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하나님 독재주의

 

1988. 10. 23. 주일오전

 

 본문:창세기 12장 1절∼9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요사이 이 말씀을 주일학교 공과로 계속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때도 아브라함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해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천하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라 그렇게 말씀을 그 후 성경으로 증거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 자손됨은 혈육적으로 자손됨이 아니고 믿음의 자손들입니다. 마치 무슨 새끼든지 그 새끼는 에미 애비를 닮는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의 믿음은 다 아브라함을 외모로 닮아야 하겠고 또 내적으로 아브라함의 그 신앙 씨가 계속해서 전해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그 신앙 생활을 어떤 한 위대한 개인의 신앙 생활로 이렇게 생각해서 참고를 삼는다든지 또 그를 하나의 표본으로 본받는다든지 그런 정도가 아니고 막바로 에미와 새끼의 그 관계와 같은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에는 이런 신앙적 관계를 가진 것인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손 전부에게 대한 약속이요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그 명령은 모든 믿음의 자손들에게 꼭 같이 명령한 것이요 같은 소망과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대한 하나님의 온갖 그 은혜의 역사를 우리가 하나의 참고로만 삼을 것이 아니고 직접 우리 개인 개인들이 받아 가지고 이 은혜를 자기 은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기를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이렇게 명령하신 것이 첫째 명령입니다. 두번째는 내가 너를 어떻게 지시하든지 너는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라 하는 이것이 둘째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첫째 둘째 명령이요 그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일곱 가지 복을 주겠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만 순종하면 됩니다.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거게 여러 가지 지엽적인 것이 있지마는 다 그는 이 두 가지에 속한 것이요 두 가지에서 나온 것이요 이 두 가지 속에 다 내포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딴것은 아닙니다.

첫째 둘째 두 가지 명령하시고 복을 일곱 가지를 주시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 일곱 가지 축복은 무엇으로서 우리에게 오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두 가지 명령하신 이 명령을 우리가 순종하는 그 순종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순종 이것이 바로 일곱 가지 복이요 또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명령하신 이것이 바로 일곱 가지 복을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의 실상입니다. 그 실상인 그 실상의 복의 실상을 우리가 받아 가지는 것은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받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그다음에 4절 끝에서부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이 말씀을 특별히 밝힌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연조가 필요합니다.

세월을 거쳐서 신앙은 수정되고 또 연단되고 구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속성적으로 요새와같이 고성능으로 이렇게 하시고 싶지마는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이 구원이라는 것이나 축복이라는 것은 이것이 다 죽은 것으로써 어떤 것을 제작 제조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가 다 산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도 자라가는 것이요 명예도 영광도 자라가는 것이요 지혜도 자라가는 것입니다.

다만 자라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진화적으로 자라가지마는 우리 기독교의 축복이 자라가는 것은 진화적으로 자라감이 아니고 계시적으로 자라가고 은혜로 자라갑니다. 하나 주시면 하나 받고 열 주시면 열 받고 받아서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저희들의 있는 그 자체가 점점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진화적 성장이지마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은혜적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일곱 가지 복을 실상으로 받아 가지는 것이요 또 하나님께서는 이 일곱 가지 복을 실상으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곧 축복 그 자체요 실체입니다. 그러면 이 축복을 우리가 가지는 데는 그 명령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실상을 주실 때에 받는 것이요 또 순종하는 것이 그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우리들이 가지는 데에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그 방편 외에는 가져지는 것이 없고 자기가 비록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구비하게 실상적으로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받아 가지고 있는 그 축복의 실상도 누릴 때에 순종으로 누립니다. 순종하면 누려지고 순종하지 안하면 저는 거게 대해서 하나도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전부가 다 순종이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완전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을 가져 죽기까지 복종으로써 이 성공을 일으켰습니다.

기독교는 순종의 도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에는 이 진리로 주실 때에 그 진리를 받아 아는 것이 순종이요 그 진리를 부인하지 안하고 인정하는 것이 순종이요 그럴 때에 이 가치를 깨닫고 소원과 소욕을 품는 것이 순종이요 이것은 다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우리들이 이목구비 수족으로 실행하는 이것이 몸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합해서 믿음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순전히 순종의 도요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축복이요 구원이요 생명이요 평강입니다. 우리가 영생하는 생명을 가졌을지라도 영생하는 생명이 순종이 끊어지면 즉시 사망합니다. 순종으로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이라 말은 영원히 순종이 계속된다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자존하신 한 분이신 그분의 완전하시고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거기에 따라 복종하고 받아 가짐으로 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 한 분은 홀로 독재자입니다. 주권자요 자율자입니다. 아무것에게도 가감이나 피동이나 타협이 없습니다. 순전히 주권자이십니다. 독재자이십니다.

이분에게 독재를 당하면 살고 이분에게 항거하면 사망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구세주가 되셨고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게 된 것은 아버지에게 완전히 독재를 당하고 완전히 당신을 비워서 영원히 복종하는 이 독재당한 것으로써 당신의 전생애를 삼아서 이러므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존재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이나 또 도성인신 하시기 전에 영으로 계실 때의 모든 구약 선지 성도들이나 그 전부는 다 단일 독재에 복종한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완전히 독재를 당해서 복종하셨고 십이 사도는 예수님에게 완전히 독재를 당해서 복종한 사람들입니다. 오늘까지 세계 만방에 퍼져 있는 기독교는 한 분 그분에게 독재를 당한 그자가 그다음 것을 그 명령 가지고 독재하고 그 명령 가지고 독재해서 그 주권이 땅끝까지 모든 사람의 말단까지 다 이르러서, 그러기에 단일 통치라 하는 것을 말했어. 이것은 세계의 학자들과 통일되지 안하는 말입니다. 칼빈도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를 말했습니다.

정치는 하나라, 단일 통치라, 나라는 둘이라, 우리는 나라는 둘입니다. 땅에 속한 나라가 있고 하늘에 속한 나라가 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국민노릇을 하지마는 통치는 한 통치만 우리는 복종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인서 13장 1절에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안한 것이 없으니 권세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을 받으리라” 이랬는데 왜정 말년에 우리 나라에서는 총독이 최고의 권세자인데 그 권세는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에 총독이 시킨 이 신사참배를 해야 된다 하는 것이 그것이 모든 일반적 신학자들의 해석으로서 우리 나라에 그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지 안한 사람들이 아주 흰쌀에 뉘보다도 도리어 수가 적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안한 것이 없으니 조선 나라 총독도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께 복종해서 하나님께 독재를 당하는 총독이라면 그 총독에게 우리는 독재를 당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총독이 권세 주신 하나님에게 독재당하지 안하고 자기 주장대로 나가면 그거는 역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역적된 그 총독이기 때문에 역적자에게 복종하면 하나님께 내가 역적이 되기 때문에 이는 복종할 수 없다 하는 그 깨달음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다 생명 내놓고 싸워서 이겼던 것입니다.

이랬는데, 요사이 지금 세계 교회가 이제까지 늘 내려오기를 기독교는 민주주의라 이렇게 해서 민주주의의 그 무서운 그물 속에 싸잡혀서 자유하는 것 같으나 실상 이 면에는 자유하지를 못하고 완전히 포위 속박돼 가지고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잘못 깨달음의 감옥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어두움의 노릇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깨닫는 사람들이 여게 저게 있어서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주의라. 민주주의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이요,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말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하는 것은 신본주의의 사상이요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인본주의의 사상이라.

이래서, 이것 때문에 우리 총공회도 물의가 많고 지금 심히 분요합니다. 온 전국이 지금 보고 있습니다. ‘저 총공회, 예수교 장로회 한국 총공회 저 총공회가 어데로 가나, 저 총공회가 어떻게 되나?’ 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것은, 이러기 때문에 저 백 목사가 있는 한은 저 총공회가 절대로 없어지지 안하고 그대로 유지돼 나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분이 만일 세상을 떠난다고 하면은 그 후계자가 없다. 그러니까 그거는 천지 만엽으로 갈라질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목사가 ○○○목사님에게 와 가지고도 말하기를 ‘○목사야 너거 총공회가 어떻게 돼 가지고 있는지 아느냐? 지금 백 목사님이 계실 때는 문제가 없지마는 그분이 만일 세상을 떠난다고 하면은 그 총공회는 천지 만엽으로 쪼갱이 나서 다 갈라질 것을 네가 보고 있느냐? 그래 너는 지금 어떻게 할라고 하고 있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그 유력한 신학자들이 나갔지, 또 신학자 지금 둘 있는데 하나는 민주주의 독재주의니 하는 것으로 서로 의견이 견해가 엇갈려서 이 민주주의는 틀렸다고 위에서 강단에서 박살을 내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분이 거게 붙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갈 것 아닌가?’ 이라며 말한답니다.

‘그래 너는 어짤래?’ `나는 백 목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너거는 잘못 봤다.

나는 하나님과 진리에 속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가 독재주의라면 나는 그분이 말하는 그 독재주의에 나는 옳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속했기 때문에 독재주의에 나는 속했지 나는 백 목사에게 속한 사람 아니다. 세계에 유력한 권위를 다 가진 학박사, 신학 학박사들이 다 똘똘 뭉쳐 가지고 기독교는 민주주의라 데모를 한다 해도 나는 거게 피동받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는 독재주의인 줄 알기 때문에 나는 거게 속했지 백 목사에게 속한 것 아니다. 그분이 깨달은 것은 내가 옳은 깨달음은 받아 들이지마는 하나님과 진리에 속했지 너거 모양으로 내가 사람에게 속한 자 아니다.’ 요렇게 대답을 했다 하는데 어데까지 나갈란지 모르겠습니다.

이래서, 뭐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지 안한 사람들은 다 그것은 그대로는 못 옵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지 안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와의 투쟁의 대상자요 적입니다. 이러니까 거게서는 우리가 구출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에 어긋난 것은 그를 권고하고 타이르고 가르치고 기도하고 위해서 하나님과 진리에 소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게 우리 목적이오. 하나님과 진리에 소속한 것을 갈라뜨리는 것은 박살을 낼라 하는 것이 생명 바쳐서 박살낼라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지 아니한 사상과 나는 적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지 아니한 신학과 적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지 아니한 운동과 나는 적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속한 자는 문둥이든지 무식하든지 거지든지 주홍 같고 진홍같은 붉은 자라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하기를 원하고 속하려 하는 자는 언제든지 우리와는 하나입니다. 이는 변동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하나님을 따라가는지 세상 간판을 따라가는지, 요새는 모든 사람들이 간판 따라갑니다. 하나님 따라가지 안하요, 성경 따라가지 안하요.

성경보다 이 세상에 다른 모르는 어학에 능통하고 지식에 능통하면 그거 따라갑니다. 우리는 천하 어학을 통달해도 거게 안 따라갑니다. 모든 걸 알고 통달한다 해도 우리는 거게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따라가요. 우리는 진리 따라갑니다 이래서, 내가 대구집회 때에 독재주의를 말했다가 내가 대공격을 당했습니다. 또 그 뒤에 여기 교역자회 때도 독재주의를 말한다고 그것을 또 반발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에 반발하는 사람 많이 일어나면 걱정과 근심되는 것 하나 있습니다. 뭐이냐? 저 미혹이 마귀 미혹인데 저 미혹에게 사람들이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겠다 하는 그 면에 대해서 근심 걱정이고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근심 걱정이지 그 주의가 강하고 사람들이 수가 많으니까 거게 대해서 내가 박살날까 그런 염려는 없습니다. 만일 그것으로써 박살이 되면 교리와 신조 진리로 박살났기 때문에, 진리 때문에 박살이 났기 때문에 박살났다는 그것이 진리하고 한덩어리라는 것이니까 그보다 더 영광이요 승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만히 살펴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말씀하신 대로 “네가 스스로 믿음에 있나 없나 시험해서 자기를 확증하라” 보자 내가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인간에게 속한 자가? 어제도 내가 어떤 사람들이, 그 학생이 아마 창세기 이 12장 설교도 듣고 모든 것 듣고 그렇게 좀 열심을 낸다는 말 듣고 속으로는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이 잘됐다고 다 잘된 것 아니오. 처음에 시작이 잘됐으면 두번째도 잘돼야 되고 또 두번째 잘됐다 해도 안심 안 됩니다. 또 세번째도 잘돼야 되고 네번째도 잘되고 끝까지 잘돼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잘됐다고 되는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요거 두 가지 명령했는데 요 두 가지 명령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지신 모든 것을 몽땅 싸 가지고 주시는 실물입니다. 알겠습니까? 모든 것을 몽땅 싸 가지고 한꺼번에 주시는 실물이요 실체요 실상입니다. 이것을 성도들이 받아서 망령부리지 안하고마귀란 놈은 어찌 됐든간에 거부하요. 사이비한 것 가지고 꾀웁니다. 이러나 어누리하지 말고 요대로 알고 요대로 인정하고 요대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충만을 몽땅 주시는 그 몽땅 주시는 몽땅 그것을 다 받아서 자기 것 삼는 것입니다. 또 순종하는 것은 몽땅 받은 것을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코에 호흡이 있는 인간의 수를 그것을 계수하지 말라 했습니다. 코에 호흡이 있는 그자의 수를 계수를 할 필요 없어. 온 천하에 그 코에 호흡 있는 게 다 있으면 뭐할 것이요? 코에 호흡 있는 것이 일차 노아 홍수에서 전멸되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았습니다. 앞으로 불심판에도 기본구원은 얻지마는 코에 호흡이 있는 그 숫자에 소망을 두고 거게 끌려가는 자는 그대로 갈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에다만 소망을 두고 거게 끌려가는 사람은 그대로 갈 것이고,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까지 이천 년 동안 신학자들이 교리 신조 다 발견해 놨소. 발표도 해 놨어. 통계가 돼 가지고 있어. 그러나 그 통계에 맞지 않는 지금 그 교리 신조를 말합니다. 이거 지금 설교록이 다 나가요. 내 이 말한 것 하나도 여기 취소하지 않습니다. 말한 것 그대로 설교록에 기록해 다 모두 설교록 듣고 있어요. 다 한 권씩은 다 가져갑니다. ○○신학교도 다 가지고 가고 있어요. 그래.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정신차릴 것은 삭개오를, 삭개오가 그와같이 된 것은 삭개오가 무슨 일시에 나타나 가지고 그 행동을 하나님이 인정한 것 아니오. 영원 전 만세 전부터 예정하실 때 고 예정했고 창조하실 때 창조하셨고 섭리하신 데서 다 순서대로 그 예정대로 그 경륜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지나간다고 해서 예수님 만날라고 가니까 앞에 선 사람 뒷꼭지나 보이지 예수님은 보이지 안하니까, 모든 사람은 언제 보일까 싶어서 앞에 사람 뒷꼭지, 뒤에 사람은 또 뒤에 사람 뒷꼭지, 전부 뒷꼭지만 보지 예수님 본 사람은 그 앞에 붙은 사람만 보지 다른 사람은 보지를 못해.

이라니까, 삭개오가 있다가서 ‘나는 주님 만나러 왔는데 인간의 뒷꼭지만 보이지 주님 만나지 못하니까 이 방식 가지고 안 되겠다.’ 쫓아 달음질 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목에 뽕나무 있는데 뽕나무에 올라가 가지고서 이제 내려다 보고서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다가서, 언제 이름 알았겠소?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압니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라. 내거 너거 집에 가서 유하겠다.” 나는 너 찾아 왔다, 너 같은 사람이 내게 필요하다 하는 말이오. 그 무슨 말입니까? 오늘 유전 신앙으로 그저 인간들이 이 신학자가 말하니까 그 신학자 또 연구해서 그다음 신학자 새끼 신학자 전부 이래 가지고 이라고 성경은 보지 않습니다.

신학자들 뒷꼭대기만 보고 신학자들 후배가 돼 가지고 ‘나는 칼빈의 후배다’ 이래만 돼지지 성경은 배척을 당했어. 이러기 때문에 오늘에는 위대한 신학자들이 신구약 성경은 한번도 열람할 필요도 없는 줄 알고 한번도 한 독도 안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신학자들이. 이 신학자의 그 뒷꼭지만 따라서 선배 신학자 또 뒤 이어서 이 신학자 따라 신학자만 자꾸 이렇게 계대해서 이래 하지 안하고 성경 보고 하나님 찾을라 하는 그 사람에게 주님은 필요하고 그 사람에게서 머물고 동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양성원에서는 표어를 내붙였어요. 뭣이라고? ‘신학은 시찰하는 것으로만 족하다’ 상고도 아니고. 왜 시찰이라는 뺄쭉스럽게 모진 소리를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소리인가? 신학은 보면서 보고 이거 성경 가지고 틀렸나 옳으나 지금 사찰하는 거, 신학은 볼 때 성경 가지고신학을 배울라 하는 게 아니고성경을 가지고 ‘보자, 이 신학자는 성경대로 바로 말했나 성경에 틀렸나?’ 그거 한번 시찰하는 것으로 족해. 시간 없으면 시찰할 필요도 없고, 성경 배우면 되고.

‘신학은 시찰하는 것으로만 족하다’ 배워서 거기 따라갈 필요가 없다. ‘성경은 배우고 복종해라’ 신학에 복종하면 안 된다. 성경은 배우고 복종해라. 또 너희들은 다 목회자 될라고 양성원 왔는데 ‘목회는 신학으로 하면 안 된다. 목회는 신학으로 하지 말고 목회는 피와 성령과 진리의 권능으로 해라.’ 이 말씀도 나가면 신학자들이 자기네들의 권세 부리는 밥 팔아먹는 것을 이리 지금 말하니까 언제 무엇이 올란지 모릅니다. 뭣이 올란지 몰라. 뭐 언제 조걸 어떻게 하자, 뭐 죽이자 소리가 벌써 양사방 많이 나는데 나도, 나는 이 세상의 원자탄이나 창검이나 독약이나 그것이 내 생명을 주권하지 못하고 주님이 오직 주권하고 계신 줄 알기 때문에 주님이 주권하시면 이 자리에서 오늘 죽을란지 모릅니다. 그분이 나를 죽여야 죽지 천하가 다 달라든다고 그분이 허락지 안하면 못 죽입니다. 요러기 때문에 겁을 내지 안해, 나는.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 제사장들 바리새 교인들이 첩첩이 윤곽 짜고 또 세포까지 조직해서 빈틈없이 해 놓은 모든 교리 신조 조직 되어 있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서 틀렸다고 깨뜨리니까, 깨뜨리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들으니까 저거가 틀리기는 틀렸지마는 예수님 옳다 하면 저거 틀리게 되고 틀린 거 되면 밥통 떨어지고 틀린 거 되면 저거 명예가 헛일이고 지위가 헛일이고 권위가 헛일이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인정이 다 헛일이니 옳다 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고 차차 차차 그것이 쌓여져 가니까 거부가 커지지 옳다고 인정해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라고 달라들었습니다.

왜? 옳기는 옳지마는 저거 것이 좋거든. 저거와 다르거든. 그거 옳다 하면 이제까지 만들어 놓은 지위도 권세도 영광도 존귀도 권위도 모든 수입도 호의 호식도 다 깨질 거라 그말이오. 그것이 진리에 삐뚤어졌나 옳았느냐 하는 것보다도 그게 크기 때문에 그걸 취하고 옳은 진리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게 무슨 운동입니까? 그것이 본토를 떠나지 안했기 때문에 그렇소. 본토을 떠나지 안했기 때문에. 본토를 떠나지 안했기 때문에 그래. 인간을 떠나지 안했기 때문에 그래. 본토 친척 애비집을 떠나지 안한 내나 불택자와 꼭 같은 종자로 믿기 때문에 그렇다 그거요. 그러니까 모아 가지고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이구 인제 됐다, 그러나 속으로는 께꾸름합니다. 분명히 그분의 하는 말이 옳기는 옳았는데 사실상 양심으로 생각하면 우리 지위 떨어질까, 밥통 떨어질까, 우리 조직해 놓은, 모든 시설해 놓은, 모든 진설해 놓은, 모든 이 건설해 놓은 이것들이 깨질까 싶어서 지금 그라기는 그랬지마는 그건 옳기는 옳다 하니까 속에 양심에는 반드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없앴으니까 이제 우리 지위도 유지가 되겠고, 권세도 유지가 되겠고, 모든 사업도 유지가 되겠고, 대우도 유지가 되겠고, 영광과 존귀도 모든 사람이 높여 주는 것도 유지가 되겠고 그러나 속에 깊은 양심에서는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라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난다고 하니까 또 ‘살아나 가지고 시체를 도둑해 가지고서 살아났다고 할지 모르니까 군대들로 지키게 합시다’ 이래 지키게 했어.

지키는 것은 예수님 시체 도적해 갈까 싶어서 그 지킨 것 아니오. 그들이 살아난다고 그분이 말해 가지고 안 된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삼 일 만에 살아난다고 했으니 삼 일 만에 살아나는 날이면 이 문제이니까, 살아나면 문제이니까 돌을 굴러놓고 군대들이 지키고 이제 거기서 저거는 ‘너희들이 그 돌을 어떤 놈이 굴려낼지 모르니까 단단히 돌이 못 넘어가도록 돌이 흘려지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라’ 예수님 부활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오. 못 하도록 막은 것이라.

이러나 천사들이 와 가지고 얼떨떨 하고서 돌이 마구 팽개쳐 날아가고서 무덤이 열려지니까 이들이 그만 그때는 기절해서 죽어서 겨우 생명만 피해 가지고 도망질 해 가지고서 어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 교인들에게 가 가지고서 말하기를 ‘주님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났습니다.’ 천사들 온 그 광경도 말하고 그 막아 놓은 돌이 다 팽개쳐 도망친 것도 말하고 이걸 말하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이제 이것이 발로되면 저희들은 다 맞아서 죽을 터이고 사형을 받을 터이니까 ‘할 수 없다. 너거에게 돈을 많이 줄 터이니까 이 말을 절대 내지 말고 너거가 그만 곤해서 잠드는 그 조는 가운데에 그 제자들이 그만 시체를 도적해 갔다 그렇게 말해라.’ 그것이 오늘까지 그게 다 환하게 퍼져서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때는 왜 돌이키지 못했는가? 틀린 줄 알면 왜 돌이키지 못합니까? 그때는 틀린 줄 알지마는 돌이키지 못하니까 뭐이 아까와 못 했겠소? 그때는 제 목숨이 끊어질 터이니까 목숨이 아까와서 회개를 못 했습니다.

처음에는 지위 명예  기업  영광 호의호식 그것이 절단나기 때문에 아까와서 그것을 진리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에 진리를 버릴지라도 그것을 가졌고 이제는 환하게 부활하셨으니까 메시야인 줄 알지마는 이제는 메시야로 지금이라도 ‘아이고 우리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면 그때라도 되는데 그때는 생명이 진리보다 더 귀하고 진리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생명을 위해서 주님을 부활하신 것을 부정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은 후회할 겁니다. 이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는 뭣할 것이요? 그들은 거게 가서는 또 후회할 것입니다. ‘아이구, 이미 그까짓 거 부귀 영화 거석할 때에 그만 그거 버리고 주님의 교훈을 따를 걸, 이미 죽는 것 그때 생명 내놓고 주님을 메시야로 모실 걸.’ 후회해 봐야 소용없어. 오늘도 그때라, 그때. 여러분들. 정신 차려요.

뭐 진리에 어긋난 신학자 한 명 두 명, 천 명 만 명이 무슨 소용 있어! 아깝지 안해.

진리에 삐뚤어진 것을 아까와하지 안해. 진리와 하나되는 것은 그는 지극히 적은 자라도 그는 완전이라. 무시하지를 못해.

이래서, 여러분들 여게 하나 깨달을 거, 이제 오후에 증거를 또 합니다. 하는데 “칠십오 세라” 여게서 깨달을 것은 신앙은 장기간을 두고서 성장해 가야 된다.

네가 일조 일석에 경거망동 하지 말아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라” 시작은 더디 하고, 시작은 더디 하고 시작한 것이면 생명이 끊어져도 계속해서 완성을 해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람도 일시를 보고서 이렇다 저렇다, 그 사람을 볼라냐? 적어도 이삼십 년을 봐라.

이삼십 년만 봐 가지고 모른다. 왜정말년도 있고 6.25도 있다. 6.25도 있고 왜정말년도 있고 있으니까 적어도 왜정말년으로부터 주욱 계속해서 사오십 년을 그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 줄을 알고 그가 어떤 주장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주장이 어떠하며 그의 깨달음이 어떠하며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시간이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미안하지마는 미개인이라. 야만인이라. 무식한 사람들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루 동안에 성자되고 하루 동안에 죄인 됩니다. 한 사람이 죄인이라 하면 그만 죄인이고 한 사람이 의인이라 하면 의인이고 좀 시야를 넓혀 가지고서 넓은 범위로 심사를 하고 진찰을 하십시오. 진찰하십시오.

천인 만인이 죄인이라 해도 내가 심사해 보고 천인 만인이 의인이라 해도 심사해 보고, 그러면 심사해 모르면 그 사람이 십 년 전에는 뭣 했노? 오십 년 전에는 뭣 했노, 육십 년 전에는? 육십 년 전에도 그 사람 오늘도 그 사람, 그때도, 온 세상이 다 삐뚤어져도 그때도, 그후 6.25 때도, 그후도, 오늘도, 그러면 알지. 정확하게 알지.

뭐 금방 은혜받았다고서 사십 일 단식기도 했다고서 그만 거기 따라 뭉치는 이것이 너무 그렇게 경솔히 동하고 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 순종할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때에 어떻게 했느냐 요거 중요합니다. 그가 떠날 때에 어떻게 떠났습니까? 본토를 떠나라 했으니까 본토는 자기의 소유를, 자기 거처하는 곳이요 소유를 가리킨 것인데 이 소유를 다 버리고 떠났습니까?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으니까 모든 친척 다 이웃을 다 버리고 떠났습니까? 아니오. 여게서부터 구별했습니다. 떠날 때에 소유도 사람도 사업도 가지고 가는데 가지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순종할 수 있는 거는 다 가져갔고 자기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같이 갈 수 있는 거는, 순종하는 데 함께 할 수 있는 거는 다 사람도 가져갔고 물건도 가져갔고 소유도 다 가져갔고 하나님 순종에 방해해서 그걸 가질라면 하나님 순종을 버려야 되겠고 하나님 순종을 가질라면은 그걸 버려야 될 때에는 애낌 없이 버리고! 순종할 때 가지고 갈 거는 가져갔습니다! 이게 진리요! 오후에 계속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굳게 잡아요. 간판 따라 돌아다니지 말고 진리 따라가. 진리 따라가면 뭐 진리는 인격이 없어. 진리 따라가면 진리는 성령에 중매쟁이라. 진리로 영감 만나고 영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중매쟁이입니다. 중신애비는 신랑 만나고 난 다음에는 버려야 돼요. 그것만 가지고 살면 그거는 정상이 아니고 음행이라. 죄짓는 거라.

<기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근본 땅에 속했던 자며 땅에 매였던 자요 땅에 소망을 가졌던 자요 땅에게 피동되었던 자요 사람에게 속했고 사람에게 매였고 사람에게 소망 가졌고 사람에게 피동된 저희들을 이제는 하늘과 하나님에게 속하고 매이고 소망하고 피동되어 영생하는 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시려고 이렇게 큰 계획으로서 큰 광명을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 사람도 탈선되지도 않고 주저하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영생의 생명길을 마음과 목숨과 힘을 뜻을 다하여서 뿍뿍 걸어가 마침내 세상을 마칠 때에 승리의 면류관을 가지고 주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형제들을 불러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저들은 이로부터 주님에게 속했고 주님의 것이 되었고 주님의 자녀되었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 장중에 잡으시고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주님이 간섭하시고 주님에게 의논할 때에 다 들어서 어지럽고 복잡하고 사이비하고 사망과 죄악이 모든 악한 것들이 가득 찬 세상이지마는 마치 태 안에 있는 아이가 어머니 안에서 평강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태 속에 염려 없이 평강을 누리고 주 앞에 설 때까지 담대히 믿음 생활 하는 저희들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사오니 모든 땅위에 있는 경제 문제도 사건 문제도 신체 문제도 문제 없는, 주님의 말씀은 양약이시며 장수시며 가장 소득하는 데에 지극히 큰 소득인 것을 확실히 믿고 나아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출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남녀 종들에게도 쉬지 말고 게을하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이 힘써서 인간 구원에 전부를 매진하는 복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점점 이 은혜로 더하여 주시옵소서. 썩을 것으로 더해 주지 말고 영원한 것으로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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