 뭐 그만 성령 받아 가지고 뭐이 막 뜨끈뜨끈하면 다 된다, 아무것도 할 것 없이 가슴만 뜨근뜨끈하면 된다 내빌내빌내빌하는 이 방언만 하면 다 된다. 뭐 알기도 못하면서 뭐 이렇게 지시받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다 된다, 또 병만 나으면 다 된다 아니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선지자노릇도 했고' 선지자노릇 한 거는 설교하고 전도한 거 말합니다. 또 능한 일 했다 말은 기적을 한 걸 말한 것입니다. 많은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말했습니다. 그 암만 해야 소용없어. 나를 이렇게 했는데 나를 영접해 주십시오 하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악한 자야 내게서 물러가라.

그 악한 자라 말이 뭐이겠습니까? 그 악한 자라는 그 악을 뭐라고 해석합니까? 예? 이 악의 정의를 말해도 이 세상 밟히기를 많이 밟힌 사람 길가바닥들은 이 악을 그걸 이해를 안 할라고 합니다, 이 악의 정의를 이해를 안 해. 악의 정의를 이렇게 이해해야 제가 성경을 해석을 하지 악의 정의를 이렇게 자기 중심 피조물 중심으로 악의 정의를 내지 안하면 성경 해석하다가 다 막혀 버리고 안 나갑니다.

성경 전체를 연구해 보면 이게 나올 터인데 다 모두 성경은 읽지 안하고 자꾸 헛되이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뭐 참 별별 궤숭한 일과 기가 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기에 우리는 지금 대심판은 받지 안하기 때문에 천국 갑니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우리 마음과 몸의 형체는 다 부활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 이 기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 노력으로 살려야 됩니다. 제 노력으로 살려야 되는 것은 자기 전적 자기 힘이 아니라 기본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중생된 자들이기 때문에 나를 중생시킨 이 세 가지 능력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능력만 쓰면 이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능히 그리스도인의 그 본분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그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이러니까, 사심판, 이 사적 시험. 이 사탄으로 더불어 우리가 제한적 이 시험 제한적 시험, 제한적 시험이라 말은 사탄이 무조건으로 얼마든지 시험하라 하는 그게 아니고 제한적 시험이지 그거 무한한 시험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한적 시험이 아닙니다. 무한적 시험이기 때문에 무한한 공심판에서 공심판을 두고 하기 때문에 무한적 시험이지만 우리는 지금 공심판은 다 통과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점령하신 그 사탄을 거머쥐고 우리를 온전한 자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복된 자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릴 때는 조그만한 시험도 감당하기 어렵고 장성하면 큰 시험을 강당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장성해 감에 따라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은 점점 높은 시험을 오도록 그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학년은 일학년으로서 시험을 승리하고 또 아주 고등된 그 장성한 신앙은 장성한 신앙으로서 승리할 수 있는 어려운 시험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시험이 끝나지 안하고 가면 갈수록 시험이 자꾸 높아져 갑니다.

높아져 가고 깊어져 가고 범위가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의 장성에 따라서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시험하는 시험의 제한을 차차 차차 범위를 넓히고 더 높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점점 넓어지고 높아져서 힘드는 시험이지만 처음에 승리한 그 승리한 자는 그 내나 뒤에 어떤 시험이 와도 또 고만치 힘쓰면 승리하고 또 고만치 힘쓰면 승리하고 그 얼마든지, 마치 태산에 올라가면서 한꺼번에 두 발자국을 못 올라가지만 한 자욱 밟아서 올라가던 그 자욱 가지고 올라가면 아무리 수천 메타의 산이라도 올라가는 거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험은 그렇게 올라가서 승리해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요걸 똑똑히 알아요 그 모두 전부가 허영과 허욕을 가지고 모두 기만적의 이 노름꾼 모양으로 도박쟁이 모양으로 도박쟁이 신앙을 가지고 도박 구원을 이룰라 하기 때문에 도박 구원 이루는 자들이 여기 오면 이 말을 듣고 난 다음에 '아이구 어렵다 예수 새로 믿어야 되겠다.' 새로 믿어야 되겠다 하고 가 가지고 마귀가 속싹속싹해 가지고 이제 '그 백 목사는 이단이다' 이라니까 '그러면 그렇지.

됐다.' 안심하고 도망칩니다. 속았습니다 속았어! 속아. 속았어! 뭐 중생된 영이 그렇지 중생된 영이 죄를 안 지을 수가 있는가? 중생된 영 우리가 믿고 난 다음에도 하루 수십 번도 마음으로 죄를 짓는데 중생된 영이 죄를 안 짓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옳지, 그러니까 뭐 어짠지 새로 믿어야 되겠다 싶은데 이번에 말 들으니까 중생된 영은 백 조사라 하는, 그때 나 조사라. 백 조사는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 이단으로 OO노회서 정죄해. 다른 데는 정죄 안 했는데 OO노회서 정죄했어요. OO노회에서 정죄했는데 이제 OO노회에서 정죄했는데 그거 내가 많이 말은 안 해요. 말 안 해도 정죄한 사람들은 이다음에 인제 무궁세계에 가면 내가 틀렸으면 그 앞에 고패를 영원히 드려야 됩니다. 만일 내가 옳고 그들이 틀렸으면 영원히 내 앞에 와서 영원히 고패를 영원히 드립니다.

억만 년 드릴 게 아니라 영원히 드립니다. 영원히. 그러기 때문에 승리가 좋고 패전이 기가 차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묵에 죽기 전에 고칠 걸 얼른 고쳐야 돼 버려요.

이러니까, '그거 이단이라 그렇지' 그라면서 배반하고 간 사람들 많습니다. 많은데 참 그거 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문제가 안 났더라면 좋은데 졸졸 따라 나와서 될 법 하다가 그만 헛일하고 말았다 그말이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전투는 무한의 전투입니다 무한한 전투요. 한정이 있는 전투가 아니고 있는 대로 다 하는 전투라. 다 해서 이 전투를 이겼어. 무한한 전투이기 때문에 어떤 전투인가 하나님의 전지가 계획하고 전지가 알고 있는 전지의 지혜에 관련된 모든 전투를 다 해서 다 이겼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투는 그런 전투 아니고 제한적인 전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시험이 와도 사랑하는 주님이 감당치 못할 시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안했고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어떠한 시험이라도 그 시험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시험만 줬지 질 수 있는 시험은 주기 안했다 그말입니다.

이길 수 있는 시험만 줬는데 왜 못 이기는가? 이길 수 있는 시험을 줬는데 못 이기는 것은 이길 수 있는 시험이라는 이 예비 시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겁이 나 가지고 패전하는 사람 있고 또 이것을 알고도 실행하지 안하고 힘을 쓰지 않기 때문에 패전한 자 있고 그렇게 모든 잡탱이 패전한 자는.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우리가 가기는 택자들은 다 가기는 가지만 그 영광의 차이는 이 세상에 인간이 다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가치와 영광의 차이가 있는 그 차이만치 하늘나라도 차이가 있습니까 그 차이의 여러 억만 배 더 차이가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차이 있는 것만치 하늘나라에 간 사람과 하늘나라에 간 사람의 차이가 그만치 차이 있습니까 그보다 차이가 많습니까 그만치 있습니까 차이가 없습니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이 세상 사람들이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영광과 권세와 존귀와 가치가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도 그만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또 손 놔요. 꺼꾸로 배웠고. 세상에 차이 있는 억억억억억 억억억억 억억억억억억 억억억억만 배도 차이가 더 있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이거야.

이게 바로 믿는 거라.

내가 처음에 부산 가서 서부교회 전도사로 그때 부임을 했는데 그 옆에 교회서 장로 장립식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그 목사님이 이 옆에 교회에서는 어떤 전도사가 하나 왔는데 그 전도사가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가서 사는 하늘나라에서도 차이가 있다. 영광의 차이가 있다, 뭐 기쁨의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다 한다고. 그런 참 엉뚱한 소리하고 있다고 지금은 그런 소리 안 해요. 지금은 벌써 그때는 다, 그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래요. 자꾸 이래 고쳐 나간다 말이오. 고쳐 나가기 때문에 틀린 사람 보고 너 네가 틀렸나 맞았나 시비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이 고치지를 못하게 돼요. 그만 가만히 둬 두면 뒤에 고치게 돼요.

제가 대구에 해방, 바로 해방 직후던가? 해방 전이야. 해방 전에 제가 거게, 전이던가 몰라. 전이던가 직후던가 모르겠습니다. 집회하러 가니까, 우상의 제물 먹으면 안 된다고 이래 놨더니만 이 전도 부인들이 믿는 집에 제사 지낼 때 제물 갖다 먹으면 한턱씩 먹는 건데 우상 제물 먹는 걸 정죄를 딱 해 버리고 나니까 전도 부인들이 와 가지고 막 시비를 대 가지고 어째 우상의 제물 먹으면 그게 죄냐고 이라더니만 나중에는 장로들이 막 뚤뚤 뭉쳐 가지고. 그때 내가 큰 욕 볼 뻔 했어요.

뭐 장로들이 단체로 뭉쳐 가지고 와 가지고 어떤 쪼그만한 조사가 와 가지고 우상의 제물 먹는 거 뭐라 한다고 야단지기는데, 마침 내가 그때 대구에 그 OO교회라는 그 교회에 집회갔어요. OO교회 장로 그 O장로라 하는 그 장로가 억센 장로라요. 그 아나요 OO씨? 대구 OO교회 O장로 그 정미소하고 까무스름한 억센 장로라. 그 이제 장로가 막 대신 싸웠어. 남의 교회 강사를 몰아댈라고 왔다고. 그래 가지고 그때 피난했는데 지금은 OO노회에서 우상의 제물 먹어도 좋다 하는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서 배워 가지고도 자기만 실행해요. 자기만 실행을 하지 그거 가 가지고 자랑을 하면서 저거 교회 가 가지고 교역자에게 '이런데 조사님 틀렸다' 이래 하면 그만 그 조사님이 그만 이 뿔따구가 나 가지고 '틀렸어? 뭐이 틀려?' 이래 가지고 그만 이래 대립해 가지고 다중에 은혜도 받지 못하고 서로 자꾸 이래 욕을 해 가지고 백 조사 이단이라고 자꾸 모는 것은 내 밑에 은혜받은 사람들이 가 가지고 백지 벌 입을 이래 자꾸 주 놀려 가지고 그렇게 다 돼져요, 안 들은 그분들이 틀린 게 아니고 여기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가 가지고 벌로이 말을 해서 자꾸 그렇게 그분들이 욕하는 일을 하도록 죄를 짓도록 그렇게 만들어요. 여게 배운 것을 다른 데 가서 말하지 말고 자기만 강직하고 구원을 이루십시오. 옳고 바르게 가르치고 있으니까.

우리는 제한적 전투, 제한적 전투요 제한적 시험을 우리가 받습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것은 원형적 시험이요 우리는 그와 꼭 같은 성질의 모형적 시험인데 예수님은 공심판을 상대한 시험이요 우리는 사심판을 상대한 시험입니다.

이 교역자들이 암만 머리가 아파도 요걸 꼭 배우십시오. 배워 가지고 요거 깨닫고 강단에서 말해야 되지 이거 깨닫지 안하고 뭐 웅변으로 뭐 고함으로 떠드는 그까짓 거는 나중에 뿍시미같이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안 돼요. 그래 가지고 갈수록.

그래 가지고는 그런 사람은 그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 못 합니다 안 돼요. 또 오랫동안 목회 한다면 그 교회는 항상 이 세상이 돼 가지고, 교회 같으나 세상이 돼 가지고 말지 그저 어쨌든간에 목회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바로 깨달아서 바로 가르치는 거 이것이 목회에 외부 성공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이 성경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성신의 감화 감동대로 설교하고 목회해야 돼지지 그리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영감과 진리 외에는 그 바른 목회가 안 돼요. 다른 것을 받지 말고 고것으로만 똑 할라고 애를 써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게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성령이 인도하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셨다. 인도하기를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광야에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지금 산꼭대기까지 다 올라가게 됐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시험을 닥치는 것은 무슨 시험을 닥치든지 그 시험 닥친 것은 다 성령님이 인도하신 시험이라 그렇게 여러분들이 요게서 배우고 확정을 하십시오 무슨 시험을 닥치든지 경제 시험이든 지, 무슨 가정 시험이든지, 도덕 시험이든지, 범죄 시험이든지, 무슨 시험이든지 시험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시험을 이기면 그 시험 닥칠 때보다 더 좋게 되고 그 시험에서 지면 시험 닥치기 전보다도 좀더 더 못해지고 요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험을 쳐서 합격하면 더 올라가고 그 시험에 낙제되면 시험 치르기 전보다도 더 떨어져 가는 거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성령님이 예수님이 시험을 받도록 인도를 했습니다. 성령님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이렇게 한 요 말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도전하러 오니까 예수님이 도전하러 오셨는데 도전하러 오신 그 예수님을 안내는 누가 했느냐 하면 성령님이 안내를 했다 그말이오. 안내했는데 안내해 가지고 누구에게 도전했느냐? 사탄에게 도전을 했다 그말이오. 도전해 가지고 사탄을 이겼기 때문에 됐지 사탄에게 졌으면 헛일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이 전투는 원형적 전투요 우리의 전투는 그와 같은 그 모형적 전투이기 때문에 모형 전투에 승리할려면 원형 전투에 승리하는 그 법을 똑똑히 알고 고 방편을 똑똑히 가져야 이 모형 전투에 승리를 하지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한 이 예수님은 원형이고 공심판에 통과한 그 전투 방법을 우리가 잘 공부해 가지고 배워 가지고 이제 사심판을 상대하는 이 전투를 우리가 승리해야 그리스도의 심판에 다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 안 하면 통과하기 못합니다.

이러니까, 이제 오늘 저녁에 배우는 것이 뭐이냐 하면 예수님이 전투로 승리해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면 승리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을 우리가 받기는 받았는데 이 구원을 내가 받았으면 어떻게 받아 가지고 있느냐 그 사실을 우리에게 조사하기 위해서 시험이 있고 또 그 받은 구원을 우리가 확고히 실상으로 받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다 전투 교회라. 세상 교회는 전투 교회인데, 세상 교회는 전투 교회라. 전투 교회인데 우리에게 있는 전투는 공심판을 지금 두고 공심판에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하는 공심판 그 심판 여하를 공심판 심판 여하, 공심판을 상대한, 공심판에서 어떻게 되나 하는 공심판을 둔 우리의 전투입니까 공심판에는 상관도 없는 이제 사심판을 두고 지금 판결을 받는 이 전투입니까 무슨 전투입니까? 사심판을 두고 실력을 판단받을 이 사심판 전투라 그말이오.

요걸 똑똑히 알아요. 요거 아는 것도 중요해요. 이거 뭐 신학 박사 가운데서도 모르는 사람 많아요. 뭐이 뭐인지? 요런 것을 똑똑히 알아서. 그러면 지금 이제 오늘밤에는 우리는 다 전투 교회라, 말하자면 전투의 신자라. 전투 교인이라, 전투 교인이라 전투 신자라. 그러면 우리는 전투의 사람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전투로써만 전진합니다. 절대. 그 전진 못 해요. 향상도 못해요.

한 전투에서 승리하면 한 층 올라가고 또 한 전투에 승리하면 또 한 층 올리고 한 전투에 승리하면 또 한 층 전진하고 이렇게 돼지고 한 전투에 승리하면 승리한 것만치 실력이 커졌고 두 번 승리하면 두 번 승리한 것만치 전투가 커졌고 세 번 승리하면 세 번 승리한 것만치 전투가 커졌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전투 교인이라 따라합시다.

우리는! 우리는! 전투 교인이라! 우리의 신앙은! 전투 신앙이라! 우리의 시험은! 무한적 시험이 아니고! 유한적 시험이라! 그러므로! 감당치 못할 시험은! 우리에게! 오지 아니하나니! 오는 시험마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불충한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요것을 확고히 잡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님이 시험을 받도록 인도했는데 우리도 성령님이 시험을 받도록 인도하십니다. 낱낱이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이 시험을 받도록 인도하시요.

인도하시는데 예수님은 시험을 받도록 성령님이 인도하셨는데, 인도하셔서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령님이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거.

예수님은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우리는 어데로 인도하십니까 혹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이 우리는 현실로 인도하십니다.

요걸 확고히 잡으십시오. 믿는 데에 능력이 오지 믿지 않는 자가 입술만 가지고 하는 데는 마귀 들어옵니다 속으로 믿지 안하면서 입술만 하는 것은 마귀 들어와요.

OOO조사님. OOO조사님 속에 울툴툴 하거든 확정을 지워요. 울퉁울퉁 하거든 확정 지워. 뭐 혹 그거 내가 그걸 잘 모르기는 모르겠는데, 언제 내가 조용히 말하면 하겠는데, 어찌 됐든간에 속에 울렁울렁한 그런 게 있거든 확정을 지워서 하면 자유가 있고 평강이 있고 능력이 와요.

성령님이 우리를 어렇게 인도하시는가? 예수님은 성령님이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랬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인도하실 때에 뭐 광야로 인도하실 때도 있고 산으로 인도하실 때도 있고 도시로 인도하실 때도 있고 또 공산주의 앞에 인도하실 때도 있는데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현실로 인도하신다 그라면 만점입니다. 뭐. 변동 없어요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 하시는데 우리에게 이 현실이 또 지나가고 또 딴 현실이 오고 자꾸 현실에 현실이 교체돼서 자꾸 우리에게 현실이 닥쳐오는 것은 그 현실은 누가 그 현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십니까? 성령님이 만들어 주시요. 성령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님이 만들어 주시오 우리 현실은 성령님이 만들어 주시는데 그 만들어 주시는 것은 요 현실을 만들어 주시니까 내게 고 현실 닥치고, 그러면 현실을 만들어 주시니까 현실마다 내게 닥치는 그 시험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그 현실마다 시험이 다른데 그러면 다른 것은 그 현실마다 닥치는데, 그 현실마다 닥치는데 다른 시험이 닥치니까 그 시험은 뭐입니까 그 시험이? 뭘로 시험합니까? 뭣으로 시험을 합니까? 예수님 시험하신 거와 꼭 같이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이 계약이 있는데 그때는 신약은 없을 때지만 구약은 다 완전히 완료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신약은 더 똑똑하게 알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구약 속에 신약이 다 들었고 신약 속에 구약이 다 들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도 이 신구약에 있는 모든 이 계약이 다 나타나 가지고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험은 뭐이냐? 이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느냐 어기느냐 하는 고것이 예수님의 시험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담은 그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시험에 패전했습니다. 둘째 아담은 그 계약을 지켰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닥쳐지는 이 온갖 현실 말이오. 온갖 현실 닥칠 때에 그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 현실이 뭣뭣이 합해 가지고 현실이 되느냐 하면, 자, 몇 가지 합해 가지고 현실이 됩니까? 한 가지만 가지고 현실 될 때도 있고 두 가지 가지고 현실 될 때도 있고 열 가지 가지고 현실 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백 가지도 더 되는 거 가지고 현실 될 때도 있고 현실은 그렇게 여러가지 가지고 현실 만듭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실을 여러가지 가지고 만들지 안해요? 여러가지 가지고 현실을 만들지요.

어떤 현실에는 친척도 들었고, 원수도 들었고, 남자도 들었고, 여자도 들었고 돈도 들었고, 사업도 들었고, 또 권세도 들었고, 정치도 들었고, 벼슬도 들었고, 거게는 또 쾌락도 들었고, 또 거게는 욕도 들었고, 거게는 또 감정도 들었고, 애매함도 들었고 억울함도 들었고, 별별 것이 주 모아 가지고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면 현실 만들어 주시는데 그 현실 만들 때에는 그 현실 만든 숫자의 종류가 말이오. 현실에 거게 만들어진 모든 요소들을 말하면 그 요소가 숫자가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고 다 그런데 그거는 누가 만들었느냐? 성령님이 만들었다 그말이오. 성령님이 뭐입니까?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님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을 누가 했어요? 성령님이 했어요.

성령님이 우리의 현실을 만듭니다. 현실 이런 거 저런 거 만드는데 그 현실을 만드는데 우리가 거게서 착각하기 쉽습니다. 현실을 만드는데 그 현실이 그것이 사람도 들었고, 좋은 사람도 들었고, 나쁜 사람도 들었고, 나 속이는 사람도 들었고, 나 욕하는 사람도 들었고, 나 칭찬하는 사람도 들었고, 나를 뺨 때리는 사람도 들었고, 쥐박는 사람도 들었고, 꾀우는 사람도 들었고 그 현실에 많은 사람이 들었는데 그 모든 현실에 그 많은 요소들이 제가 내 현실에 거기에 가담을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자유로 가담했습니까 절대 가담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도록 절대성의 절대의 능력이 그 현실에 가담하도록 해서 가담했습니까 그것들이 자유로 가담했습니까? 자, 자유로 가담했습니까 내 오늘 현실에, 오늘 내 현실에는 의외에 보지 못한 밉상스러운 사람이 와 가지고 그 시간에 지금 촉분을 지르고 와서 이렇게 부애를 지르고 달라듭니다. 달라들면, 그러면 그 사람이 나한테 촉분 지르고 달라드니까 그거 현실 아닙니까? O장로, 그거 현실 아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지금 그 내 현실에 나타나고 싶어서 나타났습니까 자유로 나타났습니까 제가 안 나타날래야 안 나타날 수 없도록 절대의 권위에게 붙들려서 나타났습니까 어떤 주권 행위에 붙들려서 나타났습니까 그것이 나타나고 싶어서 나타났습니까 제가 원해서 나타났습니까? 뭐 어째 나타났소? 할렐루야? 이거 알아야 돼요. 이거 알아야 돼 제가 나타나고 싶어 나타난 게 아니라 그말이오. 안 나타날래야 안 나타날 수 없어. 전능하신 성령님이 여기 아나 너도 가담해야 돼. 이 현실에 가담해야 돼. 전부 불러대니까 막 불러대니까 이게 다 와 가지고 이 현실은 열이 뭉쳐 가지고 현실이 되고, 스물이 뭉쳐 가지고 현실이 되고, 서른이 뭉쳐 가지고 현실이 되고, 어떤 때는 오십이 뭉쳐 가지고 되고, 어떤 때는 여러 수만의 군대들이 뭉쳐 가지고 현실이 되고, 이래 현실 되는데 그 현실 되는 그 현실은 주님이 나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나에게 주신 것이지 현실에게 이용당하는 그것들은 자유가 없습니다. 권리가 없어. 그 현실을 만든 그분에게 주권이 있어요.

이러니까 그 현실을 보고, 현실보고 현실에 만들어진 그 요소를 보고 욕을 해야 되겠소? 현실을 만든 그이 보고 욕을 해야 되겠소? 싫은 현실 어째야 되겠소? 요소.

보고 욕해야 되겠소 현실을, 만들어 준 그이 보고 욕을 해야 되겠소? 그 현실이 싫으면. 현실이 싫어서 현실이 싫어서 욕을 할라면 현실 만든 그이를 보고 욕을 해야 되겠소 현실에게 이용된 데 대해서 욕을 해야 되겠소? 이용된 데 대해, 이용되는 거 제가 뭐 이용되기 싫어도 할 수 없는데? 그런 욕은 할 수 있지. '이 새끼야, 이놈아, 뭐 할라고. 이 현실에 이용되러 왔노? 뭐하러 왔노?' 이런 욕은 할 수 있지만, 그라면 그거는 아마 현실은 그랄 거라.

현실은 말하기를 '내가 오고 싶어 왔나? 안 올라면 안 올 수 있나? 전능자 주권자 개별 섭리자 주권 개별 섭리자가 이래 이렇게 여기 현실에 가담하라 했는데 내가 가담하기 싫다고 안 할 수가 있나?' 그래 대답할 거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 현실은, 현실은 누가 만들었어요? 성령이 만들었어. 성령님이. 요것만 배워도 여러분들 여기 온 거 값이 돼. 이것만 해도 여기 온 값이 넉넉하고도 남아요 천천 금은보다 보배라요. 현실을 만드는 이는 성령님인데 성령이 만들어 줬다 말이오.

그 만들어 주신 목적이 뭐입니까? 그 현실을 만들어 주신 목적이 뭐이요? 뭐할라고 현실을 만들어 줬어? 예? 우리를 시험하실라고, 우리에게 씨름 붙이느라고 했다 말이오. 우리에게 씨름 붙이느라고 우리에게 씨름을 붙일라고, 시험한다 말은 우리하고 말이요. 우리하고 이 현실을 이 사탄, 하나님이 부리는 종 사탄이 그 현실을 거머쥐고. 현실을 거머쥐고 이 현실을 사탄 제맘대로 이용할라 하고 또 우리는 그 현실을 내가 맘대로 이용할라 하고 그 싸움이라.

이 시험은 무슨 시험이냐 하면 그 현실 닥친 것은 그 현실을 주님이 마귀란 놈을 시켜서 '그 현실을 네 마음대로 그 현실을 이래 해' 가지고 사용해 가지고 '저 아무것이를 백 목사를 시험해라, 저 지금 O목사를 시험해라.' 이렇게 시험하라 한다 말이오. 시험하면 '네가 네 주장대로 이 모든 현실을 붙들고 네 주장대로 그와 같이 해라.' 이라면 또 이제 백 목사는 '네 주장대로 못한다. 이 현실은 내 주장대로 할란다.' 그 현실을, 현실, 나한테 와 가지고는 또 인제 성령님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만들어 줘 놓고 '네가 이 현실에, 이 현실에서 네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자꾸 현실에 대해서 나에게 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또 시킨다 말이오. 시키고 또 저 마귀에게 가 가지고는 또 마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또 시킨다 말이오.

마귀는 누가 시킵니까? 성령님이 마귀 시켜. 알겠어? 요거 알아야 돼요. 마귀도 성령님이 시켜. 성령님이 부리는 신이 됐어. 성령님이 시켜.

거기 가서는 또, 거기 가서는 지금 나 반대하라고 또 시키고 나한테 와 가지고 저 또 마귀 반대하라고 시키고 이래 둘이 한번 싸움 붙어 봐라 이 반대하라 이라는데 둘이 현실에 붙었다 말이오.

붙었는데 내가 마귀가 그 현실을 붙들고 제맘대로 현실을 할라 할 때에 나는 현실을 내맘대로 할라 하고, 현실에 대해서 내 맘대로라니? 내가 가진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나님의 계명대로 현실에 대해서 취급할라 하고 마귀는 그 현실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그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나에게 어긴 그대로 나를 이 현실을 취급하라 하고 성령님은 이 진리대로 취급하라 하고 이라니까 나하고 현실하고 싸움이 붙겠소 안 붙겠소? 나하고 현실하고 싸움이 붙지 싸움이 붙는데 그 현실 배후에는 뭐이 있어? 사탄이 있지.

그러니까 우리가 눈이 밝아서 이제 현실에 와 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나를 못 살게 그래 합니다. 못 살게 하면 설설 달래요. 달래서 현실아 네가 나 하는 대로 하면 만물이 새로와질 때에 네가 영생으로 새로와지고 마귀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된다, 네가 지금 현실이 자꾸 마귀 시키는 대로 나한테 말하는데 나한테 마귀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나 시키는 대로 해라. 자꾸 이렇게 해 가지고 서로 이 싸움이 붙는다 그말이오 붙는데 이라니까 마귀도 안 지고 나도 안 질라 합니다.

이라면 그 내가 현실을 이기는 도리가 뭐입니까? 그 현실을 내 가 점령하는 도리가 뭐이요? 이 현실 내가 점령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현실을 점령할 수 있습니까? OOO목사님. 어? 현실을 점령하는 것? 현실을 점령하는 것? 현실을 점령하는 것? 자꾸 따져 물어도 대답하는 것 보니까 확신이 있는 모양이로구만.

현실을 닥칠 때에 현실에 뭐 막 우 달라들어 뭐 라고 하든지간에 나는 고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 명령대로 딱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딱 해 하나님 말씀대로 딱 하면 나 할 일 다 했어. 하나님 말씀대로 딱 하면 제가 현실 제야 순종하든지 말든지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딱 해서 내가 요리요리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딱 해 버리고 나니까 나 할 일 했으니까 나는 승리했다 그거요.

그러기에 여러분들, 요 현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전투하라고 보냈기 때문에 전투하라는 것은 고 현실에서. 현실에서 마귀는 나를 마귀 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금 나한테 달라들어 싸우고 나는 마귀에게 대해서 하나님 시키는 대로 마귀.

네가 해야 된다 하면서 하나님 시키는 대로 나 하고, 나는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고 마귀는 또 하나님 시키는 반대로 하고 이와 같이 해 가지고 내가 하나님 시키는 고대로 고 것으로 하고 끝이 나 죽든지 말든지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는 고것으로서 일관해서 끝을 맺어 버렸으면 나는 승리한 사람이고 이제 그거는 점령한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우주와 영계와 모든 것을 점령하는 방편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 점령하는 방편은 그 시험이 왔을 때에 내가 시험에 지지 안하고 고게서 하나님의 시키시는 대로 하는 고 일을 고대로 끝까지 계속해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으로 끝내 버렸으면.

예수님이 자, 승리한 것은, 승리한 것은 살아서 승리했습니까 죽어 승리했습니까? 예수님이 만일 십자가에 못박혀 가지고 지금까지 안 죽고 지금 그 생명이 붙어 있으면 예수님의 그 승리는 끝이 났습니까 아직까지 미결입니까? 그거 똑똑히 그게 나요? 오늘까지 예수님이 만일 십자가에 못박히셔 가지고 지금 거기서 아직까지 생기가 남아 있다면 말이요, 생기가 남아 있으면 아직까지 승리 끝나지 안됐어. 아직도 그 다음에 뭐 있을지 아직까지도 미결이라 말이오. 미결이지만 승리하는 것으로 딱 끝나 버렸으니까, 승리하는 것으로서 그 모든 전신의 모두 전체가 다 끝나 버렸으니까 자 전쟁은 끝났어 안 났어? 끝났어. 승리로 끝나 버렸다 말이오. 우리가 요걸 알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에게 그 시험 오는 것은 우리가, 그 시험 오는 것은 처음에 보니까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이 있는데 현실을 보고 욕하고 현실을 보고 지금 불평하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 현실에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보고 거게다가 원수를 품고 대적을 하고 욕을 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눈이 어두운 소행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것은 제가 오고 싶어 왔는가? 오고 싶어 은 게 아니라 전능자가 몰아대니까 할 수 없어 왔지. 이라니까 이제 그걸 보고 원망할 게 아니라 그 배후에는 전능자가 조절해 가지고 이런 것들을 종합해 가지고 현실을 만들었다.

그러면 이 만든 것은 전투하라고 만들었다 그러면 전능하신 성령이 만들었는데 그 배후에, 성령님이 만들었는데 성령님 그 배후에, 눈을 뜨고 가만히 살펴 보니까 창살문에 말이오. 저 방안에 앉아 가지고 창에다가, 창호지로 문 발라 놨지요.

창에다 바늘 똑 한번 똑 뚫으니까 그 밖에서야 그 구멍 보이요 안 보이요? 안에서 고 구멍으로 보면 밖에 다 보이요 안 보이요? 다 보이요.

그와 같이 고 바늘 구멍이 있는데 바늘 구멍에 자세히 눈을 떠 가지고 가만히 딱 보니까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이 지금 그 배후에서 나를 시험하고 있다 말이오. 이러면서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나 내가 죽기까지 해 가지고 세 가지 대속을 입혀 놨는데 네가 내 대속을 네가 기념하나 대속을 벗어내 버리나? 네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대속을 벗어 버리나? 죽어도 대속을 벗지 않고 네 생명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생명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돈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돈 백 원짜리만치 나를 사랑하느냐 천 원짜리만치 사랑하느냐, 천 원짜리만치는 사랑하지만 만 원짜리만치 사랑 안 하는구나. 또 억만 원만치 사랑하느냐 돈 전부만치 사랑하느냐 네 몸뚱이보다, 몸뚱이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네 생명을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최후의 사랑은, 소유, 소유보다 주님 사랑하고, 몸보다 주님 사랑하고, 생명보다 주님 사랑하면 그보다 더 주님 사랑한 사람 있습니까? O조사. 이 속에 안 따라 들어오는 모양이라.

영감이 안 가는 모양이라.

이거를 알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알아야 돼요? 이것을 어쨌든지 모르는 사람은 패전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패전이라. 과거에도, 앞으로 지금 이렇게 자꾸 가르쳐 주는 것이, 저는 여게 대해서 하나도 준비 안 했어요. 준비 안 했는데 오늘 오면서 요 뭐 할까 요번에는 하나님이 뭘 주실란가? 나도 몰라요. 당신이 주시는 대로 내가 하지 뭐 내야 내맘대로 한 마디도 안 할 터이고 내 말은 하나도 안 할 터이니까 당신이 하라는 것만 하겠습니다. 이라는 내게 떡 보여 주기를 그렇게 보여 줘 아무래도 이제 이 환난이 심하기 때문에 이제 시험을 이기는 사람들이 돼야 된다 환난을 승리하는 성도들이 돼야 된다. 여게 모인 사람들이 말이지요, 여게 모인 사람들이 전부 앞으로 공산주의든지 한번 뭐이든지 시험합니다. 큰 시험이 한번 와요. 시험해 그 알곡인가 쭉정이인가 키를 가지고 한번 까불러 봐.

까불러 가지고 알곡 쭉정이가 앞으로 나타날 거라 말이오. 참으로 예수 믿나, 하나님의 전능을 참말로 믿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나,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나.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 자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

이 믿는 믿음이 대번에 됩니까 여러 수천 번 연습을 해 가지고 됩니까? 수천 번 연습해 가지고 되는 거라. 연습 없이 되는 줄 알아요? 연습 없이 안 돼요. 연습해 가지고 돼요.

자, 이런데, 들여다 보니까, 현실이 왔습니다. 현실이 왔으면 인사를 그래 해야 돼, 우리는 사실. 현실이 왔으면 기뻐하면서 '수고합니다' 경어를 쓰며 '모두 수고하요.

수고하요.' 왜 수고하요 인사를 해? 나 위해 왔거든. 나 위해 왔으니까 수고하요 인사해야지. '수고하요'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인제 그 인사했으니까 고다음에 또 인사를 해야 되겠다 말이오. 고다음에는 누가 계시느냐 하면 성령님이 계시거든. '이렇게 참 열심히 수고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성령님에게 또 인사해야 되겠다 그거요.

고다음에 또, 고다음에 또 들여다 보니까 누가 있습니까? O장로. 뭐? 마귀? 큰일났네. 그안에 누가 있어? 주님이 계셔, 주님. 주님이 계시니까 온전히 기뻐하면서, 온전히 기뻐하면서 '주님, 어짜든지 내가 이렇츰 원청 연약해 놓으니까 이라시는데' 반가워서 '나에게 힘을 주시고 이래서 어짜든지 주님을 만족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해 주옵소서' 이렇게 하면서 그 주님이 지금 창살틈으로 보고 있는 것 딱 보고 속으로 반가워서, 이럴 때는 말이지 이번에는 말이요. 주님이 창살틈으로 나를 보고 계시니까, 아가서 거기 있어요, 창살틈으로 창살틈으로 주님이 보고 계시니까 이때 한번 주님의 마음이 만족하도록 한번 멋지게 한번 주님 한번 사랑해 봐야 되겠다 하고 그때 힘을 바짝 쓴다 말이요.

그럴 때. 알겠어요? 이러기 때문에 이라는 사람들은 다 신사참배 다 이겼어. 신사 참배 다 이기고 6·25때도 다 이기고 이래 신앙 준비한 사람들은 다 이겼고 껍데기로 준비한 사람들은 다 패전했어요. 여게 있는 사람 패전 하나도 안 돼야 돼요. 다 패전 안 해야 돼. 이거 다 배우면 패전 안 해요.

오늘 저녁에는,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올라가는 것은 꼭 시험쳐서 올라갑니다. 우리가 자라가는 것을 시험 쳐서 자라가지 시험 안 치고 자라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으로 자라가고 시험으로 자라가고, 시험을 치면 시험은 무슨 시험입니까? 시험은 무슨 시험이요? 전투 시험이라, 전투 시험 전투 시험으로 자라가요 전투 시험으로.

그러니까 기독자가 자라가는 것은 승리로 자라가지 승리 없이 자라가는 일이 없습니다. 승리는 전투 없이 승리가 없습니다. 전투는 그것이 모두 다 시험입니다.

이러니까 그러면 그 전투하는 그 전쟁에 그 전쟁터를 누가 마련했어요? 성령님이 마련했어요. 그러면 전투를 마련했는데 그 전투로 인도하신 이는 성령님이오.

뭐하라고? 뭐하라고? 뭐하라고? 시험해서 뭐 할라고? 승리하도록.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련하셨다 그말이오.

그러면 자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현실을 마련해 주셨는데 현실이 우리에게 대해서는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주셨으니까 이 현실이 우리에게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자, 현실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봐요. 축복이야 축복.

따라합시다.

현실은! 축복 축복! 현실은! 축복 축복! 할렐루야 할렐루야! 승리야 승리야! 성장은 여게 있다! 향상은 여게 있다! 면류관은 여게 있다! 여게 있어요. 이 현실을 이렇게 알아야 돼요. 오늘 저녁에는 그만 하고, 이제 똑똑히 배워요. 배워 가지고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한번 바짝 기도하고. 이제 확정해요. 현실 닥치면 원망 불평 시비하는 것을 야고보서 5장에 말씀하시기를 현실을 닥칠 때에 원망하지 말아라 그라면 심판 받는다 이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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