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양을 먹이라

 

1983. 10. 30. 주전.

 

본문 : 요 21:15-23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해 주신 그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바다에 가서  제자들이 다시 옛날 어부로 돌아가 가지고 고기 잡고 있는 거기에 가셔 가지고  된 일입니다.

 그들에게 고기 잡은 것을 가지고 오라 해 가지고 생선도 굽고 조 반을 예수님이  친히 지으셔서 그들을 청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써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옛날 어부로 돌아가서 고기 잡고 있는 그들이 다 잡아도 잡지  못하고 다 헛일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던지라 해 가지고서 고기를  잡아서 끌고 나오라 해 가지고 조반을 만드셔서 대접을 했습니다.

 조반 먹고 난 다음에 주님이 이 베드로에게 세 번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처음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이렇게 부르지 아니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 믿기 전 옛날 이름입니다.

 불러 가지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데에 베드로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할 때에 "내 양을 먹이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두번째 또 같은 말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보다 사랑하느냐 말은 빼놓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을  때에 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이떻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치라" 했어, "내 양을 치라" 양을 치라 말은 양을  다스리라 관리하라 그말입니다. 양을 네가 다스리라 관리하라 하는 그런 말을  치라 그래 말한 것입니다.

 세번째 또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래 불러  가지고 말씀을 하시니까 이상하게도 베드로라고? 다시 개명을 하도록 이름을  지어 주신 이가 주님이신데 왜 옛날 이름을 자꾸 이렇게 불러 가지고 두 번이나  '나를 사랑하거든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이라다가 또 세번째 그렇게  불러 가지고 물으시니까 그만 베드로가 놀랬습니다.

 세 번이나 옛날 자기 이름 버린 자기 이름, 개명된 옛날 이름을 불러 가지고  묻는 것도 이상하고 또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것도 이상하고 또  세 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마음에 이상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알지 못하심이 없사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주님 앞에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세번째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그렇게 세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네가 젊을 때에는 네  마음대로 했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이렇게 했지마는 네가 이제는 신앙에 장성함이  되어 가지고 이 복음의 일꾼으로서 네가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그 일을 하려고  하면 네 팔을 벌리리니 이렇게 네 가 범위 넓게 복음 운동을 이렇게 네가 하려고  하면 이제는 네가 네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고 다른 사람이 너를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나를 따르라"  이랬습니다.

 이 말씀은 차차 복음으로 장성하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장성하고 주님의  이 도가 인간의 참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도인 것을 점점 깨달아 이제 이 도를  전하지 안하고는 안 된다는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차차 넓게 이 도를 전파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너를 띠 띠운다 띠를 띠는 것은 긴장하는 것이요 조심하는  것이요 마음 단속입니다.

 과거에는 네 마음대로 너 좋으면 됐고 네게 해로우면 다 피하고 이랬지마는  이제는 네가 너 좋은 대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네가 할 일도 못 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하기 싫은 것도 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가고 싶은 데도 가지  못하고 가기 싫은 데도 가고 이제는 너를 자유하는 것이 네가 아니라 내 양들이  너를 조심하게 하고 너를 단속하게 하고 너를 이리 저리 가도록 양들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서, 양들의 은혜를 인해서 양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양들이  손해보지 않도록 이것에게 네 마음이 눌리고, 붙들려서 네가 자유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네가 죽는 데까지 나아가서 네 마음대로 못하고 주를 사랑하는 일 곧  주의 원하시는 양떼들의 구원 유익을 위해서 네가 내 생명도 네 마음대로 못하고  복음 위해서 생명 바쳐 죽는 그런 데에 나아가게 되리라.

 거기까지 네가 죽도록 충성해서 참 주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함이 되는 이 일을 인해서 네 모든 과거에 네 사욕대로의 네 주관대로, 네  형편. 네 사정 네 마음대로. 네 좋도록 그렇게 못하고 양떼를 위해서 이렇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생명까지도 이 복음을 위해서 참 복음 때문에, 형제들 구원  때문에 그들에게 도를 바로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인해서 네가 순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 복음을 영광스럽게 모든 어린 양떼들에게 확신을 주는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이제는 나를 따라 오라" 하시면서  말씀했습니다.

 그럴 때에 그 곁에, 마지막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지키실 때에 예수님이 "나를  팔 자가 가까왔다" 말씀하시니까 "주님을 팔 자가 누굽니까?" 그때 물을 때에  사도 요한이가 예수님의 그 품에 안겨서 예수님에게 기대 앉아 가지고 그래  묻던. 특별히 사도 요한이는 예수님에게 사랑도 받고 신임도 받았습니다. 아주  제자 중에도 참 주님에게 대한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비한 그런 제자였습니다.

 성경 기록한 것을 봐도 사도 요한이가 기록한 성경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서,  이서, 삼서,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는데 그는 참 성경 기록한 그 영감  받아서 기록한 데도 주님을 독특히 사랑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그 제자를 보고 주님에게 묻기를 "그러면 나는 그래 되지마는 여기에 같이  있는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사람을 너와 같이 이렇게 순교를 당하도록 하든지 내가  재림할 때까지 그때까지 안 죽고 살아 있도록 하든지 그 사람에게야 내가  어찌하든지, 내가 또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내가 할 일이 있고 네게 대해서는  네게 대해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인데 그 사람을 내가 재림 때까지  죽지 안하고 있도록 그렇게 머물러 있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는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너는 남이야 어찌 됐든지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이 제자들 가운데에 퍼져 나가 가지고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이는 주님 오실  때까지 죽지 안한다고 하셨다 그런 말이 많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이가 죽지 않겠다는 그 말씀이 아니고 '요한이야 죽든지 살든지 이래 죽든지  저래 살든지 너는 그 사람이야 어찌되든지 네게 상관할 것 없고 너는 나와에만  관계니까 네가 너 할 일만 네가 해라.' 하는 것으로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뚜렷이 좀 베드로와 같이 우리도 좀 이상하게  뚜렷하게 우리에게 그 충격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주님이  베드로라고 개명까지 해 주시고 옛날 이름 시몬이라는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을까 하는 그것이 베드로도 이상하게 여겨서 두려워했고 우리도 참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입니다.

 사람은 기독자로서 중생된 사람이라면 중생된 새사람으로 살 때도 있지마는 또  옛사람으로 돌아가 가지고 옛사람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이래 단속하신 것이 베드로라고 이름 지어 줄 때에는  아버지의 영감대로 한 거기다가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줬는데 영감되었을  때에는 문제가 없지마는 사람이 영감이 식어지고 세상이 들어와 가지고 마음이  흐려지고 속화되어지고 옛사람으로 되어질 그때에 우리는 참 실수하기 쉽고  우리는 믿음의 새사람의 본의가 아닌 자기 뜻이 아닌 그런 실수도 또 그렇게  변해서 환장되는 참 소용 없는 욕심도 욕망도 두려움도 뭐 이떻게 그만 옛사람이  되면 우리가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상이나 지식이나 비판이나 소욕이나  행위가 뭐 참 측량도 못 할 만치 그떻게 탈선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참 원통히 눈물 흘려 회개하고 강하고 굳센 그  결심을 가진 그것도 어느 때 어떻게 돼 가지고 그만 옛사람으로 돌아가면 자기도  상상 못 할 만침 완전히 변질되고 뒤에 생각하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 만치, 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저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고 할 만치 그렇게 우리는 변질되어  타락할 수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세 번이나 주님이 다졌습니다.

 네가 영감으로 베드로와 같은 그런 위대한 참 반석같은.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  할 그런 성령의 충만한 새사람도 되지마는 또 상상도 못 할 옛사람으로  돌아가기가 쉬우니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그것을 언제든지 명심하고 다지고  다지고 다져서 네가 옛사람이 나올 때에 옛사람으로 돌아갈 때에 너의 모든  소욕과 사상과 네 생애는 다 변해지고 마는 것이니 그럴때에 네가 조심해서 네  생애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다지고 다지라 하는 그런 뜻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도 진리와 성령으로 새사람을 입은 새사람으로 살  때도 있지만 옛사람으로 살기도 쉽다' 하는 이것을 언제든지 우리는 기억해서 참  우리의 그 생명의 호흡과 같이 옛사람 새사람이라 하는 이것을 기억하고 언제나  우리는 깨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걸 봅니다. 새사람이 되면 참 자기가 봐도 '어디 이럴 수가 있겠느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자기가 봐도 자기를 존경할 만하고. 참 칭찬할  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하고 모든 사람이 '아!' 그 사람을 기념할  만하고 이런 자기가 되는 때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 환경에 몰려쳐 가지고 시험에 들면 참 그때는 그게  옳다고 좋다고 이렇게 바르다고 죽기까지 뭐 생명을 내 대기까지 그 사람으로  사는 것이 옳다고 이렇게 주장을 하고 힘을 쓰지마는 성령의 감화가 와 가지고  회개를 척 하고 보면 그게 참 완전히 미친 생활입니다. 섞인 것이 없는 미친  짓이오. 섞인 겻이 없 는 것이 완전히 멸망 밖에는 안 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을 우리가 또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이 오시면 참 굉장히 의인이 되고 성령이 나가고 마귀가  와서 우리를 주장하면 상상도 못 할 허무한 사람이 되는 이렇게 우리는 아주  양극으로 형언 못 할 의인으로 상상 못할 아주 인간이 아닌 이런 짐승에도 비할  수 없는 그런 자로 이렇게 전락할 수 있는 우리인 것을 언제든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참 살아갈수록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구하기를 왕도 하려면 할 수  있고 왕으로 삼아 달라 해도 왕위도 주려면 엘리야가 줄 수가 있고 선지자의  지위도 주려면 줄 수가 있고 그때에 뭐 이스라엘의 왕이나 이방인의 왕도 다  주려면 엘리야가 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기독신자였지마는 세계의 신불신자의  모든 전체에 최고의 권위를 엘리야가 혼자 가졌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 어떤 그 이방인의 정권들도 자기 마음대로 그 정권자를 세웠고 또 교회  안에도 그 권력가를 엘리야가 마음대로 세웠습니다. 또 죽은 자도 살리고 없는  가운데 있게 하고 하니까 엘리야는 참 볼 때에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소원해라. 소원하면 소원하는 것을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떻게 말할 때에  엘리사는 다른것을 구하지 안하고 '당신에게 있는 그 영감, 그 영감 내게  주옵소서. 나는 당신보다 모자라니까 영감이 당신보다 더 충만해야 나는 이  세대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사오니 당신의 영감의 갑절을 나에게 주옵소서'  하는 그 영감을 구한 그 엘리사가 신앙에 장성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겪고 겪고 비판해 봤고 비판해 봤고, 모든 것을 평가 해 봤고 평가해  본 결과에 영감보다 더 우리에게 필요한 게 없고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영감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그만 참 형언 못 할, 땅에 이 자연인으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못 할 그런 참 사람이 되고 위인이 되고 광대하고 고귀하고  진실하고 그뭐 인간을 초월한 초인간의 본질과 본성의 사람이 되는, 자연인을  탁월한 탁월하되 무한히 탁월한 사람 자연인을 초월하되 자연인으로서 상상도 못  할 무한히 탁월한 이런 사람도 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토막 토막에 맛을 봤을  것이고 아마 겪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때 우리의 영감으로 된 그 생각은 하나님 심판 앞에 가도  담대히 자랑할 만하고 영원히 가도 만물에게 부끄럼이 없이 자랑할 만하고 그럼  참 상상 못 할 그런 이 자연인에 탁월한, 무한에 속하고. 영원에 속하고, 완전에  거의 속하는 이런 자기로 변화 되는 것을 우리가 자주 체험하고 또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으로 계속해서 살다가도 그만 암흑을 만나 가지고 영감이 떠나면  뭐 상상 못 할 그 형편도 없는 그런 증인된 것을 그것을 우리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앞에다 큰 집회를 정해 놓고 집회하기 전에 며칠 전에.

자기에게 늘 영감으로 충만해 있었는데 그 영감이 떠나고 나니까 도무지 이것은  무엇이라 겉잡을 수가 없고 아무런 진실도 하나도 없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아주 변해서 완전히 광인이 되는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서 못 견뎌서  빈들판에 가 가지고 발동을 치고 물에 가서 드러눕고 발동을 치고 저 산골에  가고 어디든지 이라다가 그 못 견뎌서 그만 레일에 가 가지고 치여 죽으려고  이래 가고 이렇게 갈급을 뭐 하고 참 자기가 봐도 흉하고 흉한 그런 사람으로  아주 전락되는 그런 것을 성도들이 많이 경험하고 그것을 공동으로 고백한 그런  것이 다 성도들의 전기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렇게 베드로 될 수도 있고 시몬 될 수도 있다는 양극에  변질될 수 있는 우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기억하고 주님이 옛사람으로 이렇게  변질돼 갈 때에 그때를 경고한 말씀입니다.

 세 번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이나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그분이, 개명하라고 개명시켜 주신 그분이 다시  옛날 이름을 불러 가지고 세 번이나 다지신 것은 우리는 얼마나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 옛사람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는 그때가  얼마나 두려운 때라는 것을 기억하고 미리부터 이 점에 대해서 많이 기도하고  우리 는 참 다지고 다지고 다져서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도 제목 가운데에 기본구원 열 가지를 입은 사람으로 산다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새사람으로 살고 옛사람으로 돌아 가지 않기를 기도하는  그 기도입니다.

 세 번 다지면서 뭘 부탁했느냐 하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녜,  사랑합니다." "내 양을 치라" "요한의 아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렇게 세 번 다 당신을 사랑하거든 양을 먹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양은 주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택한 자들이요 또 좁게 말 하면 믿는  사람들이요, 또 택한 사람은 그 택한 사람 가운데에 불교 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유교 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무신론자 속에 있는 사람도 있고 택한  자로서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는 그러 반대자 속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피로 구속한 양은  공산주의에게는 없다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 집은 저렇츰 예수 믿는  사람을 반대하니까 저 사람들 집에는 주의 양이 없으리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잃어버린 양이 어디 가서 지금 붙들려 매여 가지고 어디 가서 지금  헤매고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거든 나를 사랑함으로 내 양을 먹이고 치고  다스려 달라.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사랑하고 내 양을 나를 위해서  나를 인하여 사랑하면 그것이 막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을 주님이 구속한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주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니까 주님이 소원하시는 것이 그것이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대우하려고 해 봤자 대우할 게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자이십니다. 영원  자존자이십니다. 내가 그분에게 무엇으로 그분을 대우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기를 당신을 사랑하거든 내 양을 사랑해다고. 당신을 위하거든 내  양을 위해다고. 당신을 좋아하거든 내 양을 좋아해 다고. 당신을 귀중히 섬겨  애끼거든 내 양을 귀중히 애껴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양이 어디 들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지금 대적하는 내  원수 그 사람도 주님의 양인지 모릅니다. 지금 공산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독침을 가지고 우리를 죽이려고 달라드는 그 원수도 주님의 양인지 나는  모릅니다.

 어떤 이종교 속에 들어 있는 그 참 만고에 형언 못 할 그런 악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막바로 주님의 양인데 지금 목자를 잃어 가지고 이리에게 삼켜서 지금  죽고 있는 양인지 모른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주의 부탁한 양을 사랑해야  되겠으니까 주의 양이 어느 것인지 모르니 주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를 대접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을 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내게 와 가지고 권종을 대고 독침을 가지고 오고 하나님 믿는다고서  몽둥이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이래도 주님이 내게 말씀 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거든 내 양을 사랑해다고' 이렇게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기 때문에 나를  대적하는 지금, 몽둥이로 나를 치고 있고 나를 고형하고 고행하고 있는 그  사람이 주님의 양인지 나는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해야 주님을 사랑함이 되지 그  사람에게 내가 홀대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홀대하는 것이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내가 박대하는 일이 될 수 있을런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사랑에  빚진 사람으로 주의 사랑에 팔린 우리들은 땅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때에 그 사람은 나를 미워서 죽이면 죽으면서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을 마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하나님의 복음을 이스라엘에게 전해서  이스라엘이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경고해서  건져내려고 그들에게 사는 복음을 전해 줬을 때에 그들은 분개해서 모여 가지고  돌로 쳐서 스데반을 돌조산을 만들어 가지고 돌무더기를 만들어서 죽였습니다.

 죽일 때에 그는 주님이 부탁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에 돌조산 속에 묻혀  가면서 하는 말이 그거였습니다. '보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주님이  살아서 아버지 우편에 계시면서 지금 나를 기다리고 서서 계시는 것을 보라.

눈을 떠서 위를 쳐다보라. 주님이 천국 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서 계시는 것을  보라.' 이분이 너희들의 주님 이시니까 주님을 믿으라고 이랄 때에 아우성을  치면서 돌을 마구 던져서 돌조산 속에 파묻척 죽어가면서 마지막 기도가  그것이었습니다.

 '주님이여, 저희들이 알지 못해서 저렇게 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죄를 돌리지  마시고 죄를 정하지 마시고 그들을 구원해 달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치고  운명했습니다.

 그가 주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 들보다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주님. 십자가의 대속하신 그 주님. 죽음으로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도 주를 생명 바쳐 사랑해야 마땅할 그분이 소원하기를 양을  사랑해 달라고. 양을 길러 달라고 쳐 달라고, 다스려 달라고, 잘 관리해 달라고,  먹여 달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그분의 음성을 그는 기억하고 주님의 사랑하는 그  사랑에 불붙음이, 자기를 돌로 쳐서 돌 속에서 죽도록 돌무더기가 되게 하는 그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뜨거움이 그 원수를 위해서 정죄하지  않기를 그들을, 몰라 그런 것이니까 구출해 주기를 기도하고 떠났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는 스데반이 하는 일 중에 가장 기쁨이요 만족이 됐을 것입니다.

 그 죽음 속에서도 참 주님을 사랑했고, 그것 참 죽음에서도 주님을 사랑했고  죽음에서도 주님을 사랑했고 생명보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께서는 그-돌로 쳐서  죽이는 그 원수를 향하여 주님 앞에-정죄하지 말고 구원해 달라고. 그들이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변호하는. 양을 사랑하는 그 양을 사랑함에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만족히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하나님이 만족하셔서 하나님의 만족하시는 그 얼굴의 광채를  스데반에게 비출 때에 스데반의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광채가 나면서  변해졌습니다.

 그때 그것을 책임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로 한 책임자 사울 이 거기  있었는데 사울이 거기에에서, 죽으면서도 그렇게 기도하는, 기도하는 그 인격성,  그 참 인격성, 그 위대성, 그 진실성,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성,  그런 가운데서 위해서 또 기도하는 것 그럴 때에 하나님의 빛이 그에게 와  비추어 가지고 얼굴이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사울은 '남자가 칼을 뺐다가 도로 꽂을 수가 있느냐?-냈던 바람 에 또, 죽이고  난 다음에 이제-다메섹으로 가서 또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겠다.' 이렇게  가면서도 그 속에, 스데반이 참 하나님의 도를 밝히 생명을 애끼지 안하고 바로  증거해 준 것과, 죽음에서도 원수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간절한 기도가 있은  것과, 또 하늘에 주님이 보인다고 말하고 그 얼굴에 광채나는 만족하고 광채나는  빛난 얼굴을 보고 사울에게는 그 마음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고민이 있고 고민이 있고 가면서도 번민이 고민이 있어 고민하여, '과연  하늘에서 하늘 문을 열고 기다리고 서신 그분이 누굴까? 스데반에게 그런  가운데서도 요동되지 않는 그 뜨거운 인류의 사랑을 준 그 사랑을 주신 이가  누굴까? 그이의 얼굴을 빛나게 반사케 한 그분이 누굴까?' 이것이 점점 주님을  가깝게 하게 되어서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났습니다.

 빛에 나타나 가지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다시 살아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 때에 그때에 사울은 그만 완전히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눈은 그때 멀었습니다. 그때 그 먼 눈이  뒤에 회복이 안 되었습니다. 그 평생 눈먼 그것으로 자기에게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눈이 멀어 가지고 그때 다메섹 성내에 들어 가서 그만 거기서 회개하면서.

'다메섹에는 사울이라 하는 사람이 율법사가 오니까 이 사울이 와 가지고서 이  성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다 몰사시킬 것이라 하고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선포했습니다. '나는 이렇고 이렇고 이랬는데 예수를 나는  하나의 이단으로 알았는데 그가 우리가 대대토록 고대한 메시야다. 구주시다.'  하는 것을 거기에서 증거하고 나도 지금 이제는 예수님을 내 구주를 믿는다 하는  걸 증거할 때에 그 성에서 모든 사람들이 잡아 죽이려고 이래서 거기에서 피해서  들창문. 성 들창문으로 광주리에 달아 내려서 죽임을 면해 아라비아에 가 가지고  삼 년 동안을 울었습니다.

 삼 년 동안을, 대대로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마는 메시야의  대적이 되고 참 메시야를 영접지 못했고, 메시야를 영접한 스데반 같은 그런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부탁하신 그 부탁의 호를 그대로  신실히 전하는 자기가 되지 못한데 대해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예수 믿는 교회에  대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거짓부리 유대인들을 깨워 주지 못한데 대해서, 자기  본족에 대해서 이방에 대해서, 주님에게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그는 삼 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울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삼 년 그곳에서 참 인사불성한 뭐인지 모를 만치 피골이 상접하게  그는 거기에서 회개를 하고 뜨거운 각오를 가지고 주님 앞에 능력받아 가지고  나와서 사도 바울로 사도들 중에 제일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잘못하면 시몬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이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이 부탁한  양이라고 우리가 보는 것이 그것이 틀림이 없고 바로 보는 것이라 양이  아닐지라도 양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양인 줄을 알고  그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도 가지고 우리 모든 걸 다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그 양을 위해 서는 내가 기회를 주시는 대로 하나님이 형편을 주시는  대로 힘을 주시는 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주의 양떼를 사랑하는 여기에 다 바쳐서 살고 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초신자를 위한 기도)  주님 강하게 막고 있는 악령과 죄악의 쇠사슬에서 주님의 자녀를 찾아 인도해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은 지금 주님을 믿지마는 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결정된 자들이 이 세상에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아버지를  찾게된 것을 아옵고 감사를 드립니다.

 저들에게 깨닫게 하사 이제는 만유의 대주재가 저의 아버지가 되었고 만유주  대주재의 아들된 것을 깨달아 이제는 조심하여 아버지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믿고  순종하며 아버지가 싫어하는 죄를 짓지 말고 아버지에게 온갖 축복과 모든  능력이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주님만 의지하여 영육이 다 복받게 하시고,  언제든지 밤이나 낮이나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들어 주시고 저들을  붙들어 주사 이 믿음에 흔들리지 안하고 연한 순같이 자라가도록 은혜를 주시고  이들을 구원하시느라고 수고하고 애쓴 사랑하는 종들에게 또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헛되지 않다고 하신 주님이여, 저들에게 더욱 더 사람을 구원할 뜨거운  사랑과 간절한 열심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주께서 끝까지 함께하사  이들로 통해서 온 가정이 다 믿어 구원 얻게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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