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면서 소경된 자

 

1987. 5. 7. 오전집회 <목>

 

본문:요한복음 9장 1절∼19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 사람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이 표적으로 고기덩어리의 병 나은 것을 이렇게 보고하는데 이 고기덩어리 병이 나은 것은 그 속에 대개는 영병 마음병이 고쳐지는 그 순간에 고기덩어리 병이 표적으로 고쳐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고기덩어리의 병이 대개는 낫지 안하고 혹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는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일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보고는 백열한 명밖에는 안 들어왔는데 제가 알기를 분명히 지금 수백 명이 여기 나았습니다. 수백 명이 나았는데 나은 것을 부끄러워 기록해 내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또 내가  말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큰딸이 와서 ‘자꾸 이렇게 그걸 여러번 말씀하시니까 이제 부끄러워서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디다. 그래 내가 있다가 ‘천한 네게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이 와서 네게 손을 대서 너를 지금 고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것이 수치냐? 그것이 수치면 귀신 하는 것은 영광스러울 것이고 그거는 수치일 것이다.’ 세상에 뭣 됐다 뭣 됐다, 우리 외손자가 미국에 하바드 대학에 입학했다고 전화를 저거는 야단을 지기고 하는데 나는 전화 대답에 암말도 안 합니다. ‘그래’ 하고 나서는 한 말도 안 합니다. 이라면 이 지금 자기딴에는 영광스러우니까 뭣이든지 말을 할 줄 아는데 거기 대해서는 아무 말을 안 합니다. 그래 내가 끝에 ‘믿음이 보배지 그런 것은 주를 위해서 가지면 괜찮지만 그렇지만 폐단되기 쉬워.’ 이랬습니다.

그런 거는 모두 자랑합니다. 자랑하지마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털끝만한 일에도 그분이 와서 했다면 그분이 크기 때문에 하신 일이야 크든지 적든지 그분이 와서 했단다는 이것이 큽니다.

옛날도 왕이 그 신하의 손목을 한번 잡았으면 그 손목을 평생 붕대를 해 가지고서 끼고 다니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안했습니다. 왜? ‘우리 왕이 내 손목을 쥐었는데 이 손목을 어떻게 내가 봉하지 안하고 이와같이 돌아다닐 수가 있느냐?’ 해서 붕대로 감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러니까 붕대 감으면 ‘왕이 손목을 잡아 준 그 신하다’ 이라니까 그것이 유풍이 돼 가지고 옛날은 토수라고 이래 손에다가 끼는 거 있는데 그 토수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그래도 어북 있다. 여기 만들어 가지고 이래 푹 끼고 다닙니다. 그게 거게서 나왔습니다.

이런데 왕이 크요 창조주 주재자 우리 주님이 큽니까? 우리 주님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한 일이면 그는 평생 그것을 자랑하고 항상 자랑해도 모자랄 터인데 어떻게 부끄러워할까? 그 부끄러워하는 것은 옛사람입니까 새사람입니까? 옛사람이라.

하필 우리 서부교회는 자궁암병 나은 사람을 자꾸 내가 ‘자궁암병 자궁암병’ 이래 쌓아니까 그 사람이 그랄 때마다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자궁이 병들은 걸 주님이 낫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자꾸 감사하면 자궁만 낫을 게 아니라 그거 그만 나중에 영광스럽고 존귀해질 터인데 한 번 말하면 ‘좀 미안하다’ 두 번 말하면 `아이고 수치스럽다' 세 번 말하면 자꾸 이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그것이 멀리 하는 것이요 가깝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짓밟는 것이요? 짓밟는 것이라. 이거 알아야 돼요.

이러니 여기 써내라 하니까 인제 보니까 백열한 명밖에는 써낸 것이 없어. 아침에 말한 대로 그런 자들은 주님을, 주님의 하시는 일은 부끄러워하고 마귀 하는 일은 좋다고, 멸망받을 무슨 어떤 선거에 당선됐으면은, 저거 남편에게 배척당해서 떨어져 나온 사람도 그 투표에 당선되고 어데 세상 권세자에게 등용당했다고 ‘나는 그전에 아무것이 아내입니다.’ 이혼을 당해 놓고도 그거 그래도 자랑해. ‘나는 그전에 아무것이 아내입니다. 아내됐던 내입니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할 줄 모르고 부끄럽게 생각합니까? 이것도 회개해야 돼요, 회개. 이거 지금은 뭐 예사로 들리지마는 주님의 심판 앞에 갈 때에 주님의 하시는 일 부끄러워한 것 그거 그때에 참 부끄러울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잘났기에 ‘아이구 예수 말하면 내게 때묻는다. 예수 말하면 내게 때묻는다. 예수가 내 병 고쳤다 하는 거 때묻는다.’ 이런 사람도 있지마는 ‘나는 주님이 내 기도 들었어. 주님이 내 감기 낫아 줬어. 주님이 내 무좀병 낫아 줬어. 주님이 낫아 줬어.’ ‘무좀 병 누구는 안 낫나? 약 한 봉지만 사 바르면 낫는데.’ ‘아니야 주님이 낫아 주셨어, 주님이.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내게 와서 나를 낫아 주셨어. 그게 크지 병나은 게 큰 게 아니라 그분이 와서 나한테 착수한 게 크지. 그분이 내게 와 가지고 착수해서 큰 병이나 작은 병이나 내게 오셔 가지고 착수해서 나를 낫아 줬어. 하나님이 나를 낫아 줬어. 내 앞에 벌로 덤비지 마.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착수하셨어. 나를 붙드셨어. 그분이 나를 알아. 알아 기어.’ 이래 가지고 뭐 교만이 나오면 나오지.

세상에 정권자의 뭣도 설설 알아 길 줄 알고 또 존귀한 줄 알면서 하나님으로는 자랑하지 않는 것, “자랑하는 자는” 뭐라 했습니까? 뭘로 자랑하라고? 돈 자랑하라고? ○목사, 뭘로? 뭘 자랑하라고? 주를 자랑하라 했어. 주 자랑.

‘주님이 이거 하셨다. 주님이 이거 하셨다.’ 주님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는 하나님과 그 사자들 앞에서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주님이 수치스럽게 여겨요. 네가 나를 수치스럽게 여겼으니까 나도 너 수치스럽게 여겨야지. 네가 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나밖에는 보배 없고 귀하고 높은 것 없고 중한 것 없다고 자랑했으니까 나도 너를 자랑해야지.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안했어? “네가 나한테 하는 대로 나도 너한테 하겠다” 뭐인지도 모르고 모두 다 살고 있어.

시간이 인제 없는데 그 병 나은 사람은 전부 다 적어내요. 내가 알아요 수백 명 나았어요. ○○○목사님, 교인 몇이 왔어? 교인 몇이 왔어? 십사 명이 왔는데 우선 세 사람 나았대요. 십사 명 왔는데 우선 세 사람, 우선 현재 나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 사람이라. 이러니까 십사 명에 세 사람이면 병 나을라 하면은 백사십 명이면 얼마야? 삼십 명. 천사백 명이면 얼마요? 삼백 명. 이 천사백 명 됩니까? 예? 얼마? 사천에서 오천? 더 될 것 같애. 더 돼. 우리 교인이 주일날 오전 출석이 사천 넘는데, 그래도 뭐 하기는 여러 칸에 앉았기는 앉았지마는 그래도 두 칸에 앉았는데 별로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니까. 더 되는 것 같애.

여게서 그 나은 사람을 비례를 하면 몇백 명 나았을 거라. 그런데 부끄러워 숨겨 놓으니까 주님이 그 사람하고 대할 때 어떻게 될란지? 어떻게 될란지? 전부 병주머니는 가져와 가지고서 치료하지도 안하고 치료하면 치료해 주는 걸 부끄러워하니까 ‘부끄러워하는 자는 네 병 가지고 평생 살아라.’ 그럴 것 아니겠소? 그거 공평 아니요? 예? 교회 이름도 안 쓰고 사람 이름도 안 쓰고 병명도 안 쓰고 요거는 살며시 숨어서 하는 그자이기 때문에 요게 얼마나 주님의 하시는 일을 부끄러워하는지? 부끄러워하거든 병을 가지라. 부끄러워하거든 그 병 가지고 네가 하든지 말든지 주님에게 무슨 상관 있어? 회개해요.

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 전지의 지혜와 전능의 능력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느라고 협동 역사한 그 협동한 수가 몇인지 손으로 표해 보십시오. 보자, 다 들었는가 보자. 저기도 들었어? 저기는 모르는가배? 둘? 그래, 일곱 다 들어요.

이것도 그 천한 것 아니라. 이거 세상에 있는 대대학 전부 다 똘똘 뭉쳐도 이것에 억억억억만분의 일의 가치도 안 돼. 내가 공연히 미친 소리인가 정상의 말인가? 어때요? 정상의 말이요 미친말이요, 어때요? 저 우리 ○박사, 한번 말씀해 봐요.

미친 말입니까? 정상의 말입니까? 정상의 말이야, 정상의 말. 미쳤다 하면 제가 미쳐서 나중에 미쳤다고 정죄받을 거라.

일곱이 가르쳐 줬는데 그 일곱이 넷은 전지 전능의 실력가들이오. 나를 알려 줄라고 역사한 그 협동 역사 중에 넷은 전지 전능 완전 영원 무궁자요. 셋은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모든 피조물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피조물인 인간 요소입니다.

이렇게 이 일곱이 들어서 나를 알렸으니까 알리신 그분들은 뭐할라고 알렸어? 그대로 되고 하라고 하기 위해서 알렸지. 이러니까 일곱 가지, 일곱이 합해서 나에게 전지 전능의 도리를 알려 주셨으니 이 알려 주신 분이 이렇게 일곱이 알려 주셨는데 넷은 굉장히 크고 셋은 피조물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이고 이러니까, 자, 이 능력이 왔으니까 배짱 있겠소 없소? 이대로 행할 때에 누가 방해하겠소? 아무도 방해할 자 없어. 아무도 방해할 자 없어. 이렇게 믿음을 만들어 들어갑니다. 믿음을 이렇게 만들어야 돼. 믿음을 만들어. 그거 공연히 잘못 만들었어요? 있는 믿음을 제가 발견한 거라. 하나도 가감이나 거짓이 없어.

퍼뜩 한번 헤아리고 갑시다. 첫째? 성부, 또? 성자, 또? 성령, 또? 진리, 이거는 전지 전능의 실력을 가진 일꾼들입니다. 이 일꾼이 나에게 알려 준 것은 나로 하여금 그대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살라고 하기 위해서 알려 줬기 때문에 내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살 때에 이 넷 능력자가 돕겠소 안 돕겠소? 이 넷 능력이 도우면 겁낼 것 있어? 못 할 것 있어? 이게 자꾸 새김질해서 믿음 만드는 거라.

또 그다음에는? 중생된 영. 중생된 영. 그거 다섯째 아니요? 또 그다음에는? 모든 선지 사도 성도들, 하나님의 성도들. 하나님의 성도들이 돕다니? 뭘로 도와요? 입으로도 도왔고, 손으로도 도왔고, 피로도 도왔고, 생명으로 도왔고, 기도로도 도왔지. ‘성도의 수많은 기도가 나에게 알리기 위해서 역사했고 알린 그대로 내가 살 때에 나를 도와서 완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다.’ 이럴 때에 성도의 기도는 그 사람의 모가치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사람이 성도의 기도를 믿지 안하고 바라지 안하면 그 사람 모가치 안 돼. 암만 저거 아버지 저거 엄마가 암만 기도해도 자녀가 믿지 안하면 안 돼. 어만 데로 가 버려, 어만 데로. 어만 데로 가. 이러니까 기도는 여기 하는데 이루어지기는 저기 이루어집니다.

또 뭐이 도와요? 만물이 도와요. 이 책장도 돕고, 공기도 돕고, 햇빛도 돕고, 공간도 지역도 돕고 전부가 다 도와. 똘똘 뭉쳐서. 이렇게 영광된 속에 권위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믿으면 제게 효력 있고 믿지 안하면 제게는 상관이 없어.

이러니까 믿어야 될 것 아니겠소? 이렇게 일곱이 협동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는데 배우기는 누가 배웁니까, 몇이 배웁니까?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배우고 있어. 이것도 구별할라면 힘들어요. 영이 듣고 있는가 마음이 듣고 있는가 뭐이 듣고 있는가 이래 가지고 혼합하기 쉬워. 똑똑히 이래 배워요.

겨자씨 비유에 씨 중에 아주 작아서 삼킬 수 있는 것은 새가 주워먹어 버리는데 뽑히지만 안하고 거게 꼭 박혀 가지고만 있으면은 얼마 안 지내서 나물이 나무가 돼 버리고, 나물이 나무가 되고 모든 공중에 기회주의자로 여게 속했다가 저게 속했다가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모든 자기를 훼방하고 핍박하고 조롱하는 대적하던 인물들이 다 발 아래 와서 절하고 거게 다 속해 가지고 자기 아니면 나 못산다고서 이렇게 소망하면서 다 소속자와 그의 것이 되고 그의 모든 소유가 되어지고 그를 찬양하는 찬양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거 과장이요? 안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대로요. 꼭 그래.

그런데 이 겨자씨가 박혀 가지고만 있으면 되는데 이 겨자씨가 박혀 있지 안하면 안 돼요. 뽑히면 안 돼. 겨자씨는 한 진리를 받은 진리라고 해도 좋고 자기라고 해도 좋습니다. 진리 받은 자기라.

진리 받은 자기인데 뿌리는 어데다 박아요? 어데다 박아요?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뿌리를 어데다 박아요? 저 뒤에 봐. 어데 박아? 요래 박는다 하는데 이거 뭐이야, 이거? 요라면 둘이지만 요라니까 열한 가지로구만. 요거 열한 가지. 열한 가지 맞았어, 열한 가지. 거게 뿌리박아요. 열한 가지.

나는 열한 가지를 근거해 가지고 나온 내라. 열한 가지는 내 뿌럭지라. 내가 뿌리박고 있는 거라. “너희들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아” 했는데 그 사랑 속에 뿌리 박으라는 그 사랑은 하나님의 열한 가지 이 구속이 사랑입니다. 알겠습니까? 우리를 택한 것도 “우리를 사랑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 그랬습니다.

끝까지 사랑 안이요 이는 생명 안이요 완전 영원 불변 영생 안입니다. 거게만 있으면 대성공이 됩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깨달은 한 진리를, 깨달은 한 진리를 이 열한 가지 구원에다가 뿌리를 박아요. 열한 가지 구원을 흡수해 가지고 열한 가지 구원을 빨아먹고 자기 하나 깨달은 그 진리가 자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를 맺어. 이해가 돼요? 깨달은 한 진리가 택함의 혜택을, 하나님 아버지 아들의 혜택을 이렇게 열한 가지 혜택을 자기가 입어. 깨달은 진리가 먹고 살아. 진리는 제가 깨달았거든. 진리 먹고 살고 저 먹고 살고 제게 있는 진리 커지고 저 커지고 진리하고 저하고 한 덩어리라. 이해가 됩니까? 과학자들은 예수 믿기 어려워. 과학자들은 하나에 하나 보태고 요 연결이 돼야 되는데 건너갈 줄 모르거든. 믿음으로 천리 만리도 떡 건너가는데 건너갈 줄 모르고 꼭 그거는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이지 수학적으로 다루고 모든 걸 눈에 봐야 되고 안 되면 뭐 몇천 배 되는 현미경이라도 꼭 봐야 그게 인정이 되지 보기 전에는 인정 안 하니까 믿음 생활 하는 데는 이거 참 소경입니다.

또 누룩 비유, 잘못된 것 하나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전부가 썩습니다. 부풀어 다 썩어요. 이러기 때문에 유월절은 무엇을 가리켜요? 유월절은 뭘 가리켜요? 유월절은 무슨 절기를 가리켜요 유월절은 우리에게 뭘 가리키고 있어요? 무교병? 유월절은 환난을 가리키고 있어요.

무슨 환난? 유월절은 성도에게 필요한 것 전부 다 막 도취할 수 있어. 뭐이든지 달라 하면 다 줘요. 유월절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 소원대로 다 잡아 취할 수 있는 것이 유월절이오. 모든 원수를 다 복수해서 딱 굴복시키는 것이 유월절이오.

완전 자유 해방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는 환난인데 이스라엘에게는 큰 수입이요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틀려요? 성도에게 오는 모든 환난은 그게 다 유월절입니다. 성도에게 오는 온갖 환난은 성도들을 완전히 해방시켜서 자유시키기 위해서 오는 환난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 환난 때에 굉장한 보 배를 수입합니다.

주남선 목사님, 얼마나 못났든지 교회 다른 데 뭐 이동해 갈 데도 없고 항상 거창읍교회서 집사 하다가 장로 하다가 조사 하다가 목사 하다가 그 교회서 순교하고 마지막 죽고 말았어요. 평양신학교를 구 년 걸려서 했어. 누가 뭐 주남선 목사를, 주남고 목사인데 주남고 목사라 하면은 아무도 알아 주지를 안했어요.

이랬는데 이 어른이 유월절에 담뿍 수입을 해 버렸어. 유월절에 수입을 해 버렸고 유월절에 출세를 해 버렸어, 유월절에. 유월절에 출세했어요? 무슨 유월절이요? 신사참배 유월절에 출세했어요. 그때 부자가 됐어. 그때 해방이 되고 자유가 됐어.

멸시 천대에서 해방되고 영광과 존귀의 사람으로서 자유했어. 알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오는 환난은 전부 유월절 환난입니다. 유월절 환난 요거 알아요. 유월절 환난에 금한 게 뭐라요? 누룩. 누룩 금했어요. 누룩 있으면 죽어버리요. 누룩 있는 떡 먹으면 죽어버리요. 누룩을 싹 제해야 돼요. 누룩은 부풀게 하거든. 벌어지게 하거든. 불화 불목하게 하거든. 자꾸 속화시키요.

속화시키는 그것이 누룩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누룩을 없애야 된다,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된다 그말은 무엇이든지 틈이 있으면 안돼요, 틈이 있으면. 성도와 성도 사이에도 틈이 있으면 안 되고 성도와 하나님과 그 사이에도 틈이 있으면 안 돼. 틈이 없어야 돼요.

유월절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양피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무교병 먹어야 되요.

거게 해석을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을 터이니까 이럴 때에 성도에게 환난이 오면 양피만 하면은 장자 재앙이고 뭐이고 아무 재앙도 안 받아요. 다 평안이요 피난이라. 성도에게는 환난이 오거든 예수님의 열한 가지 구속 요 속으로 쏙 들어가서 거게서 숨어 앉았고 내놓기는 열한 가지 구속만  내놔요.

이라면 장자 재앙은 전멸 재앙인데, 장자 멸하니까  차자가 장자 되니까 또 차자 멸하고. 삼자가 장자 되니까 멸하고 전멸 재앙이라. 장자 재앙은 전멸 재앙이라는 그런 뜻을 가진 것입니다. 이랬는데 피 속에만 들어앉았으면 아무 일 없거든.

예수님의 대속 속에만 들어앉았으면 아무 일 없어. 열한 가지 구속 속에 들어앉고 나타낸 것은 열한 가지 구속이라. 밖에도 벽에도 전부, 말에도 열한 가지 구속, 행동도 열한 가지 구속, 주장도 열한 가지 구속, 거처도 열한 가지 구속, 그때 열한 가지 구속이 참 보배롭게 효력을 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누룩 있으면 안 돼. 큰일 나요, 누룩 있으면.

그래서 이기선 목사님이 순교하신 것 같은데 그분이 이북에 있으면서 그 제자들에게, ‘인민군이 들어와 가지고 이와같이 지금 설치고 있으니 자꾸 죽이고 박해를 주고 이라는데 이 환난을 이기는 비결이 뭐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그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더래요. ‘환난을 이기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사랑밖에 없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 사랑하는 것이니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자기 사랑만 하면은 모든 환난은 다 승리한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 그 어른 바로 깨달았어요.

이래서 그들이, 이들이 자꾸 우리를 죽이고 해하고 이라니까 그때에 당면된 것이 그 인민군들 공산주의자들이 이게 참 해를 하니까 미워 안 할 수 없는데 공산주의를 안 미워할라고 사랑할라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사랑할라고, 사랑할라고 애를 쓰니까 그 싸움 하다 보니까 공산주의는 뭐 옆에 있거나 말았거나 그거 상관도 없고 아예 지금 사랑할라고 애를 쓰고 거기만 지금 씨름하다 보니까 공산주의 와서 뭐 박해 주는 그까짓 거는 소분지더래요. 그래 가지고 성도들이 거기 다 승리하고 옮겨 필요한 사람은 다 월남시키고 그래 가지고 여기서 다 구원 준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데 자, 여게서 알려 준 것이 일곱이 알려 줬고 둘에게 알려 줬는데 요한복음 9장에서도 여게서 오전에 알려 준 것 있습니다. 알려 준 것, 우리에게 알려 준 것 이 진리를 깨달아서 알려 준 것 있어요. 알려 줬는데 제일 처음에 뭐 알려 줬습니까? 알려 준 것은 교리와 신조가 되겠는데 그거는 제 교리와 신조로 정하든지 말든지 그거는 자유요. 자유인데, 뭐 하나 배웠어? 나면서 눈먼 소경, 나면서 눈먼 소경, 또 ‘뉘 죄니이까?’ 그것 배웠고, 또 진흙 발라서 물에 씻고 오니까 나았고 그거 배우지 안했어? 배웠는데 여게 대해서 해석은 구구합니다. 뭐 주석에 별별 해석들이 다 많이 있습니다. 있는데 누구에게 배우든지 어데 배우든지 여러분들이 배우는 것은 성경을 배우면 자기 깨달음이 되는데 그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달은 그 사람의 금생 내생, 영육, 그 생사화복 흥망성쇠가 그 깨달음 거게 매였습니다. 바로 깨달으면 금생 내생 다 살고 성공하고 평안하고 부강해지고 그 잘못 알면 다 금생도 사망 내세도 사망, 금생도 빈궁 내세도 빈궁 그렇습니다. 자, 이 말 맞아요 안 맞아요? 되나 안 되나 맞다 할 게 아니라 정말로 맞아요? 그래, 맞습니다.

잘못 깨달으면 그 사람은 잘못 깨달은 대로 그대로 살아야지. 바로 깨달으면 바로 깨달은 대로 살아야지.

잘못 사는 것은 세상이 동무가 많아서 협동이 많지마는 바로 깨달아 살라 하면 바로 깨달은 사람이 적기 때문에  고독의 걸음입니다. 고독의 걸음. 방해하는 자가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실패보다 성공이 어려워. 성공보다 실패가 쉬워.

그러면 여게서 이 성경 해석을 아무나따나 자, 성경 해석을 할 때에 소리를 윤창하게 해서 소리를 윤창하게 이 성경 해석을 소리를 아주 피아노 소리 또 이거 뭐 바이올린 소리 모양으로 앵앵앵앵앵 요렇게 잘 아주 아름답게 말이요, 아름답게 요렇게 정서와 곡을 넣어서 그렇게 가르쳐 주는 그 소리에 가치를 둘랍니까? 위엄스럽게 말하는 거게 가치를 둘랍니까? 또 찬란하게 화려하게 아주 화려한 문체로 발표해서 고등술어, 아주 세상이 고귀하게 여기는 철학 술어, 모두 다 세상에 종교 가운데 있는 이상한 종교 술어, 이 과학 술어, 모든 문학자들의 그 문학 술어 거게다가 가치를 둘랍니까 옳은 깨달음에 옳은 가치, 삐뚤어진 깨달음에 삐뚤어진 가치 거게다 가치를  둘랍니까? 가치를 어데다 둬요? 옳은 데다 둬요? 그러면 이거 나면서 눈먼 자라 하는 이것을 가르칠 때에 그러면 옳은 데 두면은, 옳은 데다 두면은 나면서 눈먼 것을 가르치는데 가르치기를 말이지요 ‘아아아아아 이이이에에 이이에에 이에에 이거다.’ 이래도 좋다 말이요? 그래 말해도 옳으면 좋다 말이요? 그래 말해도 옳으면 좋아? 아주 문체 내 가지고 아 이렇고 이렇고 이리 저리 이리 저리 이렇게 아주 문장 있게 이렇게 해도 삐뚤어지면 싫어요? 왜? 뭣 때문에?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거기다가 바쳐 살 길이기 때문에 벙어리 반벙어리같이 해도 옳게 바르게만 말해 주면 그것이 가치 있지 오만 문체 다 둘러 엄쳐놔도 삐뚤어지게 가르치면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삐뚤어지게 써서 남은 여생이 삐뚤어지니까 금생 내세 영원이 멸망받기 때문에 거게는 가치가 옳고 바른 것이 가치지 문체나 문장이 그런 것이 가치가 아닙니다. 맞아요? 이거 또 백 목사 변명 같지마는 백 목사는 무식해요. 국민학교 오학년 하다가 말았어요. 이래 놓으니까 뭐 말도 옳게 못 해요, 무식해서. 이러니까 누가 있다가 한번 보고, 공과를 뭐 총공회에서 나온 공과를 가르치는데 그 공과를 가르치는데 요새 자꾸 유행하는 말 내가 알아야지요? 말을 몰라서 ‘나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이라니까 ‘에이고 이 말도 모르니 거기 배울 것이 뭐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 사람 그만 내가 표준어 안 쓴다고 무식하다고 그만 도망쳐 버렸어.

그래 가지고 딴데 가서 목사가 돼 가지고 나중에 우리 진영 교회에 올라고 그렇게 애를 쓰고 올라 해도 ‘오너라. 오너라.’ 오는데 교회를 맡겨 줄라 해도 배척을 당해서 거기서 견디지를 못하니 교회 맡겨 주지 못하지, 또 이 복음으로 그라면 네가 전도 개척교회 한번 해 보라 이라니까 적이 많으니까 이 복음 가지고 개척 할라 하면 안 됩니다. 적이 많으니 안 돼요, 이거는 참. 그걸 초월한 실력이 있어야 개척 척척 하지 그리 안 하면 안 돼. 가는 곳마다 이단으로 정죄받는데 어짤 거라? 저 진해에 개척교회 하나 세웠는데 그 개척교회 세운 지 얼마 됐어? 그 진해 조사 여기 왔나? 사 개월? 사 개월 됐다는데 벌써 거게서 뭐 별파니 백파니 이단이니 어짜니 이래 쌓는데 그래 가지고서 뭐 찾아와 가지고, 왜 하필 개척해도 그런 교회 하느냐고, 우리 개척하면 우리가 돈 대 주고 다 하겠다고 이래 쌓고 훼방을 받는데도 그래도 거기 세우니까 벌써 사개월인데 주일학생은 뭐 얼마라 하더라? 얼마? 백칠십구 명. 장년반은? 장년반? 삼십 명. 사 개월에 그만하면 됐지.

그래 놓으니까 뭐 막 교회들이 야단이더래요. 야단이라. 부흥이 났어. 햐, 저거 지금 사 개월인데 주일학생이 백칠십이나 되지 장년반이 삼십여 명 되지 우리는 오래까지 있어도 찍해야 한 오륙십 명 사오십 명 백 명 미만이니까 저거 좀 있으면 다 차지하고 큰일나겠다 이래 가지고서 아예 가지 말라고 단합도 하고 운동도 하고 자꾸 그란대요. ‘거기 보내지 마라. 이단이다 가지 마라. 너거 가지 마라.’ 자꾸 이라는데 사람의 마음과 활동계의 심리계를 주권하고 계시는 분이 누구라요? 주님이 주권하고 계셔. 이라니까 이래 쌓아니까 ‘대끼 이놈들’ 어쨌든간에 마음을 빽 트니까 자꾸 온대요. 활동을 주님이 주관하셔 가지고 ‘요리 가라’ 하니까 집도 없는데 끼역끼역 들어온대요.

이렇게 바로 깨달아 가는 길은 이렇게 고독합니다. 이렇게 어렵습니다. 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이 깨달음이라는 교리와 신조를 가지는 것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내가 그런 사람 많이 더러 봤어. ‘진리는 여기서 배우고 능력은 거게서 얻고 여게 저게 어데든지 내게 필요하고 내 비위에 맞은 것만 출출 추려 가지고 그래 가지고 설교하고 목회해야 된다’ 이 말 하고, 또 그보다 나은 사람들은, 이거 상품으로 팔아서 교인들이 쭉쭉 돈도 내고 쭐쭐 따라올 수 있는 잘 세월나는 것 이것을 생각하고 그런 것을 생각해서 ‘어데로 가서 그런 것을 받을꼬?’ 이래 가지고 방송 설교가 그 방편이라 하니까 또 방송 설교가 한꺼번에는 어떻게 나왔는지? 요새는 또 테이프를 노려 가지고 테이프 선전으로 또 하는 것이 어떻게 유행이 돼 가지고 있는지? 모두 다 이 교리외 신조를 어떻게 팔아야 돈벌이가 될꼬 어느 교리를 가지고 와야 팔아야 손님들이 많겠느냐 이렇게만 생각하지 이 교리와 신조는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칠 길이다. 내 여생을 바칠 길이다. 얼마 남지 안한 남은 여생 이걸 바칠 길인데 잘못 바치면 다시 찾지 못한다. 내가 어디다가 바쳐야 되느냐?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칠 길로 알고 이렇게 참 두려워하면서 ‘잘못되면 전멸된다’ 이미 늙기는 늙고 이미 죽기는 죽는 건데 바로 알면 바로 살아 늙어지고 바로 살아 죽어지는데, 없어지는데 이거 잘못 알아서 다 늙어지고 없어지니 맛잃은 소금으로 없어지면 이거 기찬다. 이래서 교리 신조를 아주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중히 여겨서 이 가치를 깨닫고 정하는 사람도 있고 예사롭게 정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교리와 신조를 자기 소유나, 소유라면 자기 물질도 소유겠고 자기 가정도 소유겠고 다 자기 가진 것인데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보다 귀하다는 이 사실의 가치를 알고 이렇게 평가하고 교리와 신조를 찾고 돌아다니면서 이는 내가 바칠 만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리와 신조를 작정하는 사람 나는 많이 보지를 못했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지금 여게 와서 지금 배웠으니 어짤랍니까? 교리와 신조는 자기 몸과 생명보다 귀합니까 천합니까? 귀하면 교리와 신조 위해서 몸과 생명 바칠 수 있지. 몸하고 생명하고 교리 신조하고 둘이 이렇게 엇비겨 서서 둘 중에 하나를 취할 때에 ‘교리와 신조를 네가 네것 만들래 네 몸과 생명을 네것 만들래? 둘 중에 하나 만들어야 되지 양쪽 다 만들 수는 없다. 교리와 신조를 네가 네것 만들든지 네 몸뚱이와 네 생명을 네것 만들든지 둘 중에 어느 것이든지 하나 택하라.’ 할 때에 자, 여러분들이 지금 자기 교리로 자기 신조로 삼고 있는 것은 교리와 신조를 잡을랍니까 몸과 생명을 잡을랍니까? 몸과 생명 잡을 사람 손 들어 보소. 몸과 생명을, ‘교리와 신조 그까짓 거야 뭐 그거 성경에 기록한 짜다라 말인데’ 몸과 생명을 붙들겠다는 사람 하나도 없네. 그라면 교리와 신조가 낫다 말이요? 그라면 하나님 앞에 우리 작정합시다. 그러면 교리와 신조 둘 몸과 생명과 서로 대립이 되어 있을 때에 둘 중에 하나밖에는 택하지 못할 때에 나는 교리와 신조를 잡고 몸과 생명을 눈물로 내놓겠다. 아깝지마는 몸과 생명은 내놓고 교리와 신조는 내 줄 수 없어서 교리와 신조를 나는 끝끝내 내것 삼고 붙들겠다 이렇게 단정 지운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 좋아할 거라. 주님 좋아해. 주님 이 집회 분명히 좋아해요. 이러니까 이 진리를 깨닫고 놓지 안하면 병 다 나아. 영병도 낫고 마음병도 낫고 몸병도 낫고 사람병은 완전이 나아서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모형이 꼭 다 되고야 말 거야.

자, 그러면 여게 나면서 눈먼 자를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많은데 여러가지로 해석하는 것 많은데 그거 해석하는 그거는 말할 시간 없고 많은데 그러면 여게서 해석하는 것은 나면서 눈먼 이것은 하나의 표적의 기관들이니 이 나면서 눈먼 것은 타락한 전인류의 심령이 소경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소경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 우리가 눈이 또록또록 떠 있는데 우리가 소경이라?’ 주님이 “네가 보지 못했으면 죄가 없을 터인데 본다 함으로” 뭐라 했어? “죄가 그저 있느니라” 했거든.

여게서 깨달아 가르치는 것은 눈이 먼 것은 제일 크신 하나님 보는 눈이 없어.

여러분들 예수 믿기 전에 있었어요? 예수님 믿기 전에 하나님 보는 눈이 있었어? 소경이지.

자, 제일 크신 하나님 보는 눈도 감겼지, 또 진리 보는 눈도 감겼지, 지옥 보는 눈도 감겼지, 천국 보는 눈도 감겼지,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대속의 지극히 큰 이 대속의 공로를 보는 눈도 감겼지, 심판 보는 눈도 감겼지, 죽을 생명만 보지 영생하는 생명 보는 눈은 떴어요? 저 ○양? 영생 보는 영생을 보는 눈은 감겼어 떴어? 감겼어? 감겼어. 이 말 맞아요 안 맞아요? 나면서 눈멀었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참은 전부 못 봅니다. 거짓 것만 봅니다. 망할 것만 보고 영존할 것은 못 봅니다. 복있는 거는 못 보고 화있는 것만 봅니다. 화를 복이라요.

자멸을 자꾸 하면서 그게 산대요.

‘너 몇 살 살았나?’ `팔십 년 살았다.' ‘팔십 년 살았으니까 엔간히 살아 모두어 놨으니까 산 게 많으러구나.’ 팔십 년 살았으니까 살아 놓은 게 무더기가 커져요 없어요? 산 것이 많아져요 적어져요? 자꾸 적어져. ‘그러면 산다 하는 게 내나 죽는 일 했구먼.’ 안 그렇소? 산다 했는데 자꾸 하루 살고 나니까 하루 생명이 끊어지지 팔십 년 사니까 팔십 년 산 게 전부 생명이 다 끊어져 버리고 없어져 버렸지, 이래 그 산 것 같으면 자꾸 자라갈 건데. 안 그래요? 산 것 같으면 자꾸 자라가고 커질 터인데 자꾸 이거는 없어져. 하루 살면 그만치 줄어지지 일 년 살면 줄어지지 이러니까 이것은 사망인데 이것을 생명으로 보니까 참 하루 살면 그만치 커지고 천 년 살면 그만치 커지고 만 년 살면 그만치 커지고 자꾸 커져가는 이 참 생명은 보는 눈이 뜨였어요 감겼어요? 감겼어.

그래, 나면서 눈먼 요것은 인류들이 타락한 이후에는 참은, 완전은, 실상은, 좋은 것은, 바로 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 꺼꾸로 본다. 죽고 망하는 것만 볼 줄 알지 살고 좋은 것은 하나도 못 본다. 좋은 것 보는 눈은, 바로 보는 눈은, 보배를 보는 눈은 다 감겨서 봉사가 돼서 모른다. 나면서 눈먼 자는 이것을 하나의 표시한 표적으로 이렇게 됐다. 이 교리 맞아요 안 맞아요? 생명 바칠 수 있어요?

그러면 이는 저거 아버지 죄값입니까, 제 부모 죄값입니까 제 죄값입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뭐이 삐뚤어져 가지고 이래 됐습니까 이러니까, 그 사람들은 모두 부모 죄 아니면 제 죄, 제 죄 아니면 부모 죄 이 삐뚤어져 가지고 이래 된 줄로 이래 알았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저거 아버지 삐뚤어진 것이 원인도 아니고 제가 삐뚤어진 것이 아니고 원인이 딴데 있다” 깨달아져요? 이렇게 못 보게 된, 못 보게 된 이 원인, 못 보게 된 이 원인은 뭐 본인이 삐뚤어지고 선조가 삐뚤어지고 뭐이 삐뚤어져 그런 것 아니다. 아니기는 타락은 선조 아담 하와가 선악과 먹어 그런데 뭐 그거는, 그러니까 저거 선조가 잘못해 가지고 그렇다 그래야 되지, 부모의 죄 선조 죄도 아니다, 선조의 삐뚤어진 것도 아니다 이래 놨으니까, 자, 이제 모든 나면서 눈먼 사람은 모든 사람의 타락 후에 이와같이 다 어두워졌다 하는 이것을 요 말씀이 부모의 죄값이라 하면 딱 들어맞겠는데 부모의 죄도 아니다 부모의 삐뚤어진 것도 아니다 해 놨으니까 요거 처음에 전인류가 다 소경으로 났다 하는 요 해석이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아요? 이 문제지.

벌로 맞다고 하지 말아요. 밖에는 악령들이 굉장한 눈독 올려 가지고 지금 어데 틀렸는가 싶어서 마구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게서 가르치는 교리와 신조가 성경대로가 아니면 굉장한 정죄가 옵니다, 여러분들. 이걸 생각하고 하지 그래 아무나따나 자꾸 말하는 줄 알아요? 나는 재미 있어요. 온 전국에 ‘백 목사는 이단자라’ 이래 소문이 나 놔서 또, 또 백파라 이렇게 소문이 나 놔서 이래서 자꾸 어데 틀렸나 이래 가지고 지금 트래기 뜯을 게 없는가 싶어서 자꾸 지금 먼지도 털어보고 자꾸 이래 털어보고 이래 쌓아니까 내게 뭐 틀린 것만 있으면 그저 하나도 숨어 있지 안하고 재빡재빡 들어서 이래 드러내 주니까 참 복있는 사람이라, 내가 복있는 사람. 틀린 거는 하나도 숨김 없이 낱낱이 다 드러내 줄 터이니까 그 복있지 않소? 그거 복입니까 화입니까? 그거 복으로 보는 눈은 또 밝은 눈인데 화로 보는 눈은 그거 잘못 본 눈이라. 내나 소경 눈이라, 소경.

그래. “제 부모의 죄나 제 죄가 아니다” 거게서 그들은 죄관이 틀렸다, 삐뚤어진 관이 틀렸다. 삐뚤어진 관이 틀렸다. 그들은 제 죄나 부모 죄나 둘 죄 중에 하나 죄라 이랬으니까 죄에 대해서 보는 죄관이 발랐소 틀렸소? 예수님이 틀렸다고 하지 안했소? 아니라 했거든. 거게서 또 그 뿌스러기를 우리가 가지고 우리를 살려 줘요. 하나도 뿌스러기도 헛된 게 없습니다.

거게서 너희 인생들은 죄관을 모른다. 삐뚤어진 관을 모른다. 너는 옳은 것도 모르고 삐뚤어진 것도 몰라. 뭐이 삐뚤어진 건지 몰라. 왜? 삐뚤어진 것만 다 가지고 있는데 삐뚤어진 것 몰라? 삐뚤어진 걸 가지고 있으면서 그게 옳다 하기 때문에 삐뚤어진 걸 모르는 것이지. 알겠어? 알겠어? 전부 삐뚤어진 것만 가지고 삐뚤어진 것에 부자지마는 그걸 옳다고 하기 때문에 삐뚤어진 걸 못 보는 거라. 인생은 옳고 삐뚤어진 것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하는 것을 거게서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죄도 제 죄도 아니다. 아담 하와의 실족으로 된 것이 원인도 아니다. 네가 잘못함으로 이렇게 인간이 어두워진 것도 원인은 아니다. 선조의 원인도 아니고 본인의 원인도 아니고 깜깜하게 모르게 된 원인 소경된 원인은 선조의 잘못도 원인이 아니고 본인의 잘못도 원인이 아니고, 그러면 원인이 뭐라 말이요? 원인이 뭐라 말이요? 거기 뭐라 했소? 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여게는 뭣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인류 타락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인류 타락을 어떻게 보고 있소? 인류 타락이 원인이 아니라 제가 잘못해 타락한 게 아니라 타락하게 했기 때문에 타락이야.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 전의 뜻이 뭐이야? 선택, 당신의 목적이라.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했는데 타락도 예정이요 구속도 예정이요 회개도 예정이요 다 예정이라. 이렇게 인간이 깜깜하게 모르게 완전히 어두워진 인간 타락도 그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 원인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원인이다.

하나님의 목적 달성하려는 그것이 원인이다. 맞아요 안 맞아요? 맞아요 안 맞아요? 생명 바칠 만해요? 예사롭게 아무나따나, 맞으나 안 맞으나,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아니야. 우리는 자기 교리와 신조는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칠 길이기 때문에 그보다도 가치 있어서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이미 거기다가 바쳐 가지고 완전을 이룰 수 있는 그 길이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소유와 몸과 생명과 남은 여생을 망치느냐 흥하느냐 멸망을 시키느냐 존영하게 하느냐 이게 그 교리와 신조에 달렸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이걸 누가 말해도 예 그대로 듣지요. 그대로 믿지요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 교리 신조의 이 권위성과 그 결과성과 중요성을 깨닫고 자기가 알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옳은 깨달음을 가질라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의 온전하고, 선하시고 기뻐하고 온전한 뜻을 구별할라고 하면은 어떻게 해야 돼요? 몸으로 산 제사 드려야 돼. 살아 있으나 완전히 ‘이제는 당신이 옳은 깨달음, 하나님의 그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알려 주면 그대로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은 바쳐서, 남김없이 바쳐서 그대로 완전히 바쳐서 걸어가겠습니다. 인도 깨닫게 해 주신 대로 그대로 바쳐서 살아가겠습니다.’ 요게 있어야 옳고 바른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맞아요? 이라는데, 자기가 교리 신조는 ‘요래야 내게 인기가 올라가겠나? 요래야 우리 교회에 티뜯는 장로 있는 데는 가 가지고서 요래야 되겠나 조래야 되겠나? 돈 많은 이 집사 있는 데는 내가 요래 해야 그 사람이 좋아서 돈 뭉텅이도 주고 모든 것 다 이렇게 바치고 이래 하겠느냐? 어째야 좀 값을 많이 받고 팔까?’ 하는 그런 마음 가지고 하면은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찾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자기 전부를, 산 제물이라 하는 것은 살기는 살아 있는데 제물은 제 주관이라 하는 거는 없어. 완전히 제 주관은 완전히 죽여버려야 제물이 돼요. 자기 주관은 완전히 죽이고 당신의 뜻에 따라서 동하고 정하겠습니다 하는 요것부터 있어야 하나님의 주시는 올바른 교리와 신조를 받을 수 있지 그거 없으면 안 됩니다. 이 주의가 받아서 가질 만한 주의요 공연히 풋장난이요? 어떻소? 풋장난이라? 이렇게 교리 선정을 산 제물로 자기를 바쳐 놓은 지 후라야 옳은 교리와 신조를 제가 받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지 공산주의 올까 싶어서 저 미국으로 도피해 가지고 시민권은 거기 두고서 오늘도 꽝 그러면 ‘나는 미국 사람이요’ 하고서 날아갈라고 이렇게 생명을 아끼는 자가 진리를 알아? 또 이것도 또 선전포고니까 또 총맞을 거라. ‘저놈의 새끼 죽여버리면 좋겠다.’ 내가 있으니까, 오래 됐어. ‘선교사가 와서 찾습니다’ 이래. 그래 내가 있다가 ‘나는 아는 선교사가 없는데. 선교사 이름이 뭐이야?’ 이라니까 무슨 선교사라 하는데 그뭐 영어로 하니까 나는 모르겠어. 무슨 선교사라 이래요. ‘그 사람이 나를 찾을 게 없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 사람을 모르는데 나 찾을 게 없는데' 우리 서부교회 교인으로 있던 분이 미국 선교사가 돼 가지고 나왔어요. 그래 ‘아무것입니다’ 이러기에 ‘그래요? 그라면 나는 우리 교인으로 내가 지금 영접하고 대면하지 나는 미국 사람 선교사로는 나가서 면접하지 않습니다.’ 그래 나가서 면접했어요. 면접하고 ‘집사님 평안하십니까?’ 이러니까, 목사 됐대.

‘목사님 평안하십니까?' 그래 인사하고 뭐 무슨 선교사 말하기 때문에 선교사는 내가 알 것 없고 그저 목사님으로만 내가 대우해서 서로 만났지요. 지금도 미국 계셔요.

여러분들 눈을 떠서 보면 알아, 눈을 떠서 보면 알아. 절대로 생명과 소유와 몸을 내놓지 안한 자는 하나님의 진리는 알지를 못합니다. 그자가 그게 아까와서 암만 하나님이 진리를 가르쳐 줘 봤자 그렇게 안 살 자인데, 그렇게 살지 안할 자인데, 이것은 다 내놔야 살지 그리 안 하면 못 사는데 내놓지 안할 자에게 하나님께서 백지 떡 줄 사람은 시장도 않는데 김치국 마신다고 그 사람은 순종할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백지 이래라 저래라 가르쳐 주는 그런 바보 하나님 아니오. 그렇게 헛점을 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해가 됩니까? 다는 아니고 선교로 간 분도 있어요. ○○○목사님이라고 그분은 가서 하는데 여게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너는 가 가지고 거기서 이 도리를 전해라 해 가지고 거게 갔는데 지금 교회를 상당히 큰 교회로 매우 큰 교회를 시무한대요.

그래, 우리 ○○○목사도 안 갈라고 하는 것을 센트루이스 교회에 보냈어요. 또 우리 떡 거게서 보내는 또 뭐꼬? ○○○목사는 또 엉뚱이같이 한국 나온다고 또 한국 나와서 복음 전한다고 나온다 하는데 아직까지 직접 만나서 아무 의논은 못 해 봤어요.

오늘 오전에 전도사 인허한 그분은 이제 한국 와서 일할 수 있지만 거게서 이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으로서 그래 전도사 인허를 했습니다. 나는 그분에 대해 실력은 몰라요. 그러나 아는 목사님의 그 소개로서 거게서 일을 꽤 열심히 한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인허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까지 하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성경 보고 자기 교리로 삼는다 말은 성경이 이렇게 살라고 가르친다 하는 그 깨달음을 작정할 때는 생명 바칠 길이기 때문에 그것을 예사롭게 알고 아무나따나 작정하는 것 아닙니다.

요것부터 회개를 해야 됩니다. 요것 모두 회개 안 하기 때문에 요것부터 회개를 해야 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천인 만인이 교리를 이렇게 말한다 이라는데 그거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 한다 저 사람은 저래 한다 할 수 있어요. ‘너는?’ `나는 요렇게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칠 내 길은 요 길이다’ 그거 없으면 죽은 자.

나는 형편에 따라서 이렇게 살아 좋을 때는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 좋을 때는 저렇게 살아서 팔방미인 창기의 인격 창기 신앙으로서 이 남자 닥치면 이 남자도 오케이 저 남자 닥치면 저 남자도 좋다 이래 하는 그런 신앙으로서 그렇게 사는 자는 성도는 아니라.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여인이지 성도는 아니라.

이런고로 지금 내가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들 어짜든지 자기가 성경 깨닫는 것을 예사로 깨달으면 안 됩니다. ‘그 깨달음이 멋이 있다. 이상한 말 한다. 이상한 말이다. 재미 있는 말이다. 듣기 좋은 말이다. 묘한 말이다. 이러니까 나는 그 교리와 신조를 따르겠다.’ 이거 가짜배기입니까 진짜배기입니까? 이거 가짜배기요 진짜배기요? 이거 가짜배기입니까 진짜배기입니까? 좀 생기 있게 좀 말해 봐요. 진짜요 가짜요? 가짜라, 가짜. 그거는 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요.

마지막에 가라지 다 불에 태우는 거게 다 들어가. 나쁜 것은 풀무불에 태운다고 그물 속에 같이 있었지마는 다 그런 축이 되고 말아요.

왜 이미 살고 가는데 그렇게 살 필요가 뭐 있겠소? 아무래도 한번 죽는데. 한번 떠나야 되는데.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해와 같이 빛나리라” 했는데, 가라지는 이렇게 풀무불에 던지고 그렇게 조롱 훼방받는 자는 “자기 아버지의 집” 이제 세월났어. 만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자꾸 이래 쌓더니마는 이제는 때가 만났어.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평생 욕 얻어먹는 아버지의 집, 평생 훼방받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집 말한다고 자꾸 세상이 미워하거든. 이랬는데 이제는 “자기 아버지 집에서” 그렇게 주 박혀서 숨도 못 쉬고 처박혀서 아무데도 나타나지 못했는데 이제는 해와 같이 둥그럿이 빛납니다. 이 날이 소망됩니까? 이 날이 소망됩니까? 여게도 소망돼요? 안 해 봤자 불쌍해요. 그것이 사람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거 아버지의 부모의 죄도 아니요 제 죄도 아니라 이렇게 눈먼 이것은,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전인류들이 참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이 심령의 소경된, 다시 말하면 영감 없는 인간들이 된 것은, 영감 없는 인간들이 된 것은 좁게 말하면 하와가 선악과 먹은 그것으로 보지마는 그게 원인 아니다. 그게 원인 아니다.

인간이 선악과 먹은 범죄로 말미암아 이와같이 인간에게 영감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떨어지고 하는 그것이 원인은 아니다. 그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는 것이 원인이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곧 하나님의 목적을 정하시고 하나님 목적 정하시고 택하신 그것이 원인이다. 타락도 그것이 원인이고 구속도 그것이 원인이고 거게서부터 다 시작해 나와 가지고 타락도 구속도 이루어진 것이지 거게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라고 생각지 말아라. 광대하신 아버지의 영원 전부터의 그 목적하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존재도 있고 모든 순서도 이렇게 모두 다 진행되고 있다. 요것을 여게서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공연히 예예 하지 말고 생명 바칠 수 있어요? ‘이거는 정확하다. 앞으로 온 세상이 다 달라드는 이 다 달라들어도 길바닥 씨가 안 될란다.’ 길바닥 씨가 안 될라요? 이 교리가 길바닥 씨가 안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의 말, 인간들의 학설, 인간들의 주장, 인간들의 모든 공통 단합, 세상 모든 문화 지식 그것들이 다 달라들어도 변동 없어요? 제가 빠사지고 깨져도 변동 없어요? 온 세상이 다 절단나도 변동 없어요? 그라면 옥토에 뿌린 씨 되지, 옥토에 뿌린 씨.

기독교는 절대 논리의 도입니다. 절대 논리의 도요. 논리 없는 기독교는 없어.

절대 논리의 도요. 논리해 가지고 논리에 맞아야 됩니다. 또 실상의 도입니다, 실상의 도. 실상이 이루어져야 되고 실상이지 실상 없는 그거 공연히 말뿐으로서 그렇게 바람 지나가듯이 가는 그런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전부가 참이요 참이요 참이요, 기독교는 참이요 참이요 참이라.

말도 참이요 주장도 참이요 듣는 것도 참으로 들어야 되고 행하는 것도 참으로 해야 되고 전부 참 참 참 참뿐이라. 참뿐이라. 재료도 방편도 이루어진 결과도 전부가 참이라. 맞습니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의 광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하나님 자존하신 그다음의 일로서 모든 걸 이루는 영원하신 이 하나님의 구속의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런 모든 것들이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만일 원인이 여게 있지 안하고 하와의 타락이 그 원인 중에 원인으로서 그게 제일 원인이 됐다고 하면은, 원인이 됐다고 하면 우리 구원은 어때요? 우리 구원은 가치가 있어요 없어요? 우리 구원은 가다가 또 뭣 될지 몰라요. 원인이 절대자이신 자존자이신 그분이 원인이 돼서 그분에게부터 시발된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거기서 시발된 것이오.

4절에, 4절에 “때가 아직 낮이매” “때가 아직 낮이매” 낮이라 하는 거는 때가 낮이라 말이오. 아직 밤이 안 됐어. 때가 낮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세상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빛이 있는 동안은 낮이라 말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이 세상 빛으로 왔기 때문에 세상은 지금 빛이 있다 말이오.

예수님은 세상에 빛을 비춥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달과 같이 예수님을 반사해 가지고, 예수님의 빛을 받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반사해서 비추는, 달과 같이 반사 작용을 하고 있는 빛이지 우리가 빛 주인이 아니고 우리가 빛 자체가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때가 아직 낮이매” 예수님이 세상에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고 머물 기간이 남아 있으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주님에게 맡긴 그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안하고 다 구원하는 것이 보냄을 받은 뜻입니다. 이 구속 위해서 오셨다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또 부활도 했지 못만 박혀도 안 돼. 또 부활해야 돼. 이것은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내가 세상의 빛으로 와서 있기 때문에 지금 일을 해야 된다 하는 그 말씀입니다.

“밤이 오리니 그때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느니라” 밤이 온다 말은 해가 없어지면 밤이 되지요. 예수님이 없어지면 밤이 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무덤 속에 들어가서 삼 일 동안은 세상에 빛이 없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 역사는 나타난 것은 없습니다. 그때는 은밀히 음부로 더불어 싸워서 구원 역사를 공작하셨지 외부에 나타난 역사는 없기 때문에 어둡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힐 때에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천지가 깜깜해졌었습니다.

“밤이 오면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안 계시면 빛의 운동은 못 합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면 빛의 운동은 못 합니다. 구약 시대에 빛의 운동을 했으나 미래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근거하고 빛의 운동했지 그것으로써 빛의 운동된 거는 아닙니다. 이라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비로소 빛의 운동이 성공을 했습니다. 생명 운동이 성공을 했습니다.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세상의 빛이로라” 빛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이라 그말이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말은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이라 그말입니다. 또 빛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작용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전부가 정체와 정형과 정색,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진상이 드러나게 된다 하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계시를 주셨고 이래서 틀린 것도 압니다. 인생이 보고 있는 것 다 너는 소경이다. 참은 하나도 못 본다. 틀린 것만 본다. 이것도 예수님이 빛의 역사를 하신 것입니다.

6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인제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시고” 그러면 예수님이 그 소경에게 해 주신 것은 이 직접 역사로 해 주신 것은 뭐 해 줬습니까? 침 뱉아 가지고 진흙 이겨서 바른 것이지요.

침 뱉아 진흙 이겨 바른 그거는 왜 침뱉았는가 그런 거는 뭐 할 필요 없고 어쨌든지 그것은 잘못하면 각각 자기네가 깨달을 수는 있기는 있지만 어쨌든지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진흙 이겨서 발라준 일 있소. 흙을 이겨서 발라 준 일 있소.

거게는 예수님의 침을 뱉았는데 예수님의 솜씨로 이겼고 침은 그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뭐라고 해석을 했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현실, ‘현실’ 하면 안 돼. 예수님이 주시는 현실.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현실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주시는 현실이면 거게 뭣뭣 가지고 됐소? 뭣뭣 가지고 됐어? 뭣뭣 가지고 됐어? 이름이 뭐꼬? ○○목사가? ○○목사. 녜, 예수님께서 침뱉아서 진흙을 이겨 가지고서 발랐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현실이라고 깨닫고 그렇게 해석을 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것도 취하든지 안 취하든지 자유로 하십시오.

‘이거 다 생명 내놓을 도리다, 바로 깨달았다, 이거는 생명을 내놓고 내가 지키겠다.’ 할 수 있으면 제 교리로 삼는 것이고 그런 확신이 없으면은 그렇게 삼지 마십시오. 우리의 현실은 땅의 것과 주님 것이 합해 가지고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마다 주의 진리가 거게 들어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현실마다 주의 진리가 거게 들어 있어. 현실에 주님의 침이 안 들어 있는 것 없어. 거게 주님의 복음하고 주님의 말씀하고, 주님의 말씀하고 입에 침하고 흙하고 이겨 가지고 발랐어. 우리 현실 속에는 주의 복음이 거기 들었고 또 물질 들었습니다. 물질과 복음이 합해 가지고 이겨 놓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냥 예 아니라 참말로 이해가 돼? ○○○조사님은 두터쓰고 뭐 시험하나? 듣고 있어? 그거 맞아요? 주님이 해 주신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명령이요 하나는 현실 주신 것이라.

그게 맞아요? 이것도 똑똑히 알아요. 확정을 지워야 돼요. 예사로 하면 안 돼요.

확정을 지워야 돼요.

뭐 침을 뭐 할라고 뱉아서 진흙을 해? 진흙은 흙이지 뭐. 그거는 흙이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계 세상의 모든 것이지. 흙은 물질계 있는 모든 것 아니요? 물질계 있는 것 모든 것 아니요? 예수님이 침뱉았으니까 그거는 예수님의 것이지. 그 안에는 진리로 엉겨 얽혀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예수님의 복음이 거게 얽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물질뿐인 줄 아요? 아니오. 내가 일단 예수 믿어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내 현실은 예수 믿기 전 현실과 다릅니다. 내가 만나는 현실은 그 현실은 물질로 되어서 구성된 것이지마는 그 속에 얽혀 있는 거는 주님의 복음이 얽혀 있습니다. 복음이 얽혀 있어.

얽혀 있기 때문에 발라 주면 달게 발라야 돼. 마다고 집어던져 내버리면 헛일이라. 거게는 주님의 기운의 복음의 역사가 그 현실 속에 힘줄같이 되어 있어. 침이 들어서 그 진흙을  요리 조리 이기니까 침 기운으로 그게 다 이겨져 가지고 한테 엉겨붙어 있어. 그래요? 침 기운으로 엉겨붙어 있어요? 침 안 바르면 빠짝 마르지 암만 이래 발라야 부실부실할 건데 침이 들어가서 엉겨붙어.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닥치는 현실에는 그 현실은 이 물질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이것을 종합해 가지고 그 요소로서 내 현실을 만드는데 그 현실 속에는 주님의 복음 구원 역사가 그 속에 힘줄이 돼 가지고 다 얽혀 가지고 있습니다.

얽혀 가지고 있어. 거게 영감도 역사하고 있고 진리도 역사하고 있어. 전능자의 이 역사 피의 역사도 있고 거게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다 그 가운데 얽혀 있어.

열한 가지 역사가 그 속에 힘줄이 되고 그 속에 줄기가 되고 거게 풀과 같이 진기가 돼 가지고서 얽혀 있어.

이러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는 해석 몰라도 그저 발라주는데 ‘주님이 내 눈 띄워 주실라고 발라 준다. 이것은 이라면 내 눈이 떠진다 밝아진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내게 닥치는 현실은 전부 나를 살리기 위함이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나를 성화시키기 위함이다. 나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다.’ 눈뜨면 성령에 충만한 것이지. ‘충만케 하기 위하심이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을 달게 받아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나 여러가지 시험 그것은 왜 기뻐해? 어려움을 닥치는데 뭐할라고 기뻐해? 기뻐하는 데도 그냥 기뻐하지 않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랍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뜻은 무슨 뜻이요? 그것도 한번 말해 봐. 나 혼자만 자꾸 해 쌓아니까 여러분들도 좀 동감이 돼야 되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는 거는 무슨 말인가? 양심으로서. 녜, 양심으로서 돼요. 거기에는 네가 그 동기와 목적과 그 방편과 결과로서 한없는 영광스러운 것이 이루어지는 네 현실에 어려운 것을 네가 똑똑히 충분히 알 것을 다 알고 기뻐해라 그말이오.

온전히 기뻐하라 하니 뭐 이래도 저래도 그래 하는 것 아니오. 동기가 뭐인데? 주님의 목적이 동기라. 결과는 뭐인데? 완전한 제사장 선지 복의 기관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이 결과라. 방편은 뭐인데? 순종만 하면 되지. 참고 견디기만 하면 되지.

이러니까 그 현실이 고량진미가 왔어. 고량진미가 왔으니까 모가지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 온전히 기뻐하는 거는 ‘요번 또 이 어려움 인해서 인제 참 좋은 것 온다.’ 이래 놓으니까 모가지 침이 꿀떡꿀떡 넘어갑니다.

무슨 침이? 육신의 침이? 새사람의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새사람 참사람이 지금 마구 침이 꿀떡꿀떡 넘어갑니다, 어서 먹고 싶어서. 그런 노래 있대요. 나는 이 노래를 잘 못 불러.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는 예수 향만 피운다’ 이러니까 한쪽머리는, 한쪽머리는 지금 죽겠다고 놀래서 막 야단이고 지금 새파라이 돼 가지고 ‘저 모세하고 저 잡아 죽이라. 저놈의 새끼들이 와 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이 홍해에서 몰사 죽음 시킨다.’ 이렇게 죽을 지경이라 놀라는데 이 밉상스럽게 떡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은 좋아서 벙긋거리면서 ‘야 이거 희한한 꼴 본다. 이 봐라. 이제 오늘 하나님의 희한한 솜씨 봐라.’ 좋아서 또 춤을 추고 있네.

그 사람들은 왜 그래 기뻐해요? 뭘 알아서 기뻐해요? 뭘 알아서 기뻐해요? ○○○권사님, 뭘 알아 기뻐해요?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은 뭘 알아 기뻐해요? 알아서 기뻐하는 거라. 온전히 기뻐해요, 그 사람들은. 온전히 기뻐해 춤을 추고 있어요. 뭘 알아서 그래요? 그래. 동기와 목적과 방편과 결과를 알고 보니까 춤출 것밖에 없어. 춤출 것밖에 없어. 그렇지 안해요? 춤출 것밖에는 없어.

그래, 어데까지 했지요?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 바를 때 떼내 버리면 안 돼요. 이렇게 우리에게 알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형식계시로 우리에게 우리 구원 길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처음에 바르면 좋아요 안 됐어요? 안 됐지, 뭐. 진흙을 발랐는데 좋을 턱이 뭐 있는가? 이래 놓으니까, 그러면 현실은 좋다 말이요 찍찌붓하다 말이요? 현실은 찍찍해요, 찍찍하고 찍찌붓해요.

그런데도 이 진흙을 이겨 바르니까 이 소경은 막 좋아서 춤을 춥니다. ‘이 자식 이 정신 빠진 자식 눈에다 진흙 발라놓고 야단이네.’ ‘하이고 좋다. 좋다.’ 왜? 그거는 주님이 제 눈 띄워 주실라고 했으니까 동기가 주님이 눈 띄워 주실라고 지금 와서 그렇게 착수하셨으니까 좀 있으면 환하게 보일 것 생각하니까, 동기 생각하고 주님이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신 주님이 침뱉아 가지고서 진흙 이겨서 눈에 발라 주니까 얼마나 영광이요? 좀 있으면 환하게 볼 것이거든. 이것 다 알고 나니까 춤을 안 출 수가 없어. 기뻐하지 안할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내용을 모르면 찡찡하이 이래 가지고 ‘왜 눈 고쳐 준다 하더니마는 뭐할라고 진흙은 발라 가지고 눈에다 발라버리는고?’ 이렇게 할 거라. 원망 안 하겠소? 오늘도 그런 사람 많아요. 요거 다 우리가 회개를 해야 돼, 회개. 그래.

그러면 달게 받아 가지고 ‘감사합니다. 진흙 발라 주니까 감사합니다.’ 이래야 될 것 아니겠소? ‘감사합니다.' 이러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현실 주시든지 그 현실은 나를 치료하는 현실이요, 나를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실라는 그 현실이요, 나에게 있는 잡철을 태우고 금을 연단해서 전부 태우고 이십사금만 남게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세상주의, 육신주의, 감정주의, 자기 주관주의, 사욕주의, 꾀있게 예수 믿는 것조차도 땅의 것을 위해서 이용해 먹는 그 복술로 저 망하는 그자 인제, 이런 것 다 싹 태워버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영원 불변의 완전의 주로 말미암아 생겨진 그 진짜 믿음만 우리에게 두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현실들을 주는 것입니다.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현실, 치료하기 위해서 주시는 현실, 영광과 칭찬과 존귀로 관씌워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현실, 그라면 현실 좋아요 안 좋아요? 고마와요 안 고마와요? 현실에, 현실이 어려우면 그 결과는, 결과는 작은 것 맺어요 큰 것 맺어요? 큰 것 맺어요. 현실에 항상 닥치는 거와 같은 그런 현실, 그런 현실에는 뭣 맺어요? 특수한 것 맺어요 뭣 맺어요? 보통 것 맺어요, 보통 것. 보통, 그까짓 거야 뉘가 봐야 사 갈 사람도 없고 보통 것 맺어요. 이런데 특수한 현실에는 특수한 것을 맺거든.

여러분들 그 사람의 전기를 써놨을 때에 이 전기를 읽습니다. 전기 읽는데 읽다가, 그 전기를 읽다가 감탄해서 눈물을 흘리고 감탄해서 또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고, 그 사람이 전기를 읽어보면서 눈물 줄줄 흘리면서 좋아서 울었다가 뛰었다가 했다는 그런 것은 다 그 현실을 몽탕 몽탕 몽탕 몽탕한 그런 현실을 줘서 그 현실에서 참 몽탕 몽탕한 그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다음에 주님 앞에 가서 무궁세계 가 가지고는 그런 것 있는 게 좋아요 없는 게 좋아요? ○○○목사님, 어느 게 좋아요? 있는 게 좋아 없는 게 좋아? 있는 게 좋아요? 정말로 있기를 원해? 그래, 원할 거야. 우리가 지혜 있게 살아야 돼요.

그래서 여게서 진흙 발라 주는 요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현실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에는 주의 말씀이요 주의 진액인 복음이 거게 꽉 얽혀 있다.

불신자의 당하는 현실과 우리 현실은 달라. 주의 진액이 얽혀 있어. 주의 구속의 이 사랑의 은혜의 진액과 이 물질계 것들을 합해 가지고 내 현실을 만드셨어.

현실을 온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동기와 원인 목적 결과될 것을 깨닫는 데에서 온전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자, 그라고 난 다음에 주님이 또 하신 게 뭐입니까? 명령뿐이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라” 그럴 때 ‘또 엉뚱이같이 실로암 못에 씻으라 하노? 여기 씻으면 안 되는가?’ 그라면 눈 떠요 안 떠요? 못 떠요. 실로암 못에 씻으라 할 때에 좋다고 뛰어가 가지고 씻고 왔습니다. 요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성령 받는 데에는 몇 가지만 하면 성령 받아요, 손가락으로? 눈 뜨는 것은 영감 받는 거라, 영감. 성령의 충만한 사람. 성령의 명철한 지혜와 총명을 받는 것이라. 성령의 명철한 지혜와 총명을 받는 데에는 몇 가지 하면 돼요, 손가락으로? 저 뒤에도 손가락 들어요? 손가락 둘 들었습니까? 녜, 두 가지 들었으면 됐어.

뭐? 진흙 발라 주거들랑은 떼내 버리지 말고 감사하고 가서 씻으라 하거든 예 하고 얼른 가 씻고 그 두 가지 하면 돼요. 이 두 가지 하면 성령의 충만 받겠소 안 받겠소, 여기 목사님들 한번 생각해 봐요.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받아, 받아. 만에 일도 잡것이 섞여 있지 안했어. 그대로 받아요. 쉽지 안해요? 현실을 떨어버리면 안 돼. 현실을 도피하면 안 돼. 현실을 자기 고치는 현실로 알고 잘 감당해야 돼. 주님이 주신 현실을 버리지 말고 그 현실에서 신앙 생활 계속해야 됩니다, 계속. 눈에 붙이고 있는 것은 주님이 붙여 준 것 그대로 떼내 버리지 안하고 가지고 있어.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현실 버리지 안하고 그 현실을 자기가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다니? 가지고 있는 거게서 신앙 생활 하고 있다 말이지. 떼내 버린 것은, 떼내 버린 것은 자기 현실에서 그 현실이 변질되면 내버리는 것이지.

변질되게 하는 것, 현실에 어려운데, 어려운데 떼내 버리는 수가 뭐 있어? ‘너 이놈 감옥에 가야 된다’ 하고 잡으러 왔어. 그게 뭐라요, 잡으러 왔는데? 그게 뭐라? 진흙덩어리야, 진흙덩어리.

그랬는데 떼내 버리는 수는 뭐지요? ‘네가 목사가 돼 가지고 이 교인들을 전부 정부 반대 운동하고 우리 공산주의 반대 운동하는데 어떻게 할래? 이놈아 가자.

이다음부터 안 그러겠다 하면 냅두지.’ ‘아이구 이제는 인민공화국에게 순종하겠습니다’ 하면은 진흙 떼버렸어요 안 버렸어요? 그게 버린 거라. 이치가 맞아요? 그럴 때에 끌려가도 자기 현실 놓지 안하고 그대로 고수하지. 그대로 지키지. 그러면 거게서 자기가 변하지 안하고 자기에게 해당된 그 진리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현실을 팔면 안 됩니다. 현실이 자기 세상입니다. 알겠습니까? 현실이 자기 세상이오. 현실이 자기 세상인데 현실을 팔면 안 돼요.

현실을 살라고 하면은 그 대금을 얼마나 내야 돼요? 얼마나 내야 돼요? ○권사님? 얼마나 내야 돼? 그 현실을 살라면 얼마나 내야 돼요? 있는 소유 다 팔아야 되지. 그걸 몰라? 있는 소유 다 팔아야 돼. 있는 소유 다 팔아야 돼.

맞아요? 맞아. 다 팔아야 그 현실, 제 눈에 진흙덩어리 붙이고 있는 거라. 그러면 진리가 맞아요? 그라면, 그라고 나서 주님 시키시는 대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할 때에,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다 그 명령이라. 씻고 눈 보게 하는 것, 씻고 눈 뜨게 하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 전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밤이나 낮이나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전부 우리를 깨끗하게 씻기는 것이요 우리를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씻기게 하는 것이요 눈뜨게 하는 것이라.

진흙은 싹 씻어버리니까 진흙뭉텅이 하나도 없어. 현실을 내가 떼버리지 안하고, 나는 현실 내가 떼버리지 안해. 현실에 진리 때문에 떼버리지 안하고 나는 현실에 어떤 고통을 당해도 나는 그 현실에서 나는 진리 버리지 안하고 그 현실을, 주님이 붙여 주신 현실을, 진리가 붙여 주신 현실을, 복음이 붙여 주신 현실을, 하나님 말씀이 닥치게 한 그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이 닥치게 한 것 주님이 닥치게 해 준 현실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 시키시는 대로 순종해.

순종하니까, 자꾸 순종하니까 진흙이 없어집니까 더 뭉떵뭉떵 많아집니까? 진흙이 없어지자 눈떨어집니다. 참 재미있다. 진흙이 없어지자 눈떨어져.

진흙이 없어지다니? 자기에게 묵직한 고통스러운 그 현실, 눈에다 발라서 찡찡하게 안됐는 현실이 주님에게 순종하고 나니까 그 현실이 안됐는 현실이 아니고 해결이 돼 버립니다. 해결이 돼.

신사참배 안 하면 죽인다 하고 감옥에 가두고 이랬는데 그때 감옥에 갇힐 때에 감옥에 갇히고 하는 그것이, 계명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하는 그것이, 그것이 뭐 덩어리라요? 진흙덩어리.

이랬는데 그때 진흙덩어리를 떼버리는 수 있어요? 떼버리는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떼버리요? 신사참배 하면 그만 떼버리는 것이지. 신사참배 안 하고 있으면, 안 하고 있으면, 안 하고 있으면서 떼버리는 수 있어요? 신사참배 안 하고 떼버리는 수 있어요? 주님 시키시는 대로 설설 씻으니까 없어집니다. 주님 시키는 대로 순종 순종 하다 보니까, 순종 순종 하다 보니까 신사참배의 무거운 얽매이고 고통스러운 것이, 고통스러운 신사참배가, 징그러운 신사참배가 뭣돼요? 고통스러운 신사참배가 뭣 돼요? 영광이 돼. 자랑거리가 돼. 이래 놓으니까 뭐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 신사참배 자랑 되게 합니다.

잠시 잠깐 지내면 어려움이 변해서 내 보좌가 됩니다. 잠시 잠깐 후면 그것이 내 영광이 됩니다. 잠시 잠깐 후면 나에게 성령의 충만함으로서 심령의 광명이 됩니다. 이래서 신앙은 경험과 체험이 없으면 안 돼요. 신앙은 경험과 체험의 소생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맞아요? 맞습니까? 맞아요, 맞아요.

이러니까 여게서 배운 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되지 여게서는 남의 등불이라도 등불이 총총 쓰였기 때문에 환하게 밝지마는 집에 가면 그만 남의 등불이 없어버리니까 제 등불뿐이면 나중에 그만 모르기 쉬워요. 제 등불도 탐박 꺼져놨거든. ‘거게서 뭐라 하더라? 그때는 꼭 믿어지더니마는 지금  믿어지지 안하네. 그때는 그 깨달음에 생명까지 바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거기 생명 바치겠나? 그렇츰 꼭 지켜야 되나? 죽어도 지켜야 되나?’ 벌써 거게서 누룩이 들어갔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서 썩히는 게 들어와 버렸어.

그런데 저게 머리 허연 형님 말이요, 앞에. 어제 서이 물었지? 가루 서 말에 무슨 뜻이 있는데 그거 뭐인고 좀 알고 싶다고 물었지요? 그거 아마 좀 아는 것 같애.

그거 한번 알아봐요, 가루 서 말을 뭘로 보는가? 아이고, 알면 또 발표를 해야 자꾸 하나님이 더 주시지. 알고 발표 안 하면 더 안 주시요.

시간 됐어? 그거 참. 시간 됐대요. 그걸 좀 말해 줘요, 가루 서 말. 뭐 그거는 뭐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어요, 여러가지로. 우리 교회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룩 들어오면, 누룩 들어오면 뭐 유치반도 썩고 중간반도 썩고 목사도 썩고 다 썩습니다. 또 행정도 썩고 교훈도 썩고 사람도 썩고 다 썩어버리요. 전부 다 썩어. 이러기 때문에 잘못 깨달음 하나 있으면 큰일 납니다. 잘못 깨달음은 모든 것을 부풀어 썩게 하는 누룩인 줄 아십시오.

자, 그라면 또 이제 오전에 연보해야 되는데, 그래 오전에 공부한 것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소유와 몸과 생명과 대결될 때에 이런 것을 다 내놓고라도 붙들고 갈 만한 교리와 신조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까? 정말로 평가됩니까? 평가돼야 돼요. 소유와 몸과 생명 그런 것과 비교 못 해요. 소유와 몸과 생명이 이 교리에 투자돼야 그것이 영생이 되지 이 교리와 신조를 버린 소유와 몸과 생명은 영멸입니다. 알겠습니까? 자, 그러면 우리 기도합시다.

주님,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사 참으로 소유와 몸과 생명 나의 여생을 솔빡 바쳐서 살 만한 온전한 길 가치 있는 길을 밝히 보여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가르쳐 주신 이 진리에 남은 여생은 완전히 바쳐서 이 진리대로만 뿍뿍 걸어가겠습니다! 놓지 마시고 끝까지 같이 하사 완전히 세상을 이기고 닥쳐지는 현실마다 고량진미같이 먹고 살찌고 장성하여 영광의 주의 형상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 말씀을 알고 인정하고 확신 가지고 요대로 살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영의 연약병, 마음의 온갖 더러운 죄병, 고기덩어리의 죄병, 몸뚱이의 모든 육체의 병균의 병, 안팎의 병 완전히 낫게 하사 이 말씀은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임을 저들로 하여금 표적 보고 믿게 하시고, 하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 보고 주님이 역사하심 보고서 이는 과연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것을 저들이 확신하고 주님의 영광의 소원이신 완전히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제사장 선지자 왕의 이 성직을 숙달시켜 영원 무궁한 세계에서 주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 정말 주의 것, 주의 종, 주님의 성전, 주님의 지체, 주님의 몸, 주님의 신부, 주님의 거룩한 나라와 거룩한 백성, 거룩한 제사장, 거룩한 선지자, 거룩한 왕이 되고 주님의 영광의 찬미의 자체들이 되게 하시고 주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연보할 때에도 각자들에게 주님이 저희 속에서 역사해서 알려주시는 주의 뜻을 금번 일호로 바로 찾아 가져 주의 뜻에 명중하는 저들의 첫 행위가 되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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