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설교요령

 

1979. 11. 1. 목요일 새벽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56절 -58절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 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오늘 아침에 기도도 잘했는데 하나님에게 대해서 기도는 되지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객관성이 아주 빈약합니다. 지금 시간이 무슨 시간이며 장소는 어떤  장소며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여 있는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혼자 지금 굴 속에서 하는 그런 기도 같다 이기요. 언제든지 시간이 안  맞으면 안되고 장소가 안 맞으면 안되고 그 모든 그 배경에 안 맞으면 안됩니다.

 지금은 모두 다 새벽예배 드리려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길을  수정하려고 자기를 수정하러 그래 왔거든. 그 여기서 대표로 할 기도가 무엇인가?  그 모든 사람이 다 예배드리려 왔고 또 은혜 받으러 왔고 또 하나님의 은혜에서  자기를 고칠려고 왔고 이랬으니까 그 사람으로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기 혼자 굴에서 집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인간적인 그 전체적인 객관성이  없다 이기요. 그 면을 좀 생각해야 되지 보면 그만 기도하라면 어떤 사람은 그저  창세기에서부터 내리 해서 설교는 되지. 설교와 기도와 또 교훈과 명령과 각각 다  성질이 다릅니다. 그것 혼돈하면 안돼요.

 지난밤에 설교를 했는데 박력있게 잘 했습니다. 그런데 좀 주의 할 점은 그 말을  좀 부드럽게 해야 되겠소. 말을 부드럽게 해야 되겠고, 둘째로는 그 높고 낮은  고저청탁이 좀 아롱아롱 하고 그 자연스럽게 돼야 되는데 그만 거기 너무 높은  것만 저 말해 높으니까 사람들이 볼 때에 들을 때에 들을 맛이 적어. 그러니까 좀  높을 때는 높고 낮을 때는 낮고 그것을 좀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은 또 음성이 꼭  저런 음성 또 인자 그런 습성으로 설교를 하는데 그분 누가 좀 충격을 줬든지 좀  고저청탁이 좀 그석하다 그리 충고를 받았는지 그분은 내 이름은 말하지  아니하겠는데 여기 있는 사람 아닙니다. 설교하라는데 이렇게 여기서 설교하다가  너무 또 살살살살살살 가다가 갑자기 꽝 이래 버립니다. 사람이 깜짝 놀랄만치  기도도 그리해. 그것도 그 분을 모든 사람이 따 가지고 그리하는데 은혜 받아도  우습다 그말이오.

 좀 너무 딱딱하고 또 자연스럽게 사람이 그 뜻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큰 소리가  나오고 또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나오고 고 설교하는 그 뜻에 똑 그이 노래를  찬송도 곡을 지을 때 그렇지 안해요. 잘 지은 곡은 처음으로 하는 사람도 그 곡이  잘 됩니다. (잘돼) 잘 짓지 않은 곡은 안돼요. 처음으로 하는 사람도 그 자연히  그걸 말 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그 곡은 그걸 그 가사를 말할 때는 자연적으로  높아지고 자연히 울음소리가 나오고 자연히 낮아지고 그러니까 그 말에 따라서  그 가사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되는데 별곡은 꾸며 높은 것은 일부러 공부 안하면  그것 못하요. 그것은 잘못 된 것이요. 자연히 안된 것은 그러고,   그 설교가 명령성이 많은데, 명령성이 많으면 일시는 사람이 처음 한 번 두 번  만났을 때는 은혜를 받아도 그 교회에 시무하면 처음에는 은혜를 끼쳐도  나중에는 그 교인들이 은혜를 안 받습니다. ○○○조사님 ○○○조사님 그  설교하는 것이 그 다 성격이 좀 같은데 이러니까 명령성이 많으니까 몇 번은 그  은혜를 받습니다. 그 하나님처럼 이래 대우를 하고 이래 받는데 아무래도 같이  사니까 같이 사니까 그 좀 보면 다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명령성이 많은 그런  설교는 목회는 못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그석할찌라도 은혜를 안 받고 교인들이  자라지를 안해요. 그것보다는 간증성이 있어야 됩니다. 간증을 하는 거 그러면 그  자기가 자기는 따로 있고 교인들만 받을게 아니라 자기도 지금 그 안에 포함 돼  가지고 지금 우리가 이렇다는 그런 간증성 그러고 또 다같이 그 안에 포함돼서  공통성 의논성이 있어야 되고 자기가 대화해서 말을 하면 상대방에서 응답이 올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설교를 해야 됩니다.

 제가 안동 그때 집회 가서 경북 안동 가서 그 지방 사투리 말을 듣고서 내가  놀랬소. 아 이곳이 양반 사는 곳이로구나 이 안동이라는 데는 역사에 아마 불거진  그 악독이나 잔인한 그런 인물들이 나지 않겠다 하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왜?  말이 모두 다 말하는 것이 상대방의 그 화합을 요청하는 언제든지 자기가  상대방에게 그 친목을 요청하는 저자세적인 그런 성격을 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순천에 가서 봤는데 순천은 여기서는 아마 뻐끔뻐끔한 그런  외식장이가 많이 나겠다 그걸 제가 느꼈습니다. 왜 거기 사람들은 모두 하는 것이  간판주의요 그 언어가 말이요 그 조그마한 사람도 그 어 어 아버지여! 역부러  연습을 해 가지고 그게 뭐이냐면 자꾸 나타낼라고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지방을 봤습니다. 그 지방이라 하는 것은 (???) 뜻을 움직이는데 아주  큽니다.

 이래서 설교는 다 간증이라야 돼요. 이런데 이걸 우리가 못한다 이렇게 해야  좋을텐데 이걸 못한다 이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하셨다 이런데 그만 자기는 너무  탁월해서 떡 그래 가지고 밑에 있는 교인들만 들을 것이라 이래 놓으니까 그  설교가 차차 많이 하면 감화가 적습니다. ‘원래 저리 떽떽 거리는 기라’거기  교인들이 화합이 안돼 버리요. 혼자 말해야 원 말은 저리 하는 것이고 또 우리  생활에는 그 뭐 관련없이 이리 하기 때문에 함께 움직여 가는 그런 것이  적습니다.

 그래서 고 깨달음은 잘 깨달았고 그런데 좀 속은 안 그러면서 표현이 그러면  그리 보니까 그것을 좀 주의해서 간증으로 자기도 그 설교, 하나님에게 한쪽은  하나님의 명령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전달하면서 한쪽은 교인 속에서  자기도 같이 그 명령을 그 교훈을 받으면서 자기가 제일 앞서 행해야 될 터인데  그러니까 행함에 자기가 제일 말단의 사람으로서 그러기 때문에 설교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그 명령을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조금도 다름이 없이 설교는  하나님이 하셨고 명령을 자기가 받은 그것으로써 회개가 되는 그것이 없으면 그  강단 생활 몇 해 안해서 나중에 껍데기가 됩니다.

 그러기에 부흥사들이 대개 목회를 못합니다. 부흥사들이 목회를 못해.

부흥사들이 목회하는 곳에서는 배척을 당하는데 아 부흥사로서는 참 가는 곳마다  은혜를 끼치는데 목회자로서는 목회를 못해. 한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서너 달  있으면 그만 권태증이 나 가지고 암만 말해야 다른 사람이 그 말 들어야 감화가  안 되고 이러니까 그만 들려 나간다 그기요.

 그래서 박영기 조사님은 세상을 떴는데 그분이 은혜 생활을 잘한 분인데 부흥회  돌아다니다가 사람 버렸어. 그래서 아예 목회는 안 되고 이러니까 난 부흥회나  다닌다 하면서 가방 둘을 커다란 것을 마련해서 하나는 그 자기 요긴한 서적을  하나 넣고 하나는 자기 의복을 넣고 이래 가지고 가방 둘을 만들어 놓고 이제  집회만 하기로 그만 그래 나서 가지고 작정을 하고 다녔는데 차차 차차 그 길도  막혀 누가 청해야지.

 목회 못하는 사람은 집회를 청하지 않습니다. 그 목회를 잘하는 사람은 안 갈라  해 그렇지 뭐 집회를 안 가 그렇지 얼마든지 청합니다. 또 그 사람도 자꾸 안  갈라 하는 거 안 가면 껍데기 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가 거기서 은혜 받지 못한  것이요. 설교에서는 자기가 제일 거기서 은혜를 많이 받아야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회개할 점이 제일 많습니다. 회개할 점이  제일 많소.

 이러기 때문에 장로를 세우면 장로는 꼭 교훈 장로를 교훈을 시켜야 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설교한 자기 설교에 거기서 제일 회개가 많이 되고  또 참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회개할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은 회개의 위치를  회개의 길을 잊어버리면 그만 사망이요. 사람은 그 회개의 은혜를 회개하는 그  은혜를 못 받으면 그만 죽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회개하는 그 은혜요.

 오늘 아침에 그 말이 나왔었는데 이 자리 앉는 것도 그 사람이 그만 이래  앉아도 중간에 아무데나 앉는 고 마음이 안 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아 내가  ??? 하나는 뭐라 하나 나는 내 앉는 대로 내 앉지’그런 사람 있고,‘아이쿠 내가  이거 뭐 여럿 앉는데 저 앞에 가서 앉을 처지가 안된다.’그 처지가 안 되어서  앞에 여럿이 있는데( ) 앉을 자격이 없어서 어데 가 참석은 해야 되겠고 저  귀퉁이에 숨어서 그 사람으로 됐으면 그것은 그래도 병이 좀 짙은 병이 아니고  그저 치료될 수 있는 조그마한 병이지마는 혹‘다른 사람이야 그리 앉든지  말든지 내야 이리 앉지’이 사람이면 그 병은 짙은 병입니다. 중환자요. 그  고치기 참 힘드는 병입니다. 저쪽 가 줄 앉은 분들( )그 앉으라 하니까 이래도  거석한 사람은 ( )그 앉을라 하니까 마음에 부끄럽고 미안하고 이 좀 뚝 뛰어나는  것 같아서 그만 못 앉아서 그만 앉는 순서 그 자리에 가 파묻히지 그 떡 앉을  마음이 없다 그기요.

 그 뭐 자연히 그걸 생각해 그런게 아니라 뭐 사람됨이 그만 그리 돼 버립니다.

사람됨이. 자꾸 돼 가면 자꾸 그리 되어져 버려. 그 안 믿는 사람 말하지 안해요?  사람이 되어가면 나락 숙이듯이 머리를 숙인다고 머리 숙이는 그기 아 내가 이리  숙여야지 그러면 그 아주 겸손을 이용해 먹는 아주 최고의 교만자 못쓸  인간입니다.

 그게 아니고 제가 사람이 된다는 말은 제가 아니까 차차 차차 모든 걸 아니 그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저를 그리 알지 제가 아는 대로는 그 제가 아는 대로의  그것을 암만 외식을 안 할라 해도 외식을 안 할라 해도 제가 저를 알고 있으니까  껍데기 좀 가장을 해서 이래한다고 해도 자기 하는게 너무 허무하니 끄트머리  허무한 기 안 나올 수 없어.

 이러니까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지. 그것은 자기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자기가  알기 때문에 자기가 그 뻔뻔스럽게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 자꾸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아 저 사람 왜 저러노 겸손하다’하지마는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그리하는 그것이 이제 사람이 된 것이요. 그기 실수가 적고  그 사람은 뭐 일을 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망하는 거 죽는 거 이것은 뭣이  들어서 망하게 하고 뭐이 들어서 죽게 하느냐, 쏜다 말은 그 망하게 한 그 독이  무엇이며 죽게 한 독이 무엇이냐 그 말입니다. 망하게 한 그 독이 망하게 한 그  죽게 한 독이 망하고 죽게 한 그 그렇게 죽도록 찌르는 그 창이 칼이 뭐이냐?  망하도록 찌르는 칼이 뭐이냐? 망하도록 죽도록 찌르는 칼이 뭐이냐? 망하도록  찌르는 창이 뭐이며 죽도록 찌르는 창이 뭐이냐?   망하고 죽도록 찔러 놓은 독약이 뭐이냐 하는 그 말인데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요 함은 삐뚤어진 기란 말이요. 죄요 삐뚤어진 것이라. 삐뚤어진 그것 때문에  그래.

 그러면 삐뚤어진 건 무엇을 표준해서 삐뚤어졌다 말이냐? 그 다음에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삐뚤어졌다고 죽이는데 삐뚤어져서 다 망하는 것인데 그  삐뚤어져서 망하는 기 어데 삐뚤어져서 망하느냐?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 삐뚤어지므로 죽은 그 삐뚤어지므로 죽은 그 삐뚤어진 그것은 어데를 표준해  가지고 어데 삐뚤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이 죽고 망하게 되느냐? 그것은 율법이라  하나님의 뜻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의 뜻, 진리.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선포해  놓은 교훈이나 약속이나 그 요구나 명령이나 그 전체는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주신 제도입니다. 제도 율법 너거 피조물들은 이렇게 살아라 한 그 제도를  줬습니다. 법칙을 줬소. 줬는데 거게 삐뚤어져 가지고 전체가 망한다 그기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랬는데 그러니까 그분을 창조주요 주재자요 주권자요 전지  전능자요 완전자요 또 그 사랑에도 무한한 자요 자비에도 무한한 자인데 이분의  것이 틀리지 안했는데 이분이 있는 것도 세상이 모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분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없다고 주장하지 않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제가 왕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자입니다. 그 처음에 발기한  자가 제가 왕 될려고 하는 것이요 제가 왕 될려고 이래서 나중에는 물질이  제일이라 물질 위에 제가 올라섭니다. 제가 하나님 대신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이라는 어떤 객관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자연히 그의  법칙을 따져야 되겠고 그의 법칙을 따질라면 그에 복종을 해야 되겠는데  그것부터 부인해야 제 법칙을 모두 다 따르도록 할 것이기 때문에 제가 최고자  제가 최고자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그 물질이 제일이라 그 말하는  것은 물질 위에 제가 일어서기 위해서 하나님을 없애고 물질을 세우고 물질 위에  자기 올라서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원죄가 강한 자요  막스니 레닌이니 하는 그 자들은 아주 원죄가 강한 자입니다. 그들이 다 예수  믿던 사람이요. 다 하나님 공경하는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 되면  누구보다도 가장 이거는 뭐 세상에서는 전쟁도 깨지 못하고 죽음도 깨지 못하고  아무것도 깨지 못한 아무것으로도 깰 수 없는 딴딴한 야문 원죄 덩어리가 되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김을 이미 주셨고 또 앞으로  영원 계속적으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김을 이미 주셨고 이것은 뭐이냐? 아 사죄  주신 것은 삐뚤어진 것을 다 이것을 해결지었다는 말이요. 또 이분에게 삐뚤어진  것 해결지었다고 맞은 것이 없으면 생명이 되겠습니까? 삐뚤어진 것을 다  해결지었고 고게 하나도 없이 딱 들어 맞췄다 그기요. 율법의 만족을 이루었다  그말이오. 율법의 만족을 로마인서 8장 1절 이하에 있지 않소. 율법의 만족을  이루었다는 말이요. 또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이렇게 화목을 해서 그 이상 더  밀접해 질 수 없는 이런 화평을 이루어 화목 제물로 예수님이 희생하므로 이  화목이 이루어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속죄 제물이요 또 다 드린  번제 제물 번제 제물에 관련된 칭의요 속죄 제물에 관련된 사죄입니다. 또 화평의  제물 화목 제물 화목 제물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화평하고 또 모든 피조물과도 가까지도록 화평하도록 하신 이 일을 해 주신 것을  가르쳐서 이미 이겨 주셨다 그말이오.

 이겨 주셨다 그것은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이 아니고 삐뚤어진  것을 이겼다는 말이요. 아 바로 되게 하는 것을 바로 되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겼다 말이요. 불목을 화목하지 못하게 하는 화목의 난점 그런 걸  다 극복해서 화평을 이루었단 말이요.

 그러면 거기에 방해 제 일차 첫 아담에게 방해자가 있었는데 그 방해자가  누구냐? 배암 곧 사탄인데 사탄이 방해를 하다가 방해를 못했으니까 거기 꺾어져  버렸습니다. 그기 그것이요. 사탄에게 무슨 값을 낸 거 아니요. 사탄에게 졌기  때문에 그랬는데 이제 그와는 무슨 관련이 있었느냐? 그가 예수님도 지금  이길려고 예수님을 지워서 예수님도 그 길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  써도 제게 걷지 못하게 해서 그 길을 걸었으니까 저는 예수님에게 패전한 거  아니겠소?   넘어뜨릴래도 예수님이 안 넘어졌다 말이요. 넘어뜨릴려 해도 예수님이 안  넘어졌으니까 저는 예수님에게 넘어뜨릴려 하는 자요. 예수님은 안 넘어갈라 하는  자이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에게 졌고 또 하나님과 끊어지게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과 밀접하게 붙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속한 자를 넘어뜨림으로써 권세  얻은 그 권세와 넘어뜨릴라 해도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므로 그 권세와 사탄의 권세와 예수님의 권세가 다르다 그 말이오.

 하나는 그 파괴시키는 권세인데 예수님은 파괴를 당하지 않는 권세와 건설하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는 그 앞에는 감히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은 만주의 주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사죄 칭의 그 결합의 새생명 이것은  모든 율법을 이루었고 율법의 쏘는 것은 이 율법에 삐뚤어진 거 삐뚤어진 거  이것을 다 해결지었고 이미 삐뚤어진 것을 해결지웠고 하나님의 법칙을 완수를  해서 바르게 옳게 이것을 다 건설했고 또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벌어지고  성글어지고 삐뚤어진 것을 원수된 것을 완전히 화평을 이루어서 화합을 이루어  주셨고 이러니까 이김을 이미 주셨다.

 이미 주셨는데 계속적으로 이김을 영원히 주신다 그 말은 영원히 삐뚤어지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을 주시고 삐뚤어지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을 주시고 또 딱  들어맞는 이것을 주시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영원히 계속해 나가는 이 영원한  화합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했기 때문에 주시는 분 우리 주 예수 주시는 분이니까  우리는 이 세 가지에 흠없이 살 수 있는 이 가능성이 있다 그 말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 완전자 완전자의 그 뜻이 완전하니 거기에  맞추기 얼마나 힘이 들겠소? 그런데 이분의 법칙, 이분의 뜻, 이분의 소원, 이분의  성품, 이분 자체에 삐뚤어지지 아니할 수 있고 이분의 법칙과 이분의 모든 경영과  소원과 이 분의 자체에 그 화합할 수 있는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돼  가지고 있다 말이요.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그 대속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되고, 이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이 공로를 우리에게 영원히 입혀서 이 공로를 가지고 살도록  이렇게 그 하시려고 책임을 진 분이 있으니 그 책임진 분이 누구냐? 성령님이  책임지셨고 성부, 성자 성령 그 이 하나님이 책임을 지셨고,   또 하나님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지능이 있는데 하나님의  지능의 역사인데 그 당신이 말씀하신 그 말씀은 그것이 그 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말씀하신 그 말씀은 시간과 공간과 종류를 초월합니다. 그 한번  말씀하신 말씀, 그 한번 나타낸 그 뜻은 영생이라. 영원히 그 뜻은 역사 해.

영원히 역사 해요. 영원히 역사 합니다.

 이 진리가 보증자 입니다. 성령과 진리가 보증자요. 이번에 공부할 때 보니까  삼위일체론이 나오는데 그 삼위일체론은 그는 그 무한자기 때문에 이 무슨  유한한 무슨 피조물 가지고 모형도 안되고 비유도 안되고 안되는 깁니다. 그저  사람이 여러 가지로 이렇게 저렇게 비유도 하고 모형적으로도 말하고 이렇게  했지마는 그기 맞는 거는 아니요. 맞는 거 아니라. 그 본체는 하나요. 삼위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라 하면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그거 표시를 못 해. 이 말로 표시하면 또 요쪽이 저쪽이고 이쪽이  이쪽이고. 왜?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유한 가지고 표시하려 하니까 안 걸려지지  안해 , 걸려지지 안 걸려지지 안 하니까 표시는 못하지만 알 수 있다 그 말이오.

한 분입니다. 한 하나님이시요.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또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은 뭐 세상에 그 비슷한 그런 것은 많이  있습니다. 아 의논은 자기 혼자 그 호주라 할지라도 그 호주면이 있고, 남편면이  있고, 아버지면이 있으니까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아버지면에서는 단행을  할려하니까 이러면 내가 남편이기 때문에 남편면이 유지 안 되겠는데 그 안  그렇소?   아버지 면 남편면만 맞출려 하니까 또 쉬운데 내가 이제 이 집에 호주인데 또  호주면을 맞춰야 되겠다 이기요. 호주면을 맞추는 그 호주면에서는 많은 사회하고  살고 있는데 많은 사회 중에 우리 가정이 하나인데 하나 대표 책임자인데  이러니까 호주면을 하니까 앞 뒷집, 이웃, 나라, 사회 이것을 안 볼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아버지 일만 생각하면 아버지 아들 딸 요 두 면만 생각해 가지고 이래  하는데 아이구 호주로구나, 이 사회면이 있구나, 이 국가면이 있구나, 이 민족면이  있구나 이기 있다 말이요.

 이러니까 그런 거 모양으로 이제 삼위일체이니까 성부가 참 하나님이시요 한  분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자도 한 분이신 하나님입니다. 성령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이런데 성령님이 보증하신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입니다. 성부 안에 성자 성령 다 계시고 성자 안에 성부 성령 계시고  성령 안에 성부 성자 계셔서 그 그만 성령님을 부르면 삼위일체를 다 불렀소.

성자 이름 불러도 다 불렀소. 다 함께 대답합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단 말은  이제 하나님의 삼분지 일이 보증하는 거 아니요 그 하나님의 본체가 보증하는  것이요. 그러나 그 활동적으로 이제 성부의 사역 성자의 사역 또 성령의 사역을  우리가 알기 쉽도록 이렇게 구별해서 성자가 대속해 놓은 것을 성령님이 완료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우리 주”57절에“우리 주 예수 예수라”는 말은 대속을 말하고  이 근본적으로 이 세 가지가 해결이 됐기 때문에 그렇지 이 세 가지가 자 하나님  하나님의 선포해 놓은 하나님의 그 법칙, 또 이미 삐뚤어져 가지고 있는 것, 또  원수 되어 있는 것, 순종치 못하고 있는 것 삐뚤어진 것을 두 가지 삐뚤어진 것을  다 삐뚤어진 거 이거 해결해서 삐뚤어진 거 없애야 되지, 또 하나님의 율법에  하나도 순종하지 못한 이것을 또 해결지워야 되지, 순종해야 되지, 하나님과 원수  된 거 이것도 해결 지워야 되지, 하나님과 화목을 해야 되지 셋인데 여섯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해결 지우셨고,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이 기본구원을 자본으로  삼아 가지고 기본구원을 종자로 삼아 가지고 그리스도화, 사랑과 도덕면이  하나님과 꼭 같도록 지혜 지식면이 같도록, 능력면이 같도록 둘이 합해서 하나된  것이 아니고 존재는 둘인데 순전히 이거는 비우고 이거는 자체만 있지 이거는  자체만 있지 본질과 본성이나 지능은 이것은 진공이 돼 버리지 공이라. 순전히  우리는 공이 되어야 돼.

 우리는 공이 되는데 마치 한 일자 써 놓고 그 다음에 공하나 치면 얼마됩니까?  공 하나 치면 얼마지요? 일자 써 놓고 공 하나 치면 아라비아 숫자 일자 쳐 놓고  공 하나 치면 얼마요? 열. 또 하나 치면 백. 이거 뭐 비유가 될런지. 이렇게  하나님 한 분에게 내가 공이 되어서 붙으면 그만큼 나는 커집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숫자지마는 당신은 많이 나타나요.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나는 비고 하나님의 것으로 와서 채우는 것이라.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으로 내게 채워서 내 본질 본성이 되고, 내 지혜 지식은 다  집어 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 지식으로 내게 채워서 내 지혜 지식이 되고, 내  능력은 다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와서 내 능력이 되어지는  이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이렇게 하려는 그리스도의 사역, 성령과 진리의 이 책임자  보증자 이로 인해 가지고 우리가 이 절대자에게 삐뚤어지지 아니할 수 있고  절대자에게 딱 들어맞을 수 있고 절대자와 참 머리와 몸같이 하나가 되어 가지고  움직일 수 있고, 에녹은 동행했고 아브라함은 동행했지마는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몸이라 이랬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호요. 그리스도는 그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은 머리고  우리는 몸같이 그렇다고 본체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창조주요  피조물이지마는 이제 그 본체의 존재적으로는 그렇지마는 활동적으로 꼭 한  몸이라.

 “하나님과 우리 몸같이 이렇게 되어서 하게 하는 이분으로 인해서 이김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감사하노니”“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여기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노니”  그러면 우리가 걷는 걸음이 얼마나 세밀해야 되며 얼마나 맞추기가 어려우며  얼마나 그 맞춰야 될 그 각 면이 많다는 거, 인간이 그 각 면이 천인지 만인지  인간이 그 숫자를 알겠소? 또 그 각 면이 어떤 각 면인지 그것을 알겠소? 또  거게 뭐 살펴서 심사해 가지고 맞출 능력이 있소? 안됩니다. 이것은 다만  예수그리스도로만 이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이 돼요. 예수  그리스도로만 삐뚤어지지 않고 여기 들어 맞을 수가 있다 그기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 할 일이라. 우리 할 일이 무슨 할 일. 이렇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할 일이 절대자의 그 모든 면에 삐뚤어지지 안해야 되지,  절대자의 그 모든 면에 들어맞아야 되지, 절대자와 한 덩어리가 돼야 되지 자 이  일이 일국의 대통령하고도 자기하고 지금 한 덩어리가 되려 해도 그기 힘들고  만나 보려 해도 힘이 드는데, 어떤 사람이 만나려고 그분 만나려고 최성모  목사님도 석달 걸려도 나중에 못 만나고 말았다고, 어떤 사람은 보고 자기가  장관이 한번 약속을 했는데 그 장관을 만나면 해결을 짓겠는데 그 장관 만나려고  또 지금 만낼라 하니까 뒤로 미루고 뒤로 미루고 그 우리 교회 정순자씨 저 오빠  뭐 정계 좀 큰 사람 좀 만나야 된다고 그걸 만나려고 그 얼마 됐노? 한 2년  되었습니까? 그 뒤에 아마 3년인가 2년인가 뭐 1년인가 더 기다렸지요? 3년 되도  못 만나고 만 모양이야 해결 짓고 만 것 보니까.

 이렇게 지저분한 그것도 조그마한 위치를 가져 놓으면 만나기 어려운데 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합이 된다는 거, 그의 그 전지의 그 뜻에 맞는다는 거, 그  전능의 능력에 배치 안된다는 것 이거 우리가 참 측량 못하는 인간의 지식을 참  탁월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이 어려움이며, 이 사랑이며,  이 구원입니다.

 이걸 공연히 우리가 못나고 어려 놓으니까 아주 쉽게 여기고 뭐 자기 할대로  다하고, 욕심대로 다하고, 그 경영대로 다하고 돈 욕심 하는 자, 권세 욕심 하는  자, 뭐 세상에 미 욕심부리는 자 제대로 다 소원 성취 다해서 그 찌꺼기 그것 뭐  쓰지 못할 얄궂은 그런 것도 거게 다 드리고 찌꺼기 가지고 이래도 이 구원이  이루어지겠지. 어림이나 있습니까? 참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천부당 만부당이요.

 이런데 다만 이 가능성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대속 아 성령과 진리가 우리를  보증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이 일이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그말이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김을 주시고 계속 이김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노니”이게 얼마나 큰 줄을 알아야 우리가 이렇게 만홀히 여기지 않고  등한히 여기지 않지. 이 큰 걸 몰라.

 그저 앵무새 모양으로 앵무새가 무슨 사람 말을 알아들어서 흉내를 낸다고 뜻을  압니까? 뜻을 모릅니다. 뜻을 모르기 때문에 땅의 것을 탐을 내 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하지. 이 뜻을 안 사람은 땅의 것을 여기 거리끼기까지 탐하지 안해요.

여기 거리끼기까지 탐하지 않고 여기 거리끼기까지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  버리고 갈 이유가 없어.

 “아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이 사실을 그  요통치 마라, 견고 견고란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요게 딱 들어 붙어 있어라  말이요. 요게 딱 명중하고 있어라 말이요. 명중하고 있어라 그 말이오.

 여기 이탈되면 안 되고 요게 견고라 말은 그 견고란 말은 그 객관적으로  객관적으로 요게 붙들려 매여 있어라 그 뜻이고, 주관적으로는 자기가 여기서  이탈하지 말아라. 이탈하지 말아라. 그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딱 맺는데 네가 그  결박을 벗어 날려고 하지 말아라. 결박을 매어 놓은 대로 고대로 있거라. 또 네가  스스로 요게서 이탈되지 아니하도록 네가 해라. 그것을 이탈되지 않게 해라.

여기에 매여 가지고 딱 붙어 가지고 있거라. 고것을“견고하며”   견고하며 그 다음에“흔들리지 말며”요게서 조그만치라도 떨어져 나가지  말아라 그말이오. 떨어지지 말라 말이요. 그것이 뭐냐?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돼라”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라 그것이 뭐이냐?  결박을 벗어나지 않고 거기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게 떨어져 가지고 날뛰는  행동, 그게 흔들리는 것이요. 떨어져 가지고 떨어졌다가 붙었다가 떨어져 가지고  행동하는 기 흔들리는 것이요. 떨어져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흔들리는 것인데,  떨어져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행동이 너희에게 없어야 되고 떨어지지 안해야  된다.

 그 결박에서 벗어나지 안해야 된다. 그게 뭐이냐? 그게 주의 일이라 그 말이오.

그것이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이라 말은 내가 주님의 일을 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요 일을 하시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는  그것이 주의 일이요.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하시는 일 그 일은 뭐이냐  하면 나를 구원하시는 일이요 나를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온전케 하시는 그  일이란 말이요. 완전케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그 일을 힘써라.

 이래서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반대만 하지 않고 받으면 된다 또 우리가 알면  우리가 힘을 합해야 된다. 또 칼빈은 전체가 은혜다. 그것은 내가 힘을 써야 되는  그것도 은혜, 또 객관에서 역사하는 그것도 은혜, 내가 주관으로 내가 하는 것  같이 되는 그것도 은혜, 은혜가 와 가지고 은혜가 발표되는 거 그 궁극에는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 궁극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게 됐고 거기서 하나님의 그 주권적 의지의  예정을 발견했고 또 주권적 능력의 성취를 발견해서 칼빈은 위대한 걸  발견했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그만하면 능히 세대를 감당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래  주의 일하는 것, 요게 들어붙어 가지고 있고 그게 꽉 매여 가지고 있고 그게서  떨어지지 않는 요게 주의 일이요 요게. 우리 구속을 하는 일이요 요게. 이기는  일인데 이 수고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이 수고만이 헛되지 안하요.

 “이 수고가 헛되지 않는 것은”헛되지 헛일 안한데 하지 안한다 그 말이오.

쓸모 있다 그 말이오. 하나도 헛일이 없습니다. 전부 자기에게 유익이 돼. 헛된  것의 반대를 전도서 1장 2절 이하에 보면 유익으로 말했습니다. 헛된 것은 유익이  없고 헛되지 않는 것은 유익이 있고, 유익이 있는 것이 ( )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한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유익이 없기 때문에 헛일이요. 유익이 있으면 헛일이 아니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요 수고만이 요 수고만이 헛되지 아니하다. 요 수고만이 헛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은 헛되다. 천하의 사람도 하는 일이 요 수고 외에는 전부가  헛됩니다. 왜? 고게 삐뚤어지면 안돼. 죄가 되면 다 헛돼. 그게 삐뚤어지면 안돼.

고게 삐뚤어지면 안되는데 고게 삐뚤어지지 않으려고 하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무도 할 수가 없어.

 이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삐뚤어지지 아니할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의 구속을 입어 이것을  종자로 토대로 삼아 가지고 이로 인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 책임자  성령의 은사와 또 책임의 그 진리의 은총으로 인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지났고 좀 거게 대해서 어려운 면은 지난 주일에 서부교회서는  말을 했습니다. 열 두 가지 어려운 면을 말했는데 그것을 내일 아침에 계속해서  증거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뭐인지 알고 우리의 소망이 어떻게 큰 줄 알고 그 소망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소망이 커야 그 소망을 가지지 세상 소망보다 그것이 희미하고 빈약하고  허무한데 세상을 내어 놓을 자가 누가 있겠소? 다 제 잘난 재미로 사는데 제  허무한 걸 모르고야 누가 자기를 부인하겠소? 자기보다 나으신 하나님을  모르고야 누가 그이에게 자기를 맡기겠소.

 아는 가운데서 자라 가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운데서 자라 가라. 알아야  자라지. 알아야 그래야 행하지. 행해야 자라지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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