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선지자선교회 1985년 3월 31일 주후

 

본문 : 요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에  영계의 요소와 물질계의 요소로 양요소로 지음을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  뿐입니다. 천사는 영의 요소뿐이요. 이 물질의 요소가 없습니다. 모든 동물이나  식물이나 곤충이나 무생물의 모든 것들은 다 물질의 요소로만 되어 있지 영의  요소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만 영과 물질의 두 요소로 되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영육이 하나 되었을 때에 정상의 사람이요, 영육이  하나되지 못했을 때에는 비정상의 사람인 것입니다.

 불택자들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은 활동  기능을 가지고 있고, 영은 활동 기능을 전혀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타락 후에  영은 단번에 즉시 죽었고, 이 심신은 정죄와 사형을 받았으나 다 죽기까지의 그  기간이 나는 그 시로부터 세상을 떠나는 그 생명의 마지막 끝나는 그때까지로서  다 죽는 것입니다. 외부에는 사는 것같이 보여지지마는 사는 것이 아니고 하루  살면 하루 사는 것만치 생명은 짧아졌고 죽음은 더 짙어지고 많아진 것입니다.

 그 생명은 어떤 것이 생명인가? 사람의 그 생명은 이 육이라는 것은, 육이라는  것은 육이라는 이 물질로 된 것인데 이 몸과 마음을 가리켜서 육이라고  말합니다. 이 몸은 마음으로 인하여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은 힘이라 그렇게도 발표할 수가 있습니다. 몸은 마음으로  인하여 힘을 얻어 살고 있습니다. 또, 마음은 영으로 인하여 힘을 얻어 살고  있고, 영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을 얻어 살고 있는 것이 그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몸은 마음으로 인하여서 힘을 얻어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기간 동안은 힘을 가지고 있지마는, 마음은 그 영으로 힘을 얻어 가지고 살아야  되는 존재인데 영이 완전히 죽어서 기능적으로는 없는 거와 같습니다. 에베소  2장 1절 이하에 '죄와 허물로 죽었다' 하는 그 말은 이 심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그 영이 죽은 것입니다. 그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으로 인하여 살아야  하는 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은 영이 죽었으니까 그것은 차차 차차 죽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몸이라는 것은 물질로만 해서 살 수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마음이라는 것은  물질만 가지고 살지를 못합니다. 그는 영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이 모든 이치를  먹고 살고 이치를 먹고 살고, 또, 옳은 감각을 먹고 사는 것인데 영과 관계가  끊어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죽어 있는 것이 그게 발동쳐서 차차  차차 죽어지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마치 동물을 그 생명을 끓어 버리면 생명이  머리와 몸과 연결될 때에 생명이 있는 건데 그 생명을 끊어 버리면 그 몸은 아주  그 활동하기를 더 힘있게 활동하지마는서도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머리에서  힘이 끊겨졌으면 그 날뛰는 그 몸통은 얼마 안 가서 다 죽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요, 또, 사람은 살기를 위로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야 하고, 또, 옆으로 아래로는 모든 피조물을 연결해 야만  사는 것이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안 믿는 사람, 우리가 안 믿을 때에  영이 죽어 있을 때에는 그 마음이 만족을 이루지를 못하고 있고 또, 그 마음이  힘을 가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이 죽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안 믿을 때의 사람들을 안 믿는 사람들, 안 믿을 때의 사람들은  마음이 제일 고통스럽습니다. 그 마음은 평안을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영에게서 얻어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영에게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니까  그 마음이 영에게서 얻을 것이 없으니 그 마음이 이 물질에게서 뭣을 얻어  가지고 평안을 누려 볼라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러니까, 그  마음이 사람을 접해 가지고서 평안을 누릴라고 혹은 사물을 접해 가지고 평안을  누릴라고 애를 써서 그것을 취하기만 취하고 연결만 가지면 저희 마음에 만족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는 취해 놓고 난 다음에는 그것으로서 만족을  못하게 되니까 또, 다른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가지고 있는 소유 이 무슨 뭐 어떤 물질이든지  자기 무슨 토지든지 또, 자기 가옥이든지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그 모든 어떤  무대든지 사업이든지 인간의 소유라는 것,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소유든지 그  소유라는 것은 사람의 몸에서 힘을 얻어 가지고 그것들이 윤택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그 아주 윤택하게 가던 어떤 그 사업이나 물질이나 그런  것이 그 사람의 육이 병들고 병신이 돼 버리면 그런 것도 다 병들고 병신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육이라는 것은 이 고기덩어리라는 것은 어디서 힘을 얻어 가지고 그것이  생명을 얻어 가지고 사느냐. 힘을 얻어 가지고 사느냐, 그에게 참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그 요소를 은혜를 받아 가지고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마음에서 받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또.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데서 생명을 받아 가지고 사느냐? 생명 받아  가지고 산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힘을 받아 가지고 산다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생명이라 하는 건 잘 모르기 때문에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있으면 이것 저것 하는 기능이 있지마는 생명이 끊어지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라는 말이나 힘이라는 말이나 그 외부적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속의 내부는 다르지마는서도.

 그러기에. 여호와의 증인이니 안식교니 하는 거게서는 생명이라는 말을  부인합니다. 생명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그 성경은 번역할  때에 생명이라고 번역하지 안하고 힘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생명이 죽었다.

힘이 끝났다' 그렇게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의 생명은 마음에 있고, 마음의 생명은 영에 있고, 영의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는데 하나님으로 끊어져서 이끌 수 없었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로  더불어 연결을 가질 수 있도록 오신 분이 신성이 인성을 입고 와서 그 인성을  통해서 우리 사람들이 신성과 연결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 하나님이  인간과 연결을 가질 수 있도록 온 하나님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신성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은 이것을 악령이  혼돈시켜서 정확한 그 지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해서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모든 소유는 그 사람의 육에서 얻는 그 힘을 가지고 그  소유들이 다 윤택하게 살게 되고, 또, 그 육은 마음에서 힘을 얻어 가지고 살게  되고, 마음이라는 것은 영에게서 얻어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이 죽은 사람은 그  마음이 힘을 가지지 못하고 만족을 가지지 못합니다. 영에게서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의 힘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힘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힘이 돼 가지고 있다 말은 그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다스릴 때에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 전부가 다 사망의 지배요 통치지 생명의 지배와 통치는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왜? 영이 죽었기 때문에. 그 영이, 영이 기능적으로는 없는 거와 같이 완전히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어서 없기 때문에 그 죽은 영이 그 마음의 만족을 줄 수  있는 그런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신자들은 전부 그 영이 죽어  있고 마음이 그 영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해도 얻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 저  단독이 무슨 작용을 하게 되고 또, 그 마음이 접하는 것이 자기의 육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육과 그 마음이 서로 관계하는 그 조화, 그 둘이 합작해 가지고서  나타나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모든 생활은 그 마음이 영과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 마음이 마음 제 욕심대로 제 생각대로 제 뜻대로 제 비판대로  평가대로 제가 이제 왕이 돼 가지고 모든 것을 주장을 해 가지고 모든 것을  계획하고, 또, 발기하고 그럴 때에 아무 머리 끊겨진 이런 동물과 같이 아무런  그 생명이 끊겨진 그 마음이 제 단독이 날뛰고 있으니까 그것은 생명에 속한  거는 없고 그렇게 만든 악령이 와 가지고서 지배를 하게 되고 그 마음대로  악령의 지배를 받아 가지고 모두가 다 악령적인 그 계획과 활동 밖에는 못 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부가 다 사망만 이루지 사망 외에는 이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망만 이룬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사망은 이 피조물이 조물주와 연결이  끊어진 모든 계획이나 모든 활동은 다 사망인 것입니다. 이 피조물은 조물주,  조물주와 연결이 맺어진 연결이 되어진 연결이 된 거 만치 그 거는 산 것이요.

또, 생명의 힘이 그에게 비추어서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그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이 마음이 무얼 어떻게 할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할 줄  몰라서 그저 이래 볼까 저래 볼까 해 가지고서 인간들 마음 하나가 단독이  생각하고, 또, 좀 낫으면 마음 둘이 생각하고 마음 열이 생각하고 마음 백이  생각하고 천 명이면 마음 천이 한테 합해 가지고서 생각을 하고 마음끼리  생각하고 마음 그 이상의 무슨 아무런 그 힘을 얻어 가지고 오지를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영이 죽은 사람들이 뭐 천 명이나 만 명이나 그 시에 있는  사람이 이십억이니 삼십억이니 뭐 지금 지금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세계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사십 억입니까? 그러면 사십억이 믿는 사람 빼 놓으면 몰라그 한  삼십 오억이나 될란지 모르겠지요. 삼십 오억이 한 테 뚤뚤 뭉쳐 가지고서  인간의 마음 삼십 오억 마음이 한테 뭉쳐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암만 공로를 해  봤자 그 영아 다 죽어있기 때문에 그 영에게 서 얻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들이 의논해 가지고서 경영하는 것은 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경영만 하지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경영이나 연결된 경영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삼십 한 오억이나 되는 그런 마음들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은 전체가 다 사망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는 산 것이 하나도 없고  사망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짓기를 이 모든 만물들의 소망은 사람의 그 육에  있고, 육의 소망은 그 마음에 있고, 마음의 소망은 그 영에 있고, 영의 소망은  하나님에게 있도록 이렇게 해놨는데 고만 그 머리가 끊겨졌기 때문에 아무  연결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의 마음들은 여럿이 뭉치면 뭉쳐서 의논을 해서 다수 종다수  가결로 그렇게 많은 것들이 다 인정하는 그것을 취하면 살 줄로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서도 다 그것이 죽어 있는 것이요, 생명의 연결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는 모조리 하나도 뭐 털끝만한 것도 남음이 없이 삼십 오억이라는  사람이 그 마음이 산 모든 행동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몰려 들어가지 아무 데도  사는 길을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수많은 그 마음들이 그 몸은 그 마음에게 다스림을 받고  마음으로 인해서 만족을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그 마음은 만족을 가지지를  못합니다. 마음은 그 이상에 무엇에도 얻어야 될 터인데 그 영에게 영과 연결이  끊어져 가지고 있지 영은 있기는 같이 있지마는 서도 영은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 활동의 작용이 없으니까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살리는 그런 역사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게 저렇게 자꾸 헤맵니다. 헤매서 뭐 하면 좀  나을까 해 가지고서 그렇게 헤매는 그것을 헤매는 그 종류를 말하면 모든  이종교, 이종교라 하는 것이 모든 그 종교들입니다. 이렇게 헤매고 저렇게  헤매고 이종교, 철학. 또, 그 모든 사상이 마음들이 이런 사상 하나 꾸며 내  가지고 이 사상으로 나가면 아마 좀 만족을 얻을 까? 이 사상, 뭐 오십 인 사상,  천 인 사상, 만 인 사상, 그 사상들이 이 사람 이런 사상 가졌다. 그 수많은  사상들, 또, 그 사상에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가지고 그 근원을 근원을  생각하면서 그 근원이 뭐이냐? 그 근원을 생각하는 그것이 모든 철학입니다.

사상 위에 철학이요. '그 철학이 자꾸 이렇게만 뭐 근원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생각할게 아니라 우리 외에 어떤 그 객관의 무슨 객관의 무엇을 받을 수 없느냐?  객관의 힘을 얻을 수가 없겠느냐? 그 객관의 그 협조를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모든 종교가 들이 창설한 종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본능적으로 마음의  소망. 마음의 그 모든 생기는 다 영에 있는데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헤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들든 다 처음에 계획하고 발동하는  것은 그 영은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영을 보지 못하고 악령이 가리어 가지고서  죽은 영이 죽은 영이 영이 죽어 있다 그것도 모릅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영이  죽어 있으니까 그 마음만 활동하고 있는데 악령이 와 가지고 자꾸 이래 꾀어서  이 마음들이 본능적으로 배가 고파 못 견디겠고 힘없어 못 견디겠으니까  무엇인가 힘을 얻어야 되겠다고 해 가지고서 야단을 지기고 하니까 마귀란 놈이  이런 것 저런 것을 내 보여서 그래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사람은 이 종교에서  좀 명철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있으니까 명철한 사람은 종교적으로 한 십 리를  들어갔다 말이오. 십 리를 들어갔으면 우둔한 사람은 한 오 리 밖에는 못  들어가고 맙니다. 이러니까. 그 십 리 들어갈 때까지는 이게 참 길인 줄 알고  거기서 그 마음이 만족 얻으려고 들어가다가 나중에 들어가니까 좀 빠른 사람은  빨리 들어가니까 먼저 다른 사람이 연구해서 '이거라' 하고서 그 종착에  말했는데 종착에 척 도달해 보니까 그것도 가짜고 아니라 말이오. 마음에 만족이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명철한 사람은 모든 이종교에서 빨리 '그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권태를 느끼고 여기 아니 '이게 내가 찾는 것이 여게 없다. 내가 내 마음에 힘을  얻고 내 마음이 만족하고 내 마음이 늙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죽지 안하는  그것이 여기에 없다' 이래 가지고서 거게서 다시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고 이런  뭐 철학으로 저런 철학으로 헤메고 있는 것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벌써 몇 해 동안에 그런 걸 다 걸어봅니다. 걸어봐서  '그거도 소용이 없다.' 이래서, 어떤 사람 불교를 불교의 불경도 보고  불교인들을 많이 접촉해 가지고서 이렇게 거기서 뭐이 될까 싶어서 말하지마는  서도 그 사람만 말 듣고서 잠깐 좀 생각해 볼 때에 벌써 종착에 들어가 보니까  마지막 막바지 그 밑자리에 들어가 보니까 거게는 꽉 막혀있고 아무것도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다시 이 불교에는 나는 소망이 없다.' 불교에서 절망을 가지고  다시 이종교로 이렇게 하다가 그만 그럭저럭 하다가 늙어 죽는 사람이 있고.

 그럴 때에 자기가 뭐 수십억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그 마음의 근원을 찾지  못했으니까 마음이 그 자기의 근원, 근원이요 자기의 소망인 그 영에게서 받도록  요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게 사람의 마음인데 그것을 얻지 못 하고 찾지  못하고 하니까 그저 어떤 사람은 그러다가 보면 처음에는 '돈이 있으면 되는  가보다' 그게 껍데기요. '돈이 있으면 되는 가보다' 돈 가지고 해 봤지마는서도  그 마음에 만족이 없으니까 '아니 이거 돈이 아니다. 명예다. 명예로 하다가  아니 명예 이것보다도 아니다. 이거 권세다. 권세로 했다가 아니 그 권세  이것보다도 영광이다. 모든 사람에게 덕을 세워 가지고서 영광이다.' 영광도 해  봐도 또, 그래 안 돼고 이래 이 세상에 이런 것을 다 이 티끌 세상 이런 것을  하다가서 안 되니까 이제는 철학으로 들어갑니다. 철학으로 들어가 가지고서  철학에 가 가지고 암만 헤매도 그 철학은 자기 단독 힘을 가지고 뭣을 찾아  들어간다 하는 그게 철학입니다. 이러다가 안 되니까 '이제는 이 철학에는 안  된다. 뭣인가 내게 없는 그 다른 객관의 세계가 있는데 객관의 세력을 힘입어  가지고 내가 살아야 되겠는데 그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그 객관을 찾아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서 이런 거 저런 거 타력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 그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다 안 되면 미신이라도 이 돌담 위에는 이 돌 위에는  여게는 무슨 석신이라는 것이 있다.' 이 물이 많이 흘러내리고 이 물은 끝없이  흘러 내려가니 '이 물에 뭐 없겠냐?' 해서 물에 수신이 있겠다. 또, 무슨 '산에  뭣이 없겠나?' 산에 산신을 찾다가 또, 안 되면 해를 찾다가, 달을 찾다가, 뭐  별을 찾다가 자꾸 이렇게 그 그런 것을 찾아서 이렇게 헤매이나 찾아서 들어가는  사람은 마지막에는 거게 대해서 다 그 절망을 가지고서 다시 거게서 절망을  가지고서 돌아나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인 것입니다. 절망을 가지고  돌아나오지마는 서도 사람 이 제가 들어가는 불교면 불교에 절망은 되긴 됐는데  그 불교에서 여게 들어가면 만족이 있다. 자꾸 만족을 지금 찾고 있는 사람,  만족을 찾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교인으로서 지금 활동 안 하고 있는  사람이요 불교인으로서 만족을 찾았다 하는 사람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만족을  찾았다고 하는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이 벌써 틀려서 자기의 심령의 갈급은  지 나갔고 그것이 하나의 영리적이요, 하나의 영리적이요 사업적이요 그것이  내나 돈벌이 하는 것 같은 그런 것으로 그만 다 속화 돼 버리고 말고 자기가  찾고 있는 그 심령의 만족을 찾는 그거는 벌써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 건데 그러기에,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이 불신자들은 절대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만족을 찾아서 자꾸 헤매이는 것입니다. 헤매이나 만족을 찾아 가지고  '이거다' 하고서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어떤 종교인이 '여게는  이거는 만족이다' 하는 그 사람은 벌써 그 사람은 거짓부리가 돼 가지고서  심령에 만족을 찾는 사람이 아니고, 심령에 만족을 찾는 사람이 아니고 벌써 그  사람은 사욕적인 사람이 돼 가지고서 벌써 거게서 자기의 그 명예욕. 자기  권세욕, 지위욕, 그 저 회교국 저 회교의 머리 되는 사람이 그 사람이 무슨  옹이지? 호메이니인가 뭐 내가 그 짜다라 봤는데 자꾸 잊어버려서 나는 그런 거  생각 안 하니까. 그 저 호메이니옹인가 뭐인가 그 분이 지금 그것을 거게서 제일  앞선 사람 위대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제는 보니까 자기가 찾는 그 심령의  만족이라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이제 이것을 가지고서 세상에 무엇을 좀  고차원적인 이런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많은 사람들을 이와 같이 통치해 가지고  자기에게 소속시키는 그런 하나의 그 사상 선전, 사상 선전, 자기 권위의 이  모든 다리 이런 걸 가지고서 내나 자기의 사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자들은 중생된 사람이면 자기가 그 심령에. 심령이 만족을 얻지  못해 가지고 내나 불택자와 같이 이 세상으로 이렇게 헤매어 나가는 사람들은 다  가다가 큰 환난이 당하면은 환난이면 거기서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고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그 자기의 중생된 영에게로 돌아가면 중생된  영에게로 돌아가면 돌아가 가지고 만족을 얻습니다. 만족을 얻어서 자기가  회개하고 그 중생된 영을 찾을 때에는 '아, 이게 참사람이로구나.' 거게는 뭐  끝도 없고 넓이도 한정없고 거게서는 그저 만족하고 아, 요게서는 얼마든지  만족하고 그 끝이 무한히 영원히 있는 그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찾아 들어가면  찾아 들어 갈수록이 만족하고 가다가서 후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후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거게 가다가 미혹을 받아 가지고 세상으로  나오는 사람은 그만 거게서 불만 고통을 당하고 미혹 받아 나갈 때는 사가면  좋지 싶어서 나갔지만 나가 가지고는 탕자와 같이 불만 고통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환난 닥치면 다시 그 중생된 영에게로 돌아가  가지고서 만족을 얻고 이래 하는 것이 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영과 혼이 몸, 또, 자기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현실의 사물  이거 와는 나뉠 수 없는 이 하나입니다. 나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 행복을 누려야 되지 행복을 누리지 안하면은 그 사람은 행복되게 못 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의 가지고 있는 이 사물은 이 사람의 몸으로 인해서 이  사물은 행복을 누리고. 이 몸은 마음으로 행복을 누리고, 이 마음은 그 영으로  행복을 누리고, 영은 하나님으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 소유물의 가치는 그 사람 몸의 그 실력에 있고. 몸의 실력은 그  마음의 실력에 있고, 마음의 실력은 그 영의 실력에 있고, 영의 실력은 그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유의 가치는 그 사람의 육체에  있고, 육체의 가치는 그 사람 마음에 있고. 마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영에 있고,  영의 가치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영, 마음, 몸. 자기의 모든 관련 가지고 있는  물질 이것은 나뉠 수 없는 하나라 그것을 지금 말하기 위해서 지금 많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그 마음과 몸을 나눌 줄 알아도 마음과.

마음과 이 몸이라 하는 것이 분명히 개별적으로 있는 존재요 나눌 수도 있고  합할 수도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나누어 가지고는 행복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몸이 그것이 마음에서 마음의 작용을 인해서 마음의  평안을 인해서 그 마음이 평안함을 누리고, 또, 마음이 고통스러움을 따라서 그  몸이 고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만일 그 사형이라는 사형이라는 구형을 사형  구형을 받았을 때에 그 마음이 마음이 사형 구형을 받았으면 마음이 벌써 고통이  됐을 때는 그 몸도 함께 내나 달라지고 고통스러워지고. 또, 벌써 그 이제 사형  구형에서 이제는 '무죄로 석방됐다' 하면은 이 몸은 모릅니다. 몸은  모르지마는서도 그 마음이 이 몸이라는 기관을 통해 가지고 들어서 마음이  그것을 듣고서 기뻐 이제는 무죄로 석방됐다 기뻐하면 그 몸도 그 때 생기를  찾아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몸, 영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자기가 가진  그 소유 사물도 분리 할 수 없습니다. 소유가 곧 사물에 고장이 생기면 그  영향이 몸에 있고. 몸에 고장이 생기면 그 마음에 있고 또, 마음에 고장이  생기면 그 영향이 영에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은 뭘로 자라느냐? 영은  마음으로 자라고. 마음은 그 몸으로 자라고, 몸은 그의 모든 사물의 행동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 그 마음 몸 이 셋은 합해서 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영. 혼, 몸 이렇게 이 영, 혼. 몸 이 세 가지로 성경에 말씀해 놨는데 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기를 정통 교리에서는 삼분설을 '이 세 가지로 논하는 것은  틀렸다' 이래 가지고서 이분설을 주장합니다. 영과 육으로 이래 주장하는 그것도  '이분설만, 맞았지 삼분설이 틀렸다' 하면 그 사람도 틀린 사람이요 이단인  것입니다. 또, '삼분설이 맞고 이분설은 이래 틀렸다' 하면 그것도 깨닫지  못하는 이단에 속한 것입니다. 이분설을 유력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그  삼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 영은 영계에 속한 영물이요 영계에 속한 영물이요,  또, 혼과 몸이라는 그것은 이 물질에 속한 물질이라. 그러기 때문에, 영계에  속한 것 영하고 물질에 속한 육하고 이렇게 말하는 그 면이 좀 정확해서  '이분설이 좋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고 '삼분설이 좋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영은 영대로 따로 있고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있고 몸은 몸대로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셋이 각각 따로 있는 그것을 분리해서 포현할 때에는 이  삼분설이 정확하고 더 좋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분설  하면은 영육이라 하는 줄 알아야 되겠고, 삼분설 하면은 영은 하나 뿐인데 육이  둘로 갈라 가지고서 그래서 이 삼분설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이 살아도 영이 살아도 마음과 몸이 살지 못하면 그 영은  갇혀 있는 병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영은. 마치 우리 마음이 다 살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살아있어서 여게서 볼 때에 '아무것이 한테 가 가지고서 그 말을  해서 서로 해결을 지워야 되겠다, 아무것이 한테 가서 권면해 가지고서 이 일을  잘 건설해 나가야 되겠다.' 아무리 자기가 마음으로는 알아 가지고 이렇지마는  몸이 말을 듣지 안하니까 걸어가지 못하니까 걸어가지를 못합니다. 걸어가지를  못하니까 가지 못하고. 또, 걸어갔다 할지라도 이 입이 말을 듣지 안하니까 자꾸  멍얼멍얼멍얼 하기만 하지 상대방에게 그 마음의 효력을 실력을 발휘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영, 마음. 몸. 또, 이 모든 자기의 가진 사물 이것이 다 합해서  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네 가지 가 합해  가지고 그 사람이 활동할 수가 있고, 세 가지만 합하면 그 존재만 있지 아무런  활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는고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했습니다. 믿느냐?  믿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믿는다는 말은 상대방이 나를 믿느냐? 주님을  믿는다 하면은 주님을 믿는다 하면은 주님과 주님의 하신 말씀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반치입니다. 인정하는 것. 주님과 주님이 그  하시는 일, 또, 주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그 모든 전하는 거 그것을 인정하는 거  그러면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내가 인정하고. 또, 주님이  내게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그렇게 그 우리에게 말씀에서 증거한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주님과 주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인정을 하고  고라고 난 다음에는 뭐 하느냐 하면은 그 분이 그분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인정함으로 그분과 그분의 하시는 일에 따라서 내가 움직여지는 이것이 이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 하는 건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믿는 자는' 그 말은 주님이 어떠하신 분. 주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창조하시고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시요, 또, 주권 개별 섭리의 주재자라. 한 분 되시는 그  하나님이시라.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도성 인신하셔 가지고 신인 양성  일위로 우리를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구원하기 위해서 세 가지 큰 대신 공로를  설정한 것이니 그것이 뭐인가? 우리가 죄로 죽었고 마귀로 죽었고 사망으로 죽은  그것을 첫째 죄를 멸했고. 마귀를 멸했고. 사을 멸하는 그 대신 멸하시는 일을  주님이 베푸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요.

 대속의 공로라 말은 '우리 대신 그 모든 문제를 다 당신이 책임지시고 그 일을  해결 지었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대속이라 말합니다. 대속이라 말 할 때는 대신  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해서 대속이라고 말하고, 구속이라고 말할 때는 대신 한  것보다도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 구원을 주로 들어 가지고서 주재로 들어서 말할  때에 구속이라 이렇게 하고 그 대속이라는 말과 좀 다릅니다. 그러면,  대속이라는 말이 더 범위가 넓고 정확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대속하신 그렇게 그 크신 분이 그렇게 크신 분이 우리 자 체라도  할 수 없고 부모도 형제도 해 줄 수 없고 대정치가도, 해줄 수 없고 어떤 위인도  해 줄 수 없고 천군 천사도 해 줄 수 없고 아무도 해 줄 수 없는 우리의 깊은 이  문제, 우리가 우리 선조가 마귀의 유혹 받아 가지고 범죄해서 사망케 된 그 세  가지 문제, 마귀의 유혹 받아 범죄해 사망하게 된 이 문제는 이 문제는 영원한  문제인데 이 문제는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아무도 해결해 줄 수가 없고 땅에 물질계에 있는 어떤 피조물로도 해결해 줄  수가 없고 영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로도 해결할 수 없고,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5장에 '하늘에도 이 인봉을 뗄 이가 없고 땅에서도 인봉을 뗄 이가  없고 아무도 인봉을 뗄 이가 없다' 하는 것은 그것은 해결 지울이가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도 못 합니다. 하나님도 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득이 사람을 입고 오셔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둘이 한 격위 한 격위라 말은 한  책임졌다 그 말이오. 이 격위라 하는 것은 한 인격인데 위를 말한 것은  책임입니다. 위에는 책임을 말합니다. 동장위. 구청장위, 통장 위, 아버지 위,  어머니위 위라 하는 그것은 거게 대한 그 책임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성이 한 책임을 하나님과 사람이 한 책임을 짊어지고서 한  것이 있으니까 신인 양성 일위의 책임을 지고서 이렇게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죄의 문제. 악령의 문제, 사망의 문제 이것을 사망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됨으로서 완전히 이걸 다시는 사망하지 않는 그 해결이 됐고, 예수님의 그  화친을 통해서 됐고, 또, 마귀를 다시 우리에게 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  진리와 영감에게 피동되니까 마귀는 와서 접 하지 못하니까 된 것,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말씀대로 고대로 사니까 이 죄라 하는 것은 해결이 된 것,  이래서, 예수님께서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이 공로를 믿고 주님이  이렇게! 크신 분이 이렇게 이 공로를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이 사실을 인정을  하고. 인정을 하고 그분을 그렇게 인정하고 그분을 그분으로 모시고 그분을  힘입고. 또, 그분이 베풀어 놓은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 대속의  공로를 힘입고 힘입고 그 공로를 힘입어 그 공로를 입고 사는 자. 또, 그 지극히  크신 그분에게 속해 가지고서 그분에게 속해서 그분으로 인하여 사는 자 이  행동이 뭐이냐 하면 믿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다는 말씀에 대한 말씀 가운데서는  고것입니다. 신인 양성 일위이신 그분의 어떻게 그 크심을 내가 알고. 그분이  말한 대로 그 크심을 내가 인정하고, 그 크신 분이 어떻게 그 완전무결한 이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니까 이만하면 뭐 아무데서나 걸릴 게 하나 없고 완전  해결입니다. 완전 해결을 대신 해 주신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등을 대고  그분을 힘입고 이제 대속하신 이 공로를 제가 입고, 입고 이 공로를 베푸는  그분에게 순종해서 사는 것이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산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도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도 있고 믿고 죽는 것도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안 뺏길라고 하니까 믿음을 안 뺏길라고 하니까 믿음 때문에 죽는 것도  있고, 또, 믿음 때문에 뺏겨 믿음으로 믿음으로 끝이 나서 죽는 것도 있고,  믿음으로 원수에게 피해를 당해서 믿음으로 인해서 깨어져 박살되는 것도 있고,  또, 아무 박살하는 것이 없지마는서도 이 믿음의 것이 돼 가지고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끝이 다 됐는고로 끝이 다 돼서 끝나서 없어지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이  믿음을 인해서 원수에게 원수에게 가해를 당해서 원수에게 타박을 받아 가지고  원수로 말미암아 이 파괴를 당해서 없어진 거 있고, 또, 이 믿음으로 이 살아  있는 것이 이것이 때가 돼서 때가 돼서, 죽는 거 있고 그러면 죽는 죽음이 두  가지 죽임입니다. 두 가지 죽음. 하나는 믿는 이것이 때가 돼서 죽는 거 있고,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아주 흠없이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잘 믿는데 벌써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슨 믿음 때문에  세상에게 타격 받아 죽는 게 아니라 벌써 그 기한이 다 됐기 때문에 기한이 다  돼서 자연적으로 그것이 이 세상에 있을 그 기간이 다 찼기 때문에 기한이 다  차서 그거는 이 기한이 세상에서 재세할 수 있는 기간이 다 차서 이제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 있고, 또, 아직까지 기간이 다 차지 안하고 없어지지 안할  것이지마는서도 이 주님을 믿는 믿는 이 믿음 때문에 피해를 당해서 피해를 당해  가지고서 자연 법칙으로 별스러운 그 별스러운 그 이상법으로 죽는 게 있다  말이요. 이상법으로 죽는 거 있고, 자연법으로 죽는 거 있고 주님을 믿는 것  중에 자연법으로 죽는 거 있고, 그 아주 이상스러운 자연이 아닌 변덕스러운  변동스러운 것으로서 죽는 게 있다 그거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이 믿음을 인해서 죽임을 받았으면 그 사람 순교로 그것은  아주 그 자연이 아닌 자연이 아닌 그 변자연적인 그 변식적으로 그것이 없어진  것이 되겠습니다. 또, 그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 늙어서 참 세상에 있을 그  기간이 다 돼서 그 떠나는 그것은 그것이 자연적으로 죽은 것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 자연적으로 죽든지 혹은 원수에게 박해를 받아  가지고 죽어지든지 죽어지는 거 이것은 없어지는 걸 말합니다. 죽어지는 걸  죽어진다 하는 이거는 왜 없어진다고 말하지 안하고 그 죽는다고 말을 쓰느냐  하면은 죽는 것은 죽는 것은 그 변태. 형태가 변해지는 것 죽는 것은 그 질이  변해지는 것이지마는서도 없어지는 거 아예 없어지기 때문에 없어지는 거  아닙니다. 이거 전부 죽는 것이지 없어지는 거 아닙니다. 없어진다는 말보다도  죽는다는 말이 더 정확한 말이요 바른 말입니다.

 그런 것은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산다 그 말은 예수님에게서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산다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살아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 변식적으로 변식적으로 그것이 깨졌다든지 없어졌다든지  이렇게 한 것은 한 것이나, 또, 자연 법칙에 따라서 없어진 그런 것들이나  어쨌든지 그런 것들이 마지막 날에는 다 살아나게 됩니다. 이런고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죽어도 다 살아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것 중에는 죽는 것이 있다 말이오. 현재 이 세상에서 요 살아 있는 요 상태대로  살지 안하고 요 상태가 변해져서 요 살아있는 요 상태가 없어지고 고 변한  상태에서 그 이 영계도 가지 못하고 이 우주에 지금 우주의 원소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되면은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아나면 몸도 살아나고, 또, 모든 그 물질도 살아나고, 또, 육체의  기능도 살아나고 전부 다 살아납니다.

 살아나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믿는 자 가운데에서는  죽지 안하고 영원히 사는 것도 있다. 그러면. 우리의 영도 죽지 안하고 영원히  삽니다.

 또, 우리의 심신의 기능 중에서 마음의 기능이라는 것은 죽지 안하고 그만  영원히 삽니다. 이 마음의 기능은 죽을 때도 죽지 안하고 영과 함께 낙원에 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삽니다.

 또, 자기의 무슨 몸의 기능 몸의 기능 이런 것은 어찌 되나? 몸의 기능 이것도  살아난 것은 죽지 않습니다. 몸의 기능 요거는 살아나는 건 죽지 안 하고.

마음의 기능은 살아난 것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영과 함께 낙원에 가고  영이 입고, 그때부터 영이 입고 그 자기의 그 기관으로 삼아서 입고 이 마음을  타고 마음을 입고 영계에 가 가지고 머물게 되고, 이몸의 기능이라 하는 것은  그때 가지 못하고 이 모든 원소 가운데에 있으나 그 기능은 살아서 거기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 기능이 살아서 대기하고 있느냐? 육체의 기능이 그때에 그 영이 갈 때에  영과 혼이 갈 때에 이 몸도 몸의 기능도 같이 가면 좋을 터인데 왜 이 같이 가지  않는가?  같이 갈수 없는 것은 몸의 기능이라 하는 이것은 아직까지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지 안했기 때문에 이거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암만  살아난 기능은 기능이지마는 이거는 구멍 없는데 못 갑니다. 구멍 없는데  들어가지를 못하고, 또, 이것은 그 이 물질이 갈 수 없는 그런 신령 한 세계를  가지 못하기 때문에 빌립보서 3장 20절로부터 21절까지 보면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그 주님이 우리의 이 몸의 기능, 살아 가지고 있는 이 기능을 다시  변화 시켜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과 같이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변화한 몸입니다. 신령하게 변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 뭐 구멍이 없는데도 들어갈 수 있고, 그러니  문을 닫아도 들어갈 수가 있고 사람에게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안할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안할 수도 있고. 또, 그 예수님의 부활은 영계  갔습니다.

 영계 가서 아버지의 우편에서 거게서도 작용하고 계시고 지금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같이 계시는 주님은 주님의 그 영만이 같이 있는 거 아닙니다. 주님의  영과 육이 함께 같이 하십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인 양성 일위. 양성  일위이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만 우리와 같이 있고 인성은 없는 줄 알고 예수님의 신성 인성 예수님의  인성 의'눈도 귀도 코도 인성의 모든 그 지체 그 지체가 예수님의 이 신성과  함께 한 격위가 돼 가지고서 역사하시는데 역 사하시는데 그 부활하신 변화하신  그 몸은 우리와 꼭 같은 몸인데 몸이면 몸인데 어찌 그 몸은 그러면 그 영계도  가고 물질계도 가고 이런 구멍 없는데 땅 속에도 들어갈 수가 있고 무쇠덩어리  속에도 들어갈 수가 있고 또,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그 인성의 육이 인성의 마음은 그럴 필요가 없지마는서도 그  몸이라는 이 육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입은 것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  입은 것은 다시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그런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입어서 그  변화 입은 몸은 영계도 물질계도 아무 데나 갑니다. 그 영계 갔기 때문에 '내  아버지 집에 갔다 오마' 하고서 간 그때는 변화한 그 몸을 입고서 갔다가 또,  지금 와 가지고서 변화한 몸을 입고 있지마는서도 우리 와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변화한 몸으로 입고 이래 가지고 있는데 가다가 필요할 때는 당신의  육을 우리에게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갔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그 신성만이 아니고  인성이 그때 나타나 가지고서 봤고, 그 후에도 바울이 예수님의그 인성을 몇 번  본 일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또, 그뿐 아니고 지금도 입신 가운데에 있어서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성 가지신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서 인도도 해 주시고 깨우쳐 주시기도 하고 위로도 해  주시고 하는 그런 것을 여러분들도 아마 가다가는 체험을 할란지 모를 것입니다.

체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하는 것은 죽어도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그 이 몸의 기능. 이것이 몸의 기능이 몸의 기능과 이 몸뚱이  형체가 죽었다가 살아난다 요렇게만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요걸 지금 가르쳐  줄라고 내가 이제까지 해석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도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이 우리 자체 우리 자체의 요소가 우리  자체의 요소 중에 믿어서 안 죽고 영생하는 게 있고, 그러면 우리마음의 기능은  안 죽고 영생하고. 몸의 기능은 일단 죽어 가지고 영생하는 것이 죽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죽는다는 것은 원소 속에 들어 가지고 살아서 들어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우리가 작용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고 활동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죽은 거와 같이 존재는 고대로 있지마는서도 기능적으로는 우리에게  대해서는 죽은 거와 같이 되는 것인 데 그런 것들도 다 살아난다 살아난다.

그러면 우리의 이 몸과 몸의 기능 이 예수님을 믿는 몸, 예수님을 믿는 몸의  기능 이것이 죽어도 부활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죽어도 살아난다 하는 말씀이요,  죽어서 형체는 이 원소 가운데에 들어있지마는서도 산 원소로 들어 있고, 또,  기능도 산 기능으로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때 이제 그 다시 그것이 그  삶을 뛰고서 나오게 됩니다. 그만 산 것이 산채로 나오게 됩니다.

 그때 부활할 때에 부활은 꼭 같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살려 놓은 기능이  있으니까 살려 놓은 제 기능을 제가 찾고 살려 놓은 제 기능을 제가 찾고 살려  놓은 제 형체를 제가 찾아서 자기 몸뚱이 살려 놓은 몸뚱이를 그 형체를 제가  찾아 가지고서 그때 부활합니다.

 그러면, 부활하면 우리의 몸이 죽어서 썩어서 다 원소로 어디 가서 이렇게 다  분산 됐지마는 어디까지 분산 됐지마는 이것은 벌써 하나님의 것이 됐기 때문에  죽지 안하고 썩는데 이르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면 이것이 다 다시 우리가 부활한다 그 말이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또, 이것을 입고 활동할 수 있고 그 우리의 심신의 모든 기능을 내가  가지고 활동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고 내 기관으로 도구로 쓸 수 있도록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서 부활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성경을 요것 보고 잘못 깨닫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것은 형체를 가지고 살아있다  형체를 가지고 살아있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 있는 OOOOO 교회 그 O 목사님이 그 말을 그 안 죽고 안  죽는다는 그런 말을 할 때에 한번 해 가지고서 그 말로서 전국이 떠들썩하게  야단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석이 다르고 듣는 게 달라서 그렇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뒤에 해명이 됐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하는 이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때에 산 자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산 자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우리 자체의 이 육적인 요소 우리 자체의 몸의 요소  몸의 요소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몸의 요소만 살아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만물이 다 살아난다 하는 것을 지금 말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말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 내가 살아나는 것은 내 몸뚱이 살아나는 것이 또, 있고 그 사람은  명예 살아나는 것이 있고, 지위 살아나는 것이 있고. 그 사람이 완전히  살아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자체도 살아나야 되겠고, 기절했다가도 살아나야  되겠고, 그 사람의 명예도 살아나야 되겠고. 그 사람 지위도 살아나야 되겠고,  권세도 살아나야 되겠고. 그 사람의 소유도 살아나야 되겠고, 그 사람의 기능도  살아나야 되겠고, 그 사람의 영광도 살아나야 되겠고, 그게 다 완전히 복구돼서  살아나야 완전히 살아나는 것이지 그다른 건 다 죽어 버리고 그 고기 덩어리  몸뚱이만 살아났다고 하면 그 사람 살아나도 살아난게 아니고 비참하게 될  것이라 말이오. 안 그렇겠습니까? 아, 그 사람이 완전히 살아났다 하면은 살아난  그것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다살 아나야 그 사람이 행복된 그 삶을 가진  것이지, 이제 기절했다가 기절했다가 살아났는데 살아나고 보니까 지위도 다  뺏겼진 권세도 다 뺏겼지 소유도 다 뺏겼지 지식도 다 뺏겼지 기능도 다 뺏겼지  고기덩어리는 살아 가지고 밥이나 먹고 이래 있지마는서도 아무것도 기능도 없어  그만 등신이 돼 버렸지 지식도 없지 지혜도 없지 그 사람의 지위도 없지 권세도  없지 쏵 다 없어져 버리고 다만 고기덩어리만 살아 가지고 거물거리고 있고 하면  죽는 게 낫지 살아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살겠고 한다는 이 죽어도  산다는데 대해서 믿는 자 죽어도 산다는 말은 내가 살아나면 내가 살아난 그게  속한 것이 다 살아나야 됩니다. 내가 살아나면 내게 속한 것이 다 살아나야  되고, 또, 내가 살아나면 내게 속한 것이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게 속한 것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죽어도 살고 하는 이것을 다만 육체의 부활, 육체의 기능 부활  이것만으로 여기 국한해서 이렇게 생각지를 말라 말입니다. 이것만으로 국한해서  생각지 말고 이제 우리에게 속한 거 우리가 진리와 영감대로 살아서 내가 진리와  영감대로 살 때에 내게 있는 물질도 내가 그 물질의 주인이 되는 내가 진리와  영감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살라 하니까 물질 그것도 상당히 욕을  봤습니다. 물질 그것도 상당히 욕을 봤고 또, 내게 속한 짐승도 욕을 봤고 내게  속한 지위도 욕을 봤고 권세도 욕을 봤고 모든 것이 욕을 많이 봤다 말이오.

 그러면, 나로 인해서 내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진리와 영감대로 이와 같이  살기 위해서 내 마음이 고난을 당했고, 내 몸이 고난을 당했고 내게 속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고, 내게 속한 지위나 권세나 모든 사물들이 고난을 당해서  이 고난 당해도 저리 가지 안하고 고난을 당해도 여기에 주의 공로와 진리와  영감에게 소속해서 있음으로서 어떻게 되어졌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다. 소속한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죽었으면 다시 살아난다, 또, 살아있으면 그것이 산  것으로서 영원히 역사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지금 내가 증거하기 윈해서 자꾸  사람의 영과 육과 그 소유는 한 덩어리라 하는 것을 지금 자꾸 말하는 것이 그것  때문에 거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것이 뭐 이냐? 믿는 이것이 내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가 인정하고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이요, 대속의 공로를 입고  또, 영감과 진리가 대속의 공로를 입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영감과 진리요.

또, 영감과 진리는 입은 대속의 공로를 입고 계속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영감과 진리입니다. 영감과 진리는 딴 거 하지 않습니다.

영감과 진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입히고. 또, 입고 벗지 말고  살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면. 입히는 일과 벗지 말고 계속해 살라는 그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게  '뭐이냐? 그대로 하는 것이 믿는 것이라. 이렇게 믿으면 믿는 생활을 하면은  죽은 것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믿는데 믿음으로  죽지 안한 것은 영원히 살고 믿음으로도 죽는 종류가 있다. 믿음으로 죽는  종류는 또, 다시 마지막 날에 다시 살고 죽지 않는 종류는 그대로 영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영도 이제는 그만 그거는 다시 죽지 않는 영으로 완전  구원 얻었기 때문에 영생하고 우리 마음의 기능은 마음의 기능은 믿을 때의 그  기능이 살아 가지고 그대로 낙원에 가는데 낙원에 가는데 그 믿은 기능이 그것이  낙원에 가기 전에는 장. 미결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 믿는 그 마음의 기능이  가다가 망령을 부려 가지고 믿는 기능이 이 믿는 기능을 다 버려 버리고 배반해  버리고 이거 안 믿는 믿음으로 변질되면 안 된다 그 말이오. 변질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믿음의 사람들은 그 그리스도의 것이 완전히 되어졌을 때 그때, 그만  '그리스도의 것으로 내 심신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그것이  성도들의 일편단심의 소원인 것입니다.

 왜? 그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그것이 내 마음도 내 몸의 모든 기능도  고것이 돼 가지고서 그만 그것 때문에 죽이니 살리니 해도 '죽어도 놓지 않겠다'  하고서 요와 같이 요것으로 돼 가지고 있는 고때 그만 끝이 그만 딱 나 버리면  그거는 할렐루야! 다시 마귀는 다시 못 합니다. 마귀 와 죄와 다시 그런 것들은  시험하고 힐란하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저  자꾸 이렇게 고문도 하고 고형도 하는 것은 행여나 그러다가 항복 받으려고 자꾸  이랬는데 항복 받아 예수님의 운명 딱 해 버리니까 다시는 마귀는 그만 손들고  패전해 버리고 예수님이 완전 승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믿는 생활,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성령과 진리는 딴  역사가 아니라 성경은. 진리는 뭐 하는 진리냐? 우리가 또, 피에게 순종하고  진리에 순종할라면 힘들 것입니다. 진리는 그 주님의 이 피공로 세 가지 공로 이  피공로를 네가 벗지 말아라' 하는 그 지금 우리에게 권면해 가지고 벗지 않는  방편을 말하고, 또, 입고 사는 방편을 말하는 것이 성신이 가르치는 것이요.

진리가 가르칩니다. 그 외에는 가르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를 따라 하다 보면은 예수님의 공로를 입게 됐고 영감을  따라 하다 보면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있고. 또, 진리와 영감을 배반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공로를 그만 벗게 돼 버렸고 이라니까 예수님의 공로와 진리와 영감은  하나인데 이 셋은 하나인데 이 진리와 영감은 예수님의 공로를 못 벗구로 벗지  못하게 하는 역사를 하고. 입고 사는 역사를 하는 것이 그것이 이 진리와 영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우리에게 어째 왔느냐? 진리가 우리에게 어째 왔느냐?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왔습니다. 영감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영감이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왔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인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없는 자에게는 진리가 가지 안하고 영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진리가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왔으면 그 진리가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왔는데 뭐하러 왔느냐? 온 것은 주님의 공로를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혜사가 오면 나를 증거하리라 나를 증거하리라,'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나를 증거하리라, 내 것을 가지고 말 하리라. 나를  증거하리라. 내 것을 가지고 말하리라, 그 진리 안으로 인도 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후의 요지는 뭐이냐? 우리가 진리의 인도를 따르면 내나  영감의 인도 ㄸ는 것이요, 진리 인도 ㄸ는 것보다 더 고급이 영감 인도 ㄸ는  것이니까 진리 인도를 따라서 초등 인도를 받고, 거게서 잘 따르면 그 다음에는  영감 인도를 받고, 영감 인도를 받으면 뭐 하는 것이냐? 그 받는 것은 내나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우리가 입고 벗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그 입고  살도록 하는 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자는 예수님이 어떠하신 분이시며  어떠한 그 공로를 나에게 베푸신 그 사실을 알고 그분이 이 공로를 나에게 입혀  주실 때에 이 공로를 입고 있는 것은 내 영이나 마음이나 몸이나 내 소유나 내  활동이나 내 모든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그 모든 것이 죽지 안하고 다 살아난다.

 그러면. 다니엘이 그 총리대신을 했는데 다니엘와 총리대신이 그것이 믿는 그  믿음의 총리대신인데 그는 다니엘의 총리대신은 그것은 하나님의 이 공로를  대속의 고 짐승의 피를 믿었고, 또, 그 공로를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했으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것이 된 그 다니엘의 지위요 권세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의 지위와 권세인데 그 지위와 권세가 믿었는데 그 다니엘의 지위와  권세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OOO 집사. 어? 살았어? 지금도 살아 있어? 어찌  됐어? 어찌 됐지요? 어찌 돼 있어 지금? 다니엘이 죽었으니 어찌 돼 있어?  그것도 죽었지. 뭐 뭐 그 총리대신이 살아있습니까? 죽었지. 죽었으나 그 권세는  지금 살아서 남아있습니다. 우리 사람 보기에 죽었다 그 말이오. 죽었으나  생명에 속했기 때문에 죽지 안한 영생에 속했기 때문에 영생을 그 지위와 권세가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데 어데 있는지 우리는 몰라.

죽지 않고 분명히 안 죽고 있기는 있습니다. 있는데 그 지위, 권세가 언제  살아나옵니까? 언제 살아 나와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지위와 권세  그대로 살아 가지고서 나온다 그거요. 그 지위와 그 실력이 그대로 살아 나와요.

 이러니까, 그것이 뭐 그 나라가 있다는 건 그 나라는 없으나 그 나라의 통치권  같은 거 통치의 권, 실력은 그대로 살아 가지고서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늘나라에 가면 영광이 되어지는 것이고 자기의 광채가 되어집니다. 이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세마포 옷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으면 믿으면 나뿐 아니고 내게 속한 것 모든 것까지  다 삽니다. 사는데 우리가 짤막한 육 안으로 볼 때에는 거게 죽는 것으로  보여지니까 죽는 줄 알지마는 '나를 믿는 것은 나는 부활이기 때문에 나를 믿는  것은 죽어도 살아난다. 또. 살아서 믿는 것은 영원히 않는다.' 이런데.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있는 이 모든 현상. 모든 현 상태의 이 전부 이 전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변형이 돼서 죽는 것으로 고대로 있지  안하고 죽는 것으로 변해질 때에는 변해질 때에는 그것이 없어지나 변해질  때에는 사망의 곳간에 있는 것이 생명으로 옮겨서 생명으로 옮겨서 생명 안에  있는 것이 되어져 있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데 옮긴 그것이 세상에서  그대로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살아 가지고서 영원히 역사하고 또, 죽은  것은 그것은 이 다음에 부활하고 그러면 살아 있는 것이 그대로 죽지 안하고  그대로 영계에 바로 가는 거 있고.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은 살아있다가 십 년  이십 년 얼마든지 있다가서 죽으면 죽은 것은 죽어 가지고서 다시 부활하고 하는  것인 것을 우리에게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걸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살겠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는데 죽어도 산다는 요 죽는다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본체에만 국한해서 하지 말라 본체에만 국한하지 말라 하는 그걸 말하기  위해서 지금 많은 말을 제가 했습니다.

 본체만 국한하지 말아라. 그에게 소속한 모든 것도 다 영광도 지위도 권세도  소유물도 다 그에게 속한 것은 그에게 속해서 그와 함께 이 진리를 보수하느라고  진리를 보수하느라고 진리 때문에 박해를 당해서 진리와 함께 죽은 거 진리와  함께 죽은 것은 다 그거는 죽은 게 아니라 다 부활한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알리기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없어도 진리와 함께 없어진 것,  죽어도 함께 진리와 죽은 것 그것은 진리가 죽지 안하면 그것도 죽지 않습니다.

그거는 다시 이 다음에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자유 활동할 수 있는 것으로 신령한  것으로 변화를 받기 위해서 잠깐 그것이 그대로는 혈과 육으로 안 되기 때문에  변화 받기 위해서 잠깐 예수님의 재림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지 그거는 죽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그 내 자체와 내게 소속한 모든 그 사물 그것은  죽는데 이르지 안하고 그게 진리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그대로 그만 이제는 죽은 게 활동하는 게 아니라 산 게 활동하고 살아 있는  게 활동하고 죽은 게 활동할 때는 자꾸 죽이는 일 밖에는 못 하는데 살아서  활동하니까 이거는 전부 산 일 밖에 못 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서 하루 종일 말하는데 말하는 게 저부 산  말 밖에 안 하고 살리는 말 밖에 안 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말하는데 전부  죽이는 말 죽은 말만 하게 된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살아 가지고 있는 것은 산 일만 하고 그러다가 산채로 가는 것도  있고, 살아서 얼마 일하다가 자연 죽음으로 그것이 끝날 때에는 그게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주님의 재림까지 머물러 있다가 재림 때는 다시 살아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안하니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은 없다.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은 없다.' 주님의 피와 주님의 그 피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에 속한 것은 다시는 죽음이 없다 하는 요걸 우리가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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