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적 영감과 문서 지식을 함께 영접

 

1984. 3. 26. 월새

 

본문: 마태복음 14장 26절∼33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또 자기가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명상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 말씀이라는 이 지식만 자기가 접,할  수도 있고 또 이 지식 안에서 역사하시는 내재적 영감을 접할 수 도 있습니다.

 외식은 어떤게 외식인고 하니 이 세상만 보고, 세상이 모르는 참 영원한 온전한  그 세계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세상 사람대로만, 세상만 보고 사는 그것도  외식이요.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만 보고 외우고 또 읽고 듣고 이렇게  하면서 그 안에 성령님이 내재하셔 가지고 감동시키는 이 영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외식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다른 것은, 물론 모든 것을 바로 말하고 또  모르고 말하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말하신 대로는 다  바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른 말 삐뚤어진 말 그것도 다르지마는 세상 말은 다  물질에 대한 것은 바른 말이지마는서도 인간에 대한 말은 전부 삐뚤어진 말이지  한마디도 옳은 말이 없습니다. 오계명에 효성을 하라 하는 그것이 이종교마다 다  그런 종류의 말이 다 있습니다. 그래도 오계명에서 말씀하는 그 말씀과 이종교나  다른 모든 사상들에서 이 효를 말하는 거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아주  뿌리부터 다르고 결과까지가 다르고 모두가 다릅니다. 하물며 다른 말은 다  다른데, 사람들의 말은 사람에 대해서 한 말은 전부 다 모르고 벌로 저거  짐작대로 한 말인데 어떻게 만물보다 거짓되게 부패한 사람들이 완전한 자의  그의 뜻을 알아서 그대로 발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부 다 틀립니다.

 이렇게 그 틀린점이 바로 알고 말한 것과 잘못 알고 말하는 그것도  틀리지마는서도 그것보다도 크게 틀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자존자이신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부도 하나님이신데  꼭 한 하나님이십니다. 한 하나님이 마치 한 사람이 이 면에서는 호주요 또 이  면에서는 남편이요 이 면에서는 아버지요 그 가정에 한 사람이 셋 직책을 가졌기  때문에 이름은 다르지마는서도 사람은 하나인 거와 그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러기에, 이 성령님이라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이 지식과 사람들의 지식이  크게 다른 것은 하나님의 지식에는 그 속에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내재하셔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내재적 영감이라고 발표하는 그 성경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영감이 계십니다. 이것은 저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의 신학자들이 다  공통되어 있습니다. 다 깨닫고 경험하고 깨닫고 성경 안에는 과연 하나님이  내재하신다 하고 또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이렇게 자기가 듣고 그 속에 영감이 역사하지 안하면, 영감의  역사를 받지 안하면 그것은 다 껍데기요 헛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서 예수님에게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미혹시켰습니다. 세 번이나 미혹할라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미혹을 했으니 그 얼마나 그 악령이 사람들에게 대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해 가지고 그에게 미혹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달라들어서 했는데 우리에게 어렵게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서 미혹을 시킬 때에 그때에  성신의 감화가 동행했겠느냐? 동행하지 안했습니다. 성령은 동행하지 안하고 그  지식만 제가 그렇게 악용을 해 가지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악용을  당하지 안했지마는서도 제가 악용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지식은 뭐  무신론자들도 이렇게 얼마든지 악용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성령의  감화가 같이 하지 안하기 때문에 그 생명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또 자기가 명상을 하고 연구를  하든지 이럴 때에 성령의 감화, 내재적 영감을 자기가 동시에 접해서 동시에  받아야 되지 성경 말씀만, 이 문서 지식만 자꾸 접하고 속에 영감 은혜를 접하지  안하면 그것은 다 그만 지식만 돼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교만해지고 맙니다.

성신의 감화가 되면 그 사람이 자꾸 겸손해지고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참 알게 되니 천하의 중량보다 이 말씀의 권위는 더 크니 이 말씀에 대해서 권위  큰 것이 인정되게 될 것이고, 또 권위 큰 것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의무와 책임이 있으너 떨리고 그대로 안 하면 안 되겠고 또 하면  그렇게 구원이 된다는 이 소망을 생각하니 욕망이 불붙고 이러니까, 자연히 그  사람은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지고 또 구원을 이루어서 자체나 모든 생활이  변화되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됩니다. 이건 필연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데서부터 힘을 써야 될 것이냐? 이 성경을 문서적으로, 이  지식적으로만 자기가 알고 내재적 그 영감을 받는 일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무시해 버리면 헛일입니다. 그러면, 내가 성경을 읽은 데도 영감이 나와 함께  하기를 우리가 힘을 씁니다.

 제가 ○○○ 목사님이라고 호주에 있는 선교사인데 제가 성경학교 갔을 때에 똑  성경학교 두 달만 공부했는데 그 ○○○ 목사님이라 하는 그 목사님을 제가 접해  봤습니다. 선교사들도 많이 접해 봤지마는서도 그만침 경건한 사람이 없었고  그만침 진실한 사람을 제가 선교사로서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랬는데 그분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보면 그, 성경 읽는 것이 참 마음에 애터질 만침 생전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아주 힘들여 뭘 읽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는 처음에 '와 저분이 성경을 저렇게 읽지 못하고 저렇게 까끌까끌하게 저렇게  읽는고?' 이래 생각을 했는데 나는 그분의 뭐 지식이 어떤가, '그래도  선교사라면 유식할 건데' 이랬는데 나중에 말을 들어보니까 그분이 실지로 논문  박사 학위를 여덟 가지 가질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가졌는데 그 사람이 논문은 다  썼지마는서도 논문을 그것을 제출만 하면 되는데 그 제출 한번 하라 해도 안  하고 여덟 박사인데 한 가지 학위도 받지 안하고서 그대로 있는 참 아주 실력  있는 분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디다. 그런데, 그분은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에게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읽고 거기에 영감이 없는 그런. 그런 성경 읽는 것을, 또  성경을 뭐 외우는 것이든지 성경을 명상할 때에. 그 명상 할 때와 물론 읽을  때에는 좀 차이는 있지마는서도 어깼든지 성경을 읽을 때에 성신의 감화를  자기가 접하는 그것을 표준으로 하고서 성경을 읽지 성경 글자나 읽는 그것을  표준으로 해 가지고서 읽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제가 들었습니다.

 성신의 감화가 자기에게 성경 읽을 때에 오느냐 안 오느냐 하는 증거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지마는서도 그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가지고 가지를 못하고 바다 가운데서, 그 갈릴리 바다는 그렇게 큰 바다가  아니기 때문에 가면 벌써 건너편에 가서 도착하고도 넉넉한 그런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까지 바다 가운데서 신강을 했으니까 그분들이 뭐 굉장히 당황했고  놀랬고. 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서 유령이라고 이래 했으니까  당황했습니다. 그때에는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모든 풍랑이나 이런 것도 다  조절하시는 개별 섭리의 주권자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배가 가지  못하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이 변해 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대한 모든  자연들도 다 변해져 가지고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그들을 상당히 변해진 것 만치 아주 흉용하고 어려움을 당케 하는  것이 그것이 필연한 하나님의 본능의 섭리입니다.

 이랬는데. 그렇게 뭐 형언할 수 없이 놀랬을 것이고, 오만 뭐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고. 분주했을 거고, 복잡했을 거고, 아주 두려워했을 것이고 절망이 됐을  거고. 온갖 그 사망에 속한 사망의 요소들이 그들에게 가득히 덮어 가지고  있어서 뭐 아마 그들의 얼굴빛도 달랐을 것이고 눈초리도 달랐을 것이고, 피부도  다 달랐을 것이고 모두 다 달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됐던 베드로가. 금방  고만 물귀신이라고, 주님이 오시는 걸 보고서 물귀신이라고 고함을 질렀던 그  사람이 주님의 음성을, '내라 두려워 하지 마라. 내라.' '내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하는 주님의 음성을 한번 들을 때에 그만 그 사람이 완전히 변해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변해졌느냐? 그 음성 한번 듣고 난 다음에는 물에 빠진다는  것의 두려움이라는 거는 하나도 없.고 주님이 물에 걸어오라고 이렇게 말하시면  물위에 걸어가고 싶은, 주님이 명령하시면 무엇이든지 해 보고 싶은. 또 주님이  명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뭐 죽어 봐라 하면 죽어도 살려낼 수가 있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 이러니까 이 주님이 이렇게 능력을 가지시고 명하시는  주님이신데 나는 주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의심했다는 그런 것을 베드로는 빨라서  그런 것을 다 연상해서 깨달았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왜 그러냐? 그 바다  깊은데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으라 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은 고기 잡은 거  보고 고기 많은 거 보고 놀래고 모두 이래 했지마는서도 베드로는 거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러져서 참 죽은 자와 같이 되어져  가지고 '주님이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주님을 모실 수 없는 이런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 강한 느낌을 가지고 그라기 때문에 주님이 위로를 하시고 그 한  마디에, 네가 두려워 하지 말아라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고기를  잡는 네가 어부가 되지마는 사람을 수입하는, 네가 사람 수입의 그 어부가  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 보면 그 베드로는 좀 실수도 많지마는서도 깨닫는  그런 것도 아주 빨랐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가 말하기를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하십시오.' 그럴 때에 주님이 걸어 오라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로라 하는 그, 주님의 음성을, 주님의 음성은 지금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그때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 들은 그 음성이  전부 이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계이 말씀하시기를,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말하기를 변화산에 가 가지고서 아버지의 음성도 들었고  주님의 음성도 들었고 모세와 엘리야의 음성도 들었고 다 들었는데 그 듣고  눈으로 그들이 보고 한 그것보다도 더 권위있고 확실한 예언이 우리에게 있다  이랬습니다. 확실한 성경 말씀이 있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그때 음성으로 듣는 것보다 문서로 이렇게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온 이 신구약 육십 육권의 이 계약은 음성으로 듣는 것보다도 더 권위 있는 더  확고한 우리들이 알기 쉽고 접하기 쉬운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베드로가 들은 그 음성보다도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접하는 것은 이  말씀은 그보다도 더 명확하고 정확한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자가가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은 막바로 살아 계시고 항상 계시고 영원히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것보다도 더 권위있게. 내가 더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확실성 있는 이 음성을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이 말씀한 내로라 하는 그  말씀을, 음성을 들은 것보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바른 설교를 듣는 것이나  성경을, 자기가 읽는 것이나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직접 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직접 말씀을 듣는 것인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서부 교회 와 가지고 얼마 동안은 시무하면서 그렇게 늘  설교할 때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무슨 말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반드시 그것을 소개하고서 그래 증거했습니다. 왜 그렇게 소개하고 증거하느냐  하면 이 성경을 기록해서 근 이천 년 전에 성경을 기록한 이 성경을 지금 내가  읽어서 소개한다고 그렇게 이 현실성 이 실상성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안하고  어떤 재고 문서 그 문서를 지금 들추어 가지고서 읽는 것으로서 그렇게  인정하고, 주님이 직접 이 시간에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 주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 말씀으로 직접 말씀하는 이 실상성, 또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그 실상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상성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제가 서부 교회 오기까지의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집회할 때에는 반드시 그말을 처음에 강단에 올라서 가지고 '오늘 밤, 오늘 이  시간에 이 강단에 찾아오신 주님은 무슨 말씀을 가지고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지금 친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개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그때 믿지 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면에 대해서 흐리기 쉽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지금  성경을 이래 읽는 것은 이 안에 계시는 내재적 영감이 이 글자 속에 든게 아니라  이 진리 속에서 지금 내주하셔 가지고 영감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이 가운데  계시고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가운데. 마치 그릇  안에 뭘 담은 것처럼 요 안에 담겨져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지금, 성령님이 주님이시요, 주님이  성령님이시요 성부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내가  입으로 통해서 듣습니다. 입으로 통해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읽을 때에  입으로 통해 가지고 귀로 듣는데, 읽을 때는 내가 입으로 통해 듣고 내가  마음으로 명상할 때에는 마음으로 통해 듣고 주님의 음성을 내가 직접 듣는  것입니다. 직접 듣는 것이라는 것을 요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요것을 인정해야  되지, 인정치 안하면 그 사이가 성글어져 버립니다. 인정 자기가 하면서 아,  그러면 내재적 영감이 지금 내게 와 가지고서 역사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그것은 증거가 있으니까,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라.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모를지라도, 그 결과를,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지 않느냐? 그 결과를  보면 아니까 그 결과라는 것이 여기도 좋은 결과가 증거가 되어 있습니다. 이  베드로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에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사망적인 것이 이  베드로를 덮고 있던 그 모든 사망의 것이 완전히 벗겨져 버렸습니다. 그게  완전히 벗겨져 버렸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의 근심 걱정이 완전히 물러가지 안하고 모든 염려가  물러가지 안하고 모든 욕심이 다 정선되지 안하고 근심 걱정도 그것이 참,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꼭 걱정을 더 해야 될 걱정도 있고,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공연한 걱정을 했다' 버릴게 있고, 또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자기가 거기에  대한 소욕이 희미했지마는서도 이제는 성경 말씀을 읽어서 영감을 받을수록이 그  소욕이 강해져서 죽어도 나는 이 욕심 이것은 이루어야 되겠다는 이 소욕이  강해지는 그런 것도 있고, 이 성경 말씀을 자기가 읽을 때에 자기의 그 자기에게  있는 사망에 속한 현실은 다 이것은 일소돼 버리는 것입니다. 사망에 속한  현실은 다 자기 심령이나 자기 심령이나 자기의 모든 태도나 정신이나 모든 것이  다 일소가 돼 버리고. 완전히 일소가 돼 버리고, 또 이 생명에 속한 것은, 요  말씀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말씀한 그 생명에 속한 것은 즉시 자기가 받아서  생명화 돼 버리고 맙니다. 생명에 속한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마음도 즉시  변해지고, 생각도 변해지고. 뜻도 변해지고, 그 지식도 변해지고, 비판도  변해지고, 평가도 변해지고 이러니까 두려움도 변해지고, 평안도 변해지고.

욕망도 변해지고. 기쁨도 변해지고 다 변해져 버린다 말이오. 그러면, 사망의  것은 다 없어지고 생명의 것으로서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이것이 영감을 받는  증거입니다.

 자기가 이 성경을 보고서 영감받는 영감에서 더 충만해지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영감받고서, 또 눈을 감고 거기에서 감고 이같이 이 말씀을 생각하고  생각함으로써 거기에 이 말씀은 고대로지마는서도 그 속에 영감은 점점 더  우리에게 충만해져서 영감이 충만해지니까 한 성경 말씀을 보고 깨달은 것이 그  성경 말씀은 하나뿐이라고, 비유를 들면은 하나뿐인데 하나의 그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니까 그 안에 수많은 진리가 내포 되어 있는 것을 자꾸 명상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그 한 말씀 안에 수많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그것이 자꾸  보여지니까 더 넓어지고 본다 말이오. 이러니까, 여기에서 사람이 자꾸  커집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성경을 '내가 요번에 한 달 동안에는 이 성경을  한번 일 독을 하겠다. 일 독을 하겠다. 그런데, 일 독을 할 뿐만 아니라 내가  여기에 대해 연구를 좀 하겠다' 하고서 읽었는데 성경을 읽어나 가니까, 신구약  성경 일 독하겠다 했는데 불과 몇 절을 그 이상 나가지 못 합니다. 몇 절 이상  나가지 못하고 그 몇 절을 자기가 읽고 명상할 때에 영감이 자꾸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충만해져서 더 깨달아지니까, 그 말씀만 깨달아지니까 그 다음에 딴걸  읽을게 없고 그 말씀을 깨달았는데 자꾸 깨달아 나가다 보니까, 깨달아 나가다  보니까 그 말씀 속에는 모든 성경이 다 들었더라 그걸 다 경험과 체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 들었더라.

 이러니까, 그 말씀만 명상하고 연구했는데 다른 말씀도 다 그 말씀이무슨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저  줄줄줄 그렇게만 읽을라고 하지 말고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 안에 내재적 영감이  계시니 내재적 영감을 내가 같이 받아야, 그 영감은 내게 와 가지고 뭘 하는고  하니 성경 말씀을 인정하게 합니다. 성신의 감화가 인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나에게 인정의 도수를 자꾸 높여갑니다. '이 성경 말씀은 참되다,  참되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말했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성경이 말 한 대로  하나님은 전능자라 주권자라 주재자라 자존자라 창조주라 이렇게 자꾸 자기가  안정되는 것이, 점점 인정되는 도수가 강하고 인정되는 그 양이 자꾸 넓어지고  커지고 자꾸 인정이 더 강해지고, 또 성신의 감화가 오는 것은 이 인정만 될 뿐  아니라 거기에 소욕이 생겨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인정되고  깨달아지니까 이 하나님을 자기가 참 모시고 싶고 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고 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원통하고 이래서 하나님께 대해서 자꾸 깨달아짐이 달라지고  자기에게 확실히 행할 수 있는, 행하지 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이 행함의 능력을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전능자인데 왜 이 전능자를 모시고 내가 어떤 때에  두려움이 왔을 때에 두려워했던가? 어떤 그런 것을 당할 때에 비겁해서 그와같이  내가 옹졸해지고 그렇게 했던가? 이래서, 자기는 자꾸 과거에 그런 현실에 한  것을 잘 못된 것을 회개를 하면서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이 능력의  품안에 안겨 있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이 사랑의 품안이라는 것을 인정치  못해서 과거에 내가 이런 실수 했는데 천하 사람이 다 인정치 못하는 그런  인정하기 어려운 그런 때라도 나는 주님을 인정해서 주님의 품안에 안겼다는  자로서 평안하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한번 닥쳤으면 좋겠다, 그런 일을  닥쳤으면 좋겠다는 자꾸, 이 사람으로 자꾸 변화되어 나간다 말이오. 자꾸  변화되어 나가기 때문에 이것이 이제 베드로가 당한 거 마찬가지로. 이러니까  모든 사망에 속한 것이 다 일소돼 버리고 그만, 마치 등불의 빛이 오면 어두움이  차차 차차 그만 자꾸 피해서 달아나 버리고 어두움이 소멸되는 것처럼 사망에  속한 것이 없어지고 이 생명에 속한 것이 자꾸 우리에게 충만해집니다. 그것이  뭐이냐? 내재적 영감을 받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설교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성경 읽을 때에도 그러하고 자기 혼자  명상할 때에도 그러하고 이 성경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 계시니 내재적 영감과 이  성경 문서 지식과 같이 이제 영접하라 하는 그것을, 오늘 아침에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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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너희는 세상의 빛/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8090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7
67 너희는 세상의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0703 남권찰회 선지자 2015.10.27
66 너희는 세상의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0818목새 선지자 2015.10.27
6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2토새 선지자 201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