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문, 좁은 문

 

1983. 5. 29. 주전

 

본문 :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깊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본문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멸망과 생명을  말씀했습니다. 멸망은 금생의 멸망과 내세의 영원의 멸망 두 차례 멸망이 있는데  세상 멸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나고 그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해서  영원 멸망으로 다시 시작해서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멸망은 금생 멸망  영원 멸망 두 차례의 멸망이 있습니다.

멸망은 첫째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과  만물들이 살고 자라고 또 평강을 누리는 그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 은혜가 없어지는 것이 멸망입니다. 그러면 없어지면 자기  자체의 영이 멸망을 받으니 그에게 참된 인격이 멸망받고, 그다음에는 몸이  멸망받고, 그다음에는 자기의 모든 활동이 멸망을 받고, 자기의 소유가  멸망받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평강과 영광과 존귀에 속한 모든 인간의 미점은,  귀중점은 다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도 다 같은 사람이지마는 그 층어리가 천층 만층 구만층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그 말이 정확히 맞는 것은 아니지마는 일방적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은 두고 인간 지식 이 육안으로 육의 감각으로 느껴 평가하는 것으로 그렇게  층어리가 있다 말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기 어려운 것 있는 것은 온 세상이 그 사람을 성공이라  성공이라, 영광이라 영광이라 하는 그것이 멸망 중에 제일 밑 절미 멸망, 제일  그게 멸망한 그 멸망이 되어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또 세상이 말하기를 그는  참 비참하다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지옥에 가 가지고는 거기에서는 조금 약한  멸망 수월한 멸망으로 그렇게 영원을 응보받는 것도 있습니다.

 멸망은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 둘째는 자체 멸망, 자기의 활동  멸망, 자기의 소유 멸망, 자기의 모든 광채, 덕이나 영광이나 명예나 존귀나  그런 것은 광채인데 광채 멸망, 그 멸망이 금생과 내세 영원에 멸망이 있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는 자존자, 주재자,  창조주, 주권자, 영원 통치자, 모든 것을 다 가지신 그분과 관계가 잘 맺어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보면, 이 자연계시께서 우리는 그런 것을 잘 봅니다.'저 집에 경제  형편이 차차 좋아진다.' 보면 혹 어떤 그 재벌가와 연결을 가져서 그의  혜택으로, '저 사람이 지금 지위가 차차 차차 올라가고 모든 그 권위가 커진다.'  또 그거는 권위 있는 사람과의 연결을 갖추어 가져서, '저 사람은 과거보다는  모든 생활이 나아진다' 혹은 좋은 농장을, 좋은 업체를, 좋은 그런 환경이나  분위기를 그런 것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의 형편이 점점 나아집니다.

 하물며 이 창조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점점 좋아지고, 그분이 나를  인정함이 커지고, 나를 돌보심이 점점 커지고 넓어지고, 그분의 온갖 그 지능의  능력이 자기에게 임하여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특별계시요 이 현상 세계 이것은 자연이라는 이 자연을 가지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이치와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께서 점점  좋아지고 온전해지고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강해지는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이  병으로 인해서 그 몸이 뚱뚱해지고 또 무엇이 기형적으로 커지고 이렇게 병으로  인해서 임시 그 사람이 좀 강건해지는 것도 있고 참 온전한 그런 건강으로  가지고 건강해지는 것도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옳고 참되고 바르고 거룩하고 진실하고 깨끗하고 또  올바른 지혜와 지식, 올바른 모든 욕망과 경영과 행위와 성과로 인해 가지고 잘  되어지는 그런 것도 있는데,  여기에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이 생명은 그만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세가 가까와지도록 되는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온갖 은혜 온갖 축복을 받는  그 길을 가리켜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우주와 영계는 지금은 떨어져 있지마는 조금 후에는 우주와 영계가 통일이  됩니다. 지금도 신령한 눈으로 보면 영계와 물질계는 한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차차 겉에서부터 온전으로 향하여 완전자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모든 것이  들어가고 있고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와서 이렇게 퍼쳐 가지고 모든 존재가  된 것인데 거기에 대공업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만들어 놓으신 큰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은 자존자 하나님으로 더불어 연결이 돼 그 충만한 것이  거기에 연결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연결되어 있는 그로 인해서 우주와  영계에 가득한 큰 것이 제작돼 있습니다.

 우주와 영계에 가득 찬 사랑이 제작돼 있고, 진실이 제작돼 있고, 거룩이  제작돼 있고, 지혜가 제작되어 있고, 공의와 정의가 제작되어 있고, 주권이  제작되어 있고, 제작되어 있는 이 큰 데에 그 모두 거기에 속한 지엽들이,  거기에 속한 모든 지부들이 꽉 차서 그것으로써 우주 영계는 가뜩 차 있습니다.

 그것이 무궁토록 영원무궁토록 살아서 움직이는 그 존재인데 그 각각 연결된  것이 연결된 제품이 있는데 그 한 제품이 우주와 영계에 가득찬 그 제품과 꼭  같은 제품으로서 그 제품 안에 우주에 충만한 제품이 안에 있고 또 그것이 그  안에 들었고 서로 상호 내주해서 다 살았고 그것은 한 힘으로 한 방편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사람의 영이라는 그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큰 조성이 있는  거기에 개인 개인마다의 영이 그 연결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충만이 각  영에게 연결되어 그 영이 비록 작으나 그 영 속에는 그 모든 것이 충만한 게 다  들어 있고, 또 그 영마다 그 영에게 육이라는 것이 달려 있는데 그 육이 한없이  커서 우주와 영세에 가득 차 있고,  그 모든 것이 다 건설되어 나열돼 있는데 그 영에게, 이런 사람 말로 말하면  전기 스위치 모양으로, 요것이 하나 연결되면 그 비유컨대 수 억천 만톤도 더  되는 그 모든 것이 마구 돌아가면은 쾅쾅쾅 쿵창쿵창 돌아가는데 거기에서는  그저 빛이 뻔쩍뻔쩍 나오면서 인간이 상상 못할 사랑의 빛이 나오고, 지혜의  빛이 나오고, 권능의 빛이 나오고, 또 인내의 빛이 나오고, 화평의 빛이 나오고,  정의의 빛이 나오고, 공의의 빛이 나오고, 소망의 확신의 빛이 나오고 그러다가  그 스위치가 딱 떨어지니까 마구 뿌숴지는 소리가 바싹바싹 막 큰 것이 뿌숴지고  절단나 가지고서 절단나는 것은 전부 폐기소로 마구 또 쓸려 내려갑니다. 이런데  그 스위치가 연결되면 그 전부가 다 생명체가 돼 가지고 살아서 오만 역사를  해서 사람이 상상도 못 할 기이한 것이, 한 말로 말하면 생명이라, 신령한  것이라, 빛이라, 의로운 것이라, 거룩한 것이라,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움직여서 거기서 다 제작돼서 나오고 그게 또 성장되고 이러는데,  거기에 아주 거짓말 입술을 가지고 있는, 또 꾀우는 유혹의 그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있는 악령이 와 가지고서 어짜든지 그 연결의 스위치를 끊으려고 애를  써서, 저는 끊을 권리 없으니까 각자의 심신이라는 심신, 마음과 몸으로 된  심신이라는, 우리가 안 믿을 때에는 순전히 심신이 지금 아주 죽기까지의 죽음을  가지고서 퍼들거리고 있는 그것입니다.

 그 심신을 유혹해 가지고 이 스위치를 끊으라 끊으라 하는데 끊으면 그 모든  것이 다 깨어져서 박살이 돼서 자꾸 폐기물로 나가고 또 스위치가 척 끼여지면  생명이 역사하는데 그 끼여지면 이 악령들은 도망을 쳐서 이리저리 숨고 또  끊어지면 그게 와 가지고서 장난을 치고 이래 해서 우주에 가득 찬 것이 죽고  살고 이 부분은 살았고 여기에는 죽었고 하는 그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 일이 계속합니다.

 지금도 자존자, 자존자, 뭐 아무리 제가 잘난 사람이라도 저는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 누구냐? 예수님이 그를 만들었소. 또 아무리 세계에 어떤  무엇이 크다 해도 그것의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내나 주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자라 말은 원인이 없는 자, 스스로 계신 분  그분,  그분이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영원무궁까지의 것을  단번에 다 설계해서 예정하셨고, 또 그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을 주권의  능력으로 하나씩 둘씩 순서 따라서 성취해 나가시고, 또 그것을 보존하시고, 한  토막 이 세상이라는 조그만한 모판에서 우주와 영계를 통치할 인간을 육성해서  성화시키는 이 일을 하시고, 심판 넘어 영원무궁에서 영계와 물질계의 통일된 그  나라의 것을 통치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그분의 생명과 신령의 나라, 영원불변의  나라, 완전의 나라, 이 모든 영원한 것, 완전한 것 그것이 거기에서 나와서 이  모든 피조물된 우리와 모든 만물들에게 그것이 와서 충만해지는데, 생명으로  인도한다 하는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모든 이 주시는 행복의  구원의 은총을 찾아서 점점 가까와지는 것, 그분과 그분의 모든 은총에  가까와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물론 그 시간에 인도를 받아서 그 시간에 속한 것은 살아나고 죽고 하는  것이 결정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모든 분자가 합해 가지고 이제 하나님과  자기와의 완전한 연결이 되어지는 이 연결을 조성하고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으로 인도한다. 생명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망은 절대자와 원수되는 것, 절대자의 은혜에 완전히 끊어지는 것,  생명은 절대자와 친밀해지는 젓, 절대자의 그분의 모든 은혜에 자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그 은혜에 점점 부합해지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사망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앞길에 무서운 멸망도 있고 참 심히 존영한 생명도  있습니다. 이 둘을 가리켜서 생명으로 인도한다 또 멸망으로 인도한다 하는 그  둘을 말했습니다. 사람이 뭐 아무리 수가 많아서 천태만상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나누면 둘입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느냐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느냐  두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러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악령이 그렇게 인도 합니다.

인류 시조 에덴동산에서부터 악령이 하와를 이리 인도했고, 하와의 유혹에서  아담이 이리 인도를 받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부정모혈로 난 이 자연인이라는  사람은 전부 이 인도를 받게 됐습니다.

이 인도를 받아 가지고 멸망하는 것을 여기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아담 하와 인류  시조의 멸망한 거기에 한 생명의 약속을 줬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오면 배암으로  말미암아 멸망받은 데에서 구원 얻을 수 있는 그런 길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여인의 후손과 배암의 후손이 싸워 여인의 후손이 배암의 후손의 머리를  상해서 다 멸하게 한다' 하는 그런 약속을 주시고 약속대로 그다음에  선지자들에체 '동정녀에게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사람되어 나타나셔 가지고 이  세상 구원하는 구세주가 된다' 하는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인간 구원에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에게는 두 길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예수 공로로 인해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 생명문이 생겼고 또 악령으로 말미암아 있는 이 사망의 문이 있고  이 두 문이 있습니다.

 이 생명문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이 가려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사람이 손 대지 안하고 그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서 갈라진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죄악의 담으로 말미암아 차단되어 있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서 그 차단된 장벽이 헐어진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졌습니다. 생명 문은 이 휘장 가운데로, 휘장이  찢어진 휘장 가운데 찢어진 그 길이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런고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성령이 인도하고 사망으로 인도 하는 길은  악령이 인도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걸음 두 걸음 인도받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든지 악령의 인도를 받든지 두 인도를 받고야 말지 제 독행하는 일은 못  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제각각 모두 멸망은 싫어하고 보다 좀 좋은  생명을 원합니다. 사람 앞에는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두 길이 있습니다. 없는  것 아니오. 사람들이 원하기는 다 생명의 길을 다 원합니다.

 마치 우리 몸이 장사의 몸이라도 생명이 떡 떠나면 그만 장사의 몸의 강건한 그  지체가 짐덩이가 되고 그때부터는 썩고 내음새 나고 맙니다.

 그러나 생명이 돌아오면 그 모든 게 살아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생명이라는 이거 하나의 묘사적으로 표현한 말씀인데 이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점점, 마치 생명이 오면 이 더러운 것이 차차 차차 이것이  깨끗해지고 치료되는 것, 어떤 의사에게 말하니까 약은 그저 방어하는 것뿐이지  치료는 자체가 치료한다 이랍디다.

 그래서 생명이 오면 나쁜 거는 다 이거 자꾸 제거해 버리고 자꾸 성한 걸로  이렇게 소생시켜서 살려 나가는 것처심 모든 자기 자체나, 또 자기에게 속한  자나, 또 자기의 활동이나, 또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그 영광의 빛이나 그 모든  것이 점점, 생명이 오면 몸이 살아나면 모든 것 살아나면 이래 움직일 수 있고  좀 살아나면 또 주변을 또 이래 통치할 수 있고, 좀 또 힘이 나면 또 점점  무대가 활동 범위가 넓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가 생명과 멸망을 요 둘을  언제든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무관심하는 사람 없고 관심을 가지고 다 노력하기는 멸망은  피하고 생명을 취하려고 노력은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 내게는  현재에 멸망과 생명 두 길이 내 앞에 꼭 같이 있다. 같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생명길을 걸어가며 어떻게 하면 사망길을 걸어 가느냐?' 이것을 생각해 보지  안하고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마음, 꼭 독사 같고 시랑이 같고 잔인하기가 뭐,  또 욕심은 도야지 이상으로. 흉측한 자기에게 자기를 운전대를 맡기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생명을 사랑하고 멸망을 다 피하려고 하기는 하지마는 이것을 좀  폭넓게 '어떻게 하면 멸망으로 가며 어떻게 하면 생명으로 가느냐?' 하는 이것을  요만큼도 생각해 보지도 안하고,  '내가 이렇게 가면 오늘 당장 멸망이나 생명이냐? 오늘은 이렇다마는 오늘은  내일 원인이 되는데 내일 가면 이게 어찌 되겠느냐? 또 이리 가면 이것이  늙어서는 어찌 되겠느냐? 장래는 어찌 되겠느냐? 내 자손대는 어찌 되겠느냐?'  도무지 요것을 좀 범위 넓게 이렇게 생각지를 안하고, 그만,  생명은 좋아하고 멸망은 싫어하지마는 자기 닥치는 현실에서는 어 짜든지 자기  좋도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좋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인 줄 알고 그 길로만 향해서 달립니다. 그러다가 다 함정에  빠져 죽습니다.

 사람의 멸망과 생명이라는 것은 조물주 절대자 그분이 주권하고 딱 계시고  그분이 보시고 그분이 멸망과 생명을 주시고 또 멸망으로 가는 길과 생명으로  가는 길은 뚜렷이 하나님이 내놓고 이리 가면 멸망이라 이리 가면 생명이라 하는  것을 해 놨는데 제가 이걸 모르고 멸망길을 가면서 생명을 암만 노래 불러야  소용없고, 생명길로 가면 멸망을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지 안해도 오지  못합니다. 이렇게 절대적인 인생로가 정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는 타락한 이후부터는 악령과 성령,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악령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지음받은 천사장 루스벨이라 하는 자가 제가  하나님 되려고 날뛰다가 하나님에게 쫓겨나 가지고서 악령이 된 것입니다.

 악령의 숫자도 뭐 억억억억만이나 그런 걸 가지고 숫자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에게 천사의 수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 거기에 천사가  속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한 천사가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의 천사가 하나님에게 호소하느니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또 그 한 사람에게 천사만 붙어 있느냐? 악령이 또 붙어  있습니다.

 이 둘이 붙어 가지고서 있는데,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 현실에서 악령의 인도를  받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든지 두 인도 중에 하나지 인도 안 받고 제  단독 독행한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독행은 못 합니다. 독행을 할 수  얹도록 지을 때부터 그렇게 지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뭘 말한 것이냐? 다시 중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딱 걸음  걸어버렸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영원히 변동 못 합니다. 후퇴도 못 하고 다시  재차도 없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딱 문 열고 들어가면 그것으로서 뒤에 문은 탁 닫겨 버리기  때문에 인생이 쇠털같이 많은 세월이라 하지마는 네게는 너에게 두 번 닥치는  세월은 하나도 없다. 모든 세월은 너에게 한 번 밖에는 안 닥친다.

 그러기에 네가 지금 오늘이라는 요 시간은, 요 시간은 다시 두 번 못 만난다.

요 시간은 요 시간으로서 끝나버린다. 이 시간에 잘못됐으면 잘못됐지 이 시간에  잘못된 것을 '고쳐 새로 한번 더 살아봤으면 좋겠다' 못한다. 그 이튿날 그 일을  해도 또 그것은 그 이튿날 일이지 전날 하는 그 일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요 문으로 말한 것은 다시 재생, 두 번 살 수 없다. 재행할 수 없다. 두 번  걸을 수 없다. 한 번 걸으면 그것은 영원히 끝나버렸습니다. 영원히 끝나고 한번  그건 걸은 그것은 잘 걸었든지 못 걸었든지 영원의 원인으로 결정돼 버렸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이 멸망으로 결정돼  버렸고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대속했기 때문에 영원 멸망으로 결정된  것이나 멸망은 예수님이 대신 받았기 때문에 결정된 그 멸망은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멸망은 안 받지마는 그 시간에 멸망의 길을 걸을 수 있고 멸망  아닌 예수님이 대속해 주신 공로를 입혀 주신 그 공로를 입은 길로 걸을 수가  있는데 예수님의 공로를 입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 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영원한 보상이 그에게 영광이 따르지마는 자기가 넓은 길로  걸어가서 멸망으로 걸어갔으면 멸망은 예수님의 대속으로서 없 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사죄를 입고 칭의 입고 화친을 입고 현실을 통과했으면  영원한 상급이 있겠는데 그것은 삭감돼 없 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일생 동안 믿으면서 뭐 집사 노릇도, 장로 노릇도, 목사  노릇도, 권찰 노릇도, 반사 노릇도 이래 했는데 가 보면 실은 자기의 생애는 다  멸망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그 상급은 하나도 없으니까 벌거벗은  자로 구원 얻는다 했습니다.

 또 구원 얻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이 부끄럽고 뜨거워서 낯이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는 그 구원을 얻는다. '공로가 불타면 그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  구원 얻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믿는 자는, 택한 자들은 넓은 길로 걸어가면 벌은 없지마는 하늘에 상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영광이 없어져 버리고 좁은 길로 걸어가면 이미 벌은 예수님이  대속한 것이고 자기가 좁은 길로 걸어간 거기 대한 보상은 지극히 큰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죄는 값이 삼사 대까지 가고 의는 천 대까지 간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배수가 죄에 비해서 몇, 천 배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문은 한번 가면 뒤에  고치지 못합니다. 오늘 내가 이 시간 잘못한 것은 뒤에 후회를 하면서 아무리  잘해 봐도 오늘 잘못한 이것이 뒤에 잘할 수 있는 거름은 되고, 밑받침은 되고,  도움은 될지라도 오늘 잘못된 이것을 고쳐져 가지고 새로와지는 건 아닙니다.

잘못된 그거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기가 전감을 삼아 가지고 배나 앞으로 옳은 길을 걸어가는 데에  도움은 될지언정 잘못된 것을 그것은 다시 재독해서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고로 문이라는 건 그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좁고 넓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 도하는  문인데 좁은 문은 아주 문이 좁고 협착하다. 좁다 말은 아주 들어가기가 힘든다  말이고 협착이라 말은 더 용납할 곳이 없는 그런 틈낼 그 틈이 없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아주 생명문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길이 평탄해서 그리 찾아가는 사람은 많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좁은 문은 어떤 것이 좁은 문인가? 좁은 문은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자기, 다 문은 현실인데 현실을 가리켜 말한 건데 자기 현실에 자기 닥쳐진 오늘  이 현실이라는 현실에 좁은 문은 어떤 게 좁은 문 이냐? 거기에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인도의 그 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시는 그 명령 그것이 자기가 걸어갈 자기 길,  그것이 자기 진리.

 그러면 그 길은 무슨 길이냐? 그 길은 죄가 없는 길이라. 범죄하지 아니하는  길, 그 길이 범죄하지 안하는 길이기 때문에 범죄하지 안할라 하니까 그 길이  좁습니다. 범죄하지 안하는 길. 또 그 길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의의 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분에게 피동되는, 그분의  지도받은, 그분이 나에게 명령하는 그 명령, 그러니까 그것이 의입니다. 의의  길,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이 길, 이것이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이 문을 찾으려고 하면 첫째는 자기가 모든 허영, 허욕, 잡된 마음,  자기에게 모든 다 거짓된 것, 이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자기 모든 뭐 주관, 욕심이나, 또 자기의 형편이나, 사정이나, 모든  처지나 그런 것을 다 가지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이리 갈라  하면 아무것도 짐을 지고 못 갑니다. 못 가고 톨톨 다 벗어놓고 진실 하나를  가지고 가야 됩니다. 진실.

 자, 내야 현재 내가 이 현실에서, 요 현실에서 생명길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거는 좁고 협착하다 했는데 내가 현실에서 생명문,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죄를 벗지 않는 길, 예수님의 칭의를 입은 길, 죄를 범하지 안하고 죄를  용납하지 안하는 길, 죄를 용납지 안하는 길, 내가 죄를 범하지 안하는 길,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하나님의 인도대로 인도를 따라가는 길,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이 길을 내가 찾아가야 되겠는데  이 길을 찾아가는 데는 내게 내 개적의 이런 조건 저런 조건, 이런 욕심 저런  욕심, 이런 감정 저런 감정, 내게 이런 모든 욕망 저런 욕망 그런 것을 가지고는  그게 다 없어져도 어쨌건 이 시간에 이 현실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  만나는, 하나님과 가까와지는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아야 되겠다 하는  요것이 제일 처음에 진실로 무장합니다. 진실로 무장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못 믿고 죽는 날까지 믿어도 저는 참 헛탕합니다.

행여나 그러다가 진실한 사람이 될까 해서 그런 것이지 진실이 아니면 이 길은  못 갑니다.

 진실로 무장을 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기에게 양심을 씁니다. '자, 이라면  내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에 이라면 옳으냐 저라면 옳으냐?' 내가 성경 상식을  가지고 '이래야 옳겠나 저래야 옳겠나?' 하는 그것을 제가 생각해서, 어짜든지  '내가 지금 형편 사정이 이러니까' 그 사정을 가지고 자기 양심을 쓸라 하면 못  씁니다. 안 됩니다. 사정이야 어쨌든지 처지야 어찌됐든지 형편이야 어찌됐든지  내 뭐 현재야 어찌됐든지 과거야 어찌됐든지, 과거가 좋았든지 나빴든지, 현재가  뭐 불리하든지 어짜든지, 어쩌든지 내가 지금 이 현재에서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제일 바른 길을 걸어가겠느냐 하는 그게 양심입니다.

 양심을 써서 진실로 무장하고 그다음에는 양심의 등불을 들고 이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성경 말씀 이 성경 말씀을 길로 삼아 가지고서 이 성경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지는 좁은 길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나가면 좁은 길은 언제 좁은 길이 되느냐? 그리 가면  자기에게 믿음이 되는 길 있습니다. 이제 그때는 성령의 감동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옳다 참되다' 자기에게 그 길이 발견되고 '요 길은 옳고 참되니까  내가 요대로 가야 되겠다.'  옳고 참된 걸 네가 참말로 발견했느냐? 발견했으면 '평가적으로 그 길이 제일  낫다. 비판적으로 제일 낫다. 요 길이라야 완전무결하고 든든하다. 다른 길은 다  위험하고 위험하다. 요 길만이 평탄하다.' 그것이 자기에게 확고히 잡혀집니다.

 잡혀지면 자기가 눈 감고 다집니다. '주여, 내가 요 현실에서 요 길  걸어가겠습니다. 요래 하겠습니다. 요래 작정했습니다. 요래 하겠습니다' 하고  만일 눈을 뜨든지 어떤 사람만 만나버리면 마귀가 접해 가지고서 그만 그 길  잊어버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이 좁은 길로 가는 이것은 아주 찾기가 어렵다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진실이 이끄는 길, 양심이 이끄는 길, 성경 진리가 이끄는 길, 그러면  성신의 감화 감동이 옳다 하여 영접하는 그것이 이제 좁은 길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불택자는 못 걸어도 중생된 사람은 다 걸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걸을 때에 크나 작으나 평강이 있고 성공이 있지 이 길 걷지 안하는 자는  그는 하나님 버리고 둥둥거릴 때에 기쁘지 정말 하나님 만나면 걱정됩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 죽을 때에 뻘뻘 떨고 죽을 때에 걱정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연고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는 뭐 돈 보니 안심되고, 권세 보니 안심되고, 저 사람  보니 안심되고, 배경 보니 안심되고, 뭐 자기의 젊음 보니 안심 되고, 건강 보니  안심되고, 별별 그래 가지고 위로를 품고 있지마는 그것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죽는 그 시간에 죽음이 와도 자기에게는 평안하고 즐거울 수 있는  그것이 성신의 감동을 받은 생명길로 인도하는 생명문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평소에 자기가 진실과 양심을 가지고서 생각하면 그것을 알 수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길을 생각지 아니하고 헛된 걸로 가지고서 안심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지금 안심했는데 죽을 때 안심이 안 되는 것, 지금 평안한데 예를  들어서 과거 6·25 전쟁과 같은 그런 원수의 그 박해가 올 때에 없어지는 안심,  없어지는 평강, 없어지는 기쁨, 그것은 다 잡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쨌든지 죽기 전에 이런 잡된 것을 다 태워서 이것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참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보배로운 완전한 믿음, 정금 같은  믿음, 그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야 네가 불로, 연단한 금을 사 가지고 부요하게  해라' 불로 연단한 금이라 말은 이 세상 용광로, 이 세상 모든 청강수, 이 세상  어떤 무엇이 와도 주님과 너와의 연결을 끊을 수 없는 그 연결 가지고 네가  부요해라, 그것 말합니다. 그 연결 가지고 네가 부요해라. 뭐 그것 외에 딴거는  다 잡탱이기 때문에 다 타지고 맙니다.

 이러니까 이 좁은 길은 찾기 힘들지마는 찾고 난 다음에는 아무도 버리지  안한다. 이 길을 정말로 발견해 찾고 난 다음에는 버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문을  찾는 것으로 끝나버려 찾는 것으로 끝나고 걷는 거는 저절로 걸어져.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부 정신 문제요 이 심령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 넓다 그말은, 생명으로 인도 하는 문은  하나뿐인데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습니다. 그것은 악령이 인도하는 문인데  인간 자기 생각,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지식, 모든 인간들이 말하는,  인간들이 비판하고 평가하고, 인간들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인간들이 통계  맞주고, 인간들의 모든 여론, 인간들의 모든 지식, 진리를 따라가서 영감을 만난  그 한 길이 있고 그 길 외에는 전부가 인본의 길이요 인지의 길이요, 인간의  만물보다 거짓된 뭐 형형색색의 그 모든 소생의 길인데 그 길은 넓다. 넓으니까  찾는 사람도 많고 가는 사람도 많다. 또 길이 평탄해서 가기가 좋다  요렇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요 길은 가려면 이 길은 무슨 길이냐? 요 길은  사죄를 입고 가는 길입니다. 사죄를 입고 가는 길, 칭의를 입고 가는 길, 화친을  입고 가는 길, 그러기에 요 길은 좁고 아주 협착해서 가기가 힘든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기에 그 초두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는 것이 우리에게 대한 명령입니다. 그다음에 넓은 문 좁은 문 해석은 해  놨는데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좁은 문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가 닥친 현실을 만났을 때에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 하나, 자기가 걸어갈 자기 진리 하나, 자기에게 대한 명령 그 하나, 그 한  길이 있고 그 한 길 외에 자기 생각대로, 친구 생각대로, 가족 생각대로,  여론대로, 세상의 공론대로, 모든 세상대로 하는 그것은 천길 만길 넘습니다.

많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현실에는 한 길 외에 수백 수천 길이 있다. 그러나 한 길 외에는  전부 사망의 길이다. 한 길 외에는 다 사망의 길이다 그 길은 마귀가 인도하는  길이다. 그건 너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너에게 네 현실에서 한 길인 한 길을 잡아라. 한길 외에 다른 길은 다 그것은  마귀가 인도하는 길이요 사망으로 향하여 가는 길이다.

 이러니까 우리 앞에는 한 길과 수많은 길이 있는데 한길 외에는 다 마귀가  인도하는 길이요 그 길은 가기가 쉽지마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처세술을 쓰지 맙시다. 처세술을 쓰지  마십시오. 장사하는 사람들도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 장사 에서 처세술  쓰지 마십시오. 또 인간 통계를 쓰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인간 통계도, 인간  처세술도, 또 모든 여론들도 다 참작은 하지마는 다 넓은 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앞에 좁은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그 한 걸음  들어감으로 그 한 현실을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 생명을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만나고 하나님의 보호를 만났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만나니까 하나님이 돕는데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아가고, 이렇게 걸어본 사람은 자꾸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고 믿음을 떠난 사람은 이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합니다. 인본으로 한  사람은 점점 인본으로 하게 되고 신본으로 하는 사람은 점점 신본으로 걸어가게  됩니다.

 탐정군이 여리고 성에 갔을 때에 탐정군을 숨겨 달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이구, 만일 숨겨 주면 우리 죽습니다. 안 됩니다.' 다 거부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가니까 숨겨 줬습니다.

 숨겨 주니까 그 뒤에 이제 탐정군 온 걸 알고서 잡으러 왔는데 '여기에  탐정군이 없느냐?' '없습니다.' '보자.' 그 숨겨 달라 하는 그 자리에 가서  문을, 턱 열어보니까 없거든, '아따, 봐라. 만일 거기 숨겨 줬으면 우리 가족은  다 전멸될 것 아니겠느냐?' 이 집 저 집 다니며 다 그 문 여니까 안 숨겨 준  사람들은 '숨겨 줬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 우리 다 몰사할 뻔했다.' 이랬는데,  기생 라합은 이층에다 숨겨 줬는데 그들이 와 가지고서 '저리 딴데로 갔다 여기  없다' 이러니까 그냥 갔거든. '하, 이제 이다음에 오면 안심하고 숨겨 줘야  되겠다.' 기생 라합이 탐정군을 숨겨 준 라합은 하나님에게 순종을 해서 점점  하나님편에서 일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반대한 사람들은 점점 반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체험이오. 믿어보면 알지. 믿어본 사람은 점점 믿지마는 안  믿어본 사람은 못 믿어  그게 쉬운 줄 압니까? 자기가 자기 뭐 높은 자리고 낮은 자리고 그 자리에서 딱  그 현실, 여기는 좁은 문 넓은 문이 있다. 넓은 문은 사망으로 인도하고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한다  생명으로 인도한다 말은 첫째는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 모든 은혜를 이제 자기가  연결해서 차지하는 받는 길인데 하나님 내가 차지하고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내가 차지하는 이것이 좁은 길이고 이 넓은 길은 아무리 평탄하고 좋지마는  하나님과 하나님 은총을 다 배반하고서 가는 그 길인데,  자기 현실에서 두 길이 있으니 '두 길이 있다' 생각을 가지는 사람은 깬  사람이요 이것도 없이 '내가 현실 닥치니까 요래 빠져나갈까 조래 빠져나갈까?  요래 승리할까 조래 승리할까?' 그것은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욕심 그놈이  주관하는 것, 마귀가 주관하는 것이요. 자기가 주관 안 하면 어떤 인간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 아니오. 이러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하고 원수되는 것이요 하나님 배반하는 것이오.

 이러니까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은 다 문인데 내 현실에는 좁은 문  넓은 문 요 두 문으로 되어 있으니 나는 현실에서 어느 문으로 들어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갈라 하니 그 찾기도 힘듭니다. 찾으려면 자기가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되지, 양심을 가져야 되지, 그다음에는 성경 말씀으로, 내게 시키는 이  세력이 크지마는 그 세력은 하나님이 만든 것 중에 뿌스러기 중에 하나고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은 창조주 자존주 주권자 이분이시니 이분을 보고 이것과 이 모든  대조를 이와 같이 해 가지고 넓은 문 이러니까 아무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들어갈라 하니까 그 길로 가는 길은 가다가 '야 너무 좁으니까 요리 좀 빽  틀어라. 네가 한 달 동안만 기도하지 말아라.' 그리 빽 틀면 평 안합니다.

다니엘이 그 길로 그리 틀지 안하고 한 달 동안 기도 안 한다는 것 않으려  하니까 고통이 온다 말이오. 죄짓지 않는 길,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길,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그 길이 심히 좁고 협착하고 힘들지마는 하나님 만난다는  요 사실을 자기가 확고하게 알면 그 길 갑니다.

 그러면 그 길 가는 것이 좁은 길 가는 것이 넓은 길 버린 것이요, 그 길 가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차지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총에 배반되는, 반대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죄악의 것을 다 떨어버리는  것이오. 이러니까 거기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좁은 문 넓은 문에서 하나님이나 어떤 세상에 무엇이냐, 마귀냐? 하나님이냐  마귀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은총이나 이 세상 것이냐? 이것이 결정되는  것이라.

 결정을 해 놓고 제가 뭐 뒤에 딴걸 기다릴 게 뭐 있어? 제가 작정해서 넓은  길로 나갔는데 그때 가 놓고서 하나님 앞에 이렇고 저렇고 기도해야  소용없으니까, 저는 기도하려면 '주여, 내가 그 길 걸어갔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앞으로 내가 그 길 걷지 안하고 지금 현재 당면한 이것은 좁은 문으로  가겠습니다.' 이걸 해야 되지 그 길로 가고 사해 달라 하지만 사해 주기는 사해  주지마는 그것 가지고서 하나님의 축복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를 해야  되지.

 이러니까 너무 우리가, 사람이 진실되지 안하고 거짓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아주 쉽게 저버립니다.

 이번에 양성원이 뭐 삼십일날 개학한다 하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그때 가서  경건회를 저를 인도하라 했는데 내가 가서 무슨 말씀을 할까? 할 때에 내게  오기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람의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 이 모두 하나님을  업신여긴다.'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능력을 가진 말씀이요 자존자  그분의 명령인데 이것은 쉽게 여기고 아주 시쁘게 여기고 인간들 대가리서 짜내  가지고서 요렇게 조렇게 막 복잡하게 해 놓은 모든 인간의 지식, 팔만대장이  있으면 어쩔 것입니까? 인간들의 모든 머리에서 나온 철학이나 과학 이런 것이  많이 있으면 어쩔 것입니까?  이런 것은 크게 여기고 중하게 여겨서 그 책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뭐 몇만 원  몇십만 원 주고 사지마는 신구약 성경은 아주 떨어져서 뭐 막 책장도 다  없어지고 하는 그런 것만 들고 돌아다닙니다. 망해야 될 것 아니겠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여기는 것과 피조물 어떤 것을 크게 여기고 그 말을 크게  여기는 것과 이걸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뭣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에 두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피조물과,  하나님 말씀과 모든 피조물들의 말과 이 비중을 달아서 보다 네가 어느 걸  취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 결정짓습니다.

 뭐 그때에 다 일생 동안 제가 제 잘난 대로 살고 다 이래 하지마는 심판 앞에  가서는 꼼짝 못 하고 행동록에 기록한 대로 다 심판받아야 됩니다. 행동록에  기록한 대로. 그때는 심촌받을 때는 세상에서 굵닥 굵닥한 대가들이 다 절단나서  깨어질 것이오. 노아 홍수 때에 네피림이히 다 물 속에 매장되지 안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그저 결정입니다. 자기 현실이라는 현실은 문이다. 자기 현실이라는 현실은  문이다. 그 현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든지 넓은 문으로 들어가든지 네가 네  자유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네가 차지하게  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멸망을 차지하게 된다.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것은  마귀가 인도하고 좁은 문으로 인도 하는 것은 성령이 인도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은 그 길은 예수님의 구속의, 예수님의 구속,  예수님의 대속 속을 뚫고 가는 거다. 휘장 속에 갈라진, 휘장 속에 열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런고로 찾기도 힘들고 아주 걷기도 힘들지마는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걷기만 걷고 난 다음에 후회한 사람 없습니다. 걸어본 사람은 자꾸 걷지마는  걸어보지 안한 사람은 못 걷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뭐 내 세상이 깨지든지 내 몸뚱이가 깨지든지  내 직장이 깨지든지 뭣이 깨지든지 어짜든지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좁은 문을 택해서 걸어가고, 모든 문제는 그러면 다 모든 문제는? '모든 염려를  다 내게 맡겨버리라' 말했습니다.

 그 모든 문제는 '이러다가 당장에 내가 어찌 되겠노? 당장에 직장 문제, 지위  문제, 모든 사업 문제 다 어찌 되겠느냐?' 그 모든 것은 내게 맡겨버리라. 내게  맡겨버리라. 내가 모든 걸 주권하고 있다. 그 인간들의 마음을 내가 주권하고  심리를 주권하고 있고 활동을 주권하고 있다. 공간계를 내가 다 주권하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너를 죽이려고 칼 들고 오는 자가 요만치 들어도 공간계를  주권하기 때문에 '중단' 하면 요래 가지고 요만치도 못한다. 팔을 오그리지도  못한다. 뻗히지도 못하고.

 공간계, 심리계, 활동계, 생사계, 모든 것을 주님이 주권하고 계시는 이걸 믿는  게 주님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이 믿는 이게 쉬운 줄 압니까? 믿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주와 영계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깁니다. 맡길 만한 자격이 있고  맡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이 말하는 건 엿새 동안에 만든 것들이 그대로 유지되고  우글거리고 있는 것인데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 아닙니다. 피조물이, 조물주와  연결된 재연결되는 여기서 가치가 영원한 가치가 생겨지지 거기 끊어진 그것은  '자랑하지 마라, 가치로 여기지 말라.' 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작정합시다. '내가 과거에 오늘까지에 살면저 현실 현실을 만났을 때에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생각하고 살았느냐?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생각지도 못하고  살았느냐? 내가 좁은 문으로 내가 걸어갈라 할 때 얼마나 힘들었느냐? 넓은  문으로 갈 때 얼마나 쉽고 가기가 쉽더냐?' 이것을 자기가 좀 생각해 봅시다.

 좁은 문으로 걸어가 본 사람은 '아멘, 이 좁은 문이면 모든 것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 있다. 이 좁은 문으로 걸어가면 세상을 지배할 수가  있다. 우주와 영계는 내것 될 수 있다. 하나님에게 통치받을 수 있다.' 자신이  있습니다. 그 가치를 압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가치 압니다.

 (초신자를 위한 기도)  감사합니다. 사망 속에 못된 악령에게 사로잡혀 한없는 어두움으로 몰려가고  있는 이 형제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불러서 주님의 백성을 삼았사옵고 주님의  권속을 삼아서 이제부터는 주의 것이 되어 주의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성령님으로 감화 감동시켜 주님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시며 주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금생과 내생의 인간 멸망에서 구출 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평강을 얻어 영과 육이 아울러 온갖 주의 축복을 받게 하신 이 은총을 깨닫고  주님 앞에 진실되이 살아 영과 육이 아울러 잘 되며 세상과 내세에 모든 것이 잘  되어 주님 앞에 영광이 되도록 은총을 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저들이 하나님은 먼데 있지 안하고 저희 아버지 된 것을 깨달아  크나 작으나 모든 일을 의논하고 또 묻고 구하여서 모든 것에 주의 축복 속에서  사는 저희들이 되도록 감화시켜 주시고 깨닫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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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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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80807주새 선지자 2015.10.27
62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3주새 선지자 2015.10.27
6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3주새 선지자 2015.10.27
60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1금야 선지자 2015.10.27
5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0905월새 선지자 2015.10.27
58 넓은 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61015수새 선지자 2015.10.27
57 넓은 문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30528토새 선지자 2015.10.27
» 넓은 문,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30529주전 선지자 2015.10.27
55 네 가지 교훈/ 누가복음 9장 22절-26절/ 851221토새 선지자 2015.10.27
54 네 가지 생활/ 요한계시록 3장 14절-16절/ 810830주후 선지자 2015.10.27
53 네 가지 생활/ 요한계시록 3장 14절-22절/ 810830주전 선지자 2015.10.27
52 네 가지 생활/ 요한계시록 3장 14절-16절/ 810831월새 선지자 2015.10.27
51 네 가지 순서 연습/ 신명기 28장 47절-48절/ 850124목새 선지자 2015.10.27
50 네 가지 싸움/ 야고보서 4장 1절-10절/ 810713월새 선지자 2015.10.27
49 네 가지 지식/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801029수야 선지자 2015.10.27
48 네 가지 축복/ 요한1서 2장 25절-29절/ 860621토새 선지자 2015.10.27
47 네 가지 큰 구원/ 히브리서 2장 1절-4절/ 880925주전 선지자 2015.10.27
46 네 가지 큰 구원의 가치를 평가/ 히브리서 2장 3절-4절/ 880925주후 선지자 2015.10.27
45 네 가지를 구하라/ 신명기 28장 1절-6절/ 860620금야 선지자 201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