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순서 연습


선지자선교회 1985년 1월 24일 새벽

 

본문 : 신명기 28장 47절-48절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은 너를 멸할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은혜를 주시는 은혜를  깨달아서 감사한 줄을 모르고 망령을 부리면 하나님께서 그 반대로 모든 것을  다 거두시고 우리에게 정반대의, 풍부의 반대 가난을 주시고 평안의 반대의  고통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존대를 받는 반대의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찾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제일 첫째로 할 순서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 할  일이 있는데 우리로서 할 일은 우리 건설구원에 말입니다. 우리 건설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어떤 걸 해야 되는고 하니 감사함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본 명령이 있고 건설 명령이 있는데, 건설 명령이 명령은  언제든지 기본 명령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기가 어떤 현실을 당하든지 주님이  내게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모든 일을 해 주신 것을 다 종합해서 감사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감사함이 있으면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대해서 내가  댓가를 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내게 더 확고해지고 견고해지지마는 감사함이  없으면 그만 그 은혜가 흔들려서 요동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이것도 우리가 그렇게 우리 속에 기존되어  있는 그 순서는 그러하지마는서도 우리가 활동하는 그 역사적 작용에서는 뭐  힘이 있어야 하지 힘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관계된  그 관계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감사에서부터 발족합니다. 감사, 자꾸 감사를  찾아서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속하신 것을, 또 어떤 소망이 있는 것을. 어떻게  함께 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때 우리에게는 힘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이 감사함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불만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고 낙망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제 공포가 나오고 자꾸 이래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없으면 그만 불만 불평 원망 낙망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차차 조롱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모든 불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게 모든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가 올  것을 말씀했습니다.

 고 밑에 63절에 보면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다가 안 되면 미워하십니다. 언제든지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서 효력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자꾸 사랑하십니다. 뭐 끝없는 사랑을 가지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랑을 받지 안하고 패역 할 때에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미워해서, 사랑 하셔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열심하심과 같이 우리가 듣지  안 할 때에는 미워서 멸하시기를 당신이 아주 열심히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것은 참고로 삼고, 하나 가지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한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다, 이 지극히 크신 분이  나와, 나를 찾아오셔서 나와 대면하시고 또 서로 대화하고 또 동거 동행하는 이  일은 꼭 고 현재 현장 현실에서만 하나님이 요렇게 정하셨습니다. 시간도  장소도 사건도 고 현재의 것에서만 하나님이 우리와 직접 대면해 주시지 고  시간 고 장소 고 사건을 떠나서는 아무리 해 봤자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지  않습니다. 또 그 외의 것은 우리에게 동행하신다 해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현재 나와의 관계에서 그분의 효력을 내가 받아야지 현재를 지내고 난 다음에  뭐 다른 때야 암만 해 봤자 현재적인, 현실적이 아닌 그런 은혜는 우리에게는  효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주님이 언제든지 중생된 자에게는  현재라는 시간에는 나를 찾아와서 계신다. 또 내가 당한 요 현장에 주님이 나를  찾아와서 계신다. 또 요 현실을, 내가 이런, 이런 실상이든지 저런 실상이든지  무엇이든지 현재 그것을 당면할 고때에 고것에게 대해서 주님이 찾아와서  계신다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기억 할 뿐만 아니라 연습해야 됩니다.

여게서, 당신을 당신으로 대우하는 것도 여게서만 대우가 되고, 당신을  당신으로 높이는 것도 여게서 만 되고 또 당신을 내가' 환영하는 것도 여게서만  되고, 당신을 버리는 것도 배척하는 것도 멸시하는 것도 여게서만 됩니다. 요  시간이 제일 중요하고 요 장소가 제일 중요하고 자기가 당면한 고 건(件) 이  중요합니다. 고 시간은 버려 놓고 다른 시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무슨 대우하는 것도 대우할 고 현장과 고  현재 고때는 대우하지 안하고서 고때는 멸시하고,  그러면, 주님을 멸시할 때는 어데 갔습니까? 어데 가고 주님을 멸시합니까?  주님을 멸시할 때는 그 사람이 어디 갔겠습니까? 간데가 있습니다. 주님을  멸시할 때는, 멸시할 때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심령이 좋아서 간데가  있습니다. 주님을 멸시하고 이랄 때는 그 사람의 심령이 좋아서 찾아간 데가  있다. 그거요. (○○○씨, 졸면 되는가.)좋아서 찾아간 데가 있어요. 찾아간  데는 어떤 데인가? 자기가 음녀를 찾아갔든지 간부를 찾아갔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딴데 가지는 안했습니다. 요거는. 우리가 이 세상일에는 무슨  아무것이를 만날라고 하다가 그 사람 만나지 못하는 것은 뭐 이런 거 저런 거  그런 거 때문에 뭐 그 사람 만날, 걸 잊여 버리는 수 있지요.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주님을 고 현재에 현장에서 현실에서 주님을 환영하지 안하고 어데  갔는가? 또 주님을 배척하고 어데 갔는가? 주님을 멸시하고 어데 갔는가?  주님을 사랑치 아니하고 어데 갔는가? 고것을 성경에 똘똘 뭉쳐서 둘로만  말했습니다. 둘로. 음녀를 탐해서 음녀한테 갔든지, 그렇지 않으면 간부를  탐해서 간부한테 갔든지 고 두 군데 가는 것으로 고렇게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째 갔든지, 어째 뭐, 다른 데 무엇 때문에 어째 갔든지 고것을  성경은 간부한테 갔다 음녀한테 갔다 요렇게 두 가지로만 말했습니다.

 고것은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거게는 본남편이라 이렇게 말씀했고,  음녀에게 갈 때에는 아버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랬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제일 섭섭해하는 것은 고것이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가 주시는 그 모든 기업을  다 팔아먹을 탕자와 같이 고렇게 창기에게 가서 가정을 망칠라고 하는 고것을  하나님이 제일 분히 여기시고 섭섭히 여기시고. 또 하나님의 그 신부로서는,  하나님의 신부로서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간부를 찾아서 간 고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시기심과 분노심이 굉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데, 본남편이신 주님이 이렇게 모든 것을, 참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장가오셨고, 또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든 더러운 거 다 당신 이 다  책임지셨고, 좋은 거는 우리에게 줬고 나쁜 것은 다 당신이 책임졌습니다.

당신의 전능을 가지고 나에게 장가왔고 나는 아주 무지한 것 가지고 당신에게  시집간 자입니다. 당신은 모든 성결, 의를 가지고 의를 가지고 장가왔는데 나는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참 영원 멸망받을 죄를 가지고 결혼한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언제 오셨는고 하니요 현재 현장  현실에 오셨는데 고때는 주님을 버리고, 고때는 주님을 버리고 간부 하고 지금,  간부를 사귀어서 간부하고 재미있게 속삭거려 놓고 만나러 갔을 때에는 고  간부와 속삭거리고, 고 현재라는 고 현실은 간부와 속삭거리고 고 현재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뭐 와 가지고서 아주 주님을 사랑하는 체로 '내가  주님에게 내가 이렇게 대우하겠습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이렇게 앞으로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결심과 각오도  하고, 또 '내가 아무 때 이걸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뭐이 되겠는가? 어떻겠습니까? 좀 한번 고걸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고 남편이 자기에게 찾아가니까 그때는 물론 오냐고 반가이  인사하고 영접할 줄 알았는데, 이라니까 아주 냉정스럽게 모르는 척 하고서  배척을 합니다. 문을 열어라 하니까 뭐 하러 왔냐고서 배척을 하고, 이렇게  아주 참 배척을 했을 때에 얼마나 섭섭함을 가졌는데, 섭섭함을 가졌으니까,  섭섭함을 가진 고것도 좋은데 섭섭한 게 떡 지나가고, 섭섭함을 가졌는데 고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까, 고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까 와 가지고서 '아이구 내가  문 열어 드리지 안한 것 잘못됐습니다. 미안합니다.' 뭐 아양을 떨면서 아양을  떨면서 '앞으로는 내가 그렇게 안하겠습니다.' 어째 하면서 아주 친근히 하고  친절히 하고 이래 합니다. 하면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분하겠습니까 그것이  대우가 되겠습니까? 자, 여기 남반에 대우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고거 분하겠다 싶은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녜, 같지요.

분하지요. 꼭 요와 같습니다.

 주님은 '내가 오늘날 네게' 오늘날이라 하는 고거는 현실을 말한 것인데, 고  시간으로 말하면 이 현시, 장소로 말하면 현장, 또 무슨 사건으로 말하면 현실  거기에 주님이 오셨는데, 고럴 때에는 주님을 영접지 안하고 주님을 대우하지  안하고 주님을 사랑치 안하고 고때는 엉뚱한 일하고 고게 지나가고 나니까  지나가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뭐 이러니 저러니 아양을 부리고 간교를 부립니다.

그것은, 사람이 정상적인 남편으로서 실력있는 남편이라면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에 그 아양부리고 하는 그것을 보기 곱겠오 더 분하겠오?  뭐 거석한 사람은 아주 다른 일은 몰라도. 요새는 사람들이 좀 달라서 '안되면  치워 버리지' 하는 사람은 그래도, 한 지금으로부터 한 오륙십 년전 오륙십년  전만 해도 일반인들은 그럴 때에는 일반인은 다 없애 버립니다. 아주 그걸  초월해서. 초월해서, 초윌한 사람들은 그만 버리면 되고, '버리면 새로 취하면  되지' 이랬지마는, 그러기에, 야만인들이, 야만인들의 살인이 많은데,  야만인들의 살인은 대개, 그 살인이 남녀 이성 관계의 살인한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거게서. 고걸 우리가 잘 생각해 봐서,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요 네게 지금 요구하고 네게 부탁하고 네게 말하는  것이 있다 하는데 고때에 고것이 주님을 환영하고 배척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있고 당신 명령을 행하고 안 하는 거기에서 고게 내나 당신을 친히  사랑하고 배척 하고 미워하고 환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게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요 현실이라는 고 현실을 떠나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 '내가 과거에  내가 주님을 사랑치 못했습니다.' 뭐 눈물을 쭐쭐쭐 흘리면서 울고 또 '내가  앞으로는 사랑하겠습니다.' 하는 고런 소리는 빼마디귀 맞을 짓이라 말이오. 안  그렇습니까? 빼마디귀 맞을 짓이라. 고때 주님이 찾아오시니까 고때는 배척해  놓고, 고때는 왜 배척했느냐? 간부가 좋아서 배척했고. 음녀가 좋아서 배척해  놓고 그만 거게 정신이 빠져 가지고 주님을 생각지 못했어. 그때는 주님이 눈에  안보여 가지고. 그렇게 안 보이기까지 주님 안 보이는 것이 계명 안 보이는  것인데 계명 안 보이기까지 그렇게 해 놓고 고 시간 지나가고 난 다음에 뭐  사랑하는 체로 오만 소리 할 때에는 그 사랑을 받겠오? 두 말 할 것 없이 뺨을  올릴 거라 말이오. '가라' 하면서 살인해서, 살인죄를 정하는 나라에서는  살인을 못 할 것이고 살인죄 정하지 않는 나라 같으면 없애 버릴 거라 말이오.

죽여 없애 버릴 거라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요 현재라는 고 현재, 현장이라는 현장, 고  현실이라는 현실 거게서 주님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척하고 환영하고 높이고  멸시하고 두려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꼭 그 시간에서만 된다 그말이오. 요것을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일을 자꾸 연습을 해야되는데,

 기독교의 건설구원은 다 필연성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설구원을 이룰 수 있는, 성화구원을 이룰 수 있는, 행위구원을 이 룰 수 있는  이 구원은 주님이 연구하시고 연구하셔 가지고서 요거 하면 고 다음에 고것은  필연적으로 되고 고다음에 필연적으로 되구로 요렇게 고 순서를 아주 쉽게 제일  쉬운 거, 제일 쉬운 거 시작하면 고다음에는, 제일 쉬운 거 하고 나면은 고다음  것은 또 필연적으로 되고 고다음 것은 필연적으로 돼서 자꾸 필연적으로 돼  나가도록 요 순서를 조직해 놓은 것이 주님이 우리의 건설구원 행위구원,  성화구원으로 방편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쉽게. 필연적으로,  필연성으로 되도록, 필연성이라 말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고 저절로 되는  것을 가리켜서 필연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저절로 되는 거. 그러면, 하나만  시작해 놓으면 저절로 저절로 구원이 되도록 고렇게 쉽고 아주 편리한 고런  방편을 전지의 지혜로 연구하셔 가지고서 우리에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건설구원은 어려워서 사람들이 건설구원을 이루지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다 너무 쉬워서 멸시해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지 어려워서 이루지  못하는 것 아닙니다. 쉬운 것을 멸시해서 이루지 안하고 지내보내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제가 생명 떼 놔도 안 됩니다. 생명을 떼 놔도 안 돼. 발람이 그때야  뭐 제가 어데 먹을 거 입을 것이 없었습니까? 그러면 그때도 선지로. 선지자로  대우를 받고 이래 있으니까 안 간다 하면 그만이라. 안 간다 하면 그만인데 떡  가 놓고 난 다음에는 생명 내 놨 어. 발람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데 생명을  내놨지마는 결국 어긴 죄값으로 저는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죽고 말았어.

 그런고로, 우리가 높은 태산을 올라갈 때에 여게 우리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곳이 어딘고 하니 제천이 제일 높은데, 해발, 해발에서 제일 높은 곳이  제천인데, 제천에도 올라가는 길을 기차도 올라갈 수 있도록 그렇게 평탄한  길입니다. 평탄한 길, 빙빙 돌아서 이래 올라가는데, 그 굴 이름이 뭐이라요?  예? ○집사 아는 것 같은데, 뭐이라? 아, 따바리 굴이지 따바리 굴, 따바리.

옛날 따바리라고 뱅뱅 틀어 가지고 요래 만드는 거 있지 않아요? 따바리.

따바리 굴이라. 뱅뱅 요래 틀어 올라가는데 차도 올라갈 수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거기 올라가는 거 뭐 힘드는 게 아니야. 그저 보통 평지를 걸어가는  것처럼 걸어가는데 남한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 그것이  따바리 굴입니다. 그래 올라가면 돼져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건설구원이나 기본구원이나 건설구원이나 요 성화구원  행위구원. 건설구원 행위구원 성화구원 요 구원은 전부 다 필연 성으로  되어지도록 요렇게 쉽게 만들어 놨다 그거요.

 그런데, 그렇게 올라가는 그것을, 자, 고렇게 순서로 한 자욱씩 올라가면  쉬운데 그것을 만일 그래 올라가지 안하고 열 자욱 올라갈 것만 띄워 가지고  한번 올라갈라 해 보십시오. 열 발자욱 걸어서 올라갈 그 거리를 제가 한  발자욱에 뛰어 올라갈라고 하면은 아무라도 못 올라갑니다.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못 올라갑니다. 제가 열 발자욱 뛰어 올라갈 그것을 한 발자욱에  뛰어서 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뭐, 뭐라 하더라? 학교 다닐 때 뭐라고 해? 뭐  넓이뛰기라 하나? 예? 뭐라 하노? 예? 아니 넓이뛰기 있제? 넓이뛰기를  가지고서 아무리 연습을 해서도 그 거리를 뛰지 못합니다. 높이뛰기도 못  올라가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은 전부 쉬운데 믿지 않기 때문에 안  됩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나아만 대장이 그렇게 쉬운 치료를 말씀했으나 믿지  않는 데서 그게 안 된 것이지 어려워 안 된 것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은 전부 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언제든지 현재에 오시는데 요것을 연습해서 우리가 갖추어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산주의가 내게 와 가지고 독침으로 찌를 그때도  고때에 '지금 내가 너 독침으로 꺼른다' 할 고때가 어느 때입니까? 고게  언제입니까? 고것이 어느 때요? 내일이요. 과거요? 현재. 고때가 내게 제일  요긴한 때입니다. 독침으로 찌를 그때에, 독침으로 찌른다 찌른다 할 고때에  전능자가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면은. 전능자의 보호가 언제 필요하나? 전능자의  보호가 고때 필요합니다. 전능자의 보호는 현재에만 필요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가 못 하는 일을 해 주셨으면' 할 때에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당면할 고때에 당신이 해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당신의  보호도 현재에 내게 필요하고, 당시이 나를 이루어 주시는 그 소망도 현재에  필요합니다. 소망도 현재에 필요하고 보호도 현재에 필요하고 또 당신을  영접함도 현재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내 현재, 현장, 현실에 내게 찾아오신 요 주님을  우리가 영접하는데에 고 영접하는 방편이 있어서 제일 첫 순서가 감사입니다.

감사. 그러면, 현재에 감사를 하면, 현재에 주님께서 내게 '어떻게 하셨다 하는  그 사실을 새김질 하는 감사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대속을, 피와 살을  말한 것은 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시고, 거기서부터 쭉 계속해서 내려오셔  가지고서 나를 대속, 대형 대행 대화친 하셔 가지고서 고것을 마지막에  결말적으로 완성한 마지막의 결론 결말이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피와 살을 말하는 것은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말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 대속하심 이 내게는 양식이라. 그 대속하심을  내가 먹고 산다. 대속하심을 먹음으로 힘이 나온다. 대속하심을 먹음으로  자란다. 그러면 주님이 내게 대속하신 그 사실을 자기가 뭐 먹는다는 것은.

언제 ○○○목사님이 말하던가? 그 피가 얼마나 돼서, 빠짝 마른 몸에 피가 몇  방울이나 됐겠노? 예수님의. 몸이 빠짝 말랐다 하는 그 말 아주 참 재미있는  말했습니다. 아마 보지는 안했지마는서도 뭐 돼지 모양으로 살찌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아마 빠짝 말랐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리의 구속할라고 고민하고  이렇게 하시니까 말랐지 살이 찔 리가, 살찔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피 내  봤자 얼마 되겠습니까? 그거는 우리가, 마음의 양식이오. 마음으로 생각으로,  느낌으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피와 살이 양식이라 그 말은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공로를 우리가 먹고 살고 공로를 먹은 그 영양으로 우리가  튼튼해지고 그 영양으로 우리가 장성해 가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하라 말은 주님이 자존하신 데서부터 자기의 지식에  따라서 '참, 완전하신 분이 자존하셨으니 참 감사하다.' 마귀 같은 그 못 쓸  것이 자존해 가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게 됐다면은 전체는 다 비참  아닙니까? 이런데 자존하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 분이 또 완전하신 분이  목적을 정하신 데 대해서 감사하고, 그런데 그 목적 속에 나를 그 안에서  창조하심을 생각할때 감사하고. 쭉 내려오면서 이래 가지고 자꾸 연결해서 쭉  연결을 이렇게 해서, 주님이 모든 걸 보존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래 가지고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서 내가 창조될  때에 당신의 공로를 내게 입혀 가지고서 나를 창조하신, 이래 가지고 중생돼  가지고 또 오늘까지 당신이 성령으로 나에게 이 대속의 공로를 확실히 확신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이 대속이 우리의 전부 중에 전부인데 그 공로를 우리에게  직접 연결시키기 위해서 연결 공사 자로 성경을 보내셨고 연결 공사의 모든  도구로 진리를 보내셨고 진리는 연결의 그 모든 장비요 또 성령은 진리의  연결의 시공자 모든 기술자시요, 이런데. 이래 보내 가지고서 얼마든지 성경만  척 나벼 보면은 알 수가 있고 영감 받으면 알 수 있도록 요렇게 된 그 모든  구원의 그 유래를 자기가 생각함으로 그 결말에 일어나는 것이 뭐이냐?  감사입니다. 감사. 그러기 때문에 감자를, 우리가 현재에 당면하는 데에 감사를  우리가 우리 건설 명령을 지키는 데 말입니다. 건설 명령을 지키는 데에 우리가  제일 처음에 효력 있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이 감사가 효력이 있다 그말이오,  감사가. 자꾸 이 감사는 자꾸 생각하면 나옵니다.

 이렇게 감사를 가지고 난 다음에 둘째는 뭐이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 당신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 주신다. 그러면, 해  주시는 것은 소망의 주님이 되겠고 나를 어떤 환난의 어려움에서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은 안보의 주님이 되시겠고 또 당신이 내게 나쁜 것이 있으면은  나쁜 게 있으면, 섭섭함이 있으면 분개히 여기시고 진노하시는 또 진노하심이,  진노하심이 있겠고. 그러면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도 있고, 또 진노의 주님도  있고, 내 모든 내게 부족한 것을 해 주실 대행해서 해 주실 소망의 주님도  계시고,  이런데, 제일 일호에는 주님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감사의 주님. '아.

주님은 감사의 주님이다.'  이랬는데, 고라고 난 다음에는 어떤 주님을 지기가 영접해야 되겠습니까?  고다음에는 어떤 주님이, 고다음에 몇이 있어요?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몇이  있다고 했어요? 고다음에 몇이 있다 했어요? 고다음에 몇을 내가 말했지요? 예?  이렇게 말해도, 귀가 어두워 그래 귀. '들을 귀는 있을지어다' 하는 요 귀를,  자꾸 들을 귀 있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돼요. 그래야 되지 들을 귀 없으면 안  돼요. 자, 손가락 한번 가리켜 보이소. 뭐이든지 들었으니까 가리켜야지. 말해  봐야지.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 우리 ○○○부장. 손가락 한번 들어 봐.

와 그라면 안 들어? 옳게 들긴 들었는데. 자, 이래 드이소, 이래 이래. 다 이래  들어 봐요, 이래 들어 셋. 셋 아닙니까? 내 손가락 셋 안 들었오, 이래? 그래.

 거게는, 어데서라도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이다. 뭐 독침 앞에서도 어디든지  주님은 나를 보호하실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시고 얼마든지 보호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보호의 주님이시다. 또 내게 모자라는 거 모든 거 다 당신이 다  해 주실 수 있는 소망의 주님이시다. 또 내게 무슨 나쁜 것이 있으면 진노의  주님 이시다. 그러니까 내게 참 보호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요, 또 나에게 모든  부족한 걸 다 해 주실 수 있는 그 소망의 주님이시요, 또 내게 나쁜 것이  있으면 당장 처벌 해 버리시는 이런 진노의 주님이시요, 이런데,  그러면, 우리가 행위구원을 이룰라고 할 때에 주님이 현재, 현장, 현실에서만  날 찾아오시는데 찾아오시는 그 주님을 내가 어떤 주님으로 내가 영접해서 그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이 사실을 자꾸 연습해 가지고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시도록 이렇게 하는데, 주님을 영접해서 나와 같이 계시는 데에 그 네  가지가 있는데 제일 일호는 뭐입니까? 감사. 네 가지가 있는데, 네 가지가  있는데 일호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환난에서도 자기가, 아마 바울이 그것 가지고 한 것 같아요. 바울이  넓은 바다 속에 빠져 가지고서 일주야(一晝夜) 동안이나 두부렁 두부렁 떠돌아  다녔는데, 목욕해 가지고, 혜엄을 쳐 가지고서. 수영을 해 가지고 떠돌아다닌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해, 가만히 생각해 볼 때에 그게 생각이 나요. '바울이  어째서 사흘 동안이나 바다에 빠져 가지고서 이렇게 두부렁 두부렁 떠돌아  다녔을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시험하실라고 그라는데 그때에 바울은  '하나님은 이 물위에 여게서도 날 얼마든지 안보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안보를 믿는. 안보를, 그러니까 안 빠져 들어갈라고 하는 그것만 아니라  '주님은 날 안보하실 수 있다. 안보를 믿습니다.' 믿는 그 믿음이, 그 믿음이  요동치 안하고 믿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시험해서 믿음이 떨어지면 그만  슬그머니 가라앉고 가라앉으니까 '주님이안보할 걸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서 믿으니까, 믿으니까 두부렁 떠올라 오고, 또 안 믿으니까, 믿음이 좀  믿음이 흐려지니까 슬그머니 빠져 들어 가고, 또 믿으니까 믿으니까 또 두부렁  떠오르고 이 연습을 며칠 동안 하다가서 '믿습니다!'하고 그만 꽝 믿어  버리니까 바다 위에서 휙 뛰어나 오지 안했느냐 그런 것을 제가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이랬는데, 주님이 내게 현재에 필요한데, 현재에 필요한 데에는, 자, 내게 참  감사의 대상이요, 또 나를 구원해 주실 소망의 대상이요, 날 또 보호해 주실  보호의 대상이요. 나에게 대해서 진노해서 날 벌할 대상이요. 이러니까, 주님은  이 네 면에 대한 우리 주님이신데, 일호는 뭐이라 했습니까? 일호는 감사의  주님, 그러면 또 이호는 뭐이 될까요? 한번 생각해 보시이소. 이호는, 이호는  뭐이 될까요? 자기네들이 해 보니까 어찌 돼? 이호는 뭐이 됐어요? 이호.

보호요, 소망이요, 두려움이오? 이호는 뭐입디까? 이호는 뭐이요? 예? 안보. 자  안보인 사람 손들어 봐 안보. 안보가 되는 사람 손 들어 봐. 또. 자기를 모든  걸 다 해주는 소망의 주님이 되는 것이 이호가 되는 것에 손 들어 봐요. 또  두려움이 또 이호가 되는 분 손 들어 봐요. 하나도 없네. 이거요. 두려움이오,  두려움. 이거 가져야 돼요. 이거 가져야 돼요. 감사하는 거게서부터 버르장이가  없어요. 사랑은 두려움과 사랑이 겸해야 되지 두려움 없는 사랑은 그것은 아주  방탕 방종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당신과 나와 연결이 이 현실에 당신이 나와 같이 계시는 이  연결이 제일 일호로 중요한 것이 감사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주님 이런  주님 이렇게 해 주시는 이렇게 해 주시는 이렇게 해 주시는, 해 주신 그 주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에 자기는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난 다음에. 잘못하면 감사하고 난 다음에 자기는 이렇게 감사 하니까  소망 가질 거 같고 안보 가질 거 같은데 거게는 방종해지고, 당신들이  여러분들이 직접으로 해 보면 힘이 안 나요. 헛일이오. 감사하고 난 다음에는  고다음에 이호를 두려움을 가지지 안하면은 모든 나머지기는 다 죽어 버립니다.

감사도 죽어 버려요. 감사도 죽어 버리고 그만, 두려움 빼 버리면은 이 세  가지가 다 죽어 버려요. 세 가지가 다 죽고. 이제 감사를, 감사가 아니면  연결이 안 되고, 감사로 연결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하신  주님이시니, 이렇게 이렇게 크신 분이 이렇게 어렵게 이렇게 어렵게 힘들여  나에게 이렇게 큰 구속을 주신 주님이시니 내가 그분에게 대해서 이 구속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면 그분이 어찌 되겠느냐' 거게 대해서 두려워 떠는 그  두려운, 두려움을 가지고 여게서 이래 되면은, 우리가 조그만한 것도 공들여  가지고 안 되면은 분하고 뭐 얼마 자본 들여 가지고서 그게 안 되면 마음이  섭섭하고 참 잠이 안 오는데 이렇게 크신 분이 이렇게 힘들여 가지고 해 놨는데  내가 거게서 방종하고 멸시하면 그분이 얼마나 노여워하시며 얼마나 분하시며  얼마나 진노하실 것인가 요것이 자기에게 생각해져야,  감사하면은 반드시 두려움이 고 감사함을 간직하는 데에, 감사함에 대해서,  그분에게 대해서 감사하니까, 그분이 내게 대해서 한 것을 감사하니까 내가  그분에게 대해서 이거 조심있지 안하면 안 되겠다 그분에게 대해서 참 멸시라  하는 거는 어림도 없고 배척이라 하는 것도 어림도 없고, 그분에게 대해서 내가  이거 두려움이, 어떻게 하면 이거 잘못해서 실수할까 그분이 섭섭해할까 하는  요 두려움이 필연성으로 고 두려움이 우리에게 와야 됩니다.

 두려움이 와서 두려우신. 주님으로 영접하고 나면은 고다음에 삼호는 안보의  영접이 옵니다. 안보의 주님. 안보의 주님, 주님이 자기의 필연성으로  안보입니다. 고다음에는 소망의 주님이 우리에게 대면해 주십니다. 이러니까 다  필연성이오.

 제일 처음에 감사의 주님을 자기가, 감사의 주님을 자기가 깨달아서 '아  주님은 이렇게 나에게 감사하신 주님이다.' 감사하신 주님이 자기 현재에  자기와 함께 계시는 요 사실을 감사함을 자꾸 생각하면은, 주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함께 계시니, 계시니까, 이 감사함을 생각하고  나니까 '아, 이분에게 대해 내가 잘못할라 이분에게 섭섭하게 할라' 그분이,  그분이 감사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동시에 두렵고 조심이 되어지고 참 그분에게  대해서는 뭐 털끝만치라도 실수할까 애낄까 자꾸만 조심에 긴장이 와지는  이것이 돼 집니다. 그라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뭐 안보라 하는 것은, 안보라  하는 것은 생각 안 해도 됩니다. 생각 안해도 그만 그 둘만 되면은 그 다음에  안보도 필연적이요, 그 다음에 암만 뉘가, 뭐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서  '하나님이 널 안보해 주긴 뭘 안보해 줘? 널 안보해 줄 줄 아느냐? 이 독침  속에서도 안보해 주겠느냐? 네가 불 속에서도 안보해 주겠느냐? 사자  구덩이에서도 안보해 주겠느냐?' 그 위에 감사가 고대로 제대로 돼 버리고  당신을 두려워하고 나면은 고다음에는 안보라 하는 것은 아무리 미혹이 와도  '왜 주님 안보해 주지 안해?' 안보해 주신다는 게 믿어집니다. 안보해 주는 게  믿어져요. 그거 다 필연적이요. 믿어지요.

 감사하면은 고다음에 필연적으로 그분을 경외함이 옵니다.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경외함이 오게 되고, 그분에게 뭘 잘못 할라. 이 세상에 모두, 요새는  모두 방종해서 비유도 안 돼요. 요새는 비유도 안돼. 옛날은 결혼 이 되고  나면은 결혼하고 난 다음에 아내라는 사람은 그 남편에게 뭐 말 한 마디라도  실수할까 행동 하나라도 실수할까, 이래서 아가서에 보면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창틈으로, 창틈으로 나를 보고 계신다. 보고 계신다.' 방안에 딱 앉아  가지고서 이래 창문에 바늘로 구멍을 똑 뚫고 요래 딱 내다보면은 보입니까? 안  보이지만 보고 있 단 말이오. 그렇게 조심되는 것이 그것이 성도입니다.

사람들도 그래요. 그만 요새 사람들은 다 뭐 뻔뻔해서, 옛날은, 옛날은 결혼할  때에 보고 결혼 안 합니다. 면접하고 결혼 한 일이 없어요. 또 옛날이니까 서로  안면은 빤빤하이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하니까 다른 때는 못 보고, 나도 그래  봤어요. 봤는데, 문 열고 보면 사람 보면 뭐 본다 해서 다른 사람 웃고, 뭐  그때는 서로 봐도 웃소. 같이 만일 손을 잡았다가는 큰일납니다. 부끄러워서.

수치스러워서 이래 놓으니까 문구멍 바늘로 요래 딱 뚫으면 구멍이 나온다  말이오. 고래가지고 요래 봐. '조 행동이 어떤고 보자' 요 행동을 살핀다  말이오. 고거 내가, 거게 대해서 아가서를 볼 때에 딱 고게 내게 오는 것은  내가 고거 딱 경험이 있고 체험이 있기 때문에 딱 안다 그 말이오. 그래 가지고  고 진리를 딱 내놨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니까 고 해석 해 놓은 데 고 해석을 해  놓지를 못했어요. 고랬는데 문구멍 바늘로 똑 뚫어 놓고서 요래 가만히 보면은  그 행동하는 것이 내가 없으니까 안 보이니까 행동이 방종하게 하면 그때 모두  속의 진상을 다 본다 그 말이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이렇게 자기가 연상하면은  '감사합니다. 이도 보니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하다 보니까 주님하고 나하고  들어붙어 버렸어. 주님하고 나하고 들어붙었어. 현재 주님이 나를 떠나고  가시지 안하시고. 나를 떠나 계시지를 안하고 나를 놓고 딴 데 가시지를 못하고  당신이 나를 붙드시고 나와 지금 같이 계신다 말이오. 계시는데 그라다 보니까  당신을. 은혜의 유래를 생각해서 감사하는 내가 되고 보니까 필연적으로 창틈  구멍으로 나를 엿보고 계신다 하는 고게 된다 말이오. 필연적으로 당신이  나에게 어떠하신 일을 한 것을 이렇게 내가 다 생각하고 깨닫고 보니까  당신에게 잘못 보일까 싶어서 당신에게 홈 이 드러날까 싶어서 조심을 해요.

 이러니까, 연애 결혼은 망한다 그 말입니다. 연애 결혼은 망한다. 연애하면은,  엉망진창이 말이오, 엉망진창이 면접할 때는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싶어서  있는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서 이래 떡 잘 보일라고 이래 꾸미고 이라니까  이등신 총각은 등신 처녀는 '아이구' 고때는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비상시기 때문에 비상 준비를 해 가지고 비상 행위를 하는 고걸 모르고서  평소에 그런 자인 줄 알고 '하 훌륭한데' 이래 봤기 때문에 그만 계산이 틀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연애 결혼은 안 되는 것이오. 이러니까. 그거 왜  그러겠습니까? 비상적인 준비하고 비상 적으로 조심해서 비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그게 잘못 보이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말이오. 그분에게 결혼해 가지고, 거기 소망을 가지고. 여생의 소망이 거기  있으니까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이분을,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이 내게 베푸신 모든 것을 생각하고 보니까  그분에게 대해서 내가 그분의 비위를 상하든지 그분을 섭섭하게 하든지, 그분을  대우를 조금 잘못 할까 그분에게 혹 흠점이 보여질까, 이러니까 자연히  필연적으로 경외가 나옵니다. 필연적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가 나오는 게  아니라 경애가 나온다 말이오. 경애. 경애라 하는 것도 뭐 안 나오요. 경외가  나오요. 두려움이 나오고, 두려움이 나오고 난 다음에 자꾸 그분의 은혜를  감사와, 감사와 두려움이 둘이 합하고 나니까 이제는 그 다음에는 경애가  나오지.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뭣 나옵니까? 필연적으로 뭣 나오요? 안보.

그분이 날 보호할 터이니까 문제가 없어, 공연히, 문제도 없이 자기 마음에.

필연적으로 자기 마음에 당신이 나를 안보해 주실 터이니까 문제가 없다  말이오. 모두 우리 사람들도 다 그렇습니다. 결혼도 다 그래요. 결혼도 다  그래서 그 남편에게 대해서 감사함이 될 대로 되고 남편에게 대해 두려워하고  조심이 될 대로 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그분이 날 안보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믿어집니다. 필연적으로 믿어져. 이 안보라 하는 거는 믿어져야  돼요. 이 안보라 하는 그때부터는 믿어져야 돼요. 믿어지는 거. 그 위에 둘은,  감사와 두려움은 제가 만들어야 되고 알겠습니까? 감사와 두려움은 만들어야  되고 그 다음에 안보는 필연적으로 자기에게 믿어져야 돼요, 믿어져야. 그라고  난 다음에 소망도 의례히 주시지. 소망도 의례히 믿어진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처음에 믿는데, 믿을 때에 그 교역자가 와  가지고서 어려운 일이 있으니까 '이럴 때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 라니까 그  사람이 웃어. 기도하라는 소리를 듣고서 대답은 예 하면서 속으로 웃어.

'주님이 내게 필요한 걸 다 알고 계실 터인데 내가 뭐 달라 말라 뭐 달라  하시기전에 다 당신이 알고 주시기를 원하고 원하는데, 그분이 전지자인데 내가  뭘 달라고 뭐 하고 있어?' 달라 소리가 좀 쑥스럽다 그말이오. 그렇게 믿는다  그말이오.

 소망도 필연적으로 돼집니다. 그러나 자기가 두려움을 쏙 빼 버립니다.

감사함을 뺐습니다. 감사하고 난 다음에 그 사이에 두려움을 빼 버리고, 두려움  조심을 빼버리고 난 다음에 '그분이 날 보호한다' 암만 해도 믿어지지 않는 걸  어짭니까, 믿어지지 않는 것을? 그러니까 다 같이 같은 경우에 만났는데 주남선  목사님은 당신의 그 안보가 믿어지니까 코를 드르렁 드르렁, 십 분도 안 돼서  자는데 두 사람은, 같이 간 두 사람은 새파랗게 벌써, 벌써 사형받기 전에  반죽음 했다 말이오. 벌써 피부도 죽었고 정신도 죽었고 마음도 다 죽어  버렸어. 이라면서 '주님이 보호하시니까. 주님이 우리가 같이 계시니까,  보호하시니까' 믿어져야 할 말이지? 안 믿어진다 말이오.

 안 믿어지는 고장 어디서 나왔습니까? 안 믿어지는 고장은 당신에게 대해서  조심할 일을 조심하지 안한 거게서 나왔다 그말이오. 조심이, 조심이 없는 것은  당신의 그 은혜의 유래를 자기가 모두 다 묵상하고 명상하는 가운데에서 감사가  제대로 되지 안했다 그말이오. 감사가 제대로 된 온전한 감사는 온전한 경외를  드러내고, 경외를 내고 온전한 감사와 경외는 필연의 안보를 생산하고, 안보.

경외와, 감사와 경외와 안보를 자기가 완전히 갖추어 가진 자는 당신이 좋은 거  해 주실 것이다 하는 소망이라 하는 것은 그거 뭐 기도할 것도 없어. 소망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기도도, 기도하라 하니까 '기도는 무슨 기도를 해,  당신이 알고 다 잘해주실 건데?' 믿어진다 말이오. 잘해 주시니까 기도할 것도  없다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필연적이더라 그말이오. 다 신앙 경험 체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에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이것을 자꾸 연습하십시오.

연습해서 독침 앞에서 언제든지 안보의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것이, 내  현재에 같이 계시는 것이 자기에게 믿어져야 되고, 또 자기에게 소망의 주님이  같이 계시는 것이 믿어져야 되고, 그런데에는 경외에 주님이 자기와 같이  계시는 것이 믿어져야 되고, 감사와 주님이 자기와 같이 계시는 것이 믿어지는  요 네 가지 순서로 이제 연습을 합시다. 그러면, 현재에 자기가 주님을 모실  때에 현재에 주님이 내게 찾아오신, 찾아오신 그 주님을 어떤 주님으로 내게  찾아와 가지고서, 내게 찾아와 가지고 나와 같이 계신다. 어떤 주님으로 내게  찾아와서 지금 요 현재에 주님이 어떤 주님으로 나를 대면하고 계신다. 내게  찾아와 계신다. 요 현재에 찾아오신 주님을 몇 가지 주님으로, 자기에게 찾아와  가지고 계신 것을 몇 가지 주님으로 찾아와 계시는 것을 자기가 믿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이거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네 가지,  네 가지로, 네 가지. 요 순서를 잊지 마십시오.

 요 순서는 자기가 실행해 보는 체험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지 성경에서는  찾아 가지고 절대 모릅니다. 절대 모르요. 요거는 영감으로만 알게 돼. 자기  실행에서만 알게 됩니다. 요 네 가지 순서. 그래서 자꾸 연습해요. 이래 가지고  어디서든지. 바울이 바다 가운데 빠져 가지고, 어느 바다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바다 가운데에 빠질 때에 밤낮 사흘 물 속에 있었다고서 할때 그때도 믿음  싸움이오, 믿음싸움.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래 보고서 믿음이 떨어지니까 푹  내려가고 믿음이 올라가니까 쑥 올라가고 나중에 자꾸 믿는 믿음이 더  강해지니까 그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로써 물 가운데 빠진 걸 들어올리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하고 믿음이 그 모든 것을 능가할 때에 물 밖에 쑥  뛰어나왔다 말이오. 그것은 억지 해석이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 앞에 물위로  걸어갈 때에 믿음이 약해시니까 뿍 빠져 들어갔고 믿음 올라오니까 쑥 올라왔고  그렇지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모든 계약을 믿음으로만 받는데, 믿음으로만  받아 믿음으로만 받고 공으로 받습니다. 받는 방편은 믿음, 또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순전히 공짜배기로 받는 거 요것을 언제든지 기억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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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80605 남권찰회 선지자 2015.10.27
6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80807주새 선지자 2015.10.27
62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3주새 선지자 2015.10.27
6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3주새 선지자 2015.10.27
60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4절-16절/ 851011금야 선지자 2015.10.27
5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0905월새 선지자 2015.10.27
58 넓은 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61015수새 선지자 2015.10.27
57 넓은 문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30528토새 선지자 2015.10.27
56 넓은 문,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30529주전 선지자 2015.10.27
55 네 가지 교훈/ 누가복음 9장 22절-26절/ 851221토새 선지자 2015.10.27
54 네 가지 생활/ 요한계시록 3장 14절-16절/ 810830주후 선지자 2015.10.27
53 네 가지 생활/ 요한계시록 3장 14절-22절/ 810830주전 선지자 2015.10.27
52 네 가지 생활/ 요한계시록 3장 14절-16절/ 810831월새 선지자 2015.10.27
» 네 가지 순서 연습/ 신명기 28장 47절-48절/ 850124목새 선지자 2015.10.27
50 네 가지 싸움/ 야고보서 4장 1절-10절/ 810713월새 선지자 2015.10.27
49 네 가지 지식/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801029수야 선지자 2015.10.27
48 네 가지 축복/ 요한1서 2장 25절-29절/ 860621토새 선지자 2015.10.27
47 네 가지 큰 구원/ 히브리서 2장 1절-4절/ 880925주전 선지자 2015.10.27
46 네 가지 큰 구원의 가치를 평가/ 히브리서 2장 3절-4절/ 880925주후 선지자 2015.10.27
45 네 가지를 구하라/ 신명기 28장 1절-6절/ 860620금야 선지자 2015.10.27