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문 좁은 문

 

1983. 5. 28. 토새.

 

본문 :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에 두 문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하나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문이라고 이렇게 표시하신 것은 문 밖에서는 문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현실 현실은 한 문 한 문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 밖에서는 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사람은 모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로소 그 안에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말은 마치 그 사람에게 모든 소유나 전신전체의  지체를 가지고 있는데 생명 하나 딱 떠나면 그만 소유에 대해서도, 자기의  영광에 대해서도, 자기의 실력에 대해서도, 자기의 욕망이나 대우에 대해서도,  아주 달라집니다.

 그런 격언이 있는데 정승, 정승으로 말하면 지금은 뭐 원청 좀 민주주의가 돼서  '국무총리' 해 봤자 그렇게 뭐 별것 없다 이렇지마는 옛날로 말하면 그만 그  나라의 하나님은 왕입니다. 왕 다음에 존귀한 자는 정승입니다. 정승 말이  죽었을 때에는 문상꾼이 굉장히 많고 선 물도 위로의 부조도 굉장히 많이  들어왔는데 정작 정승이 딱 죽고 나니까 그만 그다음에는 문상꾼이 하나도  없었다. 현실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이 있을 때에 자기의 세계도 살고, 자기의 무대도 살고, 자기의  사업도 살고, 자기의 권위도 영광도 자기 자체도 이렇게 살아 움직이지마는  생명이 딱 떠났다 하면 그때부터 그 모든 것은 다 동결이 되고 해이해지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멸망이 오면 어떠며, 멸망이라면 사망인데, 망하고 죽는 것인데,  사망과 멸망의 차이, 멸망이 오면 나와 내게 대한 것이 어떠하며, 또 내 세계가  어떠하며, 내게 대한 모든 무대와 활동의 범위 그 모든 분위기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우리는 잘 모든 것을 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죽으니까 그만 모든 것이 다 동결이요 다 풀어지고 그저 죽은 것은  살아서 있던 그것이 전부 비참으로 변해지고, 영광이 수치로 변해지고, 권위가  무능으로 변해지고, 존귀가 천대로 확 변해지고, 변해졌다가 만일 그 사람이  깨어났다 하면 당장 변해져 버려. 깨어났다고 하면 모든 것이 변해집니다.

이렇게 사망과 생명의 이 차이는 그 형언할 수 없이 그게 차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자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사망 세계로 들어가서, 사망 세계로 들어가서 사망을 접하는 것과 또  죽은 것이 생명을 접해서 살아난 것과 그 세계가 달 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의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은 사망 세계로 들어가고 생명 세계로 들어가는 걸음이라.

그것이 다 사람은 예측 못하나 그 실상에 달라지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이  달라진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새롭게 맺어진다 하는 말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걸음은  우리의 한 걸음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새 관계가 맺어진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니까 지혜도 자기가 상상도 못한  새로운 지혜에 연결이 되고 또 새로운 능력에 연결이 되고 또 새로운 변화에  속성에 연결이 됩니다.

 산 자가 또 생명문을 열고 들어가도 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자기의 생명에  관련된 모든 생명 형편과 한 걸음 열고 들어간 그다음의 생명 형편이 아주  다르다. 또 생명의 형편과 사망의 형편은 측량할 것도 없이 달라진다. 그것을  표시해서 여기에 문이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었으면 그 사람의 세계도 죽 었고,  소유도 죽었고, 사업도 죽었고, 활동도 죽었고, 영광도 권위도, 존귀도 전부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정승 말이 죽으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마구 떠들고 이렇게  대우하지마는 그건 정승 안면 보고 그렇다 말이오. 그러나 정승이 탁 죽고  나니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그거는 정승이 죽었으니까 끝났으니 뭐  그것 그럴 필요가 없다 그거요.

 그러기에 사람에게 사망보다 더 가난해지는 것이 없고, 무능해지는 것이 없고,  비참해지는 것이 없고, 천해지는 것이 없고, 가련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가 존대하고 있는 브레즈네프도 그 사람이 척 생명이 끝나니까  그만, 그 사람은 세계를 움직이고 세계에 지금 이걸로 가지고서 있다가 딱  끝나니까 그때부터 자기의 세계와 모든 것은 다 사망입니다. 그 사람 사망하니까  모든 건 다 사망이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죽었다가 떡 살아나면 어찌  되느냐? 모든 것이 회복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멸망이니, 멸망이라 말은 사망인데 멸망과 생명은 그  모든 것이 아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 가치적으로 다르다는 것, 또  영광적으로 다르다는 것, 권위적으로 다르다는 것, 다른 것을 이것을 표현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뭐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자연계시에서 우리가 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생명이 떡 끝나면, 골리앗 대장이 그 사람이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전국이 그 사람 명령 하나에 움직였지마는 생명 딱 끝나니까 그  모든 그 사람의 가졌던 위엄이나 권위나 존대나 영광이나 모든 것은 다  끝나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지혜 있는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허사라' 이래 말하지마는  죽으면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말은 잘하지마는 실상 사람들이 모른다  그말이오. 그렇츰 그런 줄을 몰라. 또 죽은 것이 살 아나는 생명은 좋은 것이요  어떻다 말하지마는 참으로 그 생명의 가치가 어떻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말해서 문이라, 가려져 있다. 문을 열고 봐야 되지.

 그래서 '문을 열라' '문들을 열고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라' '문들을 열고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라' '너희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없다' 하는 그것은 문 밖에서 문 안에 것을 아무리 제가 추측하고 상상하고 뭐  어떻게 추상을 한다고 해도 그는 제 생각과는, 생각은 미치지 못할 세계라  그거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것이 죽으면 다 이래 됐다가 생명이 돌아오면 다  살아나는 것 사망과 생명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 그 생명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다시 새 연결, 새 관계, 또 새 분위기 그런 걸 말 합니다.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있는, 그 안에는 뭐 성문이라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성 안에 모든 것이 다 장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궁전이라면 자기가 문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상상 못 하던 궁내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지마는 그 안에 보지 못하는 것처럼 사망으로 가는 것도  생명으로 가는 것도 사람이 들어가기 전에는 상상이나 추측 가지고 모를 아주  이렇게 변해진다.

 그러면 사망과 생명이 얼마나 차이 있는가? 가만히 좀 생각해 봐야 됩니다.그  사람에게 사망이 왔으면 당장 어찌 되는가? 또 죽은 자에게 생명이 돌아오면  어찌 되는가? 우리는 그 토막을 생각할 때에 산 자가 생명이 딱 끊어지면 어떻게  그 비참해지며 또 생명 없는 죽은 자가 생명을 탁 돌아와서 다시 생명이 회생이  된다면 어떻게 되나? 그 차이는 추측 가지고도 추상 가지고도 모를 그 차이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는 인간이 참이라면 복되다 저라면  뭐 화가 된다 말은 아무리 자기가 잘못 걸어가는 그 걸음에 대한 그 자기에게  닥쳐오는 보응이라는 것보다도 잘못 걸어 자기가 봉착하는 그 모든 만나지는  봉착과 또 죽었던 자가 생명을 얻어 살아날 때에 그에게 봉착되는 모든 분위기나  주위나 자체나 소유나 모든 것에 관계나 그런 것이 아주 확 달라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그저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제나 작년이나 금년이나  이렇게 같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마는 실은 그것이 사망과 생명의 차이 있는  길이라, 사망과 생명의 차이 있는 길이다. 네가 한 걸음 걸어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고 또 네가 한 걸음 걸어 사망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사망과 생명으로 들어가는 그것은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이 예측이나  추측이나 그것과는 영 다르다. 다르면 어떻게 다르나? 그저 잘 아는 대로 생명이  죽었던 자에게 생명이 돌아오는 것과 산 자에게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과 그  차이가 어떤가 그것을 생각해라.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한 걸음 한 걸음의 그에게 관련되는 모든 관련,  접촉되는 모든 접촉, 그에게 대한 모든 분위기 이것은 이렇게 달라진다.

 말이 '쇠 털같이 많은 날에 하루 뭐 이래 살면 어떠며 저래 살면 어떠며,  이렇게 하루 하루 세월이 지나가니까 어짜든지 한 시간이라도 지나 보내지  안하고 잘 놀자, 잘 먹자.' 하는 그게 모두 다 인생관이 각각 달라서  그렇습니다.

 '세월은 요 토막인데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땅위에서 어짜든지 욕심을  채워보자' 하는 그것이 인생들이요, 성령은 말하기를 '네가 지금 몇 시간이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마는 네 한 걸음 한 걸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서 생명과  접하고 사망으로 들어가서 사망과 접한다.'  그러나 생명과 사망에 접하기 전에 예상이나 예측이나 추측 가지고는 알 수  없도록, 아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 죽는 걸 보고 '죽으니까 저래 된다.' 죽는  사람에 대한 모든 일반 사회적 견해 또 상식적 견해 그런 것은 알고서 '죽으니까  그만 허사로구나. 저리 됐다.' 이러지마는 죽은 사람이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한  그와는 다르다. 생명도 그와 같다.

 그러기에 한 토막 한 토막의 우리의 생활이라 하는 것은 사망으로 들어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일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아주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참 그 결과가 맺어지는 것을 여기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측량 못 할.

 죽은 자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다 살아납니다. 살아난 것처럼 한 걸음 주님과  가까와지고, 내 자체가 주님과 가까와지고 또 주님이 내게 대한 모든 역사가  달라지고, 또 내가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모든 피조물이 내게 대하는  것이 다 달라지고,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또 피조물이 내게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 대해서  피조물에게 대해서 그는 상상도 못 할 만치 달라진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이란, 한 자욱 한 자욱이라는 것은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한테 붙어 있다. 그  문은 무엇인가? 그 문은 네가 만난 현실이다. 그 현실은 이렇게 큰 차이를 지금  맺어지는 현실이다. 그러면 넓은 문은 뭐인가? 넓은 문도 네 현실이다. 좁은  문은 뭐인가? 좁은 문도 네 현실이다.

 그러면 넓은 문은 찾는 사람이 많고 길이 넓고 평탄해서 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주 문도 좁고 길이 협착해서, 협착하다 말은 마치  어떤 물건 그 속에 꼭 끼여서 아주 거기에 용신할 곳이 없을 만치 빡빡해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어떻게 애를 쓰면 겨우 뚫고 들어갈 만치 협착이라 하는 것은 아주 좁고 거기에  용납할 곳이 아주 없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협착이라, 그저 겨우 비비고 뚫고  들어가면 들어갈 정도의 좁지 거기에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없는 그런 길이다.

여유가 없는 그런 문인데 좁고 그런 여유 없는 그런 문이기 때문에 그리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 저리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현실에 넓은 문은 어떤 것이 넓은 문인가? 좁은 문 빼 놓고 나서는 넓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어떤 게 좁은 문인가? 자기의 현실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자기가 지켜야 될 자기 진리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만난 현실 현실에는 자기가 걸어갈 자기 길, 자기가지켜야 될  자기 진리, 자기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자기에게 분담된 자기의 의무  책임, 어쨌건 현실에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련된 그 자기 길이  있다. 그 길은 아주 좁다.

 또 그 길은 걸어가려면 이리도 저리도 못 한다. 꼭 좁아서 그리 틈을 틀고 그래  가지고 들어가야지 그 무슨 여유 있게 활개를 젓고 그래 가는 그런 문이 아니다.

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그런 문이다.

 거기에는 자기의 형편이나 사정이나 누구의 의사나 자기의 경험이나 체험이나  그런 것을 조그마치도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좁은 문이다. 가다가 이러니까 좁은  길이니까 쉬어 가지고 가자, 요럴 때는 또 요렇게 조금 요런 조화를 붙여 가자,  그럴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넓은 길은, 내나 그것도 네 현실인데 네 현실에 넓은 길은 그저  전인류라면 다 들어갔습니다. 타락 후 배암이 점령한 지 후에 사람들이 천 명이  됐든지 만 명이 됐든지 아마 그 동안에는 문화를 건설한 사람의 수는 심히 많을  것이오. 역사를 건설한 사람의 수는 많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인간들이 건설해 놓은 문화요 또 인간들이 내어놓은 만들어 놓은 모든  넓은 도로입니다.

 네 현실에는 네가 무식해 그렇지 천 명 말을 들으면 네 현실에 천 개의 길이  있을 것이고, 만 명의 말을 들었으면 만 명의 길이 있을 것 이고, 네가 억만  명의 그 사상이나 인생관이나 그 모든 지식을 들었으면 네 앞에는 억만 길이  있을 것이다. 그게 넓은 길이다.

 이 사람은 이래 말하고 저 사람은 저래 말하고,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 뭐 거기에서 양적 가감이나, 종류적 가감이나, 방편적 가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처세술이 능해서 이리 가다 안 되면 저리 가고 저리 가다  안 되면 이리 가서 얼마든지 그들은 이리도 갈 수 있고 저리도 갈 수 있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길로 인도하는 길은 이리도 못 가고 저리도 못 간다.

 그걸 천로역정에 기독자가 걸어가는 그 걸음에, 그 길에 사자 두 마리가  엉크리고 있는데, 그 사자 두 마리가 엉크리고 있는데 그리 통과해서 가야 될  터인데 그 사자에게 가다가는 다 잡아먹힐 거라 그거요.

 '여기에를 어떻게 갈 수가 있겠느냐?' '네가 치우치지만 안하고 가면 된다.

자세히 봐라. 그 사자 뒷다리를 묶어놔서 마구 날뛰고 뛰고 이렇게 해도 그  가운데 그저 사람 겨우 하나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그만큼은 사자 두 마리가 발이  대이지 아니하는 그런 틈이 있다. 네가 이리도 저리도 치우치지 안하고 그 한  가운데로 그리만 딱 가면 거기 가 섰어도 사자가 아무리 날뛰어도 네 몸에  사자의 발이 닿지 않는다. 그리 한 가운데로 가라.' 그렇게 천로역정에 표현을  해 놓은 것과 같은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

 그것이 무슨 길이냐? 하나님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오. 하나님이 주신  생명길, 모든 것이 살아나는 길, 성공하는 길, 승리하는 길, 모든 것을 취하는  길, 어떤 참 유력한 사람이 죽으니까 모든 소유는 다 내놨어. 그렇다가 그 사람  생명이 떡 돌아오면 모든 것 다 차지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을 받는 길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 다 네  실력을 이렇게 품어서 모든 것을 발휘해 가지고서 그 모든 것을 모든 것들에 다  비춰, 햇빛이, 태양은 하나지마는 그 빛을 모든 것에게 이렇게 다 발휘해서 그  빛이 쫙 비춰 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너로 인해서 모든 피조물에게 이렇게 나가던  것이 하나님과 딱 끊어지면 그만 그만이라.

 이 전등이 전선과 끊어지면 그만 깜깜해 아무것도 못 하요. 다시 이으면 그  모든 빛이 가는 것처럼 이렇게 이 길로 인도하는 길, 사망과 생명이 어느 것이  좋으며 살았던 자가 죽을 때에 그 주관적 기분이 어떨 것이며 죽은 자가  살아나면 주관적 기분이 어떨 것인가?  네 주관이나 객관이나 모든 피조물이나 하나님이나 모든 세계가 확 바꿔지는 이  사망과 생명인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이렇게 좋고, 평안하고, 행복되고,  권위 있고, 영광 있고, 모든 것을 취득할 수 있고, 또 모든 것에게 이렇게 줄 수  있는 이 길인데, 그러면 이 길 이상은 없는 이 길이 참 좋은 길인데, 아주 좋은  길인데 이 길을 사람들이 찾지를 못해서, 찾으면 갑니다.

 찾지를 못해서 이 길을 이 길인 줄 모르고, 모르니까, 모르니까 찾을 마음이  없지 알면 찾을 마음이 있어. 찾으려고 애쓰는 자는 찾으니까 기쁘고 즐겁고  걸어가지 못 걸어갈 것 없는 것이오.

 그러면, 월남한 사람들 말 들어보면 뭐 그 숲속으로 강을 건너서 이래도 '요  길로 가야 월남을 해 가지고 살지 그리 안 하면 죽는다' 이러니까 그 길 험한  거는 생각지 아니하고 어짜든지 그 안내자를 만나서 그 길만 알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 가지고서 뭐 생명 있는 대로 다해서 걸어가는 것처럼.

 이렇게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찾지 않는다.

생명길을 모르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그 광이-예를 들면-그 길 광이 두 자, 석 자, 넉  자, 백 자, 천 자, 만 자, 억만 자 마구 이 길이 얼마든지 넓은데, 이 사람의  말대로 이리도 갈 수가 있고, 이리도 현실을 살 수 있고, 저 사람이 말하는  저대로도 현실을 살 수 있고, 어떤 학자가 말하는 그대로 살 수가 있고, 또 중이  말하는 그대로 살 수가 있고, 또 공산주의가 말하는 그대로 살 수 있고, 그 길은  한없이 넓다. 또 그 길을 취하면 평탄하고 평안하다.

 다니엘이 모든 사람이 다 기도 안 한다 했는데 다니엘 혼자만이 기도하는 그  길은 협착합니다. 그러나 그 길만 탁 양보하고 한 달 동안 뭐 기도 아니 하고,  또 속으로만 기도하고, 안 한다 하고 기도하고, 그리 안 하면 대답 안 하고,  이렇게 뭐 해서 그 한 길, 그 한 길 외에는 평안하다. 사람들이 다 평탄을  원해서 그 현실에서 넓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 길은 사망으로 가는 길이다.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

 다니엘이 요리도 조리도 조화를 부리지 못하고 꾀를 쓰지 못하고 자기의 의사나  소욕이나 자기의 지혜나 방편이나 이거는 하나도 가감을 못 하고 꼭 그 한 길  그것만 하니까 다른 사람들 볼 때에 미련타, 고 집이라, 처음에는 '저 사람이  너무 고집 부린다 교만하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그 길 가다가서 생명이 끊어져도  가면 '저 미련하다 어리석다' 이래 된다 말이오.

 그러나 그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가감이 없다. 조화가 없다. 조그마치라도  다른 방편이 없다. 거기에는 요리도 조리도 못 하는 그 길이다. 그 협착하다.

아주 좁아서 뭐 요리도 여유가 있고 요리도 여유가 있는 게 아니다. 다시 그  길밖에는, 겨우 자기 하나 빠져 나갈 수 있는 그 길밖에는 공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 가면 사람 보기에는 사자같은 그 무서움이 있어도 그것이  거기에 접해지지를 아니한다. 다니엘이 그 길을 걸어갈 때에 사람 보기에는  사자구덩이 집어넣으니까 그는 고통이겠다 이랬는데 다니엘이 그 길을 양보하지  안하고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자기의 중심이 그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지식이 그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욕망이 그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비판과  평가가 그 길을 걸어갔고, 사상이 그 길을 걸어갔고, 고기 덩어리만 그 길  걸어간 것 아니라.

 자기의 영과 육 아울러 가지고서 그 길을 걸어가니까 사람들의 보기에 다니엘이  죽었다 이랬지마는 다니엘은 그때 사자가 먹었든지 말았든지 다니엘에게는  평강이요 다니엘은 사자의 해가 그에게는 하나도 오지 못하고 다니엘이  살아나오니까 사자로 말미암아 다니엘은 높아졌다 그것만이 아니고, 만일  다니엘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하면 그 사자로 인해서 다니엘은 손해를 봤을까? 더  큰 영원 불변적인 고정적인 수입을 봤다.

 또 요셉이 걸어간 길은 자기는 신앙으로 일관한 그 길을 걸어서 좁은 길  걸어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고 비참한 길이고 자기 속에 부패성이 들어서  비참한 길이었지, 그러니까 잠시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여러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안 할 수 없었으나 지 나가고 난 다음에 그게  기뻐합니다.

 그러면 마치 모세는 홍해 가에서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은 좁은 길을  택해서 가기 때문에 그에게는 염려나 두려움이나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솜씨 구경하자 하고 지금 구경할라 하는데, 그 길에서 좁은 길 그 아주 좁은 길  그 중앙선, 아주 거기에서 조금만 틀린 사람은 팔이 하나 나갔으면 팔이 하나  끊기고, 다리가 하나 나갔으면 다리가 하나 끊기고, 몸뚱이가 반이 나갔으면  몸뚱이 반이 쪼개지고, 요리도 조리도 안 가고 그리만 딱 간 것은 하나도  상해받지 안하고 이래 가기 때문에 그 밖에 나간 그것이 요셉이도 놀래서 이제는  죽을 지경이다 놀라고 비참했지마는 지내 나오고 난 다음에는 감사하고 기쁘고  자꾸 그 걸음 걸으니까 하나님의 나의 보호가 더 믿어지고 이래서 벌써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한 탁월한 높은 차원에 가 가지고서 있기  때문에 그까짓 거 애굽 나라 통치라 하는 그거는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 네가 닥칠 때에 네가 현실  닥치는 거기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있다. 그 문에는 어떤 무슨  주위에 뭣이 피조물이 어떻게 한다 해도 하나도 피해는 받지 안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광되어진다.

 네가 여인이 몸을 장식하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아이구,  저 사람 비참하게 됐다.' 하는 그 비참이 들어서 그 사람에게 영광이 되어지고,  모든 것이 네 영광 되어지고. 네 장식 되어지고, 네 옹호 되어지고, 네 실력  되어지고, 네 가치 되어지고, 존귀 되어지지 절대로 너에게 해하지 못하는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 있다.

이런데 이 길을 사람들이 몰라서 구하지 않는다. 찾지 않는다. 이 길을 알아서  이 길, 이 넓은 길 가운데에 모든 길은 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수많은  인간들이, 자기 당한 현실에 수많은 인간들이 '요래도 된다. 조래도 된다.' 하는  수많은 인간들이 말하는 그것은,  그리 가면 평안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좋은 길이라고 이십세기의 과학에서 지금,  미국 같은 나라는 어떻게 뭐 길이 많이 났는지 '요래야 된다 조래야 된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자껏 일해서 해야 제 소유는 없어요. 겨우 월부로  자기가 가지고 하루 하루에 생활하는 그 월부 그것 지불하면 될 정도의 수입밖에  없어요.

 그러나 하나 둘 자꾸 편리합니다. 편리해서 얼마나 많이 편리한지? 그러니까  편리한 그 댓가 낼라 하니까 자기 여유 시간은 하나도 없어. 그것 다 편리하고  이래도 저래도 편리해서 이십세기 문화가 좋다 해서 이십세기 문화의 수많은  편리한 길이 있지마는 그 길에는 반드시 댓가를 내야 된다.

 그 댓가는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길을 양보해서 나가니까  네가 지금은 평안하지마는 그것은 뭐이냐? 사망으로 인도 하는 문이기 때문에  사망은 하나님과 끊겨진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만물과의 자기와의 끊겨진  것을 가리켜 말을 합니다. 참 자기와의 끊겨진 것을 가리켜서 말을 합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뭐 그 길을 가도 사람들이 상상과 추측과는 아주 판이하다.

그런데 생명으로 가는 그 길은 아주 좁아서 천인 만인이 거기에 대해서 천론  만론이 있는데, 어떤 현실에 대해서 자, 사람이 그러면 났으면 어째 길러야  되느냐? 열 살 먹을 때는 어째야 되느냐, 아홉 살 먹을 때는 어밑야 되느냐?  거기 대한 천인 만인이 벌써 아동 교육이라든지 무엇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데  하나님이 딱 말씀하신 것 하나 있다 그거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한 길이 있어. 그래 그건 좁아.

 아주 좁은데 또 그 길을 가는 데에도 사람이 사람 좋게 뭐 이랄 수도 있고 저랄  수도 있고 서로 타협적으로, 서로 양보적으로, 서로 화평적으로, 서로 상의해서,  서로 서로 양보해서 이렇게 하면 얼마든지 평안하고 좋아. 그렇지마는 그 결과는  사망이다. 너희들이 한 길 외에 많은 길이 있지마는 많은 인생들의 낸 길이  있지마는 그거는 다 결과가 사망이다.

 그러기에 너희 앞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 들어갔으면  다시 후퇴는 못 한다. 문 열고 들어가면 다시 후퇴는 못 한다.

 거기에서 또 꿰뚫고, 딴데로 또 잘못 갔으면 이래 꿰뚫고 새 길을 뚫어서  회개해 가지고 새 길을 가지마는 이제 '잘못 들어왔다. 도로 나가야 되겠다.'  나가지는 못한다. 딱 닫겨서 나가지는 못한다. 후퇴는 못 한다. 네가 사망으로  들어가도 후퇴는 못 하고, 사망으로 갔으면 거기에서 다시 네가 앞으로 생명으로  뚫고 들어 나가든지 이게 있지 뒤로 돌아서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 길은 사망과 생명의 이 길이 있는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아주  좁고 협착은 하기는 하다. 왜 협착하니 왜 협착하나? 왜 협착하나? 사자 속에  사자에게 안 물어뜯길라고 하면 가운데 좁은 그 길밖에는 갈 수 없는 것처럼 왜  하나님께서 요리도 못 하게 하고 조리도 못 하게 하고 똑 요래만 가는 그 좁은  길로 인도하느냐? 그것은 요리도 못 하는 것은 네가 몰라 그렇지 그거는 수많은  원수에게 삼 켜지고 요래도 수많은 원수에게 삼켜지는데 요리도 못하고 조리도  못 하는 것은 원수에게 삼켜지지 않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거는  그렇게 좁다.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무한한 비참을 향해 가고 무한한 행복을 향해  가는 우리의 노면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길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길인데 이 길에는 하나님이 내게 명령하시는 둘이 없는  꼭 좁은 한 길 그게 있습니다. 거기에는 절대 피조물이 해하지 못합니다.

피조물은 다 옹호하고 있고 또 높이고 있지 하나님도 피조물도 그 좁은 길은  옹호만 하지, 왜 좁은 길이 됐느냐? 요것에게도 해를 받지 안하고 조 사망도  받지 안하고 모든 사망을 받지 안하고 사망을 다 피하니까 좁아졌다. 또 모든  미혹을 다 그것을 피하고 보니까 좁은 길이 돼졌다. 아주 협착하다. 그러나 그  길로 가면 생명으로 인도한다  거기 가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생명적 관계라, 사망적 관계가 아니라 생명적 관계라. 피조물과도 다 생명적  관계, 영원한 관계, 불변의 관계, 완전의 관계, 하나님과도 완전한 관계 이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에 협착한 길이지마는 그 길이 복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게 현실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걸어가는 자기의  노면이다. 자기의 길이다. 현실은 자기 길, 현실 외에는 길이 없다. 현실은 자기  길인데 이 현실이라는 자기 길은 두 길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 그 좁은 것  하나있고 하나님의 뜻 외에 수억억만만의 그 뜻이요 주장이요 지식으로 되어  있는 한없는 넓은 길이 있다. 그러니까 그거는 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요 길을 걸어간 본인들은 다 기쁘고 즐거웠는데 그 본인 속에 그 길에 대해서  그 길과 반대되어 있는 옛사람 아직까지 성화되지 못한 게 있으면 못한 것만치  걸려서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다가 다 칼로 끊는 것처럼 다 끊겨버립니다.

이제 갈라 하니까 할 수 없어 그것은 끊어버리고 가야 돼. 그래서 마지막에는 손  길 갈 수 있도록, 그게 뭐이냐? 자기 부인입니다.

 소유 부인, 지식 부인, 자기의 뭐 권위 부인, 그런 것 '아이고, 이것 가져갈라  해 안 되겠다.' 그것 다 놓고 떼놓고 마지막에는 자기만 걸어간다 그거요.

단신으로 걸어가. 그 길에는 평탄과 생명뿐이라.

 그러기에 우리의 현실은 무한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길이다. 그 길  외에는 다른 길 없다. 자기 현실이라는 이 현실을 밟아서 걸어가는데 이 현실은  좁고 넓은 두 길이다. 좁고 넓은 두 길이다.

 네가 현실 닥쳤을 때에 안 믿는 부모는 와서 요렇게 해라, 또 믿음 없는 남편은  요렇게 해라, 믿음 없는 부인은 요렇게 해라, 또 상관은 이렇게 해라, 뭐 부하는  이렇게 해라, 또 자기 사업은 또 요렇게 해라, 네 형편은 네가 이렇게 해라,  별별 것들이 많이 있다.

 네 안에도 수많은 강도와 절도가 들어와 있다. 네게는 수많은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 수많은 것들 네 주관들이라 하는 너 아닌 네가 가득히 들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가다가는 요놈이 나서 가지고 '아무래도 요래 해야 된다 조래 해야  된다' 많지마는 그런 넓은 길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이리도 저리도 하는 길이 아닌 하나뿐인 이 단일 이 길이니까 이 길로 가면 아무  피해도 당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 발이 대이지 안하는 좁은 그 간격이 있는 그  길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데 이 길은 걷는 사람을 말하지 않고, 찾아서 들어가는 사람 많고 '찾는  사람이 적다' 이랬어. 찾기만 하면 들어갑니다. 찾는 게 제일 문제라.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여기에는 사망의 문과 생명문이 있다' 하는 그것을 알고  있는 지식이 필요하고, 그러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 만이 살지 그 외에 다른  길은 다 멸망하는 길이라는 요것을 알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을 찾으려고  애를 써서 찾은 자는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현실은 무궁으로 향하여 가는 우리의 길이다. 그 길에는 넓고  좁은 길이 있다.

 그러면 그 길을 우리가 찾았을 때에는 그 길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능력을  힘입어서만 갈 수가 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이 능력 입고 있으니까 이 능력 입었다는  것을 네가 인식하고 이 능력 안 벗으면 된다. 안 벗으면 돼.

 지난밤에도 서 목사님이 설교하는 걸 내가 들었는데 시험이 없으면 안 된다.

악인의 꾀, 악인의 꾀에 안 빠지려고 악인의 꾀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은 저 뿌리에서부터 돋아오른 건데 악인의 꾀에 안 빠지려고, 죄인의 길  서지 않으려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대내전 대외전을 이것을,  대내전 대외전을 하려고 하니까 안 지려고만 하면, 안 지려고만 하면 어디서  나오느냐? 저 시냇가의 땅 에서 올라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그 신앙 걸음을 자기 주관에게도 모든 객관의 세력에게도  양보를 안 하고 자기의 신앙 걸음을 그대로 걸으려고 하면 못 걷게 하는 것이  강하든지 약하든지 약하면 그것 대항하면 약한 것을 제가 수입했고, 강하면 강한  것을 수입했고, 세계가 다 대적했으면 세계를 다 이길 수 있는 걸 수입했고, 그  연결돼 있으니까, 연결되어 있으니까 필연적으로 햇볕이 쪼이니 밑에 것  빨아당겨야 되겠고 빨아당겨야 되니까 빨아당기니까 빨아당겨 놓은 거는  제것입니다. 빨아 당겨 놓은 거는 제것이오.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 걸음에 대항해서 대항하는 그것을 투쟁해서, 대항하는  것을 투쟁해서 그것을 투쟁한 힘은 영원히 내 힘 돼 썼고 투쟁해서 이긴 힘은  영원히 내 힘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시냇가에 있는 무한의 진액과  수분을 내 자체를 만드는 데에는 대적이 많아야 되고 대적을 대항하는 그게  막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것을 내것 만드는 것이라. 내것 만드는 것. 그것 하다  보니까 무한의 것이 내것 됐어.

 우리 앞에는 이런 좁은 길 넓은 길이 있는데 어리석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시대를 따라서 형편을 따라서 요렇게 저렇게 처세하는 것 그것 민수기에 보면  '내가 미워하는 것을' '내가 미워하는 것을 네가 미워했기 때문에 내 미워하는  그 모든 진노를 풀어서 이제는 염병을 제해 주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만사천 명이 당장에 하루 저녁에 죽은 그 재앙을 내가 미워하는 것 내가  질투하는 것 네가 질투하기 때문에 했다 이랬습니다.

 한 길뿐인데 그 길을 버리고 아주 처세에 능하게 사람을 요렇게 또 융화하고  요렇게 타협하게 하고 요렇게 조렇게 해 가지고서 사람을 널펑하게 만드는 그런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우리는 그걸 미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요 변동시킨 요리도 조리도 못 하는  고게 있지 안하고 뭐 따라서 또 이렇게 사람을 해해서 딴 길 걸어가고. 한  길밖에는 없는데. 우리가 닥친 그 현실에는 한 길밖에는 없다는 걸, 한 길외에는  다 사망의 길이라. 그 길이야 한없이 있지.

 그런고로 타협하는 그런 버릇을 우리가 버리고 그저 주님이 노하는 것 우리가  노해야 돼요. 주님이 미워하는 것 우리가 미워해야 됩니다. 그 비느하스가  그렇게 음행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 가지고 어깨에 둘러메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내가 미워하는 그 도수대로의 미움을 네가 가지고서 이와 같이 질투했기  때문에 내가 미워하는 그 도수대로 네가 미워했기 때문에 네 질투로써 내 질투를  이제 다 삭혔다. 네가 나와 같은 질투를 가지고 내가 미워하는 걸 네가 미워했기  때문에 이제 내 미워하는 게 이제는 다 풀어졌다. 너 하나로 인해서 풀어졌다.

이제부터는 염병이 다 그치게 하겠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에누리 있으면 안 됩니다. 아주 처세술이 능해 가지고 이리  저리 하는 것, 뭐 요새는 사랑 사랑 해 가지고서 굉장한 타협과 화평 있지마는  그게 인격 같애도 아니오.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노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게  그분을 그분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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