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찾아 오신 주님께 순종해 보라

 

1986. 10. 8. 새벽 (수)

 

본문:누가복음 5장 4절∼11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요사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앞에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느니라” 하는 거게 대해서 많이 증거도 하고 많이 생각을 모두 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이름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킨 건가? 나사렛은 성경대로 그 이루어진다 하는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역사, 운동 그것을 이름으로 이렇게 표시했는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 역사 이름이 뭐인가? 다섯 가지라 하는 걸 우리가 배웠습니다.

“믿으므로” 다섯 가지 이 역사를, 운동을, 공로를 자기가 알고, 이 사실을 다섯 가지를 알고, 그 다음에는 인정을 하고 믿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믿는 것 아닙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미래사가 아니고 그것은 벌써 과거에 이력이 나타내고 있는, 과거에 그 모든 그 사람의 행적을 똑똑히 드러내고 있는 그것이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다섯 가지,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순종해서 행동하는 것이고, 영감, 또 사죄, 칭의, 화친 이 다섯 가지인데 이 다섯 가지를 믿는 데는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하면은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믿지를 못합니다.

왜? 진리도,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진리를, 신구약 성경을 그 사람이 읽고 연구하는 데도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기가 어떻게 성의를 가지고 정성을 들여서 연구한다 할지라도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에게 대한 진리인데 이 진리는 천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말을 다 똘똘 뭉친 그 전부가 이 말씀의 한 마디를 비중할 수가 없고 이 한 마디와 비교될 수가 없는, 이 한 마디는 천하에 있는 인간들의 말 전부보다 뭐 몇억억억만 배가 중량이 크고 권위 있다 할 게 아니라 무한히 차이 있다, 무한을 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이렇게 말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말은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그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 믿습니다. 왜? 세상 지식과 비교하기 때문에 안 믿습니다. 연구를 해도 안 믿고 또 구체적으로 그 진리를 자기가 행할라고 하면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해당된 그 진리는 전부가 자기가 알고 있는 인간 지식과 인간 생각과 인간 평가와 정반대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 자기가 자기 현실에서 자기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될 그 진리는 언제든지 자기와 반대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옵니다. 왜? 자기는 죽은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산 지식이니까 반대고, 자기는 죽는 지식이라, 그대로 살면 자꾸 하루 살았으면 그만치 죽고 이틀 살았으면 그만치 죽고 죽는 것인데 이 지식은 살리는 지식이기 때문에 정반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뭐 행하기가 어려워 못 행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그것이 자기 주관이라는, 자기 자율이라는, 자기 선입적 관념이라는, 자기 기존 지식이라는, 이 모든 또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라는 이것이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은 오른편에서 이렇게 하라 하는데 자기에게 있는 인간 지식과 모든 밖에서 응원하고 있는 모든 인간 지식은 왼쪽으로 이렇게 하라 하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게 하기 어렵습니다. 행하기 어려운 것은 자기와 모든 사람이 그라면 안 된다 하기 때문에 이거 부인하기 어려워서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에 언제든지 크나 작으나 무슨 한 사건이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은 이라면 된다 이라는데 되는 꼴을 여러번 봐서, 되는 꼴을 여러번 보고 ‘그거는 될 수 없는 일이라도 됐다 됐다’ 되는 그런 경험과 체험이 많이 있어도, 많이 있어도 그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떨어져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네가 나았으니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라. 더 큰 증세가 날까 두렵다.” 이렇게 다 예고해 놓았는데도 번연히 제가 나았는데 지금은 어렵게 돼지니 ‘아마도 낫는다고 하지마는 이거는 아무래도 언젠간가 이 병으로 내가 끝을 마치지 이 병이 다 낫지를 않는다.’ ‘네가 지금 현재 낫고 있는데 자꾸 그것 다 믿어라, 믿고 나았다고 생각하고 자꾸 낫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해라.’ 하는 그놈이 지금 어떤 놈이 하느냐 하면은 내나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 그놈이 하고 있습니다.

새사람은 ‘네가 나을 때와 같은 그런 지금 네 심정도, 네 인품도, 네 간절도, 소망도, 겸손도, 영 바꿔지지 안했느냐? 변화되지 안했느냐?’ 죄를 범하지 말라 말은 삐뚤어지지 마라 그말이오. ‘아주 삐뚤어지지 안했느냐?’ ‘내가 지금 병이 도져서 아프다. 이거는 삐뚤어진 이거 때문에 아픈 게 지당하다. 아프다.’ 이러면 이 삐뚤어진 것을 알고 삐뚤어진 그것을 그만치 빽 돌려 놓으면, 본자리만치 돌려 놓으면 그것이 즉시 그거 하나님께서 다시 치료해서 성하게 해 주실 것이고, 조금 더 돌려 놓으면 더 나을 것이고 아주 더 돌려 놓아 버리면 아무것도 없고 그만 그런 거 거리가 멀 것이고, 많이 돌렸으면 다시 질병의 재발에서 거리가 멀 것이고, 조금 돌렸으면 거리가 가까울 것이고, 어기면 재발될 것이고, 또 고치면 나을 것이고, 요거는 변함 없는 이거는 이 물질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과 약속 불변의 이거 신인계약 과학인데, 신인계약의 면할 수 없는 요 이치인데 사람들이 그걸 못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되어 있는 옛사람 그놈 때문에 개인의 자기에게 당면한 경험 많은, 누구 말 말고. 경험 많은 그런 질병도 그 질병이 나아 가지고 끝까지 은혜 생활 하는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변해지니까 그게 변해지고, 변해지는 데에 ‘하나님 말씀대로 변해졌으니 변해졌다. 변해졌으니 정확히, 변해졌으니 변해진 것을 정확히 그만치 다시 복구하자.’ 다시 복구되는데 그렇게 믿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마귀란 놈은 ‘아무래도 이것으로서 아마 거석해서 낫는다 하지마는 아주 낫는 거는 아니다.’ 어제 내가 어떤 권찰이 그따위로 믿음 없는 말 하기 때문에 ‘네가 들어서 사람 다 죽인다. 네까짓 것들이 무슨 믿음을 가지고 뭘 얻겠다고 모두 하고 있노, 있기를? 하나님이 거기서 에누리를 했나, 틀렸나? 어데서, 정확성이 어데 틀렸노? 틀린 그것을 찾아 가지고, 죄를 지어, 틀린 게 죄인데 틀린 걸 그걸 찾아라.’ 틀린 걸 그걸 찾지 못하면 헛일이오. 그대로 뒈져 버리지 뭐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인데 진리대로 사는 것도 제일, 진리대로 사는 게 어려워 못 사는 게 아니오. 진리대로 사는 데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부인, 자기 부인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자기 부인이 무슨 부인입니까? 세상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이 전인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인류들의 통계와 모든 공통론 이 모든 그것을 완전히, 자기가 세상이요 세상이 자기인데, 인간 모든 론, 인간 지식 그거 전부를 부인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것만 딱 부인해 놓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행하는 게 쉬우냐 안 행하는 게 쉬우냐? 행하는 것은 사는 것만치 쉽고 행하지 않는 거는 죽는 것만치 어렵기 때문에 자기만 바꿔 놓으면 문제 없는데 자기가 바꿔지지 안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또 영감도, 뭐 영감도 자기 생각, 자기 마음, 자기 이성 비판, 영감은 하나님의 마음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자기 마음과 언제든지 이래 대립됩니다.

뭐하고 대립되느냐?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마음과 대립되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일치돼서, 피와 일치되고, 영감과 일치되고, 진리와 일치된 것은 하나님하고 딱 들어서 하나입니다. 하나님하고 딱 들어 하나요.

이제 우리에게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타락한, 내 마음이 아닌 변질된 마음, 하나님이 지어 주신 대로 마음이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원죄와 본죄로 변질된 마음, 이 변질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하고 정반대입니다. 영감하고 정반대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대로 사는 것이 영감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이 완전히 죄 없이 사죄함을 받은, 사죄 받아서 죄가 완전히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도 죄가 없는 자로 ‘너는 죄가 없다’ 통과했기 때문에, 통과했음으로 우리에게 새생명이 왔습니다. 통과한 이 사실을 자기가 뭐 힘드는 것도 아니고 그는 그렇다는 이 사실을 믿고 그 사람으로 살면 돼. 사죄 받은 사람으로 살면 됩니다.

사죄 받은 사람으로 살면 되는데 사죄 받은 사람으로 살지 못한 그게 뭐이냐 하면은 자기를 부인치 못하고 세상을 부인치 못하고 이것이 자꾸 반대하기 때문에 안 된다 그거요, 이것이 반대해서. 그러면 칭의도 그러하고 화친도 그러하고 다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구원은 이 다섯 가지를 자기가 알고, 간단해. 다섯 가지를 알고, 이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증도 하셨고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를 알고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이대로 살면 돼 버려, 그만.

이대로 살면 되는데 뭐 살기가 어려워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이 자, 죽기가 어렵습니까 살기가 어렵습니까? 뭐이 어렵소? 죽기가 어렵습니까 살기가 어렵습니까? 죽기가 어렵소 살기가 어렵소? 왜 그거 뭐 자꾸 더듬더듬 그래 해? 살기보다 죽기가 쉽다 하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죽기보다 살기가 쉽다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이 봐, 아직 확신이 없어.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쉽지. 그렇지 안해? 사는 게 쉽지 안해요? 사는 거는 뭐 저절로 살아지는 거, 또 살라고 애를 쓰고 또 살고 싶고 이렇지마는 죽는다는 그거 제일 힘들지 안해요? 죽음에 하나 손가락 하나 끊어 보이소. 손가락 하나 끊으면 아픈 그거는 죽음에 속했소 삶에 속했소? 죽음에 속했으니까 그거 견디기 어렵지 안해요? 이 다섯 가지 공로를 믿고, 알고 믿고 요대로 사는 것은, 행동하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하기 쉽고 이 일은 소원이 되고 이런데, 하기도 쉽고 소원도 되고 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이 일이 하기 힘드는 것은 뭣 때문에 하기 힘듭니까? 하기 힘든 것은 누구 때문에 하기 힘듭니까? 악령 악성 악습, 옛사람 그놈 때문에 하기가 힘듭니다. 그놈을 부인하기가 힘들지 그놈만 부인해 놓으면 이거는 저절로 살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고 사는 것이 좋지 말씀대로 살지 안하고 어기는 것은 불구덩이 들어가는 것만치 싫고 어렵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 부인하지 못하면, 자기 그놈이 주먹덩이만치 있으면 그만치 자기는 고통 생활이요, 자기 그놈이 집채만치 있으면 그만치 자기는 불행이요, 자기 그놈이 만일 쌀내끼만치만 있으면 그만치 자기는 불행이요 자기라는,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하나도 없으면은 그에게는 불행이나 고통이나 근심이나 걱정이나 뭐 어려운 일이나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거게 대한 것을 하나 지금 말할라고 이 말씀을 봉독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그때부터 수제자입니다. 수제자인데 그만 예수님 배반하고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었습니다. 여게서 우리는, 우리를 다 아시는, 우리를 체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도 우리의 심리를 다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뭐 놀랠 게 없다 말이오.

왜? 인간은 조석으로 변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껍데기는 믿는 척 하지마는 속으로는 뭐 하루도 몇 번 변하는지 모릅니다.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갔다가 또 물러갔다가 가까이 갔다가 물러갔다가, 또 삐꿨다가, 또 의심했다가, 또 어만 거 바라고 주님 배척했다가, 또 주님 바라보다가 얼마나 많이 변하는 것이 우리라 그거요.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고기 잡으러 갔는데 주님이 오셔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네가 바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아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했어.

오늘도 우리가 이 신앙 생활 할 때에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 대속의 세 가지에 대해서 영감과 진리에 대해서, 영감과 진리는 대속을 우리에게 실상화시킬라고 지금 제이 역군으로, 제이 역사로 온 것이 영감이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제일 역사로 오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형은 완전히 이루기만 했고 영감과 진리는 완전히 이루어 놓은 것을 우리에게 갖다 주셔 가지고 우리의 것이 되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이 영감과 진리인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 자기가 ‘나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뭐 사죄니, 대형의 사죄니 칭의니 화친이니 예수님이 나를 대속을 하셔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조롱을 하면서도예수교는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해서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다고 그렇게 주장을 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또 배우고, 그렇게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그 생각이 나는 그것이 제가 둔하고 미련해서 그렇지 바로 그것이 고기 잡으러 갔다가 밤새도록 헛일한 말이오. 그래 제 힘으로 튀어나온 거는 사는데 제 힘으로 튀어나오지 안한 거는 안 돼요.

이러니까, 우리에게 현재 주님이 찾아오셔 가지고 어떨 때는 먼 데는, 자, 성경 말씀이 하나 성구가 생각이 나옵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 예수님의 피니 뭐이니 이라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번 생각이 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가 예수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 또 전도만 듣고 예수 믿기 시작 안 한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래 하지’ 그게 나온다 말이오.

그 생각이 나오는 것과 그 성구가 생각나는 것과 어느 사람이 지금 주님과 자기와의 거리가 가깝습니까? 어느 사람이 가깝소?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뭐 대속의 피공로니 뭐 이래 하고 있는데’ 그라는 사람 있고 그 성구 하나를 생각이 나서 성경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런 성구 하나 생각하면은 그 두 사람이 있다 고 하면은 두 사람에게 다 주님이 찾아오기는 찾아오셨는데 주님과 자기와의 가까운 것은 어느 사람이 더 가깝습니까? 성구를 말한 사람이 가깝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이거 뭐 예수님의 뭐 십자가의 대속이니 뭐이니 그래 하지’ 그 사람이 가깝습니까? 누가 가깝소? 십자가의 대속이니 하는 그 사람이 가깝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이든지 어느 성구를 생각나는 사람이 가깝습니까? ‘예수님의, 뭐 예수님 십자가 뭐 피니 십자가 믿지’ 하는 그 사람이 가깝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이든지 무슨 성구든지 성구를 자기가 생각나는 사람이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그게 가깝습니다. 그게 가까와. 그거 그때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오.

‘이거 내가 자꾸 이렇게 하고 있어 되겠나? 참 예수를 이래 믿어서는 안 될세.

내가 뭐 일 년 내 가야 성경을 보나 뭣 보노?’ 슬그머니 생각이 나서 ‘성경 좀 보고 싶다’ 성경이, `성경 좀 보고 싶다' 성경 볼라고 성경 보고 싶다 하면은 성경 볼 수 없도록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친구놈이 옵니다. 그놈이 마귀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놈이 마귀요. 주님이 찾아왔는데 그놈이 얼른 마귀 일군이 돼 가지고 지금 성경 못 보구로 하는 거라.

이제 요걸 배워 놓은 사람은 ‘아무래도 성경은 봐야 되겠다’ 성경 볼 마음 있는데 볼라 하니까 옆에 무슨 친구가 와 가지고 무슨 문제를 들고 ‘어짜고?’ 하면 그 배운 걸 기억나면, 그렇기 때문에 들은 것은 지켜 행해야 돼. ‘이 사람은 내가 성경 볼라 하니까 요게 찾아온다.’니까 해석이 하나만 잘못돼도 이거 또 재미가 없다 그거요.

그거 믿지 안하면서 ‘한번 내가 그래 가지고, 이거는 뭐 우리 생각에 고기가 잡힐까 싶어서 던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이라면 고기 잡겠다 뭐 고기가 잡히겠다고 던지는 건 아닙니다. 선생의 말씀에 의지해 가지고 이러니까 책임지십시오. 꼭 선생이 말하는 거기 따라서 지금 우리가 던지는 것이지 우리가 고기가 잡힐까 싶어서 던지는 거 아닙니다.’ 하는 그거는 뭐이냐 하면, 벌써 조건을 따진 것이 뭐이냐 하면 뒤에 인제 고기 잡히지 안하면 하는 그걸 보고서 지금 벌써 미리 따져 들어가는 것이라 말이오.

만일 고기가 안 잡혔으면 어째? 안 잡혔으면 어짤 것이요? 안 잡혔으면 어떻게? 내가 안 잡혔는 그걸 또 한번 생각해 봐. 안 잡혔으면, 주님이 있다가 ‘야 고기가 들었나?’ 피이 웃으면서 ‘고기가 없습니다. 뭐 고기가 있겠습니까? 밤새도록 고기 잡아도 없었는데 고기가 없습니다.’ 이랬을 것이고, 그 피이 웃어도 속으로는 해 붙이며 ‘인제 야나지게 한번 했다. 이제 공연히 자꾸 말만 해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고,’ 그라며 떡 그때부터 깔고 앉을 거라. 그때부터 주님을 깔고 앉을 거라. 깔고 앉아서 ‘녜, 그저 선생님은 고기는 아직 잡아 보지 안했으니까 그렇지마는 우리는 고기를 잡아 봤기 때문에 이 고기가 모일 때도 있고 안 모일 때도 있습니다. 안 모일 때는 고기가 한 마리도 없고 다 몰려 딴데로 가 버리고 하나도 없습니다. 밤새도록 고기 안 잡혔기 때문에 여기 지금은 요 바다에 요 부근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또 고기는 밤으로 잡는 거지 낮으로 잡는 거는 아닙니다. 또 고기는 깊은 데, 물 많이 깊은 데라고 많이 있는 게 아니고 고기는 다 얕은 데 그와 같이 해서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물을 칠 때는 강에도 치면 다 한가운데 치지 안하고 양쪽 가에다 주르 치는 겁니다.’ 이래 떡 이라면서 예수님을 코빵을 한번 단단히 줄라고 이래 딱 하고서 이제까지 다 복수를 한번 할라고 ‘공연히 알지도 못하며 뭐이 뭐라고 말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데 내가 오랫 동안 따라다니며 헛일 많이 했다.’ 이라고 이랬는데, 그런 마음을 가졌지마는 시키는 대로 한번 딱 순종하고 나니까 어땠습니까? 시키는 대로 똑 순종하고 나니까 모두가 다 뿌셔졌습니다. 순종하고 나니까 저도 놀라고 남도 놀라고 다 놀랬어.

순종하고 보니까, 순종을 하고 보니까 뭐이 달라졌어? 사람이 달라졌어. 순종하고 나서, 순종하고 보니까, 순종을 하고 보니까, ‘과연 주님은 이거 모든 인간들이 볼 때에는 안 될 만한 그 모든 것도, 절대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라도 주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된다.’ 이 주님은 전능이라. ‘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는데 이거 주님이 그물 던지라 하니까 이거 어데서 고기는, 고기 없는데 고기가 다 왔네.’ 이제 주님은 점점 커졌습니다.

한번 순종하고 보니까 주님은 점점 두려워 큰 주님이 됐고, 주님은 자꾸 커졌고 자기는 어찌 됐소? 자기는 점점 꼬꾸라졌습니다. 꼬꾸라졌어. 그 앞에 꼬꾸라졌어.

그냥 엎드린 그게 저절로 엎드린 게 아니라 우리에게 형식 계시를 가지고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 말이오. 그 앞에 꼬꾸라졌어.

주님은 크심이 발견됐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발견됐고, 주님은 높였고, 높이는 행세가 생겨졌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뭐 자기는 짓밟아 봤다 말이오.

그러면 이제 우리 믿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것만치 신앙 생활 할 수 있고 자기를 아는 것만치 신앙 생활 할 수 있는 것인데, 주님을 바로 아는 것과 자기를 바로 아는 것, 자기 바로 아는 거는 자기는 무익한 죄인이요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죄뭉텅이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요, 주님은 완전자이요 전지 전능자로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자기를 바로 알고 주님을 바로 아는 것이 믿든지 안 믿든지 주님 말씀대로 좀 실행을 해 본 거게서만 알지 그리 안 하면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실지로 행동한 그 행동에서만 주님도 알고 자기도 알지 다른 데서는 알 수 없다는 걸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한다” 이렇게 말씀했어.

이러니까, 그때에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면서 행동해 봤어. 믿지 않으면서 행동해. ‘말한 대로 되겠나?’ 요대로 안 될 걸 알고 안 되리라 생각하고서 지금 주님을 한번 코빵 주고, 주님을 한번, 한번 납짝 눌러주고, 주님을 한번 공격해 줄라고 하기 위해서 순종했다 말이오.

그러면 그 순종이 좋은 순종이요 나쁜 순종이요? 좋은 순종이요 나쁜 순종이요? 좋은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나쁜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나쁜 순종이요, 나쁜 순종. 나쁜 순종도 좋다 말이오. 좋은 순종도 좋다 말이오. 어쩌든지 말씀대로 해 보라 말이오! 말씀대로 해 봐라! 네가 뭐 어쩌든지, 뭐 욕을 하든지 말든지 네가 말씀대로 해 봐라, 네가! 네 현실에서 말씀대로만 실행을 해 봐라. 하면은 거게서만 주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참 감히 자기가 같이 있을 수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크신 분임을 자기가 알게 되고 자기는 아주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자기는 순종해 보니, 행동해 보니 자기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은 점점 커지고, 이라니까 자기는 점점 부인해지고 하나님은 점점 믿어지게 됩니다.

그라니까 이제는 베드로의 그만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달라졌고 자기에 대한 지식이 달라졌고, 또 하나님께 대한 행동이 달라졌고 자기에 대한 행동이 달라졌고, 하나님께 대한 평가가 달라졌고 자기에게 대한 평가가 아주 달라졌고, 이라니까, 자, 이게 달라졌는데 베드로가 중심에 소원이 어찌 됐소? 소원이 달라졌어. 그전에는 예수님 배반하고 고기 잡으러 왔던 자가 이제는 고기가 그렇츰 잡혔는데도 고기가 눈 앞에 보이지 안합니다. 자, 소원이 달라졌어 안 달라졌어? 고기 잡고 난 다음에 베드로가 그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엎드러졌을 때에 그때에 베드로의 그 소욕, 베드로의 소욕, 베드로의 소원 말이요, 베드로의 소원이 바꾸어졌습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바꾸어진 걸 뭘 보고 알아요? 주님이 있다가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니까 베드로가 좋아했소 싫어했소? 이러니까 그물과 고기와 배를 다 집어던져 버리고 주님 따랐으니까 그 베드로가 그때에 엎드려서 굴해졌을 때에 그때에 베드로의 소원이 달라진 걸 확실히 표시나지 않습니까? 소원이 달라지지 안했습니까? 소원이 달라지니까, 소원이 달라지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대해서 베드로를 취급하시는 일이 또 같습니까 달라졌습니까? 처음에는 베드로에게 이놈 고기 줘야 될 것이기 때문에 “저 깊은 데 가서 고기 잡아라” 이거, “고기 많이 잡아라” 고기 줬지마는 그 다음에 꺼꾸러지고 난 다음에는 베드로에게 뭐 주면 좋아할 줄 알고 베드로에게 뭐 줬습니까? 베드로에게 “사람을 취하리라” 하는, 베드로 취급이 달라졌고 베드로에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달라졌다 말이오.

은혜가 달라졌어.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고기 주지 안하고 “네가 이제는 사람을 취하리라” 이 딴거 줬다 말이오.

줬는데, 그러면 자기가 그와 같이 변화가 되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이 변화되지 자기가 변화되기 전에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 변화가 되지를 못합니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주님관이, 주님 보는 것이 영 달라졌지, 자기 보는 게 달라졌지, 이라면 주님께서 또 시몬 베드로를 보는데 보는 것이 같습니까 달라졌습니까? 또 달라졌다 말이오. 달라졌어.

그라면 주님이 달라졌으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대해 취급하는 것이 같았습니까 달라졌습니까? 취급이 달라졌어. “사람을 취하리라” 이랬어. 그라니까 또 베드로는 주님의 그 말씀에서 행동이 같아졌습니까 달라졌습니까? 같소 다르요? 달라졌다 말이오. 달라졌어.

이러니까, 처음에는 취하기 위해서 주님 배반하고 갔던 인간이 이제는 취해 놓은 것도 집어 던지고 주님 따르지 안했습니까? 영 달라졌어. 믿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지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자기 소망에 대해서나, 자기 행동에 대해서나, 하나님이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것이나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거게서만 발원되는 것이지 그게 아니면 못 합니다. 그게 아니면 발원이 안 돼요.

‘주님의 말씀대로 한번 해 보자’ 해 보는 데서 거게서 자기 모든 지식도 소망도 행동도 달라지고, 또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취급도 달라지고, 또 주는 것도 달라지고 모든 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인데, 믿음으로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인데, 역사에 없던 자연이 아닌, 자연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니까 인간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 일이 있으니까 해 봐야만, 해 가지고 돼 봐야 알지 그 외에는 아는 길이 없어.

해 가지고 돼 봐야 알지 뭐 논리로 이 천하 과학을 다 논리를 줘도 그 논리에 안 맞아요. 과학에 맞지 안해요. 과학에 맞지 안하고 인간의 논리에 맞지 안해요.

이러니까 이거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가 순종해서 실행하는 요 길 외에는 뚫고 들어가는 길이 없어요. 이해가 됩니까? 예수 믿는 것은 주님이말씀하신 요것을 복종하는 요 길 외에는 뚫고 들어가는 길이 없고 요 길 외에는 내가 볼 수가 없고 요거 취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해 보라 말이요, 어쩌든지.

해 보면 뭐이 변화돼요? 해 보면 뭐이 변화돼요? 주님관이 변화돼요. 해 보면 주님이 변해져 버렸어. 처음에는 ‘공연히 쓸데 없는, 고기 잡는 데 와서 또 거치게 와 가지고 또 자꾸 그래 쌓고 있네. 밤새도록 고기 못 잡았지마는 한번 던져 보지요.’ 이렇게 멸시하고, 자기는 옳고 자기 지식은 옳고 주님의 지식은 무식하고 멸시해서 이게 이래 됐었는데, 한번 그물 던져 보고 보니까 이래 됐던 게 바꿔졌소 요래 가지고 있소? 자기는 높으고 하나님은 낮은 게 요래 가지고 있습니까 바꿔졌습니까? 주님은 높으고 자기는 낮아졌고 그만 이렇게 바꿔졌다 말이오.

이러니까, 행함에서 자기와 주님과에 대한 지식도 바꿔지고, 또 자기의 소원도 바꿔지고, 소원이 바꿔지니까 주님이 그에게 주시는 것도 바꿔져. 그거는 원치 안하고 고기 원하는 자에게 “네가 사람 취하리라” 하면 뭐라 하겠소? 그말 하면 베드로가 받겠소 조롱하겠소? ‘나는 배가 고파 지금 고기부터 필요합니다.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럴 것 아니겠소? 내가 변화돼져야 변화된 데 따라서 변화된 좋은 것을 줍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여러분들이 어쩌든지, 믿어지든지 안 믿어지든지 현실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행해 봐라. ‘내가 뭐 이 정직하게 하다가는 이거 다 장사 헛일이겠다. 이렇게 거짓말 안 하고 이라다가는 헛일이겠다.’ 하나, 이제 말씀대로, ‘진리대로 순종하고 영감대로 순종하고, 내가 나는 사죄받았기 때문에 나는 사죄받은 사람이니,’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한번 생각하고 ‘나는 죄가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라. 공심판에도 통과된 무죄자라.’ 무죄자라는 걸 자기가 한번 생각을 하고,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에게 무죄의 은총을 공로를 베풀어 주셨다는 그걸 그거 한번 생각하면 달라져.

‘이러니까 나는 죄 없는 자다, 나는 다시 죄 가운데 들어갈 수 없다.’ 하면은 벌써 변화가 많이 돼 버렸어. 사죄를 한번 믿어서 사죄 받은 자인 것을 인정하면은 자기에게 모든 뭐 어두움이 확 달아나 버리고 ‘이렇게 대속으로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하셨으니 내가 다시 어짜든지 이 의를 중단할 수 있나? 의를 중단할 수 없다.’ 의를 중단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걸 믿지 안하고 의를 행할라 할 때는 이거 뭐 자기가 태산을 뚫고 나가는 거 한가지였는데 ‘주님이 칭의를 주셨으니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나는 의가 내 생활이고 내 본능이니 내가 의를 중단할 수 없다.’ 믿고 하니까 태산 같은 것도 구멍이 열려 가지고 있다 말이오. 쑥 들어가 버려. 그만 통과돼 버려.

이러니까, 어쨌든지 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 봐라. 행해 봐라. 행하는 데서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 봐라.

따라합시다.현실에서!주의 말씀이!믿어지든지 안 믿어지든지!주님을 멸시하든지 존대하든지!일단!네 현실에서!주님의 말씀대로!행해 보라!행한 후에는!받은 증거로!네가 꺼꾸러진다! 너도 변화되고, 생활도 변화되고, 소망도 변화되고, 행동도 변화되고, 전부가 다 변화돼서,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마는 내게 있는 것으로 준다” 하니까 그만 다섯 가지 해 주지 안했소? 그라니까 메어다 놓은 사람 죽도록 공들였지만 사람은 누구 사람 됐소? 그러니까 사람 취하는 사람 되고 말았어. 이러니까 어짜든지 여러분들이 해 봐요.

자, 오늘 아침에 보니까 여게서 양성원 학생들하고 이 사람들이 한 백 명이나 돼요. 양성원 학생들하고 이 교역자들하고 한 백 명 되니까 백 명 되면 오늘 아침에는 우리 서부교회 새벽기도 나온 사람은 한 구백 명밖에 안 되는 거 같애.

지금 이 수면 천 명 좀 넘겠는데 백 명을 제하니까 뭐 좀 그뭐 천명도 안 돼.

구백 명 좀 넘은 거 같애.

이런데, 오늘 새벽에 나와 보니까, 나와 보니 후회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후회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나와 보니까 이제 후회 안 되고 나와 보니까 나온 게 잘됐다 싶은 사람 손 들어 봐요. 그거라. 이제 끝났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이거 교역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좀 시간이 늦었습니다. 반 시간 늦었어. 지금 다섯시 꼭 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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